평신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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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신정 사건은 1966년 9월, 북한 어선 평신정 4-034호가 일본으로 귀순하려다 발생한 사건이다. 선상 반란으로 선장 등 7명이 살해되고, 일본에 입항하여 선원들이 체포되었다. 사건 이후, 북한과 대한민국, 일본 정부 간의 외교적 갈등이 빚어졌고, 특히 망명을 희망하는 선원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주모자 4명을 한국으로, 나머지 선원들과 선체는 소련으로 인도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북한 이탈 주민 문제와 한일 관계, 일본 내 정치적 갈등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드라마 방영 중단 사건으로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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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정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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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평신정 사건 |
발생 시기 | 1926년 |
관련 인물 | 평안북도 신의주 지방 유지들 일본인 관리 |
사건 유형 | 민족 차별 항의 사건 |
배경 | |
시대적 배경 | 일제강점기 |
사회적 배경 | 민족 차별 심화 |
전개 과정 | |
발단 | 신의주 일본인 관리의 민족 차별적 행위 |
항의 | 평안북도 신의주 지방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항의 운동 전개 |
결과 | 항의 운동 확산 및 일제 당국의 탄압 |
영향 | |
사회적 영향 | 민족 의식 고취 및 항일 운동 확산 |
역사적 의의 | 일제강점기 민족 차별에 대한 저항의 상징 |
2. 사건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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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7일 정오경, 북한 신의주수산사업소 소속 저인망 어선 "평신정 4-034호"(146톤)가 동료 어선과 함께 황해로 출어했다. 평신정 4-034호에는 수산고등학교 학생 4명, 어선 승무원 13명, 조선로동당 당원과 북한 정부 관계자 2명 등 20명이 타고 있었으며, 민병 조직이었기 때문에 무장하고 있었다.[1]
3. 사건의 전개
9월 13일 평신정호는 어장을 이동하던 중 동료 어선과 헤어졌다. 이 틈을 타 공산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던 부선장(당시 26세), 부기관장(31세), 갑판원 2명(29세와 21세)은 2개월 전부터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밀항할 계획을 세웠다. 9월 14일 오전 3시 40분경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밀항에 반대하는 선장, 기관장, 당과 정부 관계자 등 7명을 사살하고 시체를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 다른 9명을 선실에 감금하고 일본으로 항해했다. 도중에 대한민국 제주도 근해에서 한국 어선을 습격하여 일본 부근의 해도를 강탈했다.[1]
9월 17일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 다케자키 정(竹崎町)의 부두에 평신정 4-034호가 접안하였고, 선원들은 시모노세키 해상보안서에 자수했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이들이 밝힌 선상 반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평신정을 수색했다. 그 결과 선장실은 피투성이였으며 탄흔이 남아 있었다. 또한 소련제 자동소총 2정, 소총 2정, 경기관총 1정, 탄환 1000발 이상이 발견되었다.[1] 해상보안청은 선원들을 밀입국과 총도법 위반 혐의 등으로 체포했다.
망명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 주모자 중 한 명은 자신의 형제가 친일적이라는 이유로 북한 당국에 처형당했다고 주장했다. 부선장의 친족은 우연히 시모노세키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갑판원 중 한 명은 북한 국적이었지만, 베이징 출신의 중국인이었다.
3. 1. 밀항 계획 및 선상 반란
1966년(쇼와 41년) 9월 7일 정오경, 북한 신의주수산사업소 소속 저인망 어선 "평신정 4-034호"(146톤)가 동료 어선 "평신정 4-033호"와 함께 북한 근해의 황해로 출어했다. "평신정 4-034호"에는 수산고등학교 학생 4명, 어선 승무원 13명, 조선로동당 당원과 북한 정부 관계자 2명 등 20명이 승선해 있었다. 북한 어선은 민병 조직이므로 무장하고 있었다.[1]
9월 13일 평신정호는 어장을 이동하던 중 동료 어선과 헤어졌다. 이 기회를 틈타 이전부터 공산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던 부선장(당시 26세), 부기관장(동 31세), 갑판원 2명(동 29세와 21세)은 2개월 전부터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밀항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9월 14일 오전 3시 40분경 반란을 일으켜, 관리들이 가져온 화기로 밀항에 반대하는 선장, 기관장, 당과 정부 관계자 등 7명을 사살하고, 시체를 현장 해역에 유기했다. 그리고 다른 9명을 선실에 감금하고 일본으로 항해했다. 도중에 대한민국(한국) 제주도 근해에서 한국 어선을 습격하여, 일본 부근의 해도를 강탈했다.[1]
3. 2. 일본 입항 및 체포
9월 17일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 다케자키 정(竹崎町)의 부두에 평신정 4-034호가 접안하였고, 선원들은 시모노세키 해상보안서에 자수했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이들이 밝힌 선상 반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평신정을 수색했다. 그 결과 선장실은 피투성이였으며 탄흔이 남아 있었다. 또한 소련제 자동소총 2정, 소총 2정, 경기관총 1정, 탄환 1000발 이상이 발견되었다[1]. 해상보안청은 선원들을 밀입국과 총도법 위반 혐의 등으로 체포했다.
한편, 선원 4명이 망명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서, 주모자 중 한 명은 자신의 형제가 친일적이라는 이유로 북한 당국에 처형당했다고 주장했다. 부선장의 친족은 우연히 시모노세키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갑판원 중 한 명은 북한 국적이었지만, 베이징 출신의 중국인이었다.
4. 국제 문제화
평신정 사건은 공해상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는 선적이 있는 북한에 재판권이 있었다.[2] 그러나 일본은 북한을 미승인 국가로 간주했고,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는 한국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2] 따라서 일본 정부는 선원들의 신병 처리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했다.[2]
또한, 이 사건은 단순한 선상 반란을 넘어 살인과 해적 행위까지 동반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2]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와 일본사회당은 북한 당국의 주장대로 13명 전원을 북한으로 송환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2]
4. 1. 북한과 한국의 입장
북한 사회안전성은 즉시 선원과 선체의 인도를 요구하는 전보를 일본 정부에 보냈다.[1] 대한민국 정부도 승무원 13명의 자유 의지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며, 특히 주모자 4명의 신병을 인수하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1] 이는 주모자 4명이 공산주의에서 도망쳐 온 자(당시 한국에서는 북한 이탈 주민을 귀순 용사라고 불렀다)이며, 만약 북한으로 돌아가면 반란죄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1]국제법상 공해에서 발생한 평신정 사건의 반란은 "기국주의"에 의해 선적이 있는 북한에 재판권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북한을 미승인 국가로 간주했고,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는 한국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2] 따라서 일본 정부는 선원의 신병 처리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했다.[2] 또한 살인 사건을 일으킨 반란자일 뿐만 아니라 해적 행위까지 했다는 사실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2] 조선총련과 북한과 관계가 깊은 일본사회당은 북한 당국의 주장대로 13명 전원을 북한으로 송환하도록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2]
법무성은 주모자들이 미승인 국가 국민이며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유로 정치 망명을 인정하지 않고 강제 퇴거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느 국가로 강제 퇴거시킬지에 대해서는 정치적 판단이 필요했다. 9월 20일 4명은 한국으로의 망명을 희망했고, 한국 정부는 즉시 신병 인수를 위해 경비정을 파견했지만 해상보안청이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저지하여 되돌아갔다. 그 후 한국은 매일 신병 인수를 위해 선박을 파견했고, 그중에는 한국 해군의 구잠정까지 시모노세키항에 오기도 했다. 망명을 희망하지 않는 9명에 대해서는 사정 청취를 위해 상륙시켜 이송하려 하자, 재한 한국 거류민단에 둘러싸여 한국으로 갈 것을 설득당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주모자 4명은 살인 및 밀항에 대해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고, 나머지 9명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선체와 선원 반환에 대해서는 소련이 중재하겠다는 제안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외무성은 4명을 국외 퇴거시키되 한국으로의 이송을 인정하고 나머지 선원과 선체는 소련의 중재로 인도하기로 결정했다.
4. 2. 일본 정부의 딜레마
일본 정부는 선원의 신병 처리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해야만 했다. 국제법상으로는 "기국주의"에 의해 선적이 있는 북한에 재판권이 있지만, 일본으로서는 북한이 미승인 국가이며,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는 한국만을 승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살인 사건을 일으킨 반란자일 뿐만 아니라 해적 행위까지 했다는 사실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조선총련과 북한과 관계가 깊은 일본사회당이 북한 당국의 주장대로 13명 전원을 북한으로 송환하도록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4. 3. 조선총련과 일본 사회당의 개입
북한 사회안전성은 즉시 선원과 선체의 인도를 요구하는 전보를 일본 정부에 보냈다. 또한 한국 정부도 승무원 13명의 자유 의지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며, 주모자 4명의 신병을 인수하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 이는 주모자 4명이 공산주의에서 도망쳐 온 자(당시 한국에서는 북한 이탈 주민을 귀순 용사라고 불렀다)이며, 만약 북한으로 돌아가면 반란죄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평신정 사건의 반란은 공해상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는 "기국주의"에 의해 선적이 있는 북한에 재판권이 있었다.[1]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북한이 미승인 국가이며,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는 한국뿐이라고 판단했다.[1] 따라서 일본 정부는 선원의 신병 처리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했다.[1] 살인 사건뿐 아니라 해적 행위까지 일으켰다는 사실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1] 조선총련과 북한과 관계가 깊은 일본사회당은 북한 당국의 주장대로 13명 전원을 북한으로 송환하도록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1]
5. 사건의 해결 과정
평신정 사건의 해결 과정은 크게 주모자 4명의 한국 송환, 나머지 9명의 북한 송환, 평신정 선체의 소련 반환으로 나눌 수 있다.
9월 28일, 주모자 4명은 국외 퇴거 처분을 받고 대한항공 특별기로 부산을 거쳐 서울로 이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련과 민단의 대립이 있었다. 한국으로 간 4명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고, 이들의 범행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1]
10월 3일, 나머지 9명은 요코하마항에서 소련 여객선을 타고 나홋카로 가, 10월 15일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들은 조선총련의 환영을 받았다.[1]
시모노세키에 있던 평신정 선체는 10월 24일 이즈반도・이토 해역에서 소련 예인선에 인도되어 11월에 모항으로 돌아갔다.[1]
5. 1. 일본 정부의 결정
주모자 4명은 구류 기한이 만료되는 9월 28일 마이크로버스로 후쿠오카 공항까지 이송되어 국외 퇴거 처분을 받았다. 곧바로 4명은 대한항공 특별기에 태워져 부산을 경유해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이송 전까지 조선총련의 항의 활동과 민단의 환영 활동이 동시에 벌어져 한반도의 남북 대립이 일본에서 펼쳐졌다. 한국으로 망명한 4명은 한국에서 주거지가 알선되었고, 금전 제공 및 일자리 소개 등 대환영을 받았다. 또한 일련의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해되었다.[1]나머지 9명은 요코하마로 이송되어, 10월 3일 요코하마항에서 나홋카로 향하는 소련의 정기 화객선 바이칼 호로 출국했지만, 그곳에는 조선총련의 군중들이 배웅을 나왔다. 9명은 소련 경유로 신의주에 15일에 도착했다. 평신정의 선체는 시모노세키에서 예인되어 10월 24일에 이즈반도・이토 해역에서 소련의 예인선에 인도되었고, 11월에 모항으로 귀환했다고 한다.[1]
5. 2. 한국과 소련의 개입
9월 28일, 주모자 4명은 국외 퇴거 처분을 받고 대한항공 특별기로 부산을 경유해 서울로 이송되었다. 이송 전까지 조선총련의 항의 활동과 민단의 환영 활동이 동시에 벌어져, 한반도의 남북 대립이 일본에서 펼쳐졌다. 한국으로 망명한 4명은 한국에서 주거, 금전, 일자리 등을 제공받는 등 큰 환영을 받았으며, 이들의 살인 행위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해되었다.[1]나머지 9명은 10월 3일 요코하마항에서 나홋카로 가는 소련 정기 화객선 바이칼 호를 타고 출국했다. 이들은 소련을 경유하여 15일에 신의주에 도착했다. 조선총련 군중들이 이들을 배웅했다. 평신정 선체는 시모노세키에서 예인되어 10월 24일 이즈반도・이토 해역에서 소련 예인선에 인도되었고, 11월에 모항으로 귀환했다.[1]
5. 3. 이송 과정
9월 28일, 주모자 4명은 마이크로버스로 후쿠오카 공항까지 이송되어 국외 퇴거 처분을 받았다. 곧바로 이들은 대한항공 특별기로 부산을 거쳐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이송 전까지 조선총련의 항의 활동과 민단의 환영 활동이 동시에 벌어져, 한반도의 남북 대립이 일본에서 재현되었다.[1] 한국으로 망명한 4명은 주거지 알선, 금전 제공, 일자리 소개 등 한국에서 대환영을 받았다. 또한 이들의 살인 행위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해되었다.[1]나머지 9명은 요코하마로 이송되어, 10월 3일 요코하마항에서 나홋카로 가는 소련 정기 화객선 바이칼 호로 출국했다. 조선총련 군중들이 이들을 배웅했다.[1] 9명은 소련을 거쳐 15일에 신의주에 도착했다. 한편, 평신정 선체는 시모노세키에서 예인되어 10월 24일 이즈반도・이토 해역에서 소련 예인선에 인도되었고, 11월에 모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1]
6. 사건의 의미와 영향
이 사건은 당시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북한이 일본의 좌익 세력이나 조선총련이 주장하는 "낙원"이 아니라 공포 정치에 의해 사람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북한의 실상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 수십 년 후의 일이다.
또한, 평신정 사건은 일본 후지 TV 드라마 젊은이들의 방영 중단에도 영향을 미쳤다.[2]
6. 1.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이 사건은 당시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북한이 일본의 좌익 세력이나 조선총련이 주장하는 "낙원"이 아니라 공포 정치에 의해 사람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실 평신정 호의 승무원이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향한 것은 남한(한국)에 가면 살해당한다는 유언비어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실상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 수십 년 후의 일이다.6. 2.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
이 사건은 당시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북한이 일본의 좌익 세력이나 조선총련이 주장하는 "낙원"이 아니라 공포 정치에 의해 사람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2] 평신정 호의 승무원들이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향한 것은 남한(한국)에 가면 살해당한다는 유언비어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 수십 년 후의 일이다.6. 2. 1. 드라마 "젊은이들" 방영 중단 사건
평신정 사건은 일본 후지 TV 드라마 젊은이들의 방영 중단에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쳤다. 젊은이들은 부모 없는 가난한 5남매가 서로 욕하면서도 돕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인기 드라마였다.[2]1966년 9월 23일 방영 예정이었던 제33화 「안녕」은 재일 한국·조선인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로,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과 조선인의 민족적 자각을 다루었다. 그러나 후지 TV 상층부는 시사회 후 "(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미묘해지고 있다. 더 이상 자극을 주고 싶지 않다"며 방송 중지를 지시했고, 결국 9월 30일 제34화를 끝으로 프로그램 자체가 종영되었다.[2] 시청자들의 프로그램 재개 요청이 쇄도했지만, 재개되지 않았다. 후지 TV는 재방송만 진행했고, 이듬해 극장판이 제작되었다. 제33화는 2008년 출시된 DVD-BOX에 수록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押収銃器
https://www.jiji.com[...]
時事通信社
2022-02-20
[2]
문서
メディア総研『放送中止事件50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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