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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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시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프랑스에 수립된 정권으로, 1940년 프랑스 제3공화국이 붕괴된 후 필리프 페탱에게 전권이 위임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독일 점령 지역을 제외한 프랑스 본토 남부, 북아프리카 등의 식민지를 통치했다. 비시 정부는 자유 프랑스와 연합국으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반혁명적 이념과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쳤다.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독일로 압송되었고, 지크마링겐에 망명 정부를 세웠으나 이듬해 붕괴되었다. 전후 비시 정권에 협력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으며, 프랑스 정부는 비시 정부의 유대인 탄압 공범 사실을 인정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국회가 필리프 페탱에게 전권을 위임한 후, 모든 행정 문서에서 '프랑스 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프랑스어)이라는 명칭 대신 '프랑스국'(État Français프랑스어)이 사용되었다.[6] 이 프랑스국을 합법적인 정부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다른 프랑스의 국가들과 구분되는 특수성을 드러내기 위해 대체로 '프랑스국'이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비시 프랑스', '비시 정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6]
자유 프랑스와 전후 성립한 프랑스의 정부들은 비시 프랑스를 위헌적인 쿠데타로 성립한 불법 정부로 간주하며 그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6] 페탱은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총리로 임명되었고, 독일과의 휴전 조약을 체결하면서 월권을 하지 않았다.[6] 그러나 프랑스 국회가 해산되고 페탱이 그 전권을 위임받은 과정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6] 일부 역사학자들은 1940년 7월 10일에 있었던 국회에서 피에르 라발이 하원 의원들에게 가한 압력과 함께, 에두아르 달라디에 등 27명의 상하원 의원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보르도에서 알제로 향하는 여객선 마실리아(Massilia)로 도피한 것 등을 지적한다.[6]
비시 정권은 근대에 대한 반동적인 반혁명을 추구했다. 프랑스의 전통주의적 우익은 귀족과 로마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 전통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통적인 문화와 종교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배척하면서 권위주의를 받아들였다.[15][16] 비시 정권은 또한 자신을 단호한 민족주의자로 규정했다.[16] 비시 정권은 극도로 반공주의적이었고 대체로 친독일적이었다. 미국의 역사가 스탠리 G. 페인은 비시 정권이 "뚜렷하게 우익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결코 파시스트적이 아니었다"고 밝혔다.[18]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하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침공으로 프랑스는 패배했고, 폴 레노 총리를 대신하여 평화파가 정권을 잡았다. 1940년 6월 22일,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북부 지역 점령, 육군 제한 등이 결정되었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비시 프랑스는 대부분의 추축국과 중립국은 물론,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196] 전쟁 중 비시 프랑스는 추축국과 연합국 양측의 무력 침공에 대해 군사 행동을 벌였는데, 이는 무장 중립의 한 예였다. 가장 중요한 행동은 1942년 11월 27일 추축국의 점령을 막기 위한 툴롱 해군 함대 자침 사건이었다.
오랜 분쟁 지역이었던 알자스와 로렌은 독일에게 할양되었으나,[168] 그 외 지역에는 비시 정부의 주권이 일단 인정되었다. 파리를 포함한 북부와 서부는 독일, 그르노블과 니스를 포함한 이탈리아 국경으로부터 50km 지역은 이탈리아에 의해 점령되어 군정이 시행되었다(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진주 지역). 이 지역은 프랑스의 주권이 인정되었지만, 점령 지역으로 간주되어 군정이 시행되었고, 비시 정부의 통치권은 미치지 못했다. 또한, 프랑슈-콩테 등 알자스-로렌 인접 지역은 “보류 지역”(Zone fermée)으로 분류되어 점령 지역과는 별도로 취급되었다. 북해·영국 해협·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수 마일 지역과, 벨기에 국경 근처 현재의 오드프랑스 부근은 “금지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연안 지역에는 독일군과 토트 기관이 “대서양의 벽”이라 불리는 방어 시설을 설치했다. 벨기에 국경 부근은 벨기에 점령군의 통치하에 놓였다. 점령 지역의 점령 비용은 프랑스 측이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고, 하루 4억 프랑[169]이라는 막대한 지출이 되었다. 점령 비용 지불은 1941년 6월 독일과의 협력에 대한 대가로 3억 프랑으로 감액되었지만, 1942년 11월 프랑스 전역 점령 이후에는 5억 프랑이 되었다[170].
비시 정권 성립 초기,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와 프랑스령 카메룬을 제외한 프랑스 식민지는 비시 정권을 승인했다. 시리아나 레바논 등 비시 정권을 지지하는 식민지에는 연합군이 침공하는 경우도 있었다.[62] 전황의 변화에 따라 자유 프랑스에 가담하는 식민지나, 연합국과 독자적으로 협상하여 중립을 유지하려는 식민지도 나타났다. 마다가스카르나 프랑스령 안틸레스처럼 연합군이 당초 중립을 요구할 예정이었는데 자유 프랑스의 개입으로 현지 정부가 타도되는 경우도 있었다.
비시 정부는 명목상 공화국으로 칭해졌지만, 앙리 필리프 페탱의 권위를 기반으로 한 특수한 형태였다.[173] 이 체제는 신헌법 제정을 목표로 하는 명분을 취했지만, 비시 정부의 4년간 통치 기간 동안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회의는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다.[174] 모든 선거는 임명제로 대체되었고, 민주적인 절차는 전혀 없었다. 독일은 모든 측면에서 개입하여, 관보 발행에도 독일의 검열이 들어갔다.[146]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는 “노동, 가정, 조국”(Travail, Famille, Patrie(프랑스어))으로 대체되었다.
동원되었던 프랑스 병사들은 무장 해제되었고, 무기는 독일에 인계되었다.[175] 본국 육군은 휴전 감시군으로 10만 명으로 제한되었고,[146] 무기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감시를 받았다. 마다가스카르나 인도차이나 등의 식민지 군대는 이 제한에서 제외되었다. 1940년 8월 29일, 재향군인을 조직한 준군사 조직인 "재향군인 봉공회"가 만들어졌다. 이 조직에서 치안부대와 밀리스(민병대) 등이 생겨나 저항군과 전투를 벌였다.
국토 분할, 독일의 징발, 식민지와의 교류 단절로 파리 시민의 생활은 악화되었다. 1940년 9월부터 배급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급량도 감소했다.[177] 이 시기 프랑스 국민의 칼로리 섭취량은 서유럽에서 가장 낮았고, 인플레이션율도 다른 점령국보다 높아 생활은 곤궁했다.[178]
비시 정부의 프랑스 합법 정부 주장은 전후 자유 프랑스와 그 이후 모든 프랑스 정부에 의해 부인되었다.[6] 그들은 비시 정부가 반역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불법 정부였으며, 헌법 위반적인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주장했다. 1940년 6월 16일 필리프 페탱은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에 의해 헌법적으로 총리로 임명되었고, 독일과의 휴전 협정에 서명할 법적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독재 권한을 부여받으면서 국민의회의 해산을 요청한 결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역사학자들은 1940년 7월 10일 제3공화국 국민의회가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한 투표 상황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비시 정부가 프랑스 국가의 연속성을 구현할 권리에 반대하는 주요 주장은 제3공화국 전 총리인 피에르 라발이 비시 의원들에게 가한 압력과 '마실리아'(''Massilia'')호로 탈출하여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던 27명의 의원과 상원의원의 부재에 기초했다. 그러나 전쟁 중 비시 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10] 특히 미국[11]과 다른 여러 주요 연합국들이 그러했다.[12][13][14] 메르스엘케비르 공격 이후 1940년 7월 8일부터 영국과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2. 용어
비시 프랑스의 통치 영역은 1940년 6월 22일 휴전 조약에서 점령되지 않은 프랑스 본토의 남쪽 영역과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등 식민지와 해외 영토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독일인들에게 비점령 지역(Unbesetztes Gebietde)이라 불렸으며, 프랑스에서는 자유 지역((zone libre프랑스어)) 혹은 간단하게 남부 지역(zone du sud프랑스어)이라 불렸다.[7]
3. 합법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비시 프랑스는 미국[196] 등 연합국 열강들로부터 국제적 승인을 받고 있었다.[10][11][12][13][14] 다만, 영국과의 국교는 1940년 7월 8일 알제리 북서부의 메르스엘케비르에 정박해 있었던 프랑스 해군의 군함들이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은 이래 단절되었다.[196]
4. 이념
비시 정부는 프랑스 역사의 갈로-로마 시대와 상징적으로 자신을 연결시켜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시도했고, 갈리아 족장 베르징게토릭스를 프랑스 국가의 "창시자"로 칭송했다.[21]
페탱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프랑스 라디오를 통해 자주 연설했다. 그의 라디오 연설에서 페탱은 항상 인칭 대명사 je프랑스어 (프랑스어로 "나"라는 뜻)를 사용하여 자신을 프랑스를 위해 희생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 다른 프랑스인들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아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화자의 신과 같은 어조를 취했다.[22]
비시 정권 하에서 잔 다르크가 마리안느를 대체하여 프랑스의 국가 상징이 되었는데, 그녀는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애국자로서의 잔의 이미지는 비시 정권의 전통주의적 메시지와 잘 어울렸다.[23]
비시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는 영국혐오증이었다.[23]
5. 역사
1940년 7월 10일, 비시에서 개최된 국민 의회는 헌법 법률을 제정하여 필리프 페탱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10월 24일, 페탱과 아돌프 히틀러는 몽투아르에서 회담했고, 페탱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독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1년 2월 9일, 프랑수아 다를랭이 부총리가 되어 대독 협력을 추진했다. 1942년 4월, 페탱은 피에르 라발을 총리로 임명하여 대독 협력을 가속화했다. 같은 해 11월,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에 대응하여 히틀러는 코르시카와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프랑스 해방이 시작되었다. 8월, 비시 정부 각료들은 독일로 이송되었고, 페르낭 드 브리농을 대표로 하는 지크마링겐 프랑스 정부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5. 1. 몰락
1944년 8월 25일 파리 해방 이후, 필리프 페탱과 그의 장관들은 독일군에 의해 지크마링겐으로 압송되었다.[35] 페탱과 피에르 라발 모두 협조를 거부하자, 페르낭 드 브리농이 독일군에 의해 지크마링겐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도록 선출되었다.[35] 페탱은 더 이상 참여를 거부했고, 지크마링겐 작전은 거의 권한이 없었다. 이 기구는 공식적으로 "국가 이익 수호를 위한 프랑스 정부 위원회"(Commission gouvernementale française pour la défense des intérêts nationaux|국가 이익 수호를 위한 프랑스 정부 위원회프랑스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비공식적으로는 "프랑스 대표단"(Délégation française|프랑스 대표단프랑스어)으로 알려졌다.[35] 이 점령지는 자체 라디오 방송국(Radio-patrie, Ici la France)과 공식 언론(La France프랑스어, ''르 쁘띠 파리지앵'')을 운영했고, 추축국인 독일과 일본의 대사관과 이탈리아 영사관을 두었다.[35]
위원회는 7개월 동안 존속했으며, 연합군의 폭격, 열악한 영양 상태와 주거 환경, 그리고 기온이 -30°C까지 떨어지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냈다.
1945년 4월 21일 드 라트르 장군은 그의 부대에 지크마링겐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며칠 만에 끝이 났고, 26일까지 페탱은 스위스에서 프랑스 당국의 손에 넘겨졌고, 라발은 스페인으로 도망쳤다.[35]
6. 외교 관계
영국은 프랑스 해군 함대가 독일의 손에 넘어가 자국의 해군력에 맞서 사용될 수 있을까 우려했다. 휴전 직후(1940년 6월 22일), 영국은 메르스 엘 케비르 해전을 실시하여 1,297명의 프랑스 군인을 사살했다.[45] 비시 정부는 이에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메르스 엘 케비르 사건 이후 영국은 자유 프랑스를 합법적인 프랑스 정부로 인정했다.
스위스와 다른 중립국들은 1944년 프랑스 해방 시 페탱이 사임하고 강제 망명 정부 수립을 위해 독일로 추방될 때까지 비시 정권과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46]
일본, 만주국, 이탈리아 등 추축국 각국은 비시 정권이 이끄는 프랑스를 국가로 승인하였고, 일본은 비시 정권과의 협정에 따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진주(仏印進駐)하였다.
7. 점령지
프랑스 정부가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점령 지역을 제외한 자유 지역과 해외 식민지였다. 그러나 자유 지역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수 물자 수송과 독일이 지정하는 독일인을 인도할 의무를 졌다. 자유 지역과 점령 지역 사이에는 경계선이 설치되어 소형 짐은 우편으로 보낼 수 있지만, 편지 왕래는 금지되는 등 검문이 실시되었다[171]. 1942년 11월 안톤 작전 이후에는 프랑스 전역이 점령하에 놓였다.
8. 식민지
1944년까지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의 강한 영향 하에 있었고, 1945년에 들어 완전히 일본군의 점령하에 들어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제외한 식민지 정부는 대체로 비시 정권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9. 정치
10. 군사
해군은 독일군과 거의 교전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함정은 휴전 전 혼란 속에 북아프리카나 영국으로 탈출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장악한 함선은 "식민지 유지에 필요한 함선"을 제외하고 무장 해제되었다.[175] 1942년 툴롱 항 자침 사건으로 주력 함대 상당수가 자침했다.
비시 정부는 프랑스 반공주의자들이 독일 진영에 자원하여 소련과 싸우는 것을 묵인했다(독일 육군의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프랑스 자원군단"). 나치 무장 친위대가 프랑스인 자원병으로 부대를 구성하는 것도 허용되었고(제33SS무장척탄병사단 등), 이들은 베를린 함락까지 독일과 함께 싸웠다.
11. 경제
12. 협력과 저항
줄리안 T. 잭슨은 "비시 정부가 초기에 법적이고 합법적이었던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썼다. 그는 만약 합법성이 대중의 지지에서 온다면, 1942년까지 페탱의 프랑스 내 막대한 인기는 그의 정부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만약 합법성이 외교적 승인에서 온다면 미국, 캐나다, 중국을 포함한 40개국 이상이 비시 정부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잭슨에 따르면, 샤를 드 골의 자유 프랑스는 비시 정부의 불법성에 대한 주장의 약점을 비시 정부의 불법 통치 시작 시점으로 여러 날짜(6월 16일, 6월 23일, 7월 10일)를 제시함으로써 인정했는데, 이는 적어도 어느 정도 기간 동안 비시 정부가 여전히 합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국가는 런던에서 드골이 이를 만류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시 정부를 인정했다. 1942년 11월 프랑스 전역에 대한 독일의 점령이 외교적 인정을 종식시켰다. 비시 정부 지지자들은 정부 권한의 부여가 제3공화국 의회(상원과 하원)의 합동 회의에서 헌법에 따라 투표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시 정권은 근대에 대한 반동적인 반혁명을 추구했다. 프랑스의 전통주의적 우익은 귀족과 로마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 전통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통적인 문화와 종교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배척하면서 권위주의를 받아들였다.[15][16] 비시 정권은 또한 자신을 단호한 민족주의자로 규정했다.[16]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인 1941년 6월, 노동조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비시 정권에 맞섰다.[17] 비시 정권은 극도로 반공주의적이었고 대체로 친독일적이었다. 미국의 역사가 스탠리 G. 페인은 비시 정권이 "뚜렷하게 우익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결코 파시스트적이 아니었다"고 밝혔다.[18] 정치학자 로버트 팍스턴은 반동주의자부터 온건한 자유주의 개혁가에 이르기까지 비시 정권 지지자 전반을 분석하여 진정한 파시스트 요소는 대부분의 부문에서 사소한 역할만 했음을 결론지었다.[19] 프랑스 역사가 올리비에 비비오르카는 비시 프랑스가 파시스트였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페탱은 일당 독재 국가를 만드는 것을 거부했고, 프랑스를 새로운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을 피했고, 근대화를 혐오했으며, 교회를 지지했다"고 지적했다.[20]
비시 정부는 프랑스 역사의 갈로-로마 시대와 상징적으로 자신을 연결시켜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시도했고, 갈리아 족장 베르징게토릭스를 프랑스 국가의 "창시자"로 칭송했다.[21] 알레시아 전투(기원전 52년)에서 갈리아인들의 패배가 프랑스 역사에서 공통된 국가 의식이 탄생한 순간이었던 것처럼, 1940년 패배가 다시 한번 국가를 통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1] 비시 정부의 "프랑시스크" 휘장은 갈리아 시대의 두 가지 상징, 즉 지팡이와 쌍두 도끼(라브리스)를 파시스와 유사하게 배열하여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상징으로 삼았다.[21]
페탱은 프랑스 라디오를 통해 자주 연설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의 라디오 연설에서 페탱은 항상 인칭 대명사 je프랑스어(프랑스어로 "나")를 사용하여 자신을 프랑스를 위해 희생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 다른 프랑스인들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아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화자의 신과 같은 어조를 취했다.[22] ''Révolution nationale''(국가 혁명)이라는 비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페탱은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단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라디오 연설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는 항상 프랑스 국민이 도덕적 퇴보와 쇠퇴를 겪었다고 주장되는 décadence프랑스어(퇴폐)의 시대로 묘사되었다.
영국 역사가 크리스토퍼 플러드는 페탱의 연설을 요약하면서 페탱이 la décadence프랑스어의 원인을 "분열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쾌락주의적인 가치를 가진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와 그 대척점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의 불임의 경쟁"으로 돌렸다고 적었다. 페탱은 프랑스 국민을 décadence프랑스어에서 구출하려면 국가 통합과 페탱이 프랑스인들이 잊었다고 주장한 전통주의적 도덕성을 회복할 권위주의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제3공화국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페탱은 ''la France profonde''("깊은 프랑스", 프랑스 문화의 심오한 프랑스적 측면)가 여전히 존재하며, 프랑스 국민은 페탱이 주장하는 그들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적 혁명에 대한 주장과 함께 페탱은 프랑스가 내부로 향하고 세계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했는데, 그는 항상 세계를 프랑스에게 끝없는 위험으로 가득 찬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장소로 묘사했다.
비시 정권 하에서 잔 다르크는 마리안느를 대체하여 프랑스의 국가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애국자로서의 잔의 이미지는 비시 정권의 전통주의적 메시지와 잘 어울렸다. 비시 문학은 잔을 전형적인 처녀로, 마리안느를 전형적인 창녀로 묘사했다. 비시 정권 하에서 르네 자네레의 교과서 Miracle de Jeanne프랑스어는 필독서였고, 잔의 사망 기념일은 그녀의 순교를 기리는 학교 연설의 계기가 되었다. 가톨릭 전통에 따르면, 잔이 천사의 음성을 들은 것은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제시되었다. 교과서 Miracle de Jeanne프랑스어는 공화주의 학교 교과서에서 잔이 정신적으로 질병이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음성이 말했다!"고 선언했다. 비시 교사들은 때때로 잔의 군사적 영웅심과 여성다움의 고전적 미덕을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한 학교 교과서는 소녀들이 잔의 본보기를 문자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영웅 중 일부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들은 바람직하게는 인내, 끈기, 체념의 미덕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들은 가사 운영을 돌보도록 운명 지어졌습니다… 미래의 어머니들은 그들의 성과 그들의 처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미덕을 실천할 힘을 사랑에서 찾을 것입니다." 비시 선전이 전사 잔과 충실한 여성 잔을 종합한 것을 보여주는 예로, 쥐라주 학교에서 연설한 앤 마리 위세노는 "여성은 잔 다르크나 다른 명망 있는 여성들의 경우, 그들에게 위임된 특별한 사명에서 우선 겸손하고 단순하게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비시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는 영국혐오증이었다.[23] 부분적으로 비시 정권의 맹렬한 영국혐오증은 페탱 원수, 피에르 라발,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 등 지도자들의 영국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 때문이었다. 1936년 2월 초 페탱은 프랑스 주재 이탈리아 대사에게 "영국은 항상 프랑스의 가장 완고한 적"이었다고 말했고, 프랑스에는 독일과 영국이라는 "두 개의 세습적 적"이 있으며, 그중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했고, 대공황으로 인한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영국 제국을 분할할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동맹을 원했다. 그 이상으로, 독일과의 휴전과 Révolution nationale프랑스어를 정당화하기 위해 비시 정권은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끔찍한 실수로, 제3공화국 하의 프랑스 사회를 퇴폐하고 부패한 것으로 묘사해야 했다. Révolution nationale프랑스어와 페탱의 la France seule프랑스어(프랑스만) 정책은 프랑스 사회를 파괴하고 1940년 패배를 초래했다고 하는 la décadence프랑스어로부터 프랑스를 "재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 사회에 대한 그러한 가혹한 비판은 그렇게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따라서 비시 정권은 프랑스의 여러 "적"에게 프랑스의 문제를 돌렸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39년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부추겼다고 주장되는 프리메이슨 조직을 통해 프랑스를 약화시키고 프랑스에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되는 "영원한 적"인 영국이었다.
비시 선전에서 영국처럼 자주 그리고 격렬하게 공격받은 국가는 없었다. 페탱의 라디오 연설에서 영국은 항상 "타자", 프랑스의 모든 좋은 것과 정반대인 국가, 피로 물든 "배신의 알비온", 그리고 무자비함에 한계가 없는 프랑스의 끊임없는 "영원한 적"으로 묘사되었다. 영국과 싸웠던 잔 다르크는 부분적으로 그 이유로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비시 정권의 영국혐오증의 주요 주제는 전쟁을 선동한 후 프랑스를 이용하고 버린 영국의 "이기심", 영국의 "배신",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를 장악하려는 영국의 계획이었다. 이러한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세 가지 예는 1940년 5월의 덩케르크 철수, 1940년 7월에 1,300명 이상의 프랑스 선원이 사망한 프랑스 지중해 함대에 대한 영국 해군의 메르스엘케비르 공격, 그리고 1940년 9월의 실패한 영국-자유 프랑스의 다카르 점령 시도였다. 자칭 "전문 영국혐오증자" 앙리 베로가 1940년 8월에 발표한 널리 배포된 소책자 Faut-il réduire l'Angleterre en esclavage?프랑스어(영국을 노예로 만들어야 하는가?)는 비시 정권의 반영국 선전의 전형적인 예였으며, 제목의 질문은 단순히 수사적인 것이었다. 또한 비시 정권은 영국혐오증과 인종차별, 반유대주의를 혼합하여 영국을 유대인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인종적으로 퇴폐한 "혼혈"로 묘사하고, 대조적으로 "인종적으로 순수한" 유럽 대륙의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1941년 ''그랭구아르'' 신문에 실린 베로가 다를랑 제독과의 인터뷰에서 다를랑은 "새로운 질서"가 유럽에서 실패한다면 "여기 프랑스에서 앵글로색슨 정책에 복종하는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인용되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는 패배했다. 폴 레노 총리 등 항전파를 대신하여 평화파가 정권을 잡았고, 6월 17일 필리프 페탱 원수가 총리가 되었다. 21일, 페탱 정부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휴전을 요청했다. 이튿날 22일 독불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프랑스 북부 등 지역 점령, 육군 제한 등이 결정되었다. 협정은 프랑스 측에 매우 가혹했지만, 주권 국가로서의 프랑스 정부 존속은 달성되었다. 페탱은 “적어도 우리 나라의 명예만큼은 지켰다”[146]고 말했다. 페탱은 프랑스 국민의 열렬한 숭배 대상이 되었고, 도시 곳곳에 원수의 초상이 넘쳐났다. 장 콕토는 이 열광을 “원수는 대중이 익숙해 있던 군주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고령은 사람을 안심시킨다. 그는 루이렉(頸部リンパ節結核)을 치유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항전파인 레노와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은 카사블랑카로 탈출하려 했으나 체포되었다. 레노 정권의 국방차관이자 페탱의 부하였던 샤를 드 골 준장은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유 프랑스를 결성했다.
프랑스 정부는 7월 1일 임시 수도 보르도에서 중부 도시 비시로 이전했다. 정부 수반 겸 총리에는 제3공화정 마지막 총리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었던 페탱 원수가 취임했고, 부총리에는 피에르 라발이 취임했다. 라발은 히틀러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타락한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권위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로비 활동을 했다. 6월 25일 라발은 “구 질서, 프리메이슨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국제적인 타협의 정치 제도가 현재의 입장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프랑스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계획,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149]고 연설했다. 신헌법 제정 의회에서는 “전 유럽이 프랑스를 버리고 신세계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중략) 패배한 의회 민주주의는 대담하고, 권위적·사회적·국가적 신제도에 그 길을 양보해야 한다.(중략) 의회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일은 즉시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여(정치 개혁을) 강제할 것이다.”[150]고 연설했다. 7월 2일, 프랑스 함대의 편입 또는 무력화를 노린 영국은 캐털펄트 작전에 의한 프랑스 함대 접수를 시도했다.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메르스엘케비르 해전이 발발했고, 정부와 프랑스 국민 사이에 반영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것은 라발의 공작을 더욱 용이하게 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 사령부 사령관 빌헬름 카이텔 원수와 “프랑스가 우리 나치즘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렇게 알았다면 공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치 동지끼리 싸운 것 같습니다.”[151]라는 대화를 나누었다.
7월 10일 비시에서 개최된 국민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신헌법 제정까지의 헌법 법률을 제정했다. 그 내용은 “『프랑스 국(État français)』의 새로운 헌법을 공포할 것을 목적으로 페탱 원수의 권위와 서명하에 있는 공화국의 정부에 모든 권한을 준다.”는 것이었다.[152] 7월 11일 페탱은 강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지만, 실제 정치는 부총리인 라발이 대부분 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페탱은 독일의 환심을 더 얻고자 프랑수아 다를랑을 해임하고 라발을 다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163] 1942년 3월 비밀리에 라발과 회담을 가졌고, 독일 또한 라발의 복귀를 지원했다.[164] 4월 18일, 헌법 행위 11호에 의해 국가 원수와 수상의 역할이 명확히 규정되었고, 수상에게는 강력한 독재 권력이 부여되었다. 이는 수상에 취임한 라발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으며, 페탱은 수상직에서 물러나 국가 원수직에 전념하게 되어 사실상 은퇴 상태가 되었다.[163] 국민혁명파 및 반독적인 각료들은 잇따라 해임되었고, 대독 협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165] 라발은 6월 22일 "볼셰비즘(공산주의)"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의 승리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프랑스 포로 1명 석방에 대해 프랑스 노동자 3명을 독일 내 공장으로 보내는 데 동의했다. 독일에서는 연합군에 대한 선전포고 움직임이 강해졌지만, 라발은 형식적으로는 각료회의에 상정했으나, 실제로는 참전할 의사가 없었다.[166]
11월 8일 횃불 작전이 시작되고, 프랑스령 알제리에 연합군이 침공을 개시했다. 이때 비시 정부군 총사령관이자 마침 북아프리카에 있던 다를랑 장군이 영미군과 휴전 조약을 체결하여 북아프리카의 비시 정부군을 항복시켰기 때문에, 11월 10일 독일은 자유 지역 점령을 시작했고, 정부는 완전히 독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앙톤 작전). 독일의 쇠퇴를 감지한 페탱 원수와 라발 수상은 연합국과 독일의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1월 17일에는 라발을 페탱의 후계자로 하는 헌법적 법규가 제정되었다.
독일의 요구는 점점 더 가혹해졌고, 1943년 1월에는 추가로 25만 명의 노동자를 요구했다. 라발은 포로 송환에서도 양보한 끝에 이 요구를 달성했고, 노동력 배치 총감 프리츠 자우켈에게 "프랑스만이 프로그램을 100% 이행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167] 그러나 이는 프랑스 국민에게 강한 불만을 안겨주었고, 징용 기피자들에 의한 마키가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다.
11월, 페탱은 폐지했던 제3공화국 의회를 재개하려고 시도하고, 헌법 초안을 제정했다. 또한 친독파인 라발을 멀리하려는 생각으로, 11월 27일 라발의 후계자 지정을 취소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독일 측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페탱의 측근 몇 명이 체포되었고, 독일에서는 "고문"이 파견되었으며, 밀리스(민병대) 지도자 조제프 달랑 등이 입각하는 등 독일 지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1944년 1월에는 독일이 추가로 100만 명의 노동자를 요구했고, 7월 21일까지 72만 명이 파견되었다.
12. 1. 대독 협력 (콜라보라시옹)
필리프 페탱은 몽투아르 회담 이후 라디오 연설에서 "나는 오늘 독일과의 협력(콜라보라시옹)의 길에 들어선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비시 정권은 중립을 표방했지만, 친독일적인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146] 많은 프랑스인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비시 정부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일부는 적극적인 대독 협력(콜라보라시옹)을 지지했고, 많은 사람들은 비시 정부 아래에서의 평온을 받아들이고 침묵을 지켰다.
당시 프랑스인들의 콜라보라시옹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1940년 10월에는 "유대인 및 외국인에 대한 법"이 제정되어 유대인의 권리가 제한되었다. 군사적으로는 라발 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민병대 조직 밀리스(Milice)가 레지스탕스 소탕 등에 참여했고, 제33SS기갑척탄병사단 등에 자원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12. 2. 레지스탕스
비시 정부 수립 직후에는 필리프 페탱이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했다는 생각이 퍼져 있어 레지스탕스는 큰 세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격렬한 친독 협력은 시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1940년 가을 무렵부터 시위와 레지스탕스 선전 활동이 활발해졌다. 1941년 봄에는 파드칼레 탄광에서 10만 명 규모의 대규모 파업도 발생했다.[180] 프랑스 공산당[181] 등 좌파들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이후 라발 저격 사건, 사보타주, 독일 장교 살해 등의 무력 행동이 빈발하게 되었다.[182] 그러나 1942년 11월까지 레지스탕스는 분파되어 있었고, 소수파였다.[183]
독일은 레지스탕스의 공격에 대해 독일 장교 1명의 피해에 대해 수 명의 "인질"을 살해하는 보복 명령으로 대응했다.[184] "인질"은 체포된 공산주의자나 유대인이었고, 1941년 10월에는 98명의 인질이 처형되었다. 페탱은 자신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85]
1942년 11월 독일의 전국 점령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비시 정권에 대한 환상을 한꺼번에 깨뜨렸다. 1943년 1월에는 남부의 3대 레지스탕스 운동이 통합되었고, 공산당이 프랑스 자유군에 참여했다. 또한 전 총리 레옹 블룸도 사회당의 이름으로 프랑스 자유군을 지지했다. 1943년 5월 27일에는 프랑스 국내에서 레지스탕스 통합 조직인 국가 저항 위원회(CNR)가 설립되었다.[186] 이후 레지스탕스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 1943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레지스탕스에 의해 709명의 비시 정부 치안 관계자가 살해되었고, 9000건의 폭탄 테러, 600건의 열차 탈선 사건이 발생했다.[187]
13. 전후 처리 및 평가
비시 정부 관계자들에 대한 재판은 알제에서 국민해방위원회가 성립되면서 시작되었고, 종전과 함께 가속화되었다.
필리프 페탱은 1945년 7월 반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샤를 드골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188] 피에르 라발, 조제프 다르낭, 페르낭 드 브리농 등은 사형되었고, 많은 협력자들이 숙청되었다.[188]
연합국 측은 비시 정부를 "괴뢰 정부"로 여겼으며, 연합국의 승리와 자유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수립, 제4공화국 성립과 함께 그러한 평가가 일반화되었다. 프랑스 제4공화국은 비시 정부의 계승국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시 정부가 도입한 노령 연금, 가족 수당 등 일부 제도는 형태를 바꿔 존속했으며, 전후 모네 계획과 비시 정부 경제 정책의 유사성도 지적되고 있다.[188]
비시 시대의 대독 협력이 위장이었는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으며, 종종 정치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프랑수아 미테랑을 비롯하여, 비시 정권 하에서 경력을 시작한 인물들이 전후 프랑스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점도 정권 평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후부터 1960년대까지 드골파와 프랑스 공산당은 각각 '레지스탕스 신화'를 선전했다.[189] 1969년 마르셀 오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프랑스 국민의 모습을 그려 당국에 충격을 주었고, 1981년까지 TV 방영이 금지되었다.[190]
로베르 아롱은 1954년 저서에서 비시 정부가 프랑스 국민을 위한 방패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로버트 팍스턴은 1972년 저서에서 이를 부정하고 비시 정부가 독일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 페로는 1987년 저서에서 페탱이 국가의 명예를 잃은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191]
1951년 페탱 사후, "페탱 원수의 추억을 지키기 위한 협회"가 설립되어 페탱의 명예 회복을 요구했지만, 극우 정치 세력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1958년 샤를 드골은 제1차 세계 대전 승리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페탱의 묘비에 화환을 보냈으나, 1993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이 관례를 중단했다.
1984년 페탱 변호 광고가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고, 유럽 인권 재판소는 1998년 프랑스 정부의 행위가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판결을 내렸다.
윈스턴 처칠은 피에르 라발을 "분명하게 먼 곳을 내다보았다"라고 평가했다.[196] 라발의 딸 조제는 라발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언급하며 반박했다.[196] 쁘띠 지지자들은 협력의 죄를 라발에게만 떠넘기는 경향이 있다.[196]
1970년 라발 재판 미공개 자료 일부 열람이 허용되었다. 전 총리 조르주 비도는 라발 재판이 드골 등의 음모였다고 말했다. 1983년과 1990년에 라발 재판 무효를 요구하는 책이 출판되었다. 장폴 쿠앙테는 라발이 영국, 독일, 쁘띠에게 속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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