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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마이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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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독일의 역사가로, 1862년에 태어나 1948년에 사망했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와 본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독일 국가 기록 보관소 사서,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교수, 그리고 사학 잡지 편집자 등을 역임했다. 마이네케는 18, 19세기 독일 지성과 문화사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며, 특히 1908년 저서 《세계 시민주의와 민족 국가》를 통해 민족 감정의 발전을 추적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공화국을 지지했으나, 나치 정권 하에서는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보이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독일의 재앙을 다룬 저서 《독일의 재앙》을 썼으며, 베를린 자유 대학교 설립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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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마이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출생일1862년 10월 30일
출생지잘츠베델, 작센, 프로이센 왕국
사망일1954년 2월 6일
사망지서베를린, 서독
국적독일
알려진 업적역사주의
교육본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직업민족주의 역사학자
독일 국립 기록 보관소 기록관 (1887–1901)
역사 저널 편집자 (1896–1935)
제국 역사 위원회 회장 (1928–1935)
학문적 배경
주요 관심사역사학
모교베를린 대학교,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본
직장스트라스부르 대학교

2. 생애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1862년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 잘츠베델에서 태어났다. 쾰른 김나지움을 거쳐 본 대학교와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887년부터 1901년까지 독일 국가 기록 보관소에서 사서로 일했으며,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896년부터 1935년까지 Historische Zeitschrift|사학 잡지de의 편집자로 활동했고, 1928년부터 1935년까지는 Historische Reichskommission|국립 역사 위원회de 의장을 맡았다.[4]

마이네케는 18, 19세기 독일 지성과 문화사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특히 1908년 저서 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세계 시민주의와 민족 국가de는 19세기 민족 감정의 발전을 추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Kratos|권력de와 Ethos|도덕de 간의 갈등, 그리고 그 균형을 찾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공화국을 지지하는 Vernunftsrepublikaner|이성적 공화주의자de였으며, 1918년 독일 민주당 창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훗날 독일 총리가 되는 하인리히 브뤼닝이 있었다.

제3제국 시기에는 정권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1935년 이후로는 Historische Zeitschrift|사학 잡지de 편집자 자리에서 물러나는 등 불명예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그는 나치의 폭력성에 사적으로 괴로워했지만, 공개적으로는 "반유대주의자"임을 밝히기도 했다.[10]

1948년에는 베를린 자유 대학교 설립에 기여했으며, 영국의 역사가 E. H. 카는 마이네케를 시대정신에 영향을 많이 받는 역사가의 예로 언급했다.[17]

마이네케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연도사건
1862년10월 31일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의 잘츠베델에서 출생
1871년베를린으로 이사
1882년베를린 대학교 입학 (전공: 게르만학)
1883년본 대학교로 전학, 전공을 역사학으로 변경
1886년베를린 대학교 졸업
1887년프로이센 국가 문서 보관소 취직
1893년『사학 잡지』 편집자
1895년안토니에 델하스와 결혼
1896년『보이엔 원수전』 제1권 출판
1899년『보이엔 원수전』 제2권 출판
1901년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 초빙
1906년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이동, 『독일의 궐기 시대 - 1795~1815년』 출판
1907년『세계 시민주의와 국민 국가』 출판
1909년『슈타인에서 비스마르크까지』 출판
1913년『라트비츠와 독일 혁명』 출판
1914년베를린 대학교로 이동
1915년『1914년의 독일의 궐기』 출판
1917년『19세기 및 20세기에서의 프로이센과 독일』, 『세계 대전의 제 문제』 출판
1919년『혁명 이후』 출판
1924년『근대사에서의 국가 이성의 이념』 출판
1927년『독영 동맹 문제의 역사 - 1890~1901년』 출판
1928년베를린 대학교 명예 교수, 국립 역사 위원회 회장 취임
1930년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출판
1932년『국가와 인격』 출판
1935년국립 역사 위원회 회장 및 『사학 잡지』 편집자 사임
1936년『역사주의의 성립』 출판
1939년『역사적 감각과 역사의 의미에 대하여』 출판
1940년『프로이센-독일의 제상과 제문제』 출판
1941년『체험기』 출판
1942년『역사를 위한 격언과 소묘』 출판
1946년『독일의 비극』 출판, 베를린 대학교 복귀
1948년『창조하는 거울』 출판
1949년『슈트라스부르크-프라이부르크-베를린』 출판
1951년풀 레 메리트 훈장 수여
1954년2월 6일 베를린 교외의 다렘에서 사망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 잘츠베델에서 태어나 베를린의 쾰른 김나지움에서 학교를 다녔다. 본 대학교와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4] 랑케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학파가 주류였던 베를린 대학교에서 처음에는 문학을 지망했지만 역사학으로 전향했다.[17] 졸업 후 1887년부터 1901년까지 독일 국가 기록 보관소(현: 연방 문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4] 이 기간 딜타이의 저작에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 2. 학문적 경력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 잘츠베델에서 태어나 베를린의 쾰른 김나지움에서 학교를 다녔다. 본 대학교와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7년부터 1901년까지 독일 국가 기록 보관소에서 사서로 일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교수로, 1896년부터 1935년까지 Historische Zeitschrift|사학 잡지de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1928년부터 1935년까지 Historische Reichskommission|국립 역사 위원회de 의장을 맡았다.[4]

마이네케는 18, 19세기 독일 지성과 문화사에 대한 연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책은 1908년 저서 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세계 시민주의와 민족 국가de로, 19세기의 민족 감정의 발전을 추적했다. Die Idee der Staatsräson|국가 이성의 이념de (1924)부터 그의 많은 작품은 Kratos|권력de와 Ethos|도덕de 간의 갈등과 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은 훗날 총리가 되는 하인리히 브뤼닝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마이네케는 Vernunftsrepublikaner|이성적 공화주의자de , 즉 최악의 대안으로 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1918년에는 독일 민주당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제3제국 하에서 마이네케는 특히 초기의 반유대주의 법과 관련하여 정권에 어느 정도 동정심을 보였다. 1935년 이후 마이네케는 반쯤 불명예스러운 상태에 빠졌고, Historische Zeitschrift|사학 잡지de 편집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이네케는 공개적으로 정권 지지자로 남았지만, 사적으로는 나치의 폭력과 무례함에 점점 더 괴로워했다.[10]

1948년, 마이네케는 베를린 자유 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17]는 그를 Zeitgeist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역사가의 예로 인용하는데, 독일 제국 시대에는 자유주의적이었고, 전간기에는 낙담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깊이 비관적이었다.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현 작센안할트 주) 잘츠베델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를린 대학교와 본 대학교에서 배우며, 처음에는 문학을 지망했지만 역사학으로 전향했다. 당시 베를린 대학교에서는 랑케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학파가 주류였다. 졸업 후 1887년부터 국가 문서관(현: 연방 문서관)에서 근무했으며, 이 기간 딜타이의 저작에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01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마이네케는 1893년부터 독일 사학계의 권위적인 잡지 Historische Zeitschrift|사학 잡지de의 편집을 맡아 나치의 압박으로 1935년에 사임할 때까지 계속했다. 또한 "국립 역사 위원회(the Historische Reichskommission)"의 회장을 역임했다. 이 위원회는 1928년에 설치되었지만, 역시 나치의 압박으로 1935년에 폐지되었다.

마이네케는 18, 19세기 독일의 지성과 문화의 역사적 배경을 논했다. 1907년에 출판된 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세계 시민주의와 국민 국가de에서, 겉으로는 보편적으로 보이는 세계 시민 사상이 민족적, 국가적 관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혔다. 대표작 Die Idee der Staatsräson|근대사에서의 국가 이성의 이념de을 비롯하여, 그의 관심은 근대적인 국가 이성과 개인의 도덕 의식과의 괴리에 쏠려 있다.

마이네케는 정치적으로 바이마르 체제 지지파였으며, 1930년에 조각된 초연 내각의 브뤼닝은 그의 제자였다. 또한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2. 3. 정치적 입장과 활동

마이네케는 민족주의 역사가로서 동유럽 사람들의 바람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4] 심지어 "남 슬라브족의 잔혹한 야만성"에 대해 글을 썼고,[5] 독일의 동쪽 팽창주의를 선호했다.[6]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는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로부터 획득한 서프로이센과 포젠주에 거주하는 폴란드 지주들을 콩그레스 폴란드로 추방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라트비아인들을 추방한 후 쿠를란트를 독일 식민지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7] 일부 저자는 그의 견해를 민족 청소에 비유했다.[8] 독일 제국이 콩그레스 폴란드에서 광대한 토지를 합병하고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독일 정착민을 위한 공간으로 추방하는 내용의 소위 폴란드 국경선 계획을 수립했을 때, 마이네케는 이 아이디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9]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마이네케는 Vernunftsrepublikaner|페어눈프츠레푸블리카너|합리적 공화주의자de , 즉 최악의 대안으로 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1918년에는 독일 민주당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제3제국 하에서 마이네케는 특히 초기의 반유대주의 법과 관련하여 정권에 어느 정도 동정심을 보였다. 1935년 이후 마이네케는 반쯤 불명예스러운 상태에 빠졌고, Historische Zeitschrift|히스토리셰 차이트슈리프트|사학 잡지de 편집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이네케는 공개적으로 정권 지지자로 남았지만, 사적으로는 나치의 폭력과 무례함에 점점 더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라고 묘사했으며,[10] 유대인 친구와 동료를 두는 것을 꺼리지 않았지만,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는 그를 그다지 괴롭히지 않았다.[11]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그는 지그프리트 아우구스트 쾰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당신도 이 훌륭한 캠페인에 기뻐했을 것입니다."[12]

나치즘의 성공에 대한 그의 설명은 독일의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유산,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 중산층의 약점을 지적하지만, 마이네케는 히틀러주의가 독일 역사의 초기 발전과 관련이 없는 일련의 불행한 사고의 이점을 누렸다고 주장한다. 마이네케는 나치즘을 "독일을 점령한 외세"[13]로 해석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편견도 표명했다.[14] 마이네케는 유대인이 반유대주의에 책임이 있으며 자유주의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재앙은 반유대주의의 두 가지 전형적인 주제, 즉 유대인의 경제 활동과 그들의 alleged "성격"에 기초한 불만과 관련된 것이었다.[15][16]

정치적으로 바이마르 체제 지지파였으며, 1930년에 조각된 초연 내각의 브뤼닝은 그의 제자였다. 또한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마이네케와 논쟁을 벌였고 나치즘에 경도된 카를 슈미트는 『바이마르-제네바-베르사유와의 대결(1940년)』에서, 자신이 비판하는 당시 유럽 공법의 어용 사상가로 마이네케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헤겔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국수주의적인 헤겔 사상 부흥의 풍조가 두드러졌던 당시 사상계에서는 이해받지 못했다.

2. 4. 나치 시대와 그 이후

제3제국 하에서 마이네케는 특히 초기의 반유대주의 법과 관련하여 정권에 어느 정도 동정심을 보였다. 1935년 이후 마이네케는 반쯤 불명예스러운 상태에 빠졌고, Historische Zeitschrift|역사학 잡지de 편집자 자리에서 물러났다.[10] 마이네케는 공개적으로 정권 지지자로 남았지만, 사적으로는 나치의 폭력과 무례함에 점점 더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라고 묘사했으며,[11] 유대인 친구와 동료를 두는 것을 꺼리지 않았지만,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는 그를 그다지 괴롭히지 않았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그는 지그프리트 아우구스트 쾰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도 이 훌륭한 캠페인에 기뻐했을 것입니다."라고 칭찬했다.[12]

마이네케의 가장 잘 알려진 저서 중 하나인 1946년의 Die Deutsche Katastrophe|독일의 재앙de에서 그는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에 대한 평생의 신념을 1933-45년의 사건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나치즘의 성공에 대한 그의 설명은 독일의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유산,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 중산층의 약점을 지적하지만, 마이네케는 히틀러주의가 독일 역사의 초기 발전과 관련이 없는 일련의 불행한 사고의 이점을 누렸다고 주장한다. 마이네케는 나치즘을 "독일을 점령한 외세"[13]로 해석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편견도 표명했다.[14] 마이네케는 유대인이 반유대주의에 책임이 있으며 자유주의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재앙은 반유대주의의 두 가지 전형적인 주제, 즉 유대인의 경제 활동과 그들의 alleged "성격"에 기초한 불만과 관련된 것이었다.[15][16]

1948년, 마이네케는 베를린 자유 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영국의 역사가 E. H. Carr[17]는 그를 Zeitgeist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역사가의 예로 인용하는데, 독일 제국 시대에는 자유주의적이었고, 전간기에는 낙담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깊이 비관적이었다.

3. 주요 사상과 연구

마이네케는 18, 19세기 독일의 지성과 문화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했다. 나치의 압박으로 1935년에 사임할 때까지 독일 사학계의 권위있는 잡지 『Historische Zeitschrift(사학 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국립 역사 위원회(the Historische Reichskommission)"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근대적인 국가 이성과 개인의 도덕 의식 간의 괴리였다.

마이네케는 정치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지지했으며, 1930년에 조각된 브뤼닝 초연 내각의 브뤼닝은 그의 제자였다.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나치즘에 경도된 카를 슈미트는 『바이마르-제네바-베르사유와의 대결(1940년)』에서 마이네케를 당시 유럽 공법의 어용 사상가로 비판했다. 헤겔에 비판적이었던 마이네케는 국수주의적인 헤겔 사상 부흥의 풍조가 두드러졌던 당시 사상계에서는 이해받지 못했다. 나치 정권의 억압 하에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종전 후 이듬해인 1946년에 저술한 『독일의 비극』에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용인한 근본적인 이유를 대중 사회의 성립("대중 마키아벨리즘")에서 찾았다.

3. 1. 세계 시민주의와 민족 국가

마이네케는 1907년에 출판된 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세계 시민주의와 국민 국가de에서 겉으로는 보편적으로 보이는 세계 시민 사상이 민족적, 국가적 관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혔다. 그의 대표작 Die Idee der Staatsräson|근대사에서의 국가 이성의 이념de을 비롯하여, 그의 관심은 근대적인 국가 이성과 개인의 도덕 의식과의 괴리에 쏠려 있다.

3. 2. 국가 이성론

마이네케의 대표작은 《Die Idee der Staatsräson(근대사에서의 국가 이성의 이념)》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근대적인 국가 이성과 개인의 도덕 의식 간의 괴리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드러냈다.

3. 3. 역사주의

마이네케는 18, 19세기 독일의 지성과 문화의 역사적 배경을 논했다. 1907년에 출판된 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세계 시민주의와 국민 국가de에서, 겉으로는 보편적으로 보이는 세계 시민 사상이 민족적, 국가적 관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혔다. 대표작 Die Idee der Staatsräson|근대사에서의 국가 이성의 이념de을 비롯하여, 그의 관심은 근대적인 국가 이성과 개인의 도덕 의식과의 괴리에 쏠려 있다.

4. 주요 저서


  • 헤르만 폰 보옌 원수의 생애de (2권, 1896–1899)
  • 독일 부흥의 시대, 1795–1815de (1906) (피터 파레트가 영어로 번역, ''[https://books.google.com/books?id=6R1pcdQsKTIC The Age of German Liberation, 1795–1815]'', 1977)
  • 세계 시민주의와 국민 국가: 독일 국민 국가의 기원에 관한 연구de (1908)
  • 라토비츠와 독일 혁명de (1913)
  • 근대사에서의 국가이성의 이념de (1924)
  • 독일-영국 동맹 문제의 역사, 1890–1901de (1927)
  • 국가와 개성de (1933)
  • 역사주의의 기원de (2권, 1936)
  • 독일의 재앙: 고찰과 회고de (1946)
  • 1848년: 세기적 고찰de (1948)
  • 작품집de (9권, 1957–1979)
  • 독일의 비극 - 고찰과 회상일본어 (야다 토시타카 역, 고분도〈아테네 신서〉, 1951년 / 주고 문고, 1974년)
  • 근대사에서의 국가 이성의 이념일본어 (기시다 타츠야 역 (요약), 주오코론 신샤〈주고 클래식스〉 Ⅰ・Ⅱ, 2016년)
  • 세계의 명저 54 마이네케일본어 (하야시 켄타로 책임 편집, 주오코론샤, 1969년) - 「근대사~」(요약) + 「독일의 비극」
  • 역사주의의 성립일본어 (키쿠모리 히데오・아소 켄 역, 치쿠마 서방〈치쿠마 총서〉(상・하), 1968년)
  • 근대사에서의 국가 이성의 이념일본어 (키쿠모리 히데오・이케마츠 케이조 역, 미스즈 서방, 1960년)
  • 세계 시민주의와 국민 국가 - 독일 국민 국가 발생의 연구일본어 (야다 토시타카 역, 이와나미 서점 (Ⅰ・Ⅱ), 1968-1972년)
  • 역사적 감각과 역사의 의미일본어 (나카야마 치이치 역, 소분사〈역사학총서〉, 1972년)
  • 랑케와 부르크하르트일본어 (나카야마 치이치・기시다 타츠야 역, 소분사, 1960년)

참조

[1] 서적 (제목 없음)
[2] 서적 Germany: The Long Road West: Volume 2: 1933–1990
[3] 서적 The anti-Enlightenment tradition Yale University Press
[4] 간행물 East European Quarterly University of Colorado
[5] 서적 Friedrich Meinecke and German politics in the twentieth century
[6] 서적 The Lost German East: Forced Migration and the Politics of Memory, 1945–1970
[7] 서적 Globalisation and the Nation in Imperial Germany
[8] 간행물 Telo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 Graduate Philosophy Association
[9] 서적 The German Empire, 1871–1918
[10] 서적 The bourgeois Democrats of Weimar Germany
[11] 서적 Militarism, Imperialism, and Racial Accommodation: An Analysis and Interpretation of the Early Writings of Robert E. Park University of Arkansas Press
[12] 서적 The Quest for the Lost Nation: Writing History in Germany and Japan in the American Century
[13] 서적 Thinking about the Holocaust: After Half a Century
[14] 서적 Germany: The Long Road West: Volume 2: 1933–1990
[15] 서적 The anti-Enlightenment tradition Yale University Press
[16] 서적 Germans and Jews Since The Holocaust https://books.google[...] Macmillan International Higher Education
[17] 서적 What is History? Macmillan/Penguin
[18] 서적 Germany: The Long Road West: Volume 2: 1933–1990
[19] 서적 The anti-Enlightenment tradition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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