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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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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의 일요일은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영국군이 무장하지 않은 시위대에 발포하여 14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북아일랜드 시민권 운동의 배경 속에서 발생했으며, 영국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가톨릭교도와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촉발하여 북아일랜드 분쟁을 격화시켰다. 위저리 조사와 사빌 조사를 통해 진실 규명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2010년 사빌 보고서는 영국군의 책임을 인정했다. 사건 이후, 예술 작품을 통해 사건이 재조명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와 재판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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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1972년)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사건 명칭피의 일요일
발생 위치데리, 북아일랜드
발생 날짜1972년 1월 30일
발생 시간16시 10분 (UTC+00:00)
사건 유형대량 총격
국가 테러
사용 무기L1A1 자동 장전 소총
사망자14명 (13명 즉사, 1명 4개월 후 사망)
부상자15명 이상 (총상 12명, 차량 충돌 2명, 고무탄 및 파편 부상자)
가해자영국 육군 (낙하산 연대)
배경
관련 분쟁북아일랜드 분쟁
사건
주요 내용영국 육군 낙하산 연대가 비무장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
관련 인물에드워드 데일리 신부가 부상자를 구조하려 할 때 피묻은 흰 손수건을 흔들었던 모습이 유명하다.
조사 및 결과
첫 번째 조사 결과 (1972년)영국 육군에게 책임을 묻지 않음.
두 번째 조사 결과 (2010년)살인이 불법적이었다고 판정.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영국 군인들의 행위를 비판함.
법적 소송
Soldier F 기소기소 중지되었으나 재개됨.
최종 결과일부 기소는 철회됨.
추가 정보
관련 문서북아일랜드 분쟁
북아일랜드 분쟁 연표
피의 금요일 (1972년)
사진
에드워드 데일리 신부가 치명상을 입은 재키 더디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할 때 피묻은 흰 손수건을 흔들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데리는 북아일랜드의 많은 가톨릭교도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50년간 유니오니스트의 잘못된 통치"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게리맨더링으로 인해 국민주의자가 다수임에도 시 의회 선거에서는 항상 유니오니스트가 다수를 차지했다. 데리는 공공 투자 부족, 고속도로 및 대학교 설립 소외, 열악한 주택 상황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6]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해 데리는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NICRA) 등이 주도하는 시민권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9년 8월, 보그사이드 전투로 알려진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북아일랜드 정부는 영국군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17]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로열 얼스터 경찰(RUC)의 종파성 때문에 초기에는 영국군을 중립적인 세력으로 환영했지만,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18] 1971년 8월, 작전 데메트리우스로 인해 폭동이 발생하고 밸리머피 학살이 일어났다. 데리에서는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IRA)에 의해 영국군 병사가 처음으로 살해되었고, 이후 가톨릭 여학생과 여성이 영국군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21][22][23][24][25]

임시 IRA의 활동 증가로 영국군 사망자가 늘었고, 데리에는 출입 금지 구역이 설정되었다. 자유 데리 지역에는 영국군 장갑차도 통과할 수 없는 장벽이 설치되었고, "공격 코너"에서는 매일 충돌이 발생하여 지역 기업에 큰 피해를 입혔다.[27]

2. 1. 아일랜드 분쟁

아일랜드 분쟁은 북아일랜드의 많은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50년간의 유니오니스트(Unionist)의 잘못된 통치"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데리 시에서 시작되었다. 국민주의자들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게리맨더링으로 인해 시 의회 선거에서는 항상 유니오니스트가 다수를 차지했다.[16] 데리 시는 공공 투자가 부족했고, 고속도로 건설과 대학교 설립에서도 소외되었으며, 주택 상황 또한 열악했다.[16]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해 데리는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NICRA) 등이 주도하는 시민권 운동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1969년 8월에는 "보그사이드 전투"로 알려진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고, 북아일랜드 정부는 영국군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17]

초기에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영국군을 중립적인 세력으로 환영했지만, 로열 얼스터 경찰(RUC)이 종파적인 경찰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영국군과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18]

1971년 8월 9일,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폭력 사태가 심화되자 영국 정부는 재판 없이 구금하는 작전 데메트리우스를 시작했다.[19] 이 작전으로 인해 폭동이 발생했고, 사흘간 21명이 사망했다.[20] 벨파스트에서는 영국군 공수여단 병사들이 11명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밸리머피 학살이 발생했다.[3] 데리에서는 폴 챌레너 상병이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IRA)에 의해 살해된 최초의 영국군 병사가 되었고,[21] 14세 가톨릭 여학생 아네트 맥개비건,[22][23] 47세의 캐슬린 톰슨이 영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24][25]

임시 IRA의 활동 또한 증가하여, 1971년 남은 기간 동안 30명의 영국군 병사가 사망했다.[20] 1971년 말까지 데리에서 6명의 병사가 추가로 사망했고, 영국군은 최소 1,332발의 총격을 받았으며, 211건의 폭발물과 180개의 못 폭탄 공격을 받았다. 영국군은 364발의 총격을 가했다.[26] 임시 IRA와 공식 IRA는 데리에 출입 금지 구역을 설정하고 장벽을 설치했다.[27] 1971년 말까지 자유 데리 지역에 29개의 장벽이 설치되었고, 그중 16개는 영국군 장갑차도 통과할 수 없었다.[27] IRA 대원들은 공개적으로 도로를 봉쇄했고, "공격 코너"에서는 매일 국민주의 젊은이들과 영국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27] 폭동과 방화로 인해 지역 기업에 약 400만파운드의 피해가 발생했다.[27]

2. 2. 북아일랜드 시민권 운동

아일랜드 분쟁

데리시는 북아일랜드의 많은 가톨릭교도들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50년간의 유니오니스트의 잘못된 통치"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국민주의자들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게리맨더링으로 인해 시 의회 선거에서는 항상 유니오니스트가 다수를 차지했다.[16] 데리시는 공공 투자가 부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고속도로가 데리까지 연장되지 않았고, 대학은 데리보다 더 작은 (Ulster Protestants|얼스터 프로테스탄트영어 다수인) 콜레인에 설립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시의 주택 상황이 전반적으로 열악했다.[16] 따라서 데리는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NICRA)와 같은 단체들이 주도하는 시민권 운동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17] 1969년 8월, "보그사이드 전투"로 알려진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북아일랜드 정부는 군사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17]

초기에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로열 얼스터 경찰(RUC)이 종파적인 경찰력으로 여겨진 것과는 달리, 영국군을 중립적인 세력으로 환영했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18]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폭력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1971년 8월 9일 재판 없이 구금하는 작전 데메트리우스가 시작되었다.[19] 구금 조치가 시행된 후 지역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사흘간의 폭력 사태로 21명이 사망했다.[20] 벨파스트에서는 영국군 공수여단 병사들이 11명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밸리머피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3] 8월 10일, 폴 챌레너(Paul Challenor) 상병은 데리 크레건 주택단지에서 저격수에게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데리에서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Provisional IRA)에 의해 살해된 최초의 영국군 병사가 되었다.[21] 구금 조치가 시행된 한 달 후, 영국군 병사가 데리에서 14세의 가톨릭 여학생인 아네트 맥개비건(Annette McGavigan)을 사살했다.[22][23] 두 달 후에는 47세의 여섯 자녀의 어머니인 캐슬린 톰슨(Kathleen Thompson)이 데리 자택 뒷마당에서 영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24][25]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의 활동 또한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증가했으며, 1971년 남은 기간 동안 30명의 영국군 병사가 사망했는데, 이는 구금 조치 이전 기간에 사망한 10명의 병사 수와 대조적이다.[20] 1971년 말까지 데리에서 6명의 병사가 추가로 사망했다.[26] 영국군은 최소 1,332발의 총격을 받았고, 211건의 폭발물과 180개의 못 폭탄 공격도 받았다.[26] 영국군은 364발의 총격을 가했다.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과 공식 아일랜드 공화군 모두 데리에서 영국군과 RUC를 위한 장벽을 설치하고 출입 금지 구역(no-go area)을 설정했다.[27] 1971년 말까지 자유 데리로 알려진 지역에 접근을 막기 위해 29개의 장벽이 설치되었는데, 그중 16개는 영국군의 1톤짜리 장갑차조차 통과할 수 없었다.[27]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대원들은 언론 앞에서 공개적으로 도로를 봉쇄했고, "공격 코너(aggro corner)"로 알려진 곳에서 매일 국민주의 젊은이들과 영국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27] 폭동과 방화 장치로 인해 지역 기업에 약 400만파운드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27]

2. 3. 영국군 투입과 갈등 심화

초기에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로열 얼스터 경찰(RUC)이 종파적인 경찰력으로 여겨진 것과는 달리, 영국군을 중립적인 세력으로 환영했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18]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폭력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1971년 8월 9일 재판 없이 구금하는 작전 데메트리우스(Operation Demetrius)가 시작되었다.[19] 구금 조치가 시행된 후 지역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사흘간의 폭력 사태로 21명이 사망했다.[20] 벨파스트(Belfast)에서는 영국군 공수여단(Parachute Regiment) 병사들이 11명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밸리머피 학살(Ballymurphy massacre)로 알려지게 되었다.[3] 8월 10일, 폴 챌레너(Paul Challenor) 상병(Bombardier)은 데리 크레건(Creggan) 주택단지에서 저격수에게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데리에서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Provisional IRA)에 의해 살해된 최초의 영국군 병사가 되었다.[21] 구금 조치가 시행된 한 달 후, 영국군 병사가 데리에서 14세의 가톨릭 여학생인 아네트 맥개비건(Annette McGavigan)을 사살했다.[22][23] 두 달 후에는 47세의 여섯 자녀의 어머니인 캐슬린 톰슨(Kathleen Thompson)이 데리 자택 뒷마당에서 영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24][25]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Provisional IRA)의 활동 또한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증가했으며, 1971년 남은 기간 동안 30명의 영국군 병사가 사망했는데, 이는 구금 조치 이전 기간에 사망한 10명의 병사 수와 대조적이다.[20] 1971년 말까지 데리에서 6명의 병사가 추가로 사망했다.[26] 영국군은 최소 1,332발의 총격을 받았고, 211건의 폭발물과 180개의 못 폭탄(nail bomb) 공격도 받았다.[26] 영국군은 364발의 총격을 가했다.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Provisional IRA)과 공식 아일랜드 공화군(Official IRA) 모두 데리에서 영국군과 RUC를 위한 장벽을 설치하고 출입 금지 구역(no-go area)을 설정했다.[27] 1971년 말까지 자유 데리(Free Derry)로 알려진 지역에 접근을 막기 위해 29개의 장벽이 설치되었는데, 그중 16개는 영국군의 1톤짜리 장갑차조차 통과할 수 없었다.[27] 아일랜드 공화군(IRA) 대원들은 언론 앞에서 공개적으로 도로를 봉쇄했고, "공격 코너(aggro corner)"로 알려진 곳에서 매일 국민주의 젊은이들과 영국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27] 폭동과 방화 장치(incendiary device)로 인해 지역 기업에 약 400만파운드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27]

2. 4. 사건 직전 상황

1972년 1월 18일, 브라이언 포크너 북아일랜드 총리는 그해 연말까지 북아일랜드 내 모든 행진과 시위를 금지했다.[28] 4일 후, 이 금지령을 무시하고 데리 근처 매길리건 해변에서 수감 반대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수감 캠프로 행진했지만, 공수여단 병사들에게 저지당했다. 일부 시위대가 돌을 던지고 가시철망을 돌아서 가려고 하자, 공수부대원들은 근접 거리에서 고무탄을 발사하고 곤봉으로 진압하며 그들을 몰아냈다. 공수부대원들은 많은 시위대를 심하게 구타했고, 상관의 제지가 필요할 정도였다. 공수부대원들의 잔혹 행위 주장은 텔레비전과 언론에 광범위하게 보도되었다. 영국군 내에서도 공수부대원들의 과도한 폭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29][30]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NICRA)는 1972년 1월 30일 데리에서 또 다른 수감 반대 시위를 열 계획이었다. 당국은 시위를 보그사이드에서 허용하기로 결정했지만, 폭동을 피하기 위해 주최 측이 계획한 길드홀 광장까지의 행진은 막기로 했다. 당시 북아일랜드 육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포드 소장은 폭동 진압을 위해 제1공수여단을 데리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31] 이 체포 작전은 '작전 예보(Operation Forecast)'라는 코드명으로 진행되었다.[32] 사빌 보고서는 포드가 "과도한 물리적 폭력 사용으로 악명 높은" 공수여단을 작전에 투입한 것을 비판했다.[33] 시위 주최자이자 국회의원인 아이반 쿠퍼는 사전에 무장한 IRA 대원이 시위 근처에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토니 제러티는 일부 안내 요원이 IRA 대원일 가능성이 있다고 썼다.[34]

3. 사건 경과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시민권 운동 행진이 일어났다. 이 행진은 북아일랜드 민권 협회(NICRA)가 주최했으며, 공판 없이 구금을 허용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낙하산부대원들은 시위 행진 당일 아침 데리에 도착하여 위치를 점령했다.[35] 패트릭 맥렐런 준장이 작전 사령관이었으며 에브링턴 병영에서 명령을 내렸다. 그는 제1낙하산여단장 데렉 윌포드 중령에게 명령을 내렸고, 윌포드 중령은 체포 작전을 펼칠 중대를 지휘하는 테드 로든 소령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당시 시위는 불법이었지만, 약 1만 명이 항의 집회를 예정하고 시내 중심부의 길드홀 광장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광장 앞에서는 영국 육군 제1낙하산여단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시위대의 진입을 막았다. 주최측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시위대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지만, 일부 시위대는 바리케이드 앞에서 영국군 병사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고무탄, 최루탄, 물대포로 대응했다. 가스에 쫓긴 많은 군중이 사건 현장인 보그사이드 지역으로 도망쳤고, 이후 가능한 한 많은 시위 참가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보그사이드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총격이 발생하여 시민 14명이 사망(13명은 현장에서 사망, 1명은 4개월 반 후 사망)하고, 13명이 총격이나 차량에 치이는 등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은 무장하지 않았고, 5명은 뒤에서 사격당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건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영국 육군 측 주장과 피해자를 낸 시민 측 주장이 대립하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68]

3. 1. 시위 행진 시작

시위대는 크레건 주택 단지에 있는 비숍 필드에서 시내 중심부의 길드홀까지 행진하여 집회를 열 계획이었다. 오후 2시 45분경 행진이 시작되었고, 1만~1만 5천 명이 참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행진 중간에 합류했다.[36] 위저리 경의 조사위원회에서는 3천~5천 명이었다고 밝혔지만, 현재는 신뢰를 잃은 상태이다.[37][38][39][40][41]

행진은 윌리엄 스트리트를 따라 진행되었지만, 시내 중심부에 가까워지자 영국군 장벽에 의해 길이 막혔다. 주최측은 행진 경로를 로스빌 스트리트로 바꾸어 프리 데리 코너에서 집회를 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행진에서 이탈하여 장벽에 배치된 병사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고무탄, 최루탄, 물대포를 발사했다.[42] 병사와 청년들 사이의 이러한 충돌은 흔한 일이었고, 관찰자들은 폭동이 평소보다 더 격렬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43]

일부 군중은 윌리엄 스트리트를 내려다보는 폐허가 된 3층 건물을 점령한 낙하산부대원들을 발견하고 창문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오후 3시 55분경 이 낙하산부대원들이 발포했다. 민간인 데미언 도너히와 존 존스턴은 건물 맞은편 황무지에 서 있다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것이 최초의 총격이었다.[44] 병사들은 도너히가 검은색 원통형 물체를 들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45] 새빌 조사위원회는 총에 맞은 모든 사람들이 무장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46]

3. 2. 영국군의 발포와 민간인 학살

영국군이 장벽을 넘어 폭도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그사이드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본격적인 발포가 시작되었다. 오후 4시 7분, 낙하산부대원들은 도보와 장갑차를 이용하여 로스빌 스트리트와 보그사이드를 따라 사람들을 쫓았다. 맥렐런은 단 한 개 중대의 낙하산부대원만 도보로 장벽을 통과하고 로스빌 스트리트를 따라 사람들을 쫓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윌포드 중령은 이 명령을 어겼다. 이로 인해 폭도와 평화로운 행진 참가자 사이에 구분이 없어졌다.[47]

낙하산부대원들은 사람들을 때리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근거리에서 고무탄을 발사하고, 살해 위협을 가하고, 욕설을 퍼부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새빌 보고서는 병사들이 "사람들을 체포할 때 과도한 힘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 구금 중에 아무런 이유 없이 심각하게 폭행했다"고 동의했다.[48]

낙하산부대원 한 무리는 로스빌 스트리트를 가로지르는 돌무더기 바리케이드 앞 낮은 담벼락에 자리 잡았다. 바리케이드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일부는 병사들에게 돌을 던졌지만, 맞힐 만큼 가까이 있지는 않았다.[49] 병사들은 바리케이드에 있던 사람들에게 발포하여 6명을 사망하게 하고 7명을 부상입혔다.[50]

대규모 군중이 도망치거나 로스빌 플랫츠 주차장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 지역은 마치 안뜰처럼 삼면이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었다. 병사들은 발포하여 민간인 1명을 사망하게 하고 6명을 부상입혔다.[51] 이 사망자 재키 더디는 사제 에드워드 댈리 옆을 달리다가 등에 총을 맞았다.[52]

또 다른 무리가 글렌파다 공원 주차장으로 도망쳤는데, 이곳 역시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기서 병사들은 주차장 건너편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다.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최소 4명이 부상을 입었다.[53] 새빌 보고서는 적어도 한 명의 병사가 허리춤에서 총을 난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54] 낙하산부대원들은 주차장을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나갔다. 일부 병사들은 남서쪽 모퉁이로 나가 민간인 2명을 사살했다. 다른 병사들은 남동쪽 모퉁이로 나가 민간인 4명에게 총을 쏘아 2명을 사살했다.[55]

병사들이 보그사이드로 진입한 시각부터 마지막 민간인이 총에 맞은 시각까지 약 10분이 걸렸다.[56] 병사들은 100발 이상 발사했으며, 발포하기 전에 경고는 없었다.[9]

총에 맞은 사람들 중 일부는 현장에서 또는 인근 주택으로 옮겨진 후 민간 자원 봉사자들로부터 응급 처치를 받았다. 그런 다음 민간 차량이나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첫 구급차는 오후 4시 28분에 도착했다. 돌무더기 바리케이드에서 사망한 세 소년은 낙하산부대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목격자들은 낙하산부대원들이 시체를 손과 발로 들어 올려 마치 "고깃덩이"처럼 장갑차 뒤에 던져 넣었다고 증언했다. 새빌 보고서는 이것이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라고 동의하면서 낙하산부대원들은 "자신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것이 그들을 변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58]

3. 3. 희생자 명단

다음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이다.

이름나이사망 당시 상황
존 "재키" 더디17세로스빌 플랫츠의 주차장에서 병사들로부터 도망치다 총에 맞았다.[52] 총알은 어깨를 관통하여 가슴에 박혔다. 목격자들은 도망치는 그를 병사 한 명이 고의로 겨냥했다고 증언했다.[52]
마이클 켈리17세로스빌 거리의 잔해 바리케이드에 서 있다가 배에 총을 맞았다.[52]
휴 길모어17세잔해 바리케이드 근처에서 병사들로부터 도망치다 총에 맞았다.[52] 총알은 왼쪽 팔꿈치를 관통하여 가슴에 박혔다.[59]
윌리엄 내시19세잔해 바리케이드에서 가슴에 총을 맞았다.[52]
존 영17세잔해 바리케이드에서 얼굴에 총을 맞았는데, 윌리엄 내시를 돕기 위해 웅크리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61]
마이클 맥데이드20세잔해 바리케이드에서 얼굴에 총을 맞았는데, 윌리엄 내시를 돕기 위해 웅크리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61]
케빈 맥엘히니17세안전한 곳으로 기어가려고 하다 잔해 바리케이드 근처에서 뒤에서 총에 맞았다.[52]
제임스 "짐" 레이22세글렌파다 공원 안마당에서 병사들로부터 도망치다 등에 총을 맞았다. 땅에 쓰러져 있는 동안 다시 등에 총을 맞았다.[52]
윌리엄 매키니26세글렌파다 공원 안마당을 통해 도망치려다 등에 총을 맞았다.[62]
제라드 "게리" 매키니35세애비 공원에서 가슴에 총을 맞았다. 목격자들은 그가 병사를 보고 멈춰 서서 팔을 들고 "쏘지 마! 쏘지 마!"라고 외치다가 총에 맞았다고 말했다.[52]
제라드 "게리" 도나히17세애비 공원에서 제라드 매키니 뒤에 서 있다가 배에 총을 맞았다. 둘 다 같은 총알에 맞은 것으로 보인다.[52]
패트릭 도허티31세로스빌 플랫츠 전면에서 안전한 곳으로 기어가려다 뒤에서 총에 맞았다.[52]
버나드 "바니" 맥기건41세패트릭 도허티를 돕기 위해 은폐물에서 나왔을 때 머리 뒤쪽에 총을 맞았다. 그는 평화적인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흰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67][52]
존 존스턴59세윌리엄 거리에서 다리와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았다.[52] 사건 발생 4개월 반 후인 1972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




4. 사건 직후의 상황

희생자 가족들이 매년 추모 행진에서 들고 다닌 현수막과 십자가


사건 직후, 군인들을 제외한 모든 목격자들(행진 참가자, 지역 주민, 현장에 있던 영국과 아일랜드 기자들)은 군인들이 무장하지 않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거나, 도망치는 사람들과 부상자를 돕는 사람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총격이나 폭탄으로 부상당한 영국 군인은 없었고,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총알이나 못 박힌 폭탄도 발견되지 않았다.[57] 영국군의 사건 설명은 국방부가 개괄하고 레지널드 모들링 내무장관이 피의 일요일 다음 날 하원에서 반복했는데, 그 내용은 공수부대원들이 총기 사격과 폭탄 투척자들에게 반격 사격을 가했다는 것이었다.[70]

버나뎃 드블린은 의원(MP)이자 독립 아일랜드 사회주의 공화주의자로 미드 얼스터를 대표했는데, 모들링의 발언에 대해 그의 뺨을 때리고[71] 의회에서 잠시 제명되었다.[72] 그녀는 총격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하원 의장 셀윈 로이드가 의회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반복적으로 거부한 것에 격분했다.[73][74]

1973년 8월, 사망자들에 대한 사인 조사가 열렸다. 도시의 검시관 허버트 오닐은 "순수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83]

사건은 공판 없이 구금을 허용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발생했다. 당시 시위는 불법이었지만, 약 1만 명이 항의 집회를 예정하고 시내 중심부의 길드홀 광장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광장 앞에서 영국 육군 제1낙하산여단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시위대의 진입을 막았고, 주최측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시위대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지만 일부는 바리케이드 앞에서 영국군 병사들에게 투석을 시작했다. 병사들은 고무탄과 최루탄, 살수로 대응했고, 가스에 쫓긴 많은 군중이 사건 현장인 보그사이드 지역으로 도망쳤다. 이후 가능한 한 많은 시위 참가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병사들은 보그사이드 지역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총격이 발생하여 시민 14명이 사망(13명은 현장에서 사망, 1명은 4개월 반 후 사망), 13명이 총격이나 차량에 치이는 등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은 무장하지 않았고, 5명은 뒤에서 사격당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건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영국 육군 측 주장과 피해자를 낸 시민 측 주장이 대립하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68]

피의 일요일 사건 몇 달 후, 데릭 윌포드 중령의 지휘하에 있던 제1 공수여단(1 Para)은 벨파스트 샹킬(Shankill Road) 지역에서 얼스터 방위 협회 본부와 주택들을 급습하여 개신교 민간인 두 명이 사망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상을 입는 또 다른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은 현지 개신교도들의 격렬한 시위를 촉발했고, UDA는 영국군을 비난했다. 영국군의 얼스터 방위 연대 부대 하나는 제1 공수여단이 샹킬에서 철수할 때까지 임무 수행을 거부했다.[81] 1972년 말, 피의 일요일과 샹킬 사건에 연루된 병사들을 직접 지휘했던 윌포드는 대영 제국 훈장(OBE)을 받았다.[82]

4. 1. 북아일랜드 및 국제 사회의 반응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13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부상자 중 한 명도 나중에 사망했는데, 그의 가족은 그가 그날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믿고 있다.[69] 행진 참가자, 지역 주민, 현장에 있던 영국과 아일랜드 기자들을 포함한 모든 목격자들은 군인들이 무장하지 않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거나, 도망치는 사람들과 부상자를 돕는 사람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주장한다.[57]

1972년 2월 2일 수요일, 희생자 11명의 장례식에 수만 명이 참석했다.[83]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는 이날을 국가 애도일로 지정했고, 인구 대비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벌어졌다.[75] 아일랜드 공화국 전역의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 그리고 시나고그에서 추도식이 열렸고, 학교는 휴교했으며 대중교통은 운행을 중단했다. 많은 군중들이 더블린 메리언 광장에 있는 영국 대사관을 포위했고, 대사관 직원들은 대피해야 했다. 같은 날 수만 명의 시위대가 영국 대사관으로 행진했고, 13개의 상징적인 관이 입구 밖에 놓였다. 유니언잭이 불타고 건물은 돌과 휘발유 폭탄으로 공격받았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가르다이는 군중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건물은 결국 불타 버렸다.[76] 이 사건으로 영국-아일랜드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고, 아일랜드 외무장관 패트릭 힐러리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가서 북아일랜드 분쟁에 유엔 평화유지군의 개입을 요구했다.[77] 1970년대 IRA 정보 수집 부서장을 지낸 키어런 코너웨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더블린의 IRA 남부 사령부가 영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아일랜드 남부 시민으로부터 200건의 지원 신청을 받았다고 밝혔다.[78]

당시 하원 야당 대표였던 해롤드 윌슨은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통일 아일랜드라고 믿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79] 당시 스토몬트 내무장관이었던 윌리엄 크레이그는 데리의 서쪽 강둑을 아일랜드 공화국에 할양하는 것을 제안했다.[80]

1972년 2월 22일, 공식 IRA는 올더샷 군영에 차량 폭탄을 터뜨려 제16 공수여단의 본부를 공격하여 보조 직원 7명을 살해함으로써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보복을 시도했다.[83]

4. 2. 영국 정부의 대응

영국 국방부는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해 공수부대원들이 총격범과 폭탄 투척범들에게 반격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레지널드 모들링 내무장관은 사건 다음 날 하원에서 이 내용을 반복했다.[70] 그러나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은 군인들이 무장하지 않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고 주장하며, 총격이나 폭탄으로 부상당한 영국 군인은 없었고,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57]

미드 얼스터를 대표하는 의원이자 독립 아일랜드 사회주의 공화주의자인 버나뎃 드블린은 모들링의 발언에 항의하며 그의 뺨을 때렸고,[71] 의회에서 잠시 제명되었다.[72] 그녀는 총격 사건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원 의장 셀윈 로이드가 발언 기회를 주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73][74]

1972년 2월 22일, 공식 IRA는 올더샷 군영에 차량 폭탄을 터뜨려 제16 공수여단 본부를 공격, 보조 직원 7명을 살해하여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보복을 시도했다.[83]

1973년 8월, 사망자들에 대한 사인 조사가 열렸다. 도시의 검시관 허버트 오닐은 "순수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고 성명을 발표했다.[83]

4. 3. 샹킬 총격 사건

피의 일요일 사건 몇 달 후, 데릭 윌포드 중령의 지휘하에 있던 제1 공수여단(1 Para)은 또 다른 논란이 된 총격 사건에 연루되었다.[81] 1972년 9월 7일, 공수부대원들은 벨파스트 샹킬(Shankill Road) 지역에 있는 얼스터 방위 협회 본부와 주택들을 급습했다. 공수부대원들은 로열리스트 무장세력의 사격에 대한 반격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개신교 민간인 두 명이 사망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현지 개신교도들의 격렬한 시위를 촉발했고, UDA는 "얼스터는 제1 공수여단처럼 잔인한 사디스트들과 노골적인 거짓말쟁이들을 본 적이 없다. 이 총을 든 깡패들을 거리에서 치워야 한다"고 선언했다. 영국군의 얼스터 방위 연대 부대 하나는 제1 공수여단이 샹킬에서 철수할 때까지 임무 수행을 거부했다.[81]

1972년 말, 피의 일요일과 샹킬 사건에 연루된 병사들을 직접 지휘했던 윌포드는 대영 제국 훈장(OBE)을 받았다.[82]

5. 진상 규명 노력

피의 일요일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은 사건 직후부터 2010년까지 이어졌다.


  • 초기 조사 (위저리 재판): 사건 직후 존 위저리 경 주도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영국군을 옹호하는 결론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데즈 세제 광고를 패러디한 "위저리는 더 하얗게 씻어낸다"는 슬로건은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불신을 보여준다.
  • 새로운 조사 요구: 1992년 존 메이저 총리는 희생자들이 무죄라고 언급했지만, 토니 블레어 총리 측근은 위저리 보고서를 "완전하고 철저한 희석화"라고 비판하며 새로운 조사를 요구했다.
  • 사빌 조사: 1998년 토니 블레어 총리는 세빌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적인 사빌 조사를 시작했다. 이 조사는 길드홀에서 2000년 3월부터 2004년 11월까지 진행되었으며, 900명 이상의 증인 심문과 방대한 자료 검토를 통해 영국 사법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조사가 되었다. 조사 비용은 12년에 걸쳐 1.95억파운드에 달했다.
  • 조사 방해 의혹: 국방부는 1,000장이 넘는 육군 사진과 헬리콥터 영상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고, 사건 당시 사용된 총기들을 분실하여 조사를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 전직 군인들의 증언: 마이크 잭슨 장군은 "무고한 사람들이 총에 맞았다"고 인정했으며, 한 전직 공수부대원은 상관이 "몇 명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일부 병사들이 금지된 덤덤탄을 사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 사빌 조사 보고서 (2010): 2010년 6월 15일 발표된 사빌 조사 보고서는 영국군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
  • 주요 내용:
  • 제1공수여단 병사들이 위협적이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 영국 공수부대는 통제력을 상실하고 도망치거나 부상자를 돕는 민간인에게 발포했다.
  • 병사들은 경고 없이 발포했으며, 희생자들은 무장하지 않았고 폭탄을 투척하지 않았다.
  • 일부 병사들은 공포와 무모함으로 발포했고, 다른 병사들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향해 의도적으로 발포했다.
  • 병사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 IRA 관련: 공식 IRA 저격수가 영국군에게 발포했으나 빗나갔고, 마틴 맥기니스가 톰슨 기관단총으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발포 여부는 불확실하다고 결론지었다.
  • 책임자:

관련 인물조사 결과
데렉 윌포드 중령상관 명령 불복종
테드 로든 소령위협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발포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함
마이크 잭슨 대위"로든 교전 목록" 작성에 대한 음모 행위 무혐의
로버트 포드 소장제1공수여단 선택 및 윌포드 임명에 대한 우려
패트 맥렐런 준장어떠한 잘못도 없음
마이클 스틸 소령폭도와 평화로운 행진 참가자 구분 불가 인지
"F 병사"로 불리는 상병5건의 살인에 대한 책임
모리스 터그웰 대령과 콜린 월리스(육군 언론 담당관) 정보 장교대중을 속이려는 고의적인 시도가 아니라 부정확한 정보를 받았기 때문


  • 영국 정부의 사과: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조사 결과를 보고하며 "피의 일요일에 일어난 일은 정당하지 않았고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잘못된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영국 정부를 대표하여 공식 사과했다.[117]

5. 1. 위저리 재판 (Widgery Inquiry)

피의 일요일 사건 이틀 후, 영국 의회는 총격 사건에 대한 재판 결의안을 채택했고, 총리는 대법원장 존 위저리 경에게 조사를 맡겼다. 위저리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으로 많은 증인들이 보이콧할 의향을 밝혔지만, 결국 많은 이들이 참여하게 되었다.[83]

10주 만에(4월 10일) 완성되어 11주 만에(4월 19일) 발표된 위저리의 보고서는 신속하게 작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일 사건에 대한 영국군의 설명을 지지했다. 보고서는 군인들이 총격범과 폭탄 투척범에게 발포했다고 밝혔다.[85] 보고서에는 "사망자나 부상자 중 총기나 폭탄을 다루고 있던 중 총에 맞았다는 것이 증명된 사람은 없다. 일부는 그러한 행위에 대한 공모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다른 일부는 무기를 발사하거나 폭탄을 다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고 명시되어 있다.[85]

재판에 제출된 증거 중에는 발사 무기의 납 잔류물을 식별하는 데 사용된 파라핀 검사 결과와 사망자 중 한 명의 시신에서 못 폭탄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자 11명의 옷에서 폭발물 흔적을 검사한 결과 모두 음성으로 나타났고, 나머지 한 명의 옷은 이미 세탁되어 검사할 수 없었다. 일부 희생자에게서 발견된 총기 잔류물은 시신을 이동시킨 군인들과의 접촉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한 명(제임스 레이)의 손에서 발견된 납 잔류물은 그의 직업이 납 기반 땜납을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위저리는 행진 주최자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고, "불법 행진을 주최한 자들이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사망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85]

위저리는 공수부대원들이 "보그사이드에 있는 IRA 무장세력을 색출하기 위해" 또는 영국군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처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85] 세빌 조사에서도 기밀 문서를 조사했지만 그러한 계획에 대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물론 비밀리에 계획이 세워지고 문서에서 제외될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86]

사건의 대부분의 목격자들은 보고서의 결론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를 희석화로 간주했다. 데리의 벽에 쓰인 "위저리는 더 하얗게 씻어낸다"는 슬로건 – 당시 데즈 세제 광고를 패러디한 것 – 은 보고서에 대한 많은 민족주의자들의 견해를 잘 보여준다.[87]

1992년, 영국 총리 존 메이저는 새로운 공개 조사를 요청한 존 휴먼에게 "정부는 1974년에 '피의 일요일'에 사망한 사람들은 총기나 폭발물을 다루고 있던 중 총에 맞았다는 주장에 대해 무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88] 메이저의 뒤를 이은 토니 블레어의 최측근 조나단 파월은 나중에 위저리 보고서를 "완전하고 철저한 희석화"라고 묘사했다.[89]

5. 2. 사빌 조사 (Saville Inquiry)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후반기에 토니 블레어 총리는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공개 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세빌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조사는 1998년 4월에 시작되었다.[90] 다른 판사들로는 호주 고등법원의 전 대법관이자 원주민 문제를 다루었던 존 투히 (개인적인 이유로 2000년 조사에서 물러난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워드 소머스 경을 대체), 그리고 뉴브런즈윅의 전 수석 대법관이자 캐나다 사법평의회 회원인 윌리엄 호이트가 있었다. 이 조사는 2000년 3월부터 2004년 11월까지 더리의 길드홀에서 증언을 청취했다.[90]

세빌 조사는 위저리 위원회보다 훨씬 포괄적이었으며, 지역 주민, 군인, 언론인, 정치인 등 광범위한 증인들을 심문하고 방대한 양의 사진과 영상을 검토했다. 세빌 경은 위저리 보고서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으며, 이것이 위저리 위원회가 아닌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사법 조사임을 강조했다.[91]

데렉 윌포드 대령은 조사를 실시하기로 한 결정에 분노를 표했고 피의 일요일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92] 2년 후인 2000년, 윌포드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한 점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의적인 악의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전쟁 행위였다."라고 말했다.[93] 2007년, 피의 일요일 당시 제1 공수여단의 부관이었던 마이크 잭슨 장군(당시 대위)은 "무고한 사람들이 총에 맞았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94] 이는 그가 30년 이상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것과 대조적이다.[95]

한 전직 공수부대원은 피의 일요일 전날 중위가 "이 녀석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자. 내일 몇 명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96][97] 그는 무기를 소지한 사람을 보지 못했고 폭발음도 듣지 못했으며, 일부 동료 병사들은 허세나 좌절감으로 사격을 했다고 말했다.[97] 이 공수부대원은 여러 병사들이 금지된 덤덤탄을 "개인적으로 지참한 탄약"을 사용했으며, 한 병사는 "군중에게 덤덤탄 10발을 발사했지만 공식적인 할당량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총을 한 발도 쏘지 않았다고 말해 넘어갔다"고 말했다. 또한 이 공수부대원은 위저리 조사 당시 제출한 원래 진술서가 찢겨졌고 "사실과 전혀 관계없는" 진술서로 대체되었다고 말했다.[98]

많은 관찰자들은 국방부(MoD)가 조사를 방해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한다.[99] 1,000장이 넘는 육군 사진과 원본 육군 헬리콥터 영상 자료가 제공되지 않았다. 또한, 조사에서 증거가 될 수 있었던 피의 일요일 당시 병사들이 사용한 총기가 국방부에서 분실되었다.[100][101] 국방부는 모든 총기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방해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시에라리온베이루트와 같은 여러 장소에서 일부 총기가 회수되었다.[102]

조사가 결과를 작성하기 위해 휴정할 당시, 7년 동안 900명이 넘는 증인들을 심문했으며, 이는 영국 사법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조사였다.[101] 또한 가장 길고 비용이 많이 드는 조사였으며, 12년이 걸렸고 £195백만의 비용이 들었다.[103] 조사는 2009년 말에 보고서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2010년 총선 이후로 연기되었다.[104]

2007년 1월 28일 더리에서 열린 제35회 피의 일요일 추모 행진


2010년 6월 15일에 사빌 조사 보고서[105]가 발표되었다.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공수여단 병사들의 발포로 13명이 사망하고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들 중 누구도 사망이나 중상을 입힐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106]
  • 영국 공수부대는 "통제력을 상실"하여 도망치는 민간인과 부상자를 돕던 사람들을 향해 발포했다.[108]
  • 병사들은 민간인들에게 발포 의사를 경고하지 않았다.[107]
  • 병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보고서는 희생자들이 무장하지 않았으며 못 박힌 폭탄이나 페트로 폭탄이 투척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108]
  • 일부 병사들은 공포와 무모함 때문에 발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고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했다.[109]
  • 병사들이 자신의 행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108]


조사는 공식 IRA 저격수가 윌리엄 스트리트 건너편 장로교회에 있던 영국 병사들을 향해 한 발을 발사했지만 빗나갔다고 결론지었다. 조사는 이 저격수의 보복 발포 주장을 기각하고, 그와 다른 공식 IRA 대원은 이미 자리에 있었고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단순히 발포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111] 또한, 공식 IRA 대원이 로스빌 아파트 근처 박공벽 뒤에서 영국 장갑차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지만, 병사들이 이를 알아차린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IRA 대원은 민간인들이 총에 맞는 것을 본 후 화가 나서 세 발을 발사했다고 하며, 에드워드 데일리 신부와 다른 사람들에게 목격되었고, 그들은 그에게 발포를 멈추라고 소리쳤다.[112]

마틴 맥기니스는 임시 IRA 데리 여단의 2인자였으며 행진에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패디 워드는 1972년 1월 IRA 청년부대인 피아나 에이렌의 데리 지역 지도자였다고 주장했지만, 맥기니스는 이 주장을 "환상"이라고 일축했다. 조사는 맥기니스가 톰슨 기관단총으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가 발포했는지 여부를 밝힐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113]

피의 일요일에 책임자였던 병사들에 관한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물직책 및 조사 결과
데렉 윌포드 중령제1공수여단 지휘관이자 체포 작전의 직접 책임자. 상관의 명령을 고의로 불복종한 것으로 판명.[82]
테드 로든 소령지원중대 지휘관. 비행위로 무혐의 판정을 받았으나, "자신의 병사들이 [...] 위협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발포하고 있거나 발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거나 깨달았어야 했다"고 밝힘.[82]
마이크 잭슨 대위피의 일요일 제1공수여단 부관.[114] "로든 교전 목록" 작성에 대해 음모 행위로 무혐의 판정.[82]
로버트 포드 소장북아일랜드 육군 지휘관. 어떤 잘못도 없다고 판명되었지만, 제1공수여단을 선택하고 특히 윌포드를 폭동 진압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우려스러운 것으로 판명.[82]
패트 맥렐런 준장당일 전체 작전 지휘관. 어떠한 잘못도 없다고 판명.[82]
마이클 스틸 소령작전실에 맥렐런과 함께 있었고 당일 명령 전달 담당. 조사는 스틸이 폭도와 평화로운 행진 참가자 사이에 더 이상 분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받아들임.[115]
"F 병사"로 불리는 상병피의 일요일 살인 사건 5건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명.[82]
모리스 터그웰 대령과 콜린 월리스(육군 언론 담당관)정보 장교. 비행위로 무혐의 판정.[116]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하원에서 사빌 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피의 일요일에 일어난 일은 정당하지 않았고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잘못된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117] 그는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함으로써 영국 육군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118] 그는 사망한 모든 사람들이 살해당했을 때 무장하지 않았고 영국 병사가 민간인들에게 첫 발포를 했음을 인정했다. 캐머런은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사과하면서 "깊이 유감"이라고 말했다.[119]

5. 3. 사빌 조사 보고서 (2010)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후반기에 토니 블레어 총리는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공개 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세빌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조사는 1998년 4월에 시작되었다.[90] 다른 판사들로는 호주 고등법원의 전 대법관이자 원주민 문제를 다루었던 존 투히 (개인적인 이유로 2000년 조사에서 물러난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워드 소머스 경을 대체), 그리고 뉴브런즈윅의 전 수석 대법관이자 캐나다 사법평의회 회원인 윌리엄 호이트가 있었다. 이 조사는 2000년 3월부터 2004년 11월까지 더리의 길드홀에서 증언을 청취했다.[90] 세빌 조사는 위저리 위원회보다 훨씬 포괄적이었으며, 지역 주민, 군인, 언론인, 정치인 등 광범위한 증인들을 심문하고 방대한 양의 사진과 영상을 검토했다. 세빌 경은 위저리 보고서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으며, 이것이 위저리 위원회가 아닌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사법 조사임을 강조했다.[91]

2010년 6월 15일에 사빌 조사 보고서[105]가 발표되었다. 보고서는 "제1공수여단 병사들의 발포로 피의 일요일에 13명이 사망하고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들 중 누구도 사망이나 중상을 입힐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지었다.[106] 보고서는 영국 공수부대가 "통제력을 상실"하여 도망치는 민간인과 부상자를 돕던 사람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밝혔다.[108] 병사들은 민간인들에게 발포 의사를 경고하지 않았다.[107] 병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보고서는 희생자들이 무장하지 않았으며 못 박힌 폭탄이나 페트로 폭탄이 투척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108] "그들 중 누구도 못 박힌 폭탄이나 페트로 폭탄 투척자의 공격이나 위협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발포하지 않았다."[9] 일부 병사들은 공포와 무모함 때문에 발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고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109] 보고서는 병사들이 자신의 행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밝혔다.[108]

조사는 아파트 건물에 위치한 공식 IRA 저격수가 윌리엄 스트리트 건너편 장로교회에 있던 영국 병사들을 향해 한 발을 발사했다고 결론지었다. 총알은 병사들을 빗맞히고 배수관에 맞았다. 조사는 이 지역에서 영국 병사들이 데미언 도나기와 존 존스턴을 사살한 ''직후''에 발사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사는 저격수의 보복 발포 주장을 기각하고, 그와 다른 공식 IRA 대원은 이미 자리에 있었고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단순히 발포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111]

마틴 맥기니스, 신 페인의 고위 간부이자 후에 북아일랜드 부수상이 된 인물은 자신의 증언에서 자신이 임시 IRA 데리 여단의 2인자였으며 행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90] 조사는 그날 맥기니스의 동선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아마도 톰슨 기관단총으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가 발포했는지 여부를 밝힐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밝히면서 "그가 병사들에게 발포할 어떤 정당성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신한다"라고 결론지었다.[113]

피의 일요일에 책임자였던 병사들에 관한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관련 인물조사 결과
데렉 윌포드 중령제1공수여단 지휘관이자 체포 작전의 직접 책임자. 상관인 패트릭 맥렐런 준장의 명령을 고의로 불복종하여 지원중대를 보그사이드로 파병했고(맥렐런에게 알리지 않고) 판명되었다.[82]
테드 로든 소령윌포드 중령의 명령을 받은 지원중대 지휘관. 보고서는 로든이 "자신의 병사들이 [...] 위협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발포하고 있거나 발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거나 깨달았어야 했다"고 밝혔다.[82]
마이크 잭슨 대위피의 일요일 제1공수여단 부관.[114] "로든 교전 목록"을 작성한 것에 대해 음모 행위로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로버트 포드 소장북아일랜드 육군 지휘관. 제1공수여단을 선택하고 특히 윌포드를 폭동 진압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제1공수여단은 과도한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부대였기 때문에 육군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긴장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것으로 판명되었다.[82]
패트 맥렐런 준장당일 전체 작전 지휘관. 어떠한 잘못도 없다고 판명되었다.[82]
마이클 스틸 소령작전실에 맥렐런과 함께 있었고 당일 명령 전달을 담당했다. 조사는 스틸이 폭도와 평화로운 행진 참가자 사이에 더 이상 분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115]
"F 병사"로 불리는 상병피의 일요일 살인 사건 5건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82]
모리스 터그웰 대령과 콜린 월리스(육군 언론 담당관) 정보 장교조사는 터그웰과 월리스가 언론을 통해 공개한 정보가 대중을 속이려는 고의적인 시도가 아니라 부정확한 정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116]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하원에서 사빌 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사망한 모든 사람들이 살해당했을 때 무장하지 않았고 영국 병사가 민간인들에게 첫 발포를 했음을 인정했다. 또한 "일어난 일은 결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캐머런은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사과하면서 "깊이 유감"이라고 말했다.[119] 2010년 6월 앵거스 리드 여론조사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61%와 북아일랜드인의 70%가 캐머런의 사과에 동의했다.[120]

6. 기소 및 재판

2010년 사빌 조사 보고서가 발표된 후, 북아일랜드 경찰청(PSNI)은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새로운 수사를 시작했다. 이 수사를 통해 여러 명의 영국군 병사들이 기소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솔저 F"의 기소 및 재판 과정에 대해서는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6. 1. "솔저 F" 기소 및 재판 과정

북아일랜드 공공기소청(Public Prosecution Service for Northern Ireland)은 2019년 3월, 제임스 레이(James Wray)와 윌리엄 매키니(William McKinney)가 등에 총을 맞아 사망한 사건과 관련하여 "솔저 F"(Soldier F)를 살인 혐의로 기소할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발표했다. "솔저 F"는 또한 4건의 살인 미수(attempted murder) 혐의도 받았다.[123][124][125] 사빌 조사는 "솔저 F"가 마이클 켈리(Michael Kelly), 패트릭 도허티(Patrick Doherty), 바니 맥기건(Barney McGuigan)도 살해했다고 결론지었으나, 조사 증거는 기소(prosecution)에 부적합했다. 관련 총격을 가한 병사를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사망한 "솔저 F"의 공동 피고인인 "솔저 G"의 진술뿐이었다.[126]

피의 일요일 희생자 유족들은 살인 사건 중 일부에 대해 단 한 명의 병사만 재판을 받게 된 것에 유감을 표명했다.[127] 2020년 9월, 다른 병사들에 대한 기소는 없을 것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128] 희생자 유족들은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솔저 F"는 일부 울스터 로열리스트[129]와 북아일랜드 참전 용사를 위한 정의(Justice for Northern Ireland Veterans) 단체의 지지를 받았다.[130] 민주연합당(Democratic Unionist Party, DUP)은 전직 영국 군인들에게 기소 면책(legal immunity|immunity from prosecution)을 부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울스터 유니오니스트당(Ulster Unionist Party, UUP) 대표이자 전직 군인인 더그 비티(Doug Beattie)는 군인들이 "법을 어겼다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131]

2021년 7월, 공공기소청은 1972년 진술이 증거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솔저 F"에 대한 기소를 중단했다.[11] 2021년 7월 13일, 사회민주노동당(Social Democratic and Labour Party, SDLP)의 콜럼 이스트우드(Colum Eastwood) 국회의원은 국회 특권(parliamentary privilege)을 이용하여 "솔저 F"의 이름을 공개했다.[132][133] 7월 17일, 빌리지(잡지)(Village (magazine)|''Village'' magazine)는 "솔저 F"의 신원과 학살 당시 그의 사진을 일부 공개했다.[134]

2022년 3월, 고등법원은 윌리엄 매키니 유족의 항소에 따라 "솔저 F"에 대한 기소 중단 결정을 뒤집고 공공기소청에 사건 재검토를 명령했다.[135] 이후 공공기소청은 고등법원의 결정에 대해 영국 대법원(Supreme Court of the United Kingdom)에 항소했으나,[136] 9월 항소 허가가 거부되어 기소를 진행해야 했다.[12] 2022년 10월, "솔저 F"에 대한 구속 전 심리가 2023년 1월 16일에 재개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137] 2023년 1월 24일, "솔저 F" 사건이 데리 지방 법원(Derry Magistrate's Court)에서 재개되었고,[138] 휴정 후 2023년 5월 26일에 다시 재개되었다.[139] 2023년 8월 25일, 테드 매길(Ted Magill) 판사는 위저리 보고서(Widgery Report)에 제출된 "솔저 F"를 연루시키는 5개의 진술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140]

2023년 12월, 재판 진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증거 청문회가 열렸다. 매길 판사는 "솔저 F"가 벨파스트 크라운 법원(Belfast Crown Court)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판결했다.[141] 이 군인은 2024년 6월 14일 처음으로 법정에 출두했다.[142] 2024년 12월, "솔저 F"는 살인 2건과 살인 미수 5건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143]

7. 사건의 영향과 의의

1969년 북아일랜드 폭동 당시 북아일랜드에 처음 배치되었을 때, 영국군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중립적인 세력으로 환영받았다.[144] 그러나 피의 일요일 이후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영국군을 적이라고 여기게 되었으며, 젊은 민족주의자들은 무장 공화파 단체에 가담하게 되었다. 공식 IRA공식 신 페인마르크스주의로 이탈하면서, 급진적인 젊은이들은 임시 IRA를 지지하기 시작했다.[145]

이후 20년 동안, 임시 IRA와 아일랜드 민족해방군(INLA) 등은 무장 투쟁을 강화했다. 얼스터 방위협회(UDA), 얼스터 의용군(UVF) 등 경쟁하는 준군사 조직들이 나타나면서, '대혼란'이라 불리는 갈등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146]

1979년 임시 IRA는 워렌포인트 매복 공격에서 영국군 18명을 살해했다. 같은 날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도 암살되었다. 공화파들은 "잊지 않겠다, 13명이 죽었고 우리는 18명과 마운트배튼을 얻었다"라는 낙서를 남기며, 이 공격을 피의 일요일에 대한 보복으로 묘사했다.[147]

밸리미나에 게양된 공수여단 깃발과 영국 국기


2012년 벨파스트 출신의 현역 영국군인이 피의 일요일 학살에 대한 종파적인 비난과 공수여단 현수막을 온라인에 게시하여 증오심 선동 혐의로 기소되었다.[148]

최근 일부 로열리스트들은 피의 일요일 기념일 무렵에 공수여단 깃발을 게양했다. 2013년 1월, 데리의 로열리스트 지역에서 여러 개의 공수여단 깃발이 게양되어, 민족주의 정치인들과 피의 일요일 희생자 유족들, 국방부의 비난을 받았다.[149][150] 이후 깃발들은 영국 국기로 교체되었다.[151] 2014년, 로열리스트들은 쿡스타운성 패트릭의 날 퍼레이드 길 근처에 깃발을 게양했다.[152]

더리에 있는 피의 일요일을 기념하는 벽화


피의 일요일 사건은 여러 예술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 폴 매카트니는 사건 발생 이틀 후 "아일랜드를 아일랜드인들에게 돌려줘"를 발매했지만, BBC에서 금지되었다.[153][154]
  • 1972년 존 레논은 ''뉴욕에서의 어느 날'' 앨범에 "피의 일요일"과 "아일랜드의 행운"을 수록했다. 레논은 뉴욕 시위에서 희생자와 유족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155]
  • 토마스 킨셀라는 1972년 시 ''정육점의 13인''을 통해 위저리 조사와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156]
  • 블랙 사바스기저 버틀러1973년 앨범 같은 이름의 "사바스 블러디 사바스" 가사를 썼다.[157]
  • 로이 하퍼는 ''라이프마스크'' 앨범의 "올 아일랜드"로 군대를 비판했다.[158]
  • 브라이언 프릴의 1973년 희곡 ''도시의 자유''는 세 명의 민간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룬다.[160]
  • 시머스 히니는 ''사상자'' (1981년 ''필드 워크''에 발표)에서 친구의 죽음에 대해 영국을 비판했다.[159]
  • U21983년 항의 노래 "피의 일요일"에서 이 사건을 기념했다.[160]
  • 크리스티 무어의 "마인드스 락드 셧"(''그라피티 텅'' 앨범)은 사망한 민간인들의 이름을 언급한다.[161]
  • 2002년 ''피의 일요일'' (제임스 네스빗 주연)과 지미 맥거번의 ''일요일''이 제작되었다.[160]
  • 크루아칸은 2002년 앨범 ''민속 전승''의 "피의 일요일"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162]
  • 윌리 도허티는 "1972년 1월 30일"을 포함하여 북아일랜드 문제를 다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160]
  • 2005년 ''피의 일요일: 사빌 조사의 장면''이 런던에서 개막하여 더리와 더블린으로 순회 공연을 했다.[163][164]
  • 2010년 T with the Maggies는 "돔나흐 나 폴라"(아일랜드어로 "피의 일요일")를 ''T with the Maggies'' 앨범에 발표했다.[166]

7. 1. 북아일랜드 분쟁에 미친 영향

1969년 북아일랜드 폭동 당시 북아일랜드에 처음 배치되었을 때, 영국군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개신교 로열리스트 폭도들, 북아일랜드 경찰(RUC), 그리고 울스터 특별경찰대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중립적인 세력으로 환영받았다.[144] 그러나 피의 일요일 이후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영국군을 더 이상 보호자로 보지 않고 적이라고 여기게 되었으며, 젊은 민족주의자들은 무장 공화파 단체에 점점 더 끌리게 되었다. 공식 IRA공식 신 페인이 주류 아일랜드 공화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이탈함에 따라, 급진화되고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은 임시 IRA를 지지하기 시작했다.[145]

그 후 20년 동안, 임시 IRA와 아일랜드 민족해방군(INLA)과 같은 다른 소규모 공화파 단체들은 국가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에 대한 무장 투쟁을 강화했다. 공화파와 로열리스트 사회 모두에서(로열리스트 측에서는 얼스터 방위협회(UDA), 얼스터 의용군(UVF) 등) 경쟁하는 준군사 조직들이 나타나면서, 흔히 '대혼란'이라 불리는 이 갈등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146]

1979년, 임시 IRA는 워렌포인트 매복 공격에서 영국군 18명(대부분 공수부대원)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IRA가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을 암살한 날과 같은 날 발생했다. 공화파들은 이 공격을 피의 일요일에 대한 늦은 보복으로 묘사하며 "잊지 않겠다, 13명이 죽었고 우리는 18명과 마운트배튼을 얻었다"라고 적힌 낙서를 남겼다.[147]

2012년, 벨파스트 출신의 현역 영국군인 한 명이 온라인 소셜 미디어를 통해 피의 일요일 학살에 대한 종파적인 비난과 공수여단의 현수막을 게시한 혐의로 증오심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었다.[148]

최근 몇 년 동안, 일부 로열리스트들은 피의 일요일 기념일 무렵에 공수여단 깃발을 게양했다. 2013년 1월, 연례 피의 일요일 추모 행진 직전에 데리의 로열리스트 지역에서 여러 개의 공수여단 깃발이 게양되었다. 이 깃발 게양은 민족주의 정치인들과 피의 일요일 희생자들의 유족들에 의해 규탄되었고,[149] 국방부도 깃발 게양을 비난했다.[150] 이후 깃발들은 영국 국기로 교체되었다.[151] 그 해 후반, 공수여단 깃발은 북아일랜드의 다른 지역에서 다른 로열리스트 깃발과 함께 게양되었다. 2014년, 로열리스트들은 쿡스타운성 패트릭의 날 퍼레이드 길 근처에 깃발을 게양했다.[152]

7. 2. 예술적 반응



피의 일요일 사건은 여러 예술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 폴 매카트니는 사건 발생 이틀 후 "아일랜드를 아일랜드인들에게 돌려줘"라는 노래를 녹음하여 발매했지만, BBC에서 금지되었다.[153][154]
  • 1972년 존 레논은 앨범 ''뉴욕에서의 어느 날''에 "피의 일요일"과 "아일랜드의 행운"을 수록했다. 레논은 뉴욕 시위에서 희생자와 유족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155]
  • 아일랜드 시인 토마스 킨셀라는 1972년 시 ''정육점의 13인''을 통해 위저리 조사와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156]
  • 블랙 사바스기저 버틀러는 1973년 앨범 같은 이름에 수록된 노래 "사바스 블러디 사바스"의 가사를 썼다.[157]
  • 로이 하퍼는 앨범 ''라이프마스크''에 수록된 노래 "올 아일랜드"를 통해 군대를 비판했다.[158]
  • 브라이언 프릴의 1973년 희곡 ''도시의 자유''는 세 명의 민간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룬다.[160]
  • 아일랜드 시인 시머스 히니는 ''사상자'' (1981년 ''필드 워크''에 발표)에서 친구의 죽음에 대해 영국을 비판했다.[159]
  • 아일랜드 록 밴드 U2는 1983년 항의 노래 "피의 일요일"에서 이 사건을 기념했다.[160]
  • 크리스티 무어의 노래 "마인드스 락드 셧"은 ''그라피티 텅'' 앨범에 수록되어 있으며, 사망한 민간인들의 이름을 언급한다.[161]
  • 2002년에는 두 편의 텔레비전 영화 ''피의 일요일'' (제임스 네스빗 주연)과 지미 맥거번의 ''일요일''이 제작되었다.[160]
  • 켈틱 메탈 밴드 크루아칸은 2002년 앨범 ''민속 전승''의 노래 "피의 일요일"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162]
  • 더리 출신의 예술가 윌리 도허티는 "1972년 1월 30일"을 포함하여 북아일랜드 문제를 다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160]
  • 2005년, 사빌 조사를 바탕으로 한 각색극 ''피의 일요일: 사빌 조사의 장면''이 런던에서 개막하여 더리와 더블린으로 순회 공연을 했다.[163][164]
  • 2010년, T with the Maggies는 메어드 니 마오나이, 모야 브레넌, 트리오나 니 도흐널, 메이그레드 니 도흐널이 작곡한 "돔나흐 나 폴라"(아일랜드어로 "피의 일요일")를 앨범 ''T with the Maggies''에 발표했다.[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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