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겐타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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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시 겐타로는 1913년 도쿄에서 태어나 2004년 사망한 일본의 역사학자이다.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반 파시즘론을 전개했으며, 도쿄대 문학부 교수, 총장을 역임했다. 1968년 도쿄대 분쟁 당시 전공투 학생들에게 감금되었고, 1983년 자유민주당 소속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근대 독일사 전문가로, 독일 외교사 및 혁명사 연구에 기여했으며,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독일 근세사 연구』, 『바이마르 공화국』 등이 있으며,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공저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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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겐타로 (역사학자) | |
---|---|
기본 정보 | |
이름 | 하야시 겐타로 |
출생 | 1913년 1월 2일 |
사망 | 2004년 8월 10일 |
사망 장소 | 도쿄도 |
국적 | 일본 |
학문 분야 | |
주요 관심사 | 서양사학(근대 독일사) |
출신 학교 | 도쿄 제국대학 |
직장 | 제일고등학교, 도쿄 대학 |
2. 경력
도쿄도에서 태어나 도쿄 부립 제6중학교(현 도쿄도립 신주쿠 고등학교), 구제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3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였다. 도쿄 대학 문학부 조교수를 거쳐 1954년 도쿄대 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구제일고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섰으며, 전쟁 중에는 반(反) 파시즘론을 전개하였다. 1944년 징병되어 대일본제국 해군으로 복무하였다. 전후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향하여 마르크스주의나 진보적 문화인을 비판해 좌파에서는 강경파로 불렸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제20대 도쿄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1983년 자유민주당 비례대표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일본 육영회 회장, 국제교류기금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2. 1. 출생과 학창 시절
도쿄도에서 태어났다. 도쿄 부립 제6중학교(현 도쿄도립 신주쿠 고등학교), 구제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3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였다.[3]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에서는 이마이 토시키에게 사사했다. 구제 제일고등학교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좌익 학생이었다.2. 2. 2차 대전 전후 활동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조교수를 거쳐, 1954년 도쿄대 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구제일고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서, 전쟁 중에는 반(反) 파시즘론을 전개하였다.[1]1943년 『독일 근세사 연구』를 출판해, 근대 독일의 정치・사회의 특징을 설명했다.
1944년 31세에 징병되어 대일본제국 해군으로 복무했다. 전후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향하였고, 그 후의 평론 활동은 마르크스주의나 진보적 문화인을 비판해서, 좌파에서는 강경파라고 칭해졌다.
고교 교과서의 베스트셀러가 된 「고교의 세계사」를 공저한 사람이기도 하다.
1968년 도쿄대 분쟁에서 문학부장으로서 전공투 학생들에게 8일간 감금되었다. 학생 측과 단체 교섭을 실시했지만, 학생들의 요구를 전부 거부해, 강직한 자세로 일관했다. (하야시 겐타로 감금 사건).[6]
1973년부터 1977년까지 가토 이치로 학장을 이어 제20대 도쿄대 총장에 취임한다.[7] 1983년 자유민주당에서 비례구 명부 제2위로 참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 일본 육영회 회장, 국제교류기금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근대 독일사의 전문가로서 독일의 외교사나 독일 혁명사의 연구로 실적을 올렸지만, 그 밖에 논단에서의 폭넓은 언론 활동으로도 유명해졌다.
1990년 훈1등서보장을 받았다.
2004년 8월 10일 심부전으로 인해 도쿄도의 자택에서 사망했다.[1] 향년 91세.
2. 3. 도쿄 대학 분쟁과 총장 재임
1968년 도쿄 대학 분쟁에서 문학부장으로서 전공투 학생들에게 8일 동안 감금되었다. 학생 측과 단체 교섭을 실시했지만, 학생들의 요구를 전부 거부하고 강직한 자세를 관철했다(하야시 겐타로 감금 사건).[6]1973년부터 1977년까지 가토 이치로 학장의 뒤를 이어 제20대 도쿄 대학 총장을 역임했다.[7] 4년 동안 학원 분쟁 수습과 도쿄 대학 재건에 진력했다.
2. 4. 정계 진출과 이후 활동
1983년 6월, 참의원 선거 비례구에 자민당 공인(명부 2위)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자민당적은 없고, 당우 대우를 받는 자유 국민 회의 소속으로, 당선 후 자민당 참의원 내 회파명은 "자유민주당・자유 국민 회의"였다[1]). 1989년 7월 참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1기 임기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일본육영회 회장, 국제교류기금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1]).3. 사상
하야시 겐타로는 강경파 논객으로 평가받으며, 근대 독일사 전문가로서 독일 혁명사 연구 등에 업적을 남겼다. 또한 논단에서 폭넓은 언론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1.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인식
하야시 겐타로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의 행위는 국제 연맹 규약이나 파리 부전 조약, 민족 자결주의 등 당시 이미 확립된 국제법, 국제 윤리에 반하며, 침략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11][12][13][14][15][16][17] 또한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타국 지배 유지·확대를 위한 전쟁이었으며, 침략 행위 과정에서 타국과의 무력 충돌을 일으킨 것이어서 자위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먼저 스스로 때려놓고, 맞받아쳐진 것을 가지고 "자위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11][12][13][14][15][16][17] 그는 아시아 해방을 내걸면서도 일본이 중국·한국을 해방시키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11][12][13][14][15][16][17]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1996년부터 1998년에 걸쳐 도쿄 대학 교수(당시) 나카무라 산과 월간지 『정론』에서 논쟁을 벌였다.[11][12][13][14][15][16][17]
3. 2. 역사 교육 관련 활동
고등학교 교과서의 베스트셀러가 된 『상세 세계사B』(산카와 출판사)를 함께 저술한 저자 중 한 명이다. 1997년 1월 30일, 후지오카 노부카츠, 니시오 간지 등에 의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설립되자[8][9], 각계 유명인사들이 찬성 의사를 밝혔고, 같은 해 6월 6일 시점의 찬동자는 204명에 달했다. 하야시도 그 안에 이름을 올렸다[10]。하야시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 1930년대 이후 일본의 행위는 국제 연맹 규약이나 파리 불전 조약, 민족 자결주의 등 당시 이미 확립된 국제법, 국제 윤리에 반하며, 침략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타국 지배 유지·확대를 위한 전쟁이었으며, 침략 행위 과정에서 타국과의 무력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를 자위라고 말할 수 없다. 먼저 스스로 때려놓고, 맞받아쳐진 것을 가지고 "자위 행위"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아시아 해방을 내걸면서, 일본은 중국·한국을 해방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1996년부터 1998년에 걸쳐 도쿄 대학 교수(당시) 나카무라 산과 월간지 『정론』에서 논쟁을 벌였다[11][12][13][14][15][16][17]。
4. 수상 및 서훈
5. 가족 및 친족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하야시 키쥬 | 해군 군인, 『곤도 마코토 선생전』(공옥사, 1937년) 편찬 |
동생 | 하야시 유지로 | 관료, 미래학자 |
장남 | 하야시 요타로 | 미쓰이 부동산 전 부사장, 세레스틴 호텔 사장 |
차남 | 하야시 켄지 | 규슈 대학 명예 교수 |
조카 | 하야시 노조무 | 작가, 서지학자, 국문학자 |
조카 | 하야시 히카루 | 하쿠호도 생활 종합 연구소 전 소장 |
6. 저서
; 단행본
- 『독일 근세사 연구』 킨도 서점, 1943
- 『역사학의 방법』 백일서원, 1948
- 『역사의 흐름 서양 문명 소사』 와카사 서방, 1948
- * 문고화: 신초 문고
- 『인간과 사상의 역사』 국립서원, 1948
- 『세계의 걸음』 이와나미 신서 청판, 1949-52
- * 개정판
- 『근대 독일의 정치와 사회 프로이센 개혁에 관한 한 연구』 홍문당, 1952
- 『사학 개론』 유비각, 1953
- * 신장판 1968년, 1982년
- 『근대사의 제상』 가와이데 서방, 1953
- 『내일로의 역사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 신초샤, 1954
- * 문고화: 신초 문고
- 『역사와 인간상』 가와이데 신서, 1956
- 『흐름을 파악하다』 신초샤, 1957
- 『현대 사회주의의 재검토』 주오코론사, 1958
- 『개성의 존중』 신초샤, 1958
- 『변해가는 것의 그림자』 지식인의 걸음』 문예춘추 신사, 1960
- 『역사와 현실』 신초샤, 1962
- 『바이마르 공화국 히틀러를 출현시킨 것』 주오코론 신서, 1963
- 『세계사와 일본』 신초샤, 1965
- 『역사와 정치』 유신당, 1965
- 『공산국 동과 서』 신초샤, 1967
- 『두 개의 대전의 골짜기』 (대세계사 22) 문예춘추, 1969
- * 개제 문고화 『양대전 사이의 세계』 고단샤 학술 문고, 1976
- 『역사와 체험』 (인간과 사상) 문예춘추, 1972
- 『독일사 논집』 주오코론사, 1976
- 『아카몬 안과 밖』 요미우리 신문사, 1976
- 『프로이센·독일사 연구』 도쿄 대학 출판회, 1977
- 『역사의 정신』 실업지일본사, 1978
- 『이마이 도시키』 스와 사담회, 1984
- 『외압에 흔들리는 일본사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고분샤 갓파 홈스, 1987
- 『독일 혁명사 1848·49』 야마카와 출판사, 1990
- 『쇼와사와 나』 문예춘추, 1992
- * 분슌 문고, 2002
- * 분슌 학예 라이브러리·문고, 2018
- 『역사로부터의 경고: 전후 50년의 일본과 세계』 주오코론사, 1995
- * 주오 문고, 1999
- 『나의 스승 나의 여행』 KTC 중앙출판, 1996
- 『전후 50년의 반성 - 국제화 시대와 일본의 장래』 원서방, 1996
- 『바이에른 혁명사 1918-19년』 야마카와 출판사, 1997
; 저작집
- '''『하야시 겐타로 저작집』'''(전 4권) 야마카와 출판사, 1993
# 제1권 『역사학과 역사 이론』 논고 5편. 랑케 전, 역「랑케 자전」을 병록
# 제2권 『독일사 논문집』 논고 9편
# 제3권 『독일의 역사와 문화』 평론, 해설, 수필
# 제4권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독일과 세계(바이마르 공화국, 양대전 사이의 세계)』
; 공편저
- 『개설 서양 역사』 가메이 다카타카 공편, 야마야스 출판, 1948
- 『서양사학 입문』 오쓰키 서점, 1949
- 『서양사 연구 입문』 이노우에 고지 공편, 도쿄 대학 출판회, 1954
- 『인간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가』 사회편, 하야시 다카코 공저, 신초샤, 1957
- 『전후 일본의 사상과 정치』 세키 요시히코 공저, 자유사, 1971
- 『원전에 의한 역사학의 걸음』 사와다 아키오 공편저, 고단샤, 1974
- * 개제 『원전에 의한 역사학 입문』 고단샤 학술 문고, 1982
- 『혁명의 연구』 다카기 서방, 1978
- 『샘은 마르지 않는다 마루야마 가쓰히로와 군마 교향악단』 쓰지무라 아키라 공편, 마이니치 신문사, 1998
- 『상세 세계사』 무라카와 겐타로·에가미 나미오·야마모토 다쓰로 공저·감수, 야마카와 출판사(고교 교과서)
; 번역
- 『랑케 선집』 산세이도, 1942[18]
- * 지요다 서방, 1948
- 『영국 사회사』 초서부터 빅토리아 여왕까지의 6세기 간의 전망 (1·2)
: G·M·트레벨리안 저, 야마카와 출판사, 1949-50, 감수만[19]
참조
[1]
간행물
追悼 林健太郎先生
史学会
[2]
서적
日本海軍士官総覧 【復刻版】財団法人海軍義済会編 海軍義済会会員名簿(昭和十七年七月一日調)
柏書房
2003
[3]
서적
東京帝国大学卒業生氏名録
https://dl.ndl.go.jp[...]
東京帝国大学
[4]
서적
昭和史と私
文藝春秋
1992
[5]
서적
昭和史と私
[6]
웹사이트
東大紛争後、再建に尽力した林健太郎
https://books.bunshu[...]
文藝春秋
[7]
웹사이트
東大の140年を牽引した博士たちの肖像(20.林健太郎)
https://www.u-tokyo.[...]
[8]
웹사이트
「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のExit, Voice, Loyalty
http://www.kiss.c.u-[...]
東京大学大学院総合文化研究科・教養学部
2022-06-13
[9]
서적
教育と愛国―誰が教室を窒息させるのか
岩波書店
2019-05-30
[10]
서적
同会賛同者名簿(一九九七年六月六日現在)
国書刊行会
2018-12-25
[11]
웹사이트
中村粲「林健太郎氏の批判に応える―大東亜戦争肯定の思想と論拠」『正論』1996年8月号、106-115ページ。
https://cir.nii.ac.j[...]
2022-02-13
[12]
웹사이트
中村粲「林健太郎氏の戦争史観を論評す―「大東亜戦争肯定論者」と再批判されて」『正論』1997年6月号、62-75ページ。
https://cir.nii.ac.j[...]
2022-02-13
[13]
웹사이트
林健太郎「中村粲氏の批判に答える」『正論』1997年9月号、82-92ページ。
https://cir.nii.ac.j[...]
2022-02-13
[14]
웹사이트
中村粲「再び林健太郎氏の歴史認識を問う」『正論』1997年11月号、282-295ページ。
https://cir.nii.ac.j[...]
2022-02-13
[15]
웹사이트
林健太郎「中村粲氏の問いに答える」『正論』1998年6月号、246-259ページ。
https://cir.nii.ac.j[...]
2022-02-13
[16]
웹사이트
中村粲「なぜ語らぬアジアの歴史責任―林健太郎史観への疑問」『正論』1998年8月号、88-102ページ。
https://cir.nii.ac.j[...]
2022-02-13
[17]
간행물
別冊正論(extra.04)
扶桑社
2006-10
[18]
문서
일부 참가
[19]
서적
완역은 "영국 사회사"
みすず書房
[20]
문서
"선집7"을 개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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