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친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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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친우회는 1919년 서재필이 창립을 주도한 단체로, 미국 내 친한파와 지한파 미국인들을 규합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일제의 학정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서재필은 미국 내 정치인,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한국 독립을 위한 정치 운동을 계획했다.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기관지인 《꼬레안 리뷰》를 발행하며 회원 모집 및 홍보 활동을 펼쳤으나, 워싱턴 회의 이후 활동이 침체되었다. 초기에는 비정치적 시민단체로 시작했으나, 점차 미국 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적 압력 단체로 활동했다.
한국친우회의 설립 논의는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대회에서 서재필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대회 둘째 날 연설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선전 활동과 미국 내 우호적인 여론 조성이 시급함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친한파(親韓派) 미국인들의 조직적인 지원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이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임시대리 백일규에게 보낸 1919년 4월 29일자 서신에서도 구체화되었는데, 서재필은 미국 내에 한국에 우호적인 단체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2]
한국친우회는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일제강점기 하의 한민족을 지원하고 독립을 돕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3] 주요 활동은 미국 국민에게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일제 통치의 부당함을 알려 미국 내 우호적인 여론과 도덕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또한 세계 평화 증진에 기여한다는 명분도 내세웠다.[3] 초기에는 순수 민간 지원 단체의 성격을 가졌으나, 점차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정치적 활동으로 그 범위를 넓혀나갈 것을 모색하였다.[3]
2. 창립 배경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서재필은 한인대회에 참석했던 미국인들을 비롯하여 구미위원부 관계자, 미국의 저명인사, 지식인 등 다양한 인사들과 접촉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점을 언급하며 인도적 차원에서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지지를 호소했다. 서재필의 이러한 노력에 톰킨스 목사를 비롯한 일부 미국 인사들이 공감하고 적극적인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한국친우회 조직의 기반이 마련되었다.[2]
2. 1. 서재필의 구상
한국친우회 설립 구상은 제1차 한인대회 둘째 날, 서재필이 선전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처음 제기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 내 친한파(親韓派) 및 지한파 미국인들을 폭넓게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2] 이후 서재필은 1919년 4월 29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임시대리였던 백일규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미국 내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단체를 조직하여 친한 여론을 형성한다면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지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다.[2]
서재필은 제1차 한인대회에 참석했던 미국인들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구미위원부 관계자, 미국의 저명인사, 대학교 및 해리힐먼 고등학교 동문, 지식인 그룹, 그리고 자신이 다니던 메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통해 폭넓은 접촉을 시도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에 새로운 문물과 기독교 신앙을 전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한국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도록 미국인들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다시 한번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서재필의 이러한 구상과 호소에 대해, 제1차 한인대회 연사로 참여했던 톰킨스 목사, 오버린대학의 H. A. 밀러(H. A. Miller) 교수,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S. 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베네딕트 기자 등이 적극적인 협력 의사를 밝혔다.[2] 특히 톰킨스 목사는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돕겠다고 약속하며 한국친우회 조직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서재필은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직접 사비를 들여 이들의 집을 방문하거나 만남, 모임,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2. 2. 미국인들의 협력
서재필은 제1차 한인대회에 참석한 미국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또한 구미위원부 및 미국의 저명 인사들, 대학교 동문, 해리힐먼 고등학교 동창, 지식인들, 그리고 자신이 다니던 메디아 교회의 신자들을 통해 미국의 주요 인사들과 접촉했다. 서재필은 미국이 한국에 신문물과 기독교 신앙을 전해준 것에 감사하며,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인도적인 차원에서 다시 한번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2]
서재필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제1차 한인대회'에 연사로 참여했던 톰킨스 목사, 오벌린 대학의 H. A. 밀러 교수,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S)의 베네딕트 기자 등이 적극적으로 협력 의사를 밝혔다.[2] 특히 톰킨스 목사는 한국이 추구하는 독립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돕겠다고 약속하며 한국친우회 조직에 앞장섰다. 서재필은 직접 사비를 들여 이들을 방문하거나 만나고, 모임 및 식사 자리를 가지며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2. 3. 서재필의 연설
서재필은 1919년 5월 2일 필라델피아 시 시티클럽 빌딩에서 열린 한국친우회 창립 발기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먼저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의학, 기독교, 신 문명을 전파하고 위생적인 양옥집 건설 등을 통해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어서 서재필은 '미국 국민이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자유와 독립을 한인들에게 가르쳤는데, 지금 조선인들이 이를 위해 싸우는 것을 미국 국민이 모른 체한다면 이것은 크게 모순되는 일이다. 지금껏 미국 선교사들과 의사들의 인도적 지원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며,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한국친우회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3] 또한 그는 조선인들은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므로,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면 한국 역시 미국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2. 4. 정식 설립
지지자를 모은 서재필은 톰킨스, 베네딕트 등과 함께 1919년 5월 2일, 필라델피아 시 시내 시티클럽 빌딩에서 미국 내 친한파 종교계, 교육계, 실업계의 분야별 저명인사 22명을 초청하여 한국친우회 창립 발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서재필은 먼저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의학과 기독교, 신 문명의 전파와 위생적인 양옥집 건설 등의 혜택을 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 뒤, '미국 국민이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자유와 독립을 한인들에게 가르쳤는데, 지금 조선인들이 이를 위해 싸우는 것을 미국 국민이 모른 체 한다면 이는 크게 모순되는 일이며, 지금까지 미국 선교사들과 의사들의 인도적 지원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고 도리가 아니다'라는 점을 들어 한국친우회의 설립 필요성을[3] 역설했다. 또한 서재필은 조선인들은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므로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에 적극 지지를 보낸다면 한국 역시 미국을 배신하지 않을 것임을 호소하였다.
한국친우회는 1919년 5월 15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레딩(Reading)의 라자 극장(Rajah) 빌딩에서 성대한 대중집회를 개최한 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정식으로 결성되었다.[3] 미국인 밀러 목사, 베네딕트 기자, 레딩 시 부시장 등의 축사 낭독 후 서재필의 개회사와 조직 목적, 강령 등의 선언이 있었다.
이때 발표된 취지문을 보면, 한국친우회는 극동 지역의 기독교와 민주주의 지원을 위해 미국민의 여론 조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와 인도의 측면에서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지, 한·중·일의 정치적 문제에 간섭하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여 순수 민간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질 것임을 시사했다.[3]
3. 설립 목적
3. 1. 표면적 목적
한국친우회는 다음과 같은 표면적인 목적을 내세웠다.[3]3. 2. 내면적 목적
한국친우회의 공식적인 설립 목적은 기독교와 자유독립국가를 위해 고통받는 한국 민족에게 미국인의 동정과 도덕적 지원을 보내고, 일제의 학정과 부당한 대우가 재발하지 않도록 미국민의 도덕적 영향력을 사용하며, 한국에 관한 진실한 정보를 미국민에게 알리고, 세계 평화 증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3]
그러나 서재필은 이러한 표면적인 목표 외에 더 깊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친우회 회원 수가 1백만 명 이상으로 늘어나면 한국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 미국 내 정치인, 양심적인 학자, 지식인들을 포섭하고, 더 나아가서는 영국, 스위스, 벨기에, 발트 3국 등 비제국주의 국가의 지식인과 정관계 인사들까지 포섭하여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한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서재필은 이러한 정치적 목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조선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조차 몰랐으며, 흥선대원군 시절의 천주교 박해(신부 참수 등) 사건 등으로 인해 조선인을 야만적이고 미개한 민족으로 여기는 시선이 존재했다. 서재필은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고려 시대의 백자, 신라 시대의 한지 제조 기술, 설총, 김대문, 최치원과 같은 문인들, 조선 시대 이황, 조식, 이이 등의 학문과 철학 논쟁(사단칠정론, 이기논쟁) 등을 영어로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며, 한국이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문명국임을 알리는 데 힘썼다.
4. 활동
서재필의 주도로 설립된 한국친우회는 미국 전역에 지부를 개설하고 회원을 모집하며 활발한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4] 초기부터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와 상호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운영되었으며,[4] 한국통신부는 한국의 실정을 알릴 강사를 지원하기도 했다.[4] 친우회는 기관지 꼬레안 리뷰 발간 등을 통해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이해를 높이고자 노력했으며,[4] 프랑스 등 해외로도 활동 영역 확장을 모색했다. 비록 한국통신부의 지원을 일부 받았으나, 재정적으로는 자체 회비와 기부금에 의존하여 독립적인 자치 활동을 펼쳤다.[4]
4. 1. 재정 및 운영
서재필은 한국친우회 설립 초기, 지부 개설, 회원 모집, 홍보 활동, 유인물 및 회보 인쇄 비용 등을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충당했다. 모임이 안정된 후에는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와 초기부터 상호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4]한국친우회는 회원 가입 시 연회비 납부 금액에 따라 회원을 세 종류로 구분했다.
회원 종류 | 연회비 |
---|---|
통상회원 | 연회비 1USD 또는 꼬레안 리뷰 구독료 포함 3USD |
찬조회원 | 5USD 이상 |
종신회원 | 100USD 이상 |
[4]
이는 회원들에게 꼬레안 리뷰 구독을 유도하여 한국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를 통해 한국통신부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려는 목적이었다. 또한 서재필은 개인 비용과 건물을 투자하여 꼬레안 리뷰 인쇄소를 설립했으며, 이 잡지를 대중화하여 전철과 열차 가판대에도 보급했다. 한편,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구미위원부 위원들이 프랑스를 비판하는 상황 속에서도, 서재필은 프랑스 내 한국친우회 설치 및 확산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영어, 일본어 외에 라틴어와 기초 게르만어까지 학습하는 노력을 보였다.
한국통신부는 한국의 실정을 미국 대중에게 알릴 강사들을 지원하며 한국친우회의 조직 확대를 도왔다. 그러나 한국친우회는 한국통신부나 구미위원부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나 재정 지원을 받지 않고, 자체 회비 수입과 기부금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독립적인 자치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4]
4. 2. 회원 모집
서재필은 한국친우회의 지부 개설, 회원 모집, 홍보 활동, 유인물 및 회보 인쇄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 재산을 투자하였다.[4] 한국친우회는 회원을 모집할 때 연회비 납부 금액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종류로 구분했다.[4]회원 종류 | 연회비 |
---|---|
통상회원 | 연회비 1USD 또는 꼬레안 리뷰(한국평론) 구독료 포함 3USD |
찬조회원 | 5USD 이상 |
종신회원 | 100USD 이상 |
이러한 회원 구분 방식은 회원들에게 한국친우회의 기관지인 꼬레안 리뷰 구독을 유도하여 한국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를 통해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4] 한국친우회는 설립 초기부터 한국통신부와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며, 한국통신부는 한국의 실정을 미국 대중에게 알릴 강사들을 지원하며 한국친우회의 조직 확대를 도왔다.[4]
4. 3. 해외 지부 설치
한국친우회는 미국 각 주와 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각 지부장 명단은 아래와 같다.[5]주 | 지부장 |
---|---|
오하이오 주 알라언스 시 | T. W. 브라이안 박사 (Dr. T. W. Bryan) |
미시간 주 앤 아버 시 | W. C. 퓨퍼스 박사 (Dr. W. C. Pupers) |
오하이오 주 맨스필드 시 | R. E. 트루즈 목사 (Rev. R. E. Truse) |
오레곤 주 뉴버그 시 | 찰스 기븐스 박사 (Dr. Charles Givens) |
시카고 시 | J. S. 바버 상원의원 (U. S. Senator J. S. Barbour) |
미주리 주 파크빌 시 | 셀든 P. 스펜서 상원의원 (U. S. Senator Selden Spencer) |
오하이오 주 포스토리아 시 | F. A. 윌버 박사 (Dr. F. A. Wilbur) |
워싱턴 시 | C. 올슨 제독 (Admiral C. Olsen) |
미주리 주 캔자스 시 | 글렌 A. 로빈슨 박사 (Dr. Glen A. Robinson) |
오하이오 주 리마 시 | T. R. 해밀튼 목사 (Rev. T. R. Hamilton) |
오하이오 주 핀들레이 시 | W. W. 게이어 박사 (Dr. W. W. Gayer) |
보스톤 시 | L. N. 머린 박사 (Dr. L. N. Merrin) |
뉴욕 시 | 찰스 J. 스미스 박사 (Dr. Charles J. Smith) |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 시 | 윌리엄 하우스튼 박사 (Dr. William Houston) |
필라델피아 시 | 플로이드 W. 톰킨스 박사 (Dr. Floyd W. Thompkins) |
펜실베이니아 주 리딩 시 | 프랭크 S. 리븐굿 씨 (Mr. Frank S. Livengood) |
샌프란시스코 시 | L. A. 맥아피 박사 (Dr. L. A. McAfee) |
펜실베이니아 주 어퍼 페리 시 | 콜빈 M. 딜롱 목사 (Rev. Colvin M. Dillon) |
각 지부는 회원 확보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으로 기업인들의 모임인 미 상공회의소를 비롯하여 각 대학 동창회, 로타리 클럽, 라이온스 클럽, 키와니스 클럽(Kiwanis Club), 메이슨 롯지(Masonic Lodge), 나이츠 오브 컬럼버스(Knights of Columbus), 교회 등을 통해 회원을 모집했다.[5] 각 협회의 임원을 포섭하여 회원을 확보함으로써 한국친우회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했다.[5] 이승만은 각 지부를 순회하며 한국 문제에 관한 연설을 통해 그 당위성을 알리고 회원 간의 결속을 다졌다.[5]
조직은 주로 미국의 중부와 동부에 집중되었다. 이는 선전 활동이 이 지역들에서 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요 원인으로는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가 처음 결성된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워싱턴, 뉴욕 등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미국 중·동부 지역 한인 유학생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성과로 이어진 점이 꼽힌다.[6]
한편, 대한인국민회가 활동하던 지역에서는 한국친우회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안창호가 이끌던 대한인국민회와 서재필 중심의 한국친우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가 있던 미국 서부 지역에서 한국친우회 결성이 미약했던 것은 대한인국민회의 대외 활동 능력이 활발하지 못했음을 보여줄 뿐, 친우회 결성을 방관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6] 그 근거로는 캔자스시티 한국친우회 결성 시 대한인국민회가 200USD를 지원한 사실과 캘리포니아주 한인들이 서재필의 방문을 거듭 요청했던 점 등이 제시된다. 이는 대한인국민회가 한국친우회 활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대외 선전 활동이 주로 정한경과 그의 친지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3·1운동 직후인 4월 상해로 떠나면서 대한인국민회가 지도력 공백을 겪었기 때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6]
한국친우회의 결성은 주로 대중집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대중집회 개최에는 장소 선정, 진행, 경비 및 인원 동원 등 많은 준비가 필요했는데, 친우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결성되었다는 점은 미국 시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이 상당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모든 운영이 회원의 회비나 기부금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주목할 만하다. 집회를 통한 한국친우회의 결성은 미국인들에게 친한(親韓)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7]
한국친우회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에도 조직을 갖추어 광범위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를 통해 3·1운동으로 드러난 한국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한국에 우호적인 국제 여론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8] 일본 제국주의 당국은 미국의 여러 한인 단체 중에서도 특히 한국친우회의 활동에 주목하며 "조선우애단(한국친우회)의 행동에 관해서는 금후 다소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8] 워싱턴과 각 주에 주재하던 일본 영사관은 한국친우회가 반일본 선동을 하는 단체인지 감시하기 위해 인력을 고용하여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창립 초기에는 비정치적 목적을 표방하며 구미 기독교계 인사들과의 우호 증진 및 친목 도모를 내세웠기 때문에, 일본 측은 별다른 탄압의 빌미를 찾지 못했다.
5. 활동의 침체
서재필이 워싱턴 회의가 끝난 뒤 모든 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한국친우회는 사실상 침체기에 접어들었다.[8] 이후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활동이 점차 위축되었다.
5. 1. 침체 원인
서재필이 워싱턴 회의가 끝난 뒤 모든 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한국친우회는 사실상 침체기에 접어들었다.[8] 한국친우회는 회원들의 성금과 모금, 꼬레안 리뷰 구독료, 서재필 개인의 재산 투자 등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항상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침체의 다른 원인으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3·1 운동을 이용한 선전 활동의 가치가 점차 줄어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8] 또한, 워싱턴 회의 이후 미국 정부가 현상 유지를 위한 대외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일본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국제 질서가 상대적으로 안정기에 들어서자, 한국친우회의 활동이 미국인들의 호응을 얻기 어려워졌다.[8]
이후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 학살 문제가 국제 사회에 알려지자, 한국친우회 회장 톰킨스는 1923년 11월 20일 미국 국무장관 휴즈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뒤로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다소 지지부진해졌다.[8]
6. 의의
한국친우회는 초기에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인도주의적이고 비정치적인 시민단체로 출발했으나, 점차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위한 정치적인 압력 단체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10] 이러한 성격 변화는 단체가 발표한 결의문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미국 사회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9][10]
6. 1. 정치적 활동
한국친우회는 처음에는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인도적이고 비정치적인 시민단체로 출발했으나, 점차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위한 정치적 압력 단체로 성격이 변화하였다.[10] 이러한 변화는 각 지역 친우회가 조직될 때 발표한 결의문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결의문의 주요 내용은 미국 정부가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9]을 준수하여 일본의 부당한 지배를 막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결의문은 미국 정부와 의회, 그리고 해당 지역 의원들에게 발송되어 한국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데 사용되었다.[10]
특히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와 레딩 한국친우회는 워싱턴 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 단장 휴즈에게 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직접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한국친우회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10]
7. 관련 자료
참조
[1]
서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2):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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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女苑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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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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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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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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