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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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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한경은 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대한인국민회 조직, 파리 강화 회의 참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 위원부 활동 등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외교 활동을 통해 미국 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한국사정'을 영문으로 저술하여 한국의 역사와 일제의 침략을 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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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경
기본 정보
출생1885년 12월 25일
사망1951년 12월 3일
직업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외교관
배우자김영옥
생애 및 활동
출생지평안남도 강서군
주요 활동대한인국민회 활동
신한민보 편집인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단 파견 요청
구미위원부 외교위원
주요 경력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미국 유학, Park College 졸업
신한민보 편집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구미위원부 외교위원
독립운동 공적영문 저술 및 외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단 파견을 요청
구미위원부 외교위원으로 활동하며 외교적 노력
가족 관계
배우자김영옥
훈장
서훈건국훈장 애족장 (1995년)

2. 생애

1904년 14세의 나이로 도미, 1906년 학업을 위해 네브래스카 커니로 이주했다.[3]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치고 네브라스카 초급대학에 진학했으며,[3]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아메리칸 유니버시티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5]

19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이승만 등과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여 재미교포의 자치 활동과 독립 정신 고취에 힘썼다.[4]

1918년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 조교수가 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3]

1920년 가을, 워싱턴에서의 외교활동을 마치고 호놀룰루행 선박 위에서 레이(Lei)를 목에 걸고 있는 정한경.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일명 한경(漢慶). 평안남도 순천 출신이다.[4]

1914년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화학 실험실에서 여학생들과 남긴 기념사진 (왼쪽)


1904년 14세의 나이로 도미, 1906년 학업을 위해 네브라스카 커니로 이주했다.[3]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치고 네브라스카 초급대학에 진학했으며,[3]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아메리칸 유니버시티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5]

2. 2. 독립운동 참여

19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이승만 등과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여 재미교포의 자치 활동과 독립 정신 고취에 힘썼다.[4]

1918년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 조교수가 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3]

2. 3. 파리 강화회의와 외교 활동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하여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만국 평화회의가 개최되자, 태평양 연안 및 뉴욕 거주 교민들을 중심으로 김규식과 함께 신고려회를 조직하여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피력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3] 이에 따라 미주 각지에서 모인 재미한인 전체회의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주최로 개최되고 이 회의의 결의에 따라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승만, 민찬호와 함께 그를 선출했다. 그러나 1919년 12월, 프랑스행 여권을 발급받고자 했으나 일본 대표단의 강력한 반발로 좌절되었다.[3]

1919년 2월 25일, 독립운동 사무를 전담할 임시위원회가 설치될 때 부위원장에 선임되어, 이승만, 민찬호 등과 함께 한국이 완전한 정부를 수립하고 내치와 외교의 권리가 있을 때까지 국제연맹 위임통치로써 보호받게 해달라는 내용의 위임통치 청원서를 강화회의 각국 대표들과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 미국 상원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토의하게 하였다.[4]

1919년 4월 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가하여 대한독립선언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9년 5월, 잡지 『아시아』에 '오늘의 한국'이라는 주제로 기고했다.[3]

1920년 10월, 호놀룰루 교민들의 초청을 받고 이승만을 대신하여 '태평양회의 한국대표' 자격으로 참석,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에 대하여 연설함으로써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3]

또한 정한경은 기독교 인사와 세계 약소국 동맹회를 배경으로 미국 정치가들을 방문하고 미국 의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요망하게 하는 한편,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여 미국인의 지지와 성원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북미합중국의 동양정책(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과 '평화회의(The Peace Conference)' 등의 글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3]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한경은 임시정부의 워싱턴 위원부 위원으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3]

2. 4.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및 광복 이후

1944년 5월, 임시정부는 임병직과 그를 전후구제회의, 태평양학회 등 국제회의에 대표로 파견했다.[3]

1944년 10월 2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그를 외무위원 겸 비서주임에 선임하여, 임시정부와 구미 지역 간의 외교 활동을 강화하도록 하였다.[4]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1985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3] 1995년, 그의 유해는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독립운동 방식과 이념

정한경은 높은 지식과 웅변술, 영문 저술을 바탕으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미국 사회에서 'Henry Chung De Young'으로 알려져 있으며, 언론과 출판을 통해 미국 여론을 움직이고자 노력했다.[3]

1919년 5월, 잡지 『아시아』[6]에 '오늘의 한국'이라는 주제로 기고했다. '북미합중국의 동양정책(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과 '평화회의(The Peace Conference)' 등의 글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3]

이승만 박사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했으며, 1차 세계대전부터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워싱턴에서 이승만과 함께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승만에 대해 “고집이 센 분이고 타협하기 어렵고, 독재적인 성격도 없지 않아요. 그러나 그분은 의심없는 애국자이지요.”라고 평가했다.[3]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평생 따르면서 살았지만, 이승만 박사를 돕는 외교 일선에서 일을 했다고 말했다.[3]

강대국을 통한 외교를 중시하는 독립운동 노선을 견지했다. '한국은 약소국이므로 강대국인 미국을 움직여야만 대한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외교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3] 국민회, 흥사단, 동지회 등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했다.[3]

4. 가족 관계

미국인 부인과의 사이에 4남매를 두었다.

5. 저서

1922년 영문으로 《한국사정》(The Case of Korea|더 케이스 오브 코리아영어)을 집필하여 한국의 역사와 지지(地誌), 정치 관계, 일제의 교회 탄압 등 침략 야욕을 지적하여 호평을 받았다.[7][3]

6. 수상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정한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 1995년 그의 유해는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1]

정한경의 수상 내역
연도훈장
1962년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참조

[1] 뉴스 해외순국 독립유공자 7위 환국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 뉴스 해외순국 독립유공자 7위 환국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3] 웹인용 영문 저술과 외교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정한경 https://knamf.org/%E[...]
[4] 웹인용 정한경 https://encykorea.ak[...]
[5] 문서 이로서 정한경은 이승만 이후 미국에서 2번째 박사가 되었다.
[6] 문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이 창간한 잡지이다.
[7] 문서 국내 번역 제목은 '한국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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