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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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백자는 한국 유교의 검소함과 실용성을 나타내기 위해 다른 도자기보다 선호된 도자기로,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고려 시대에는 고려청자에 가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전국적으로 장려되면서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 백자는 초기에는 분청사기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15세기 이후 백자로 바뀌었고, 17세기에는 청백색, 조선 말기에는 탁한 흰색을 띠었다. 조선 백자는 중국 백자와 달리 소박한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하며, 다양한 형태와 문양으로 제작되어 일상생활과 의례에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분원의 설립과 민영화 등은 조선 백자의 생산에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수의 조선 백자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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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도예 -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10세기 초 중국의 청자 기술을 도입하여 시작되어 12세기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상감 기법의 발달과 몽골 침입으로 인한 쇠퇴기를 거쳐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받는다. - 백자 - 백자청화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
- 백자 - 백자 항아리
백자 항아리는 조선 17~18세기 관요에서 제작된 높이 52.6cm의 대형 입호로, 담청백색 유약과 자연스러운 형태를 갖추어 조선시대 도자사 대표작으로 평가받아 보물 제2064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백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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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자 | |
![]() | |
한글 | 조선 백자 |
한자 | 朝鮮白磁 |
로마자 표기 | Joseon baekja |
2. 역사
백자는 검소와 실용주의와 같은 한국 유교 윤리를 나타내기 위해 다른 도자기보다 선호되고 칭찬받았다.[1]
백자는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으로 한국에 등장했다. 처음에는 14세기 말 새로운 도공의 흙과 유약이 도입될 때까지 백자는 뚜렷한 발전을 보이지 않았다. 고려 왕조 말기에 큰 주목을 받은 후, 백자 생산은 조선 왕조 초기에 전국적인 드라이브를 통해 널리 보급되었다. 이 기물은 왕이 자주 사용했으며, 그 품질이 매우 뛰어나 명나라는 공물의 형태로 이 기물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백자는 약간 푸르스름했고, 왕조 건국 당시 구상했던 국가적 이상을 묘사하며, 고요하고 위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2]
전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도자기는 500년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일반적으로 전기, 중기, 후기의 세 가지 주요 시기로 나뉜다.
조선 도자기의 연대기는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세 가지 주요 사건이 가마 생산에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1751년 서울 근처 광주의 분원리에 정부가 지원하는 가마인 ''분원''(ko)의 설립, 그리고 1884년 분원의 민영화가 그것이다.[3]
많은 수의 조선 백자가 정부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선 도자기는 초기에는 분청사기가 주류였으나, 15세기 이후 백자로 바뀌었다[7]。중국의 원, 명 백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17세기에는 색이 청백색을 띠었고, 조선 말기에는 탁한 흰색으로 변했다[8]。조선에서 자기 제조는 관요에서 노비인 공장(:ko:공장 (직업))이 담당했다. 1752년에 광주에 분원의 관요가 세워져 생산의 중심이 되었으나, 1883년에 분원이 민영화되면서 관요의 역사는 끝났다. 그림 그리기는 있었지만, 채색 그림은 없었다[9]。코발트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도 제작되었지만, 코발트 안료가 부족하여 철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철화백자나 동 안료로 그림을 그린 진사도 제작되었다[10]。그러나, 조선 백자의 95% 이상은 다른 색으로 장식하지 않은 순백자이며,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제작되었던 것과 같은 화려한 색채 자기(색회자기)는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1][9]。
=== 고려 백자 ===
고려 때 백자는 고려청자에 압도되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12] 소문(素文)·음각·양각·상감의 4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현재 고려 백자 몇 개가 박물관이나 개인의 소장으로 전하고 있는데 빛깔은 백색·유백색·대황유백색(帶黃乳白色)·담청색·담감람색/淡橄欖色중국어 등이 있다.
태토(胎土)는 흰색의 고령토이며 기벽(器壁)이 엷고 고대(高臺) 바닥에는 시유(施釉)하지 않은 것이며 기형이나 무늬에 있어서도 송(宋)·원(元)의 백자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말기에 와서는 기벽이 두꺼워지고 유약의 빛깔도 송의 정요풍(定窯風)을 닮은 독특한 백색으로 바뀌면서 조선시대 초기의 백자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인다. 시문(施紋)에 있어서는 음각·양각뿐만 아니라 흑토(黑土)나 진사(辰砂)로 상감한 것이 있고 기형은 수병(水甁)·완·합자(合子)·유호(油壺)·향로 등 여러 종류로 나뉜다.
백자상감 유로모란문매병은 고려시대 백자로서는 희귀한 양식을 보이는데 기복에 청자태토로 긴 능화형(菱花形)을 세로로 상감하고 그 안에는 흑·백·진사를 상감했다. (덕수궁미술관 소장)
=== 조선 백자 ===
조선은 명나라 백자의 영향과 흰색을 숭상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초기부터 후기까지 꾸준히 백자가 발전했다. 초기에는 화문 자기[13]에 밀려 주류를 이루지 못하고, 용재총화에 기록되었듯 궁중에서만 사용되는 귀한 물품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 136곳에 자기소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백자 기술이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기록에 도기소는 185곳이었다. 세조 때에는 청료(靑料)[14] 수입이 어려워 주기(酒器) 외에는 백자 사용을 금지했고, 예종(睿宗) 때에는 한국에서도 청료를 채취하도록 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백자 제조가 성행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위축되었고,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백자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조선 백자는 화문 자기풍으로 변하여 근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조선 백자는 중국 백자와 달리 대청색(帶靑色)·대회백색(帶灰白色)·유백색(乳白色)을 띠며, 기교면에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갖춰 정적(靜寂)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고려 백자보다 정교한 멋은 덜하지만, 조대호방(粗大豪放)한 특색을 지닌다. 백자는 검소와 실용주의 등 한국 유교 윤리를 반영하여 다른 도자기보다 선호되었다.[1]
백자는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등장했으나, 14세기 말 새로운 도공의 흙과 유약이 도입되기 전까지 큰 발전은 없었다. 고려 말기에 주목받은 후, 조선 초기 전국적인 장려로 백자 생산이 보급되었다. 왕이 자주 사용하고 품질이 뛰어나 명나라에서 공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 시기 백자는 약간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고요하고 위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2]
조선 시대 도자기는 500년 동안 여러 변화를 겪었으며,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뉜다. 임진왜란, 1751년 광주 분원리에 설립된 정부 지원 가마인 ''분원''(분원/分院한국어) 설립, 1884년 분원의 민영화가 가마 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3]
많은 조선 백자가 정부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분청사기가 주류였으나, 15세기 이후 백자로 바뀌었다.[7]。중국 원, 명 백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17세기에는 청백색, 조선 말기에는 탁한 흰색으로 변했다.[8]。조선에서 자기 제조는 관요에서 노비인 공장(:ko:공장 (직업))이 담당했다. 1752년 광주에 분원 관요가 세워져 생산 중심지가 되었으나, 1883년 분원 민영화로 관요의 역사는 끝났다. 그림은 있었지만, 채색 그림은 없었다.[9]。청화백자도 제작되었지만, 코발트 안료 부족으로 철화백자나 진사도 제작되었다.[10]。그러나, 조선 백자의 95% 이상은 순백자이며, 에도 시대 일본에서 제작된 화려한 색채 자기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는다.[11][9]。
=== 청화백자 ===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후기 청화백자 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백자기이다. 태토 위에 청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철분이 섞인 장석유를 덮어 구운 것으로 중국에서는 유이청, 청화백자, 일본에서는 소메스키 라고 부르고 있고,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는 청화백자, 청화사기, 화기, 화자기 등으로 나와 있다. 청화백자가 생산된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세조 10년(1465)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이 때에 순천에서 국산 안료인 토청이 채취되어 그것으로 청화백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청화백자의 발생시기는 15세기 중엽으로 보게 되는데 그 생산의 중심인 광주관요의 변천을 기초로 초기, 중기, 후기의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2. 1. 고려 백자
고려 때 백자는 고려청자에 압도되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12] 소문(素文)·음각·양각·상감의 4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현재 고려 백자 몇 개가 박물관이나 개인의 소장으로 전하고 있는데 빛깔은 백색·유백색·대황유백색(帶黃乳白色)·담청색·담감람색/淡橄欖色중국어 등이 있다.
태토(胎土)는 흰색의 고령토이며 기벽(器壁)이 엷고 고대(高臺) 바닥에는 시유(施釉)하지 않은 것이며 기형이나 무늬에 있어서도 송(宋)·원(元)의 백자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말기에 와서는 기벽이 두꺼워지고 유약의 빛깔도 송의 정요풍(定窯風)을 닮은 독특한 백색으로 바뀌면서 조선시대 초기의 백자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인다. 시문(施紋)에 있어서는 음각·양각뿐만 아니라 흑토(黑土)나 진사(辰砂)로 상감한 것이 있고 기형은 수병(水甁)·완·합자(合子)·유호(油壺)·향로 등 여러 종류로 나뉜다.
백자상감 유로모란문매병은 고려시대 백자로서는 희귀한 양식을 보이는데 기복에 청자태토로 긴 능화형(菱花形)을 세로로 상감하고 그 안에는 흑·백·진사를 상감했다. (덕수궁미술관 소장)
2. 2. 조선 백자
조선은 명나라 백자의 영향과 흰색을 숭상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초기부터 후기까지 꾸준히 백자가 발전했다. 초기에는 화문 자기[13]에 밀려 주류를 이루지 못하고, 용재총화에 기록되었듯 궁중에서만 사용되는 귀한 물품이었다.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 136곳에 자기소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백자 기술이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기록에 도기소는 185곳이었다. 세조 때에는 청료(靑料)[14] 수입이 어려워 주기(酒器) 외에는 백자 사용을 금지했고, 예종(睿宗) 때에는 한국에서도 청료를 채취하도록 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백자 제조가 성행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위축되었고,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백자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조선 백자는 화문 자기풍으로 변하여 근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조선 백자는 중국 백자와 달리 대청색(帶靑色)·대회백색(帶灰白色)·유백색(乳白色)을 띠며, 기교면에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갖춰 정적(靜寂)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고려 백자보다 정교한 멋은 덜하지만, 조대호방(粗大豪放)한 특색을 지닌다. 백자는 검소와 실용주의 등 한국 유교 윤리를 반영하여 다른 도자기보다 선호되었다.[1]
백자는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등장했으나, 14세기 말 새로운 도공의 흙과 유약이 도입되기 전까지 큰 발전은 없었다. 고려 말기에 주목받은 후, 조선 초기 전국적인 장려로 백자 생산이 보급되었다. 왕이 자주 사용하고 품질이 뛰어나 명나라에서 공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 시기 백자는 약간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고요하고 위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2]
조선 시대 도자기는 500년 동안 여러 변화를 겪었으며,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뉜다. 임진왜란, 1751년 광주 분원리에 설립된 정부 지원 가마인 ''분원''(분원/分院한국어) 설립, 1884년 분원의 민영화가 가마 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3]
많은 조선 백자가 정부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분청사기가 주류였으나, 15세기 이후 백자로 바뀌었다.[7]。중국 원, 명 백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17세기에는 청백색, 조선 말기에는 탁한 흰색으로 변했다.[8]。조선에서 자기 제조는 관요에서 노비인 공장(:ko:공장 (직업))이 담당했다. 1752년 광주에 분원 관요가 세워져 생산 중심지가 되었으나, 1883년 분원 민영화로 관요의 역사는 끝났다. 그림은 있었지만, 채색 그림은 없었다.[9]。청화백자도 제작되었지만, 코발트 안료 부족으로 철화백자나 진사도 제작되었다.[10]。그러나, 조선 백자의 95% 이상은 순백자이며, 에도 시대 일본에서 제작된 화려한 색채 자기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는다.[11][9]。
2. 2. 1. 청화백자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후기 청화백자 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백자기이다. 태토 위에 청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철분이 섞인 장석유를 덮어 구운 것으로 중국에서는 유이청, 청화백자, 일본에서는 소메스키 라고 부르고 있고,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는 청화백자, 청화사기, 화기, 화자기 등으로 나와 있다. 청화백자가 생산된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세조 10년(1465)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이 때에 순천에서 국산 안료인 토청이 채취되어 그것으로 청화백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청화백자의 발생시기는 15세기 중엽으로 보게 되는데 그 생산의 중심인 광주관요의 변천을 기초로 초기, 중기, 후기의 3기로 구분할 수 있다.3. 특징
고려 청자와 달리, 조선 백자는 절제된 형태의 아름다움과 최소한의 색상 사용을 특징으로 하며, 당시 우위를 점하고 있던 한국 유교 국가의 이상을 전달했다.[4] 한국 문화의 독특하고 독창적인 아름다움은 백자에 반영되었고, 점차 색상과 디자인의 다양성은 궁중과 일반 백성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조선 백자에는 색상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초부터 백자는 코발트 블루로 채색되었으며, 희소성과 제작의 어려움으로 인해 백자보다 더 높은 가치를 받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철갈색이 인기를 얻어 백자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특히 코발트 가격이 너무 높이 치솟았을 때 사용되었다. 철갈색은 독특한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데 자주 사용되었으며, 둥근 항아리를 휘감는 용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유머러스한 최고의 예들을 보여준다. 백자에서 더욱 이례적이며 특히 어려운 점은 구리-적색 장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제작된 구리-적색이 사용된 작품은 18세기에 제작되었다.[4]
백자는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다.[6] 15세기와 16세기에는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형태와 모양의 접시, 사발, 병, 항아리 등이 선호되었다. 실용적인 일상 용도 외에도, 백자는 매장 용기와 같은 의례적인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백자는 태반 단지로 사용되었는데, 보통 두 개가 한 세트로 만들어져 하나는 다른 하나 안에 넣어 왕자나 공주의 태반을 보관하고 묻는 데 사용되었다. 18세기에는 달항아리로 알려진 크고 둥근 형태의 용기가 유행했다.[4]
4. 문화재
기물의 종류에는 병, 호(壺), 발(鉢)[15], 주발, 주전자, 베개(枕), 향로(香爐), 화분대(花盆臺), 필통(筆筒), 연적(硯滴) 및 기타 문방구 등이 있다. 현재 국보, 보물로 지정되어 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국보 제170호)
- 청화백자홍치2년명송죽문호(국보 제176호)
- 청화백자매죽문호(국보 제219호, 222호)
- 백자 박산향로(국보 제238호)
- 백자 청화죽문 각병(국보 제258호)
- 청화백자 산수화조문대호(국보 제263호)
-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 제294호)
- 백자 상감모란문 매병(국보 제345호)
-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보물 제241호)
참조
[1]
서적
Korean, An Introduc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8-03-29
[2]
서적
An Illustrated Guide to Korean Culture
https://archive.org/[...]
Hakgojae Publishing Co.
[3]
서적
Atlas of World Art
Laurence King Publishing
[4]
웹사이트
In Pursuit of White: Porcelain in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ttps://www.metmuseu[...]
2019-12-08
[5]
웹사이트
From birth to death: Joseon life expressed in white porcelain
http://www.koreahera[...]
2019-12-08
[6]
웹사이트
Sculpture and Crafts: White Porcelain Gallery
https://www.museum.g[...]
[7]
백과사전
朝鮮美術
http://100.yahoo.co.[...]
日本大百科全書 Yahoo!百科事典
[8]
백과사전
李朝白磁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9]
간행물
『李朝の皿に描かれた絵画』
http://www.moco.or.j[...]
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友の会通信26号 第23回講演会要旨
1992-03-01
[10]
웹사이트
韓国陶磁室 朝鮮時代・磁器
http://www.moco.or.j[...]
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11]
서적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1巻 「朝鮮王朝」
小学館
[12]
문서
무늬가 없는 것
[13]
문서
삼도수(三島手)
[14]
문서
코발트청
[15]
문서
분(盆)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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