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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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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형모는 일제강점기 친일 영화 촬영에 참여하고, 광복 후에는 반공주의 영화를 연출한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다. 평안북도 녕변군 출신으로, 만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1941년 최인규 감독의 영화 《집없는 천사》에서 미술을 담당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최인규의 《태양의 아이들》과 《사랑의 맹서》 촬영에 참여하여 친일 논란에 휩싸였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보류되었다. 1949년 《성벽을 뚫고》로 감독 데뷔 후, 《운명의 손》, 《자유부인》 등을 연출하며 1950년대 흥행 감독으로 활동했다. 대표작으로는 《청춘쌍곡선》, 《순애보》 등이 있으며, 마지막 작품은 《엘레지의 여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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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한형모
출생1917년 4월 29일
출생지평안북도 녕변군
사망1999년 9월 22일
분야영화연출
교육

2. 생애

한형모는 평안북도 녕변군 출신으로, 만주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41년 동향 출신 영화 감독 최인규의 《집없는 천사》에서 미술을 담당하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이후 촬영을 정식으로 공부했다. 1944년 최인규의 친일 영화 《太陽の子供達|태양의 아이들일본어》과 이듬해 《愛の誓い|사랑의 맹서일본어》에서 촬영을 담당하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보류되었다.[2]

광복 후 1949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을 다룬 반공주의 영화 《성벽을 뚫고》로 감독 데뷔했다. 1954년운명의 손》은 한국 영화 최초의 키스씬이 들어간 영화로 기록되었고, 1956년 정비석의 소설을 영화화한 《자유부인》은 유부녀의 외도를 다뤄 사회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큰 흥행을 기록했다. 1956년 《청춘쌍곡선》, 1957년순애보》도 대표작이며, 1967년 이미자의 삶을 그린 남정임 주연의 《엘레지의 여왕》이 마지막 작품이다.

2. 1. 영화계 입문과 초기 활동

평안북도 녕변군 출신이다. 만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1941년 동향의 영화 감독 최인규의 《집없는 천사》에서 미술을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최인규의 주선으로 촬영을 정식으로 공부했다.

최인규는 1944년 국민학교 교사가 제자들을 지원병으로 참전하게 한다는 내용의 친일 영화 《太陽の子供達|태양의 아이들일본어》을 찍었는데, 한형모는 이 영화의 촬영을 담당했다. 이듬해 발표된 《愛の誓い|사랑의 맹서일본어》에서도 촬영을 맡아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나 보류되었다.

《愛の誓い|사랑의 맹서일본어》는 최인규가 부인인 김신재를 출연시켜 연출한 작품으로, 일본인이 키워준 조선인 고아가 자살 공격으로 전사한 일본군 장교의 뒤를 따라 해군에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참전 선동 영화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영화계 친일 명단 작성에서 기술직은 제외했으나, 촬영은 영화 제작에서 핵심적인 분야이므로 친일 영화 제작에 반복 참가한 경우 포함시켰다고 밝힌 바 있다.[2]

2. 2. 친일 영화 제작 논란

한형모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1944년 국민학교 교사가 제자들을 지원병으로 참전하게 한다는 내용의 친일 영화 《太陽の子供達|태양의 아이들일본어》 촬영을 담당했다.[2] 이듬해 발표된 《愛の誓い|사랑의 맹서일본어》에서도 촬영을 맡았다.[2] 《사랑의 맹서》는 일본인이 키워준 조선인 고아가 자살 공격으로 전사한 일본군 장교의 뒤를 따라 해군에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참전 선동 영화였다.[2]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나 보류되었다.[2] 민족문제연구소는 영화계 친일 명단 작성에서 기술직은 제외했지만, 촬영은 영화 제작의 핵심 분야이므로 친일 영화 제작에 반복 참가한 경우 포함시켰다고 밝혔다.[2]

2. 3. 해방 이후 대표작과 전성기

1949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을 영화화한 반공주의 영화 《성벽을 뚫고》를 발표하여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1954년운명의 손》, 1956년자유부인》 등에서 당시로서는 과감한 애정 표현을 묘사해 1950년대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 되었다.[2] 《운명의 손》은 한국 영화 최초의 키스씬이 들어간 영화로 기록되었고, 정비석의 소설을 영화화한 《자유부인》은 유부녀의 외도를 다루어 사회적인 논란과 화제를 몰고 오며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2]

1956년 《청춘쌍곡선》, 1957년순애보》도 잘 알려진 대표작이며, 마지막 작품은 1967년 이미자의 삶을 그린 남정임 주연의 《엘레지의 여왕》이었다.[2]

2. 4. 후기 활동과 마지막 작품

이미자의 삶을 그린 남정임 주연의 《엘레지의 여왕》(1967)이 한형모의 마지막 작품이었다.[2]

참조

[1] 뉴스 [부음] 영화감독 한형모씨 동아일보 1999-09-22
[2] 뉴스 한국 영화의 근간도 친일 - [친일영화편] 인민배우 문예봉, 〈자유만세〉 최인규도 포함 컬처뉴스 200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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