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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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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박 김씨는 임진왜란 때 귀화한 김성인의 후손을 지칭하는 성씨이다. 김성인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좌부장 김충선과 함께 조선에 귀화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선조로부터 관을 하사받았다. 광해군은 그의 공을 치하하여 김씨 성과 성인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김성인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함박동에서 생을 마쳤으며, 후손들은 김해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후손들이 대종회를 결성하고 본관을 함박 김씨로 하였으며, 주요 인물로는 김귀성, 김흥발, 김득추, 김수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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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박 김씨 - 김성인
    김성인은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우고 관직에 올라 경상북도 청도군에 정착했으며, 후손들은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함박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문 이름함박 김씨
한자 표기咸博金氏
관향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함박리
시조김성인(金誠仁)
중시조알려진 바 없음
집성촌알려진 바 없음
인구 (2010년)약 4000명
순위알려진 바 없음
비고
창시자

2. 임진왜란 귀화 배경

김해김씨향화공세보(金海金氏向化公世譜)에 따르면, '''김성인'''(金誠仁, 沙汝某|사여모일본어)은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일본군 좌부장(左部將)으로 참전하였다가 '''김충선'''(金忠善, 沙也可|사야가일본어)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하였다. 귀화 후 김성인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당시 경상도 병마절도사였던 박진(朴晋)이 그의 공적을 특별히 조정에 보고(계문, 啓聞)하자, 선조는 김성인에게 관(冠)을 하사하며 공을 인정하였다.

3. 조선에서의 활동 및 공적

김해 김씨 향화공 세보(金海金氏 向化公 世譜)에 따르면, '''김성인'''(沙汝某|사여모일본어, 金誠仁)은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일본군 좌부장(左部將)으로 참전하였다가 김충선(沙也可|사야가일본어, 金忠善)과 함께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 조정은 귀화한 항왜(降倭) 8천여 명에서 만여 명을 북방 국경 지역에 배치하여 여진족을 방비하도록 하였다. 이는 공식 기록상의 수치이며, 실제 항왜의 정확한 규모는 전해지지 않는다.

김성인은 조선군 소속으로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경상도 병마절도사였던 박진(朴晋)이 그의 공적을 특별히 선조에게 계문(啓聞)하자, 선조는 김성인에게 관(冠)을 하사하며 공로를 치하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김성인은 스스로 북방 경비를 자원하여 나아가 또다시 공을 세웠다. 이후 즉위한 광해군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김씨(金氏) 성과 성인(誠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한 정 2품 문무관 품계인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교지(敎旨)를 내려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후 김성인은 벼슬에서 물러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함박동(咸博洞)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의 후손들은 처음 귀화하여 정착했던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4. 관직 및 하사

김성인(金誠仁)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후 많은 전공을 세웠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이 그의 공적을 특별히 보고하자, 선조는 김성인에게 관(冠)을 하사하였다.[1]

1603년(선조 36년)에는 자원하여 북방 경비에 나서 공을 세웠다.[1] 이에 광해군은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김(金)씨 성과 성인(誠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1] 또한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문무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교지(敎旨)를 내렸다.[1]

5. 은퇴 이후

김성인광해군 때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교지(敎旨)를 받은 후 벼슬에서 물러났다.[1] 이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함박동(咸博洞)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1] 그의 후손들은 김성인이 처음 조선에 들어온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1]

대한민국 건국 이후, 김성인의 후손들은 대종회를 결성하고 본관을 함박 김씨로 변경하였다.[1] 그러나 김성인계 김해 김씨는 세보(世譜)가 실전되어 정확한 후손 수를 파악하기 어렵고, 2010년 기준으로 약 4천여 명만이 함박 김씨로 본관을 변경한 것으로 파악된다.[1] 대종회는 나머지 후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으며, 비록 세보의 실전으로 확인은 어렵지만 김성인계 김해 김씨 본관은 현재에도 존속하고 있다.[1]

6. 후손 및 본관

김성인의 후손들은 그가 처음 조선에 귀화했을 때 머물렀던 김해(金海)를 관향으로 삼아 대대로 이어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김성인의 후손들이 대종회를 결성하고, 김성인이 정착하여 생을 마감한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함박동(咸博洞)의 지명을 따서 본관을 함박 김씨로 정했다.

그러나 김성인김해 김씨의 세보(世譜, 족보)가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후손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김성인의 후손 대부분은 여전히 김해 김씨를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2010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는 약 4천여 명만이 함박 김씨로 본관을 등록한 것으로 파악된다. 함박김씨 대종회에서는 후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본관 변경을 독려하고 있다. 김성인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 분파는 족보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현황 파악이 어려울 뿐,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7. 주요 인물


  • '''김귀성'''(金貴成) : 병자호란 참전하여 공적을 세움.
  • '''김흥발'''(金興發) : 인조 때 무과 급제.
  • '''김득추'''(金得秋) : 영조 대 인물.
  • '''김수태'''(金守泰) : 김득추의 아들, 가선대부 역임.

7. 1. 김귀성(金貴成)

김귀성( )은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공적을 세웠다.

7. 2. 김흥발(金興發)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무용(武勇)을 떨쳤다.

7. 3. 김득추(金得秋)

1733년(영조 9년)의 인물이다.

7. 4. 김수태(金守泰)

김득추(金得秋)의 아들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다.

참조

[1] 간행물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2]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16
[3] 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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