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 정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규슈 정벌은 1585년 시마즈 요시히사의 규슈 통일을 막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를 통일하기 위해 일으킨 일련의 군사 작전이다. 시마즈는 규슈 대부분을 장악하고 오토모 소린을 압박하자, 소린은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시마즈에게 정전령을 내렸지만 거부당하자, 각지의 다이묘를 소집하여 규슈 정벌에 나섰다. 모리 데루모토 등을 선봉으로,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시마즈를 압박했고, 결국 시마즈는 항복했다. 이후 히데요시는 규슈 국분령을 발표하고,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게 영지를 분배했다. 이 과정에서 히고 국인 일규, 바테렌 추방령 등이 발생했으며, 도요토미 정권의 전국 통일과 대외 정책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86년 일본 - 덴쇼 지진
덴쇼 지진은 1586년 일본 중부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여러 단층의 활동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일으켰으며, 규모는 M 7.8에서 M 8.2 사이로 추정된다. - 1587년 분쟁 - 헤쓰기가와 전투
헤쓰기가와 전투는 1586년 시마즈 가문과 오토모 가문 간의 전투로, 도요토미 연합군이 센고쿠 히데히사의 지휘 아래 시마즈 군에게 패배했으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의 계기가 되었다. - 1587년 일본 - 헤쓰기가와 전투
헤쓰기가와 전투는 1586년 시마즈 가문과 오토모 가문 간의 전투로, 도요토미 연합군이 센고쿠 히데히사의 지휘 아래 시마즈 군에게 패배했으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의 계기가 되었다. - 1587년 일본 - 바테렌 추방령
바테렌 추방령은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발표한 포고령이다.
규슈 정벌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분쟁 명칭 | 규슈 정벌 |
전체 | 센고쿠 시대 (일본) |
![]() | |
날짜 | 1586년 ~ 1587년 |
장소 | 규슈 전역 |
결과 | 시마즈 가문 항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 성공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도요토미 가문 |
교전국 1 추가 | 오토모 가문 |
교전국 1 추가 | 초소카베 가문 |
교전국 1 추가 | 모리 가문 |
교전국 2 | 시마즈 가문 |
교전국 2 추가 | 아키즈키 가문 |
지휘관 | |
지휘관 1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지휘관 1 추가 | 도요토미 히데나가 |
지휘관 1 추가 | 오토모 소린 |
지휘관 1 추가 | 초소카베 모토치카 |
지휘관 1 추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지휘관 2 | 시마즈 요시히사 |
지휘관 2 추가 | 시마즈 요시히로 |
지휘관 2 추가 | 시마즈 도시히사 |
지휘관 2 추가 | 시마즈 도요히사 |
지휘관 2 추가 | 시마즈 이에히사 |
지휘관 2 추가 | 아키즈키 다네자네 |
병력 규모 | |
병력 1 | 200,000명 |
병력 2 | 30,000명 |
관련 전투 | |
전투 목록 | 도시미쓰 헤쓰기가와 다카조 간자쿠 아키즈키 센다이가와 가고시마 |
결과 | |
영향 | 도요토미 가문의 규슈 정복 |
2. 배경
규슈 정벌은 히데요시가 1587년(덴쇼 15년) 규슈 지역에서 벌인 군사 행동이다. 이 사건은 "규슈 공략", "시마즈 공략", "규슈 정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도요토미 정권의 규슈 침공이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다. 오다-도요토미 정권의 전국 통일 과정의 일환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전)"이라고도 한다. 규슈 지역의 현(県)·시정촌(市町村) 공식 자료에서는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지만, 1983년에 간행된 『국사대사전』에서는 "규슈 정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5]
대일본제국 육군 참모본부가 편집한 "일본전사"에서는 대부분의 전쟁에 "역(役)"이라는 단어를 붙여 "규슈 역"이라고 칭했다. "역"은 원래 "인민을 공적인 일에 사용한다"는 의미로, 전쟁을 위해 백성을 징발하고 군사적으로 징용하는 것에서 유래한 표현이다.[6]
오와다 테츠오는 규슈 정벌의 시작 시기를 1587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 히데요시의 출병은 3월 1일, 시마즈 요시히사의 항복은 4월 21일이므로, 이는 사실상 마무리 단계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규슈 공략은 그 전해인 1586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 히데요시 측의 주역은 구로다 요시타카였다고 설명한다.[7]
히데요시는 규슈 국분안을 제시했으나 시마즈씨는 이를 거부했고,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모리씨와 초소카베씨 등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2. 1. 규슈의 정세
규슈 지방은 사쓰마의 시마즈씨 당주 시마즈 요시히사의 지휘 아래 휴가의 이토씨, 히고의 사가라씨, 아소씨, 히젠의 아리마씨, 류조지씨 등을 격파하였다. 또한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의 죽음으로 오토모씨의 지배가 느슨해진 지쿠고의 고쿠진들까지 산하에 넣어 규슈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규슈의 여러 다이묘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분고의 오토모 소린 역시 시마즈씨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당시 긴키·시코쿠·주고쿠 등지를 평정하고 일본 통일을 앞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8]간파쿠에 취임한 히데요시는 이 요청을 승낙하여, 덴쇼 13년(1585년) 10월에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에게 조정의 권위로 정전을 명령하였다(총무사령).[10] 그러나 시마즈씨는 이를 묵살하고 규슈 통일전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를 소집하여 규슈 정벌에 나섰다.[13]
시마즈 요시히사는 덴쇼 14년 (1586년) 1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의 명문 시마즈 가문이 히데요시와 같은 "벼락 출세자"를 간파쿠로 예우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10] 히데요시는 3월, 시마즈씨의 사자 가마다 마사치카에게 점령지의 과반수를 오토모씨에게 반환하는 국분안을 제시했지만, 시마즈 측은 "신의 뜻"으로 이를 거부[12]하고 오토모 공격을 재개하여 규슈 통일전을 진행했다.
시마즈씨 측으로서는, 이미 규슈의 대부분이 시마즈령이라는 현 상황을 무시한 히데요시의 규슈 국분안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12][14] 덴쇼 14년 4월 5일,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만나, 시마즈씨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해 줄 것을 간청했다.[15]
히데요시와 군감 (전투 봉행) 구로다 요시타카는, 규슈 공격에 있어서, 되도록 도요토미 본대를 사용하지 않고, 이미 히데요시에게 귀순한 모리 데루모토・깃카와 모토하루・고바야카와 다카카게나, 미야베 쓰구준 등의 중국의 다이묘, 또는 초소카베 모토치카・소고 야스치카 등의 시코쿠의 다이묘를 이용하려 했다.[7] 히데요시가 덴쇼 14년 4월 10일부로 모리 데루모토에게 보낸 각서에는, 성곽의 보강, 부젠·히고로부터 인질을 잡을 것, 서해도에 이르는 도로의 수리, 및 아카마가세키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에 병량 창고의 건조를 명령하고 있다.[16]
2. 2. 오토모 소린의 원군 요청
전국 시대 후반 규슈는 전국 다이묘 세 세력의 삼파전 항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오토모·류조지·시마즈의 삼씨 정립 시대"라고 부른다.[8] 그 중 사쓰마의 시마즈씨가 휴가의 이토씨, 히고의 사가라씨, 아소씨, 히젠의 아리마씨, 류조지씨 등을 격파하고, 다치바나 도세쓰의 죽음으로 오토모씨의 지배가 느슨해진 지쿠고의 구니인들도 산하에 두어 북규슈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규슈 평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9]분고의 오토모 소린은 시마즈씨의 압박을 피하고자 당시 긴키, 호쿠리쿠, 산요, 산인, 시코쿠를 평정하고 천하 통일의 길을 걷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청했다.
덴쇼 14년 (1586년) 4월 5일,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만나, 시마즈씨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해 줄 것을 간청했다.[15]
2. 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입
전국 시대 후반, 규슈는 오토모, 류조지, 시마즈 세 가문의 세력 다툼, 즉 "오토모·류조지·시마즈의 삼씨 정립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8] 그 중 사쓰마의 시마즈씨는 휴가의 이토씨, 히고의 사가라씨, 아소씨, 히젠의 아리마씨, 류조지씨 등을 격파하고, 오토모씨의 유력 가신 다치바나 도세쓰가 사망하며 오토모씨의 지배력이 약해진 지쿠고의 구니인들까지 휘하에 두면서 북규슈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 '''규슈 평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9] 분고의 오토모 소린은 시마즈씨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당시 긴키, 호쿠리쿠, 산요, 산인, 시코쿠를 평정하고 전국 통일을 향해 나아가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간파쿠가 된 히데요시는 이를 받아들여 덴쇼 13년 10월, 조정의 권위를 빌려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에게 정전을 명령했다. (\[\[소무사령|규슈 정전령]])[10] 오토모씨는 즉시 정전령을 받아들였으나, 시마즈씨는 가신들 간의 격렬한 논의 끝에 정전령 수용을 결정하고 가신 가마다 마사치카를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가마다는 시마즈가 이전 오다 노부나가와 고노에 사키히사의 중재에 따른 정전을 지키려 했으나 오토모씨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방어한 것이라고 변명했다.[10] 오토모 측 역시 같은 논리로 시마즈 측이 호사쓰 화평을 어겼다고 주장했다.[11]
덴쇼 14년 1월, 시마즈 요시히사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의 명문가인 시마즈가 히데요시와 같은 "벼락출세자"를 간파쿠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10] 3월, 히데요시는 시마즈씨의 사자 가마다 마사치카에게 점령지의 절반 이상을 오토모씨에게 돌려주라는 국분안을 제시했으나, 시마즈 측은 "신의 뜻"이라며 거부하고[12] 오토모 공격을 재개하여 규슈 통일전을 계속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오토모씨를 돕기 위해 규슈 공격을 시작했다.[13]
시마즈씨는 이미 규슈 대부분이 시마즈의 영토라는 현실을 무시한 히데요시의 규슈 국분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12][14] 덴쇼 14년 4월 5일,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만나 시마즈씨의 위협을 없애줄 것을 간청했다.[15]
히데요시는 규슈 공격에 되도록 자신의 주력 부대를 사용하지 않고, 이미 항복한 모리 데루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모리 가문이나, 미야베 쓰구준 등 주고쿠 지역 다이묘, 초소카베 모토치카, 소고 야스치카 등 시코쿠 지역 다이묘를 활용하려 했다.[7] 덴쇼 14년 4월 10일 히데요시가 모리 데루모토에게 보낸 각서에는 성곽 보강, 부젠·히고 지역 인질 확보, 서해도 방면 도로 정비, 아카마가세키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에 병량 창고 건설 등을 명령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16]
히데요시가 도착하기 전 규슈 통일을 원했던 시마즈군은 1586년(덴쇼 14년) 6월, 지쿠젠 침공을 시작했다. 6월 18일 시마즈 요시히사가 직접 가고시마를 출발, 7월 2일 히고 국야쓰시로에 도착했다.[8] 시마즈 타다나가, 이쥬인 타다무네가 선봉을 맡고, 시마즈 타다치카, 니이로 타다모토, 키타고 겐츄, 가와카미 타다카타 등이 뒤따르며 오토모 측 지쿠시 히로카도가 지키는 히젠 국 가쓰오 성(사가현도스시 고치마치)을 공격했다. 7월 6일 지쿠고 강을 사이에 둔 지쿠고 국 고라 산(후쿠오카현 구루메시)에 본진을 둔 시마즈군은 가쓰오 성의 지성을 공략, 지쿠시 하루카도가 지키는 히젠 다카토리 성(도스시 야마우라마치 나카하라)을 함락시키고 하루카도를 죽였다. 7월 10일 가쓰오 성도 항복했지만, 같은 날 히데요시는 시마즈씨 토벌군 파견을 결정했다.[8]
히데요시는 규슈 분할령을 받아들인 오토모 소린과 모리 데루모토에게 분할령 집행을 명령하고, 구로다 요시타카, 미야기 겐포, 안코쿠지 에케이를 검사역으로 임명했다. 히데요시는 분할 집행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모리 가문 외에 사누키 국다카마쓰 성 성주 센고쿠 히데히사, 도사 국오카토요 성 성주 초소카베 모토치카에게도 군사를 이끌고 규슈로 건너갈 것을 명령했다.[8] 한편, 시마즈군은 7월 12일 본진을 지쿠젠 덴파이 산 (후쿠오카현 지쿠시노시)으로 옮기고, 다카하시 쇼운이 지키는 지쿠젠 이와야 성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 다자이후), 쇼운의 장남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지키는 다치바나 산 성 (후쿠오카현 가스야군신구정 다치바나), 쇼운의 차남 다카하시 무네마스(후의 다치바나 나오쓰구)가 지키는 호만 산 성 (다자이후시 기타다니)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7월 13일 이후 3만 이상의 대군으로 이와야 성을 공격했으나, 다카하시 쇼운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다치바나 산 성으로 합류를 권유했지만, 쇼운은 700명의 병력으로 시마즈군을 저지하며 히데요시의 원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27일 시마즈군은 이와야 성을 함락시켰지만, 가미이 가쿠켄이 부상당하고 사망자가 수천 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오토모 측 기록에 따르면 쇼운은 자결했고, 1천여 명으로 늘어난 성 병력은 모두 전사하는 치열한 전투였다.[8]
8월 6일 시마즈군은 호만 산 성도 함락시켰지만, 다치바나 산 성은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견고한 방어에 함락시키지 못했다. 시마즈 타다나가와 이쥬인 타다무네는 무네시게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배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모리 군이 나가토 국 아카마세키(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까지 진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8] 8월 24일 시마즈군은 다치바나 성 공격을 포기하고 포위를 풀었으며, 다치바나 성 근처 다카토리이 성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스에마치 가미스에)에 호시노 시게타네, 호시노 시게모토 등 수비 병력을 남기고 철수했다. 8월 25일 무네시게는 다카토리이 성을 탈환했고, 8월 말까지 모리 선발대와 협력하여 시마즈군을 몰아내고 이와야 성, 호만 산 성을 되찾았다.[7]
3. 전개 과정
규슈 정벌은 도요토미 정권의 규슈 침공전으로, "규슈 공략", "시마즈 공략"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다-도요토미 정권의 천하 통일 사업의 일환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전)"이라고도 한다. 1983년 간행된 『국사대사전』에서는 "규슈 정벌"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5] 대일본제국 육군참모본부가 편집한 "일본전사"에서는 "규슈 역"으로 칭하고 있다.
오와다 테츠오는 덴쇼 15년(1587년) 3월 1일 히데요시의 규슈 출병, 4월 21일 시마즈 요시히사의 항복을 언급하며, 본격적인 규슈 공략은 그 전해인 1586년부터 시작되었고, 구로다 요시타카가 주역이었다고 설명한다.[7]
1585년 2월,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시마즈 요시히사를 규슈의 "다이슈"로 임명하고 오토모 공격을 명령했다.[17] 시마즈씨는 규슈 통일을 위해 오토모씨 영지인 부젠, 분고, 지쿠젠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1586년 3월, 히데요시는 시마즈씨에게 점령지의 대부분을 오토모씨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국분안을 제시하고, 4월에는 모리 데루모토에게 규슈 공격 준비를 지시했다. 또한 센고쿠 히데히사, 조소카베 모토치카 등을 분고에 파견하여 오토모씨를 지원하게 했다.[19]
1586년 4월 15일 모리 테루모토에게 규슈 선봉을 명령한 히데요시는 8월 6일 테루모토에게 규슈 출진을 재촉했다. 8월 16일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깃카와 모토하루가 각각 규슈로 진군했다.
8월 26일 모리 선발대는 부젠 고쿠라성(기타큐슈시고쿠라키타구) 공략 중 다카하시 모토타네 복병과 아키즈키 다네자네의 공격으로 모지성으로 후퇴했다. 이는 히데요시 측과 시마즈 측의 첫 교전이었다.
9월, 히데요시는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고, 소고・쵸소카베 양씨도 분고에 출진하여 오토모 씨와 합류했다. 히데요시 진영은 부젠국의 히로츠성, 토키에다성, 우사성, 지쿠젠국의 하나오성, 류가타케성을 귀복시켰다. 10월 초, 모리 테루모토는 구로다 효우타카,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규슈에 상륙하여 고쿠라성, 우루츠성을 공격했다. 10월 4일 고쿠라성이 함락되었고, 우마가타케성, 아사카와성, 켄가타케성도 함락되어 모리 세력에 귀복했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분고를 직접 공격하여 승부를 결정하려 했다.[8]
구로다 효우타카는 부젠 및 지쿠젠 지방의 시마즈 측 무장에게 배반 공작을 펼쳤다. 오와다 테츠오는 히데요시 본대가 규슈에 도착했을 때 히데요시의 위세에 눌려 귀복하는 형태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7]
10월 22일 시마즈 요시히사는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3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히고국 아소에서 규슈 산지를 넘어 분고로 침공시켰다. 요시히로 군은 츠가무레성을 함락시키고 오카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시가 지카쓰구의 저항으로 고전했다.
요시히사는 동생 시마즈 이에히사에게 1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휴가에서 북상하여 분고를 침공하게 했다. 이에히사 군은 마츠오성, 코마키성을 함락시키고 10월 23일 사에키 고레사다에게 사자를 보냈지만, 코레사다는 방비를 강화하고 11월 4일 츠가무레성을 나와 교전하여 시마즈 세력의 침공을 저지했다.
깃카와 모토하루는 마쓰야마성을 공격하고 11월 7일 우루츠성, 15일 쇼지다케성을 공격했다. 모토하루는 진중에서 병사했지만, 깃카와 세력은 다카하시 모토타네의 본성 카와라다케성을 20일 동안 공격하여 12월 초 항복시켰다. 이로써 부젠 대부분이 히데요시 측에 굴복했고, 분고에서의 전선이 남았다.
12월 1일 히데요시는 1587년 3월을 기한으로 시마즈 정벌에 나설 것을 알리고, 약 37개국에 20만 명의 병력을 오사카에 모을 것을 명령했다.[20] 고니시 다카사 등에게 30만 명분의 병량 쌀과 군마 2만 필의 사료 조달을, 이시다 미츠나리 등에게 병량 봉행을 맡겼다.[20]
분고 츠루가성은 오토모 소린의 거성 우에하라관과 니우지마성을 잇는 요충지였다.[15] 11월, 이에히사는 츠루가성을 공격했지만, 11월 25일 도미쓰 무네우오의 야습을 받았다.[15] 12월 6일 시마즈 이에히사는 츠루가성 공격을 시작하여 본 곡륜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도지강에서 시마즈 군을 막기 위해 12월 11일 사국 세력 6천 명을 출진시켰다.[8] 12월 12일 도지강 전투가 시작되었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제지를 듣지 않고 도지강 도하 작전을 강행했다. 시마즈 세력의 급습으로 히데히사가 패주하고, 도요토미 측은 2,000명의 병력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소고 마사야스 등 유력 무장을 잃었다.[22]
12월 13일 시마즈 군은 오토모 요시무네가 버린 후나이성을 함락시키고 오토모 소린이 지키는 니우지마성(우스키성)을 포위했다. 소린은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화승총 사격으로 시마즈 군에 승리했다.[23] 시마즈 군은 기쓰키성을 공격했지만 기쓰키 다다나오의 저항으로 패배했고, 분고 남부에서는 사에키 고레사다가 시마즈 측 성들을 탈환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군은 12월 14일 야마노성에서 겨울을 보냈다.
3. 1. 시마즈 가문의 규슈 통일 시도 (1585-1586)
규슈 지방은 시마즈 요시히사의 지휘 아래 이토씨, 히고의 사가라씨, 아소씨, 히젠의 아리마씨, 류조지씨 등을 격파하고, 다치바나 도세쓰의 죽음으로 오토모씨의 지배가 느슨해진 지쿠고의 고쿠진들까지 산하에 넣어 규슈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9] 오토모 소린은 시마즈씨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간파쿠에 취임한 히데요시는 이 요청을 승낙하여, 1585년 10월에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에게 조정의 권위로 정전 명령(총무사령)을 내렸다.[10] 그러나 시마즈씨는 이를 묵살하고 규슈 통일전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를 소집하여 규슈 정벌에 나섰다.[13]
시마즈씨는 규슈 통일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오토모씨의 영지인 부젠, 분고, 지쿠젠 침공을 개시하였다. 일본사학자 이케가미 히로코는 "시마즈는 자력으로 규슈의 대부분을 평정하여 그 실적을 히데요시에게 인정받으려고 생각했다"라고 평하였다.[18]
1586년, 시마즈 씨족은 히데요시의 침략 계획을 듣고 다치바나 성 포위를 풀고, 군대의 상당 부분을 히고국으로 철수시키는 한편, 나머지는 분고국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들은 오토모 씨족으로부터 후나이성을 점령하고 침략을 준비했다.[3]
오토모 씨족은 센고쿠 히데히사, 소고 마사야스, 조소카베 모토치카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비록 분고국은 결국 시마즈에게 함락되었지만, 센고쿠와 조소카베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도착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을 지연시키고 약화시켰다.
전국 시대 후반의 규슈는, 전국 다이묘 세 세력에 의한 삼파전의 항쟁이 펼쳐졌는데, 이를 "오토모·류조지·시마즈의 삼씨 정립 시대" 등으로 칭하는 경우가 있다.[8] 1585년 2월,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시마즈 요시히사를 규슈의 "다이슈"로 임명하여 귀락(歸洛) 시의 원조와 오토모 공격을 명령했고, 요시히사는 이에 응했다.[17]
1586년 3월, 히데요시는 시마즈씨의 사자 가마다 마사치카에게 점령지의 대부분을 오토모씨에게 반환하는 국분안을 제시했지만, 시마즈 측은 "신의 뜻"으로 이를 거부했다.[12] 4월에는 모리 데루모토에게 규슈 공격을 위한 인원, 성곽, 병량 등의 준비를 지시했다. 또한 센고쿠 히데히사, 조소카베 모토치카 등을 분고에 파견하여 오토모씨를 돕게 하고, 8월에는 오토모 소린·요시무네 부자(父子)와 다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서신을 보내, 구로다 요시타카, 미야키 도요모리 등의 부젠 출진을 전했다.[19]
3. 2. 도요토미 군의 선봉 출진 (1586)
1586년(덴쇼 14년)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착하기 전에 규슈 통일을 달성하고자 지쿠젠 침공을 개시하여 지쿠젠 서부를 제압했다. 다카하시 쇼운이 지키는 이와야 성,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지키는 다치바나성, 다카하시 무네마스가 지키는 호만 산성만을 남겨두고 있었다.그해 7월, 시마즈 군은 3만 이상의 대군으로 이와야 성을 공격하였으나, 다카하시 쇼운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했다. 우와이 가쿠겐이 부상당하고 전사자가 수천 명에 이르는 손해를 입으며 간신히 공략하였다. 그 직후 호만 산성도 함락되었으나, 다치바나 성은 공략을 포기하고 포위를 풀고 분고 침공으로 방침을 전환하였다. 이때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철수하는 시마즈 군을 바짝 추격하여 이와야 성과 호만 산성을 탈환하였다.[7]
한편, 히데요시는 같은 해 9월에 모리씨에게 출진을 명하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이 군세를 이끌고 부젠으로 출진하였다.
또한, 시코쿠의 소고 마사야스, 조소카베 모토치카·노부치카도 분고로 출진하여 오토모씨와 합류했다. 10월에는 다카하시 모토타네의 고쿠라성 등을 공략하였으나, 오토모 가문의 가신단 내분으로 일시적인 탈환에 그쳤다.
한편, 시마즈 가문은 휴가국에서 시마즈 이에히사, 히고국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각각 총대장으로 삼아 분고에 일제 침공을 개시하였다.
요시히로 군은 오카 성의 시가 지카쓰구의 격렬한 저항으로 고전하여 정체하였다. 이에히사 군은 10월에 사에키 고레사다에게 한 번 패배하였으나, 12월에는 사에키를 우회하여 북상, 쓰루가성 공략 중에 오토모씨의 원군으로 온 도요토미 군과 정면 충돌하였다. 이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감으로 한 도요토미 군은 조소카베 노부치카, 소고 마사야스 등 유력 무장이 전사하는 대패를 맛보았다.[22]
시마즈 군은 기세를 이어 오토모 요시무네가 포기한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 후나이를 손에 넣고, 오토모 소린이 지키는 우스키성을 포위하였다. 소린은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거대 화포 사격 등으로 시마즈 군의 공세를 버텨냈다.[23] 그 후 시마즈 군은 북상하여 기쓰키성을 공격하였으나 기쓰키 시게나오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더욱이 분고 남부의 사에키 고레사다가 시마즈 가문에게 빼앗긴 성들을 탈환하여 후방이 차단되고, 시마즈 요시히로 군이 시가 지카쓰구에게 여러 번 패배하는 등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이윽고 1587년 3월에는 도요토미의 대군이 부젠에 도착하여 분고에서의 결전이 불가능해진 시마즈 군은 시가, 사에키 등의 격렬한 반격을 받으면서 휴가로 철수하였다.
3. 3. 도요토미 군 본대 출진 (1587)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침공 군령을 발하여, 3월에는 직접 출진하였다. 히고 방면은 히데요시가, 휴가 방면은 동생 히데나가가 이끄는 총 20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히데요시의 규슈 상륙 소식에 시마즈 군은 규슈 북부 대부분을 포기했고, 시마즈 씨의 지배는 급속히 붕괴되어 도요토미 군은 순식간에 시마즈 측 성들을 함락시켰다. 시마즈 군은 본국 사쓰마 수비를 강화하는 방침으로 전환하였다.[24][25][26]히데나가 군은 분고를 거쳐 휴가로 들어가 야마다 아리노부가 지키는 다카 성(高城)을 포위하였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원군을 이끌고 왔으나, 네지로자카 전투에서 시마즈 다다치카가 전사하는 등 대패하고 다카 성도 함락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도노고리 성(都於郡城)을 공략하고 이와무레 성(岩牟礼城)까지 진군하였다. 요시히로는 이이노 성에서 농성하며 철저 항전 자세를 굳혔다.
한편 히데요시 본대는 지쿠젠으로 침공, 선봉 가모 우지사토, 마에다 도시이에 부대는 아키즈키 다네자네의 간자쿠 성(岩石城)을 하루만에 공략하였다. 아키즈키 군은 마스토미 성(益富城)을 포기하고 고쇼 산성(古処山城)으로 후퇴하였다. 히데요시는 밤에 농민에게 횃불을 들게 하여 지쿠젠을 불바다로 만들고, 다음날 파괴한 마스토미 성을 하루만에 다시 지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등 압도적인 물량 차이를 과시하여 아키즈키 측 전의를 상실시켜 항복을 받아냈다.[25]
히젠의 류조지씨는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히데요시와 내통하여 귀순하였다. 시마바라 방면에서 아리마 하루노부가 항복하자, 시마즈 다다토키는 다카다(高田, 현 야쓰시로시 남부)를 포기하고 이즈미까지 철수하였다. 히데요시는 야쓰시로, 미나마타를 거쳐 이즈미까지 진군, 이즈미 성(出水城) 성주 시마즈 다다토키를 항복시켰다. 나아가 센다이까지 진군하여 다이헤이지(泰平寺)에 본진을 설치하였다.
히데요시는 1587년 규슈 동해안의 다카조에서 시마즈를 공격하며 분고 남쪽에 상륙한 이복형제 하시바 히데나가와 합류, 시마즈 본거지 가고시마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결국 가고시마는 공격받지 않고 시마즈는 항복, 히데요시는 고호조 씨족의 간토에 집중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1590년대 대부분 규슈를 활용, 조선을 공격했다.
- 헤쓰기가와 전투 - 시코쿠 무장들은 오토모 군과 함께 시마즈 군과 전투를 벌여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퇴각하여 분고 국을 시마즈에게 넘겨주었다.
- 타카조 전투 (타카시로 전투) - 도요토미 히데나가는 휴가 국에서 시마즈 군을 공격, 사쓰마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 간자쿠 성 포위전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북부 지쿠젠 국의 아키즈키 씨를 공격했다.
- 아키즈키 성 포위전 - 히데요시는 오구마 성에서 아키즈키 씨 공격을 계속, 아키즈키 씨는 항복했다.
- 센다이가와 전투 (치도리가와 전투) - 히데요시와 히데나가가 연합, 사쓰마 국 공격을 시작했다.
- 가고시마 성 포위전 - 히데요시와 히데나가는 시마즈 수도를 포위, 성을 포위하지 않고 항복을 받아냈다.
1586년 12월 1일, 히데요시는 고니시 류사 등 4명의 봉행에게 30만 명분의 병량미와 말 2만 필 분의 사료를 1년분 조달, 각지에서 아마가사키(尼崎)로 수송하게 했다.[24] 1587년 정초, 히데요시는 연하 축하 자리에서 규슈 침공 부서를 여러 다이묘에게 전하고 군령을 내렸다. 1월 25일 우키타 히데이에를 시작으로, 2월 10일 동생 히데나가, 3월 1일 직접 출진했다. 히데요시 출진에 즈음하여 칙사, 공가 및 오다 노부오 등이 전송했다.[25] 히데요시는 출진 당시 전 봉행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보낸 주인장에 "야윈 성들은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리듯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26]
도요토미 군 진영은 다음과 같다.
구분 | 부대 | 지휘관 |
---|---|---|
히고 표진[27] | 1번대 | 모리 요시나리, 다카하시 모토타네, 조이 아사후사 |
2번대 | 마에노 나가야스, 아카마쓰 히로히데, 아카시 노리자네, 벳쇼 시게무네 | |
3번대 | 나카가와 히데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다카야마 나가후사 | |
4번대 | 호소카와 타다오키, 오카모토 요시카츠 | |
5번대 | 니와 나가시게, 이코마 치카마사 | |
6번대 | 이케다 테루마사, 하야시 타메타다, 이나바 사다미치 | |
7번대 | 하세가와 히데카즈, 아오야마 타다모토, 키무라 시게모리, 오타 가즈요시 | |
8번대 | 호리 히데마사, 무라카미 요시아키 | |
9번대 | 가모 우지사토 | |
10번대 | 마에다 토시이에 | |
11번대 | 도요토미 히데카츠 | |
총대장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구분 | 부대 | 지휘관 |
---|---|---|
휴가 표진[27] | 1번대 | 구로다 요시타카, 하치스카 이에마사 |
2번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기카와 모토나가 | |
3번대 | 모리 데루모토 | |
4번대 | 우키타 히데이에, 미야베 쓰구준 외 인바(因幡) 무리 (가메이 코레노리, 기노시타 시게카타, 가키야 미츠나리, 난조 모토츠구) | |
5번대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
번외 | 쓰쓰이 사다쓰구, 미조구치 히데카츠, 모리 타다마사, 오토모 요시시게,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조소카베 모토치카 | |
총대장 | 도요토미 히데나가 |
이시다 미츠나리, 오타니 요시츠구, 나가츠카 마사이에가 병량 봉행을 맡아 병량 확보 및 수송에 힘썼다. 가미가타에서의 수송에는 셋츠아마가사키 항(효고현아마가사키시)이 주로 사용되었다.
히데요시와 히데나가의 규슈 동시 침공을 감지한 시마즈 군은 북부 규슈를 반쯤 포기, 도요토미 군은 시마즈 측 성 대부분을 함락시켰다. 시마즈 씨는 사쓰마, 오스미, 휴가 방비를 굳히는 방침으로 변경했다.
히젠국 (사가현·나가사키현)에서도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이 수백 명 출동, 전투는 규슈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히데나가는 3월 초순 고쿠라에 도착했다. 시마즈 이에히사가 분고 마쓰오성 (오이타현 분고오노시 미에마치 마쓰오)로 이동, 후나이성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있었지만, 도요토미 측은 분고를 즉시 공격하지 않고 고야산 승려 모쿠지키 오키를 사자로 후나이성에 보내 히데요시와의 강화 교섭을 권유했다.[8] 요시히로는 거부 후 이에히사와 분고에서 철수했다. 도요토미 측 추격에 3월 18일 시마즈군은 분고·휴가 국경에서 오토모 가신·사에키 코레사다의 추격을 받았다 (아즈시고에 전투). 19일, 요시히로는 다카조 (미야자키현 코유군 기조초 다카조)로 이동, 3월 20일 이에히사와 휴가 토노코오리성 (미야자키현 사이토시 토노코오리)으로 물러나 요시히사를 포함한 형제 3명은 군의를 열었다.[8]
히데요시는 3월 1일 오사카성을 출발, 산요도를 거쳐 3월 25일 아카마세키에 도착했다.[28] 아카마세키에서 히데나가와 규슈 공격 협의를 진행, 히데나가가 동 규슈 분고, 휴가를 거쳐 사쓰마로, 히데요시가 서 규슈 지쿠젠, 히고를 거쳐 사쓰마로 향하는 것이 약속되었다.
히데나가 군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미야베 게이준 등 산요산인 군세와 합류, 분고에서 휴가로 들어가 현 (미야자키현 노베오카시)을 거쳐 3월 29일 휴가 마쓰오성 (노베오카시 마쓰야마)을 함락, 4월 6일 미미가와를 건너 야마다 아리노부가 지키는 다카조 (키조초)를 포위했다. 히데나가는 성을 열 겹, 스무 겹으로 포위, 병량 공세를 펼치며 토노코오리성 후속 지원군을 예상, 네시로자카 (코유군 기조초 네시로자카)에 성채를 쌓았다.
4월 17일, 시마즈 요시히사·요시히로·이에히사가 2만 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8] 요새 수장 미야베 게이준 중심 1만 군세가 해자, 판자 울타리 등으로 요새를 굳혔지만, 포위되는 형세가 되었다. 도도 다카토라, 구로다 나가마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후속 지원군 가세로 격렬한 전투(네시로자카 전투)가 벌어졌다. 시마즈 측은 네시로자카 돌파 실패, 시마즈 타다치카 전사 등 대패했다. 요시히사·요시히로는 토노코오리성으로 물러났고, 이에히사도 사도와라성 (미야자키시 사도와라마치)으로 병력을 이끌었다.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토노코오리성 함락, 미쓰야마 (미야자키현 고바야시시)·노지리 경계 이와무레성 (고바야시시)까지 침공했다. 요시히로는 이노성 (미야자키현 에비노시 이노)에 갇혔다.
히데요시는 미야베 게이준의 휴가국 다카조 시마즈 이에히사 군 격퇴를 두고 "법인(게이준) 일은 이제 시작하지 않은 교활한 자이다" (『가와스미 다이코키』)라고 칭찬했다.
이 전투는 분고국 방비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 회전 토지키와 전투에 임했다 패배한 센고쿠 히데히사 실책을 만회, 히데요시 규슈 평정 공고, 오토모 요시시게 구원 전투였다.
히데요시는 아카마세키 군의 후 배를 타고 규슈 지쿠젠으로 향했다. 음력 3월 28일 코쿠라성 도착, 29일 부젠 마가타케(유쿠하시시 오타니) 진군, 시마즈 측 아키즈키 타네자네 본거지 지쿠젠 코쇼산성(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 아키즈키)・부젠 간세키성(후쿠오카현 다카와군 소에다마치 마스다) 공격을 결정했다.
3월 29일 군의에서 히데요시는 간세키성 견고 판단, 도요토미 히데카츠・가모 우지사토・마에다 토시나가 억제 부대, 호소카와 타다오키・나카가와 히데마사・호리 히데마사 코쇼산성 공격 투입 예정이었다. 우지사토・토시나가 간세키성 공격 주장,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카츠 대장, 선봉 가모 우지사토・마에다 토시나가 부대에 간세키성 공격 명령했다. 음력 4월 1일 전투 시작, 가모군 정문, 마에다군 후문 맹공, 하루 만에 함락했다. 성병 3,000명 중 약 400명 전사 격렬한 전투였다.[8]
아키즈키 타네자네는 전투 모습 지쿠젠 마스토미성(후쿠오카현 카마시 오쿠마)에서 엿보다 패색 판단, 마스토미성 파각, 본거지 코쇼산성 철수했다. 히데요시 5만 군세 코쇼산성 공격, 밤에 농민 횃불, 다음 날 아키즈키 측 파각 마스토미성 성벽 봉서지 이용 하룻밤 개수처럼 보이게, 아키즈키 측 전의 상실 성공.[25] 음력 4월 3일 아키즈키 타네자네 삭발, 아들 아키즈키 타네나가와 항복했다. 타네자네는 다기 "나라시바 어깨걸이(楢柴肩衝)"와 "구니토시의 칼" 및 딸 료시(후에, 키이 토모후사 정실)을 히데요시에게 바쳤다.
간세키성 하루 함락, 아키즈키 타네자네 3일 항복은 선전 효과, 전황 결정적 영향이었다. 히데요시 적대 시마즈 측 재지 세력 잇따라 신종했다. 쿠로다 요시타카 사전 정비 효험, 히데요시 대군에 대부분 무장 전의 상실.[8]
음력 4월 10일 히데요시 지쿠고 타카라산, 16일 히고 구마모토(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19일 히고 야츠시로(구마모토현 야츠시로시) 도착했다. 히젠 류조지씨 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 히데요시 내통, 도요토미군 귀참했다. 시마바라 방면 아리마 하루노부 시마즈 측 배반, 히데요시 측 되었다.
히데요시 대군 도래, 타카다(야츠시로시 타카다) 진주 시마즈 타다토키 포기, 사쓰마국 이즈미(가고시마현 이즈미시) 철수했다.
3. 4. 도요토미 군의 진용
다음은 규슈 정벌에서 도요토미 군의 진용에 대한 내용이다.히데요시는 덴쇼 15년(1587년) 정초에 여러 다이묘에게 규슈 침공 부서를 알리고 군령을 내렸다. 3월 1일, 히데요시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진했으며, 칙사와 오다 노부오 등이 전송했다.[25] 히데요시는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보낸 주인장에서 "야윈 성들은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리듯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26]
도요토미 군은 히데요시가 이끄는 히고 방면군과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끄는 휴가 방면군으로 나뉘어 총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번대 | 주요 인물 |
---|---|
1 | 모리 요시나리, 다카하시 모토타네, 기이 도모후사 |
2 | 마에노 나가야스, 아카마쓰 히로히데, 아카시 노리자네, 벳쇼 시게무네 |
3 | 나카가와 히데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다카야마 우콘 |
4 | 호소카와 다다오키, 오카모토 무네노리 |
5 | 니와 나가시게, 이코마 지카마사 |
6 | 이케다 데루마사, 하야시 다메타다, 이나바 사다미치 |
7 | 하세가와 히데카즈, 아오야마 다다모토, 아라키 시게코레, 오타 가즈요시 |
8 | 호리 히데마사, 무라카미 요리카쓰 |
9 | 가모 우지사토 |
10 | 마에다 도시이에 |
11 | 도요토미 히데카쓰 |
총대장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번대 | 주요 인물 |
---|---|
1 | 구로다 요시타카, 하치스카 이에마사 |
2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깃카와 모토나가 |
3 | 모리 데루모토 |
4 | 우키타 히데이에, 이나바슈 (미야베 게이준, 가메이 고레노리, 기노시타 시게카타, 가키야 미쓰나리, 난조 모토쓰구) |
5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번외 | 쓰쓰이 사다쓰구, 미조구치 히데카쓰, 모리 다다마사, 오토모 요시무네,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라, 구키 요시타카, 조소카베 모토치카 |
총대장 | 도요토미 히데나가 |
이시다 미츠나리, 오타니 요시츠구, 나가츠카 마사이에는 병량 봉행을 맡아 병량 확보 및 수송을 담당했다. 셋쓰 아마가사키 항(효고현 아마가사키시)이 수송에 주로 사용되었다.
시마즈 군은 도요토미 군의 동시 침공을 감지하고 북부 규슈를 반쯤 포기했으며, 도요토미 군은 시마즈 측 성의 대부분을 빠르게 함락시켰다. 시마즈 씨는 사쓰마, 오스미, 휴가의 방비를 강화하는 방침으로 변경했다. 히젠국에서는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끄는 군이 도요토미 군을 원호했다.
3. 5. 시마즈 가문의 항복
덴쇼 14년(1586년) 말부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모쿠지키 오고가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의향에 따라 화평 공작을 진행했고, 시마즈 요시히사도 화의에 응할 뜻을 보였다. 요시히사는 삭발하고 류하쿠(龍伯)라는 법명으로 출가하여, 덴쇼 15년(1587년) 5월 8일, 다이헤이지(泰平寺)에 머무르고 있던 히데요시를 방문하여 항복하였다.[8] 히데요시는 요시히사의 항복 의사를 이미 전해 듣고 있었고, 요시히사가 검은색 법의로 속세를 떠날 자세를 보였으므로, “목숨을 버리고 달려와 항복하였으니 사면하겠다”라며 요시히사를 사면하였다.히데요시는 4월 25일에 히고 사시키(구마모토현 아시키타군아시키타정), 26일에는 히고 미나마타(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로 진군했다. 4월 27일에는 시마즈 측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히데요시가 사쓰마 국내로 진군하자, 이즈미성(이즈미시)의 성주 시마즈 타다토키, 미야노조 (가고시마현 사쓰마군사쓰마정)의 성주 시마즈 타다나가 등이 항복했다.
4월 28일 저녁, 히라사성(사쓰마센다이시히라사정)에서 저항하고 있던 카츠라 타다아키는 당주 요시히사로부터 항복 권유 서장을 받았다. 요시히사는 이미 항복했으며, 더 이상 싸우는 것은 시마즈 가문의 전후 처리에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30] 4월 29일, 타다아키는 요시히사의 명령에 따라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항복 의사를 전했다.[30]
히데요시는 5월 1일 이즈미에서 아쿠네(가고시마현 아쿠네시)로 이동, 3일에는 센다이의 타이헤이지 (사쓰마센다이시 다이쇼지초)에 본진을 두었다. 타다아키는 타이헤이지에서 히데요시에게 배알하여 그 무용을 칭찬받고, 명도 호쥬를 하사받았다.[30]
시마즈 가문의 당주 요시히사는 5월 6일 가고시마를 출발, 이주인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의 셋소인에서 삭발하고 이름을 "류하쿠"로 고쳐 출가했다.[31]
4. 전후 처리
시마즈 요시히사가 항복한 후에도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저항했으나, 결국 요시히로도 5월 22일 항복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7일 하코자키 하치만구에서 규슈 국분령을 발표하고,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11개조의 '조목'을 내려 규슈 지역의 통치 방침을 지시했다.
시마즈 가문은 새로 획득한 영지 대부분을 몰수당했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와 이주인 다다무네의 전후 처리로 사쓰마 1국을 안도받았다. 시마즈 이에히사는 6월 5일 급사했는데, 그의 아들 시마즈 도요히사는 휴가 사도와라를 안도받았다. 오토모 소린과 조소카베 모토치카에게 각각 휴가와 오스미를 주려 했으나, 두 사람이 고사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오스미 국과 휴가 일부가 주어졌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분고 1국과 부젠 우사 군 반 군을 안도받았고, 히고국은 대부분 삿사 나리마사에게 주어졌으며, 히고 국인(国人)들은 그의 가신단으로서 본래 영지를 안도받았다. 사가라 요리후사에게는 히고 히토요시가 안도되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는 지쿠젠, 지쿠고, 히젠 1군 약 37만 석, 구로다 요시타카에게는 부젠 국 6군 약 12만 5,000석, 모리 요시나리에게는 부젠 2군 약 6만 석, 다치바나 무네시게에게는 지쿠고 야나가와성 13만 2,000석, 모리 가쓰노부에게는 부젠 고쿠라 약 6만 석을 각각 주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지쿠고 3군을 고바야카와 히데카네에게 나누어 주었다. 류조지 마사이에, 오무라 요시자네, 마쓰우라 시게노부는 각각 히젠 국 내 소령을, 소 씨에게는 쓰시마국을 안도받았다.
규슈를 '당나라 진입'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는 의도로 대규모 창입지가 설정되었다. 아키즈키 다네자네는 휴가 구시마와 다카나베로 이봉되었고, 이토 스케타카는 휴가 오비 등을 받았다. 히데요시는 하카타 부흥을 추진하고 직할화했으며, 예수회령이었던 나가사키 등을 몰수하고 6월 19일 바테렌 추방령을 내려 기독교를 금지했다. 후카보리 쥰켄은 해적 정지령 위반으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4. 1. 규슈 국분

시마즈 요시히사가 항복한 후에도,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이노 성에서 농성하고, 시마즈 다다치카를 잃은 시마즈 도시히사 등이 저항을 계속했다. 5월 22일, 요시히로는 요시히사의 설득으로 아들 시마즈 히사보를 인질로 보내고 항복했다.[25]
6월 7일, 히데요시 본대는 지쿠젠 하코자키(후쿠오카시 히가시구 하코자키)에 도착하여 하코자키 하치만구에서 규슈 국분령을 발표했다.
5월 13일, 히데요시는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11개조의 '조목'을 내렸다. 주요 내용은 오토모 소린에게 휴가국을 주고, 오스미국을 조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주며, 구로다 요시타카,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깃카와 모토나가를 사쓰마국으로 이동시키고, 분고국과 부젠국의 성을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시마즈 가문은 규슈에서 새로 얻은 대부분의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와 이주인 다다무네의 전후 처리로 사쓰마 1국을 안도받았다. 시마즈 이에히사는 6월 5일 급사했는데, 그의 아들 시마즈 도요히사에게는 휴가 사도와라가 안도되었다.[25]
히데요시는 히데나가를 통해 오토모 소린에게 휴가 1국을 주고 이토 스케타카를 요리키(與力)로 삼게 했다. 또한 오스미 국의 거의 1국(이주인 다다무네 영지 1군 제외)을 조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주려고 했으나, 소린과 모토치카가 모두 사양하여 실행되지 않았다.[32] 소린은 5월 23일 사망했다. 그 결과,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오스미 국(히데요시 직할지, 이주인 다다무네 영지 1군 제외)과 휴가 모로카타 군이 주어졌고,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히사보에게는 모로카타 군의 마사키인이 주어졌다.

오토모 요시무네에게는 분고 1국과 부젠 우사 군 반 군이 안도되었다. 휴가 아가타(노베오카)와 미야자키에는 다카하시 모토타네가 이주했다. 히고국은 대부분 삿사 나리마사에게 주어졌고, 히고 국인(国人)들은 그의 가신단으로서 본래 영지를 안도받았다. 히고 히토요시(히토요시시)는 사가라 요리후사에게 안도되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는 지쿠젠, 지쿠고, 히젠 1군 약 37만 석, 구로다 요시타카에게는 부젠 국 중 6(5.5)군(교토, 나카쓰, 지쿠조, 가미게, 시모게, 우사 반 군) 약 12만 5,000석, 모리 요시나리에게는 부젠 기쿠군·다카가와군 약 6만 석, 다치바나 무네시게에게는 지쿠고 야나가와성(후쿠오카현야나가와시) 13만 2,000석, 모리 가쓰노부에게는 부젠 고쿠라(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약 6만 석을 각각 주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지쿠고 3군을 고바야카와 히데카네에게 나누어 주었다. 류조지 마사이에, 오무라 요시자네, 마쓰우라 시게노부는 각각 히젠 국 내 소령을, 소 씨에게는 쓰시마국을 안도받았다. 또한, 대규모 창입지가 설정되었는데, 이는 규슈를 '당나라 진입'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는 의도였다.[33]
그 외, 아키즈키 다네자네가 휴가 구시마(구시마시)와 다카나베(다카나베정)로 이봉되었다.[34] 이토 스케타카에게는 휴가 오비(미야자키현 니치난시)와 소이(미야자키시 소이), 기요타케(미야자키시 기요타케정)가 주어졌지만, 오비성의 시마즈 가신 우에하라 나오치카는 성을 넘겨주지 않았다.(약 1년 후 요시히사의 설득으로 퇴거했다)[4]
히데요시는 하카타(후쿠오카시하카타구) 부흥을 추진하고 직할화했다.[35] 또한 히젠 나가사키, 우라가미, 모기가 예수회령임을 알고 6월 19일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고, 다음 날 가스파르 코엘료에게 통지하여 기독교를 금지했다.[36] 후카보리 쥰켄은 해적 정지령 위반으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4. 2. 바테렌 추방령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상경하여 귀환하는 길에 폐허가 된 하카타(후쿠오카시 하카타구)를 부흥시키고 직할화했다.[35] 또한 히젠의 나가사키, 우라가미, 모기가 예수회 영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6월 19일 하코자키에서 바테렌 추방령을 내렸다.[36] 다음 날인 20일, 히데요시를 알현하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온 가스파르 코엘료에게 추방령을 통지하고 기독교를 금지했다.
오무라 씨와 대립하며 나가사키 항을 습격하고, 남만선에서 통행료 징수를 강요하던 후카보리 쥰켄은 해적 정지령 위반으로 소령을 몰수당했다.
5. 영향
구로다 요시타카는 부젠의 영토화를 서둘렀기 때문에 부젠 국인 일규를 초래했지만, 요시타카의 신속한 대응으로 곧 진압되어 국인 대부분이 처형되었고, 요시타카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휴가 다카치호 (미야자키현 니시우스키군 다카치호정)의 영주인 미타이 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영지 보장 소식도, 몰수 소식도 받지 못했다. 다카하시 모토타네는 미타이 씨를 따르게 하려고 진군하여 공격, 멸망시켰다.
시마즈 가문은 영지 상실에 따른 재정 문제가 발생하여, 이주인 히사하루, 가미이 가쿠켄 등 급지를 잃은 가신들에 대한 보충이 어려웠다. 교토 시내의 상인과 과선으로부터의 차용, 구라지리의 입질 및 매매를 통해 재정난을 극복하려 했다.[37] 또한, 이 재정난은 공의로부터도 질책받았다.[4] 재정난 극복을 위해 검지가 행해졌지만, 이러한 시책에 대한 불만이 훗날 우메키타 일규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4]
5. 1. 도요토미 정권의 전국 통일 완성
일본 서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류큐에 종속을 요구하며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일본 동부의 평정 역시 개시하여, 간토의 호조 가문과 오슈의 다테 가문으로 창 끝을 돌렸다.[1]삿사 나리마사는 히고의 영국화를 지나치게 서두른 나머지, 영지를 받은 바로 다음 달에 겐치(토지 조사)를 시행하였다. 이는 즉시 고쿠진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히고 고쿠진 잇키(肥後国人一揆)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나리마사는 실책을 추궁받아 할복하고, 고쿠진도 대부분이 처형당하였다. 그 후 히고의 북쪽 절반은 가토 기요마사, 히토요시(人吉)를 제외한 남쪽 절반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가 되었다.[2]
시마즈 가문은 많은 영지를 잃었으므로 재정 문제가 발생하여, 이주인 히사하루, 우와이 가쿠겐 등 영지를 잃은 가신에게 대신할 땅을 주지 못하여, 교토 등에서 돈을 빌리고, 다이묘의 직할지를 매매하는 등 여러 수단으로 재정난 극복을 강구하였다. 또한, 재정난 극복을 위하여 토지 조사도 시행되었으나, 이것이 가신들의 불만을 부추겨 후의 우메키타 잇키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3]
5. 2. 히고 국인 잇키
삿사 나리마사는 히고의 영토화를 서두른 나머지, 영지를 받은 그 다음 달에 겐치(検地, 토지 조사)를 시행하였다. 이는 즉시 고쿠진(国人)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히고 국인 일규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나리마사는 실책을 추궁받아 할복하고, 고쿠진도 대부분이 처형되었다. 그 후 히고의 북쪽 절반은 가토 기요마사가, 히토요시를 제외한 남쪽 절반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영유하게 되었다.[37]5. 3. 대외 정책의 변화
일본 서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류큐에 종속을 요구하며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일본 동부 평정 역시 개시하여, 간토의 호조 가문과 오슈의 다테 가문으로 창 끝을 돌렸다.[1]삿사 나리마사는 히고의 영국화를 지나치게 서두른 나머지, 영지를 받은 바로 다음 달에 겐치(토지 조사)를 시행하였다. 이는 즉시 고쿠진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히고 고쿠진 잇키(肥後国人一揆)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나리마사는 실책을 추궁받아 할복하고, 고쿠진도 대부분 처형당하였다. 그 후 히고의 북쪽 절반은 가토 기요마사, 히토요시(人吉)를 제외한 남쪽 절반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가 되었다.[1]
시마즈 가문은 많은 영지를 잃었으므로 재정 문제가 발생하여, 이주인 히사하루, 우와이 가쿠겐 등 영지를 잃은 가신에게 대신할 땅을 주지 못하여, 교토 등에서 돈을 빌리고, 다이묘의 직할지를 매매하는 등 여러 수단으로 재정난 극복을 강구하였다. 또한, 재정난 극복을 위하여 토지 조사도 시행되었으나, 이것이 가신들의 불만을 부추겨 후의 우메키타 잇키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立花 誾千代姫
http://ww2.tiki.ne.j[...]
2019-04-08
[2]
웹사이트
Tsurusaki Castle -Fierce battle for fate and fame (5) -Plots of old lady-
http://www.japancast[...]
2019-04-30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간행물
九州停戦命令をめぐる政治過程--豊臣「惣無事令」の再検討
2010-01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간행물
豊臣政権下での兵站整備とその限界-西欧との比較から-
2006-09
[25]
문서
[26]
웹사이트
乱世の終焉・九州平定
http://museum.city.f[...]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문서
池ら (1995) p. 501
"#クロニック"
[37]
문서
福島(1983)
"#福島"
[38]
문서
『クロニック戦国全史』(1995)p.502
"#クロニック"
1995
[39]
역사적 사실
도요토미 성씨 하사
1586-09-09
[40]
서적
규슈 정벌 진립서(九州役の陣立書)
199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