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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진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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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진은 후한 말 동탁의 부하로, 대도호를 지냈다. 손견과의 양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동탁 사후 왕윤의 명으로 이각 토벌에 나섰으나 이각에게 항복했다. 이후 사례교위로 재직하며 유은을 억울하게 죽인 후 병사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화웅의 부장으로 등장하여 정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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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진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호진
원어 이름胡軫
자(字)문재(文才)
경력
직업장군
관직동군태수 → 사례교위
활동
관련 활동양인 전투

2. 생애

호진은 동탁의 부하였다. 처음에는 진군 태수에 임명되었다. 191년(초평 2년), 손견이 동탁을 공격하기 위해 양인까지 진격해 오자, 대도호에 임명되어 여포와 함께 맞섰다. 호진은 무용이 뛰어났지만, 오만하고 성급하여 부하들의 신뢰가 얇았고 여포와 사이도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호진군은 전투가 가능한 상태가 되지 못했고, 화웅을 잃는 등 손견군에게 패배했다(양인의 전투).

192년(초평 3년) 동탁 사후, 왕윤의 명에 따라 서영, 양정과 함께 이각 토벌에 나섰으나, 왕윤의 오만한 태도에 반감을 품고 이각에게 항복했다.

노필의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삼국지』 위서 장기전 주에 인용된 『삼보결록주』에 언급된 사례교위 호진도 동일 인물이다. 호진은 부임 중 평소 사이가 나빴던 좌풍익 공조 유은(유초의 아버지)을 억울한 죄로 처형했다. 그 후 한 달여 만에 병에 걸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헛소리를 하며 사망했다. 호진의 죽음을 듣고 사람들은 유은을 칭찬했다고 한다.[6]

2. 1. 반동탁 연합군과의 전투 (양인 전투)

190년(초평 원년), 반동탁 연합군이 원소를 맹주로 궐기하였다. 191년, 원술 부하인 장사태수 손견이 양인(陽人)에 이르렀다.[2] 동탁보병기병 5,000명을 편성해 동군태수[3] 호진을 대독호(大督護)로, 여포를 기독(騎督)으로, 나머지 장수를 도독(都督)으로 삼아 응전하게 하였다. 호진은 성질이 급해 미리 큰소리치길, “모름지기 이번 출정에서 파란 인수(印綬)를 찬 관리를 참해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하였다. 여포 등 여러 장군은 반감을 가졌다.

양인성과 수십 거리인 광성(廣成)에 도착했다. 은 저물었고 병사와 들은 매우 지쳤기에 마땅히 머물러 취침해야 했다. 동탁으로부터 받은 명령 역시 광성에 묵어 휴식을 취한 후 에 나아가 새벽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포 등은 호진을 싫어해 손견군이 이 일을 망쳐주길 바랐으므로 일부러 ‘양인성의 적들이 벌써 달아났으니 추격해야 한다’고 거짓말하였다. 호진이 쉬지도 않고 바로 진군했으나 성은 방비가 철저해 습격할 수 없었고 피로만 가중되었다.

다른 밤, 호진군은 해자와 보루도 없이 갑주를 벗고 쉬고 있었다. 불현듯 여포 등이 성중의 적들이 나왔다고 외쳤다. 군사들은 온갖 장비도 팽개친 채 요란스레 도주하였다. 십여 리를 가서야 진정되었고 적도 없었다. 날이 밝아 되돌아와서는 병기를 수습하였다. 공성을 하려 했지만 성의 수비가 이미 견고해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손견에게 격파되어 도독 화웅 등을 잃었다.[4]

2. 2. 동탁 사후

192년 동탁왕윤, 여포 무리에게 주살당했다. 홍농군 섬현(陝縣)에 주둔하던 우보도 죽었다. 이각, 곽사, 장제 등은 사면이 거부되자 군사를 일으켰다. 왕윤은 온화한 표정도 짓지 않고 호진과 양정에게 “관동의 같은 새끼들이 뭘 하려는 건가? 경들이 가 타일러 불러오시오.”라 하였다. 호진과 양정은 평소 왕윤과 사이가 나빴기에 이각, 곽사, 장제에게 합류하였다.[1] 경조윤 신풍현(新豊縣)에서 이들을 요격하려던 서영전사하고, 이각 등은 장안을 함락해 정권을 장악하였다.[5]

이후 호진은 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그는 평소 사이가 나빴던 좌풍익공조(左馮翊功曹) 유은(游殷)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나 호진은 이 들었고, “를 받는구나, 죄를 받아! 유공조가 귀신을 데려왔어!”라고 중얼거리고는 숨을 거두었다.[6]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화웅의 부장으로 설정되어 제5회에만 등장한다.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 손견이 사수관으로 진격해오자, 사수관을 지키던 화웅의 명으로 5,000명을 인솔해 출격했다가 철척사모(鐵脊蛇矛, 철등사모)를 쥔 정보에게 수 합이 되지 않아 죽임을 당한다.[1]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허구의 사수관 전투에서 손견 휘하의 무관인 정보에게 살해당한다.[2] 다만, 사료에서는 화웅이 호진의 부하이다.[3]

참조

[1] 서적 구주춘추
[2] 서적 후한서
[3] 서적 구주춘추
[4] 서적 삼국지
[5] 서적 후한서
[6] 서적 삼보결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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