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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키르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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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크키르히 전투는 1758년 7년 전쟁 중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폰 다우가 맞붙은 전투이다. 오스트리아군은 호흐키르히에서 프로이센군을 기습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병력의 30% 이상을 잃고 퇴각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뿌리쳤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에게 큰 손실을 안겼지만, 프로이센군의 훈련과 규율은 오스트리아군의 전략적 이점을 무력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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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키르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호흐키르히 전투
일부7년 전쟁
하킨트 데 라 페냐의 호흐키르히 급습
하킨트 데 라 페냐의 "1758년 10월 14일 호흐키르히 급습"
날짜1758년 10월 14일
장소작센 선제후국 호흐키르히
결과오스트리아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오스트리아
교전국 2프로이센
지휘관
프로이센 지휘관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지휘관 (사망)제임스 키스
프로이센 지휘관한스 폰 치텐
프로이센 지휘관프리드리히 자이틀리츠
오스트리아 지휘관레오폴트 폰 다운
오스트리아 지휘관프란츠 폰 라시
오스트리아 지휘관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병력 규모
프로이센 병력30,000–36,000
오스트리아 병력80,000
사상자 규모
프로이센 사상자사망, 부상, 포로 9,400명
오스트리아 사상자사망 및 부상 5,400명

2. 7년 전쟁

7년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분쟁이었으나, 유럽 전선에서는 직전에 끝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의 영향으로 특히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748년 아헨 조약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부유한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조약을 군사력을 재건하고 새로운 동맹을 모색할 시간을 벌기 위한 방편으로 여겼으며,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주도권을 되찾고 슐레지엔을 회복하고자 했다.[1] 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자, 프랑스는 이를 영국의 대서양 무역 지배력을 약화시킬 기회로 보았다. 오스트리아 역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 이에 맞서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에는 영국의 왕이 개인 연합 형태로 다스리던 하노버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 헤센-카셀 방백령 등 친척들의 영토까지 포함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외교 관계 변화를 외교 혁명이라고 부른다.[2][3][4]

전쟁 초기,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럽 최고 수준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병사들은 분당 최소 4발, 많게는 5발까지 사격할 수 있는 뛰어난 훈련도를 자랑했다.[5] 1757년 말까지 전황은 프로이센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프로이센은 로스바흐 전투로이텐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오스트리아에게 빼앗겼던 슐레지엔 일부를 되찾았다.[6] 이후 프로이센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령 모라비아로 향했다. 1758년 4월, 프로이센과 영국은 영-프로이센 협약을 맺어 영국이 프로이센에게 연간 67만파운드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한 영국은 프리드리히의 매형인 페르디난트 공작 휘하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7,000명에서 9,000명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다.[7]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을 하노버와 베스트팔렌에서 몰아내고 1758년 3월 엠덴 항구를 탈환했으며,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 본토를 위협했다. 비록 크레펠트 전투에서 승리하고 뒤셀도르프를 잠시 점령하기도 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의 기동에 밀려 다시 라인강 동쪽으로 후퇴해야 했다.[8][9]

페르디난트가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묶어두는 동안, 프로이센은 동쪽에서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오스트리아에게, 포메라니아를 스웨덴에게, 마그데부르크를 작센에게, 동프로이센을 폴란드나 러시아 제국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10] 1758년, 프리드리히는 동쪽에서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을 막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8월 25일, 오데르강 동쪽 브란덴부르크-노이마르크에서 벌어진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35,000명의 프로이센군은 43,000명의 러시아군과 격전을 벌였다.[11]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러시아군이 후퇴하면서 프리드리히는 승리를 선언했다.[12] 한 달 뒤 토르노프 전투에서는 스웨덴군이 프로이센군을 물리쳤으나 베를린까지 진격하지는 못했다.[13] 늦여름 무렵,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진 듯 보였다. 프로이센의 적들은 결정적인 공세를 취하기보다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14]

8월 25일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친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대규모 공세를 준비 중이라는 급보를 받았다. 레오폴트 폰 다운이 지휘하는 10만 명에 가까운 오스트리아군은 수적 우위를 이용해 왕제 하인리히 왕자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을 포위하려 했다. 프리드리히는 즉시 군대를 돌려 하루 40km의 강행군 끝에 클로센하인에 도착했다.

다운은 조른도르프에서 러시아군이 패배했고 프리드리히의 주력 부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작센 공략을 포기하고 라우지츠로 철수했다. 이는 산악 지형인 라우지츠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는 동시에, 프로이센군의 작센과 슐레지엔 사이 보급로를 차단하고, 별동대를 이용해 나이세 요새를 공략하려는 의도였다. 프로이센군도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여 라우지츠로 진입했다.

다운의 군대는 호크키르히 마을 동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울타리와 참호를 파며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어떻게든 다운 군대를 보헤미아로 몰아내고 싶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10월 10일, 다운이 지나치게 신중하고 수세적인 지휘관이라는 점을 이용해 오스트리아군 진지 바로 옆, 언덕 서쪽에 대담하게 포진했다. 또한 언덕 북쪽에는 레초프의 군단을 배치하여 다운 군대를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다운을 너무 얕보았다. 많은 프로이센 장군들이 이 위험천만한 포진에 반대했다. 제임스 키스 원수는 "오스트리아 장군들이 우리의 배치를 보고도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두 교수형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말할 정도였고, 다른 장군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판단을 밀어붙였다.

한편, 다운은 기대했던 러시아군의 남하가 불가능해지자 해당 연도의 전투를 일찍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 내부에서는 다운의 지나친 신중함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은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했고, 마침 주군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10월 13일)이 다가오자 다운 역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3. 전투 이전 상황

8월 25일, 프로이센군은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그 사이 오스트리아군은 작센을 주 전장으로 삼아 1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 하인리히 왕자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압도적인 수로 포위하려 했다. 작센에서의 위급한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즉시 군대를 돌려 7일 만에 180km를 강행군하여[9] 작센의 클로센하인으로 진출, 총 4만 5천 명의 병력으로 다우 육군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했다. 프리드리히는 다우를 '뚱보 각하'(die dicke Exzellenz|디 디케 엑스첼렌츠de)라 부르며 자신감을 드러냈다.[15]

러시아군의 패배 소식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주력군 도착을 알게 된 다우는 작센 공략을 단념하고 8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9] 라우지츠로 철수했다. 이는 산악 지형인 라우지츠에서 방어 태세를 취하면서 프로이센군의 작센과 슐레지엔 사이 교통로를 차단하고, 별동대를 이용해 나이세 요새 공략을 지원하려는 목적이었다. 프로이센군도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여 라우지츠로 들어갔다. 9월과 10월 초, 다우 군대는 스톨펜 마을 근처에 야영했다. 바우첸과 뢰바우 사이 지역에서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군을 끌어내 전투를 벌이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신중한 다우는 완벽한 조건이 아니면 응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군이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8km 이내까지 접근해도 다우는 군대를 물렸다.[15] 좌절한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바우첸 쪽으로 이동시켜 다우를 따라갔고, 다우가 자신보다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호크키르히 마을 동쪽 언덕에 진지를 구축한 것을 확인했다. 9월 말, 프리드리히는 볼프 프리드리히 폰 레초프 장군이 지휘하는 정예 프로이센 군단을 이 지역을 내려다보는 슈트로움베르크 언덕 점령을 위해 보냈으나, 레초프는 이미 강력한 오스트리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그를 지휘에서 해임하고 체포했다.[16]

호크키르히는 완만한 구릉 지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완만하게 기복이 있는 평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의 고지대를 제외하면 멀리서도 마을을 볼 수 있으며, 교회는 가장 높은 지점 근처에 있어 동, 서, 북쪽 조망이 가능했다.[17] 10월 10일, 프리드리히는 호크키르히로 진군하여 마을 서쪽에 자신의 야영지를 구축했다. 야영지는 마을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쿠프리처베르크 기슭 숲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었다.[16] 그는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으며, 보급품이 도착하면 동쪽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불과 2km 동쪽 언덕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은 프리드리히를 제외한 프로이센 장교들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많은 장군들이 이 위험한 포진에 반대했다. 특히 야전 원수 야코프 폰 카이트는 "오스트리아군이 이 야영지에서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프리드리히는 "그들이 우리보다 교수대를 더 두려워하길 바란다"고 응수하며 경고를 무시했다고 전해진다.[18]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군의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병력을 동쪽, 즉 다우 군대가 마지막으로 위치했던 방향으로 배치했다. 군대는 호크키르히에 인접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S자 형태의 전선을 형성했다. 취약한 서쪽 측면은 포병 지원을 받는 9개 대대로 이루어진 전초 기지가 방어했고, 11개 대대와 28개 기병대가 동쪽 측면을 지켰다. 프리드리히는 최정예 병력을 호크키르히 마을에 주둔시켰다. 그는 다우 군대가 최근 몇 달간 전투를 회피해왔기 때문에 어떤 공격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16][18]

한편, 의 제국 궁정에서는 다우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었다.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대신들은 오스트리아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동맹국인 러시아와 프랑스가 이탈할 것을 우려했다.[15] 이러한 압박 속에서, 그리고 라우돈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공격을 강력히 주장하자 신중한 다우도 공격을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 주군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10월 13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다우는 이에 맞춰 기습을 계획했다. 다우는 프로이센군보다 2배 이상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병사들의 사기도 높았다. 그는 인근 숲에서 대규모 벌목 작업을 벌였는데, 프리드리히는 이를 방어 진지 구축 작업으로 오인했지만 실제로는 기습 부대가 이동할 통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다우는 프리드리히의 개인 비서가 계란 배달 속에 숨겨 정보를 보내는 것을 알아채고, 협조를 계속하면 목숨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며 역정보를 흘리도록 했다. 다우의 비밀 계획은 새벽에 3만 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숲을 통해 프로이센군의 측면으로 돌아 포위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이 공격할 때 프로이센군은 방심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게 될 터였다.[17]

4. 전투의 전개

village burning
불타는 마을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다운 원수의 전투 계획은 프로이센군을 완전히 기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0월 13일 밤, 다운은 스파이를 이용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오스트리아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실제로는 트라운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기습 부대가 어둠을 틈타 프로이센군 진지의 남쪽으로 몰래 이동하여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20]

10월 14일 오전 5시, 별도 없는 어두운 밤과 짙은 안개를 틈타 오스트리아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교회 종소리를 신호 삼아, 소규모 부대로 나뉜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 포병 진지를 급습했다.[21][22] 당시 많은 프로이센 병사들은 잠들어 있거나 막 깨어나고 있었기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특히 크로아티아[20] 병사들은 프로이센군 막사에 불을 지르고 텐트 밧줄을 끊어 잠자는 병사들 위로 캔버스가 무너지게 한 뒤,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려는 병사들을 공격하는 잔혹함을 보였다.[21][22] 이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오늘날까지 "블루트가세"(Blutgasse|블루트가세deu, 피의 골목)라 불리는 곳에서 목숨을 잃었다.[23]

처음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투 소음을 단순한 전초 소규모 교전[24]이나 크로아티아군의 일상적인 총기 발사 정도로 여겼다.[21] 참모들이 급히 그를 깨웠고, 오스트리아군에게 빼앗긴 프로이센 대포가 자신의 진영을 향해 포격을 시작하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24][25]

프리드리히 대왕이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키스(Keith) 야전원수를 비롯한 여러 프로이센 장군들은 이미 깨어 자발적으로 저항을 조직하고 있었다.[21] 키스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당한 포병 진지를 되찾기 위해 맹렬한 반격을 지휘했다.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공작 역시 휘하 병력을 이끌고 키스를 지원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잠시 포병 진지를 탈환하기도 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의 머스킷 사격에 밀려 오래 지키지 못했다. 오전 6시경, 프로이센 3개 연대가 호흐키르히 마을 자체를 향해 돌격했고, 모리츠 공작은 후속 부대를 계속 투입하며 반격을 이어갔다.[26] 프로이센군은 마을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나와 총검 돌격으로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맞섰지만, 이미 대열은 흐트러지고 지휘 체계는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오스트리아군은 빼앗은 프로이센 대포를 이용하여 프로이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이 과정에서 키스 야전원수가 총에 맞아 전사했다.[27]

호흐키르히 전투(요제프 에라스무스 벨링 작)


이른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병사들은 비로소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이센 기병대가 연이어 반격을 시도했지만, 측면과 후방이 포위되어 번번이 격퇴되었다. 그러나 마을 교회 묘지를 요새 삼아 버틴 지크문트 모리츠 윌리엄 폰 랑겐 소령 휘하 제19 머스킷 연대의 필사적인 방어는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하며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25]

오전 7시경, 완전히 상황을 파악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직접 전선으로 나아가 지휘하며 전세를 뒤집으려 했다. 그는 혼란에 빠진 보병들에게 진격을 명령하고, 자신의 매제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프란츠 공자와 함께 증원군을 이끌었다.[28] 그러나 프란츠 공자는 마을로 접근하던 중 오스트리아군의 포탄에 맞아 머리가 날아가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고, 이를 목격한 부대원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29] 프리드리히 대왕은 동요하는 병사들을 직접 수습해야 했다.[27]

오전 7시 30분까지 오스트리아군은 불타는 마을을 다시 점령했지만, 프로이센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주요 지휘관들을 연이어 잃었다. 키스 야전원수와 프란츠 공자가 전사했고, 카를 페르디난트 폰 하겐 장군은 부상당했으며,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중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29] 오전 9시가 되자 프로이센군 좌익은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에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마지막 남은 프로이센 포병대마저 오스트리아군에게 넘어가 프로이센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28] 프리드리히 대왕은 직접 후사르 기병대를 이끌고 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후사르 부대에 맞서 돌격했지만, 오스트리아 보병 전열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다가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후사르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포로가 될 위기를 넘겼다.[30]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달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결국 철수를 결심했다. 그는 북쪽에서 달려온 레초우 장군의 부대와 합류하여 대열을 정비하고, 오전 10시경 북서쪽으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31] 한스 요아힘 폰 지텐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들리츠가 이끄는 후위 부대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24]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의 완강한 저항과 재정비의 필요성 때문에 적극적인 추격을 포기했고, 일부 크로아티아 병력과 비정규군은 마을과 전사자들의 시신을 약탈하는 데 만족했다.[30] 호흐키르히 마을을 둘러싼 격전에서 프로이센 척탄병들은 고립된 상황에서도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마지막 총검 돌격을 감행하며 장렬히 전사하는 등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기습을 극복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은 채 물러나야 했다.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전투 결과, 프로이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프리드리히는 전투에 투입한 30,000명의 병력 중 9,400명을 잃었는데, 이는 전체 군대의 30%가 넘는 손실이었다. 이 손실에는 장군 5명,[32] 대포 101문, 거의 모든 텐트가 포함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장군들에게 용기와 리더십의 본보기를 요구하며 최전선 지휘를 맡겼고, 이는 장교단의 높은 사상률로 이어졌다. 전쟁 초기 3년간의 작전에서 이미 장교단의 절반이 손실된 상태였다.[33] 인명 손실 외에도 귀중한 말과 짐승, 탄약 마차 70대, 그리고 사기를 크게 저하시키는 군기 28개와 표준 기 2개를 잃었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레초우(Retzow) 부대의 병력 약 6,000명은 온전히 보존되었고,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을 질서 있게 후퇴시키는 데 성공하며 병사들의 신뢰를 유지했다.[24]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오스트리아 역사가 가스통 보다르는 오스트리아 참전 병력을 60,000명으로 추산하며, 사상자는 약 5,400명(약 8.3%), 부상, 탈영, 포로 등 기타 손실은 약 2,300명(약 3.6%)으로 총 손실률을 약 11.9%로 보았다. 또한 표준 기 3개를 잃었다.[34]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오스트리아군의 총 손실을 7,300명으로 더 높게 추산하기도 한다. 전투 승리 소식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 축하 행사가 열리던 에 도착하여 쇤브룬 궁전에 모인 여제와 궁정 인사들을 기쁘게 했다. 다우 원수는 이교도를 물리친 공로로 교황 클레멘스 13세로부터 축복받은 칼과 모자를 수여받았으며, 여제는 다우와 그의 후계자들을 위해 250,000 플로린의 기금을 조성했다.[35]

그러나 다우와 그의 참모장 레이시에게 이 승리는 단순한 기쁨만은 아니었다. 전투 후 교회에서 프로이센의 키스 원수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두 사람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키스는 레이시의 아버지(페터 레이시)가 러시아에서 복무할 당시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30] 프리드리히 역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키스를 잃은 슬픔에 잠겼다. 며칠 후, 그가 1730년 카테 사건 당시 아버지의 분노를 함께 겪었던 사랑하는 누나 빌헬미네가 전투 당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일주일 동안 칩거하며 괴로워했고, 한때 사서에게 아편 캡슐 18개가 든 상자를 보여주며 "돌아갈 수 없는 어두운 곳으로 여행"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우울감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36]

프리드리히는 기습 속에서도 병사들을 규합하며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호흐키르히 전투는 그의 군 경력에서 최악의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그의 평정심을 심하게 흔들었다. 당시 프로이센군과 동행했던 영국 특사 앤드루 미첼은 평소 프리드리히에게 우호적이었음에도, 이번 패배는 다우의 신중함을 얕보고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무시한 프리드리히 자신의 오만함 때문이라고 평가했다.[33] 그해 겨울, 미첼은 46세의 프리드리히를 "이빨 절반을 잃고, 머리는 희끗희끗하며, 유쾌함이나 활력, 상상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노인"으로 묘사했다. 프리드리히는 통풍과 인플루엔자를 앓았고, 좀이 슬고 음식과 코담배 얼룩으로 더러워진 제복을 갈아입는 것조차 거부했다.[37]

하지만 상황은 프로이센에게 더 불리하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 프로이센군의 뛰어난 규율은 전투 중에도 유지되었고, 불타는 마을에서 벗어나자 부대 응집력을 회복했다.[33] 이러한 규율과 다우 원수의 망설임은 오스트리아군이 얻을 수 있었던 전략적 이점을 상당 부분 상쇄했다. 다우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를 추격하거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레초우 부대를 차단하는 대신, 전투 전 점령했던 고지대로 물러나 병사들을 쉬게 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35] 오스트리아군은 그곳에서 6일간 머물다 벨게른과 예제비츠 사이의 새로운 진지로 이동했을 뿐이다.[24] 결국, 오스트리아는 큰 대가를 치르고 승리했지만,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지는 못했다.[35]

오스트리아군의 추격 실패는 프리드리히에게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다. 다우의 이러한 결정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재상 카우니츠는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35] 프리드리히는 겨울 동안 군대를 재건할 기회를 얻었지만, 지난 2년간의 전투(1756–1757)에서 이미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사망, 부상, 포로, 질병, 탈영으로 잃은 상태였다. 호흐키르히 전투 이후에는 훈련이 부족한 신병들로 병력을 충원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외국인이거나 전쟁 포로 출신이었다. 그는 1759년을 미숙한 신병과 계속된 전투에 지친 베테랑들로 구성된 불안정한 군대로 시작해야 했고, 병력 충원은 영국의 재정 지원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38]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의 공격적인 명성은 여전히 유효했다. 11월 5일, 그는 로스바흐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며 나이세로 진군했고, 그의 등장만으로 오스트리아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39] 몇 주 후, 프리드리히가 서쪽으로 더 이동하자 다우는 전군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철수하여 겨울 야영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은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작센과 실레지아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으며, 프리드리히의 이름은 여전히 적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35] 프로이센군 역시 작센으로 이동하여 오스트리아군이 철수한 후 겨울 야영에 들어갔다.

한편, 로마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이 전쟁을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간주하고 호흐키르히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며 다우에게 축하의 보검을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해석은 당시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던 시대적 분위기와 맞지 않아 많은 계몽주의자들로부터 시대착오적인 행태라는 조롱을 받았다.

6. 기념물

화강암 기념비는 청동 명판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야콥 폰 카이츠 원수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호흐키르히 주민들이 세웠다. 비문에는 "고통, 비참함, 죽음"이라고 적혀 있다.[40]

참조

[1] 서적 The Heart of Europe: A History of the Holy Roman Empire Penguin 2016
[2] 간행물 The Diplomatic Revolution 1957
[3] 논문 "Essay and Reflection: On the 'Old System' and the 'Diplomatic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1990
[4] 서적 The Habsburg Empire 1700–1918 Routledge 2014
[5] 서적 Crucible of War: The Seven Years' War and the Fate of Empire in British North America, 1754–1766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2007
[6] 서적 Frederick the Great: A Magnificent Enigma Ticknor & Field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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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The Seven Years War in Europe: 1756–1763 Routledg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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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Europe: The Struggle for Supremacy, 1453–present https://books.google[...] Basic Book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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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Germany at War: 400 Years of Military History https://books.google[...] ABC-CLIO 2014
[17] 서적 Guide to Carlisle G. Allen & Unwin Limited 1922
[18] 서적 Frederick the Great and the Seven Years' War Longmans, Green, and Company 1881
[19] 서적 Loudon: A Sketch Of The Military Life Of Gideon Ernest, Freiherr Von Loudon https://books.google[...] Pickle Partners Publishing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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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Frederick the Great, King of Prussia Random House 2016
[22] 서적 Frederick the Great, a Military History Frontline 2012
[23] 서적 For God and Kaiser: The Imperial Austrian Army, 1619–1918 Yale University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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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적 Hochkirch: Eine Studie Verlag von teufens, Wien 1905
[29] 서적 Frederick the Great and the Seven Years' War, 1756–1763 McFarland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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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Losses of Life in Modern Wars, Austria-Hungary https://books.google[...] Clarendon Press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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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적 Blanning
[37] 서적 Bassett
[38] 서적 Anderson
[39] 서적 The Art of War in the Western World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1
[40] 웹사이트 Sehenswertes um und in Hochkirch http://www.hochkirch[...] 20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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