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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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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십팔사략》은 중국 역사를 쉽게 이해하도록 17종의 정사에서 발췌하여 1321년~1323년 원나라 때 간행된 역사서이다. 명나라 학자 진은이 주석을 달아 7권으로 만들고, 유염이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현재 전해진다. 조선에는 1403년 명나라 사신 황엄이 《원사》 등과 함께 들여온 이후 초학 학습서로 널리 읽혔으나, 내용의 간략함과 부정확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초심자용 서적으로 널리 읽혔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한문 교과서로 채택되었으나 역사서로서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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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2. 내용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간행본은 원나라 지치 연간(1321년 ~ 1323년)의 것이다. 원래 2권이었으나, 명나라 초기 학자 진은이 제왕의 세기(世紀)나 주자학 서적을 토대로 음과 해석을 달아 현재 전하는 것과 같은 7권이 되었다. 이후 명 중기의 유염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을 따라 삼국 시대의 정통 왕조를 에서 으로 바꾸고, 남송 마지막 황제를 공제에서 단종, 상흥제로 바꾸는 등 보주(補注)를 더해 간행한 것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1]

진은은 중국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마천사기, 반고한서, 구양수신오대사 등 17종의 정사에서 내용을 발췌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자치통감》 등 다른 자료에서 인용한 내용도 많다.[2] 특히 북송남송 부분은 증선지 생존 당시에는 송사가 완성되지 않아 야사(野史)나 개인 기록에 의존한 부분이 많다.[3]

조선에는 1403년(태종 3년) 명나라 사신 황엄(黃嚴)이 《원사》 등과 함께 《십팔사략》을 보내오면서 처음 전래되었다. 성현이 이 책을 애독하였고, 선조는 즉위 전 양인수(楊仁壽)에게 《십팔사략》을 배우고 즉위 후 김수에게 교정하도록 명했다. 홍대용, 이덕무 등의 기록을 통해 조선 후기 초학 학습서로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다.

3. 구성

《십팔사략》은 원나라 지치(至治) 연간(1321년 ~ 1323년)에 만들어진 2권짜리 책이 시초였다. 이후 명나라 초기 학자 진은(陳殷)이 제왕의 세기(世紀)나 주자학(朱子学) 서적을 바탕으로 음과 해석을 달아 7권으로 만들었다. 명 중기 유염(劉剡)은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따라 삼국 시대(三国時代)의 정통왕조를 위(魏)에서 촉(蜀)으로 바꾸고 보주(補注)를 더해 간행했는데, 이것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십팔사략》은 사마천사기, 반고한서, 구양수신오대사 등 17종의 정사(正史)를 발췌하여 엮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치통감》 등에서 발췌한 내용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민간에서 저술된 야사(野史)도 상당수 인용되었다. 특히 북송·남송에 관해서는 증선지 생존 당시 송사가 완성되지 않아 야사, 개인 저작, 관련자 기록물을 토대로 한 것이 많다.[2][3]

3. 1. 십팔사

진은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 반고가 지은 한서, 구양수가 지은 신오대사 등 17종의 정사(正史)에서 내용을 발췌하여 십팔사략을 엮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현재 연구에 따르면 《자치통감》 등에서 발췌한 내용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황제의 명령이나 국가 기관 주도로 발행된 것이 아닌, 민간인이 저술한 야사(野史)도 상당수 인용되었다. 특히 북송·남송에 관해서는 증선지 생존 당시 송사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야사류, 개인 저작, 관련자 기록물을 토대로 한 것이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2][3]

십팔사는 다음 사서를 말한다.

순서사서명저자
1사기사마천
2한서반고
3후한서범엽
4삼국지진수
5진서방현령
6송서심약
7남제서소자현
8양서요사렴
9진서요사렴
10위서위수
11북제서이백약
12주서영호덕분
13수서위징·장손무기
14남사이연수
15북사이연수
16신당서구양수·송기
17신오대사구양수
18"송감"이희의 『속송편년자지통감』과 유시거의 『속송중흥편년자지통감』을 합쳐서 센다.


3. 2. 목차 (일본에서 주해된 판본 기준)

내용
권1태고 · 삼황 · 오제 · 하 · 은 · 주 · 춘추 전국
권2진 · 서한
권3동한 · 삼국 · 서진
권4동진 · 남북조 · 수
권5
권6오대 · 송 상
권7송 하 · 남송


4. 한국에서의 수용과 비판

조선 태종 3년(1403년)에 명나라 사신 황엄(黃嚴)이 《원사》 등과 함께 《십팔사략》을 조선에 전래하였다.[4] 조선 초기 성현이 이 책을 애독하였고, 선조는 즉위 전 양인수(楊仁壽)에게 《십팔사략》을 배우고 즉위 후 김수(金晬)에게 교정하게 하였다.[4]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십팔사략》을 언급하였다. 홍대용에서 조선 아이들이 《천자문》, 《사략》, 《소학》 등을 읽는다고 답했고,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몽학(蒙學)에게 《통감》과 《사략》을 가르친다고 하여, 조선 후기 초학 학습서로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다.[4]

그러나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통감》이나 《사략》이 중국에서는 숭상되지 않는다고 지적했고, 조위한(趙緯韓)은 중국인들이 조선 사람들의 글이 자신들처럼 높아지지 못하게 하려고 《사략》과 《고문진보》를 보냈다고 비판하였다.[4] 허균은 조위한의 말이 과장되었다고 하면서도 《사략》 읽기를 부끄럽게 여겨 《통감》과 《논어》를 읽었다고 밝혔다.[4]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숙종 4년(1678년)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서 《십팔사략》 등을 구해 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말기 문신 홍한주(洪翰周)는 《지수염필》(智叟拈筆)에서 《사고전서》 편찬 당시 청에서는 《십팔사략》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하였다.[4]

5. 일본에서의 수용과 비판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인 1526년(다이에이 6년)에 우에스기 노리후사가 아시카가 학교에 이 책을 기증한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6] 에도 시대에는 초심자를 위한 입문용 서적으로 널리 읽혔다.[6] 1866년(게이오 2년)에 태어난 우쓰노미야 센타로는 태어난 마을에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같은 고향 선배에게 논어나 십팔사략을 교재로 가르침을 받았다.[7]

메이지 시대 이후 한문 교과서로 많이 채택되었으나,[8] 동양사의 새로운 통독서가 등장하면서 역사서로서의 비중은 줄어들었다.[8] 메이지 시대에 간행된 동양사 출판물 466점 중 "십팔사략"은 136점으로 3분의 1에 가깝게 차지할 정도로 메이지 시대 초반에는 폭발적인 유행을 보였다. 그러나 1887년(메이지 20년)을 기점으로 다구치 테이켄의 「지나 개화 소사」, 나카 토세이의 「지나 통사」와 같은 동양사의 새로운 통독서가 등장하면서 쇠퇴해졌다. 이후에는 초학자용 역사서가 아닌, 한문 학습용 교재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다 로한은 손녀 아오키 타마가 도쿄 여자 대학 국어과(1946년 입학)에서 십팔사략을 배우는 것을 듣고, "나는 다섯 살 쯤에 구운 고구마를 먹으면서 쿠사조시 같은 것과 함께 읽었는데, 네 대학은 그런 걸 가르치는 거야?"라며 어이없어하고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9]

중국 문학자인 다카시마 도시오는 "일본은 옛날부터 문화 수입국으로, 외국에서 들어온 서적을 매우 고맙게 여긴다. (중략) 지금도 상당한 지식인 중 십팔사략을 일류 역사서로 생각하는 듯한 글을 접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하며, "십팔사략"은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서적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일본인은 이것을 전거로 삼을 수 있는 역사서로 착각해 왔다고 말했다.[11]

다카시마는 이 점에서 "십팔사략"과 "파레 만국사"는 매우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12]

쇼와 시대 후기에는 경영자나 비즈니스맨을 위한 자기계발서로 출판되었다. 잡지 『재계』 편집장이자 평론가였던 이토 하지메는, 전후, 80세가 넘은 실업가 아야카와 요시스케와의 대화에서, 이토가 애독서로 토인비나 드러커를 거론하자, 아야카와는 "그런 것보다, 십팔사략이라도 읽기 시작하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말했고, 십팔사략은 아득한 시간을 들여 쓰였고, 등장인물은 4517명으로 성격이 전부 다르며, 이것을 자세히 읽으면 저절로 인간학이 된다고 말했다.[13]

6. 현대적 의의

십팔사략은 역사서로서의 가치는 낮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로 널리 읽혔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인 1526년(다이에이 6년)에 우에스기 노리후사가 아시카가 학교에 이 책을 기증한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6] 에도 시대를 거치며 어린 학생들을 위한 읽을거리로[6] 인식되었으며,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폭발적인 유행을 보였다. 그러나 1887년(메이지 2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동양사 통독서들이 등장하면서 쇠퇴했고, 이후에는 한문 학습용 텍스트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8]

중국 문학자인 다카시마 도시오는 "일본은 옛날부터 문화 수입국으로, 외국에서 들어온 서적을 매우 고맙게 여긴다... (중략) ... 일류로 여겨지는 사전이 사기와 십팔사략을 나란히 인용하는 일이 일어난다."라고 하며, 일본인이 십팔사략을 전거로 삼을 수 있는 역사서로 착각해 왔다고 지적했다.[10][11]

현대에도 경영, 처세, 인간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십팔사략의 내용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쇼와 시대 후기에는 경영자나 비즈니스맨을 위한 계발서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잡지 『재계』 편집장이자 평론가였던 이토 하지메는 80세가 넘은 실업가 아야카와 요시스케와의 대화에서 십팔사략을 읽을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십팔사략을 통해 인간학을 공부했다고 한다.[13] 1974년 1월에는 진순신이 『소설 십팔사략』을 연재하여 인기를 끌었다.

참조

[1] 서적 十八史略 上 明治書院 1967
[2] 서적 十八史略 明徳出版社
[3] 문서 林1967
[4] 문서 弇陋は浅陋と同義である。
[5] 서적 十八史略 角川文庫 2012-01-25
[6] 서적 平凡社大百科事典 平凡社 1985-03-25
[7] 웹사이트 安宅一夫「日本酪農の父・宇都宮仙太郎のまぼろし」 https://www.rakuno.a[...] 2022-02-25
[8] 서적 文化輸入国の悲哀 文藝春秋 2002-10-10
[9] 서적 小石川の家 講談社 1994
[10] 서적 文化輸入国の悲哀 文藝春秋 2002-10-10
[11] 서적 文化輸入国の悲哀 文藝春秋 2002-10-10
[12] 서적 文化輸入国の悲哀 文藝春秋 2002-10-10
[13] 서적 中国史 講談社文庫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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