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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경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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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성경황후는 명나라 홍치제의 황후이자 정덕제의 황태후, 가정제의 황백모황태후이다. 1487년 황태자 주우당(홍치제)과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홍치제는 후궁을 두지 않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1505년 홍치제가 붕어하고 정덕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고, 정덕제 사후에는 정덕제의 양자인 가정제를 옹립했으나, 대례의 의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 가정 21년(1541년)에 사망했으며, 최종 시호는 효성정숙장자철의익천찬성경황후, 능호는 태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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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경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효강경황후 장씨 (명 효종)
효강경황후 장씨
장씨 (張氏)
시호효성경숙장자철의익천찬성경황후 (孝成靖肅莊慈哲懿翊天贊聖敬皇后)
생애
출생성화 6년 2월 29일 (1470년 3월 31일)
출생지하간부 흥제현
사망가정 20년 8월 8일 (1541년 8월 28일)
사망지순천부, 자금성
매장지태릉
가족 관계
아버지장만 (張巒), 창국공
어머니창국공부인 금씨 (金氏)
배우자홍치제
자녀정덕제 주후조 (朱厚照)
주후위 (朱厚煒), 울도왕
주수영 (朱秀榮), 태강공주
혼인 및 책봉
황후 책봉성화 23년 10월 10일 (1487년 10월 26일)
재위 기간1487년 10월 26일 - 1505년 8월 30일
칭호
사후 칭호효강정숙장자철의익천찬성경황후 (孝康靖肅莊慈哲懿翊天贊聖敬皇后)
추가 시호효성정숙장자철의익천찬성경황후 (孝成靖肅莊慈哲懿翊天贊聖敬皇后)
황태후
재위 기간1505년 8월 30일 - 1541년 8월 28일

2. 생애

1487년 황태자 주우당(朱祐樘, 훗날 홍치제)과 결혼하여 태자비가 되었고, 그 해 9월 성화제가 붕어하자 남편 홍치제가 즉위하면서 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후궁이 없는 성인 황제의 황후였다. 홍치제는 황후 장씨 외에 다른 후궁을 두지 않았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아내나 후궁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 장씨는 가족들에게 봉작을 하사하였다.

장씨 황후는 사소한 결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황후의 두 오빠인 장학령(張鶴齡)과 장연령(張延齡)은 황후인 누이와 어머니 진 부인의 지원을 받아 높은 지위를 악용하여 출세했다. 홍치제와 궁중에서 민간 부부처럼 생활했고, 아버지 장란은 공작이 되었으며, 두 남동생을 비롯한 일족은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동생도 공경에게 시집갔다. 일족의 탐욕은 심해 많은 원한을 샀지만, 실제로는 황후 자신이 유약한 인물이라 지시할 수 없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1505년 홍치제가 붕어하고 아들 정덕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다.

홍치제의 황후로, 홍치 18년(1505년)에 홍치제가 붕어하면서 황태후가 되었다. 정덕제 즉위 후에는 대황태후가 되었고, 1510년에는 자수(慈寿皇太后)라는 존호가 내려졌다.

정덕 26년(1521년), 정덕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흥왕세자(興王世子) 주우총(朱厚熜)을 홍치제의 양자로 삼아 황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그러나 가정제는 대례의 의를 일으켜 황태후 장씨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특히, 태후 장씨의 친척과 아버지를 역도로 몰아 죽이는 일도 있었다.

정덕제가 붕어했을 때 아들이나 형제가 없었으므로, 대학사 등의 요구를 받아들여 유지를 내려 선대의 숙부들을 제쳐두고 그 아들 세대(선대의 종제)인 가정제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제의 생모 장씨(자효헌황후/慈孝獻皇后중국어)가 과도한 예우를 요구했고, 가정제는 장황후를 향해 "짐은 암살당하려 하고 있다"라는 미움을 받았다. 대례의 의 이후, 흥헌왕 주우원 (가정제의 생부)이 황제로 추존되었고, 그 모비와 정비가 잇따라 존봉되는 가운데, 장씨는 홀로 황백모황태후로 개호되어 고립되었다.

가정제대례의 의를 일으켜 황태후 장씨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가정제는 장황후를 박대하였는데, 장황후가 황후로 선택한 진부인(陳夫人)과 결혼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24년 봄, 가정 황제는 진황후의 생일에 공식적인 알현을 거부했고, 몇 주 전에 그의 어머니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화려한 의식을 준비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1525년 4월 15일, 화재로 장황후의 거처인 궁궐이 파괴되어 작은 궁궐로 이사해야 했다. 황제는 궁궐 공사를 중단할 것을 제안했고, 내각대학사 비홍(費宏)이 장황후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언급했지만 황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태후 장씨의 친척과 아버지를 역도로 몰아 죽였던 일도 있었다. 그런 환란 속에서 힘들게 버틴 황태후 장씨는 가정 21년 8월(1541년)에 붕어하였다. 장황후가 붕어했을 때, 가정제의 모후 장씨의 죽음에 관련되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2. 1. 황후 시절 (1487년 ~ 1505년)

효성경황후 장씨는 1487년 황태자 주우당(朱祐樘, 훗날 홍치제)과 결혼하여 태자비가 되었고, 그 해 9월 성화제가 붕어하자 남편 홍치제가 즉위하면서 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후궁이 없는 성인 황제의 황후였다. 홍치제는 황후 장씨 외에 다른 후궁을 두지 않았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아내나 후궁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 장씨는 가족들에게 봉작을 하사하였다.

장씨 황후는 사소한 결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황후의 두 오빠인 장학령(張鶴齡)과 장연령(張延齡)은 황후인 누이와 어머니 진 부인의 지원을 받아 높은 지위를 악용하여 출세했다. 홍치제와 궁중에서 민간 부부처럼 생활했고, 아버지 장란은 공작이 되었으며, 두 남동생을 비롯한 일족은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동생도 공경에게 시집갔다. 일족의 탐욕은 심해 많은 원한을 샀지만, 실제로는 황후 자신이 유약한 인물이라 지시할 수 없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1505년 홍치제가 붕어하고 아들 정덕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다.

2. 2. 황태후 시절 (1505년 ~ 1521년)

효성경황후 장씨는 홍치제의 황후로, 홍치 18년(1505년)에 홍치제가 붕어하면서 황태후가 되었다. 정덕제 즉위 후에는 대황태후가 되었고, 1510년에는 자수(慈寿皇太后)라는 존호가 내려졌다.

정덕 26년(1521년), 정덕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흥왕세자(興王世子) 주우총(朱厚熜)을 홍치제의 양자로 삼아 황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그러나 가정제는 대례의 의를 일으켜 황태후 장씨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특히, 태후 장씨의 친척과 아버지를 역도로 몰아 죽이는 일도 있었다.

정덕제가 붕어했을 때 아들이나 형제가 없었으므로, 대학사 등의 요구를 받아들여 유지를 내려 선대의 숙부들을 제쳐두고 그 아들 세대(선대의 종제)인 가정제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제의 생모 장씨(자효헌황후/慈孝獻皇后중국어)가 과도한 예우를 요구했고, 가정제는 장황후를 향해 "짐은 암살당하려 하고 있다"라는 미움을 받았다. 대례의 의 이후, 흥헌왕 주우원 (가정제의 생부)이 황제로 추존되었고, 그 모비와 정비가 잇따라 존봉되는 가운데, 장씨는 홀로 황백모황태후로 개호되어 고립되었다.

2. 3. 가정제와의 갈등 (1521년 ~ 1541년)

성화 23년(1487년), 장씨는 황태자 주우당(朱祐樘)과 결혼하여 태자비가 되었고, 그 해 9월 성화제가 붕어하자 황태자 주우당이 홍치제로 즉위하였다. 홍치제는 황후 장씨 외에 후궁을 두지 않았고, 황후 장씨의 가족들에게 봉작을 하사하였다.

홍치 18년(1505년)에 홍치제가 붕어하여 정덕제가 즉위하였고, 황후 장씨는 황태후로 격상되었다. 정덕 26년(1521년), 정덕제가 후사 없이 붕어하면서, 흥왕세자(興王世子) 주우총(朱厚熜)을 홍치제의 양자로 삼아 계승하게 하였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가정제대례의 의를 일으켜 황태후 장씨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가정제는 장황후를 박대하였는데, 장황후가 황후로 선택한 진부인(陳夫人)과 결혼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24년 봄, 가정 황제는 진황후의 생일에 공식적인 알현을 거부했고, 몇 주 전에 그의 어머니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화려한 의식을 준비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1525년 4월 15일, 화재로 장황후의 거처인 궁궐이 파괴되어 작은 궁궐로 이사해야 했다. 황제는 궁궐 공사를 중단할 것을 제안했고, 내각대학사 비홍(費宏)이 장황후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언급했지만 황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태후 장씨의 친척과 아버지를 역도로 몰아 죽였던 일도 있었다. 그런 환란 속에서 힘들게 버틴 황태후 장씨는 가정 21년 8월(1541년)에 붕어하였다. 장황후가 붕어했을 때, 가정제의 모후 장씨의 죽음에 관련되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4. 가족 관계

효성경황후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남편: 정덕제 (正德帝 주후조; 1491년 10월 26일 ~ 1521년 4월 20일), 홍치제의 첫째 아들
  • 아들: 위도왕 주후위 (蔚悼王 朱厚煒; 1495년 1월 1일 ~ 1496년 3월 9일), 홍치제의 둘째 아들
  • 딸: 태강공주 (太康公主; 1497년 2월 15일 ~ 1498년 10월 1일), 휘는 주수영, 홍치제의 첫째 딸

5. 기타

5. 1. 예술 후원

명나라 시대의 예술은 효성경황후와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다른 궁중 여성들이 얻은 권력을 반영했다. 효성경황후에게 귀속되는 가장 유명하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작품은 1493년 그녀가 도교 여사제로 서품되는 모습을 그린 두루마리인 ''수도권''이다.[1] 원작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 샌디에이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시회 ''도교와 중국 미술''은 황후 외에도, 이 두루마리에는 "옥녀"라고 불리는 신성한 여성들과 그녀를 서품한 도교 사제, 그리고 여러 신들이 등장한다고 언급한다.[2]

''수도권''은 황후와 관련된 유일한 예술 작품이 아니다. 그녀는 오위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장로에게 귀속된 그림을 포함한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장로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또 다른 두루마리 그림인 ''수식이 조정으로 돌아오다'' 또한 효성경황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황후 자신을 묘사하지 않지만, 제니퍼 퍼틀은 효성경황후가 이 그림을 사용하여 자신을 역사 속 황후들과 비교했다고 주장한다.[3]

효성경황후는 예술의 영향력을 이해했고, 그것이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지 알았다. 퍼틀은 효성경황후의 권력을 "지배적인" 것으로 묘사하며, 이는 그녀의 예술 후원에 반영된 미묘하고 간접적인 권력이라고 정의한다.[4] 그녀의 영향력은 또한 명나라 시대에 다른 궁중 여성들이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5. 2. 대중 매체

6. 존호, 시호, 능호

정덕 5년(1510년)에 '''자수황태후'''(慈壽皇太后)라는 존호를 바쳤고, 정덕 16년(1516년)에는 소성(昭聖)을 추가하여 '''소성자수황태후'''(昭聖慈壽皇太后)라는 존호를 바쳤다. 가정제 15년(1536년)에 공안강혜(恭安康惠)를 추가하여 '''소성공안강혜자수황태후'''(昭聖恭安康惠慈壽皇太后)라는 존호를 바쳤다.

원래 시호는 '''효강정숙장자철의익천찬성경황후'''(孝康靖肅莊慈哲懿翊天贊聖敬皇后)라고 하였으나, 남명 홍광제건문제의 일족의 지위를 복원할 때 추존황후 상씨의 시호가 효강황후(孝康皇后)이기 때문에, 효강(孝康)을 효성(孝成)으로 바꿔 재추시 하면서, 최종적으로 '''효성정숙장자철의익천찬성경황후'''(孝成靖肅莊慈哲懿翊天贊聖敬皇后)로 추시되었다.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참조

[1] 서적 A Companion to Asian Art and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5-06-22
[2] 웹사이트 Taoism and the Arts of China (Art Institute of Chicago) http://www.artic.edu[...] 2016-03-03
[3] 서적 A Companion to Asian Art and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5-06-22
[4] 서적 A Companion to Asian Art and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5-06-22
[5] 문서 『明孝宗実録』巻4, 成化二十三年十月丙子条に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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