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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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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곤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정치적 경쟁자였다. 그는 연산군 시대에 훈구파의 비리를 탄핵하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관직을 얻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는 데 동조하면서 사림파로부터 배신자로 비판받았다. 만년에 자신의 과오를 자책하며 저서를 불태웠으며, 1527년 사망 후 시호가 추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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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남곤
한자남곤(南袞)
로마자 표기Nam Gon
사화(士華)
지정(止亭), 지족당(知足堂), 지족(知足)
시호문경(文敬)
출생1471년
출생지조선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사망1527년 3월 10일
사망지조선 경상남도 밀양시
사인병사
국적조선
가족 관계
아버지남치신
어머니진주 하씨
배우자연안 이씨
형제형 남포
외조부하비
학력
학력1494년 별시 문과 급제
관직
직업문신, 유학자, 교육자, 작가, 정치가
분야성리학
주요 관직영의정
영의정 임기 시작1523년 5월 3일
영의정 임기 종료1527년 4월 10일
영의정 이전김전
영의정 이후정광필
좌의정 임기 시작1520년 1월 7일
좌의정 임기 종료1523년 5월 3일
좌의정 이전안당
좌의정 이후이유청

2. 생애

남곤은 영남학파 출신으로 김종직의 제자였다. 1520년까지 조선영의정을 지냈고, 1523년부터 1527년까지 다시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김종직에게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조광조김굉필에게서 배워 서로 사상적,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었다.[7]

2. 1. 출생과 가계

1471년(성종 2년) 곡산군수를 지낸 남치신의 2남으로 경상남도 밀양부(密陽府) 부북면(府北面) 대항리(大項里, 현재의 밀양시 부북면 대항 2리 457번지 "남곤의 딱밭"이라고 부르는 곳) 화악산 근처에 있던 외가인 외할아버지 하비(河備)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남포는 그의 형이었다.

그의 집터는 현재 사라지고 없는데, 고향인 밀양의 전설에 의하면 그가 훗날 중종조에 조광조 등 유명한 신진 학자들을 죽게 한 기묘사화에 동조, 묵인하여 사후에 변절자와 배신자의 전형으로 몰려 지탄받게 되자, 남곤과 같은 인물을 낳았다 하여 남곤 사후 이곳 지맥을 끊기 위해 배(舟)의 모양인 대항리 산들을 메우고 연못을 팠다고 한다.

남곤의 가계는 다소 불확실한데, 이는 그가 몰락한 후, 서자 1명이 전하나 본부인에게서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에 대한 자료나 기록은 잊혀졌기 때문이다.

고려말에 지영광군사를 지낸 남천로(南天老)의 후손으로, 남천로의 손자 조선의 개국 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이라는 설과, 일설에는 남재의 숙부이자 남천로의 차남 남을진(南乙珍)의 증손자라는 설도 있으나, 남을진의 형 남을번(南乙蕃)이 1320년생이고, 남을진은 1331년생으로 그의 증조부로 보기에는 다소 연대가 맞지 않는다.[5] 또한 남을진의 증손으로 본다면, 30년 연상인 남이가 그의 손자뻘이 되고, 남효온이 그보다 17년 연상인 그의 손자뻘이 되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의 고모는 임원준과 혼인했는데, 2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임사홍과 임사영은 그의 고종 사촌 형들이었다. 임사홍은 후일 폐비 윤씨가 사사된 일을 연산군에게 폭로하고, 갑자사화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남곤은 임사홍을 안좋게 보았는데, 중종 말 김안로를 제거하면서 김안로가 임사홍보다도 더 사악한 인간이라 지목했다. "임사홍(任士洪)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노기(盧杞)의 재주도 안로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김안로는 임사홍과 노기를 합쳐 한몸이 된 사람이다. 우리들이 어떻게 끝까지 그 사람의 수족(手足)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그가 하루를 밖에 있으면 조정이 하루가 편안하고, 한 해를 밖에 있으면 조정이 한 해가 편안할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만족하겠는데, 나는 이미 늙어서 죽을 날이 얼마 안남았다. 이 말이 사실임을 그대들은 알게 될 것이다.[6]"라는 것이다.

남곤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에 능했으며, 시와 글을 잘 지어 신동이라 칭찬을 들었다.

2. 2. 유년기와 수학

어려서 외사촌 하충(河沖)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7] 어려서부터 독서와 탐구를 좋아하여,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김일손, 김굉필, 이목, 정여창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그는 동문들 중 김일손과 특히 친했으며, 김일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그의 친구인 김굉필의 문하에서 조광조가 수학했는데, 조광조는 훗날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 된다. 1489년 (성종 20년) 19세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儒生)으로 수학하였다.

1492년(성종 23년) 겨울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이목, 심순문(沈順門), 최광윤(崔光潤), 조원기(趙元紀), 송여려(宋汝礪), 이수함(李守諴), 이윤탁(李允濯) 등과 함께 대신 윤필상의 죄악을 규탄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2. 3. 청년기와 관직 진출

1494년(성종 2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쳐 사가독서를 하였다. 김일손은 그가 오랫동안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위로하는 시문과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495년(연산군 1년) 3월 5일 주서(主書)가 되었으며, 1496년(연산군 2년)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냈다. 사간원으로 있을 때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해 11월 김전, 신용개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전정(殿庭)에서 문신들의 재량을 시험할 때 1등으로 뽑혔다. 수신과 제가를 신념으로 삼은 그는 사사로운 청탁과 도움을 거절하였고, 성리학 이념 전파를 위해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성종 말년 외척이자 권신인 윤필상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훈구파의 역공격을 받고 투옥되었고, 유순정, 성희안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다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성희안, 유순정 등과 척을 지게 되는데, 이들은 훗날 중종반정의 주요 지휘자들이었다.

1498년(연산군 4년) 1월 5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7] 이후 김종직의 제자인 동문들의 추천으로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훈구파 인사들의 축재와 비리를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부제학과 좌부승지를 지냈고, 부패한 지방관들을 탄핵하고, 음서 제도로 출사한 관리들이 요직을 차지한 것을 비판하여 실력으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1500년(연산군 6년) 5월 29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1502년(연산군 8년) 2월 9일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1503년(연산군 9년) 1월 2일 경연 시강관(侍講官)이 된 이래 경연시독관(試讀官), 참찬관(參贊官), 전한(典翰)을 지냈다.[7] 훈구 대신들의 권력 남용이 심하여 왕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려 한다며 훈구파 대신들의 부패와 전횡, 월권행위를 규탄하기도 했다. 통정대부로 승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는 일찍부터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사물과 시국을 논하였는데, 이때 남곤 역시 조광조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조광조의 모친은 아들에게 남곤과 가까이 하지 말 것을 충고하기도 한다.

2. 4. 중종반정과 정치 활동

1498년(연산군 4년) 1월 5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7] 이후 김종직의 제자인 동문들의 추천으로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훈구파 인사들의 축재와 비리를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부제학과 좌부승지를 지냈고, 개혁적 성향으로 부패한 지방관들을 탄핵하고, 음서 제도로 출사한 관리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것을 비판하며 실력으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1500년(연산군 6년) 5월 29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1502년(연산군 8년) 2월 9일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1503년(연산군 9년) 1월 2일 경연시강관(侍講官)이 된 이래 경연에 참석하여 경연시독관(試讀官), 참찬관(參贊官), 전한(典翰)을 지냈다.[7] 훈구 대신들의 권력남용이 심하여 왕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려 한다며 훈구파 대신들의 부패와 전횡, 월권행위를 규탄하기도 했다. 그 뒤 통정대부로 승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동료인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는 일찍부터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사물과 시국을 논하였는데, 이때 남곤 역시 조광조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그의 모습을 우려한 조광조의 모친은 아들에게 남곤과 가까이 하지 말것을 충고하기도 한다.

연산군 즉위 후 그의 고종사촌형인 임사홍은 연산군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촌형인 임사홍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멀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 6월에 훈구파인 임사홍과 신수근 등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찍이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폐위하여 사사(賜死)하게 한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여 왕을 격분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갑자사화가 발생하여 그는 출사를 박탈당한다. 사화 초기인 그해 7월에 그는 김일손 등을 추국할 때 비변사 가낭청(假郞廳)으로 참여하여 성희안, 유헌, 박열, 신공제 등과 함께 1자급 승급했다.[9] 그러나 사화가 김종직의 문하생 전체로 확대되면서 그 또한 직첩을 박탈당하였다.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추숭하려 하자 사림파 관료들은 선왕(성종)의 유지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분노한 연산군은 생모 추숭작업을 계속하던 중, 유자광, 신수근, 임사홍 등은 생존해 있는 폐비 윤씨의 생모 거창군부인 신씨를 찾아내 연산군과 만나게 한다. 모친의 죽음에 분노한 연산군은 학살을 감행한다(갑자사화).

폐비 사건에 참여했거나 관련된 윤필상, 성준, 이세좌 등을 사형시키고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이 부관참시당한다.

남곤 역시 폐비 윤씨의 복위는 성종의 유지에 어긋난다는 발언을 했다가 연산군의 눈밖에 나게 되고, 금고형에 처해진다.

유배지에서 그는 시문과 사서 삼경으로 시름을 달랬고, 후학들을 양성하여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로도 그의 성리학적 도덕적 이상향 구현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으나, 신중한 성격으로 변모했고 온건론과 점진적 개혁론자로 변모하게 된다. 1506년(연산군 12년) 초 박원종 등으로부터 반정 거사에 동조하라는 의사가 그에게 타진된다. 연산군을 패륜아로 생각한 그는 중종반정 계획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반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중종 반정이 성사된 직후 석방되어 바로 한성으로 귀경하였으며, 그에게도 공신의 서훈이 내려졌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2. 5. 기묘사화와 조광조와의 관계

청년기의 남곤은 같은 김종직 학파 사람인 조광조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조광조는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다녔는데 그 중에는 남곤도 있었다. 산책을 하던 길에 조광조는 지나가던 여인의 모습을 보고 계속 뒤돌아봤고 남곤은 옆으로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앞서 걸어갔다. 조광조는 지나는 길에 여인들을 훔쳐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였다. 조광조는 어머니 여흥 민씨에게 산책시 여인의 모습을 훔쳐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자책하였으나, 조광조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오히려 남곤을 조심할 것을 경고하였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답게 살아야 된다.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젊은 장부의 마음이 어찌 잠잠하겠느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사람이다. 네가 처녀들에게 한 눈 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반드시 있다."며 "남곤은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처녀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인가?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흘리게 할 거나 외면할 것이다. 내가 너를 어찌 그런 사람과 사귀게 하겠는가?"라고 경고 하였다.

민씨는 아들이 남곤과 자주 만나지 못하도록 집도 이사하였다 한다.

이 일화는 출처도 불분명한 야사로 남곤의 냉혹함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남곤 입장에선 억울한 측면이 있다.

그는 김전 등과 함께 사림파 소속이었다. 그러나 조광조, 김식 등의 급진적인 개혁책에 김전 등과 함께 반대하고 나섰다.

개혁의 방안을 놓고 남곤은 조광조와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조광조가 '문학은 선비의 일이 못 되며, 경전 공부에 전념토록 하자'고 하면, 남곤은 '참된 선비라면 학술과 문예에 모두 능해야 한다'고 했고, 김숙자가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활쏘기를 가르쳤던 점도 지적했다.

인물 천거제를 놓고도 논란이 벌어지자 남곤은 양자를 절충, 과거 제도도 존속시키되 과거제를 보완해 천거로도 일부 관리를 뽑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과거제를 천거제로 대체해나가야 된다고 했다. 남곤의 미온함을 두고 조광조 일파에서 “남곤은 소인이다”라는 비판이 점점 커져 갔다. 한편 김전은 인물 천거제를 반대하였다. 훈구파들에게 받는 의심보다 조광조 일파의 공격이 그에게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광조 등의 급진적인 개정, 개혁에 부정적이었고, 서서히 바꿔나가야 된다는 견해를 피력하다가 신진 사류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성리학과 수신을 강조하는 개혁자 조광조와의 대립으로 조광조의 신진 세력들에 의해 소인으로 내몰리게 되자 1519년 훈구파 대신 심정, 홍경주조광조 일파 제거계획에 가담, 기묘사화에 참여하여 조광조와 그의 세력들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남곤과 심정이 경빈 박씨를, 홍경주 등은 희빈 홍씨를 사주하여 궁녀들을 시켜 궁궐 안과 도성의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적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남곤과 심정은 각각 경빈 박씨와 불륜관계가 있었다고 모함되어 곤정(袞貞)이 젖이라는 말도 세간에 퍼져 있었다.

또한 남곤의 집이 경복궁 뒷편 백악산(白岳山) 아래 대은암동(大隱岩洞[7], 후일 대한민국 수립 후의 청와대 경내에 들어있는 곳)인데 이때 그는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뛰워 대궐 안의 어구(御溝)에 흘려 보내어 중종이 이를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이를 고변하기 위하여 남곤, 심정, 홍경주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서 궐안에 들어가 중종에게 고하고 무사들을 시켜 조광조를 처치하려 하였으나 정광필이 말려 유배를 보내는데 그쳤다.[7]

다만 위의 주초위왕의 내용은 애초 선조시대에 추가된 것으로 전부 사실이 아니며, 현대에서 벌레가 글씨가 새겨지도록 파먹게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이 입증됐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오히려 기묘사화를 방관하기는 했지만 처벌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지 찬성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종이 조광조를 죽이는데 실패하고 유배를 보낸 것도 정광필 이전에 남곤의 결사반대 때문이었다. 또한 이 때 조광조를 제거하고자 방해되는 정광필을 쫓아내려는 중종의 행동을 막으며 반대한 것 역시 남곤이었다.

2. 6. 기묘사화 이후와 죽음

1519년 11월 19일 조광조 일파가 유배되자 이조판서 직을 여러 차례 사직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정광필, 안당 등과 함께 조광조 일파에 대한 온건한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12] 12월 19일 왕이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려 하자, 중종에게 유배형으로 감형할 것을 청했으나 거부당했다.[13] 그러나 계속된 반대 상소로 조광조의 목숨은 2개월 가량 연명되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고, 조광조가 사사되자 그는 누군가 자신을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고 평해도 상관 않겠다고 했다. 기묘사화에 협력한 대가로 공신 책록이 내려졌으나 거절했다. 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는 그를 배신자로 여겨 비판했다. 중종반정에 참여했던 성희안과 유순정은 이미 사망하여 그를 변호해 줄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조광조 등을 구명하지 못한 일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고, 정광필이 헛소문으로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있다고 중종에게 말할 정도였다.

1521년 성균관 학유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 안처근(安處謹) 형제가 훈구파 영수 심정, 홍경주 등을 제거하려 할 때, 남곤과 김전도 배신자로 지목되어 제거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안처겸 형제의 모의는 송사련[14]의 밀고로 탄로났다. 남곤 등은 안처겸 등의 역모를 주장하여 안당 등의 일파를 숙청하였다.(→신사무옥)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느껴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20년 1월 13일 의정부좌의정이 되어 우의정 심정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고 세자사부(世子師父)를 겸했다. 이때 그의 첩 조운(朝雲)은 그에게 함께 낙향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낙향하지 않고, 1523년 4월 18일 의정부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심정과 함께 중종의 사돈인 김안로를 공격, 탄핵하였다. 아들 김희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한 이후 김안로의 권력 남용이 심해지자, 심정, 이항, 이행 등과 함께 김안로를 공격하였다. 1524년 11월 남곤 등은 김안로가 시비를 가리고 패거리를 만든다는 이유로 탄핵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남곤은 심정, 이항(李沆) 등과 김안로경기도 풍덕군(豊德郡)으로 유배시켰으나, 김안로의 며느리 효혜공주 등의 노력으로 석방 운동이 계속되었다.

1527년 병이 위중하여 중종에게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뒤 얼마 후 사망하였다. 그는 관직 생활 중에도 서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만년에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고, 자신의 글로 인해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제자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내 글을 전파 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고 했다. 또, "내가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殮襲)을 하지 말라[7]",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시호를 청(請)하여 비석(碑石)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한 뒤 평생의 글을 불태웠다.[7] 훈구파의 조광조 제거를 방조한 것을 후회하며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글을 태우고, 글을 남길 자격이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1527년 3월 10일에 사망하니 향년 57세였다. 1527년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후에 추탈된다.

3. 사상과 평가

1568년 이황, 송순 등이 남곤을 간신으로 몰아 삭탈관직되었고, 이후 신원되지 못하고[7] 역사상 최악의 소인, 간신으로 지탄받았다.[7]

그러나 남곤은 청렴하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재상이었지만 위세를 부리지 않았다. 남곤이 죽자 왕은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조회를 중단했으며, 3일간 정사를 멈췄다. 왕조실록 졸기에 따르면 남곤은 문장력이 뛰어나고 청렴했다. 당대에 문장이 뛰어나고 필법이 아름다웠으며, 평생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재주가 뛰어나 지론(持論)이 올바르다는 평가를 받아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다.[7] 조광조 일파 숙청에 가담하여 조선 왕조 내내 비난받았으나, 김종직의 문하생이었음이 알려진 1910년 이후에는 일부 재조명되기도 한다.

남곤은 영남학파 출신으로 김종직의 제자였다. 성리학을 배웠으며, 조광조와 사상적, 정치적 경쟁 관계였다.

4. 가족 관계

항목내용
아버지남치신
어머니진주 하씨, 하비의 딸
남포[17]
부인정경부인 연안 이씨, 숙천부사 이세웅(李世雄)의 딸
자녀
장녀의령 남씨
사위이선(李墠, 현령, 한산인, 사성 이곡(李穀)의 아들, 목은 이색의 5대손)
차녀의령 남씨(1492년 ~ ?)
사위송지한(宋之翰, 통정대부목사, 여산인, 영의정 송질의 아들)
외손자송인, 여성위
외손부정순옹주 정환(貞順翁主 貞環), 조선 중종의 서녀
삼녀의령 남씨
사위유충경(柳忠慶)
전첩 소생 서녀의령 남씨
전첩 소생 서녀사위신대윤, 거창인, 판관
전첩 소생 외손자신익(愼益, 판관 증 판윤)
서자남승사[16]
후첩조운(朝雲, 기생 출신)
외할아버지하비
장인이세웅(李世雄, 본관은 연안, 숙천부사 역임)


5. 저서 및 작품


  • 지정집|止亭集한국어
  • 유자광전|柳子光傳한국어
  • 남악창수록|南岳唱酬錄한국어
  • 《속동문선》 (공저)
  • 《정난종 신도비명》[15]
  • 《영춘군 이인 신도비명》 (1509년)

6. 기타

1518년 중종은 변방에서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는 여진족 속고내를 토벌하기 위해 이지방방어사로 임명하여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광조 등은 비밀리에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속임수라는 이유로 반대했고, 유담년은 속임수보다 사람과 가축이 상한다는 이유로 반박하였다. 사림파 인사들은 모두 조광조의 편을 들었지만, 남곤은 조광조의 편을 들지 않았다.[11] 그해 5월 15일 조선 각지에 지진이 발생하자 예조판서로서 지진으로 흉흉해진 민심 수습을 주관하였다.

조광조는 유자광은 패악한 인물이고 심정은 심보가 바르지 못한 인물이며, 그들이 조정의 권력을 차지하고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고 규탄했으며, 이들을 숙청하고 부패한 반정, 훈구 공신들을 축출해야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때 남곤 역시 소인배라고 비판했는데, 이 말이 남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남곤은 훈구파가 조광조 일파를 공격할 때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남곤은 ‘김일손의 문장, 박은의 시는 쉽게 얻을 수 없다’라고 평했다.[18]

기묘사화 때 조광조, 김식 일파를 제거하는 데 동조하였으나, 그는 사림 출신으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성리학자였다. 조광조 등의 스승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과는 동문수학한 사이로, 학맥상으로는 심정이나 홍경주와는 달리 조광조와 같은 학파였다. 이때문에 후대에서 사림파로부터 배신자나 변절자의 전형으로 낙인찍혀 다른 훈구파 인사보다 더 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 중에는 무령부원군 유자광의 일대기를 쓴 《유자광전》이 있다. 후에 유자광이 남이의 옥사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그의 유자광 일대기 역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학맥상으로는 백이정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남곤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조광조를 구명하려 노력하였으나 기묘사화에 동조하는 입장에 섰었으므로 사림파 집권 후에도 김전 등과 함께 사림파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과 변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참조

[1] 실록 중종실록 권37, 중종 14년(1519년) 11월 15일(을사) 6번째 기사 1519-11-15
[2] 실록 중종실록 권37, 중종 14년(1519년) 12월 16일(병자) 1번째 기사 1519-12-16
[3] 실록 중종실록 권37, 중종 14년(1519년) 12월 16일(병자) 2번째 기사, 사신의 사론 1519-12-16
[4] 서적 월정집·별집 권4, 만록, 제129조
[5] 문서 후자 설을 따를 경우 그에게 손자 항렬이 되는 남이가 1441년생이 된다. 1441
[6] 실록 중종실록 65권, 1529년(중종 24년, 명 가정 8년) 5월 24일 무오 1번째기사, "연성위 김희가 김안로의 사면을 구하는 상언을 올리다. 그에 대한 삼공의 논의" 1529-05-24
[7] 뉴스 남곤은 밀양인 이었다! http://407.newsk.com[...] 밀양신문 2003-05-12
[8] 뉴스 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④…대은암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2-05-02
[9] 실록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7일 신유 2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사초 사건을 담당한 당상 낭청 등에게 후한 포상을 하다 1498-07-27
[10] 백과사전 남곤 http://100.nate.com/[...] 민족문화대백과
[11] 문서 명나라의 건국(1366년) 초에 편찬된 명나라의 백과사전 대명회통에는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대명회통을 수정하기 위해 수십차례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1366
[12] 실록 중종실록 37권, 1519년(중종 14년, 명 정덕 14년) 12월 16일 병자 1번째기사, "대사헌 이항 등이 현량과의 혁파와 조광조의 일에 관해 합사하다" 1519-12-16
[13] 실록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년) 12월 16일(병자) 1번째기사 "대사헌 이항 등이 현량과의 혁파와 조광조의 일에 관해 합사하다" 1519-12-16
[14] 문서 안돈후의 서녀의 아들로 외가를 고발한 공로로 서자에서 면천하여 양반이 되고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5] 문서 경기도 군포시 대야동 대야미역 근처에 있다.
[16] 인물정보 남승사 http://people.aks.ac[...]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17] 웹인용 남포 http://koreandb.nate[...] 2011-06-26
[18] 웹사이트 http://weekly.hank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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