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성 (후쿠시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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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시마성(후쿠시마현)은 후쿠시마현에 위치했던 일본의 성으로, 고분 시대부터 건축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13년 다테 모치무네가 축성한 다이부쓰 성에서 시작되어 스기노메 성으로 개칭되었으며, 가모 씨, 우에스기 씨를 거쳐 1702년부터는 이타쿠라 씨가 메이지 유신까지 거성으로 사용했다. 보신 전쟁 이후 1873년 성터가 파각되었으며, 현재는 후쿠시마현청과 모미지야마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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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성 (후쿠시마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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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 | |
기본 정보 | |
이름 | 후쿠시마 성 |
다른 이름 | 다이부쓰 성 스기쓰마 성 스기메 성 |
위치 | 후쿠시마시, 후쿠시마현, 일본 |
종류 | 평산성 |
건축 양식 | 일본 성 |
건축 시기 | 1413년 |
건축자 | 불명 |
사용 시기 | 에도 시대 |
철거 시기 | 1871년 |
현재 상태 | 유적 |
공개 여부 | 공개 |
통치자 | |
통치 가문 | 다테 씨 기무라 씨 혼조 씨 혼다 씨 홋타 씨 이타쿠라 씨 |
문화재 | |
문화재 지정 | 미지정 |
위치 정보 | |
좌표 | 37°45′2.5″N 140°28′5.5″E |
2. 역사
고분 시대부터 이 지역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건축물이 존재했던 사실이 2014년 후쿠시마현청 북청사 건설 및 오하라 종합병원 재건축을 위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1413년 다테 모치무네가 가케다 사다카쓰와 함께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다이부쓰 성(大仏城)이 그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다이부쓰 성은 스기노메 성(杉目城)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542년부터 1548년까지 벌어진 덴분의 난 이후에는 다테 가문의 가신인 마키노 사가미노카미의 영지가 되었다. 다테 하루무네는 아들 다테 데루무네에게 가독을 물려준 뒤 요네자와 성에서 스기노메 성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당시 시노부 군의 중심지는 하루무네의 동생 다테 사네모토가 있던 오모리 성이었고 스기노메 성은 하루무네의 은거지였다. 1577년 하루무네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부인과 막내아들 다테 나오무네가 스기노메 성에서 살았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호쿠 지방 다이묘들의 영지를 재편하면서 시노부 군은 와카마쓰 성 성주 가모 우지사토의 영지가 되었다. 가모 가문의 가신 기무라 요시키요는 오모리 성에 들어가 이 지역을 다스리다가 1592년 무렵 스기노메 성을 후쿠시마 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거처를 옮겼으며, 성하 마을도 정비하여 후쿠시마 성은 시노부 군의 중심지가 되었다.[1] 1598년 가모 히데유키가 시모쓰케 국 우쓰노미야로 옮겨가자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아이즈의 영주로 부임해 왔고, 후쿠시마 성은 그의 가신 혼조 시게나가에게 주어졌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일환으로 다테 마사무네가 시노부 군으로 진격했을 때 후쿠시마 성 북쪽에서 벌어진 마쓰카와 강 전투에서 우에스기 군이 다테 군을 격퇴했다. 이후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인 이모카와 가문이 오모리 성을 거점으로 이 지역을 다스렸다.[2]
1664년 우에스기 가문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영지가 몰수되고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1] 1679년 혼다 다다쿠니가 후쿠시마 번 15만 석의 번주로 부임하여 후쿠시마 성에 입성했다. 1682년 다다쿠니가 하리마 국 히메지 번으로 옮겨가자 다시 후쿠시마 번은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1686년 데와 국 야마가타 번에서 홋타 마사나카가 후쿠시마 번에 부임하여 다시 후쿠시마 번이 성립되었다. 1700년 2대 번주 홋타 마사토라는 데와 국 야마가타 번으로 다시 옮겨갔다. 1702년 시나노 국 사카키 번에서 이타쿠라 시게히로가 번주로 부임한 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후다이 다이묘인 이타쿠라 가문이 12대에 걸쳐 후쿠시마 성을 다스렸다.[2]
1868년 (메이지 원년) 보신 전쟁에서 후쿠시마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과 싸웠다. 같은 해 음력 7월 27일 니혼마쓰 성이 함락되자, 번주 이타쿠라 가쓰나오는 인접한 요네자와 번으로 도주했고, 음력 9월 2일 니혼마쓰 성에 주둔한 신정부군에 성을 넘기고 항복했다. 1869년(메이지 2년) 이타쿠라 가문은 미카와 국 시게하나 번으로 전봉되어 번지사로 부임하였다. 이로써 후쿠시마 번은 소멸되었다. 1873년(메이지 6년) 성터는 육군 주둔지가 되면서 해체되었다. 현재 성터에는 후쿠시마 현청사와 모미지야마 공원이 정비되어 있으며, 모미지야마 공원 한편에는 이타쿠라 신사가 건립되어 있다.
2. 1. 고대
고분 시대부터 이 지역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건축물이 존재했던 사실이 2014년 후쿠시마현청 북청사 건설 및 오하라 종합병원 재건축을 위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2. 2.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다테 가문)
1413년 다테 모치무네가 가케다 사다카쓰와 함께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다이부쓰 성(大仏城)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다이부쓰 성은 스기노메 성(杉目城)으로 개명되었고, 덴분의 난(1542년 ~ 1548년) 이후, 다테 가문의 가신 마키노 사가미노카미의 소령이 되었다.다테 하루무네는 아들 다테 데루무네에게 가독을 양도한 후, 요네자와 성에서 스기노메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무렵 시노부 군의 중심지는 다테 하루무네의 동생 다테 사네모토의 거성이었던 오모리 성이었고, 스기노메 성은 단순히 하루무네의 은신처였다.
1577년 다테 하루무네 사후, 하루무네의 부인과 막내아들 다테 나오무네가 스기노메 성에 거주했다.
2. 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가모 가문, 우에스기 가문)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도호쿠 다이묘들의 처우가 결정되자, 시노부 군은 와카마쓰 성주 가모 우지사토의 영지가 되었다. 가모 가문의 가신 기무라 요시키요가 오모리 성에 입성해 이 지역을 다스리다가, 1592년 무렵 스기노메 성을 후쿠시마 성으로 개칭하고 거처를 옮겼다.[1] 성하 마을도 정비되어, 후쿠시마 성은 시노부 군의 중심이 되었다.1598년 가모 히데유키가 시모쓰케 국 우쓰노미야로 이봉되자,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아이즈의 영주로 부임해왔다. 그리고 후쿠시마 성은 그의 가신 혼조 시게나가에게 주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일환으로 다테 마사무네가 시노부 군으로 진격했을 때, 후쿠시마 성 북쪽 일대가 전장이 된 마쓰카와 강 전투에서 우에스기 군이 다테 군을 격퇴했다. 이후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 가문 이모카와 가문이 오모리 성을 거점으로 이 지역을 다스렸다.[2]
2. 4. 에도 시대 (막부 직할령, 혼다 가문, 홋타 가문, 이타쿠라 가문)
1664년 우에스기 가문 내 후계자 문제로 영지가 몰수되어 막부 직할령에 편입되었다.[1] 1679년 혼다 다다쿠니가 후쿠시마 번 15만 석에 배령되어 번주로 부임, 후쿠시마 성에 입성했다. 1682년 다다쿠니가 하리마 국 히메지 번으로 이봉되자, 다시 후쿠시마 번은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1686년 데와 국 야마가타 번에서 홋타 마사나카가 후쿠시마 번에 이봉되어 다시 후쿠시마 번이 성립되었다. 1700년 2대 번주 홋타 마사토라가 데와 국 야마가타 번으로 이봉되었다. 1702년 시나노 국 사카키 번에서 이타쿠라 시게히로가 번주로 부임한 후, 메이지 유신기까지 후다이 다이묘 이타쿠라 가문 12대의 거성이었다.[2]2. 5. 메이지 시대 이후
1868년(메이지 원년) 보신 전쟁에서 후쿠시마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중심이 된 신정부군과 싸웠다. 같은 해 음력 7월 27일 니혼마쓰 성이 함락되자, 번주 이타쿠라 가쓰나오는 인접 번 요네자와 번으로 도주하였고, 음력 9월 2일 니혼마쓰 성에 주둔한 신정부군에 성을 양도하고 항복하였다. 1869년(메이지 2년) 이타쿠라 가문은 미카와 국 시게하나 번으로 전봉되어 번지사로 부임하였다. 이로써 후쿠시마 번은 소멸되었다. 1873년(메이지 6년) 성터는 육군의 주둔지로 되어 파각되었다. 현재 성터에는 후쿠시마 현청사와 모미지야마 공원이 정비되어 있으며, 모미지야마 공원 한편에 이타쿠라 신사가 건립되어 있다.3. 구조
이타쿠라씨 시대의 성은 1873년(메이지 6년)에 성터에 육군 진대(鎮台) 분영이 설치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 구내 총면적(이타쿠라씨 시대): 75790평
- 구내: 본마루(本丸), 니노마루(二の丸), 니노마루 고가이니와(二の丸御外庭), 산노마루(三の丸) 등
내곡륜과 외곡륜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문(門)과 미쓰케(見附)가 설치되어 있었다.
구분 | 명칭 | 위치 (남서쪽부터 시계 방향) |
---|---|---|
내곡륜 | 문(門) | 서문, 오테몬(大手門), 북문, 동문 |
외곡륜 | 미쓰케(見附) | 미쓰고바시구치, 시로미치구치, 바바초구치, 오테구치, 산노마루구치 |
3. 1. 개요
이타쿠라씨 시대의 성 구조는 『板倉家御歴代略記』 부도를 통해 어느 정도 재현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현청 주차장에 본마루(本丸) 저택이 있었고, 남동부를 제외하고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본마루(本丸) 저택 동쪽(현재: 현청 동분청사 일대)에는 영사(御霊社)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탄약고와 관청이 있었다. 본마루(本丸) 저택 남쪽(현재: 홍엽산공원(紅葉山公園))은 정원이었고, 남서쪽(현재: 후쿠시마현청(福島県庁))에는 마장과 철포장, 무기고 등이 있어 군사적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테몬(大手門)은 현재 현청 정면 도로상 후쿠시마경찰서와 오하라종합병원 남쪽 사거리 부근에 있었다. 이러한 시설들을 내해자가 둘러싸고 있었고(단, 남쪽은 아부쿠마가와(阿武隈川)가 흐르는 천연의 요새였다), 이 내해자 바깥쪽에는 북쪽에서 서쪽에 걸쳐 사무라이 저택 외에도 련병소, 병학소 등이 있는 군사적 공간, 동쪽에는 미야쿠쇼(米役所)와 재목창고 등이 늘어선 경제적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들을 둘러싸듯이 성의 서쪽, 북쪽, 동쪽에 외해자가 있었다.3. 2. 주요 출입문
후쿠시마성 북쪽 내곡륜(内曲輪)에 있던 정문이다. 2층 누문(櫓門) 형태였으며, 문루 위에 샤치(鯱)를 올려놓은 훌륭한 문이었다고 전해진다. 1873년 육군 진대분영(鎮台分営) 설치 당시 파괴되었다. '오테몬(追手門)'이라고도 불렸다. 후쿠시마시립 후쿠시마미나미유치원 옆 후쿠시마현도 제148호선 미나미와라후쿠시마 선(현청도리(県庁通り)) 위에 있었다.
오테몬에서 북쪽의 시부산(信夫山)으로 직진하는 길은 오랫동안 '오몬도리(大門通り)'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현청도리(県庁通り)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후쿠시마성 남쪽 외곡륜에 있던 출입구로, 미붙번소(見附番所)가 설치되어 있었다. 양쪽 끝에는 미쓰고바시길(密語橋通り)을 따라 무가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현재 스기즈마카이칸(杉妻会館) 옆 후쿠시마시도 나카마치·야나기마치선(밀어교길) 위에 있다. 쇼와 시대에 외호가 매립되기 전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미쓰고바시구(密語橋口)에 놓여 있던 '미쓰고바시(ささやきばし)'는 에도 시대 초기에 신푸군(信夫郡) 남서부의 스기 고목을 사용한 목교였다고 전해지며, 후쿠시마의 민담 '왕로스기 전설(おろすでんせつ)'의 무대가 된 다리이다. 현재 외호와 미쓰고바시 터에는 이시다타미(石畳)가 깔려 있고, 돌다리 자체는 스기즈마카이칸 정원 안으로 축소 이설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후쿠시마성 서쪽 끝 외곽 성벽에 있던 출입구이다. 현재의 성도도리(시도명 불명・아라마치와 나카마치의 마을 경계)와 후쿠시마시도 혼마치・아라마치선(외호리도리)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었다.
후쿠시마성 북서쪽 끝 외곽에 있던 출입구이다. 현재의 구쿠나이도오리(곽내길)(시도명 불명・츄우마치와 혼마치의 마을 경계)와 후쿠시마시도 츄우마치・야나기마치선(미쓰고바시도오리, 密語橋通り)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었다.
후쿠시마성 북쪽 외곽의 곡륜(外曲輪)에 있던 정문이다. 현재 후쿠시마 경찰서 앞 교차로의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후쿠시마시에 있는 '오오마치(大町)'와 '카미마치(上町)'라는 지명은 '오테구치(大手口)'와 깊은 관련이 있다. 두 지명 모두 '후쿠시마성 정문(오테구치)에 접해 있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다.
후쿠시마성 북동쪽 외곡륜에 있던 출입구이다. 현재 국도 4호선( 후쿠시마 남바이패스)의 후나바초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수십 미터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유구
- 모미지야마 공원: 후쿠시마 성 내에 있었던 정원 터이다. 내호 토루의 일부가 남아 있다.
- 후쿠시마 성 내호 토루 터: 후쿠시마현청 서청사 남쪽, 후쿠시마 제일소학교 교정에 내호 토루가 남아 있다.
- 미쓰고 교, 후쿠시마 성 외호 터: 스기즈마 회관 정원 내에 미쓰고 교를 본뜬 돌다리가 남아 있다.
5. 유물
2001년 후쿠시마 경찰서 분청사 건설에 따른 구 니노마루 호(堀) 옛터 발굴 조사에서 "삼인양(三引両)" 문양이 새겨진 칠기가 출토되었다. "삼인양(三引両)"은 다테씨(伊達氏)의 가문 중 하나이며, 후쿠시마 성과 다테씨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2014년 후쿠시마현청(福島県庁) 북청사 건설 및 오하라 종합병원(大原綜合病院) 재건축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는 에도 시대 도자기, 목제품, 후쿠시마 성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 시대 소성 토기,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의 도자기·기와·칠기·목제품 등 약 200점도 출토되었다. 센고쿠 시대 다테씨 지성이었던 "스기즈마 성(杉妻城)" 유물로 확인된 것 외에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목제품도 다수 출토되었다.
6. 호칭
후쿠시마 성은 이전에는 다이부쓰 성(大仏城) 또는 스기즈마 성(杉妻城)·스기메 성(杉目城)이라고 불렸다. 다이부쓰 성의 정식 발음은 "다이부쓰조"이다. "오사라기조"는 오독이다. 스기즈마/스기메 성의 발음은 모두 "스기노메조"이다.
참조
[1]
문서
佐藤家忠と古川重吉
[2]
문서
灌漑用水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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