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코네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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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코네 병풍은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6폭 병풍으로, 11명의 남녀가 다양한 오락을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는 미상이나, 화풍은 교카노 파를 따른 것으로 보이며, 중국 사예를 일본식으로 변형하여 표현했다. 에도 시대 말기 히코네번 이이씨 가문 소유가 되면서 '히코네 병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1955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재 히코네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풍속화의 진수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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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네 병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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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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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시기 | 1624년–1644년 경 |
종류 | 병풍 |
재료 | 종이에 금박을 입힘 |
기법 | 채색 |
크기 | 가로 94cm x 세로 274.8cm |
소장처 | 히코네 성 박물관 |
문화재 지정 | 국보 |
일본어 명칭 | 日本語: 紙本金地著色風俗図 (Shihon Kinjichaku-shoku Fuzoku-zu) |
로마자 표기 | Shihon Kinjichaku-shoku Fūzoku-zu |
한국어 명칭 | 종이에 금박 채색 풍속도 |
상세 정보 | |
주제 | 풍속화 |
특징 | 에도 시대 초기의 풍속을 묘사 |
그림 내용 | 악기를 연주하는 남녀 이성을 유혹하는 기녀 담배를 피우는 여성 고쇼에서 고쇼인 게임을 하는 여성 |
화가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음 |
양식 | 가노파와 도사파의 영향을 받음 |
보존 상태 | 양호 |
2. 상세
히코네 병풍은 여느 풍속화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작가가 가노파나 그와 유사한 화파 소속이었을 경우, 일상적인 풍속을 다루는 주제는 화가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여겨 서명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의 의뢰로 제작된 작품에는 관례적으로 서명하지 않기도 했다.
병풍의 필법과 붓놀림 방식으로 미루어 보아, 작가의 화풍은 '교카노 파'(京狩野) 양식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초의 병풍 작품 대다수가 그렇듯 히코네 병풍은 작자는 물론 누가 제작을 의뢰했는지도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추측컨대 당대 사회 고위층, 즉 공가나 무가, 혹은 정중(町衆, 마치슈)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2]
[1]
간행물
国宝指定の告示
文化財保護委員会
1955-02-02
94cm × 274.8cm 크기의 6폭 병풍으로, 열한 명의 남녀가 오락을 즐기는 모습을 그렸다. 왼편에는 맹인 남녀가 샤미센을 연주하고 있고, 그 뒤로는 네 폭짜리 산수화 병풍이 서 있다. 오른편에는 남녀 무리가 모여 쌍륙(스고로쿠) 놀이를 하고 있다.
그려진 장면은 근세 초 교토 로쿠조 야나기마치(통칭 미스지마치)의 유곽으로 추정된다. 당시 로쿠조 야나기마치의 다유는 시조가와라마치에서 상연되던 유녀 가부키의 연기자이기도 했다. 이처럼 향락적이고 화려한 소재를 다루었음에도 그림에서는 어딘가 차갑고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제작 연대는 유사한 작품과의 비교나 금지(金紙) 사용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간에이 연간, 특히 간에이 6년(1629년)부터 11년(1634년) 사이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풍기 단속이 엄격해지면서 그림 속과 같은 풍경이 빠르게 사라져가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그림은 발주자나 화가가 과거 자신들이 즐겼으나 이제는 사라져가는 정경을 추억하며 제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병풍의 필법으로 미루어 보아 화가는 '교카노(京狩野) 파'의 화풍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 인물들이 즐기는 활동은 중국 문인들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기예인 금기서화(琴棋書画), 즉 사예(四藝)를 당시 일본의 풍속에 맞게 변형하여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금(琴, 거문고) 연주를 샤미센 연주로, 기(棋, 바둑)를 스고로쿠(주사위 놀이)로, 서(書, 글쓰기)를 연문(艶文) 주고받기로, 화(画) 감상을 병풍 속 산수화로 바꾸어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은 근세 일본 회화에서 종종 보이지만, 히코네 병풍은 그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후대의 우키요에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인물들의 옷차림과 소지품은 사계절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우키요에의 한 종류인 사계회(四季絵, 시키에)와도 연관성을 보여준다.
3. 작가
한때 이 작품은 메이지 시대 중반까지 화가 이와사 마타베이(1578–1650)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당시에는 마타베이가 사용한 호('가쓰모치')가 알려지지 않았고(1898년 발견), 그의 별명인 '우키요 마타베이'가 우키요에와 관련 있다는 추측, 그리고 《우키요에 부이코》(浮世絵類考) 같은 문헌에서 그를 우키요에의 창시자로 시사하는 내용 등으로 인해 에른스트 페놀로사를 포함한 초기 연구자들은 그를 작가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마타베이의 실제 작품들은 우아한 야마토에 전통에 속하며, '우키요'라는 단어 역시 아사이 료이가 1661년 사용하기 전에는 다른 의미였다는 점 등이 밝혀지면서 이 설은 부정되었다. 히코네 병풍의 인물 묘사나 산수화 기법 역시 마타베이의 것과는 다르다.
현재는 작가가 가노파 화가 중 한 명일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구체적으로 가노 산라쿠, 가노 고이, 가노 나가노부 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명으로 특정되지는 않았으며 이러한 설들은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작가의 정체는 불분명하지만, 그림의 세부 표현을 통해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였음은 확실하다. 인물의 머리카락이나 옷의 무늬를 페티시즘을 느끼게 할 만큼 정교하게 묘사한 점, 병풍 속 그림으로 그려진 슈분 양식의 산수화(당시 기준으로도 150년 전 유행 양식)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점 등이 그 증거이다.
4. 화풍
병풍 속 인물들이 하는 활동들은 옛 중국의 문인들이 갖추던 네 가지 기예, 이른바 사예 (四藝)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중국의 문물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닌 일본의 것으로 대체한 모습인데, 거문고는 샤미센, 바둑은 스고로쿠, 책은 염문 (연애편지), 그림은 병풍 속 산수화로 각각 대입해 놓았다. 인물들의 옷차림과 지니고 있는 풍물은 사계절을 연상케 하며, 이는 우키요에의 일종인 사계회 (四季絵|시키에일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 전래
우키요에 화가 하네가와 진초 (羽川珍重, 1679?~1754)는 히코네 병풍에 기대선 남자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남겼다. 작품 속 글에는 히코네 병풍이 엔쿄 2년 (1745년) 에도의 시타야 (下谷)에 있었다고 쓰여 있다. 이는 병풍이 1745년경 에도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화가 시바타 제신 (1807–1891)의 일대기를 다룬 기록에 따르면, 시바타 제신이 어느 에도 집안의 소장품 중에서 히코네 병풍을 '발견'하였고, 이를 여러 번 모사하거나 변형한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발견 시기는 1833년에서 1836년경으로, 시바타가 병풍을 모사한 시기는 1840년경으로 추정된다.[2][3]
이후 히코네 병풍은 에도 시대 말기 (1853~1867)에 히코네번 이이씨 집안의 소장품이 되었다. '히코네 병풍'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다만 이이 가문이 산킨코타이 제도로 인해 에도에 머무를 당시 저택 내에 병풍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히코네 번의 집안 문서에서도 별다른 기록이 없어 쇼와 시대까지 에도에 보관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병풍이 이이 가문에 들어온 정확한 시기와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다도인 다카하시 요시오 (高橋義雄, 1861~1937)는 1912년 6월 30일 이이 저택에서 열린 노 공연에 대한 기록에서, 당시 15대 당주였던 이이 나오타다 (井伊直忠, 1881–1947)가 여러 예술품을 전시했으며 그중에 히코네 병풍도 있었다고 적었다. 이때 이름 모를 가문 사람이 다카하시에게 병풍을 '그 유명한 우키요에 작가 마타베이의 히코네 병풍'이라 소개하며, 서화와 골동품에 관심이 많았던 13대 당주 이이 나오스케 (1815~1860)가 처음 들여온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가 병풍을 처음 입수했다는 설은 메이지 시대에 나온 이야기로, 당시 안세이 대옥 등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던 나오스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다이묘 다인으로서 "일기일회"를 설파한 나오스케의 금욕적인 성격과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반면, 나오스케의 형이자 선대 당주인 이이 나오아키는 세련된 미의식을 가졌고 도검, 악기, 노 도구, 다도구, 시계, 오르골 등 다양한 물품을 수집했던 인물이다. 히코네 병풍이 오랫동안 두루마리 형태로 전해졌고, 병풍으로 완성되기 직전에 작업이 중단된 상태로 흑칠 삼중 상자와 슌케이칠 외상자에 보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오아키가 병풍에 어울리는 표구를 하려다 완성 직전 사망했고, 뒤를 이은 나오스케가 이를 완성하지 않고 봉인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
이 작품은 적어도 17세기 중반부터 일본 풍속화의 걸작으로 여겨져 왔으며, 에도 시대를 통해 여러 차례 모사되거나 변형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1955년에는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紙本金地著色風俗図|시혼킨지차쿠쇼쿠 후조쿠즈일본어이다. 현재 시가현 히코네시의 히코네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매년 4월경에 일반에 공개되고 그 외 기간에는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2]
6. 평가 및 영향
히코네 병풍은 17세기 중엽 일본 풍속화의 진수이자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널리 모사되고 때로는 변형되었으며, 일부 복제품 자체도 명성을 얻어 후대에 전해졌다. 1955년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공식 명칭은 紙本金地著色風俗図|시혼킨지차쿠쇼쿠 후조쿠즈일본어이다.
그림 속 형식을 보면, 중국 문인들의 '아(雅)'한 놀이인 '금기서화(琴棋書画)'를 당시 일본의 '속(俗)'한 것으로 바꾸어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즉, 금(琴)은 샤미센, 기(棋)(바둑)는 스고로쿠, 서(書)는 야한 편지, 화(画)는 그림 속 병풍의 산수화로 각각 바꾸어 나타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근세 회화에서 드물지 않지만, 히코네 병풍은 그 초기 사례로 평가되며 후대의 우키요에에도 영향을 미쳤다.
참조
[2]
서적
彦根屏風 ─伝来と研究史─
[3]
논문
是真点描
日本美術協会
1938
[4]
웹사이트
히코네성 박물관
https://visit.hik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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