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1932년 7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32년 7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치러졌다. 선거 결과, 나치당이 37.27%의 득표율로 230석을 얻어 제1당으로 부상했지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사회민주당은 21.58%의 득표율로 133석을 얻었고, 공산당은 14.32%의 득표율로 89석을 얻었다. 선거 이후, 파펜 내각은 나치당의 지원을 얻어 통치를 이어갔지만, 정부의 권위주의적 조치와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로 정국은 더욱 불안정해졌고, 결국 11월에 조기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32년 독일 - 프로이센 쿠데타
    프로이센 쿠데타는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수상의 주도로 프로이센 자유주의 주 정부가 강제 해산된 사건으로, 중앙 정부 권력 강화와 바이마르 공화국 민주주의 쇠퇴, 나치당 권력 장악에 영향을 미쳤다.
  • 1932년 독일 - 1932년 11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1932년 11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나치당과 공산당의 강세 속에서 치러졌으며, 나치당의 의석수 감소와 공산당의 약진으로 정국 불안이 심화되어 결국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 1932년 선거 -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32년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만주사변 처리를 명분으로 중의원을 해산하고 실시한 선거로, 입헌정우회가 압승을 거두었으나 혈맹단 사건으로 정당 정치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선거구제 하에서 만 25세 이상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있었다.
  • 1932년 선거 - 1932년 프랑스 총선
    1932년 프랑스 총선은 제3공화국 시기에 좌파 연합인 "카르텔 데 고슈"의 승리로 에두아르 에리오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내부 분열과 경제 위기로 불안정했으며, 공화급진사회당이 제1당, 프랑스 노동자 인터내셔널 지부가 그 뒤를 이었다.
  • 1932년 7월 - 1932년 하계 올림픽
    1932년 하계 올림픽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10회 하계 올림픽으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올림픽 선수촌과 승리 시상대 도입, 사진 판독 장치 사용 등 새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 1932년 7월 - 프로이센 쿠데타
    프로이센 쿠데타는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수상의 주도로 프로이센 자유주의 주 정부가 강제 해산된 사건으로, 중앙 정부 권력 강화와 바이마르 공화국 민주주의 쇠퇴, 나치당 권력 장악에 영향을 미쳤다.
1932년 7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선거 개요
국가바이마르 공화국
선거 유형의회 선거
이전 선거1930년 독일 연방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30년
다음 선거1932년 11월 독일 연방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32년 11월
선출 의석 수608석
과반 의석 수305석
등록 유권자 수44,211,216명 (2.9% 증가)
투표율84.1% (2.1%p 증가)
선거 날짜1932년 7월 31일
내각파펜 내각
정부 형태 (선거 이전)무소속–DNVP
정부 형태 (선거 이후)무소속–DNVP
주요 정당 및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 1932
아돌프 히틀러
지도자아돌프 히틀러
정당나치당
이전 선거 결과18.3%, 107석
당선 의석 수230석
의석 변동123석
득표수13,745,680표
득표율37.3%
득표율 변동19.0%p
독일 사회민주당 1932 지도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
지도자오토 벨스
아르투어 크리스피엔
한스 포겔
정당독일 사회민주당
이전 선거 결과24.5%, 143석
당선 의석 수133석
의석 변동10석
득표수7,959,712표
득표율21.6%
득표율 변동2.9%p
에른스트 텔만 1932
에른스트 텔만
지도자에른스트 텔만
정당독일 공산당
이전 선거 결과13.1%, 77석
당선 의석 수89석
의석 변동12석
득표수5,282,636표
득표율14.3%
득표율 변동1.2%p
루트비히 카스
루트비히 카스
지도자루트비히 카스
정당독일 중앙당
이전 선거 결과11.8%, 68석
당선 의석 수75석
의석 변동7석
득표수4,589,430표
득표율12.4%
득표율 변동0.6%p
알프레드 후겐베르크
알프레드 후겐베르크
지도자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정당독일 국가인민당
이전 선거 결과7.0%, 41석
당선 의석 수37석
의석 변동4석
득표수2,178,024표
득표율5.9%
득표율 변동1.1%p
하인리히 헬트
하인리히 헬트
지도자하인리히 헬트
정당바이에른 인민당
이전 선거 결과3.0%, 19석
당선 의석 수22석
의석 변동3석
득표수1,192,684표
득표율3.2%
득표율 변동0.2%p
선거 지도
1932년 7월 독일 연방 선거 - 차트
선거구별 결과
1932년 7월 독일 연방 선거 - 구역별
구역 및 독립 도시별 결과
1932년 7월 독일 연방 선거 - 등치 지역도
각 정당별 결과

2. 배경

1932년 7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치러졌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재선에 성공했지만,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 역시 상당한 득표를 기록하며 급부상했다.[1] 힌덴부르크는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를 해임하고 프란츠 폰 파펜을 새 총리로 임명했다.[2] 파펜은 의회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기에, 힌덴부르크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했고, 결국 1932년 7월 31일에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다.[2]

2. 1. 경제 대공황과 정치적 혼란

1929년부터 독일은 대공황으로 고통받았으며, 실업률은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8.5%에서 거의 30%로 상승했고,[1] 산업 생산량은 약 42% 감소했다.[1] 1932년에는 600만 명 이상이 실업 상태였고, 조직 노동자의 40%가 실업 상태이거나 근무 시간이 단축되었다.

1930년 3월, 사회민주당(SPD), 중앙당, 그리고 양대 자유주의 정당들의 연립 정부가 붕괴되었다.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중앙당의 하인리히 브뤼닝이 이끄는 소수 정부를 임명했는데, 이 정부는 힌덴부르크의 비상 권한을 사용해서만 통치할 수 있었다. 1930년 9월 선거는 매우 분열된 국회를 만들어 안정적인 정부 구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선거에서 나치당은 95석을 얻으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1]

대통령령을 통해 시행되고 의회가 용인한 브뤼닝의 정책은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고 의회 제도를 약화시켰다.

2. 2. 힌덴부르크와 브뤼닝 내각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회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임명하는 "대통령 내각"을 통해 정국을 운영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은 힌덴부르크의 지원을 받았으나, 나치당과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1932년 4월 13일, 힌덴부르크는 돌격대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같은 달 23일 지방 선거에서 나치당은 바이에른주를 제외한 모든 주의회에서 제1당이 되었다.

힌덴부르크의 측근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브뤼닝 내각 대신 나치당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1932년 4월과 5월, 슐라이허는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와 비밀 회담을 가졌다. 이들은 브뤼닝 내각을 무너뜨리고, 새 내각에서 돌격대 금지 명령을 해제하며, 국회를 해산하는 조건으로 나치당이 새 내각을 공격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었다.[1] 이 밀약에 따라 슐라이허는 5월 13일 국방 장관 빌헬름 그뢰너를 해임시키고, 5월 30일에는 힌덴부르크에게 브뤼닝 해임을 건의했다. 6월 1일, 프란츠 폰 파펜이 새로운 대통령 내각의 총리가 되었다.[2]

파펜과 슐라이허는 약속대로 6월 4일 국회를 해산하고, 6월 16일 돌격대 금지 명령을 해제했다.[3]

2. 3. 1932년 대통령 선거와 파펜 내각

1932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재선에 성공했지만,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는 상당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1] 1932년 5월, 힌덴부르크는 하인리히 브뤼닝을 해임하고 프란츠 폰 파펜을 총리로 임명했다.[1] 파펜 내각은 국회에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힌덴부르크에게 국회 해산을 요구하여 7월 31일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게 되었다.[1]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국회에 근거하지 않고 임면하는 "대통령 내각"의 첫 번째 총리였던 하인리히 브뤼닝과 그의 내각의 국방 장관인 빌헬름 그뢰너는 나치당과 대립을 심화시켰고, 1932년 4월 13일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돌격대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4월 23일 각 주에서 실시된 지방 선거에서 나치당은 바이에른주를 제외한 모든 주의회에서 제1당으로 약진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측근으로 킹 메이커로 암약하고 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중장은 브뤼닝 내각을 외면하고 나치당과의 연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1932년 4월 28일과 5월 3일에 슐라이허와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가 비밀리에 회견했다. 두 사람은 브뤼닝 내각을 타도하고, 그 후에 옹립될 신 내각에서 돌격대 금지 명령을 해제하고, 국회도 해산할 것이니, 그때까지 나치당은 신 내각에 대한 공격을 자제한다는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에 기초하여, 슐라이허는 5월 13일에 그뢰너를 실각시키고, 이어서 5월 30일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브뤼닝을 해임시켰다. 그리고 6월 1일 프란츠 폰 파펜을 새로운 대통령 내각의 총리로 옹립했다.

파펜과 슐라이허는 밀약대로 6월 4일에 국회를 해산하고, 6월 16일에는 돌격대 금지 명령을 해제했다.

3. 선거 운동

나치당은 1930년 9월 29만 3천 명이던 당원 수가 1932년 말에는 거의 150만 명으로 늘어났고, 당 소유 신문 수도 1930년 49개에서 1932년 127개로 증가했다. 민족 관찰자 발행 부수는 1929년 2만 6천 부에서 1931년 10만 부 이상으로 증가했다.

1930년부터 나치 선전 및 선거 운동을 책임진 요제프 괴벨스는 1932년 기업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1] 돌격대친위대 금지는 주 정부 간청에도 불구하고 파펜이 파펜 내각에 대한 나치 관용을 대가로 해제했다.[2]

독일 국가당(DSP)은 1932년 프로이센 주 선거 이후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석이 28석에서 2석으로 감소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중앙당, 독일 인민당(DVP)과 동맹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독일 국가 인민당(DNVP)과 동맹을 맺었다.[3]

알프레드 후겐베르크는 1930년 독일 연방 선거의 저조한 결과에 따라 DNVP를 대중 운동 정당으로 만들려 시도했고, DNVP는 파펜 정부를 지지했다.[4]

파펜은 선거로 좌파와 중도를 약화시키려 했다. 1932년 7월 20일, 알토나 피의 일요일에 함부르크 알토나에서 나치와 좌익 간 충돌 후 프로이센 사회민주당 정부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시행했다. DNVP와 DVP는 이 결정을 지지했다. 괴벨스는 6월 4일 지방 지도자들에게 파펜에 대해 논의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치는 "이 내각과 연관되는 것을 매우 단호하게 거부한다"라고 밝혔다.[5] 독일 공산당(KPD)은 파펜의 행동을 "노골적인 파시스트 쿠데타"라고 비판했고, 보복하지 않은 SPD도 비판했다.[6]

중앙당은 나치를 이교도 운동이라고 비난했고, 나치는 중앙당이 소련 반종교법과 스페인 제2공화국의 가톨릭에서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조직과 동등한 반종교 단체와 협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7]

3. 1. 나치당의 선거 전략

요제프 괴벨스가 이끄는 나치당은 1932년 7월 선거에서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쳤다. 나치당은 이 선거를 바이마르 공화국 전체에 대한 심판으로 규정하고, 1918년 11월 혁명 이후의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기존 정치권에 물었다.

나치는 반공주의와 반의회주의를 내세웠지만, 이는 파펜 내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괴벨스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상세한 논쟁 대신 화려한 선전과 단순한 주장을 내세웠다. 수많은 대중 집회를 열고, 선거 영화와 레코드를 활용했다.[1] 특히 히틀러는 1932년 7월 15일부터 7월 30일까지 비행기를 이용하여 50개 도시를 순회하며 유세를 펼치는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2]

나치당의 포스터를 붙이는 돌격대원 (1932년 6월 21일)

3. 2. 사회민주당의 선거 운동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선전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방어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적대자에게도 통일을 호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적대자인 나치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많았고, 사회적·정치적 전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게을리했다.

국기단이나 Allgemein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전독일 노동조합 연합de(ADGB) 등으로 구성된 바이마르 공화국 옹호파의 공동 전선 Eiserne Front|철선de의 집회는 양적으로는 나치당의 집회에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역시 그 선전은 방어적인 성격이 강했다.

3. 3. 공산당의 선거 운동

공산당은 "사회 파시즘론"에 따라 사민당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하는 선거전을 펼쳤다.[1]

3. 4. 중앙당의 선거 운동

중앙당 당원이었던 파펜(Franz von Papen) 수상이 당수 루트비히 카스의 의향에 반하여 수상직을 수락하고 당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에, 중앙당은 파펜에게 격렬한 적대심을 불태웠다. 중앙당은 선거전에서 "브뤼닝으로 돌아가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배교자" 파펜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파펜의 모든 독재 계획을 거부하고, "개혁된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브뤼닝을 지도자로 "독일 전역에 걸친 승리의 행진"을 벌여 상당한 동원에 성공했다. 가톨릭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도 호소하는 노력을 했다

3. 5. 국가인민당의 선거 운동

독일 국가인민당은 반공산주의와 반 바이마르 공화국을 내세운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 나치당과의 주장 차이는 거의 없었지만, 나치당의 "사회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민족주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으며, 사회주의는 우리를 목표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들만이 유일한 "보수주의 운동"이라고 자처했다.[1]

3. 6. 폭력 사태의 증가

선거전 기간 동안, 각 정당의 사병 조직에 의한 폭력 사건이 평소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나치당의 돌격대나 공산당의 적색 전선 전사 동맹과 같은 과격한 사병단은 물론이고, 사민당의 국기단과 같은 비교적 온건한 사병단도 빈번하게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

좌우 양쪽의 무장 부대는 거의 매일같이 거리로 나와 가두 투쟁을 벌였다(특히 주말). 1932년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한 달 동안 프로이센 주에서만 가두 투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99명, 부상자는 1125명에 달했다.[1]

1932년 7월 17일, 알토나에서 경찰의 허가를 받고 행진하던 나치당의 데모대가 공산당의 근거지인 노동자 거리에 들어선 것으로 인해 항쟁이 벌어져, 데모대를 호위하던 경관대와 공산당의 총격전으로 이어져, 통행인 등이 휘말려 18명이 사망하는 알토나 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했다.[2] 파펜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7월 18일 야외 집회와 행진을 금지했지만, 정치적 폭력 사건이 종식되지는 않았다.[3] 1932년 7월 20일 파펜 수상은 프로이센 주 정부의 명령 위반을 이유로 프로이센 쿠데타(Preußenschlagde)를 일으켜, 바이마르 공화국파의 거점이었던 프로이센 주 정부를 해체했다.[4] 파펜은 라디오 연설에서 "프로이센 정부는 공산당 테러 집단에 대항할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며 이 쿠데타를 정당화했다.[5] 7월 24일에는 공산당 본부인 칼 리프크네히트 하우스(de|Karl-Liebknecht-Haus)가 점령되었지만, 공산당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켜, 7월 26일에는 비상사태 파기되어 취소되었다.[6]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고조된 공산당에 대한 경계심은 분명히 나치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7] 나치당은 가두 투쟁을 통해 "우리야말로 공산당의 테러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질서 요인"임을 선전했다.[8]

4. 선거 결과

Reichstagswahl Juli 1932de

1932년 7월 31일에 투표가 진행되었다. 나치당은 37.3%의 득표율과 230석을 획득하여 사민당을 제치고 국회 제1당으로 약진했다.[2] 선거 제도는 비례대표제였으며, 선거권은 20세 이상의 남녀에게 주어졌다. 투표율은 84.06%로, 이전 선거보다 2.11% 상승했다.

1932년 7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결과
정당득표수득표율(%)의석수 (변동)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13,745,68037.27230 (+123)
독일 사회민주당(SPD)7,959,71221.58133 (-10)
독일 공산당(KPD)5,282,63614.3289 (+12)
중앙당(Zentrum)4,589,43012.4475 (+7)
독일 국가인민당(DNVP)2,178,0245.9137 (-4)
바이에른 인민당(BVP)1,192,6843.2322 (+3)
독일 인민당(DVP)436,0021.187 (-23)
독일 국가당(DStP)371,8001.014 (-16)
기독교사회 국민봉사(CSVD)364,5430.993 (-11)
독일 중산층 제국당("WP")146,8760.402 (-21)
(DBP)137,1330.372 (-4)
(RLB)96,8510.262 (-1)
기독교 국가 농민 및 농촌 주민당90,5540.251 (-18)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D)72,6300.200 (신규)
독일-하노버당(DHP)46,9270.130 (-3)
(VRP)40,8250.111 (+1)
기타 여러 정당130,0470.350
총계36,882,354100608 (+38)



각 선거구의 최다 득표 정당과 그 득표율

4. 1. 나치당의 부상

1932년 7월 31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37.27%의 득표율로 230석을 획득하여 사민당을 제치고 국회 제1당으로 부상했다.[2]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정당 중 가장 많은 의석수였다.

나치당의 압승은 중산층의 지지를 얻은 덕분이었다. 기존에 중도 부르주아 정당에 투표했던 중산층 유권자들이 독일 국가인민당의 분열과 독일 인민당반 마르크스주의 입장 약화, 독일 민주당과 독일 중산층 제국당의 약세에 실망하여 나치당으로 지지를 옮겼다.

그러나 같은 해 대통령 선거와 비교하면 나치당의 득표 증가는 크지 않았다. 새로운 지지층을 얻었지만, 기존 지지층 일부를 잃은 것이다. 이는 나치당 지지 기반의 상대적인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사민당은 21.58%의 득표율로 133석에 그쳤고, 공산당은 14.32%의 득표율로 89석을 얻었다. 좌익 전체 득표율은 1930년 37.6%에서 36.2%로 소폭 하락했다. 중앙당과 바이에른 인민당은 의석을 늘렸지만, 나치당과 공산당이 국회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온건파 정부 구성은 불가능해졌다. 결국 1932년 11월에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1932년 7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결과
정당득표수득표율(%)의석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13,745,68037.27230
독일 사회민주당(SPD)7,959,71221.58133
독일 공산당(KPD)5,282,63614.3289
중앙당(Zentrum)4,589,43012.4475
독일 국가인민당(DNVP)2,178,0245.9137
바이에른 인민당(BVP)1,192,6843.2322
독일 인민당(DVP)436,0021.187
독일 국가당(DStP)371,8001.014
기독교사회 국민봉사(CSVD)364,5430.993
독일 중산층 제국당("WP")146,8760.402
(DBP)137,1330.372
(RLB)96,8510.262
기독교 국가 농민 및 농촌 주민당90,5540.251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D)72,6300.200
독일-하노버당(DHP)46,9270.130
(VRP)40,8250.111
기타 정당130,0470.350
총계36,882,354100608


4. 2.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결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7,959,712표를 얻어 21.58%의 득표율을 기록, 133석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2] 이는 지난 선거에 비해 득표율은 2.95%, 의석수는 10석이 감소한 결과였다. 독일 공산당(KPD)은 5,282,636표(14.32%)를 얻어 의석수를 12석 늘려 89석을 확보했다.[2] 그러나 좌익 전체 득표율은 1930년 37.6%에서 36.2%로 감소했다.

정당득표수득표율의석수
독일 사회민주당(SPD)7,959,71221.58%133
독일 공산당(KPD)5,282,63614.32%89


4. 3. 기타 정당의 결과

중앙당과 바이에른 인민당은 의석수를 늘렸지만, 다른 군소 정당들은 대부분 의석수를 잃었다. 상세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당명득표수득표율(%)의석수 (변동)
독일 인민당(DVP)436,0021.187 (-23)
독일 국가당(DStP)371,8001.014 (-16)
기독교사회 국민봉사(CSVD)364,5430.993 (-11)
독일 중산층 제국당("WP")146,8760.402 (-21)
(DBP)137,1330.372 (-4)
(RLB)96,8510.262 (-1)
기독교 국가 농민 및 농촌 주민당90,5540.251 (-18)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D)72,6300.200 (신규)
독일-하노버당(DHP)46,9270.130 (-3)
(VRP)40,8250.111 (+1)
기타 여러 정당130,0470.350


5. 선거 이후

나치당 또는 공산당의 지지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파펜과 나치는 비공식적인 신임과 공급 협약을 체결하여 총리가 권력을 유지하고 칙령 통치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3] 그 대가로 파펜은 나치 돌격대(SA) 민병대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다.[4]

파펜의 긴축 조치는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인기가 없었지만, 독일 엘리트층은 일반적으로 이를 지지했다.[5] 정부는 공개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1932년 7월 20일, 프로이센의 SPD 주도 연립 정부는 대통령령을 통해 내각의 직접 통제를 받도록 하는 불법 쿠데타로 전복되어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더욱 약화시켰다.[6] 8월 9일, 또 다른 대통령령은 사형 사건의 사법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는 동시에 항소권을 제한했다.[7][8] 새로운 특별 법원도 설립되었다.[7]

8월 11일, 파펜과 내무부 장관 빌헬름 폰 가일 남작은 기자 회견을 열어 독일을 사실상 독재 국가로 만들 새로운 헌법 계획을 발표했다.[9] 9월 12일, 국회는 512 대 42의 압도적인 표결로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고 조기 선거힌덴부르크에 의해 소집되었다.[10]

5. 1. 정국 불안 심화

나치당 또는 공산당의 지지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파펜과 나치는 비공식적인 신임과 공급 협약을 체결하여 총리가 권력을 유지하고 칙령 통치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3] 그 대가로 파펜은 나치 ''돌격대''(SA) 민병대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다.[4]

파펜의 긴축 조치는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인기가 없었지만, 독일 엘리트층은 일반적으로 이를 지지했다.[5] 정부는 공개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1932년 7월 20일, 프로이센의 SPD 주도 연립 정부는 대통령령을 통해 내각의 직접 통제를 받도록 하는 불법 쿠데타로 전복되어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더욱 약화시켰다.[6] 8월 9일, 또 다른 대통령령은 사형 사건의 사법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는 동시에 항소권을 제한했다.[7][8] 새로운 특별 법원도 설립되었다.[7]

8월 11일, 파펜과 내무부 장관 빌헬름 폰 가일 남작은 기자 회견을 열어 독일을 사실상 독재 국가로 만들 새로운 헌법 계획을 발표했다.[9] 9월 12일, 국회는 512 대 42의 압도적인 표결로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고 조기 선거가 힌덴부르크에 의해 소집되었다.[10] 국회가 소집되었지만, 공산당이 제출한 파펜 내각 불신임안의 긴급 동의에 나치당이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불신임안이 가결되었고, 파펜은 다시 국회를 해산했다. 다시 선거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1932년 11월 독일 국회 선거).

5. 2. 1932년 11월 총선

1932년 9월 12일, 국회가 소집되었지만 공산당이 제출한 파펜 내각 불신임안의 긴급 동의에 나치당이 찬성하면서 불신임안이 가결되었고, 파펜은 다시 국회를 해산했다. 다시 선거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10]

5. 3.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

나치당 또는 공산당의 지지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파펜과 나치 사이에 비공식적인 신임과 공급 협약이 체결되어 총리가 권력을 유지하고 그의 칙령 통치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3] 그 대가로 파펜은 나치 ''돌격대''(SA) 민병대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다.[4]

파펜의 긴축 조치는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인기가 없었지만, 독일 엘리트층은 일반적으로 이를 지지했다.[5] 정부는 공개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1932년 7월 20일, 프로이센의 SPD 주도 연립 정부는 대통령령을 통해 내각의 직접 통제를 받도록 하는 불법 쿠데타로 전복되어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더욱 약화시켰다.[6] 8월 9일, 또 다른 대통령령은 사형 사건의 사법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는 동시에 항소권을 제한했다.[7][8] 새로운 특별 법원도 설립되었다.[7]

8월 11일, 파펜과 내무부 장관 빌헬름 폰 가일 남작은 기자 회견을 열어 독일을 사실상 독재 국가로 만들 새로운 헌법 계획을 발표했다.[9] 9월 12일, 국회는 512 대 42의 압도적인 표결로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고 조기 선거가 힌덴부르크에 의해 소집되었다.[10]

참조

[1] 웹사이트 The Holocaust Chronicle – Prologue: Roots of the Holocaust http://www.holocaust[...] 2002
[2] 웹사이트 Jacob G. How Hitler became a Dictator http://www.fff.org/f[...] Hornberger 2004
[3] 서적 Hitler's thirty days to power http://archive.org/d[...] Addison-Wesley 1996
[4] 서적 Hitler: A Lif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5] 서적 Hitler: A Lif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6] 서적 Germany: A New History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7] 서적 Hitler: A Lif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8] 서적 Hitler, 1889–1936: Hubris https://books.google[...] W. W. Norton & Co. 1999
[9] 서적 Hitler, 1889–1936: Hubris https://books.google[...] W.W. Norton & Co. 1999
[10] 서적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How the Nazis Destroyed Democracy and Seized Power in Germany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Ltd. 20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