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에너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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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대 에너지 위기는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석유 위기로 인해 발생했다. 1973년 제1차 석유 위기는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 회원국들이 이스라엘 지지 국가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를 선포하면서 시작되었고, 유가 급등과 공급 부족을 야기했다. 1979년 제2차 석유 위기는 이란 혁명으로 인한 이란의 석유 수출 중단으로 발생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쳐, 경기 침체와 스태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에너지원 다변화, 에너지 절약 기술 개발, 석유 비축 체제 강화 등의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1990년 걸프전, 2000년대 자원 버블과 유가 급등을 거치면서 유가는 등락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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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에너지 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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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1970년대 에너지 위기 |
다른 명칭 | 오일 쇼크 오일 위기 |
주요 사건 | |
제1차 오일 쇼크 | 1973년 |
제2차 오일 쇼크 | 1979년 |
원인 | |
제1차 오일 쇼크 |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한 OPEC의 석유 수출 제한 |
제2차 오일 쇼크 | 이란 혁명으로 인한 석유 생산 차질 |
영향 | |
경제 | 스태그플레이션 발생 에너지 절약 운동 확산 대체 에너지 개발 촉진 |
정치 | 에너지 안보 중요성 부각 산유국의 국제적 영향력 강화 |
대응 | |
각국 정부 | 에너지 정책 전환 (에너지 절약, 대체 에너지 개발) 전략 비축유 확보 |
기업 | 에너지 효율 향상 기술 개발 |
국민 | 에너지 절약 생활 습관 형성 |
기타 | |
관련 인물 | M. 킹 허버트 (석유 생산 정점 이론 제시) |
관련 용어 | 석유 의존도 에너지 안보 대체 에너지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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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73년 석유 위기 (제1차)
1973년 10월,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 회원국들은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대에 재보급하려는 미국의 결정에 대한 대응으로 석유 금수 조치를 선포했다.[21] OAPEC은 미국과 다른 국가들이 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할 경우 석유 선적을 제한하거나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21] 이는 1960년대 말과 1971년 초 미국 생산량의 정점 이후 발생한 일이었다.[17]
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자, 10월 16일 OPEC 가맹 산유국 중 페르시아만 연안 6개국은 원유 공시 가격을 배럴당 3.01달러에서 5.12달러로 70% 인상했다.[17] 다음 날인 10월 17일에는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가 원유 생산의 단계적 감축('''석유 전략''')을 결정했다.[17] OAPEC 국가들은 이스라엘 지지국(미국, 네덜란드 등)에 대한 경제 제재(석유 금수)를 결정했다.[17] 12월 23일에는 OPEC 가맹 페르시아만 연안 6개국이 1974년 1월부터 원유 가격을 5.12달러에서 11.65달러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17]
2. 1. 발생 배경
1970년대 에너지 위기는 1960년대 말과 1971년 초 미국 생산량의 정점 이후 발생하였다.[17] 1973년 10월,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 회원국들은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대에 재보급하려는 미국의 결정에 대한 대응으로 석유 금수 조치를 선포했다.[21] OAPEC은 미국과 다른 국가들이 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할 경우 석유 선적을 제한하거나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21]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자, 10월 16일 OPEC 가맹 산유국 중 페르시아만 연안 6개국은 원유 공시 가격을 배럴당 3.01달러에서 5.12달러로 70% 인상했다.[17] 다음 날인 10월 17일에는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가 원유 생산의 단계적 감축('''석유 전략''')을 결정했다.[17] OAPEC 국가들은 이스라엘 지지국(미국, 네덜란드 등)에 대한 경제 제재(석유 금수)를 결정했다.[17] 12월 23일에는 OPEC 가맹 페르시아만 연안 6개국이 1974년 1월부터 원유 가격을 5.12달러에서 11.65달러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17]
2. 2. 한국에 미친 영향
2. 3. 일본에 미친 영향
1960년대 에너지 혁명을 통해 에너지원을 석유로 전환했던 일본은 1970년대 에너지 위기로 인해 닉슨 쇼크 (달러 쇼크)에서 벗어나려는 경기 회복에 직격탄을 맞았다. 전년도부터의 열도 개조 붐에 따른 지가 급등으로 급속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석유 위기로 인한 잇따른 부당 인상 등으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다.일본은 중동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직접 지원한 적도 없었으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이었지만, 최대 이스라엘 지원 국가인 미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지원 국가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다나카 가쿠에이는 부총리인 미키 다케오를 급히 중동 국가에 파견하여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고, 지원 국가 목록에서 제외하도록 협상하는 한편, 국민 생활 안정 긴급 조치법·석유 수급 적정화법을 제정하여 사태의 심각성에 대응했다.
1973년 11월 16일, 석유 긴급 대책 요강을 각의 결정, '총 수요 억제책'이 채택되어 일본의 소비는 더욱 저조해지고 대형 공공 사업이 동결·축소되었다. 정비 신칸센 건설이 대폭 연기되었고,[57] 혼슈 시코쿠 연락교 3개 루트의 착공 연기 지시가 내려졌다.[58]
일본의 소비자 물가 지수는 1974년에 23% 상승하여 '광란 물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공정 금리 인상이 이루어졌고, 기업의 설비 투자를 억제하는 정책이 취해졌다. 그 결과, 1974년에는 -1.2%라는 전후 처음의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고도 경제 성장이 여기서 종언을 맞이했다.
이러한 불황은 1975년 이후 일본 국채가 대량으로 발행되는 계기가 되었다.[55] 1979년에 양도성 예금이 도입되었고, 1973년부터는 사채 자유화가 추진되었다.[56]
화장지나 세제 등, 원유 가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물품의 사재기 소동 (화장지 사재기 소동, 세제 패닉[59])이 발생했다. 종이 자원 부족으로 출판 업계에도 타격을 주었다.
연료 가격 폭등으로 초음속 수송기의 수요가 급감하고, 콩코드에 대한 발주 취소가 잇따랐으며, 연비가 좋지 않았던 로터리 엔진 채용을 많은 자동차 제조사들이 단념했다. 철도용 가스터빈 동차의 실용화도 단념했다.
통상산업성은 행정지도 등을 통해 절전을 호소했지만 자발적인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강제력을 가진 전기사용제한 등 규칙에 따라 제한을 가했다.[60]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 운행 중단, 네온사인의 조기 소등, 주유소의 일요일 휴업, 음식점 및 영화관의 영업시간 단축 및 심야 영업 중단, 상업시설의 영업시간 단축, 철도사업자의 최종 열차 시간 앞당김, 지하철 역의 조명 간헐적 소등, 프로 야구 야간 경기 시작 시간 조정, 도요타 자동차 및 닛산 자동차, 마쓰다 등 주요 자동차 메이커의 모터스포츠 철수, 텔레비전 심야 방송 휴지 등의 조치가 있었다.[60]
중유를 막대하게 사용하는 석유 화력 발전소를 재검토하고, 석유 비축 설비 건설을 촉진하며, 에너지 안전 보장 관점에서 원자력 발전소 정비를 촉구했다.
경쟁력을 잃은 "구조 불황 업종"을 축소하고, 성장 분야에 자원을 투입하는 "적극적 조정 정책"이 시행되어, 소재 산업의 부진, 가공 조립 산업이 성장했다. 고용 조정 (신규 채용 중단, 잔업 시간 단축 등)이 이루어졌다. 우량 기업의 은행 이탈이 진행되어, 간접 금융에서 직접 금융 (주식이나 사채 발행 등), 내부 유보 의존으로 전환되었다. 중후장대한형 산업 주체에서 경박단소형 산업 주체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석유 위기는 일본인 전체에게 에너지뿐만 아니라 식량 등 자원을 해외로부터 수입하는 것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주었고, 특히 식량 자급률 향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63]
3. 1979년 석유 위기 (제2차)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이란은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섰고 배럴당 13달러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돌파했다.[74]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30달러벽이 깨졌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한 1981년 1월 두바이유는 39달러의 정점에 도달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의 여파로 미국에서 위기가 발생했다. 대규모 시위 속에서 팔라비 왕조의 이란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1979년 초 자국을 떠났고, 이로 인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시위는 이란의 석유 부문을 붕괴시켰다. 새로운 정권은 석유 수출을 재개했지만, 이는 일관성이 없고 물량도 적어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마나 알오타이바 박사가 의장을 맡은 다른 OPEC 국가들은 생산량을 늘려 감소분을 상쇄했고, 전체 생산량 손실은 약 4%였다.[25] 그러나 광범위한 공황이 발생하여 정상적인 상황에서 예상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초래했다.
1980년, 이라크의 이란 침공 이후, 이란의 석유 생산은 거의 중단되었고, 이라크의 석유 생산도 심각하게 감소했다.
1980년 이후, 다른 국가들이 이란과 이라크의 생산 부족분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유가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1979년 1월 이란 혁명이 발생했다.[64] 이란의 석유 생산이 중단되면서 석유 수급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OPEC가 1월, 4월, 7월에 단계적으로 원유 가격을 인상하면서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64]
3. 1. 발생 배경
1979년 이란 혁명의 여파로 미국에서 위기가 발생했다.[24] 대규모 시위 속에서 팔라비 왕조의 이란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1979년 초 자국을 떠났고, 이로 인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시위는 이란의 석유 부문을 붕괴시켰다.[25] 새로운 정권은 석유 수출을 재개했지만, 이는 일관성이 없고 물량도 적어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마나 알오타이바 박사가 의장을 맡은 다른 OPEC 국가들은 생산량을 늘려 감소분을 상쇄했고, 전체 생산량 손실은 약 4%였다.[25] 그러나 광범위한 공황이 발생하여 정상적인 상황에서 예상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초래했다. 1980년, 이라크의 이란 침공 이후, 이란의 석유 생산은 거의 중단되었고, 이라크의 석유 생산도 심각하게 감소했다.3. 2. 한국에 미친 영향
3. 3. 일본에 미친 영향
4. 아랍-이스라엘 분쟁과 석유 위기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 지속된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석유 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8] 중동과 남서부 아시아에서의 대규모 석유 발견과 세계의 몇몇 더 산업화된 지역에서의 생산의 정점은 1960년대부터 일부 이슬람 국가들에게 세계에서 독특한 지렛대를 주었다. 특히 1973년과 1979년의 위기는 이들 국가가 발견한 새로운 힘의 증거였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은 이들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에 더 관여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같은 평화적인 계획으로 이어졌다.
1973년의 욤키푸르 전쟁은 서방 동맹국들이 이스라엘을 공급하고 일부 아랍 국가들이 소련의 물자를 공급받으면서 이 시기의 가장 국제적으로 위협적인 대결 중 하나가 되었다.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 국가들은 리처드 닉슨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22억 달러를 요청하자, 석유 생산량을 줄이고 미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수 조치했다.[12] 그러나 이 금수 조치는 1974년 1월까지만 지속되었지만, 이후에도 석유 가격은 높게 유지되었다.[12]
4. 1. 수에즈 위기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은 중동에서 지속되었으며, 이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8] 수에즈 위기는 이스라엘의 남부 항구인 에일라트가 이집트에 의해 봉쇄되고, 이집트가 영-프랑스 투자자 소유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발발했다.[8] 이 침공의 목표 중 하나는 소련과 연대하고 있던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8]1967년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시나이 반도 침공을 포함했고, 이로 인해 이집트는 8년간 수에즈 운하를 폐쇄했다.[9] 수에즈 운하는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1974년에 정비되어 1975년에 다시 개통되었다.[10][11]
4. 2. 6일 전쟁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은 중동에서 지속되었으며, 이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8] 1967년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시나이 반도 침공을 포함했고, 이로 인해 이집트는 8년간 수에즈 운하를 폐쇄했다.[9] 수에즈 운하는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1974년에 정비되어 1975년에 다시 개통되었다.[10][11]4. 3. 욤 키푸르 전쟁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은 중동에서 지속되었으며, 이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8] 1967년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시나이 반도 침공을 포함했고, 이로 인해 이집트는 8년간 수에즈 운하를 폐쇄했다.[9] 수에즈 운하는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1974년에 정비되어 1975년에 다시 개통되었다.[10][11]1973년 10월,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 회원국들은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대에 재보급하려는 미국의 결정에 대한 대응"으로 석유 금수 조치를 선포했다.[21] OAPEC 국가들은 리처드 닉슨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22억 달러를 요청하자, 석유 생산량을 줄이고 미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수 조치했다.[12] 미국의 행동이 석유 금수 조치를 촉발한 것으로 보이면서, 금수 조치와 관련된 높은 석유 가격, 공급 차질, 경기 침체의 장기적인 가능성은 NATO 내부에 강력한 분열을 초래했다.[21] 유럽 국가들과 일본 모두 미국의 중동 정책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다.[21]
1974년 1월 18일까지 국무 장관 헨리 키신저는 시나이 일부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를 협상했다.[21]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의 협상 타결에 대한 약속은 아랍 석유 생산국들이 1974년 3월 금수 조치를 해제하도록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5월까지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21]
5. 1970년대 석유 생산 정점
1970년대에는 석유의 실질 가격이 안정적이었지만, 미국의 수입이 급증하여 미국을 비롯한 다른 선진국의 무역 수지에 부담을 주었다. 1960년대에는 당시 추출 기술을 갖춘 세계 최고 생산국 중 일부에서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기 시작했다. 서독은 1966년에, 베네수엘라와 미국은 1970년에, 이란은 1974년에 생산량이 정점을 찍었다.[13][14] 캐나다의 기존 석유 생산량도 이 시기에 정점을 찍었다(비재래식 생산이 나중에 캐나다의 생산량을 어느 정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15] 곧이어 전 세계 1인당 생산량도 정점을 찍었다.[4]
다른 지역의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이러한 지역의 정점은 세계 석유 가격에 상당한 상승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서독과 미국과 같은 국가들이 이 핵심 자원에 대한 외국 공급업체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석유 공급 통제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16]
5. 1. 미국의 석유 생산 정점
1970년대에는 석유의 실질 가격이 안정적이었지만, 미국의 수입이 급증하여 미국을 비롯한 다른 선진국의 무역 수지에 부담을 주었다. 1960년대에는 당시 추출 기술을 갖춘 세계 최고 생산국 중 일부에서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기 시작했다. 서독은 1966년에, 베네수엘라와 미국은 1970년에, 이란은 1974년에 생산량이 정점을 찍었다. 캐나다의 기존 석유 생산량도 이 시기에 정점을 찍었다. 곧이어 전 세계 1인당 생산량도 정점을 찍었다.다른 지역의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이러한 지역의 정점은 세계 석유 가격에 상당한 상승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서독과 미국과 같은 국가들이 이 핵심 자원에 대한 외국 공급업체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석유 공급 통제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5. 2. 기타 국가들의 생산 정점
서독은 1966년에, 베네수엘라와 미국은 1970년에, 이란은 1974년에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었다.[13][14] 캐나다의 기존 석유 생산량도 이 시기에 정점을 찍었다.[15] 곧이어 전 세계 1인당 생산량도 정점을 찍었다.[4]다른 지역의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이러한 지역의 정점은 세계 석유 가격에 상당한 상승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서독과 미국과 같은 국가들이 이 핵심 자원에 대한 외국 공급업체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석유 공급 통제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16]
6. 1980년대 석유 공급 과잉
1973년과 1979년 에너지 위기로 인해 석유 가격은 1980년에 배럴당 35달러 이상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러한 사건 이후 산업 경제의 둔화와 수급의 안정으로 인해 1980년대에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26] 석유 공급 과잉은 1973년 및 1979년 에너지 위기로 인한 산업 국가의 경제 활동 둔화와 고유가로 촉진된 에너지 절약의 결과로 198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27] 인플레이션 조정된 실질 2004년 달러 가치는 1981년 평균 배럴당 78.2달러에서 1986년 평균 26.8달러로 하락했다.[28]
1981년 6월,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석유 공급 과잉! ...이 도래했다"[29]라고 밝혔고, ''타임''(Time Magazine)은 "세계는 일시적으로 석유 과잉 속에 떠다닌다"[30]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다음 주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는 "과잉"이라는 단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실제로는 일시적인 잉여로 인해 가격이 다소 하락했지만, 가격은 여전히 에너지 위기 이전 수준보다 훨씬 높다고 경고했다.[31] 이러한 정서는 1981년 11월에 엑손사(Exxon)의 CEO가 석유 과잉을 일시적인 잉여로 특징짓고, "과잉"이라는 단어가 "과장된 언어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의 경향"의 한 예시라고 언급하면서 재확인되었다. 그는 과잉의 주된 원인이 소비 감소라고 썼다. 미국, 유럽 및 일본에서 석유 소비는 1979년부터 1981년까지 13% 감소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석유 수출국 기구(OPEC) 및 기타 석유 수출국들의 유가 대폭 인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1973년 가격 인상 기간에 시작된 추세를 지속한 것이다.[32]
1980년 이후, 수요 감소와 과잉 생산으로 인해 세계 시장에 석유 공급 과잉이 발생하여 6년에 걸친 유가 하락을 초래했으며, 1986년에는 46%의 가격 하락으로 절정에 달했다.
6. 1. 석유 공급 과잉 발생
1973년과 1979년 에너지 위기로 인해 석유 가격은 1980년에 배럴당 35달러 이상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산업 경제 둔화와 수급 안정으로 인해 1980년대에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26] 석유 공급 과잉은 산업 국가의 경제 활동 둔화와 고유가로 촉진된 에너지 절약의 결과로 198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27] 인플레이션 조정된 실질 2004년 달러 가치는 1981년 평균 배럴당 78.2달러에서 1986년 평균 26.8달러로 하락했다.[28]1981년 6월,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석유 공급 과잉! ...이 도래했다"[29]라고 밝혔고, ''타임''(Time Magazine)은 "세계는 일시적으로 석유 과잉 속에 떠다닌다"[30]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는 "과잉"이라는 단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실제로는 일시적인 잉여로 인해 가격이 다소 하락했지만, 가격은 여전히 에너지 위기 이전 수준보다 훨씬 높다고 경고했다.[31] 1981년 11월에 엑손사(Exxon)의 CEO는 석유 과잉을 일시적인 잉여로 특징짓고, "과잉"이라는 단어가 "과장된 언어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의 경향"의 한 예시라고 언급했다. 그는 과잉의 주된 원인이 소비 감소라고 썼다. 미국, 유럽 및 일본에서 석유 소비는 1979년부터 1981년까지 13% 감소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석유 수출국 기구(OPEC) 및 기타 석유 수출국들의 유가 대폭 인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1973년 가격 인상 기간에 시작된 추세를 지속한 것이다.[32]
1980년 이후, 수요 감소와 과잉 생산으로 인해 세계 시장에 석유 공급 과잉이 발생하여 6년에 걸친 유가 하락을 초래했으며, 1986년에는 46%의 가격 하락으로 절정에 달했다.
6. 2. 유가 하락 추세
1973년과 1979년 에너지 위기로 인해 석유 가격은 1980년에 배럴당 35달러 이상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26] 산업 경제의 둔화와 에너지 절약으로 인해 1980년대에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26] 인플레이션 조정된 실질 2004년 달러 가치는 1981년 평균 배럴당 78.2달러에서 1986년 평균 26.8달러로 하락했다.[28]1981년 6월,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석유 공급 과잉! ...이 도래했다"[29]라고 밝혔고, ''타임''(Time Magazine)은 "세계는 일시적으로 석유 과잉 속에 떠다닌다"[30]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시적인 잉여로 인해 가격이 다소 하락했지만, 가격은 여전히 에너지 위기 이전 수준보다 훨씬 높았다.[31] 1981년 11월, 엑손사(Exxon)의 CEO는 석유 과잉을 일시적인 잉여로 특징짓고, "과잉"이라는 단어는 과장된 표현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과잉의 주된 원인이 미국, 유럽 및 일본에서 석유 소비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13%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32]
1980년 이후, 수요 감소와 과잉 생산으로 인해 세계 시장에 석유 공급 과잉이 발생하여 6년에 걸친 유가 하락을 초래했으며, 1986년에는 46%의 가격 하락으로 절정에 달했다.
7. 석유 위기의 영향
선진국 경제가 중동의 석유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인해 원유 수출이 정체되자, 국내에서는 전력 부족이 발생하여, 전력을 절약하기 위해 대도시의 가로등・네온사인・도쿄 타워 소등,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운행 중단, 고속도로 저속 운전, 냉난방 온도 조절, 텔레비전 심야 방송 중단 등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북해 유전 등이 적극적으로 개발 운영되었다. 또한, 원자력 및 풍력, 태양광 등 비석유 에너지의 활용 모색, 그리고 에너지 절약 기술의 연구 개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어 "에너지 절약"이 유행어가 되었다. 석유 비축 체제를 강화하는 것도 이루어졌다. 또한, 모터리제이션의 진전에 따라 자동차의 연료 소비가 석유 소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철도를 비롯한 대중교통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모달 시프트)이 나타났다.
다이와 종합 연구소는 "두 차례의 오일 쇼크는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일본 기업이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했다.[66] 합리화는 자본 자유화와 병행했다.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발안에 따라, 1975년 제1차 석유 위기 이후 경제 회복을 주요 의제로 하여, 선진국 수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주요 7개국 정상 회담(G7 정상 회담)의 제1차 회담이 프랑스 랑부이에에서 개최되었다.
인플레이션 경향을 강화하던 선진국 경제는, 석유 위기로 인해 스태그플레이션에 돌입했다. 1971년의 닉슨 쇼크와 맞물려, 전후 세계 경제의 성장 체제는 파괴되었다. 공업화에 따른 투자로, 대외 채무를 팽창시키던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의 개발도상국은, 석유 수입 비용의 급상승으로 인해 유로 채 (신디케이트론의 변동 금리 채)로의 차환을 불가피하게 되었다.
석유 수출국은 오일 머니를 얻어, 국내 복지를 충실히 하거나, 강력한 국부 펀드를 설립했다. 오일 머니의 출처는 OTD 금융이 신용 창조한 예금 통화이며, 이 유로 달러가 수입국에서 발행한 유로 채가 되었다.
OTD 금융은 그림자 은행 시스템이 능동적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벤 버냉키는, 석유 가격의 급등이 재화·서비스의 비용을 상승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진 것은, 가계·기업이 연방 준비 제도의 금융 긴축이 충분하지 않다고 예상하고, 그것이 높은 인플레이션 예상을 초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67] 버냉키는 그 결과, 임금 인상·제품 가격 인상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68]。 이 견해에 따른 레이거노믹스의 고금리 정책으로 신디케이트론의 상환이 곤란해지고, 채무 위기에 빠진 멕시코는 기관화되었다.
1973년 | 1974년 | 1975년 | 1976년 | 1977년 | 1978년 | 1979년 | 1980년 | 1981년 | |
---|---|---|---|---|---|---|---|---|---|
OECD 가맹국 | 123.6 | 182.9 | 62.2 | 99.0 | 130.4 | 304.1 | 290.7 | 411.6 | 973.7 |
비가맹 산유국 | 21.0 | 6.9 | 24.7 | 24.7 | 46.2 | 86.9 | 87.7 | 68.4 | 57.4 |
비가맹 개발도상국 | 52.7 | 75.2 | 87.8 | 119.0 | 132.7 | 231.8 | 360.0 | 281.6 | 409.3 |
동유럽 | 5.9 | 8.3 | 19.5 | 17.3 | 14.1 | 28.7 | 37.2 | 26.7 | 15.1 |
남아공 및 국제 기관 등 | 5.4 | 12.0 | 11.7 | 19.2 | 14.4 | 8.6 | 15.2 | 10.9 | 3.7 |
합계 | 208.6 | 285.4 | 205.8 | 279.2 | 337.8 | 660.0 | 790.8 | 799.2 | 1459.1 |
7. 1. 경기 침체
1970년대는 2차례의 석유 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다.
이전의 많은 경기침체와는 달리, 높은 실업률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겹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경기 침체에 기여한 다른 원인으로는 베트남 전쟁과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가 있다. 신흥 공업국들의 출현은 금속 산업의 경쟁을 증가시켰고, 북미와 유럽의 산업 핵심 지역들이 재건될 수밖에 없었던 철강 위기를 촉발시켰다. 1973–1974년 주식 시장 붕괴는 경기 침체를 분명히 반영했다.
전미 경제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의 불황은 1973년 11월부터 1975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34] 비록 경제가 1975년부터 1980년 1월에 시작된 1980년대 초반의 첫 번째 불황까지 확장되고 있었지만, 인플레이션은 10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극도로 높았다.
이 경기 침체기 동안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3.2% 감소했다. 비록 경기 침체가 1975년 3월에 끝났지만, 실업률은 몇 달 동안 최고조에 달하지 않았다. 1975년 5월, 이 비율은 9%의 사이클 동안 최고치에 도달했다.[35]
불황은 영국에서도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지속되었다. GDP는 출처에 따라 3.9%[36][37] 또는 3.37%[38] 감소했다. 경기 침체가 시작될 때 영국의 GDP가 회복되기까지 14분기가 걸렸다.[36]
선진국의 경제가 중동의 석유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인해 원유 수출이 정체되자, 국내에서는 전력 부족이 발생하여, 전력을 절약하기 위해 대도시의 가로등・네온사인・도쿄 타워 소등,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운행 중단, 고속도로 저속 운전, 냉난방 온도 조절, 텔레비전 심야 방송 중단 등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북해 유전 등이 적극적으로 개발 운영되었다. 또한, 원자력 및 풍력, 태양광 등 비석유 에너지의 활용 모색, 그리고 에너지 절약 기술의 연구 개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어 "에너지 절약"이 유행어가 되었다. 석유 비축 체제를 강화하는 것도 이루어졌다. 또한, 모터리제이션의 진전에 따라 자동차의 연료 소비가 석유 소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철도를 비롯한 대중교통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모달 시프트)이 나타났다.
다이와 종합 연구소는 "두 차례의 오일 쇼크는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일본 기업이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했다.[66] 합리화는 자본 자유화와 병행했다.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발안에 따라, 1975년 제1차 석유 위기 이후 경제 회복을 주요 의제로 하여, 선진국 수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주요 7개국 정상 회담(G7 정상 회담)의 제1차 회담이 프랑스 랑부이에에서 개최되었다.
인플레이션 경향을 강화하던 선진국 경제는, 석유 위기로 인해 스태그플레이션에 돌입했다. 1971년의 닉슨 쇼크와 맞물려, 전후 세계 경제의 성장 체제는 파괴되었다. 공업화에 따른 투자로, 대외 채무를 팽창시키던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의 개발도상국은, 석유 수입 비용의 급상승으로 인해 유로 채 (신디케이트론의 변동 금리 채)로의 차환을 불가피하게 되었다.
석유 수출국은 오일 머니를 얻어, 국내 복지를 충실히 하거나, 강력한 국부 펀드를 설립했다. 오일 머니의 출처는 OTD 금융이 신용 창조한 예금 통화이며, 이 유로 달러가 수입국에서 발행한 유로 채가 되었다.
OTD 금융은 그림자 은행 시스템이 능동적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벤 버냉키는, 석유 가격의 급등이 재화·서비스의 비용을 상승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진 것은, 가계·기업이 연방 준비 제도의 금융 긴축이 충분하지 않다고 예상하고, 그것이 높은 인플레이션 예상을 초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67] 버냉키는 그 결과, 임금 인상·제품 가격 인상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68]。 이 견해에 따른 레이거노믹스의 고금리 정책으로 신디케이트론의 상환이 곤란해지고, 채무 위기에 빠진 멕시코는 기관화되었다.
1973년 | 1974년 | 1975년 | 1976년 | 1977년 | 1978년 | 1979년 | 1980년 | 1981년 | |
---|---|---|---|---|---|---|---|---|---|
OECD 가맹국 | 123.6 | 182.9 | 62.2 | 99.0 | 130.4 | 304.1 | 290.7 | 411.6 | 973.7 |
비가맹 산유국 | 21.0 | 6.9 | 24.7 | 24.7 | 46.2 | 86.9 | 87.7 | 68.4 | 57.4 |
비가맹 개발도상국 | 52.7 | 75.2 | 87.8 | 119.0 | 132.7 | 231.8 | 360.0 | 281.6 | 409.3 |
동유럽 | 5.9 | 8.3 | 19.5 | 17.3 | 14.1 | 28.7 | 37.2 | 26.7 | 15.1 |
남아공 및 국제 기관 등 | 5.4 | 12.0 | 11.7 | 19.2 | 14.4 | 8.6 | 15.2 | 10.9 | 3.7 |
합계 | 208.6 | 285.4 | 205.8 | 279.2 | 337.8 | 660.0 | 790.8 | 799.2 | 1459.1 |
7. 1. 1. 미국의 경기 침체
1970년대는 2차례의 에너지 위기로 인해 경제 성장이 제한적이거나 부정적인 시기였다. 비록 70년대 중반이 미국에게 최악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까지 경제는 전반적으로 약했다. 이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호황의 끝을 장식했다. 높은 실업률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겹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많은 경기침체와는 차이가 있었다.[34]전미 경제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의 불황은 1973년 11월부터 1975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34] 이 경기 침체기 동안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3.2% 감소했다. 비록 경기 침체가 1975년 3월에 끝났지만, 실업률은 몇 달 동안 최고조에 달하지 않았다. 1975년 5월, 이 비율은 9%의 사이클 동안 최고치에 도달했다.[35]
7. 1. 2. 영국의 경기 침체
영국에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경기 침체가 지속되었다. GDP는 자료에 따라 3.9%[36][37] 또는 3.37%[38] 감소했다. 영국의 GDP가 경기 침체 시작 시점의 수준으로 회복되기까지 14분기가 걸렸다.[36]7. 2. 새로운 산유국 출현
1970년대의 고유가는 OPEC 이외의 국가들, 특히 생산 비용이 더 높은 매장량에 대한 석유 생산에 대한 투자를 유도했다.[39][40] 여기에는 알래스카의 프루도 만, 영국과 노르웨이의 북해 해상 유전, 멕시코의 칸타렐 해상 유전, 그리고 캐나다의 오일샌드 등이 포함되었다.[41][42][43]7. 2. 1. 주요 신흥 산유지
1970년대의 고유가는 OPEC 이외의 국가들, 특히 생산 비용이 더 높은 매장량에 대한 석유 생산에 대한 투자를 유도했다. 여기에는 알래스카의 프루도 만, 영국과 노르웨이의 북해 해상 유전, 멕시코의 칸타렐 해상 유전, 그리고 캐나다의 오일샌드 등이 포함되었다.[39][40][41][42][43]7. 3. 석유 비축 사업
1973년 위기의 결과로, 많은 국가들은 에너지 위기 동안 경제적 및 국가 안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전략 비축유(SPRs), 즉 특정 국가 정부 또는 민간 산업이 보유한 원유 비축량(또는 비축)을 만들었다. 국제 에너지 기구(IEA)는 이 위기의 여파로 결성되었으며 현재 31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44][45] IEA에 따르면 약 41억 배럴의 석유가 회원국에 의해 전략 비축유로 보관되어 있으며, 이 중 14억 배럴은 정부가 통제한다. 나머지는 민간 산업이 보유하고 있다.[46] 이 비축량은 최소 90일치 순 수입에 해당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재 미국 전략석유비축국은 최대 7억 1350만 배럴의 용량을 가진 가장 큰 정부 소유 비축유 중 하나이다.[47]최근 다른 비IEA 국가들도 자체 전략 석유 비축량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중국이 전체에서 두 번째로 크고 비IEA 국가 중 가장 큰 규모이다.[48]

1982년 이후 주간 데이터
7. 3. 1. 국제에너지기구(IEA) 설립
1973년 위기의 결과로 많은 국가들은 에너지 위기 동안 경제와 국가 안보를 제공하기 위해 특정 국가 또는 민간 산업의 정부에 의해 보유된 전략적 석유 비축물(SPR), 원유 재고(또는 비축물)를 만들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번 위기를 계기로 결성되어 현재 31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44][45]7. 3. 2. 주요 국가들의 석유 비축 현황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약 41억 배럴의 석유가 회원국들에 의해 전략적으로 비축되어 있으며, 이 중 14억 배럴은 정부가 통제하고 있다. 나머지는 민간기업이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비축량은 최소 순수입의 90일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도된다.[46] 현재 미국 전략석유비축국은 최대 7억 1350만 배럴의 용량을 가진 정부 소유의 최대 비축량 중 하나이다.[47]최근 다른 비 IEA 국가들은 자체적으로 전략적 석유 비축량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중국은 전체 2위, 비IEA 국가 중 가장 규모가 크다.[48]
7. 4. 중동 지역 정세 불안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 및 일부 다른 주로 무슬림 국가들과 거의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아랍인과 이스라엘인 사이의 적대감은 1970년대에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다. 1973년의 욤키푸르 전쟁은 서방 동맹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일부 아랍 국가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 시기에 가장 국제적으로 위협적인 대결 중 하나가 되었다.7. 4. 1. 중동 지역 석유 발견의 영향
1960년대부터 중동에서 대규모 석유가 발견되면서 일부 무슬림 국가들은 세계에서 독특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73년과 1979년의 위기는 이 국가들이 갖게 된 새로운 힘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미국 및 기타 국가들은 이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에 더 많이 관여하게 되었으며, 이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같은 평화적인 계획으로 이어졌다.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 이후 이 국가는 거의 끊임없이 아랍 세계 및 일부 다른 주로 무슬림 국가들과 갈등을 겪었다. 아랍인과 이스라엘인 사이의 적대감은 1970년대에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다. 1973년의 욤키푸르 전쟁은 서방 동맹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일부 아랍 국가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 시기에 가장 국제적으로 위협적인 대결 중 하나가 되었다.
7. 4. 2. 미국의 중동 정책 변화
1973년의 욤키푸르 전쟁은 서방 동맹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일부 아랍 국가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 시기에 가장 국제적으로 위협적인 대결 중 하나가 되었다.중동에서 대규모 석유가 발견되면서, 1960년대부터 일부 무슬림 국가들은 세계에서 독특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73년과 1979년의 위기는 이 국가들이 갖게 된 새로운 힘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미국 및 기타 국가들은 이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에 더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같은 평화적인 계획으로 이어졌다.
7. 5. OPEC의 역할 변화
1970년대 OPEC이 직면한 첫 번째 도전 중 하나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브레턴 우즈 협정에서 탈퇴하고 1971년 확립된 금 교환 표준에서 미국을 제외한 것이었다. 이 변화는 세계 통화의 불안정과 다른 통화뿐만 아니라 미국 달러 가치의 절하를 초래했다. OPEC의 수익 또한 유가를 달러로 책정했기 때문에 타격을 받았다.[49]OPEC은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느렸지만, 마침내 금에 대한 석유 가격 결정을 내렸다.[49]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주요 석유회사들 간의 유가협정 개정 협상이 좌절된 것은 물론, 중동지역에서의 지속적인 갈등은 이 시대 동안 안정화를 위한 OPEC의 노력을 계속해서 지연시켰다.
7. 5. 1.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의 영향
1970년대 OPEC이 직면한 첫 번째 도전 중 하나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브레튼 우즈 협정에서 탈퇴하고 1971년 확립된 금 교환 표준에서 미국을 제외한 것이었다. 이 변화는 세계 통화의 불안정과 다른 통화뿐만 아니라 미국 달러 가치의 절하를 초래했다. OPEC의 수익 또한 유가를 달러로 책정했기 때문에 타격을 받았다.[49]OPEC은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느렸지만, 마침내 금에 대한 석유 가격 결정을 내렸다.[49]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주요 석유회사들 간의 유가협정 개정 협상이 좌절된 것은 물론, 중동지역에서의 지속적인 갈등은 이 시대 동안 안정화를 위한 OPEC의 노력을 계속해서 지연시켰다.
7. 5. 2. OPEC의 석유 가격 정책
1970년대 OPEC이 직면한 첫 번째 도전 중 하나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브레턴 우즈 협정에서 탈퇴하고 1971년 확립된 금 교환 표준에서 미국을 제외한 것이었다. 이 변화는 세계 통화의 불안정과 다른 통화뿐만 아니라 미국 달러 가치의 절하를 초래했다. OPEC의 수익 또한 유가를 달러로 책정했기 때문에 타격을 받았다.마침내 OPEC은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유가를 금에 연동하여 책정하기 시작했다.[49] 그러나 OPEC은 여전히 이들과 다른 서방 석유 회사 간의 협상이 긍정적인 결과를 거의 또는 전혀 내지 못하면서 이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7. 6. 오일 패치 지역의 경제 호황
텍사스,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 콜로라도, 와이오밍, 알래스카 등 미국의 주요 유전 지대는 1970년대 미국 석유 산업 전반과 마찬가지로 물가 상승의 혜택을 크게 받았다.[50] 석유 가격은 1970년대 10년 내내 상승했다. 1978년과 1980년 사이에 서부 텍사스 중질유의 가격은 250% 상승했다.[50] 모든 주들이 주식 시장 붕괴와 관련된 국가 경제 문제의 영향을 느꼈지만, 오일 패치 주의 석유 수입 증가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일반적으로 이를 상당 부분 상쇄했다.[50]8. 에너지원 다변화
1970년대 이후, 1인당 세계 에너지 소비는 이전의 급속한 성장 추세에서 벗어나, 중국과 같은 거대 아시아 경제의 부상과 함께 다음 세기까지 수십 년 동안 비교적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다.[51]
에너지원 수요 종류를 분석한 결과 1970년대 석유 소비량의 지속적인 급격한 증가가 멈추고 추세가 하향 반전되었으며, 천연가스 소비량의 증가세도 둔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51] 그 동안 원자력 에너지의 사용은 회복되었지만,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1990년대까지 원자력 에너지의 성장은 멈췄다.[51] 거의 1세기에 걸친 침체에 따른 석탄 사용의 증가뿐만 아니라, 천연가스의 재가속화에 의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51] 태양광, 풍력발전, 조력발전, 소수력발전등 다른 대체 에너지의 성장기도에 올라섰다.[51]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인해 원유 수출이 정체되자, 국내에서는 전력 부족이 발생하여, 전력을 절약하기 위해 대도시의 가로등・네온사인・도쿄 타워 소등,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운행 중단, 고속도로 저속 운전, 냉난방 온도 조절, 텔레비전 심야 방송 중단 등이 실시되었다.[66] 그 결과, 북해 유전 등이 적극적으로 개발 운영되었다. 또한, 원자력 및 풍력, 태양광 등 비석유 에너지의 활용 모색, 그리고 에너지 절약 기술의 연구 개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어 "에너지 절약"이 유행어가 되었다.[66] 석유 비축 체제를 강화하는 것도 이루어졌다. 모터리제이션의 진전에 따라 자동차의 연료 소비가 석유 소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철도를 비롯한 대중교통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모달 시프트)이 나타났다.
9. 걸프전과 석유 가격 (미니 오일 쇼크)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경제 제재를 받아 이라크 및 이라크 점령하 쿠웨이트에서의 원유 수출이 중단되었다.[69] 이로 인해 원유 가격이 급등했지만, 1991년 걸프 전쟁으로 분쟁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이전 가격으로 돌아갔다.[69]
이 원유 가격 급등을 미니 오일 쇼크라고 부르기도 하며, '''제3차 오일 쇼크(제3차 석유 위기)'''라고 부르기도 한다.[70]
10. 2000년대 자원 버블과 유가 급등
2004년경부터 2008년 가을 무렵까지(피크는 2008년), 뚜렷한 공급 감소를 동반하지 않은 원유 가격 급등이 세계적으로 지속되었다(자원 버블).[71] 2007년 가을부터 현저해져 2008년 2월에는 뉴욕 상업 거래소의 원유 선물 시장에서 100미국 달러/배럴을 돌파했다.
피크 시의 가격은 제1차·제2차 석유 위기의 피크에 비해 명목으로 3배를 넘었고, 실질로도 넘어섰다. 다만, 제1차·제2차에 비해 가격 상승 속도는 완만했다.
급등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중국이나 인도 등 BRICS로 불리는 신흥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한 원유 수요 증가
# 지정학적 리스크를 배경으로 한 원유선물 시장에서의 투기 매수
# 산유국의 생산 능력 정체
# 선물 거래에 의한 투기 자금 유입
이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되는 것은 잉여 자금으로서의 투기적 자금이 원유의 "현물"이나 "선물"을 사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금융 시장에서 보면 원유의 시장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거기에 2007년 9월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에서 비롯된 미국의 불황으로 투기 자금이 원유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선물"로서의 원유 가격이 급등했다.
당시, 원유 선물 시세가 사상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던 것 등으로 인한 원유 가격 급등을 받아 석유와 관련된 제품의 가격 인상이 잇따랐고, 항공기에서는 유류 할증료 도입으로 더욱 원유 가격 급등 및 인상 폭의 상승을 초래했다.
이후 서브프라임 문제가 세계적인 경기 후퇴를 일으키면서 잉여 자금 자체가 부족해져 2008년 9월 하순경부터 불과 2개월 만에 원유 가격은 절반 정도로 크게 하락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원유 가격은 다시 완만하게 회복, 2008년의 피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가가 지속되었다. 물가 연동으로는 금융 위기 이후의 피크가 더 고가였다는 계산도 있다.[72]
고가는 2014년 폭락(역 오일 쇼크)까지 이어졌고, 2015년 저점 이후 약간 회복했지만, 피크 시의 절반 정도인 60달러 전후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비교적) 저가가 유지되고 있는 요인은 50달러를 넘으면 미국의 휴지해저 유전이 재개되는 것과 신기술인 셰일 가스 혁명이 크다.
10. 1. 유가 급등 원인
197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 원유 가격이 급등한 현상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71]주요 원인으로는 중국, 인도 등 BRICS로 불리는 신흥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한 원유 수요 증가,[71] 지정학적 리스크를 배경으로 한 원유 선물 시장에서의 투기 매수, 산유국의 생산 능력 정체, 선물 거래에 의한 투기 자금 유입[71] 등이 있다. 특히,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로 인한 불황은 투기 자금이 원유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게 만들어, 현물 및 선물 가격 급등을 야기했다.[71]
2008년 2월, 뉴욕 상업 거래소의 원유 선물 시장에서 가격이 배럴당 100미국 달러를 돌파했으며, 이는 제1차, 제2차 석유 위기 당시의 최고 가격을 실질 및 명목 가격 모두에서 넘어선 것이다.[71] 이러한 원유 가격 급등은 석유 관련 제품 가격 인상 및 항공기의 유류 할증료 도입으로 이어졌다.
이후 서브프라임 문제가 세계적인 경기 후퇴를 야기하면서 2008년 9월 하순부터 원유 가격이 크게 하락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완만하게 회복하여 높은 가격을 유지했다.[72] 2014년에는 역 오일 쇼크로 가격이 폭락했고, 2015년 저점 이후 약간 회복했지만, 2008년 최고 가격의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미국의 휴지 해저 유전 재개와 셰일 가스 혁명이라는 신기술의 영향이 크다.
10. 2. 유가 급등의 영향
10. 3. 2008년 이후 유가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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