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튀르키예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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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1년 튀르키예 총선은 2011년 6월 12일에 치러졌으며, 2010년 개헌 국민투표 이후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이 주도하여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선거 결과 정의개발당은 49.83%의 득표율로 과반 의석을 확보하여 단독 내각을 구성했으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세 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승리하여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로 각 선거에서 이전 선거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공화인민당(CHP), 민족운동당(MHP), 무소속 후보들도 원내에 진입했으며, 선거 이후 각국 정상 및 국제기구에서 정의개발당의 승리를 축하하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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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튀르키예 총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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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정보 | |
선거명 | 2011년 튀르키예 총선 |
국가 | 튀르키예 |
유형 | 의회 |
정당명 | 튀르키예 |
정당색 | 튀르키예 |
이전 선거 | 2007년 튀르키예 총선 |
이전 선거 연도 | 2007년 |
선거 전 의원 | 제23대 튀르키예 의회 |
선거일 | 2011년 6월 12일 |
당선 의원 | 제24대 튀르키예 의회 |
차기 선거 | 2015년 6월 튀르키예 총선 |
차기 선거 연도 | 2015년 6월 |
차기 의원 | 제25대 튀르키예 의회 |
선출 의석 | 550석 전 의석 |
과반 의석 | 276 |
여론조사 | 2011년 튀르키예 총선 여론조사 |
투표율 | 83.16% (감소 1.09%) |
지도 | |
![]()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민족운동당}} 노동민주자유연합은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는데 의회 입성 요건인 10%를 넘기기 위한 것이었다. 각 주와 구별 선거 결과도에서 연합 무소속 후보의 총득표수가 전체 1위를 차지한 곳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다만 개별 후보의 득표수는 타 정당 후보들보다 더 낮을 수도 있다." | |
주요 정당 1 | |
정당 | 정의개발당 (튀르키예) |
색 | 정의개발당 |
![]() | |
리더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
리더 취임일 | 2001년 8월 14일 |
리더 선거구 | 이스탄불 (제1구) |
이전 선거 결과 | 341석, 46.58% |
선거 전 의석 | 331석 |
선거 후 의석 | 327석 |
의석 증감 | 감소 4 |
득표수 | 21,399,082 |
득표율 | 49.83% |
득표 증감 | 증가 3.25% |
주요 정당 2 | |
정당 | 공화인민당 |
색 | 공화인민당 |
![]() | |
리더 | 케말 클르치다로을루 |
리더 취임일 | 2010년 5월 22일 |
리더 선거구 | 이스탄불 (제2구) |
이전 선거 결과 | 112석, 20.88% |
선거 전 의석 | 102석 |
선거 후 의석 | 135석 |
의석 증감 | 증가 33 |
득표수 | 11,155,972 |
득표율 | 25.98% |
득표 증감 | 증가 5.10% |
주요 정당 3 | |
정당 | 민족주의자 운동당 |
색 | 민족운동당 |
![]() | |
리더 | 데블레트 바흐첼리 |
리더 취임일 | 1997년 7월 6일 |
리더 선거구 | 오스마니예 |
이전 선거 결과 | 71석, 14.27% |
선거 전 의석 | 72석 |
선거 후 의석 | 53석 |
의석 증감 | 감소 19 |
득표수 | 5,585,513 |
득표율 | 13.01% |
득표 증감 | 감소 1.26% |
총리 | |
선거 전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
선거 전 정당 | 정의개발당 (튀르키예) |
선거 후 직함 | 총리 |
선거 후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
선거 후 정당 | 정의개발당 (튀르키예) |
2. 배경
2010년 개헌 국민투표를 통해 동력을 얻은 정의개발당(AKP)은 2011년 총선 전까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추진했다.[1]
2011년 총선에서는 최신 인구 통계에 따라 각 주의 의석수가 재분배되었다. 이스탄불주는 15석, 앙카라주는 3석, 이즈미르주는 2석이 증원되었다. 이 외에 안탈리아주, 디야르바키르주, 반주, 시르나크주에서도 각각 1석씩 증가했다.[4] 앙카라는 2개의 선거구로 나뉘어 각각 15명과 16명의 의원을 선출하며, 이스탄불은 3개의 선거구에서 각각 30명, 27명, 28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이즈미르는 2개의 선거구에서 각각 13명의 의원을 선출한다.[4]
각 주별 의원 수[4] | ||||||
---|---|---|---|---|---|---|
2011년 3월 5일, 튀르키예 최고선거위원회는 총선에 참여할 정당 목록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민족운동당을 포함한 26개 정당이 포함되었다.
- 대안당
- 튀르키예 공산당
- 민주당
- 민주좌파당
- 평등민주당
- 지복당
- 자유연대당
- 대통합당
- 조국당
- 독립튀르키예당
- 정의개발당
- 노동당
- 자유민주당
- 국민당
- 민족보수당
- 민족운동당
- 새로운당 (Yeni Parti)
- 평화민주당
- 국민진보당
- 국민의 목소리당
- 공화인민당
- 권리평등당
- 권리자유당
- 정로당
- 튀르키예당
- 노동자당
- 청년당
몇몇 소규모 정당들은 선거 전략을 수정하여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거나, 연대를 통해 단일 정당으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4월 19일, 최고선거위원회는 자유연대당과 새로운당이 마감일까지 필요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발표하면서, 최종적으로 15개 정당만이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3. 선거 제도
2011년 3월 3일, 튀르키예 국회는 6월 12일을 총선일로 확정하는 정당규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2월 21일 정의개발당에서 발의되었으며, 정기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통과되었다. 정의개발당은 고등학교 입시(SBS)와 대학 입시 고사(LYS)가 열리는 6월 일정을 고려하여 6월 12일이 선거일로 적절하다고 보았다. 또한 여름철 더위 또한 높은 투표율을 고려하는 요소였다.[2]
지난해 국회에서 튀르키예 선거법 개정 관련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튀르키예 유권자들은 2011년 총선에서 몇 가지 새로운 규정과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튀르키예 선거운동 규정을 유럽 국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2] 구체적인 변화는 다음과 같다.
- 총선 출마 가능 연령이 30세에서 25세로 줄었다.
- 나무 투표함이 강플라스틱 투표함으로 바뀌었다. 투표함은 투명하고 파손 방지, 열 차단 기능을 갖추었다.
- 기표소가 더욱 튼튼하고 안전하며 투표에 적합한 모습으로 개선되었다.
- 투표용투가 더 커지고 각 투표 종류에 맞는 색을 가지게 되었다.
- 선거운동이 해가 지고 나서 두 시간 뒤까지 허용되었다. 기존 선거법상 해 진 뒤의 선거 운동은 금지됐었다.
- 신원 등록번호를 댈 수 있는 국민이라면 공식적인 신원증명수단 없이도 투표가 가능하게 되었다.
- 투표 행사를 방해한 사람은 최소 징역 3년에서 5년까지의 처벌을 받게 되었다.
해외 거주 튀르키예 유권자를 위해 별도의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며, 전자투표 도입이 불가능하므로 해당 국가의 영사관에서 투표를 진행해야 한다.[3]
2011년 3월 5일, 튀르키예 최고선거위원회는 6월 12일 총선에 참여하는 정당을 발표했다.
- 대안당 (Alternatif Parti, AP)
- 튀르키예 공산당 (Türkiye Komünist Partisi, TKP)
- 민주당 (Demokrat Parti, DP)
- 민주좌파당 (Demokratik Sol Parti, DSP)
- 평등민주당 (Eşitlik ve Demokrasi Partisi, EDP)
- 지복당 (Saadet Partisi, SP)
- 자유연대당 (Özgürlük ve Dayanışma Partisi, ÖDP)
- 대통합당 (Büyük Birlik Partisi, BBP)
- 조국당 (Yurt Partisi, YURT-P)
- 독립튀르키예당 (Bağımsız Türkiye Partisi, BTP)
- 정의개발당 (Adalet ve Kalkınma Partisi, AKP)
- 노동당 (Emek Partisi, EMEP)
- 자유민주당 (Liberal Demokrat Parti, LDP)
- 국민당 (Millet Partisi, MP)
- 민족보수당 (Milliyetçi ve Muhafazakar Parti, MMP)
- 민족운동당 (Milliyetçi Hareket Partisi, MHP)
- 새로운당 (Yeni Parti, YP)
- 평화민주당 (''Barış ve Demokrasi Partisi'', BDP)
- 국민진보당 (Halkın Yükselişi Partisi, HYP)
- 국민의 목소리당 (Halkın Sesi Partisi, HAS Parti)
- 공화인민당 (Cumhuriyet Halk Partisi, CHP)
- 권리평등당 (Hak ve Eşitlik Partisi, HEPAR)
- 권리자유당 (Hak ve Özgürlükler Partisi, HAKPAR)
- 정로당 (Doğru Yol Partisi, DYP)
- 튀르키예당 (Türkiye Partisi, TP)
- 노동자당 (İşçi Partisi, İP)
- 청년당 (Genç Parti, GP)
아홉 개의 소규모 정당은 선거 전략을 변경하여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거나, 연대를 통해 하나의 정당으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4월 19일, 최고선거위원회는 자유연대당과 새로운당이 마감 시한까지 필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총선에 참여하는 정당 수는 15개로 줄었다.
3. 1. 선거구
2011년 튀르키예 총선에서는 최신 인구 통계에 따라 각 주별 의원 수가 배분되었다. 이스탄불 지역구의 의원 수가 15명까지 늘었으며, 앙카라는 3명, 이즈미르는 2명까지 추가되었다. 안탈리아, 디야르바키르, 반, 시르나크는 각각 1명씩 의원이 증가했다. 앙카라는 두 선거구로 나뉘어 각각 15명과 16명의 의원을 선출하며, 이스탄불은 세 선거구로 나뉘어 각각 30명, 27명, 28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이즈미르는 두 선거구에서 각각 13명의 의원을 선출한다.[4]각 주별 의원 수[4] | ||||||
---|---|---|---|---|---|---|
3. 2. 참여 정당
2011년 3월 5일, 튀르키예 최고선거위원회는 6월 12일 총선에 참여하는 정당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대안당 (Alternatif Parti, AP)
- 튀르키예 공산당 (Türkiye Komünist Partisi, TKP)
- 민주당 (Demokrat Parti, DP)
- 민주좌파당 (Demokratik Sol Parti, DSP)
- 평등민주당 (Eşitlik ve Demokrasi Partisi, EDP)
- 지복당 (Saadet Partisi, SP)
- 자유연대당 (Özgürlük ve Dayanışma Partisi, ÖDP)
- 대통합당 (Büyük Birlik Partisi, BBP)
- 조국당 (Yurt Partisi, YURT-P)
- 독립튀르키예당 (Bağımsız Türkiye Partisi, BTP)
- 정의개발당 (Adalet ve Kalkınma Partisi, AKP)
- 노동당 (Emek Partisi, EMEP)
- 자유민주당 (Liberal Demokrat Parti, LDP)
- 국민당 (Millet Partisi, MP)
- 민족보수당 (Milliyetçi ve Muhafazakar Parti, MMP)
- 민족운동당 (Milliyetçi Hareket Partisi, MHP)
- 새로운당 (Yeni Parti, YP)
- 평화민주당 (''Barış ve Demokrasi Partisi'', BDP)
- 국민진보당 (Halkın Yükselişi Partisi, HYP)
- 국민의 목소리당 (Halkın Sesi Partisi, HAS Parti)
- 공화인민당 (Cumhuriyet Halk Partisi, CHP)
- 권리평등당 (Hak ve Eşitlik Partisi, HEPAR)
- 권리자유당 (Hak ve Özgürlükler Partisi, HAKPAR)
- 정로당 (Doğru Yol Partisi, DYP)
- 튀르키예당 (Türkiye Partisi, TP)
- 노동자당 (İşçi Partisi, İP)
- 청년당 (Genç Parti, GP)
아홉 개의 소규모 정당은 선거 전략을 변경하여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거나, 연대를 통해 하나의 정당으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4월 19일, 최고선거위원회는 자유연대당과 새로운당이 마감 시한까지 필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총선에 참여하는 정당 수는 15개로 줄었다.
4. 선거 운동
케말 클르치다로을루가 공화인민당 대표로 나선 첫 총선은 2011년에 치러졌다.[8] 클르치다로을루는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 대표직에서 사임할 것이라고 공언했다.[8]
공화인민당의 총선 후보 지원자는 3,500명에 달했으며, 남성 후보는 3,000 튀르키예 리라, 여성 후보는 2,000리라, 장애인 후보는 500리라의 지원비를 냈다.[9] 후보 지원자 중에는 데니즈 바이칼 전 공화인민당 대표와 에르제네콘 연루 의혹을 받았던 무스타파 발바이, 메흐메트 하베랄 등이 있었다.[10]
공화인민당은 29개 주에서 예비 선거를 실시했다.[11] 클르치다로을루 대표는 공화인민당의 변화를 위해 453명의 후보 명단에서 현역 의원 78명을 제외하고, 조국당, 정로당, 튀르키예당 등 중도우파 정당 출신 인사 11명을 영입했다.[11]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내 주류에서는 "의원 감축에 꼼수를 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1]
4. 1. 정의개발당
정의개발당(AKP)은 6월 12일 총선을 앞두고 많은 출마 신청을 받아 1,500만 튀르키예 리라의 수입을 올렸다. 여성 의원 수가 가장 많은 당으로서, 정의개발당은 다음 국회에서 여성 의원 수를 늘리고자 했다. 의원 4~5인이 선출되는 각 주마다 최소 1명 이상의 여성 후보를 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총 5,599명의 지원자 중 여성 후보는 855명, 장애인 후보는 315명이었다. 남성 지원자에게는 3,000리라의 지원금을 부과한 반면 여성 지원자는 1,500리라, 장애인 지원자는 면제했다. 지원금으로 확보한 총액은 1,485만 리라였다. 에르도안 당 대표는 선거 후 후보 등록 명단에 오르지 못한 지원자에게 지원금을 환불할 것이라고 밝혔다.[5]핵심 지원자로는 볼칸 보즈키르 대사, 무아메르 귈레르 유럽 연합 사무국장 및 전 이스탄불 주지사 등이 있었다.
4월 12일, 총선 의원 후보 정당 명부의 상위 선거위 제출이 마감되었다. 3선 연임을 노리는 에르도안 총리는 당의 활력을 위해 기존 의원 중 절반을 명부에서 제외했다. 기존 국회 의석 333석 중 146석만 지명하여 정의개발당의 정권 재창출을 노렸다.[6] 정의개발당 후보 550명 중 514명이 대학 학위를 소지했으며, 장애인 후보는 11명이었다.[7] 주요 인물들은 기존 지역구를 지켰지만, 당내 장관들은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해안 지역구로 옮겨 출마하는 경우가 많았다.
5월 4일, 에르도안 대표가 카스타모누에서 유세 집회를 진행하던 중 경찰 수송차 습격 사건이 발생해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 에르도안 대표는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며, 쿠르드 노동자당은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정의개발당은 다음과 같이 전국 각지에서 선거 유세 집회를 개최했다.
- 4월 22일: 바이부르트, 귀뮈샤네
- 4월 24일: 베이코즈, 실레, 제크메쾨이, 산작테페
- 4월 30일: 무슈, 이디르
- 5월 2일: Arnavutköy, Sultangazi
- 5월 3일: Esenyurt, Beylikdüzü, Büyükçekmece
- 5월 4일: Kastamonu, Amasya
- 5월 5일: Adana, Osmaniye
- 5월 7일: Yığılca, Düzce, 종굴다크
- 5월 8일: Kilis, Kahramanmaraş
- 5월 10일: Afyon, Kütahya
- 5월 11일: Çorlu, Lüleburgaz, Edirne
- 5월 12일: 발리케시르, 얄로바
- 5월 13일: 마니사, 데니즐리
- 5월 14일: 리제, 기레순
- 5월 15일: 우샤크, 안탈리아
- 5월 16일: 시텔레르, 케치외렌, 신잔
- 5월 17일: 요즈가트, 말라티아
- 5월 18일: 토카트, 초룸
- 5월 19일: 시르트
- 5월 20일: 카르스, 반
- 5월 21일: 하카리, 산리우르파
- 5월 22일: 코카엘리, 부르사
- 5월 24일: 시르나크, 바트만
- 5월 25일: 키리칼레, 네브셰히르
- 5월 26일: 니데, 아크사라이
- 5월 27일: 아이딘, 물라
- 5월 28일: 하타이, 에스키셰히르
- 5월 29일: 카이세리, 앙카라
- 5월 30일: Ümraniye, Ataşehir, Kartal, Çağlayan
- 5월 31일: Trabzon, 오르두
- 6월 1일: Diyarbakır
- 6월 2일: 이스파르타, 메르신
- 6월 3일: 코니아, 삼순
- 6월 4일: Adana, 이즈미르
- 6월 5일: Sakarya, 이스탄불
- 6월 6일: Çankırı
- 6월 7일: Adıyaman, Mardin
- 6월 8일: Elazığ, Bingöl
- 6월 9일: Sivas, Gaziantep
- 6월 10일: Erzurum, Ağrı
- 6월 11일: Tuzla, Maltepe, Üsküdar
4. 2. 공화인민당
케말 클르치다로을루가 공화인민당 대표로 나선 첫 총선은 2011년에 치러졌다.[8] 클르치다로을루는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 대표직에서 사임할 것이라고 공언했다.[8] 공화인민당의 총선 후보 지원자는 3,500명에 달했으며, 남성 후보는 3,000 튀르키예 리라, 여성 후보는 2,000리라, 장애인 후보는 500리라의 지원비를 냈다.[9] 후보 지원자 중에는 데니즈 바이칼 전 공화인민당 대표와 에르제네콘 연루 의혹을 받았던 무스타파 발바이, 메흐메트 하베랄 등이 있었다.[10]공화인민당은 29개 주에서 예비 선거를 실시했다.[11] 클르치다로을루 대표는 공화인민당의 변화를 위해 453명의 후보 명단에서 현역 의원 78명을 제외하고, 조국당, 정로당, 튀르키예당 등 중도우파 정당 출신 인사 11명을 영입했다.[11]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내 주류에서는 "의원 감축에 꼼수를 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1]
5. 여론 조사
총선을 앞두고 여러 여론 조사 기관에서 정의개발당(AKP)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2009년 지선에서 정의개발당은 39%의 표를 얻었으며, 공화인민당(CHP)은 23%, 민족운동당(MHP)은 16%를 득표했다. 2011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각 여론 조사 기관은 정의개발당의 지지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 비율은 42%에서 51% 사이를 보였다고 전했다. 공화인민당의 경우는 25%에서 30%였다. 민족운동당은 대부분 10%에서 14%의 지지율을 보였다.
2011년 6월 12일 실시된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21,399,082표를 획득하며 49.83%의 지지율로 과반 의석을 차지하여 승리했다. 공화인민당은 11,155,972표를 얻어 25.98%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민족운동당은 5,585,513표를 획득, 13.01%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무소속 후보들은 2,819,917표, 6.57%의 득표율로 35석을 확보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세 번의 선거에서 연속 승리하면서 각 선거에서 이전 선거보다 더 많은 표를 받은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총리가 되었다. 선관위가 표 집계를 마치자, 튀르키예의 새 국회에 들어설 정당은 총 네 개 당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개발당은 50%의 지지율에 힘입어 과반 내각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원내 정당 자리에는 야당이었던 공화인민당, 민족운동당, 평화화합당이 다시 합류하게 되었다. 정의개발당이 얻은 의석 327석은 원내 여타 정당의 지지 없이도 개헌 투표를 요청할 수 있는 의석인 330에는 살짝 못 미치고,[12] 국민 투표 없이 튀르키예의 1982년 튀르키예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3분의 2의 과반 의석인 367석에는 더더욱 도달하지 못했다.
정의개발당 고위 당원으로는 총 73명이 이번 선거에서 마지막으로 당선됐다. 당칙상으로는 최대 세 번 연임까지만 의원직에 오를 수 있다고 정해놓았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 메흐메트 알리 샤힌 국회의장, 뷜렌트 아른치, 제밀 치체크, 알리 바바잔 부총리, 베시르 아탈라이, 파루크 첼리크, 메흐메트 메흐디 에케르, 사둘라흐 에르긴, 에게멘 바으슈, 니메트 추북추, 하야티 야즈즈, 베지디 괼, 타네르 이을드즈, 니하트 에르귄, 비날리 이을드름, 레제프 아크다 장관은 차기 총선 후보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원내 제2당은 공화인민당으로, 25.9%를 득표했다. 민족운동당은 13% 득표로 원내 진입에 필요한 최소 의석 비율인 10% 기준선을 넘었다.[12] 노동민주자유연합 동맹 (권리자유당, 참여민주당, 노동당을 비롯한 여러 정당이 모인 연합)에 속해 쿠르드 평화민주당의 지지를 받았던 무소속 후보 35인도 당선됐다. 레일라 자나 (50) 의원은 1991년 초선으로 입성한 지 20년 만에 다시 당선되어 국회로 돌아가게 되었다.[13]
아시리아인 전 변호사 에롤 도라 의원은 평화민주당의 지지를 받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튀르키예의 아시리아인 출신 국회의원으로는 사상 처음이자, 기독교 신자 국회의원으로는 1960년 (미기르디쉬 셸레피안 의원이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재직) 이래 처음이었다.[14]
여성 의원 수는 46명에서 78명으로 뛰어올랐다. 정당별로 살펴보면 정의개발당이 44명으로 1위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공화인민당 20명, 민족운동당 3명, 쿠르드 평화민주당이 지지하는 무소속 후보 11명이었다.
국회의원 중 최고령자는 오크타이 에크쉬 공화인민당 의원으로, 1961년 제헌의회 당시 최연소 의원이었다. 이에 따라 에크쉬 의원은 개회 선서가 이루어지는 동안 임시 의장으로 있을 예정이다. 최연소 의원은 비발 마시트 정의개발당 의원 (27)이었다.
하티프 디클레 의원 (평민당)은 테러 선전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유죄가 선고된 것에 대해 항소를 했으나 이 역시 유죄가 인정되면서 국회의원직이 박탈되게 되었다. 그의 의석은 오이아 에로나트 정의개발당 의원에게 돌아갔다.[15] 디클레 의원이 퇴출된 것을 계기로 나머지 평민당 의원들도 항의 차원에서 의회에 나오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클레 의원이 의회로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여럿 있었다.[16] 정의개발당과 공화인민당은 이번 경우에 한해 디클레에게 의원직을 주도록 한다는 법 개정에 모두 찬성했다. 이미 지난 2003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에르도안 의원에게 일어났었는데, 그때도 의원직을 허용토록 하는 법 개정이 이뤄졌었다.[17]
공화인민당 의원이 된 기자 무스타파 발바이와 학자 메흐메트 하베랄은 당시 에르제네콘 조직에 관여하였다는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에 대한 석방 신청이 이뤄졌지만 유예되었고, 공화인민당 측에서는 강한 저항에 나서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할 뜻을 밝혔다.[18]
민족운동당과 공화인민당은 의회 개회식에 불참하였는데 디클레 의원의 의석 상실과 더불어, 그밖에 여덟 의원이 투옥 기간과 겹쳐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민족운동당과 공화인민당은 이 여덟 의원의 투옥기간에 대해 정치적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19]
6. 결과
2011년 튀르키예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50%의 지지율로 과반 의석을 확보하여 단독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세 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승리하면서 각 선거마다 이전 선거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총리가 되었다. 공화인민당, 민족운동당, 평화화합당도 원내에 진입했다.[12]
정의개발당은 327석을 얻어 개헌 투표를 요청할 수 있는 330석에는 미치지 못했고, 1982년 튀르키예 헌법을 국민 투표 없이 개정할 수 있는 3분의 2 의석(367석)에는 훨씬 못 미쳤다. 정의개발당 고위 당원 73명은 당칙에 따라 3선 연임 제한으로 이번 선거를 끝으로 의원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2] 여기에는 메흐메트 알리 샤힌 국회의장, 뷜렌트 아른치, 제밀 치체크, 알리 바바잔 부총리, 베시르 아탈라이, 파루크 첼리크, 메흐메트 메흐디 에케르, 사둘라흐 에르긴, 에게멘 바으슈, 니메트 추북추, 하야티 야즈즈, 베지디 괼, 타네르 이을드즈, 니하트 에르귄, 비날리 이을드름, 레제프 아크다 장관 등이 포함된다.
공화인민당은 25.9%를 득표하여 원내 제2당이 되었고, 민족운동당은 13%를 득표하여 10% 기준선을 넘었다.[12] 노동민주자유연합 동맹에 속한 무소속 후보 35인도 당선되었는데, 이들은 평화민주당의 지지를 받았다. 레일라 자나 의원은 1991년 초선 당선 이후 20년 만에 국회로 복귀했다.[13] 아시리아인 출신 변호사 에롤 도라는 평화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는데, 이는 튀르키예의 아시리아인 출신으로는 최초의 국회의원이며, 기독교 신자 국회의원으로는 1960년 이후 처음이었다.[14]
여성 의원 수는 46명에서 78명으로 증가했으며, 정의개발당이 44명으로 가장 많았다. 공화인민당은 20명, 민족운동당은 3명, 쿠르드 평화민주당 지지 무소속 후보는 11명이었다.
국회의원 중 최고령자는 오크타이 에크쉬 공화인민당 의원이었으며, 1961년 제헌의회 당시 최연소 의원이었다. 그는 개회 선서가 진행되는 동안 임시 의장직을 맡았다. 최연소 의원은 비발 마시트 정의개발당 의원(27세)이었다.
하티프 디클레 의원(평민당)은 테러 선전 유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의 의석은 오이아 에로나트 정의개발당 의원에게 돌아갔다.[15] 평민당 의원들은 이에 항의하며 의회에 불참했지만, 디클레 의원의 복귀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16] 정의개발당과 공화인민당은 디클레에게 의원직을 허용하는 법 개정에 찬성했는데, 2003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17]
무스타파 발바이와 메흐메트 하베랄 공화인민당 의원은 에르제네콘 조직 연루 혐의로 수감 중이었다. 석방 신청은 유예되었고, 공화인민당은 판결에 불복하며 강하게 반발했다.[18]
민족운동당과 공화인민당은 의회 개회식에 불참했는데, 디클레 의원의 의석 상실과 더불어 8명의 의원이 수감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들의 투옥이 정치적이라고 주장했다.[19]
6. 1. 전국 결과
(6월 11일 기준)(2007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