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가타야마 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타야마 센은 미마사카국 출신의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이다. 그는 미국 유학 중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일본으로 돌아와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결성에 참여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며 코민테른 간부로 활동했다. 193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소련에 거주한 일본인 - 노사카 산조
    노사카 산조는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가로, 영국 유학 중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하여 일본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제2차 중일 전쟁 기간에는 중국에서 활동했고, 전후 일본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과거 동료 살해 연루 의혹으로 제명되었다.
  • 소련에 거주한 일본인 - 스기하라 지우네
    스기하라 지우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부영사로서 일본 정부의 지시를 어기고 유대인 난민에게 비자를 발급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했으며, 사후 '열방의 의인'으로 추앙받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 미마사카국 사람 - 아카마쓰 마사노리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무로마치 시대에 가키쓰의 난으로 몰락한 아카마쓰 가문을 재건하고 오닌의 난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옛 영지를 회복했으며, 막부 내에서 높은 신임을 얻고 문화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 미마사카국 사람 - 히라누마 기이치로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일본의 법조인, 정치인으로 법무성에서 근무하며 공정한 법 집행으로 명성을 얻었고,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나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가타야마 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센 가타야마
본명야부키 스가타로
출생일1859년 12월 26일
출생지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사망일1933년 11월 5일 (향년 73세)
사망지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모스크바
안장지크렘린 벽 묘지, 모스크바
국적일본 제국
직업
직업쌀 농부, 언론인, 교사, 인쇄공 견습생, 신문 편집자
학력
학력오카 주쿠 (예비 학교), 그린넬 대학교, 앤도버 신학교, 예일 대학교 신학대학원, 메리빌 대학교
가족
배우자후데
하리 타마
자녀3명
부모야부키 구니조, 야부키 키치
경력
알려진 업적일본 공산당 공동 창립자, 미국 공산당 초기 멤버
사상
사상마르크스-레닌주의
법적 문제
범죄 혐의1912년 도쿄 전차 파업 참여
형벌없음

2. 생애

1859년 미마사카국(현재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활판공 등으로 일하며 고학하였고,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리넬 칼리지, 앤도버 신학대학원, 예일 대학교 신학부 등에서 수학했다. 유학 중 기독교에 입문하고 사회적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896년 일본으로 돌아와 사회 운동에 투신했다. 일본 최초의 린보관인 '킹슬리관'을 설립하여 사회 사업의 거점으로 삼았고[8], 잡지 〈로도세카이(勞動世界)〉를 창간하여 일본 초기 노동 운동을 이끌었다. 노동조합기성회 설립에 기여하고, 1901년에는 고토쿠 슈스이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즉시 금지되었다.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 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하여, 러일 전쟁 중임에도 러시아 대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와 함께 연단에 올라 전쟁 반대와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를 호소했다. 1906년 일본 사회당 결성에 참여했으나, 노선 갈등으로 탈당하기도 했다. 1911년도쿄 시전 노동자 파업을 지도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1912년 출옥했다.

1914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적극 지지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활동했으며, 미국 공산당과 멕시코 공산당 창당에 기여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코민테른 상임 집행 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고, 1922년 도쿠다 규이치 등과 함께 일본 공산당 창당을 국외에서 지도했다. 또한 국제 반제 동맹을 이끌며 반제국주의 및 반전 운동에 힘썼다.

만년에는 모스크바에 머물며 활동했으나 건강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33년 11월 5일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17] 그의 장례는 소련 정부에 의해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등 소련 및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유해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다.[18][19]

2. 1. 초기 생애와 교육

25세의 가타야마 센


가타야마 센은 1859년 미마사카국 구메난조 군 하데키 마을(현재의 오카야마현 구메군 구메난정 하데키)의 장원 야부키(弥吹) 가문에서 야부키 쿠니조(弥吹国造)와 키치(キチ)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스가타로(菅太郎)였다.

1877년 10월, 19세 때 가메베 마을(현재의 구메난정 가메베중)의 친척인 가타야마 이쿠타로(片山幾太郎)의 양자로 들어가 이름을 '''가타야마 센'''(片山 潜)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입양은 당시 징병을 피하고 학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생모가 남편에게 버려진 후 가타야마 가문의 "장남"이 되었다. 그는 훗날 자서전 『自伝|지덴일본어』에서 자신이 장남이 아니었던 점이 다행이었다고 술회했는데, 이는 장남으로서 짊어져야 할 여러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다치 세이후(足立正声)의 사숙에서 공부한 후, 1880년 오카야마 사범학교(현재의 오카야마 대학 교육학부)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881년 자퇴하고 도쿄로 상경했다. 도쿄에서는 고교쿠샤(攻玉社)에서 숙부(塾僕, 학교에서 잡일을 하며 공부하는 학생)로 일하고, 활판공으로도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또한 작은 대학 예비 학교인 오카-주쿠(岡塾)에서 공부하며 미쓰비시 창립자 중 한 명의 조카인 이와사키 세이시치( 岩崎清七일본어 )와 교류했다[3] .

1884년, 친구 이와사키 세이시치가 예일 대학교로 유학을 떠난 것에 자극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샌 라파엘(San Rafael)에서 접시 닦이로 일했으며, 이후 샌프란시스코 빈민가의 목수 집, 포모나(Pomona)의 여관, 알라메다의 가정집 등에서 요리사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알라메다에서는 중국인 교회에 다니며 영어기독교를 배웠다[4] . 1886년 11월에는 조합 교회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5] .

이후 고학으로 테네시주의 메리빌 칼리지, 아이오와주그리넬 칼리지에서 공부하여 1892년 그리넬 칼리지를 졸업했다. 이후 앤도버 신학대학원과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수학하며 사회적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유학 중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예일 대학교 동문인 오쿠보 리타케(大久保利武)나 마쓰카타 고지로 등이 학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3] . 또한 플라톤, 소포클레스 등의 원전을 읽으며 서양 고전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했다[6] . 이 시기 가타야마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을 접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공감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896년 학업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2. 2. 일본에서의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활동

189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가타야마 센은 일본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귀국 후 선교사 다니엘 크로스비 그린의 지원과 친구 다카노 후사타로와의 협력을 통해, 1897년 3월 간다구 미사키초에 일본 최초의 린보관인 '킹슬리관'을 설립하여 기독교 사회 사업의 거점으로 삼았다[8].

1901년경의 가타야마 센


킹슬리관 운영과 함께 가타야마는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 1897년 12월, 그는 일본 최초의 노동조합 중 하나인 직공의용회(노동조합기성회)의 설립에 기여했으며, 기관지 격인 労働世界|로도 세카이일본어(''Labour World'')를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 잡지는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발행되며 초기 노동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1897년 4월 나카무라 다이하치로 등이 결성한 사회 문제 연구회(후의 사회주의 연구회)에 참여했으며, 1901년 5월에는 이 연구회를 개편하여 고토쿠 슈스이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을 창당했으나, 당은 결성 직후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초기에는 노사협조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으나, 1899년경부터 점차 비판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여 1901년에는 대일본노동단체연합 본부의 노사 협조론을 비판하며 탈퇴했다[10][11]. 1903년에는 『도시사회주의』를 간행하여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펼쳤다.

1904년, 가타야마는 제2 인터내셔널 제6차 암스테르담 대회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러일 전쟁이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러시아 대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와 연단에서 악수하며 전쟁 반대와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호소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평가된다.

1906년에는 일본 사회당 결성에 참여했으나, 의회 활동을 통해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의회 정책론을 주장하며 직접 행동을 강조한 고토쿠 슈스이 등 아나키스트들과 대립했다[12]. 결국 가타야마는 다조에 데쓰지 등과 함께 탈당하여 1907년 일본 사회 평민당을 결성했으나, 이 정당 역시 결성 이틀 만에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13].

1911년 말, 가타야마는 도쿄 시전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을 지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12년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사면으로 출옥했으나[14], 일본 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그는 191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25년의 가타야마 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가타야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적극적인 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멕시코에서 미국, 멕시코 공산당 창당 활동에 힘썼으며, 1921년에는 소련으로 건너가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상임 집행 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다. 그는 국외에서 1922년 도쿠다 규이치 등과 함께 일본 공산당 창당을 지도했으며, 국제 반제 동맹을 이끌며 반제국주의 및 반전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민족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3년 관동 대지진 직후 발생한 아마카스 사건에 대해 군벌의 사적 원한에 의한 만행으로 규탄하기도 했다[15].

만년의 가타야마 센


가타야마는 만년까지 소련에 머물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했다. 1933년 11월 5일,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17]. 그의 장례식은 소련 정부에 의해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미하일 칼리닌 등 소련 및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운구에 참여했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어[18][19], 혁명가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일본인이다.

1967년 소련에서 발행된 가타야마 센(1859-1933) 초상 우표

2. 3. 미국 망명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

1911년도쿄 시전 파업을 지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12년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사면[14]으로 출옥한 뒤, 1914년 9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크게 감명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깊이 경도되었다. 그는 미국 공산당과 멕시코 공산당의 결성에 힘쓰는 등 북아메리카 지역의 공산주의 활동을 이끌었다. 같은 해 블라디미르 레닌이오시프 스탈린이 지도한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했으며, 1920년에는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코민테른 상임 집행 위원회 간부가 되었다. 이후 국외에서 일본 공산당 창당을 지도했으며, 국제 반제 동맹을 이끌며 반전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민족 회의에 다카세 기요시, 도쿠다 큐이치 등과 함께 참석했다. 같은 해 모스크바에 정착하였다.

만년에는 모스크바에 머물렀으나, 임무의 기밀 유지가 어렵고 업무 수행이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했다. 중병을 앓아 두 딸의 간호를 받았는데, 기혼 사실조차 제대로 보고되지 않아 코민테른으로부터 의심을 사기도 했으며, 이는 훗날 그의 딸들이 숙청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3년 11월 5일, 입원 중이던 모스크바 시내 병원에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17] 향년 75세(만 73세)였다. 11월 9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소련에서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15만 명의 소련 시민과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미하일 칼리닌, 이오시프 스탈린, 빌헬름 피크, 쿤 벨라, 노사카 산조 등 14명이 관을 운구했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다.[18][19] 그의 뇌는 연구를 위해 뇌 연구소에 기증되었다. 도쿄 아오야마 묘원에도 그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2. 4. 코민테른 활동과 소련에서의 죽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에 영향을 받아 가타야마는 적극적인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간부가 되었다. 그는 멕시코를 거쳐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에 정착했고, 일본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환영받았다. 코민테른 상임 집행 위원회 간부로 활동하며 국외에서 1922년 도쿠다 규이치와 함께 일본 공산당 창당을 지도했다. 또한 국제 반제 동맹을 지도하며 반전 운동에도 힘썼다.

1922년 1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민족 회의에는 가타야마, 다카세 기요시, 도쿠다 규이치 등이 참석했다. 관동 대지진 직후인 1923년 9월 16일에 발생한 아마카스 사건에 대해 그는 "오스기 일가 살해는 아무래도 군벌의 사적인 원한에 기인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15]고 언급하기도 했다.

가타야마는 임무의 기밀 유지가 어렵고 업무 수행이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여, 여러 해외 임무를 거친 후에는 주로 모스크바에 머물게 되었다. 만년에는 중병을 앓아 두 딸의 간호를 받는 일이 잦았는데, 그가 기혼자라는 사실조차 코민테른에 제대로 보고되지 않아 의심을 사기도 했으며, 이는 후에 그의 딸들이 숙청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933년 6월 20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클라라 체트킨의 장례식에서 다른 조문객들과 함께 관을 운반하는 모습이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확인된 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16] . 같은 해 11월 5일, 입원 중이던 모스크바 시내 병원에서 패혈증으로[17] 사망했다. 향년 75세(만 73세)였다.

11월 9일에 거행된 그의 장례식은 소련에서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15만 명의 소련 시민과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관을 운구한 14명에는 미하일 칼리닌, 이오시프 스탈린, 빌헬름 피크, 쿤 벨라, 노사카 산조 등이 포함되었다.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 묘지의 붉은 광장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다[18][19] . 그의 뇌는 뇌 연구소의 해부학적 재료로 사용되었다. 일본 아오야마 묘원에도 그의 묘비가 있다.

3. 가족 관계

장녀 가타야마 야스코 (오른쪽)와 하라 노부코 (왼쪽). 밀라노, 1929년


가타야마 센의 친부인 구니히라는 센이 3살 때 이혼하고 승려가 되었다[20]。센은 19세에 가타야마 이쿠타로의 양자가 되었으나 다시 본래 성으로 돌아왔고, 37세에 가타야마 쓰네키치의 양자가 되었다[20]

센은 1897년, 첫 번째 부인 요코즈카 후데(히쓰코)와 결혼했다[20]。후데는 이와사키 세이시치의 먼 친척(친동생 가메지로 아내의 친척)이었다[3]。두 사람 사이에는 장녀 야스(야스코, 1899년생)와 장남 간이치(1901년생)가 태어났다[20]。그러나 1903년 후데가 사망하면서[20], 1907년 하라 타마(시코)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고 이듬해 차녀 치요가 태어났다[20]

장남 간이치는 어머니 후데가 사망한 후, 이와사키 세이시치의 동생 가메지로와 새어머니 타마의 친정집에서 자랐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예과에 입학했지만 22세의 나이로 병사했다[3]

장녀 야스코는 다이쇼 시대 초기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사촌인 하라 노부코와 교류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불영화여학교를 졸업했지만, 아버지가 망명하여 다시 미국으로 가자 야스코도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곳에서 안나 파블로바에게 발레를 배웠고,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하라 노부코와 함께 발레리나로서 공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자 간병을 위해 소련으로 들어갔고, 과로로 인해 발레리나의 길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일본어 강사로 일했으며, 소련에 체류 중이던 일본 공산당 간부 이토 마사노스케와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 이토는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야스코는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인 1956년에 모스크바 대학교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고, 1958년부터는 소일 우호 협회 부회장으로서 소련과 일본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8년에 사망했다.

차녀 치요는 쇼와 시대 초기에 소련에 있는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를 돌보며 지냈다[3]。당시 코민테른은 센과 함께 사는 치요의 존재에 대해 질문했는데, 센은 딸이라고 설명했지만 코민테른은 센이 기혼자라는 사실조차 몰랐고, 일본 공산당 역시 치요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코민테른은 치요를 일본 비밀경찰의 스파이로 의심했다고 한다[21]。아버지 센이 사망한 후, 치요는 여러 곳을 떠돌며 힘든 노동에 시달렸고,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46년 모스크바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한편, 히에이 산의 대승정을 지내고 젠코지 다이칸진의 주지가 된 미즈오 자쿠교는 가타야마 센의 친동생이다[3]

4. 평가 및 유산

가타야마 센의 삶과 활동에 대한 연구와 회고는 그의 사후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관련 서적들이 출판되어 그의 사상과 유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 신판 『가타야마 센 걸어온 길』 일본도서센터 "인간의 기록", 2000년
  • 가타야마 야스 『나의 걸어온 길, 아버지 가타야마 센의 추억과 함께』 성문사, 2009년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Socialism 1997
[2] 웹사이트 『国民年鑑 昭和10年』国民新聞社 https://dl.ndl.go.jp[...] 国民新聞社 1934
[3] 웹사이트 『欧米遊蹤』 https://dl.ndl.go.jp[...] アトリエ社 1933
[4] 서적 アメリカが見つかりましたか(戦前篇) 都市出版 1998
[5] 간행물 片山潜 교문관 1988
[6] 논문 Classica Japonica: Greece and Rome in the Japanese Academia and Popular Literature
[7] 웹사이트 社会問題の顕在化と早稲田大学 https://www.waseda.j[...]
[8] 문서 労働世界6号
[9] 문서 日本社会政策学会史
[10] 문서 片山潜
[11] 문서 日本労働運動史料1
[12] 뉴스 東京朝日新聞 1933-11-07
[13] 문서 社会主義者沿革
[14] 웹사이트 『官報』第55号 https://dl.ndl.go.jp[...] 1912-10-05
[15] 웹사이트 世界各誌・紙|世界思潮研究会調査部訳|世界は日本の震災をいかに見たか|ARCHIVE http://www.project-a[...] 2024-01-27
[16] 뉴스 コミンテルン中央幹部、モスクワで死去 大阪毎日新聞 1933-11-07
[17]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010
[18] 서적 レーニンの秘密(下) 日本放送出版協会
[19] 웹사이트 モスクワの赤の広場に眠る外国人 https://jp.rbth.com/[...] 2021-12-28
[20] 웹사이트 片山潜記念館(久米南町) https://www.e-tsuyam[...] 2017-09-21
[21] 서적 Before and After Stalin Michael Joseph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