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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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레이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쇼군을 보좌하던 직책으로, 처음에는 집사로 불리다가 1362년 시바 요시마사가 임명되면서 간레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간레이는 정무 총괄, 쇼군 권력 대행, 군사 지휘, 슈고 다이묘 통제 등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시바 씨, 호소카와 씨, 하타케야마 씨가 번갈아 간레이 직을 맡는 산칸레이 체제가 확립되었다. 오닌의 난 이후 쇼군의 권위가 실추되고 간레이 직은 유명무실해졌으며,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후 간레이 직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한편, 간토 지방에는 간토 간레이가 존재하여 가마쿠라를 통치했다.
무로마치 막부 초기에는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보좌하는 '집사(執事)'가 정무를 담당했으며, 고노 모로나오, 니키 요리아키, 호소카와 기요우지 등이 임명되었다. 집사는 아시카가 가문의 가신들이 맡는 직책이었다.[23] 간노의 소란 이후 집사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1362년 시바 다카쓰네의 아들 시바 요시마사가 13세의 나이로 집사에 임명되면서 '간레이(管領)'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 '간레이'는 '천하를 관령(管領)한다'는 의미였다. 시바 다카쓰네는 아시카가 가문과 동등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가신이 맡는 집사 직을 꺼려, 아들 요시마사를 집사로 임명하고 자신은 간레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았다. 다만, 이때의 간레이는 집사의 후견으로 설치된 임시적인 지위였고, 제도상으로는 여전히 집사가 쇼군의 보좌역이었다는 설도 있다.[24]
1366년 시바 다카쓰네, 요시마사 부자가 실각하면서 쇼군의 친정 체제가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쇼군은 간레이(또는 집사)를 폐지하려 했으나, 이듬해 사망 직전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간레이로 임명했다.[25] 요리유키는 어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며 막부 체제를 안정시켰다. 이 시기 히키쓰케토닌(引付頭人)의 직권이 간레이로 흡수되어 정무 일체를 통괄하게 되었다.[25]
2. 역사
1366년 조지의 변으로 시바 가문이 실각하고,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간레이에 취임하였다. 요리유키는 어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며 막부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이 시기 간레이는 정무를 총괄하게 되었고, 여러 문서에 '간레이'라는 호칭이 정착된 것도 호소카와 요리유키 시대 이후였다.[26] 1379년 고랴쿠 정변으로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실각하고, 시바 요시마사가 다시 간레이에 복귀하였다.
1398년 하타케야마 모토쿠니가 간레이에 취임하면서, 시바, 호소카와, 하타케야마 (산칸레이) 세 가문이 번갈아 간레이 직을 맡는 관례가 확립되었다.[28]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 이후, 간레이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고, 유력 슈고들의 회의체(슈쿠로)가 막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28]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쇼군의 권한을 강화하고 간레이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간레이의 역할이 확대되었는데, 이는 쇼군에 의한 간레이 통제를 강화하고 군사 지휘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29] 1441년 가키쓰의 난으로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암살된 이후, 간레이 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30]
오닌의 난(1467년~1477년)으로 쇼군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면서, 간레이 직은 점차 유명무실해졌다.[31] 오닌의 난 이후,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간레이 직을 독점했으나, 마사모토 사후 호소카와 가문이 분열되면서 간레이 직은 사실상 소멸되었다.[31]
2. 1. 집사에서 간레이로
초창기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보좌하는 '집사(執事)'가 정무를 담당했고, 고노 모로나오, 니키 요리아키, 호소카와 기요우지가 차례로 임명되었다. 집사는 아시카가 가문의 가신들이 맡는 직책이었다.[23]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간의 권력 다툼(간노의 소란) 이후, 집사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1360년에는 집사 호소카와 기요우지가 니키 요시나가를 꺾었지만, 이듬해 사사키 도요와의 갈등으로 실각하고 남조에 항복했다.
1362년, 시바 다카쓰네의 아들 시바 요시마사가 13세의 나이로 집사에 임명되면서 '간레이(管領)'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간레이'는 '천하를 관령(管領)한다'는 의미이다. 시바 다카쓰네는 아시카가 가문과 동등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가신이 맡는 집사 직을 꺼려, 아들 요시마사를 집사로 임명하고 자신은 간레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았다. 다만, 이때의 간레이는 집사의 후견으로 설치된 임시적인 지위였고, 제도상으로는 여전히 집사가 쇼군의 보좌역이었다는 설도 있다.[24]
2. 2.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집권과 실각
1366년 시바 가문이 실각하고(조지의 변),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가 간레이에 취임하였다. 요리유키는 어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를 보좌하며 막부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이 시기 간레이는 정무를 총괄하게 되었고, 여러 문서에 '간레이'라는 호칭이 정착된 것도 호소카와 요리유키 시대 이후였다.[26] 요시미쓰의 원복(元服) 때 간레이였던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에보시오야(烏帽子親)를 맡아, 이후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원복에는 간레이가 가관 역할을 맡는 관례가 성립되었다.[27]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임명하여 규슈 지역의 남조 세력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요시노의 남조와 강화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구스노키 마사노리(楠木正儀)를 끌어들여 남조를 공격, 남조의 저항을 약화시켰다. 또한 오안 반제령(応安の半済令)을 내려 무사와 장원 영주 간의 토지 분쟁을 조정하려 하였다.
1379년 고랴쿠(康暦) 정변으로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실각하고, '''시바 요시마사(斯波義将)'''가 다시 간레이에 복귀하였다.
2. 3. 산칸레이 가문의 성립과 권력 변동
1398년 하타케야마 모토쿠니(畠山基国)가 간레이에 취임하면서, 시바(斯波), 호소카와(細川), 하타케야마(畠山)의 세 가문(산칸레이, 三管領)이 번갈아 간레이 직을 맡는 관례가 확립되었다.[28]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 이후, 간레이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고, 유력 슈고들의 회의체(슈쿠로, 宿老)가 막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간레이는 슈쿠로 회의 등 막부 효조(評定)의 주최자로서의 요소가 강해졌다.[28]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는 쇼군의 권한을 강화하고 간레이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했다. 그는 부교닌(奉行人) 제도나 쇼군 직속군인 부교추(奉公衆)을 강화하여 쇼군 친재(親裁)를 추진하고, 간레이를 쇼무사타(所務沙汰)에서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간레이의 역할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쇼군에 의한 간레이 통제를 강화하고 군사 지휘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29]
가키쓰(嘉吉) 원년(1441년),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가 요시노리를 암살하는 가키쓰의 난(嘉吉の乱)이 일어났다.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細川持之)는 어린 요시카쓰(義勝)를 7대 쇼군으로 옹립하고 정국을 주도했다.[30] 그러나 이후 하타케야마 모치쿠니(畠山持国),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 등 간레이 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30]
2. 4. 간레이 직의 유명무실화와 소멸
오닌의 난(1467년~1477년)으로 쇼군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면서, 간레이 직은 점차 유명무실해졌다.[31] 오닌의 난 이후,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간레이 직을 독점하고 전제 권력을 휘둘렀으나,[31] 마사모토 사후 호소카와 가문이 분열되면서 간레이 직은 사실상 소멸되었다.[31]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간레이 직은 완전히 폐지되었다.[31]
에도 시대에 편찬된 군키모노(軍記物) 등에서는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 호소카와 우지쓰나(細川氏綱) 등이 간레이에 취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34] 당시의 1차 사료에는 이들의 간레이 취임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 실제로 간레이에 취임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34]
3. 간레이의 역할과 권한
이러한 변화는 '간레이의 권한 강화'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다른 직급의 권한을 흡수하거나 새로운 권한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측면도 있었다. '간레이'라는 명칭이 정착된 것도 호소카와 요리유키 시대 이후였다.[26] 쇼군 요시미쓰의 원복(元服) 때 간레이였던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에보시오야(烏帽子親)를 맡아, 이후 쇼군의 원복 때 간레이가 가관(加冠) 역할을 맡는 관례가 성립되었다.[27]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이마가와 료슌을 규슈 단다이로 임명하여 남조 세력을 소탕하게 하고, 구스노키 마사노리를 끌어들여 남조를 공격했다. 또한 오안 반제령(応安の半済令)을 내려 무사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한편, 유력 장원영주의 일원 지배지를 보호하여 양측의 이해 관계를 조정했다.
1379년 고랴쿠 정변으로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실각하고, 시바 요시마사가 간레이로 복귀했다. 이후 1398년 하타케야마 모토쿠니가 간레이가 된 뒤로는 시바 씨, 호소카와 씨, 하타케야마 씨 세 집안이 교대로 간레이에 임명되었다. 간레이는 퇴임 후에도 막부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3. 1. 정무 총괄
간레이는 쇼군을 보좌하여 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행정, 사법, 군사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쇼군을 대리하여 권한을 행사했다.[25]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어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면서, 이전에는 히키쓰케토닌(引付頭人)이 가지고 있던 직권을 간레이에게 흡수시켰다. 요시미쓰가 성인이 된 후에는 그의 의향을 받드는 형태로 정무를 총괄했고, 히키쓰케슈 등의 업무도 만도코로로 이관되었다.[25]
이러한 변화는 '간레이의 권한 강화'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다른 직급의 권한을 흡수하거나 새로운 권한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측면도 있었다. '간레이'라는 명칭이 정착된 것도 호소카와 요리유키 시대 이후였다.[26]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 이후에는 슈쿠로(宿老)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쇼군의 자문에 응하거나, 쇼군이 직접 숙로들에게 자문하는 형태가 되면서 간레이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슈쿠로 회의 등의 바쿠후 효조(評定)를 주최하는 역할이 강조되었고, 경제적 부담까지 지게 되면서 하타케야마 미쓰이에나 시바 요시아쓰 등은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28]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부교닌(奉行人) 제도 등을 강화하여 쇼군 친정을 추진하고, 간레이를 쇼무사타(所務沙汰)에서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간레이의 역할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쇼군에 의한 간레이 통제를 강화하고 군사 지휘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29]
오닌의 난 이후,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메이오 정변을 일으켜 쇼군을 폐립하고 전제 권력을 확립했다. 그러나 마사모토 사후 호소카와 가문은 분열되어 쇠퇴했고, 가신이었던 미요시 나가요시가 대두하게 되었다. 호소카와 우지쓰나가 사망한 후 간레이는 자연 소멸 형태로 폐절되었다.[31]
3. 2. 쇼군 권력 대행
어린 쇼군이 즉위하거나 쇼군이 부재중일 때, 간레이는 쇼군의 권력을 대행했다.[22] 쇼군의 명령을 집행하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며, 소송을 처리하는 등 쇼군의 역할을 대신 수행했다.[22]
3. 3. 군사 지휘권
간레이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쇼군을 보좌하며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초기에는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간레이로 임명되어 어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며 막부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요리유키는 이마가와 료슌을 규슈 단다이로 임명하여 규슈 지역의 남조 세력을 진압하도록 하는 등 군사적 활동을 지휘했다.[26]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간레이에게 군사 지휘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겼다. 요시노리는 부교닌 제도와 쇼군 직속 부대인 부교추를 강화하여 쇼군의 친정을 추진했고, 군사 행동에 필요한 명령의 일부를 간레이 호쇼(管領奉書)로 대신하게 했다. 이는 간레이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쇼군이 간레이를 통제하고 군사 지휘를 보좌하게 함으로써 쇼군 중심의 정치를 확립하려는 의도였다.[29]
가키쓰 원년(1441년),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쇼군 요시노리를 암살하자,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는 슈고들을 소집하여 요시노리의 아들 요시카쓰를 쇼군으로 옹립하고 가키쓰의 난을 진압했다. 이후 간레이는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호소카와 가쓰모토 등으로 교체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30]
3. 4. 슈고 다이묘 통제
간레이는 슈고 다이묘를 통제하고 막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슈고 다이묘들의 분쟁을 조정하고, 반란을 진압하며, 막부의 정책을 시행했다.[21]
4. 역대 간레이 목록
취임 기간 | 이름 | 비고 |
---|---|---|
1362년 - 1366년 | 시바 요시마사 | |
1367년 - 1379년 | 호소카와 요리유키 | |
1379년 - 1391년 | 시바 요시마사 | |
1391년 - 1393년 | 호소카와 요리모토 | |
1393년 - 1398년 | 시바 요시마사 | |
1398년 - 1405년 | 하타케야마 모토쿠니 | |
1405년 - 1409년 | 시바 요시시게 | |
1409년 | 시바 요시마사[39] | |
1409년 - 1410년 | 시바 요시아키 | |
1410년 - 1412년 | 하타케야마 미쓰이에 | |
1412년 - 1421년 | 호소카와 미쓰모토 | |
1421년 - 1429년 | 하타케야마 미쓰이에 | |
1429년 - 1432년 | 시바 요시아키 | |
1432년 - 1442년 | 호소카와 모치유키 | |
1442년 - 1445년 |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 |
1445년 - 1449년 | 호소카와 가쓰모토 | |
1449년 - 1452년 |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 |
1452년 - 1464년 | 호소카와 가쓰모토 | |
1464년 - 1467년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
1467년 - 1468년 | 시바 요시카도 | |
1468년 - 1473년 | 호소카와 가쓰모토 | |
1473년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
1478년 - 1486년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
1486년 | 호소카와 마사모토 | |
1486년 - 1487년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
1487년 - ? | 호소카와 마사모토 | |
1490년 | 호소카와 마사모토 | |
1495년 - 1507년 | 호소카와 마사모토 | |
1508년 - 1525년 | 호소카와 다카쿠니 | |
1525년 | 호소카와 타네쿠니 | |
1527년 | 하타케야마 요시타카 | 1532년 사망 |
1536년 | 호소카와 하루모토 | |
1546년 | 롯카쿠 사다요리 | |
1552년 - 1564년 | 호소카와 우지쓰나 | 1564년 사망 |
4. 1. 집사
초창기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씨의 푸다이(譜代) 가신을 중심으로 주종 관계라는 사적인 지배 관계를 맺은 '''집사'''가 초대 쇼군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보좌하는 한편, 타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소송·공권적인 지배 관계를 담당하는 이원적인 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고노 모로나오, 니키 요리아키, 호소카와 기요우지가 잇따라 집사에 임명되었다. 집사는 타카우지가 막부를 열었기 때문에 중앙 정치의 요직이 되었지만, 원래는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었던 아시카가 씨의 가재(家宰) 직책이었으며, 고노 씨, 니키 씨, 호소카와 씨는 가마쿠라 시대 이래의 푸다이 가신이었다.장원공령제 등 기존의 제도·질서의 유지와 공정을 중시하는 아시카가 타다요시와, 휘하 무사들의 권익을 옹호·확대함으로써 집사, 나아가 그 배후 세력인 쇼군 권위의 편성·강화를 꾀하는 고노 모로나오의 대립으로 인해 일어난 간노의 소란을 거쳐, 타다요시파는 쇠퇴하고,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시대에는 재판 기관인 히키쓰케슈의 역할을 축소하여 집사의 권한을 강화하고, 일원화된 체제 확립을 목표로 했다.
쇼헤이 15년/엔분 5년(1360년), 집사 호소카와 기요우지는 전 집사 니키 요리아키의 동생 니키 요시나가를 세력 다툼 끝에 꺾었지만, 이듬해 그 기요우지가 사사키 도요와의 불화로 인해 막부에서 쫓겨나 남조에 항복했다. 이처럼 집사직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 반복되어, 잠시 쇼군 친재(親裁)가 되었지만, 쇼헤이 17년/조지 원년(1362년)에 불과 13세의 시바 요시마사가 집사에 임명되었고, 아버지 시바 다카쓰네가 후견했다. 당초에는 타카쓰네가 취임을 요구받았지만, 시바 씨는 아시카가 일문이기는 하지만 본가로부터 독립한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 가격(家格)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즉, 형식상으로는 아시카가 본가와 동격), 아시카가 가신의 직책인 집사에 취임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아, 재삼의 요청에 마지못해 응한 결과이다. 집사에서 간레이로의 제도 전환은 이 무렵의 일로 여겨진다. 간레이란 "천하를 관령(管領)한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때의 간레이는 집사의 후견으로 설치된 임시 지위였고, 시바 다카쓰네가 간레이, 시바 요시마사가 집사로 각각 임명되었으며, 제도상으로는 여전히 집사가 쇼군의 보좌역이었다는 설도 있다[5]. 실제로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간레이 취임 후에도 요리유키를 '집사', 간토 간레이(과거의 간토 집사) 우에스기 노리아키를 '간레이'라고 칭한 서장[6]이 남아있어, 간토에서 간토 집사→간토 간레이로의 변경이 막부 중앙에서의 집사→간레이로의 변경보다 먼저였을 가능성도 있다.
취임 기간 | 이름 |
---|---|
1336년 ~ 1349년 | 고노 모로나오 (1351년 사망) |
1349년 | 고노 모로요 (1351년 사망) |
1349년 ~ 1351년 | 고노 모로나오 (1351년 사망) |
1351년 ~ 1358년 | 니키 요리아키 (1299년 ~ 1359년) |
1358년 ~ 1361년 | 호소카와 기요우지 (1362년 사망) |
4. 2. 간레이
간레이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쇼군을 보좌하던 최고위 관직이다. 초기에는 집사라고 불렸으나,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간레이에 취임한 이후 '간레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간레이는 시바 씨, 호소카와 씨, 하타케야마 씨의 세 가문(삼관령가)에서 교대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오닌의 난 이후에는 호소카와 씨가 간레이직을 독점하게 되었다.
간레이의 권한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초기에는 쇼군을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고,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모치 이후 쇼군 중심의 정치가 강화되면서 간레이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었다.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쇼군 친정을 추진하며 간레이의 역할을 군사 지휘 보좌로 제한하려 했다.
가키쓰의 난(1441년) 이후 호소카와 모치유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등이 간레이를 맡아 정치를 주도했으나, 오닌의 난(1467년)을 거치면서 간레이는 점차 형해화되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메이오 정변(1493년)을 통해 쇼군을 폐립하고 전제 권력을 확립했으나, 에이쇼의 착란(1507년)으로 암살당한 후 호소카와 가문은 분열되어 쇠퇴했다.
호소카와 다카쿠니 사후 호소카와 하루모토, 호소카와 우지쓰나가 간레이에 취임했다는 설이 있으나, 동시대의 1차 사료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 의문시되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센고쿠 시대의 간레이는 정치적 권한이 거의 없고, 쇼군의 원복 등 중요한 의식 때만 임명되는 임시 직책에 불과했다는 견해도 있다.
호소카와 우지쓰나의 사망(1564년) 이후 간레이는 자연 소멸 형태로 폐절되었다고 여겨진다.
취임 기간 | 이름 | 비고 |
---|---|---|
1362년 - 1366년 | 시바 요시마사 | |
1367년 - 1379년 | 호소카와 요리유키 | |
1379년 - 1391년 | 시바 요시마사 | |
1391년 - 1393년 | 호소카와 요리모토 | |
1393년 - 1398년 | 시바 요시마사 | |
1398년 - 1405년 | 하타케야마 모토쿠니 | |
1405년 - 1409년 | 시바 요시시게 | |
1409년 | 시바 요시마사[39] | |
1409년 - 1410년 | 시바 요시아키 | |
1410년 - 1412년 | 하타케야마 미쓰이에 | |
1412년 - 1421년 | 호소카와 미쓰모토 | |
1421년 - 1429년 | 하타케야마 미쓰이에 | |
1429년 - 1432년 | 시바 요시아키 | |
1432년 - 1442년 | 호소카와 모치유키 | |
1442년 - 1445년 |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 |
1445년 - 1449년 | 호소카와 가쓰모토 | |
1449년 - 1452년 |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 |
1452년 - 1464년 | 호소카와 가쓰모토 | |
1464년 - 1467년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
1467년 - 1468년 | 시바 요시카네 | |
1468년 - 1477년 | 시바 요시카네 | 서군 |
1468년 - 1473년 | 호소카와 가쓰모토 | 동군 |
1473년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동군 |
1477년 - 1486년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
1486년 | 호소카와 마사모토 | |
1486년 - 1487년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
1487년 | 호소카와 마사모토 | |
1490년 | 호소카와 마사모토 | |
1494년 - 1507년 | 호소카와 마사모토 | |
1507년 | 호소카와 스미유키 | |
1507년 - 1508년 | 호소카와 스미모토 | |
1508년 - 1525년 | 호소카와 다카쿠니 | 아시카가 요시하루 측 |
5. 산칸레이 가문
무로마치 시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정했다고 여겨지는 간레이(관령) 직에 취임하는 가문을 말한다.
오에이 5년(1398년),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조정의 5섭가 7세이카를 본떠 무가의 '''3직 7두'''를 정했다. 여기서 3직은 아시카가 씨 일문의 시바 씨, 호소카와 씨, 하타케야마 씨이며, '''삼관령'''(집사별당)이라고 칭했다. '''7두'''는 야마나 씨, 잇시키 씨, 도키 씨, 아카마쓰 씨, 교고쿠 씨, 우에스기 씨, 이세 씨 등이며, 그중 야마나 씨·잇시키 씨·아카마쓰 씨·교고쿠 씨를 교토 봉행(사무라이도코로별당)으로 하여 '''4직'''이라고 칭했다. 주자는 이세 사다유키로 했다. 또한 다케다 씨·오가사와라 씨 두 사람을 궁마례식 봉행으로 하고, 키라 씨, 이마가와 씨, 시부카와 씨 등을 무두로 했다"(『난포키덴』).[31]
삼관령의 3가에는 적류의 종가와 서류의 분가가 있지만, 관령을 대대로 맡는 것은 종가이며, 각각의 적류 당주가 역대 통칭으로 삼았던 관직의 당명을 바탕으로, 시바 부에이 가(대대로 좌병위독), 호소카와 쿄초 가(대대로 우쿄노다이부), 하타케야마 킨고 가(대대로 좌에몬노카미)라고 칭하며, 각각 관령(시바, 호소카와, 하타케야마) 가 또는 (시바, 호소카와, 하타케야마) 관령가라고도 불린다.[31]
삼관령의 3가는 각각 분열되어 센고쿠 시대를 격렬하게 싸웠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살아남았고, 각각 남은 당주 호소카와 아키모토, 하타케야마 아키타카, 시바 요시카네는 오다 노부나가의 친족과 혼인하여 노부나가의 의형제·준의형제가 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중요도를 회복했다. 후에 도요토미 정권으로 이행한 후에도 고귀한 가문의 후예로서 후하게 대우받게 된다.[31]
에도 시대는 고케로서 에도 막부에 섬기는 가문이나, 다이묘가의 가로직으로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가문 등 독자적인 운명을 겪었다.[31]
6. 간토 간레이
1336년 초,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쫓아 가마쿠라를 떠나 교토로 향했다.[3] 그는 자신의 4살 된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호소카와 키요우지, 우에스기 노리아키, 시바 이에나가 등 세 명의 후견인에게 맡겼다.[4] 1349년, 다카우지는 요시아키라를 교토로 불러들이고, 그를 대신하여 다른 아들인 아시카가 모토우지에게 간토 간레이 직함을 부여했다.[3] 간레이는 쇼군의 아들로서 간토를 통치하고 그 지역의 군대를 통제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보통 가마쿠라 막부 또는 가마쿠라 쇼군이라고 불렸으며, 모토우지는 쇼군 또는 가마쿠라/간토 고쇼와 동등한 직함을 가졌다.[3] 나중에 교토에서 간토로 쇼군을 '쿠보'라고 부르는 습관이 퍼지면서, 가마쿠라의 통치자는 ''가마쿠라 쿠보''라고 불리게 되었다.[3] 간레이 직함은 그 후 우에스기 씨 가문의 세습 집사(shitsuji|執事일본어)에게 넘겨졌다.[3][4] 이후 우에스기 씨 가문은 1552년 간토 간레이가 폐지될 때까지 이 직책을 독점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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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The Kamakura shogunate reserved for itself an area in Kyōto called Rokuhara where lived its representatives, who were supposed to protect its inter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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