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노의 소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간노의 소란은 1350년부터 1352년까지 무로마치 막부를 분열시킨 사건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형제의 권력 다툼이 주요 원인이었다. 다카우지는 쇼군으로서 가신단과 포상소를 통제했고, 다다요시는 심문소 행정을 관리하며 대립했다. 이 갈등은 고노 모로나오의 쿠데타, 다다요시의 반란, 남북조의 일시적 통합, 다다요시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소란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은 다카우지에게 집중되었고, 쇼군의 친재권이 강화되었으며, 남북조 대립이 장기화되었다. 또한, 수호 다이묘의 권력이 확대되고, 북조 내부의 왕위 계승 다툼, 무장 세력 간의 파벌 대립이 심화되는 등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 아시카가 목상효수사건
1863년 교토에서 존황양이파 낭인들이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의 목상을 효수한 아시카가 목상효수사건은 봉칙양이 운동의 격화와 히라타 아쓰타네의 국학 사상에 영향을 받아 발생했으며, 에도 막부의 정책 변화를 가져왔다. - 아시카가 다카우지 - 덴류지
덴류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을 추모하기 위해 무소 소세키를 초빙하여 창건한 린자이종 텐류지파의 대본산 사찰로, 아름다운 회유식 정원이 특징이다. - 아시카가 다카우지 - 무로마치 막부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1336년에 세워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일본의 무가 정권으로,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을 거치며 쇼군의 권위가 약화되어 멸망에 이르렀다. - 일본의 역사 - 에도 시대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멸망한 1868년까지의 일본 역사 시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아래 평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으나 엄격한 신분제도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막번체제, 산킨코타이 제도 등 독특한 정치·사회·경제 체제를 통해 일본 근세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역사 - 연호
연호는 군주의 권위와 통치권을 상징하며, 군주의 즉위와 함께 사용되는 칭호로,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는 일본, 중화민국, 북한 등에서 사용된다.
간노의 소란 | |
---|---|
개요 | |
![]() | |
명칭 | 간노의 소란 |
일본어 명칭 | 간노 교란 (観応擾乱) |
로마자 표기 | Kannō Jōran |
시기 | 1350년 11월 26일 – 1352년 3월 12일 |
장소 | 불명 |
원인 |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다다요시 간의 권력 투쟁, 고 모로나오의 권력 남용 |
결과 |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승리 |
교전 세력 | |
![]() | |
![]() | |
지휘관 | |
직의당 | 아시카가 다다요시 (사망) 아시카가 다다후유 |
존씨당 | 일본 황실 고무라카미 천황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고 모로나오 (사망) 고 모로야스 (사망) |
주요 인물 | |
직의당 | 우에스기 시게요시 하타케야마 나오무네 모모이 다다쓰네 기라 사다이에 유키 도모타네 |
존씨당 | 시바 이에카네 호소카와 요리유키 하타케야마 다카쿠니 하타케야마 구니우지 아카마쓰 노리무라 야마나 도키우지 (후에 직의당으로 전향) 교고쿠 다카우지 잇시키 노리우지 도키 요리야스 |
2. 배경
무로마치 막부 정권 초기에는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 다다요시가 각각 군사와 행정을 분담하는 이원적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다카우지는 가신단을 통솔하며 군사적 지휘와 포상을 담당했고, 다다요시는 관료 조직을 이끌며 사법 기능을 관리했다.[9]
가신단은 가신들을 단속하고 범죄를 기소하는 기관이었으며,[10] 포상소는 가신들의 주장을 듣고 봉토를 지급하거나 새로운 무사들을 등록하는 데 사용되었다.[11] 주요 사법 기관인 보좌관 회의는 토지 분쟁과 상속 관련 분쟁을 해결했다.[11] 이러한 사법 기능은 제도 내에서 분쟁을 합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운 정권의 관료들은 멸망한 호조 정권을 섬기던 사람들 중에서 모집되었는데, 이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대부분의 무사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었다.[12]
1350년대에 간노의 소란과 그 여파로 초기 정권은 분열되어 거의 파괴될 위기에 처했다.[13] 표면적으로는 다카우지의 동생 다다요시가 고노 모로나오, 모로야스 형제에 맞서는 파벌 투쟁처럼 보였지만,[14] 실제로는 쇼엔 제도에 대한 의견 차이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가 통제하는 서로 다른 관료 체제에서 비롯된 갈등이었다. 다카우지는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한 반면, 다다요시는 과거의 정책을 보존하려는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다카우지는 가신단의 군사 지도자로서 전장에서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가신을 슈고 직에 임명하고 쇼엔 장원을 나누어 절반을 가신에게 봉토 또는 지토로 주었다. 반면 다다요시는 겐무식목 초안을 통해 이러한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장원 토지의 직접적인 분할에도 반대했다.[15]
이처럼 정책이 서로 모순되는 두 명의 국가 수장이 존재했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했다. 아시카가 가문 구성원 간의 심각한 분열은 반대 세력을 강화시켰고, 무로마치 정권의 두 기둥이었던 다다요시와 다카우지는 각자의 의제를 추진하기 위해 남조에 형식적으로 항복하기도 했다. 다다요시는 고 형제를 파괴하기 위해, 다카우지는 다다요시를 물리치기 위해 남조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조는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구성원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데 정당성으로 사용되었다.
2. 1.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통치 방식
초기 무로마치 막부는 쇼군 아시카가 가문의 가재(家宰) 역할을 맡았던 집사(執事) 고노 모로나오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보좌하고,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정무를 담당하는 이원적인 체제였다. 다카우지는 가신들의 수장으로서 가신단(사무라이도코로, 侍所)과 포상소(온쇼가타, 恩賞方)를 통제했고, 다다요시는 정권의 사법 기능을 관리하는 심문소의 행정을 통제하는 관료적 지도자였다.다카우지는 주종제의 기본인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에 관련한 은상완행(恩賞宛行, 영지 지급)과 영지 기진을, 다다요시는 영지 안도 및 상론(영지 관련 소송)을 맡았다. 모로나오의 직무에는 전자를 보좌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직권을 행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상대의 직권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었고, 그러한 직권 대립이 다카우지의 보좌를 맡은 모로나오와 막부의 정치를 분담하는 다다요시의 대립 원인이 되었다.
고노 모로나오를 필두로 하는 슈고케(守護家)의 서자나 교토 주변의 신흥 고케닌들이 다카우지를, 사법 관료, 슈고케 적자 및 지방의 호족들이 다다요시를 따랐으며, 양자는 서로 혁신과 보수를 외쳤다.
영지 관련 소송을 맡은 다다요시는 장원이나 경제적인 권익을 무사들에게 거의 빼앗기다시피 한 영주(주로 공가나 사사寺社)의 소송을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다요시의 정치적 이상은 가마쿠라 시대의 싯켄 정치에 있었고, 히키쓰케슈(引付衆) 등 재판 제도를 충실히 하거나 기존의 제도, 질서 유지를 지향하였으며, 재정 기능의 일부를 교토 조정에 남겨두기도 했기에 유력 고케닌들과 함께 구게, 지샤의 기존 권익을 보호하는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비해 막부에 참여한 무사 대부분은 왕실이나 귀족의 권위를 가벼이 하고 스스로의 무력으로 이권을 얻으려는 성향이 있었으며 모로나오는 이러한 무사단을 통솔해 남조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모로나오는 전투 공적으로 휘하 무장들에 대한 은상으로써 토지를 실제 점령자들에게 잠정적으로 ‘예치’시키는 형태로 나누어 주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 토지가 다른 사람의 영토였을 경우 원래 주인이 이를 막부에 호소해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많은 무사를 참여시키기 위한 ‘토지 예치’와 '법에 의한 공평한 통치'라는 슬로건은 모순을 일으키고 결국 두 사람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모로나오는 쇼군 다카우지의 집사로서 쇼군의 권익 강화에 힘썼으며 이는 모로나오 자신의 발언권 강화로도 이어지는 것이었다. 모로나오는 겐무 정권 때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쇼군의 명령과 함께 집사의 시행장 등 각종 봉서를 발급해 명령의 ‘실현’을 도모했다.
이러한 대립은 모로나오와 다다요시와 같은 차원에서는 정치사상적인 대립이라는 측면도 있었는데, 슈고 이하 여러 무사들로써는 자신과 대립하는 무사가 모로나오에 붙으면 자신은 다다요시에 붙는 방식으로 결국 전란에 의해 발생한 영지 및 권익을 둘러싼 다툼에서 모로나오, 다다요시, 다카우지, 아시카가 다다후유, 그리고 남조(南朝) 등, 그저 자신들의 거병에 내세울 기두가 될 존재를 요구할 뿐이라는 경향이 대체로 강해서, 이마가와 노리쿠니나 다다요시파인 호소카와 아키우지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사정으로 짧은 기간 동안 소속 당파를 몇 번이나 철새처럼 바꾸며 오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양자간 대립의 경위에는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가독(家督) 계승 과정 및 아시카가 집안의 외척인 우에스기 씨(上杉氏)의 문제도 있었다. 원래 다카우지의 아버지 사다우지는 호조 씨 소생의 적남이었던 다카요시(高義)에게 가독을 남겨주고 가재인 고노 모로시게(高師重, 모로나오의 아버지)에게 다카요시 보좌를 명했지만 다카요시가 요절하는 바람에 우에스기 씨 소생으로서 다카요시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난 다카우지가 사다우지의 후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시카가 집안의 가재(집사)로써 다카우지를 보좌하고자 했던 고 집안이나 오랫동안 서자 취급을 받아온 다카우지 형제를 지지하던 외척 우에스기 씨 사이에 대립이 생겨났고, 다카우지가 가재인 고 가문을 정무의 중심으로 두었던 한편 다다요시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외가 우에스기 가문에 동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엔겐(延元) 3년/랴쿠오(暦応) 원년(1338년) 우에스기 시게요시(上杉重能)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출사 정지 처분을 당하고,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憲顕)가 맡고 있던 간토 집사(関東執事, 훗날의 간토 간레이) 자리가 고노 모로후유(高師冬, 모로나오의 사촌 형제)로 교체되고, 시게요시 대신 상경할 것을 명받은 것이 우에스기 씨 및 다다요시의 타카우지에 대한 반감을 키운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17]
남북조 초기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 등 남조측의 내로라하던 무장들을 차례로 패배, 전사시킨 고노 모로나오, 모로야스(師泰) 형제 등의 전공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그리고 엔겐 4년/랴쿠오 2년(1339년)에 요시노 남조의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한 뒤 기나이(畿内)가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접어들면서 무투파인 모로나오가 활약할 곳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갔고, 다다요시의 법 집행이나 재판에 의한 정도(政道)가 추진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러나 모로나오가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무사들은 다다요시 일파가 내세우는 ‘법에 의한 질서 유지’나 이를 위한 행정 절차를 무시하고 갖가지 비법적, 비도덕적 사건들을 많이 일으켰다. 오코쿠(興国) 2년/랴쿠오 4년(1341년)에 이즈모, 오키의 슈고(守護) 엔야 다카사다(塩冶高貞)가 다다요시 지지파인 모모노이 나오쓰네(桃井直常), 야마나 도키우지(山名時氏) 등에게 공격을 당해 자결하고, 이듬해 오코쿠 3년/고에이(康永) 원년(1342년)에는 미노의 슈고 도키 요리토가 북조의 고곤인에게 활을 쏘는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다다요시에게 재판을 받고 참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다다요시의 처분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은 모로나오에게로 모여들었고, 그런 와중에도 다다요시는 여전히 권위와 제도의 안녕을 추구하였다. 양자간의 사이가 서서히 험악해지고 있었다.
쇼헤이(正平) 2년/조와 3년(1347년)이 되어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쓰라(楠木正行)가 교토 탈환을 목표로 봉기해 교토는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9월에 다다요시 지지파인 호소카와 아키우지, 하타케야마 구니키요(畠山国清)가 파견되어 이를 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패하고, 11월에 야마네 도키우지가 증원군으로 파견되었으나 그 역시 패하여 교토로 도망쳐 왔다. 이들 대신 기용된 고노 모로나오, 모로야스 형제는 이듬해인 쇼헤이 3년/조와 4년(1348년) 1월 5일에 시조나와테(四條畷) 전투에서 마사유키를 꺾고 남조군을 격파하는 것도 모자라 사기를 몰아서 남조의 본거지 요시노(吉野)까지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고무라카미 천황 등 남조측은 요시노의 오쿠노아노우(奥の賀名生, 일본 나라현 고조시)로 달아났다. 이 결과 막부 안에서 다다요시의 발언권이 떨어지고 모로나오의 세력이 증대하면서 양자간 파벌 싸움을 더욱 부추겼다.
이러한 파벌 싸움을 가장 앞장서서 중재해야 할 지위에 있었고 동시에 그렇게 할 권력이 있었던 쇼군 타카우지는 이 무렵 고다이고 천황을 등진 것을 후회하며 불교에 잠시 귀의하였다.
2. 2. 고노 모로나오와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대립
초기 무로마치 막부는 쇼군 타카우지를 보좌하는 집사 고노 모로나오와 타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정무를 담당하는 이원적인 체제였다. 타카우지는 군사 지휘권을, 다다요시는 소송 및 공권적 지배 관계를 담당했다.[17] 두 사람의 직권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쪽의 직권 행사가 다른 쪽의 직권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곧 모로나오와 다다요시의 대립으로 이어졌다.모로나오는 쇼군 타카우지의 가신들을 이끌고 남조와의 전쟁을 수행하며, 무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었다. 반면 다다요시는 가마쿠라 시대의 싯켄 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유지하고 공가나 사찰의 권익을 보호하려 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필연적인 대립을 불러왔다.[17]
모로나오는 쇼군의 권익 강화를 통해 자신의 발언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겐무 정권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쇼군의 명령과 함께 집사의 시행장 등 각종 봉서를 발급하여 명령의 실행을 도모했다.[17]
이러한 대립은 정치사상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많은 무사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그들은 자신과 대립하는 무사가 모로나오에게 붙으면 자신은 다다요시에게 붙는 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소속 당파를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시카가 집안의 가독 계승 과정과 외척 우에스기 씨의 문제도 대립의 배경이 되었다. 타카우지의 아버지 사다우지는 적남 다카요시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고노 모로시게(모로나오의 아버지)에게 보좌를 명했지만, 다카요시가 요절하여 우에스기 씨 소생의 타카우지가 후계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타카우지를 보좌하려는 고 집안과 우에스기 씨 사이에 대립이 생겼고, 다다요시는 외가인 우에스기 가문에 동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1338년 우에스기 시게요시가 출사 정지 처분을 당하고,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맡고 있던 간토 집사 자리가 고노 모로후유(모로나오의 사촌 형제)로 교체되면서, 우에스기 씨와 다다요시의 타카우지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17]
남북조 초기에 고노 모로나오, 모로야스 형제는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 등 남조의 주요 무장들을 격파하며 큰 공을 세웠다. 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한 후 기나이 지역이 평온해지면서 모로나오의 활약은 줄어들고, 다다요시의 법 집행과 재판에 의한 정치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모로나오 휘하의 무사들이 여러 비도덕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면서 양측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341년 이즈모, 오키 슈고 엔야 다카사다가 다다요시 지지파에게 공격당해 자결하고, 1342년 미노 슈고 도키 요리토가 고곤인에게 활을 쏘는 무례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다다요시에게 참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347년,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쓰라가 교토 탈환을 목표로 봉기하자, 다다요시 지지파가 파견되었으나 패배하고, 모로나오, 모로야스 형제가 이를 격파하고 요시노까지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막부 내에서 다다요시의 발언권은 약화되고 모로나오의 세력이 증대되면서 파벌 싸움은 더욱 심화되었다.
2. 3. 남북조 대립과 규슈의 정세
다다후유가 다시금 맹위를 떨치던 긴키(近畿), 간토와 마찬가지로 규슈 지역 역시 복잡한 정세에 놓여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아들인 가네요시 친왕을 정서대장군으로 파견했고, 가네요시 친왕은 기쿠치 다케미쓰를 끌어들여 규슈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한편 다카우지는 규슈 단다이로 잇시키 노리우지를 남겨두었으나, 잇시키 노리우지는 현지의 기존 슈고층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쿠진들은 자신들에게 '은상'을 줄 수 있는 강한 세력을 찾아 우왕좌왕하였다.다다후유는 규슈에 오자마자 많은 문서를 발급했고, 새로운 주군 아래서 은상을 받아 세력을 키우는 것을 지향하던 고쿠진들로부터 일정 지지를 얻었다. 다카우지는 모로나오 등과 모의하여 잇시키파 슈고들에게 다다후유 토벌령을 내렸다. 다다후유는 다카우지와 대립하는 처지였지만, 자신이 다카우지의 친아들이라는 점을 이용해 세력을 늘려나갔다. 한편 다카우지로부터 다다후유 토벌령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모로나오의 음모"라고 선전하며 대응했다.
다다후유도 자신을 싫어하고 배제하려 드는 다카우지의 본심을 잘 알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다카우지의 친아들이라는 입장 말고는 의지할 것이 없었다. 아버지(다카우지)의 아들(다다후유)에 대한 증오는 상궤를 넘어선 파라노이아로 비쳐지기 충분했고, 교토와 멀리 떨어진 규슈 무사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다카우지의 친아들인 다다후유가 역적 모로나오를 토벌하기 위해 규슈에서 병사를 모으고 있다"는 다다후유가 제시한 명분은 현지에서 점차 지지를 얻었다.
규슈 현지 슈고의 필두였던 쇼니 요리히사는 자신의 권위를 침해하는 존재였던 잇시키 노리우지를 타파하고, 나아가 쇼니 씨의 옛 권력을 되찾기 위한 기수로 다다후유를 주목하였다. 1350년(쇼헤이 5년/조와 6년) 다다후유와 요리히사는 연합하여 잇시키 노리우지를 무찌르고 하카타를 빼앗았다. 그러나 1352년(쇼헤이 7년/간노 3년) 다다후유의 양아버지이자 숙부인 다다요시가 사망하자 다다후유의 세력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여러 무사가 이반하는 가운데 요리히사만이 끝까지 다다후유를 지지했지만, 결국 다다후유는 규슈에서 도망쳤다.
3. 전개 과정
1349년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실각하고 고노 모로나오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1350년부터 1352년까지 간노의 소란이 발발했다.
1350년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봉기하고, 다다요시가 거병하면서 소란이 시작되었다. 다카우지가 고노 모로나오를 자신의 싯츠지(집사)로 임명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다다요시는 모로나오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349년 다다요시는 정부를 떠나 승려가 되었고, 1350년 반란을 일으켜 남조에 합류, 교토를 점령하고 고노 모로나오 형제를 체포하여 처형했다.[5]
1351년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으로 남북조가 일시적으로 통합되었으나, 1352년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사망하면서 소란은 종결되었다. 다다요시는 가마쿠라로 도망쳤지만, 다카우지는 군대를 이끌고 그를 추격했다. 1352년 3월, 표면상 두 번째 화해가 있은 직후, 다다요시는 태평기에 따르면 독살되어 갑자기 사망했다.[5]
간노의 소란으로 무로마치 정권 초기,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의 이원화된 행정 체제가 분열되었다. 다카우지는 가신단과 포상소를, 다다요시는 사법 기능을 관리하는 심문소를 통제했다. 가신단은 가신 단속, 포상소는 가신 포상 및 무사 등록, 보좌관 회의는 토지 분쟁 해결에 사용되었다.
1350년대 간노의 소란으로 정권은 분열되었다.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의 정책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었다. 다카우지는 가신에게 슈고 직을 임명하고 쇼엔 장원을 분할하여 봉토로 주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다다요시는 이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정책 모순과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남조는 정권 내부 갈등에 이용되었다.
1351년 1월, 다다요시 군은 교토로 진격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다카우지에게 피신했다. 2월, 다카우지 군은 교토를 목표로 했으나, 우치데하마 전투 등에서 패배했다. 다카우지는 모로나오의 출가를 조건으로 다다요시와 강화했지만, 실제로는 모로나오 살해를 지시했다. 2월 26일, 고노 모로나오 형제는 우에스기 요시노리의 군세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다요시는 요시아키라를 보좌하며 정무에 복귀했고, 다다후유는 규슈 단다이에 임명되었다.
1351년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으로 남북조가 일시적으로 통합되었으나, 1352년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사망하고 쇼헤이 일통이 파기되면서 북조가 재건되며 소란은 종결되었다.
3. 1.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실각과 고노 모로나오의 쿠데타 (1349년)
1349년 (조와 5년/쇼헤이 4년) 윤6월,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측근 우에스기 시게요시, 하타케야마 다다무네(畠山直宗) 및 선승(禅僧) 묘키쓰(妙吉)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집사 고노 모로나오의 악행을 형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규탄하며 집사직에서 면직시킬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이를 계기로 다다요시는 모로나오를 막부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하려 했다.그러나 같은 해 8월 12일, 고노 모로나오는 가와치에서 군세를 이끌고 상경한 모로야스와 합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8월 13일, 다다요시는 형 다카우지의 저택으로 피신했으나, 모로나오 군세는 다카우지의 저택을 포위하고 다다요시의 최측근인 우에스기 시게요시와 하타케야마 다다무네를 '주군 옆에 빌붙은 간신'이라며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무소 소세키가 중재에 나서 우에스기 시게요시와 하타케야마 다다무네는 유배,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출가하여 막부 정치에서 손을 떼는 조건으로 고노 모로나오는 포위를 풀었다.
다다요시 대신 막부 정무를 통괄하게 된 것은 다카우지의 적자 요시아키라였고, 요시아키라의 동생 모토우지는 초대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로서 간토(関東)를 통치하게 되었다.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憲顕)는 간토 집사(関東執事)로서 모토우지를 보좌하게 되었는데, 모로나오는 노리아키가 다다요시 지지파였던 시게요시의 동생이라는 점을 경계하여 간토 집사 정원을 두 명으로 늘리고 자신의 유자(猶子) 고노 모로후유를 임명했다.
이러한 정변 속에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노 모로나오와 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에서 동요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다카우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켰다는 설, 형세를 관망했다는 설, 다다요시 배제를 위해 모로나오와 미리 음모를 짰다는 설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 사건은 협조 노선을 유지하던 다카우지와 다다요시가 갈라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1349년 11월, 요시아키라가 교토로 들어오고, 12월 8일 다다요시는 출가하여 에겐(恵源)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 달 안에 우에스기 시게요시와 하타케야마 다다무네가 유배지에서 모로나오의 부하에게 암살당하면서, 모로나오와 다다요시 사이의 긴장은 다시 높아지게 된다.[18]
3. 2. 아시카가 다다후유의 봉기와 다다요시의 거병 (1350년)
다다후유는 다다요시의 양아들이었는데, 다다요시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주고쿠(中国)에서 병사를 모아 상경하려 했다. 그러나 다카우지가 모로나오에게 다다후유 토벌령을 내려 실패하고, 1350년 9월에 규슈로 달아나 그곳에서 세력을 키웠다.[4] 다다후유는 다자이후(大宰府)의 호족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와 남조측과 연계해 막부에 맞섰다.1350년 막부와 북조는 연호를 「조와」(貞和)에서 「간노」(観応)로 바꾸었다. 스코 천황의 즉위에 맞춰 바꾼 연호인데, 『장자(荘子)』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 무렵 일본 각지에서는 남조를 지지하는 무사들이 다다후유를 돕겠다며 군사를 일으켰다. 10월 28일, 다카우지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히젠으로 출진하였다.
10월 26일,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교토를 탈출해 야마토로 들어가, 11월 20일 하타케야마 구니키요(畠山国清)의 도움으로 가와치 이시카와 성(石川城)에 입성, 모로나오 · 모로야스 형제를 토벌하겠다며 거병한다. 이것이 간노의 소란의 시작이었다.[4]
하타케야마 구니키요뿐 아니라 모모노이 다다쓰네(桃井直常), 이시도 요리후사(石塔頼房), 호소카와 아키우지(細川顕氏), 기라 사다우지(吉良貞氏), 야마나 도키우지(山名時氏), 시바 다카쓰네(斯波高経) 등이 다다요시를 따랐다. 간토에서는 12월에 간토 집사로 있던 우에스기 노리아키와 고노 모로후유 사이에 분쟁이 벌어져,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고노 모로후유를 내쫓고 집사직을 독점했다. 다다요시의 거병 소식을 들은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토벌을 중단하고 히고에서 퇴각했고, 고노 모로나오 형제 역시 여기에 가담했다. 북조의 고곤 상황으로부터 다다요시 추토령이 내려졌고, 12월에 다다요시는 남조측에 항복했다.
3. 3. 고노 모로나오 형제의 몰락 (1351년)
高師直일본어 형제의 몰락은 1351년에 일어났다.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군세가 교토로 진격했을 때, 교토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남아 지키고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군사를 몰아 교토로 오고 있다는 소식에 요시아키라는 아버지가 있는 히젠으로 도망쳤다. 2월에 다카우지군은 교토를 목표로 진격했지만, 하리마의 고묘지 성에 이어 2월 17일 셋쓰 우치데하마 전투에서 다다요시군에게 패했다. 남조측을 포함한 다다요시의 우세 앞에 다카우지는 총동 아이바 우지나오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다다요시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이 교섭에서 다카우지는 표면적으로는 모로나오의 출가를 조건으로 들었지만, 실제로 우지나오에게는 다다요시에게 "모로나오를 죽여도 좋다"는 뜻을 전하라는 밀명을 전하고 있었다. 2월 20일, 화의가 성립되었고, 2월 26일에 모로나오 형제는 셋쓰에서 교토로 호송되던 도중에 길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다요시파의 우에스기 요리노리의 군세에 의해 셋쓰 무코 강에서 일족이 몰살당한다.[5][8] 정적 제거에 성공한 다다요시는 요시아키라의 보좌역으로써 막부의 정무에 복귀했고, 규슈의 다다후유는 규슈 단다이에 임명되었다.3. 4.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의 대립 재개 (1351년)
고노 모로나오 형제가 제거된 후에도 아시카가 정권 내에서는 다다요시파와 반(反) 다다요시파 간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논공행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행하고, 다다요시파였던 호소카와 아키우지를 협박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등 다다요시파를 압박했다.[5] 반면 다다요시의 정치는 무사들에게 환영받지 못해, 무장들의 이탈을 야기했다.1351년,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남조에 귀순을 제의하고 북조와의 화의 교섭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그해 3월 30일, 다다요시 지지파 무장 사이토 토시야스가 암살당하고, 5월 4일에는 사쿠라이 다다쓰네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카우지는 사사키 도요(佐々木道誉)와 아카마쓰 노리스케(赤松則祐) 등이 남조와 결탁한 것으로 간주하고, 7월 28일 군사를 일으켜 다다요시를 압박했다. 8월 1일, 다다요시는 교토를 탈출해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는 호쿠리쿠와 시나노를 거쳐 가마쿠라로 달아났다.[6][7]
1353년, 사사키 도요와 야마나 도키우지, 모로요시 부자가 영지 문제로 대립하면서 도키우지가 쇼군 측에서 이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도키우지는 이즈모를 제압하고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노리와 연합해 6월, 교토를 공격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고코곤 천황을 피난시키고 교토 방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고코곤 천황과 함께 동쪽으로 도주했다. 요시아키라는 아버지 다카우지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다카우지가 상경하자 도키우지 등은 교토를 버리고 철수했다.
간노의 소란(1350년 ~ 1351년)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형제간의 관계를 파멸시켰다. 다카우지가 고노 모로나오를 자신의 싯츠지(집사)로 임명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다다요시는 모로나오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349년, 다다요시는 정부를 떠나 승려가 되었고, 1350년 반란을 일으켜 남조에 합류했다. 1351년, 다다요시는 다카우지를 격파하고 교토를 점령했으며, 고노 모로나오 형제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러나 1352년, 다다요시는 다카우지에게 패배했고, 이후 독살된 것으로 추정된다.[8]
간노의 소란으로 무로마치 정권 초기,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의 이원화된 행정 체제가 분열되었다. 다카우지는 가신단과 포상소를, 다다요시는 사법 기능을 관리하는 심문소를 통제했다. 가신단은 가신 단속, 포상소는 가신 포상 및 무사 등록, 보좌관 회의는 토지 분쟁 해결에 사용되었다.
1350년대, 간노의 소란으로 정권은 분열되었다.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의 정책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었다. 다카우지는 가신에게 슈고 직을 임명하고 쇼엔 장원을 분할하여 봉토로 주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다다요시는 이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정책 모순과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남조는 정권 내부 갈등에 이용되었다.
1351년 1월, 다다요시 군은 교토로 진격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다카우지에게 피신했다. 2월, 다카우지 군은 교토를 목표로 했으나, 우치데하마 전투 등에서 패배했다. 다카우지는 모로나오의 출가를 조건으로 다다요시와 강화했지만, 실제로는 모로나오 살해를 지시했다. 2월 26일, 고노 모로나오 형제는 우에스기 요시노리의 군세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다요시는 요시아키라를 보좌하며 정무에 복귀했고, 다다후유는 규슈 단다이에 임명되었다.
3. 5. 쇼헤이 일통(正平一統)과 남북조의 일시적 통합 (1351년)
교토에서 다다요시파를 몰아냈지만, 다다요시는 간토(関東) ・ 호쿠리쿠(北陸) ・ 산인(山陰) 지역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사이고쿠(西国)에서는 다다요시의 양자인 다다후유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와 남조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사키 도요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조로부터 다다요시 ・ 다다후유 양자를 토벌하라는 윤지(綸旨)를 얻고자 남조에 화친을 제안했다. 남조는 북조가 가지고 있던 삼종신기(남조의 고다이고 천황은 북조에 넘겨진 삼종신기를 가짜라고 주장했다)를 넘기고 정권을 반납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북조에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1351년 10월 24일,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남조에 항복하고, 다다요시 ・ 다다후유 토벌 윤지를 얻어냈다.[4]이 화친에 따라 남조의 칙사가 교토로 들어왔고, 11월 7일에는 북조의 스코 천황과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이 폐위되고, 간파쿠(関白) 니조 요시모토 등도 교체되었다. 연호 또한 북조의 「간노 2년」이 폐지되고 남조의 「쇼헤이 6년」으로 통일되었다.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이라고 부르며, 훗날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다시 시도한 남북조 통일인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과 함께 「겐추 일통」(元中一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2월 23일에는 삼종신기가 남조 측에 반환되었다. 이는 사실상 정권이 남조 측에 무조건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5]
다카우지는 요시아키라에게 구체적인 교섭을 맡겼는데, 남조 측은 북조가 임명한 천태좌주를 비롯한 사찰 요직을 남조 측 인사로 교체하고, 겐무 신정 때 구게(公家)나 지샤(寺社)에 주기 위해 몰수했던 지토(地頭)직을 아시카가 정권이 원래 주인에게 반환한 것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며 북조 측과 대립했다. 요시아키라는 양보를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 다카우지와 연락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퇴로를 확보하는 등 소란이 일었다.
한편, 다카우지는 다다요시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여 12월에 삿타토우게(薩埵峠), 사가미 하야카와지리(早川尻)[19] 등지에서 승리하였다. 이듬해인 쇼헤이 7년(간노 3년, 1352년) 1월, 가마쿠라로 쫓겨간 다다요시는 형에게 항복했다.
3. 6.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죽음과 소란의 종결 (1352년)
다다요시는 가마쿠라로 도망쳤지만, 다카우지는 군대를 이끌고 그를 추격했다. 1352년 3월, 표면상 두 번째 화해가 있은 직후, 다다요시는 태평기에 따르면 독살되어 갑자기 사망했다.[5]그 후, 타다후유는 가마쿠라의 조묘지 경내의 엔푸쿠지에 유폐되었다. 2월 25일에는 가마쿠라에서 다카우지의 넷째 아들인 모토우지의 원복이 거행되었다. 그 다음 날인 2월 26일 (서기 3월 12일)에 타다후유는 급사했다. 공식적으로는 병사로 처리되었지만, 이 날은 고노 모로요리의 1주기에 해당하며, 『태평기』의 이야기에서도 타카우지에 의한 독살로 묘사되어 있어, 독살설을 지지하는 연구자와 그렇지 않은 연구자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타다후유의 죽음으로 소란의 결착을 본다고 한다.
3. 7. 쇼헤이 일통의 파기와 북조의 재건 (1352년)
쇼헤이 7년/간노 3년(1352년) 1월, 가마쿠라로 쫓겨간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형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항복했다. 조묘지(浄妙寺) 경내의 엔푸쿠지(延福寺)에 유폐된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2월 26일에 급서했다. 사인은 병사로 알려졌는데, 다다요시가 죽은 날이 하필이면 고노 모로나오의 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19]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이른바 「노치노 산보(後の三房)」의 한 사람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간토 통치에 실패하고 요시노로 돌아온 뒤, 남조와의 화의에서 더 나아가 교토와 가마쿠라에서 북조나 아시카가 세력을 몰아낼 것을 획책하였다. 우선 윤2월 6일, 남조는 다카우지의 세이이타이쇼군직을 해임시키고 대신 무네요시 친왕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에 닛타 요시오키(新田義興), 와키야 요시하루(脇屋義治), 호조 도키유키(北条時行) 등이 무네요시 친왕을 받들어 거병하고 가마쿠라로 진격해왔다. 가마쿠라의 다카우지는 일단 무사시국까지 물러났고, 18일에 남조군이 일시 가마쿠라를 점령했지만, 다카우지는 무사시 국의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하고 3월까지의 사이에 요시무네는 에치고, 무네요시 친왕은 시나노로 달아났으며, 다시금 가마쿠라가 다카우지 손에 넘어갔다(무사시노 합전).
한편 윤2월 19일,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지휘 아래 구스노키 마사노리 ・ 지바 아키쓰네(千種顕経) ・ 기타바타케 아키요시(北畠顕能) ・ 야마나 도키우지(山名時氏)를 비롯한 남조 세력들은 교토로 진군해 시치조오미야(七条大宮) 부근에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 호소카와 아키우지(細川顕氏) 등과 싸웠고, 다음날인 윤2월 20일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오미로 쫓아내고 교토로 들어왔다. 윤2월 24일에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준후(准后)로 임명된 지 17년 만에 교토로 돌아왔고, 이어 북조의 고곤 ・ 고묘 ・ 스코 세 상황과 폐태자 다다히토 친왕(直仁親王)을 체포해 본거지인 아노우로 데려갔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행궁을 아노우에서 가와치국 히가시노조(東条, 가와치미나미), 셋쓰국의 스미요시(住吉, 일본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나아가 야마시로국 오미 하치만(男山八幡, 일본 교토부 하치만시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로 옮겼다. 오미로 달아났던 요시아키라는 오미의 사사키 도요 ・ 시코쿠의 호소카와 아키우지 ・ 미노의 도키 요리야스(土岐頼康) ・ 하리마의 아카마쓰 씨(赤松氏) 등과 예전 다다요시 지지파였던 야마나 도키우지나 시바 다카쓰네 등의 협력으로 포진을 정비하고 3월 15일 교토를 탈환, 21일에는 고무라카미 천황의 임시 고쇼(御所)였던 오미 하치만을 포위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차단하는 포위전에 들어갔다. 이 포위전은 2개월에 걸치는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남조측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5월 11일에 시조 다카스에(四条隆資)가 사수 끝에 전사, 고무라카미 천황이 측근을 거느린 채 탈출하고 오미 하치만은 함락되었다(하치만 전투).
이러한 사태에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부자는 3월까지 간노 연호의 부활을 선언했고, 이로써 쇼헤이 일통은 4개월 만에 와해되었다.
4. 간노의 소란과 왜구
1350년은 한국에서는 고려 충정왕 2년으로 간지는 경인년에 해당한다. 이 해 2월 왜구가 고려 남부의 고성, 죽림, 거제 등지를 침공하였다.[20] ‘경인년 왜구’라 불리며 이후 고려는 물론 중국 해안까지 휩쓸었던 왜구의 시발점이 된 이들의 배후에 대해, 한국의 이영은 당시 고려 조정으로부터 왜구의 본거지로 지목되고 있던 쓰시마섬의 슈고다이 소 쓰네시게를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다자이후의 슈고 쇼니 요리히사가 이 '경인년 왜구'의 배후 세력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영에 따르면 1349년 9월에 쇼군 타카우지의 서자이자 다다요시의 양자로써 다다후유가 규슈로 들어와 세력을 넓혀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규슈 지역을 통솔해왔던 쇼니 씨와 충돌하게 되었고, 쇼니 요리히사는 아시카가 다다후유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서 병량미 확보를 위한 교두보가 절실하던 차에 다자이후 휘하에 있던 쓰시마 소 씨를 통해, 병량미 확보를 위해 고려 해안의 조운선을 노린 것이 경인년 왜구의 정체였다는 것이다.
《고려사》를 비롯한 한국의 사료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한반도 연안을 거의 휩쓸고 중국 대륙까지 침공해 약탈을 감행했던 왜구가 준동한 시발점을 경인년 왜구로 잡고 있으며, 거듭된 왜구의 침공은 고려의 국력을 저하시켜 종래에는 이들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세력을 키운 신흥 무인 세력의 일원인 이성계에 의한 왕조 교체로까지 이어졌다.
5. 영향
간노의 소란은 무로마치 막부, 남조, 북조, 그리고 무장 세력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 남조의 부활: 멸망 직전이었던 남조는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항복으로 기사회생하여 남북조 대립이 장기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352년 닛타 요시무네를 중심으로 한 천황파의 가마쿠라 공격과 1353년 야마나 도키우지 등이 가담한 교토 공격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2]
- 북조의 위기: 남조에 항복한 다카우지가 황위 계승을 남조에 일임하면서 북조의 정통성은 약화되었다. 고곤 상황, 소코 상황, 나오히토 친왕이 남조에 억류되고, 삼종신기마저 빼앗기면서 북조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코기몬인이 치천의 군 역할을 대행하고, 고고곤 천황이 즉위하면서 북조와 막부는 부활했지만, 이는 훗날 남조에 정통성을 인정하는 원인이 되어 막부와 북조의 권위를 실추시켰다.[4]
- 무장 세력 간 대립 심화: 다다요시파와 다카우지파로 나뉜 무장 세력 간의 대립은 슈고 다이묘를 중심으로 더욱 심화되었다.[9]
5. 1.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 구조 변화
간노의 소란으로 다카우지와 다다요시로 나뉘어 있던 무가의 권력은 쇼군 다카우지와 그의 적자 요시아키라에게로 일원화되었고, 쇼군의 친재권(親裁權)이 강화되었다.[9] 다다요시가 목표로 했던 ‘가마쿠라 막부 정치 체제 계승’이라는 노선은 껍데기로 전락했고, 모로나오가 추진하던 쇼군의 명령 및 그 실시를 명하는 집사(執事)의 시행장(施行狀) ・ 봉서(奉書) 발급에 의한 상의하달(上意下達)이 행해져 무로마치 막부의 지휘 계통이 확립되었다.[9] 그 뒤 쇼군을 이어받은 요시아키라에 의해서 집사가 폐지되고 다시금 쇼군의 친재권 강화를 노렸으나 요시아키라가 요절하면서 좌절되었다.[9] 요시아키라의 뒤를 이은 3대 쇼군 요시미쓰를 보좌하기 위해 집사에 히키쓰케노도닌(引付頭人) 직권이 흡수된 새로운 직위인 간레이(管領)가 성립되기에 이른다.[9]5. 2. 남북조 대립의 장기화
간노의 소란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아들 요시아키라에게 집중되었고, 쇼군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다다요시가 추구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 체제 계승은 유명무실해졌고, 모로나오가 추진했던 쇼군의 명령과 집행을 담당하는 집사의 시행장과 봉서 발급을 통한 상의하달 방식이 확립되어 무로마치 막부의 지휘 체계가 갖춰졌다. 이후 쇼군직을 계승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집사를 폐지하고 쇼군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려 했으나, 요시아키라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좌절되었다. 요시아키라의 뒤를 이은 3대 쇼군 요시미쓰를 보좌하기 위해 집사의 권한을 흡수한 새로운 직책인 간레이(管領)가 설치되었다.[1]한편, 모로나오에 의해 요시노로 쫓겨나 멸망 직전에 놓였던 남조 정권은 다다요시와 다카요시가 잇따라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겨우 위기를 넘겼고, 이는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1]
북조 내부에서는 고코곤, 고엔유, 고코마쓰, 쇼코 등 4대에 걸쳐 고코곤 계통이 황위를 계승했지만, 스코 상황의 자손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세습친왕가인 후시미노미야 가문으로 존속하면서 북조 내부에서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두 계통의 대립이 발생했다. 결국 고코곤 계통은 쇼코 천황 대에서 끊어졌고, 후남조(後南朝)를 견제하기 위해 후시미노미야 가문에서 고하나조노 천황(後花園天皇, 스코 천황의 증손)을 맞아들이면서 이후 일본의 황위는 후시미노미야 가문에서 계승되는 것으로 확립되었다.[1]
다다요시를 따르던 무장들은 다카우지를 따르던 무장들과 파벌 대립을 일으켰고,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를 중심으로 하는 두 파벌의 대립은 요시아키라 말년에 더욱 심화되었다.[1]
간노의 소란은 남조의 항전 의지를 되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352년, 가마쿠라의 다카우지를 공격하려던 천황파의 공세는 이전 다다요시 지지자들의 대거 합류로 가능해졌으며, 이들은 천황파 지도자 닛타 요시무네를 지지했다. 1353년 교토에 대한 천황파의 공세는 슈고 영주 야마나 도키우지의 이탈로 가능했다. 다다요시의 양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는 1353년과 1354년 교토를 향한 천황파 공세에서 남조 서부 군대를 이끌었다.[2]
간노의 소란이 끝나면서 아시카가 형제 간의 권력 분점은 사라지고 모든 권력이 다카우지의 손에 집중되면서 그의 지위가 강화되었고, 이는 초기 무로마치 막부 전체의 지위를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2]
1350년, 북조는 연호를 "조와"에서 "간오"로 변경했다. 각지에서 남조 측 무가들이 아시카가 다다후유를 옹립하여 거병했고, 다카우지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군했다.[3]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항복했을 때 남조가 요구한 조건 중에는 황위를 남조에 맡긴다는 항목이 있었기 때문에 북조의 황위 정통성은 약화되었다. 교토를 탈환했지만 치천의 군이었던 고곤 상황, 퇴위한 소코 상황,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은 여전히 남조에 있었고, 고다이고 천황이 위조품이라고 주장했던 북조의 삼종신기까지 남조에 넘어가면서 북조는 치천, 천황, 황태자, 신기가 부재한 상황에 빠졌다.[4]
이러한 상황을 우려한 니조 요시키 등은 칸슈지 츠네아키나 다카우지와 상의하여 고곤과 고묘의 생모인 코기몬인에게 치천의 군이 될 것을 요청하여 수락받았다. 코기몬인이 전국 조선을 행하게 되었고, 소코 상황의 동생인 이야히토가 고고곤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북조와 막부, 정이대장군직이 부활했다. 북조는 쇼헤이 잇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연호를 간오에서 분와로 변경했다.[4]
요시키는 신기 없는 천황 즉위에 주저하는 이들에게 "다카우지가 검이 되고, 요시키가 옥새가 될 것이다. 어찌 불가하겠는가"라고 호통쳤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이 고토바 천황을 즉위시킨 예처럼, 즉위에 신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치천의 조서를 통해 즉위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남조 측이 치천을 포함한 황족을 납치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지만, 북조 측은 여원을 치천으로 삼는 고육지책으로 위기를 극복했다.[4]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쇼헤이 잇토와 함께 훗날 남조에 황통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막부와 북조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4]
규슈에서는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세력을 떨쳤다. 다카우지는 잇시키 노리우지를 규슈 탐대로 남겨두었지만, 노리우지는 현지 수호층과 심하게 대립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아들 가네나가 친왕을 정서 대장군으로 파견하여 기쿠치 다케미쓰의 지휘 아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다다후유는 규슈에 도착하자마자 문서를 발급하여 새로운 주군 아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다카우지는 잇시키파 수호에게 다다후유 토벌령을 내렸지만, 다다후유는 다카우지의 친자라는 점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다다후유는 "다카우지의 친자인 자신이 역적 모로나오를 토벌하기 위해 규슈에서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지지를 얻었다.[5]
쇼니 요리나오는 노리우지를 격파하기 위해 다다후유와 연합하여 1350년에 노리우지를 격파하고 하카타를 탈환했다. 그러나 1352년에 아시카가 다카요시가 사망하면서 다다후유의 세력은 급격히 붕괴되었고, 요리나오만이 끝까지 다다후유를 지지했지만 결국 다다후유는 규슈에서 도망쳤다.[5]
다다후유는 규슈 통치보다는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를 살해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주고쿠 지방에 대한 정치 공작을 활발하게 펼쳤고, 다다후유파가 규슈에서 붕괴된 후에도 주고쿠 지방, 특히 나가토와 이와미에서는 세력을 유지했다.[5]
1354년, 모모이 나오쓰네, 야마나 도키우지, 오우치 히로요 등 옛 다카요시파 무장들을 규합한 다다후유는 이와미에서 교토로 진격했다. 1355년에는 남조와 결탁하여 교토를 탈환했지만, 간난 전투에서 야마나 세력이 사사키 도요, 아카마쓰 노리스케를 지휘하는 요시아키라에게 격파되어 붕괴했다. 다다후유는 도지(東寺)를 거점으로 저항했지만, 다카우지가 직접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격파되어 패주했다. 다카우지는 도지의 본진에 들어가 직접 수급을 확인하며 다다후유를 죽였는지 확인했고, 이는 다카우지의 다다후유에 대한 증오심을 보여준다.[5]
다다후유 세력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다다후유는 이후 20년 이상 은둔 생활을 했으며, 소식은 불분명하다. 오우치 히로요와 야마나 도키우지는 1363년에 막부에 귀순했다.[5]
다카우지는 이 전투에서 입은 화살 상처가 원인이 되어 3년 후인 1358년에 사망했다.[5]
5. 3. 북조 내부의 왕통 대립
다카우지가 남조에 항복했을 때 남조가 요구했던 조건 중에는 '남조 왕통이 천황의 자리를 잇게 한다'는 것도 있었고, 이는 북조 왕통의 정통성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교토를 되찾기는 했지만 치천의 군이었던 고곤인, 막 퇴위한 직후였던 스코 상황, 태자 다다히토 친왕까지 모두 여전히 남조에 붙들려 있는 상태였고, 나아가 고다이고 천황이 '가짜'라고 주장했던 북조의 삼종신기까지 남조가 접수하게 된 상태였다. 북조는 치천의 군(인세이를 행하는 상황)도 천황도 태자도 삼종신기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 최악의 사태에 빠져 버렸다. 또한 무가로서도 앞서 다카우지가 세이이타이쇼군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에 정권 자체가 법적으로 존립 근거를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어명(인젠)이라는 형태로 정치적인 재가를 내려 활동의 명분을 제공해 줄 상왕(치천의 군)도 국왕(천황)도 없는 상태가 이어지다가는 교토의 여러 세력(구게와 무가, 슈고) 등의 정치 집행이 모조리 지체될 수 있었다. 막부와 북조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사태를 우려한 사사키 도요나 전임 관백 니조 요시모토 등은 간주지 쓰네아키나 다카우지와 서로 계책을 마련해서 고곤 천황・고묘 천황 두 천황의 생모인 고기몬인에게 치천의 군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부단한 절충 끝에 겨우 수락하였다. 고기몬인이 전국조선(伝国詔宣)을 행하게 되고 스코 천황의 동생인 이야히토가 8월 17일 천황이 되어 9월 25일에 고코곤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9월 27일에 북조는 쇼헤이 일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종래의 간노에서 연호를 바꾸어 '''분나(文和) 원년'''으로 하였다.
천황이 삼종신기 없이 즉위하는 것에 대해 당시 과거에 고시라카와인이 고토바 천황을 즉위시킬 때의 전례도 있었으므로 즉위에 신기가 있어야 한다는 필수조건은 없었고, 치천의 군으로써 전국조선에 의해 즉위가 가능하다는 관념도 존재하고는 있었다. 남조측이 치천을 포함한 북조의 왕족들을 납치해 간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데, 북조측은 이러한 맹점을 뇨인(女院), 즉 왕대비를 치천으로 세운다는 고육지책으로 돌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쇼헤이라는 연호를 쓰던 시기 전반과 맞물려서 나중에 북조가 아닌 남조에 '정통성'이 인정되는 한 원인이 되었으며, 막부와 북조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5. 4. 무장 세력 간의 대립 심화
간노의 소란 이후,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따르던 무장들과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일관되게 따르던 무장들 사이에 파벌 대립이 발생했다. 이러한 파벌 대립은 슈고 다이묘를 중심으로 하는 두 세력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만년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9]초기 무로마치 막부 정권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형제가 각각 다른 관할권을 가지는 이원적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다카우지는 가신단을 통솔하고 포상을 담당했으며, 다다요시는 사법 기능을 관리했다.[10] 그러나 정책 차이로 인해 형제간 갈등이 발생했고, 이는 정권의 분열로 이어졌다.[15]
특히 다카우지가 가신들에게 슈고 직을 임명하고 쇼엔 장원을 분할하여 봉토로 주는 정책은 다다요시의 반발을 샀다. 다다요시는 겐무식목을 통해 이러한 정책에 반대했으며, 장원 토지 분할에도 반대했다.[15] 이러한 정책 차이는 결국 무장 세력 간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5. 5. 수호 권력의 확대
간노의 소란으로 다카우지와 다다요시로 나뉘어 있던 무가의 권력은 쇼군 다카우지와 그의 아들 요시아키라에게로 일원화되었고, 쇼군의 친재권이 강화되었다.[9] 다다요시가 목표로 했던 ‘가마쿠라 막부 정치 체제 계승’이라는 노선은 유명무실해졌고, 모로나오가 추진하던 쇼군의 명령 및 그 실시를 명하는 집사의 시행장 ・ 봉서 발급에 의한 상의하달(上意下達)이 행해져 무로마치 막부의 지휘 계통이 확립되었다. 그 뒤 쇼군을 이어받은 요시아키라에 의해 집사가 폐지되고 다시금 쇼군의 친재권 강화를 노렸으나 요시아키라가 요절하면서 좌절되었다. 요시아키라의 뒤를 이은 3대 쇼군 요시미쓰를 보좌하기 위해 히키쓰케노도닌(引付頭人) 직권이 흡수된 새로운 직위인 간레이가 성립되기에 이른다.[13]한편 다다요시를 따랐던 무장들도 일관되게 다카우지를 따랐던 무장들과 파벌 대립을 일으켰고, 슈고 다이묘를 세력의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파벌이 맞서게 되었다. 요시아키라 만년에는 이러한 대립이 현저히 드러났다.[14]
참조
[1]
웹사이트
Weapons & Fighting Techniques Of The Samurai Warrior 1200-1877 AD
http://shogun-yashik[...]
2009-06-24
[2]
서적
Japan encyclopedia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4]
웹사이트
Ashikaga-Tadayoshi
http://www.britannic[...]
2009-08-11
[5]
문서
[6]
문서
[7]
서적
Lessons from History: The Tokushi Yoron
[8]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간행물
高氏・上杉氏の確執をめぐって
千葉史学
[17]
간행물
高氏・上杉氏の確執をめぐって
[18]
문서
[19]
문서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시
[20]
문서
고려사 권제37 세가제37 충정왕 2년 2월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