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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 기요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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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마쓰 기요카도는 사쓰마 번의 가로이자 메이지 유신의 공신으로, 1835년에 태어나 1870년에 사망했다.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와 교류하며 삿초 동맹을 추진하는 등 막부 말 혼란기에 정치적, 외교적으로 활약했다. 특히, 영국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해군력 강화에 힘썼으며, 메이지 유신 후에는 정부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관용적인 성품과 뛰어난 언변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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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 기요카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마쓰 기요카도 (다테와키)
고마쓰 기요카도 (다테와키)
이름고마쓰 기요카도
일본어 이름小松 清廉 (こまつ きよかど)
이명고마쓰 다테와키 (小松帯刀)
기모쓰키 가네타케 (肝付 兼戈)
가명 (통칭)쇼고로 (尚五郎), 다테와키 (帯刀)
간란 (観瀾), 고세쓰사이 (香雪齋)
출생덴포 6년 음력 10월 14일 (1835년 12월 3일), 가고시마, 사쓰마 번, 일본
사망메이지 3년 음력 7월 20일 (1870년 8월 16일), 가고시마, 일본
묘소네지메・고마쓰 가문 묘소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히요시초 요시토시)
사인병사
직업가로, 사쓰마 번
주군시마즈 나리아키라
시마즈 다다요시
메이지 천황
씨족기모쓰키 씨 (도모 씨) → 고마쓰 씨 (네지메 씨 적류)
가족 관계
아버지기모쓰키 가네요시
어머니시마즈 히사쓰라 (마타자에몬)의 딸
형제자매기모쓰키 가네후루
기모쓰키 가네쓰구
기모쓰키 가네유키
고마쓰 기요카도
기모쓰키 가네후미
기모쓰키 가네스케
기모쓰키 가네아이
배우자정실: 고마쓰 지카
측실: 미키 코토
자녀기요나오
스미
관직 및 작위
관위증 종4위, 겐바노카미
봉록1,700석
기타 정보
시대에도 시대 막부 말기 - 메이지 시대 초기
개명기모쓰키 가네타케 → 고마쓰 기요카도

2. 생애

고마쓰 다테와키는 사쓰마 번의 고위 가신인 기이레의 기모쓰키 가네요시(5,500석)의 셋째 아들(기모쓰키 가네시게)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고마쓰 기요미치에게 입양되어 고마쓰 오치카와 결혼했으며, 1856년에 가문을 상속받아 고마쓰 기요카도(다테와키)가 되었다.

1862년 사쓰마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의 가로가 되어 오쿠보 도시미치, 사카모토 료마 등 여러 인물과 교류하며 막말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신정부의 관료로 활동했다.[4]

1870년 병으로 사망했으며, 죽기 전 아들 고마쓰 기요나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의 묘는 현재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에 있다.

2. 1. 소년기

덴포 6년(1835년) 10월 14일, 사쓰마국 가고시마성 아래 야마시타정의 기이레 저택에서 기이레 영주 기모쓰키 가네요시(5,500석)의 아들로 태어났다[6]. 공식 기록상으로는 셋째 아들이지만, 실제 계도에 따르면 넷째 아들이었다[7]. 둘째 형인 가네쓰구가 3세(만 1세)에 일찍 세상을 떠나 셋째 아들처럼 자랐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시마즈 히사쓰라(또는 사에몬)의 딸이다[8].

부모는 둘째 형 요노스케를 더 아꼈고, 유모 역시 성격이 경솔하여 어린 시절 부모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한다[9]. 이러한 환경이 오히려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0].

13, 14세 무렵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한학자 요코야마 야스나리 밑에서 유학을 공부했다[10]. 하지만 타고난 허약한 체질에 밤낮없이 학문에 몰두한 탓에 17세 무렵부터는 병으로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아졌다[10]. 그럼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온천 요양을 가서도 다양한 지역과 신분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식과 생각을 넓혔다고 한다[10].

그 외에도 가도를 핫타 도모키에게 배워 칸란(観瀾), 쿄세쓰사이(香雪齋)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11]. 병약한 몸이었지만 무술 수련에도 힘써, 엔부칸에서 지겐류를 익혔다[11].

2. 2. 출사

안세이 2년(1855년) 정월, 21세의 나이로 오쿠고쇼(奥小姓) 및 킨쥬반(近習番) 직책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5월에는 에도 근무를 명받았다[12]. 그러나 에도에 머무른 지 불과 2개월 만에 귀국 명령을 받아 같은 해 10월 8일 가고시마로 돌아왔다[13]. 돌아오는 여정 중에 쓴 여행 일기에는 그가 지은 노래 여러 편이 남아 있다[14].

안세이 3년(1856년), 기리 영주 고마쓰 기요미치(2,600석)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후 미야노하라 카즈에의 양녀였던 기요미치의 여동생 치카(센가)와 결혼했다[15]. 안세이 5년(1858년) 7월,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사망하고 시마즈 타다요시가 새로운 번주가 되자, 기요카도는 당번두(当番頭) 겸 주자반(奏者番)에 임명되었다. 그는 슈세이칸 사업의 관리와 화폐 주조 업무를 담당했다[16]. 이후 만엔 원년(1860년)에는 이세 가가쿠, 기타고 사쿠자에몬 등과 함께 벤텐하토바(弁天波止場, 벤텐 부두) 건설 책임을 맡았다[16].

1862년에는 사쓰마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를 섬기는 가로가 되었다.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이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의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사카모토 료마를 보호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3. 에도 막부 말기 동란

분큐 원년(1861년), 히라사 영주 혼고 히사노부와 함께 나가사키 출장을 명받아 1월 17일 증기선 '덴요마루'(天佑丸)를 타고 출발했다.[17] 나가사키에서는 통사를 고용하여 네덜란드 군함에 승선해 군함 조작, 파열탄, 수뢰, 포술 등을 배우고, 야기 하루에츠 (八木玄悦), 이시카와 세이류 (石河正龍) 등과 함께 연구했다.[18] 같은 해 6월 가고시마로 돌아온 후, 이시카와는 타다요시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기로 수뢰를 폭발시키는 시연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공적으로 고마쓰는 같은 해 5월 18일 시마즈 히사미쓰의 측근(소바야쿠, 側役)으로 발탁되었다.[19] 10월, 대규모 인사 이동으로 히사미쓰 체제가 확립되자 어개혁 어내용가(御改革御内用掛)에 임명되어 번정 개혁에 착수했으며,[20] 오쿠보 도시미치가 그의 휘하에 있었다.

분큐 2년(1862년)에는 히사미쓰의 상락을 수행했고, 귀국 후 가로직에 올랐다.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은 하급 관리들의 공식적인 후원자였으며, 사카모토 료마를 보호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사쓰에이 전쟁에서는 직접 연구한 수뢰를 가고시마만에 설치하는 등 방어에 힘썼다. 전쟁 후에는 슈세이칸을 재건하고 특히 증기선 기계 철공소 설치에 힘쓰는 한편, 교토에 머물며 주로 조정, 에도 막부, 여러 번과의 연락 및 교섭 역할을 맡았고 참예회의 등에도 참석했다. 또한 어군역(御軍役), 고쇼카게(御勝手方), 증기선 담당, 어개혁 어내용 담당, 류큐 산물 담당, 당물 단속(唐物取締) 담당 등을 겸임하며 번정을 이끌었고, 오쿠보 도시미치, 마치다 히사나리와 함께 양학교 '카이세이죠(開成所)'를 설립했다.

고마쓰 다테와키 거우지비(교토시 가미교구)


금문의 변(1864년) 당시에는 막부의 출병 요청에 소극적이었으나, 칙명이 내려지자 사쓰마 번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여 막부 측 승리에 기여했다. 전쟁 후에는 조슈번에게서 빼앗은 군량미를 전쟁으로 고통받는 교토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같은 해 제1차 조슈 정벌에서는 조슈 번의 사죄와 항복을 이끌어내는 데 힘썼다.

한때 적대했던 조슈번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여, 조슈 번이 군함 '유니온호' 등 무기를 구매하도록 알선했다.[5] 교토에 머무는 동안 도사번탈번낭인 사카모토 료마와 가까워졌다. 가메야마샤추(후의 해원대) 설립을 지원하고 료마의 아내 오료를 돌봐주기도 했다. '유니온 호'의 수입과 운용 등 실무는 료마와 곤도 초지로 등 도사 번 낭인들이 담당했다.[5] 나아가 고마쓰는 조슈 번의 이노우에 카오루와 이토 히로부미를 나가사키의 사쓰마 번 저택에 숨겨주고 글로버와 만나게 주선했으며, 이후 이노우에와 함께 가고시마로 가서 삿쵸 동맹 교섭을 진행했다. 또한 삿쵸 동맹에서의 밀약이나 키도 타카요시(가쓰라 고고로)가 체류한 곳도, 교토에 있는 기요카도의 저택[21]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저택은 고노에 가 별저 "어화밭"이라고 통칭되며, 그 규모와 내용, 구체적인 소재지가 2016년 5월 교토와 가고시마에서의 잇따른 사료 발견에 의해 확정되었다.

2. 4. 메이지 유신

사쓰에이 전쟁 이후 영국과 사쓰마의 우호 관계 구축에 힘썼다. 고다이 도모아쓰 등을 비밀리에 영국으로 유학 보냈으며,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를 사쓰마에 초청하여 시마즈 히사미쓰와 만나게 주선했다. 효고가 개항되자, 야마토 무역 컴퍼니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1866년의 제2차 조슈 정벌에는 반대 입장을 보였다. 게이오 3년(1867년)에는 사쓰토 동맹과 사쓰토 밀약, 사후 회의 등 여러 번과의 교섭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토막의 밀지가 내려졌을 때,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서명하여 메이지 유신을 향한 의지를 보였다. 대정봉환이 발표될 당시에는 사쓰마 번 대표로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쇼군 직위 사임을 건의했다. 또한 섭정 니조 나리유키에게 대정봉환 상주를 수리하도록 압박하여 막부 체제 종식에 기여했다.

사이고, 오쿠보와 함께 사쓰마로 돌아가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에게 병력을 이끌고 상락할 것을 주장했다. 상락 수행 명령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메이지 2년(1869년) 9월, 메이지 유신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상전록 1,000석을 받았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총재국 고문, 징사 참여 겸 외국 사무 담당, 외국관 부지관사, 겐바노카미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신정부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4] 프랑스에도 막부 시절의 빚을 신정부가 갚지 않으면 요코스카 조병소를 압류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오쿠마 시게노부와 협력하여 영국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프랑스에 변제함으로써 외교적 위기를 넘겼다. 이외에도 사카이 사건, 우라가미 4차 붕괴 등 초기 메이지 정부가 직면한 외교 문제 해결에 나섰다. 또한, 글라버, 고다이 도모아쓰와 함께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독 시설을 갖춘 고스게 수선장을 건설하여 일본 근대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네지메 코마쓰가 역대 묘소에 있는 코마쓰 키요카도의 묘

2. 5. 병과 최후

메이지 2년 (1869년) 1월 11일, 오쿠보에게 판적봉환 신청을 재촉하였고, 1월 20일에는 요시이 도모자네와 함께 가고시마로 돌아왔다. 같은 해 1월 8일자로 오쿠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무렵 네덜란드인 의사 안토니우스 보드윈의 진찰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마쓰는 만엔 원년(1860년) 무렵부터 다리 통증을 앓아 입욕 치료를 자주 받았으며, 메이지 원년(1868년) 10월 8일에는 가슴 통증, 같은 해 12월 8일에는 폐병 진단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 이 증상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중순에는 왼쪽 하복부에 종양이 발견되었는데, 보드윈은 수술로 절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869년 2월 1일 다시 번으로 돌아왔고, 3월 10일에는 나가사키에서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협의했다. 2월 4일에는 병을 이유로 영지와 가격(家格) 반납을 청원했고, 5월 15일 관리 공선에 의해 퇴직했다. 판적봉환 과정에서는 시마즈 히사미쓰를 설득하고 스스로 영지를 반납하는 모범을 보였다. 8월 17일 영지 반납이 허가되어 영세록 300석을 받았고, 9월 26일에는 상전록 1000석을 추가로 받았다. 9월에는 하복부 종양이 악화되어 오사카시 니시구 다치우리보리에 있는 사쓰마 번의 거처로 옮겨 요양했다.

메이지 3년 (1870년) 1월, 오쿠보기도 다카요시 등이 문병을 왔을 때 고마쓰는 이미 유언장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죽기 전 교토에 있는 측실 미키 고토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 고마쓰 기요나오를 본처 오치카에게 맡겨 고마쓰 가문의 후계자로 키우도록 당부했다.

같은 해 7월 20일, 오사카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36세였으며, 임종은 측실 미키 고토가 지켜보았다. 장례식은 다음 날인 7월 21일, 오사카시 덴노지구 유히가오카에서 신토식으로 거행되었다. 메이지 9년(1876년), 유골은 고마쓰 가문의 옛 영지였던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히요시초 기리의 엔린지 폐사 터에 마련된 네지메·고마쓰 가문 역대 묘소로 이장되었다. 이 묘소에는 본처 오치카와 측실 미키 고토도 함께 묻혔다.

3. 인물


  • 애처가로, 신혼 시절인 안세이 3년 음력 4월 23일부터 음력 5월 6일 (1856년 5월 26일 ~ 6월 8일)까지 당시에는 드물었던 신혼여행으로 기리시마의 에이노오 온천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여행에는 아내 고마쓰 지카의 아버지도 동행했다. 일본 최초로 신혼여행을 갔다고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오료 부부가 데라다야 사건 직후인 게이오 2년(1866년)에 신혼여행을 떠난 것보다 실제로는 1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22]
  • 관용적이고 말을 잘하며 명쾌한 인품으로 인망이 두터워 젊은 나이에 사쓰마번의 중책에 발탁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처음 만났을 때, 사이고는 신분상으로는 고마쓰보다 훨씬 위였지만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그의 도량을 시험해보고자 일부러 방에 누워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고마쓰는 이를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사이고를 위해 베개를 가져오라고 시종에게 시켰고, 이 말을 들은 사이고는 즉시 자세를 바로잡고 고마쓰에게 사과하며 충성을 맹세했다고 전해진다[23]메이지 유신 이후 수립된 신정부에서도 장래가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 사카모토 료마가 구상한 신정부 인사 명단에서는 사이고, 오쿠보, 가쓰라 고고로 등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이름이 올랐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승마의 달인이어서 밤에 초롱을 들고 말을 타도 초롱의 불빛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세노 토미키치 저술 인용)
  • 측실인 고토 미키는 고마쓰 기요카도(타테와키) 사후, 장남 고마쓰 기요나오를 가고시마의 본처 고마쓰 지카에게 맡기고, 고마쓰와 친분이 두터웠던 고다이 도모아쓰의 저택에서 장녀 스미와 함께 살았다.
  • 다이쇼 11년(1922년), 당시 철도대신은 고마쓰 기요카도의 자손인 백작 고마쓰 시게하루에게 시나가와역의 매점 영업권을 허가했다. 이는 고마쓰 기요카도가 게이오 3년(1867년)에 철도 부설 건의서를 제출한 공적을 고려한 조치였다. 이로 인해 고마쓰 가문은 "주식회사 토키와켄"이라는 상호로 성선 (현: JR) 시나가와역에서 역 도시락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2010년 시나가와역 개장 때 역 빌딩 루미네 더 키친으로 이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점했고, 역 소바집이나 도시락 판매 등은 계속 영업하고 있다.

4. 평가

오쿠마 시게노부는 고마쓰 기요카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풍채가 당당하고 변설이 상쾌하며, 약간의 학식이 있고, 지기(志気, 의지와 기개)가 비루하지 않다. 여기에 더하여, 사쓰마의 명문으로서 위망(위엄과 명망)이 매우 높고, 외국의 부지관사(외교관)로 가장 적임인 사람이다."[24] 또한 "용모와 풍채가 모두 훌륭하고 기품을 갖춘 사람은 고마쓰 기요카도였다. 이 사람은 사쓰마의 명문 가로였다. 신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25]고 덧붙였다.
  • 오쿠마는 고마쓰를 뛰어난 웅변가로 기억하며, "대체로 사쓰마 사람들은 말이 서투른 편인데, 고마쓰만은 예외로 훌륭한 변설가였다"고 말했다. 그는 고마쓰를 문명적이고 진보적인 인물로 평가하며, 오쿠보와는 견해가 달랐다고 언급했다. 고마쓰는 관인대도했기 때문에 사쓰마 번 사람뿐 아니라 도사 등 다른 번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특히 조슈의 이토이노우에가 병기 구입에 어려움을 겪을 때 고마쓰의 도움으로 은밀히 무기를 구매할 수 있었다. 고마쓰는 일본이 섬나라이므로 영국을 본받아 해군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쿠보, 기도와는 사이가 좋았으며, 오쿠마 자신도 고마쓰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고마쓰는 죽기 전 오쿠마를 후임으로 추천했고, 이로 인해 오쿠마는 외무경이 되었다. 오쿠마는 고마쓰에게는 편협한 번벌 의식이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마쓰가 유신 초인 메이지 원년(1868년) 10월에 일찍 사망한 것을 아쉬워하며, 고마쓰가 좋은 가문 출신에 재산도 있었고, 막부의 감시를 피해 나가사키를 오가며 사쓰마 번을 위해 무기 구입 등에 힘썼다고 평가했다.[26]


영국 외교관 어니스트 사토는 고마쓰를 "내가 아는 일본인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또한 "가로의 가문이지만, 그런 계급의 인간답지 않게, 정치적 재능이 있고, 태도가 남보다 뛰어나며, 게다가 우정이 두터워 그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뛰어났다."[27]고 평가하며 그의 인품과 능력을 높이 샀다.

5. 가계

본성헤이시이다. (타이라노 고레모리의 사위가 되면서 타케베씨에서 개성하였다.) 가계는 네지메씨의 적류에 해당하며, 에도 시대 중기에 네지메씨 직계인 고마쓰 기요타카가 고마쓰씨로 성을 바꾸었다. 가문의 문장은 '안은 귀신 갓의 잎'(抱き鬼梶の葉)이다. 정식 성명은 타이라노 아손 고마쓰 타테와키 기요카도(平朝臣小松帯刀清廉)이다.

고마쓰 기요카도는 원래 사쓰마번의 고위 가신인 키이레(喜入)의 키모츠키 카네요시(肝付兼善, 5500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키모츠키 카네시게(肝付兼戈)였다. 젊은 시절 고마쓰 기요미치의 양자로 들어가 그의 딸 고마쓰 치카(小松千賀, 1828년생)와 결혼했고, 입양 직후인 안세이 3년(1856년)에 가문을 상속받아 고마쓰 기요카도(小松清廉), 통칭 타테와키(帯刀)로 개명했다.

기요카도는 게이오 2년(1866년)에 정실 부인 치카의 조카인 마치다 신시로 사네타네(마치다 히사나리의 동생, 사쓰마번 제1차 영국 유학생)를 양자로 삼아 고마쓰 기요쓰구(小松清緝)로 개명하게 했다.[28]

기요카도에게는 정실 치카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으나, 측실 미키 코토(三木琴, 1848년생)와의 사이에서 장남 고마쓰 기요나오(小松清直)와 딸 스미(スミ, 1870년생)를 두었다. 기요카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0년 가고시마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교토에 있는 측실 코토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 기요나오를 정실 치카에게 맡겨 고마쓰 가문의 후계자로 키우도록 당부했다.

기요카도 사후, 1870년(메이지 3년) 10월에는 양자 기요쓰구가 가독을 계승했다. 그러나 1872년(메이지 5년) 9월 25일(양력 10월 27일)에 기요쓰구는 기요카도의 장남이자 정실 치카가 양육하고 있던 기요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기요나오는 30세에 은퇴하였고, 그의 적자인 고마쓰 타테와키(小松帯刀, 1884년 ~ 1905년)는 할아버지 기요카도의 공적으로 화족이 되어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1905년(메이지 38년) 3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가독은 기요나오의 차남인 고마쓰 시게하루(小松重春, 1886년 ~ 1925년)가 상속받았다. 시게하루는 게이코쿠 은행(帝国銀行) 총재를 맡는 등 경제계에서 활동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이에 후작 사이고 주도의 7남인 고마쓰 요리무네(小松従志, 1883년생, 주렵관 겸 주마료 어용계)가 시게하루의 양자로 들어가 가독을 상속했다. 그 후, 요리무네와 그의 아내 치요코(千代子, 1894년생, 야마구치 게이조의 장녀) 사이의 아들인 고마쓰 테루미치(小松輝久, 1913년생)가 작위를 계승(습작)했다.[29] 테루미치의 사위로는 스기야마 야스시(杉山栽)가 있다. 한편, 시게하루의 누나인 하나(ハナ, 1885년 ~ 1974년)는 와키자카씨 14대 당주이자 자작인 와키자카 야스유키(脇坂安之, 1876년 ~ 1939년)의 후처가 되었다.[30][31]

고마쓰 가문의 묘소는 시게하루까지는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히요시초 요시토시(日吉町吉利)에 있는 고마쓰가(네지메・고마쓰씨) 역대 묘소에 안장되었으나, 양자인 요리무네 이후의 묘소는 도쿄에 있다. 기요카도 본인은 가고시마의 고마쓰 가문 사당에 정실 치카와 측실 코토 옆에 묻혔다.

6. 관련 작품


  • '''텔레비전 드라마'''
  • * 용마가 간다 (1968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핫토리 테츠지)
  • * 용마가 간다 (1982년, TV 도쿄 12시간 초 와이드 드라마, 배우: 호리우치 마사미)
  • * 나는 듯이 (1990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오하시 고로)
  • * 도쿠가와 요시노부 (1998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안도 카즈오)
  • * 용마가 간다 (2004년, TV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 배우: 히구치 코지)
  • * 아츠히메 (2008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에이타)
  • * 료마전 (2010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타키토 켄이치)
  • * 세고 돈 (2018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마치다 케이타)

  • '''만화'''
  • * 코믹판 일본의 역사 63 막부 말·유신 인물전 고마쓰 기요카도 (기획·구성·감수: 카쿠 코조, 원작: 세이카 카오루, 작화: 카와노 이치로)
  • * 단 돈 (타이 산코)

참조

[1]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2] 웹사이트 "Nejime-shi" on Harimaya.com http://www2.harimaya[...] 2008-08-15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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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뉴스 【文化の扉】薩摩藩に小松帯刀あり/融和路線 薩長同盟・大政奉還の真の功労者?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0-10-26
[6] 서적 小松帯刀
[7] 서적 鹿児島県史料 旧記雑録拾遺家わけ二 鹿児島県
[8] 서적 小松帯刀
[9] 서적 小松帯刀
[10] 서적 小松帯刀
[11] 서적 小松帯刀
[12] 서적 小松帯刀
[13] 서적 小松帯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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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小松帯刀
[21] 문서 室町通り鞍馬口下る西入森之木町462附近
[22] 뉴스 日本初の新婚旅行は小松帯刀?通説“龍馬”に異論登場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2008-10-16
[23] 방송 その時歴史が動いた NHK 2008-11-19
[24] 서적 大隈重信自叙伝 岩波文庫
[25] 서적 早稲田清話
[26] 서적 早稲田清話
[27] 서적 一外交官の見た明治維新 岩波文庫 1960-09-25
[28] 문서 近世禰寝文書
[29] 서적 現代華族譜要 日本史籍協会
[30] 웹사이트 小松從志 https://jahis.law.na[...] 人事興信録 1928-07
[31] 웹사이트 脇坂子爵家 龍野藩主 https://easthall.blo[...] 直球感想文和館 200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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