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키·나가쿠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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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는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쓰,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가문의 세력 다툼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 확장이 배경이 되었으며, 히데요시는 이누야마 성을 점령하고, 미카와 침공 작전을 펼쳤으나, 이와사키 성 전투, 하쿠산모리 전투, 나가쿠테 전투 등에서 도쿠가와·오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전투는 히데요시의 포위망 붕괴, 도쿠가와 가문의 위상 변화, 덴쇼 대지진 등 정치적, 군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오다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고,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종속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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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키·나가쿠테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분쟁 | 센고쿠 시대 |
시기 | 1584년 |
장소 | 아이치현 고마키시, 나가쿠테 정 일대 |
결과 | 하시바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카쓰의 강화 |
교전 세력 | |
하시바 군 | 하시바 히데요시 휘하 군대 |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
지휘관 | |
하시바 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 오다 노부카쓰 |
병력 규모 | |
하시바 군 | 100,000명 (추정치) |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 30,000명 (추정치) |
피해 규모 | |
하시바 군 | 2,500명 이상 |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 550명 이상 |
전술적/전략적 결과 | |
결과 | 교섭을 통한 정전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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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정보 |
2. 배경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그의 아들 노부타다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훗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기슈 회의(清洲会議)에서 노부타다의 아들 삼법사를 오다 가문의 당주로 삼는 것을 확인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에게서 삼법사를 데려온 뒤,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쓰를 삼법사의 보호자로 옹립하여 주군으로 받들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혼노지의 변 이후 덴쇼 임오의 난(天正壬午の乱)을 통해 오다 정권의 승인 아래 다케다 가문의 옛 영지였던 가이와 시나노를 확보하여 5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1583년 4월, 히데요시는 오미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노부타카를 옹립한 오다 가문의 필두 가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에게 승리했다.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시바타 가쓰이에의 영지였던 에치젠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에게 주어졌고, 셋쓰·오사카의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는 미노를 받았으며, 오사카는 히데요시가 접수했다. 같은 해 겨울,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오사카성(大坂城)에 노부카쓰를 포함한 여러 장수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1583년,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에 의해 안토 성(安土城)에서 쫓겨났고, 이후 노부카쓰와 히데요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가신 쓰가와 요시후유(津川義冬), 오카다 시게타카(岡田重孝), 아사이 나가토키(浅井長時)(타미야마루) 등 세 명의 가로를 회유하려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은 노부카쓰는 1584년 3월 6일 가신 히지카타 유키히사(土方雄久)에게 명하여 히데요시파였던 세 가로를 나가시마 성(長島城)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에게 출병할 것을 결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슈의 자카슈(雑賀衆)·네구라이슈(根来衆)와 시코쿠(四国)의 쵸소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호쿠리쿠(北陸)의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14], 관동(関東)의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등이 노부카쓰·이에야스와 결탁하여 히데요시 포위망을 형성, 히데요시 진영을 압박했다.
2. 1. 혼노지의 변과 오다 가문의 분열

1582년 3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를 멸망시키고(고슈 정벌(甲州征伐)) 상방으로 개선했지만, 같은 해 6월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아들 노부타다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살해당했다(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14]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훗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기슈 회의(清洲会議)에서 노부타다의 아들 삼법사를 오다 가문의 당주로 삼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에게서 삼법사를 데려온 뒤,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쓰를 삼법사의 보호자로 옹립하여 주군으로 받들었다.
한편,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정권의 승인 하에 다케다 가문의 옛 영지였던 가이와 시나노를 확보하여 5개국을 다스렸다(덴쇼 임오의 난(天正壬午の乱)).
1583년 4월, 히데요시는 오미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노부타카를 옹립한 오다 가문의 필두 가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에게 승리했다.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시바타 가쓰이에의 영지였던 에치젠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에게 주어졌고, 셋쓰·오사카의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는 미노를 받았으며, 오사카는 히데요시가 접수했다. 같은 해 겨울,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오사카성(大坂城)에 노부카쓰를 포함한 여러 장수들을 초청했다.
1583년,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에 의해 안토 성(安土城)에서 쫓겨났고, 이후 노부카쓰와 히데요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가신 쓰가와 요시후유(津川義冬), 오카다 시게타카(岡田重孝), 아사이 나가토키(浅井長時)(타미야마루) 등 세 명의 가로를 회유하려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은 노부카쓰는 1584년 3월 6일 가신 히지카타 유키히사(土方雄久)에게 명하여 히데요시파였던 세 가로를 나가시마 성(長島城)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에게 출병할 것을 결단했다.
고마키 전투에서는 키슈의 자카슈(雑賀衆)·네구라이슈(根来衆)와 시코쿠(四国)의 쵸소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호쿠리쿠(北陸)의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 관동(関東)의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등이 노부카쓰·이에야스와 결탁하여 히데요시 포위망을 형성, 히데요시 진영을 압박했다.
2. 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 확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살해당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덴쇼 임오의 난(天正壬午の乱)을 통해 오다 정권의 승인 아래 다케다 가문의 영지였던 가이와 시나노를 확보하여 5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14]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에게 승리하였다. 이후 히데요시는 오사카성(大坂城)을 새로 짓고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를 포함한 여러 장수들을 초청했다.
같은 해,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에 의해 안토 성(安土城)에서 쫓겨났고, 이후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가신 세 명을 회유하려 했으나,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은 노부카쓰는 1584년 3월 6일에 이들을 나가시마 성(長島城)에서 살해했다.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노부카쓰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고마키 전투에서는 자카슈(雑賀衆), 네구라이슈(根来衆), 쵸소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등이 노부카쓰,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히데요시를 압박했다.
2. 3. 히데요시와 노부카쓰의 대립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를 지원하여,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지원한 시바타 가쓰이에를 패퇴시켰다. 전투 승리 후, 히데요시는 그 해 완공한 오사카성에 노부카쓰와 다른 장군들을 초청했다. 이 초청은 모든 이들이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여 히데요시와 노부카쓰의 역할을 바꾸려는 의도였다.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와의 관계를 끊고 오사카성에 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세 가신(쓰가와 요시후유, 오카다 시게타카, 아자이 나가토키)에게 화해를 제안했고, 이는 그들이 모두 히데요시를 지지한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이에 노부카쓰는 세 사람을 의심, 덴쇼 12년 3월 6일(1584년 3월 17일)[3]에 처형했다. 이는 히데요시에게 노부카쓰 공격 명분을 주었고,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다음 날 이에야스가 군대를 파병하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간 전투가 시작되었다.[3]덴쇼 10년(1582년) 3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를 멸망시키고(고슈 정벌(甲州征伐)) 상방으로 개선했지만, 같은 해 6월 노부나가 및 오다 가독자였던 노부타다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살해당한다(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기요스 회의(清洲会議)에서 노부타다의 아들 삼법사를 오다 가 당주로 삼았다. 히데요시는 노부타카에게서 삼법사를 탈취한 후, 노부카쓰를 삼법사의 명대(名代)로 옹립하여 주군으로 받들었다.
한편, 이에야스는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정권 승인 아래 다케다 유령인 가이·시나노를 확보, 5개국을 영유하였다(덴쇼 임오의 난(天正壬午の乱)).
덴쇼 11년(1583년) 4월, 히데요시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노부타카를 옹립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에게 승리했다. 시즈가타케 전투 후, 가쓰이에의 유령 에치젠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에게 주어졌고,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는 미노를, 오사카는 히데요시가 접수, 같은 해 겨울 오사카성(大坂城)에 노부카쓰 등 여러 장수를 초청했다.
덴쇼 11년(1583년)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에 의해 아즈치성에서 퇴거당했고, 이후 둘의 관계는 악화된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 가신 쓰가와 요시후유(津川義冬)·오카다 시게타카(岡田重孝)·아사이 나가토키(浅井長時)(타미야마루)를 회유하려 하지만,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은 노부카쓰는 덴쇼 12년(1584년) 3월 6일 히지카타 유키히사(土方雄久)에게 명하여 친히데요시파 삼가로를 나가시마 성(長島城)에서 살해했다.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노부카쓰 출병을 결단했다.
고마키 전투에서 자카슈·네구라이슈와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14],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등이 노부카쓰·이에야스와 결탁, 히데요시 포위망을 형성하여 히데요시 진영을 압박했다.
2. 4. 히데요시 포위망 형성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를 지원하여,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지원한 시바타 가쓰이에를 패퇴시켰다. 히데요시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해 완공한 오사카성에 노부카쓰와 다른 장군들을 초청했다. 이 초청은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여 히데요시와 노부카쓰의 역할을 바꾸려는 의도였다.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와의 관계를 끊고 오사카성에 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세 가신(쓰가와 요시후유, 오카다 시게타카, 아자이 나가토키)에게 화해를 제안했고, 이들은 히데요시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부카쓰는 세 사람을 의심하여 덴쇼 12년 3월 6일(그레고리력 1584년 3월 17일)[3]에 처형했다. 이 사건은 히데요시에게 노부카쓰를 공격할 명분을 주었고,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다음 날 이에야스가 군대를 파병하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권력을 잡았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타카로부터 오다 히데노부(삼법사)를 탈취한 후, 오다 노부카쓰를 옹립하여 주군으로 받들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덴쇼 임오의 난을 통해 5개국을 영유하게 되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승리하고, 오사카성을 신축하여 노부카쓰를 포함한 여러 장수를 초청했다. 그러나 1583년에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에 의해 안토 성에서 퇴거당했고, 이후 노부카쓰와 히데요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가신 3명을 회유하려 했으나, 1584년 3월 6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은 노부카쓰는 이들을 살해했다.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에게 출병을 결단했다.
고마키 전투에서는 키이국의 자카슈·네구라이슈와 시코쿠의 쵸소가베 모토치카, 호쿠리쿠의 사사 나리마사[14], 간토의 호조 우지마사 등이 노부카쓰·이에야스와 결탁하여 히데요시 포위망을 형성하고, 히데요시 진영을 압박했다.
3. 전투의 전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케다 쓰네오키가 이누야마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이누야마 성으로 향했다.[4] 한편, 모리 나가요시는 히데요시 측에 가담하여 하구로에 진을 쳤다. 이에야스는 사카이 다다쓰구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군사를 주어 하구로로 보냈고, 기습 공격으로 나가요시를 격퇴했다.[5] 이후 이에야스는 이누야마 성을 점령하고 히데요시가 구축한 방어 시설을 완성했다.
이에야스는 소목산성을 점령하고 주변에 보루와 토루를 쌓아 하시바군에 대비했다.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을 출발하여 기후를 거쳐 이누야마에 도착했다. 양측은 최전선에 보루와 토루를 구축하며 대치했고, 소규모 충돌 외에는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히데요시는 이케다 쓰네오키의 제안에 따라 모리 나가요시 등을 주축으로 하는 부대를 미카와 서부로 진격시켰다.[1] 이 부대는 가미스에 성주 등의 안내를 받아 미카와 중입 작전을 개시했다.[1]
이케다 쓰네오키는 이와사키 성(현재 니신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4] 이 과정에서 니와 우지쓰구의 형제인 니와 우지시게를 포함한 많은 수비군이 전사했다.
하시바 히데쓰구의 군대는 백산림(현재의 오와리아사히시, 나가쿠테시)에서 도쿠가와 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되었다. 히데쓰구는 간신히 탈출했으나, 감찰관 키노시타 유키히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전사했다.
호리 히데마사는 히데쓰구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후퇴하여 히가네(桧ヶ根, 나가쿠테시)에서 도쿠가와군을 기다렸으나, 역습을 받고 추격당했다.
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케다 쓰네오키와 모리 나가요시를 격파했다.[9][10] 이이 나오마사는 약 3천 명의 총병을 지휘하여 활약했다.[11] 이 전투에서 나가요시와 쓰네오키가 전사하면서 도쿠가와군이 승리했다.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주력군이 접근하자 철수하여 고마키로 돌아갔다.[11]
혼다 다다카쓰는 탄바국에서 군대를 일으킨 아카이 씨와 협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의 하시바 히데나가는 마쓰가시마성을 열었고, 다키가와 유토시는 하마다성에서 농성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은 동미노 지역을 침공하여 아케치성을 탈환했다. 하시바 군은 카가노이성, 오쿠성, 다케가하나성을 함락시켰다. 히데요시는 기후성을 거쳐 오사카성으로 돌아갔고, 이에야스도 기요스성으로 이동했다.
와카야마에서는 네가이·자사슈와 코가와지 슈토가 히데요시의 부재를 틈타 사카이와 오사카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기슈 정벌). 북관동에서는 호조 우지나오가 이끄는 호조 군과 사타케 요시시게 등이 전투를 벌였다(누마지리 전투). 시코쿠에서는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도가와성을 함락시켰다(제2차 토가와성 전투).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가네가성(蟹江城) 등을 함락시켰으나,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반격으로 성을 탈환당했다(가네가성 전투(蟹江城合戦)). 히데요시는 낙전성으로, 이에야스는 이와쿠라성으로 이동하여 대치했으나, 작은 충돌만 있었다.
3. 1. 이누야마성 점령
덴쇼 12년(1584년) 3월 13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요스 성에 도착했다. 같은 날, 이케다 쓰네오키가 이끄는 오다 가문 가신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에 가담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처음 건설한 이누야마 성을 점령했다.[4] 이 소식을 들은 이에야스는 즉시 이누야마 성으로 향하여 이틀 후에 도착했다.한편,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한 모리 란마루의 형제인 모리 나가요시가 기요스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리 군의 조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사카이 다다쓰구는 모리 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모리 나가요시는 3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5]
3월 16일(4월 26일), 이누야마 성을 지원하기 위해 소집된 병력이 하구로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미 이 계획을 알고 있었고, 같은 날 저녁에 사카이 다다쓰구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하구로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다음 날 새벽, 다다쓰구의 군대는 나가요시를 기습 공격했고, 나가요시의 군대는 겨우 퇴각했다.
18일(4월 28일), 이에야스는 이누야마 성을 점령하고 히데요시가 구축했던 방어 시설을 완성했다.
3. 2. 하구로 전투

덴쇼 12년(1584년) 3월 13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요스 성에 도착했다. 같은 날, 이케다 쓰네오키가 이누야마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야스는 서둘러 이누야마 성으로 향했다.[4] 한편, 모리 나가요시는 히데요시 측에 가담하여 3월 16일 하구로에 진을 쳤다.
이에야스는 이 사실을 알고 3월 16일 저녁, 사카이 다다쓰구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하구로로 보냈다. 다음 날 새벽, 다다쓰구의 군대는 나가요시를 기습 공격했고, 나가요시는 3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망쳤다.[5] 3월 18일, 이에야스는 이누야마 성을 점령하고 히데요시가 구축한 방어 시설을 완성했다.
모리 나가요시는 혼노지의 변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모리 란마루의 형으로, 이케다 쓰네오키의 전공을 부러워하여 자신도 공을 세우고자 하구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구로 전투의 양측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하시바 군 | 도쿠가와 군 |
---|---|
3. 3. 고마키 대치

이에야스는 적의 습격 걱정이 없어지자 3월 18일(음력)에 소목산성을 점령하고, 주변에 보루와 토루를 쌓아 하시바군에 대비했다. 히데요시는 3월 21일(음력)에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오사카성을 출발하여, 3월 25일(음력)에 기후로 진격하고, 3월 27일(음력)에 이누야마에 도착했다.
이에야스가 소목산성에 들어간 후 히데요시가 가쿠타에 도착할 때까지, 도쿠가와 측은 최전선에 우다즈보루, 카니시미즈보루, 덴가쿠보루, 키타토야마성 등을 구축했다. 하시바 측은 최전선에 니쥬보리보루, 이와자키야마보루, 쿠보야마보루, 가미스에성 등을 구축했다. 양측 모두 보루를 쌓고 토루를 건설했기 때문에, 서로 손을 쓸 수 없게 되어 도발이나 소규모 충돌을 제외하면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3. 4. 미카와 침공 작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군대는 1584년 5월 1일 오사카성을 출발, 5월 7일 이누야마성에 도착했고, 5월 14일에는 가쿠덴(현재의 이누야마시)에 도착했다.[1]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마키 성에 입성한 후 가쿠덴에 도착하기까지 몇몇 작은 충돌을 제외하고는 전투를 피했다.[1] 이케다 쓰네오키는 히데요시에게 "이에야스는 지금 고마키야마에 있습니다. 그는 오카자키에 있는 주요 거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우리가 그를 공격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히데요시의 자만을 부추겼다.[1]히데요시는 하구로 전투에서 명성을 회복한 모리 나가요시, 딸의 결혼으로 곤란을 겪었던 이케다 쓰네오키, 호리 히데마사, 그리고 젊은 히데쓰구(당시 17세)의 지원을 받아 미카와로 향하기로 결정했다.[1] 히데쓰구가 이끄는 8,000명의 병력에 호리 히데마사의 3,000명, 모리 나가요시의 3,000명, 쓰네오키의 6,000명이 합류하여 다음 날 미카와로 출발했다.[1] 양군은 고마키 부근에서 대치하며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1]
4월 4일, 이케다 쓰네오키는 히데요시에게 군사를 미카와에 보내 빈틈을 공격하고 각지에 방화하여 위협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마키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계책을 제시했다.[1]
5일 아침, 쓰네오키는 다시 히데요시를 찾아 모리 나가요시와 함께 하가쿠라 전투의 치욕을 씻고 싶다고 말했다.[1]
히데요시는 이를 허락하고 4월 6일 모리 나가요시 등을 주축으로 하는 부대를 미카와 서부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미카와 중입 작전).[1] 이 부대는 가미스에 성주 오치아이씨 등 토호 지사무라이와 고시의 안내를 받아 4월 6일 밤 출발했다.[1]
각 부대의 주요 편제는 다음과 같다.[1]
3. 5. 이와사키성 전투
이와사키 성 전투는 이케다 쓰네오키의 군대와 니와 우지쓰구가 이끄는 이와사키 성 수비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의 일부였지만, 전투 결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
1584년 4월 7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가 국 농민들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시노기(현재 가스가이시)에 진을 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날 오바타 성(나고야시 모리야마 구)에 들어가 야영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는 오스가 야스타카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군대를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군대를 추격하도록 보냈고, 그 직후 자신의 군대와 함께 뒤따랐다. 히데쓰구는 이에야스가 오바타 성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8일째 행군을 재개했지만, 다음날 상황은 매우 급변했다.
이케다 쓰네오키가 이와사키 성(현재 니신시)을 공격했고, 곧 말에서 떨어졌다. 추락에 당황한 쓰네오키는 기습 전술을 잊고 성을 향해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수비군이 잘 싸웠지만, 성은 함락되었다. 니와 우지쓰구는 300명이 사망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냈고, 우지쓰구의 형제인 니와 우지시게도 사망자에 포함되었다.

이에야스는 4월 7일(구력)에 하시바 히데쓰구 세력이 상조성·다이토메 성 등 시노키 주변(가스가이 시)에 2박 동안 주둔한 무렵, 인근 농민들과 이가 닌자들로부터 얻은 정보로 히데쓰구 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4월 8일(구력), 현지의 다니와 우지쓰구·미즈노 다다시게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오스가 야스타카 등 4,500명이 소규모 부대로 저녁 무렵 고마키를 출발하여 밤 8시에 오바타 성(나고야 시 모리야마 구)에 진입하여 주변 적정을 살폈다.
이에야스와 노부나오의 주력 9,300명은 밤 8시에 고마키야마를 출발하여 밤 12시에 오바타 성에 도착했다. 오다·도쿠가와 군은 주력의 도착과 함께 오바타 성에서 군사 회의를 열고 병력을 양분하여 각개격파하기로 결정했다. 9일 새벽 2시, 오다·도쿠가와 군 소규모 부대는 하시바 히데쓰구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
히데쓰구 세력은 이에야스가 오바타 성에 진입한 8일 행군을 재개하여 9일 새벽 이케다 쓰네오키 세력이 다니와 우지시게(우지쓰구의 동생)가 수비하는 이와사키 성(닛신 시)에 대한 공성전을 시작했다.
우지시게 등은 선전했지만 약 3시간 만에 함락되어 전멸했다 ('''이와사키 성 전투'''). 이 사이 하시바 히데쓰구, 모리 나가요시, 호리 히데마사 각 부대는 현재의 오와리 아사히시, 나가쿠테시, 히나시시에 걸쳐 있는 지역에서 휴식을 취하며 진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무렵 이미 도쿠가와 군은 그들의 후방에 다가와 있었다.
하시바 군 | 도쿠가와 군 (이와사키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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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 하쿠산모리 전투

이케다 쓰네오키가 이와사키 성을 공격할 당시, 히데쓰구, 히데마사, 나가요시는 군대를 백산모리(현재의 오와리아사히시, 나가쿠테시)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했으나, 도쿠가와 군이 그들을 포위해 왔다. 이후 히데쓰구의 군대는 오스가 야스타카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기습을 받았다. 도쿠가와 군의 기습 공격으로 히데쓰구의 군대는 거의 궤멸당했다. 히데쓰구 자신은 말에서 떨어졌지만, 다른 말을 얻어 탈출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스케히사(히데요시의 아내 네네의 아버지)를 포함한 기노시타 가문의 많은 구성원들이 사망했다.
하시바 히데쓰구(羽柴秀次)의 군대는 백산림(白山林, 나고야시 모리야마 구・오와리 아사히시(尾張旭市))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9일 4시 35분경 후방에서 미즈노 타다시게, 다니와 우지쓰구(丹羽氏次), 오스가 야스타카의 군대, 측면에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군대의 기습을 받았다. 이 기습으로 히데쓰구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히데쓰구는 자신의 말을 잃고, 수행원의 말을 타고 간신히 도망쳤다. 또한, 감찰관으로 파견되었던 키노시타 유키히사와 그의 동생 키노시타 토시마사를 비롯한 많은 키노시타 씨 일족이 히데쓰구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전사하였다.
하시바 군 | 도쿠가와 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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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 히노키가네 전투
하시바 히데쓰구(羽柴秀次)군보다 앞에 있던 호리 히데마사(堀秀政)군은 히데쓰구군의 패배 소식을 약 2시간 후에 전해 들었다.[16] 호리군은 즉시 후퇴하여 히데쓰구군의 패잔병을 합쳐 히가네(桧ヶ根, 나가쿠테시(長久手市))에 진을 치고 몰려드는 도쿠가와(徳川)군을 기다렸다. 히데쓰구군을 격파하고 기세를 탄 도쿠가와군은 히가네 부근에서 호리군을 공격했지만, 역습을 받고 오히려 추격당했다. 도쿠가와군 부대의 사망자는 280명 이상 또는 500명이라고 한다.오다·도쿠가와 본대는 9일 2시에 오바타(小幡)성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4시 30분경 곤도(権堂)산 부근을 지나 색금산(色金山)에 도착했다. 거기서 별동대의 승전과 패퇴 소식을 알고, 이와사쿠(岩作)를 지나 후지가네(富士ヶ根)로 진격하여 호리 히데마사군과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모리 나가요시(森長可)군 사이를 분단했다. 이때 히데마사는 이에야스(家康)의 깃발(馬印)인 금선을 목격하고, 전황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케다와 모리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고 후퇴했다.
하시바군 | 도쿠가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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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 나가쿠테 전투
학산성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은 고마키 산을 요새화하여 교착 상태를 만들었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이케다 쓰네오키는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인근 미카와 국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예상하고 도쿠가와군을 이끌고 히데요시의 군대에 맞섰다. 미즈노 다다시게는 도쿠가와군 후위를 지휘하여 이케다의 군대에 맞섰고, 전투 소리가 히데요시군의 한 부대장인 호리 히데마사에게 들렸다. 호리 히데마사는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동료들을 방어하기 위해 나가쿠테 마을에 진을 쳤다. 그는 도쿠가와군의 초기 공격을 막아냈지만, 약 9,000명의 병사로 구성된 도쿠가와군 본대가 도착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5]
히데요시의 다른 장수인 모리 나가요시는 이이 나오마사를 지원하기 위해 이에야스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측면에서 공격하려 했다.[11] 처음에 나오마사의 부대는 적의 공격에 밀려 후퇴했지만, 이에야스는 격노하여 나오마사의 부관인 기마타 모리카츠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를 정비하고 질서를 회복하게 했다.[6] 결국 도쿠가와군은 우회하지 않고 돌격하여 측면 기습을 피했다. 모리 나가요시는 말에서 떨어졌고, 이는 이케다군의 사기를 꺾었다. 이이 나오마사는 이 전투에서 약 3천 명의 총병을 지휘했다.[11] 이 전투는 2시간 이상 지속되었는데, 나오마사 부대는 쓰네오키와 모리 나가요시 부대의 반복적인 돌격을 소총 사격으로 격퇴했다.[7][10] 나가요시가 전사하자 도쿠가와군은 혼란 속에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쓰네오키도 나가이 나오카쓰의 창에 맞아 전사했다. 나가요시와 쓰네오키의 군대는 궤멸되었고, 도쿠가와군의 승리로 끝났다.[9][10]
나중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주력군이 접근하자 추가적인 피해를 감수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철수하여 고마키로 돌아갔다.[11]
이와사키성을 점령한 이케다 쓰네오키와 모리 나가요시에게 도쿠가와군의 출현 소식이 전해지자, 두 장수는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에야스는 후지가네에서 전산에 진을 쳤다. 우익에는 이에야스 자신이 이끄는 3,300명, 좌익에는 이이 나오마사 군 3,000명, 여기에 오다 노부오 군 3,000명이 배치되었다. 한편, 철수하여 대치한 쓰네오키·나가요시 군은 우익에 쓰네오키의 장남인 이케다 모토스케, 차남 이케다 테루마사 군 4,000명, 좌익에 모리 군 3,000명, 후방에 쓰네오키 군 2,000명이 진을 쳤다.
4월 9일 오전 10시경, 양군이 격돌했다. 전투는 2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전황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모리 나가요시가 저격당해 전사하자 이케다·모리군 좌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도쿠가와군이 우세해졌다. 이케다 쓰네오키도 자신의 부대를 재정비하려 했으나, 나가이 나오카쓰의 창에 맞아 전사했다. 이케다 모토스케도 안도 나오쓰구에게 살해당했고, 이케다 테루마사는 가신들에게 부친과 형이 이미 전장을 이탈했다는 설득을 받고 전장을 이탈했다. 이윽고 쓰네오키·나가요시 군은 궤멸되었고, 합전은 도쿠가와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추격전 이후 오바타성으로 철수했다. 이날 나가쿠테 전투에서 하시바군 전사자는 2,500여 명, 오다·도쿠가와군 전사자는 590여 명이었다.
히데요시는 9일에 양동 작전으로 고마키야마를 공격했다. 오후에 하쿠산린 전투의 패보가 도착하자, 히데요시는 3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전장 근처 용천사를 향해 급행했다. 그러나 500명의 혼다 다다카쓰 군에 의해 행군이 방해받았다. 저녁 무렵, "이에야스는 오바타성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다음 날 아침 공격을 결정했다.
이에야스와 노부오는 야간에 오바타성을 나와 고마키야마성으로 귀환했다. 히데요시는 다음 날 이 소식을 듣고 가쿠타성으로 물러났다. 다만, 혼다 다다카쓰가 히데요시와 교전한 날은 히데요시의 서장 사본[17]과 다다카쓰의 서장 사본[18]으로부터 5월 1일임을 알 수 있으므로, 나가쿠테 합전에서 이에야스 본대의 전투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 아니라, 진군하는 히데요시 본대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시바군 | 도쿠가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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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9. 기타 지역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는 고마키산 주변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고마키 전투")와 나가쿠테 주변에서 벌어진 나머지 전투("나가쿠테 전투")로 나뉜다.
혼다 다다카쓰는 탄바국 출신 사무라이 가문인 아카이 씨와 협상을 벌였다. 아카이 나오마사의 동생 아시다 토키나오가 이끄는 아카이 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협력하여 가문의 부흥을 꾀했다. 토키나오는 이에야스를 돕기 위해 탄바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의 하시바 히데나가는 마쓰가시마성을 열고, 성주 다키가와 유토시는 하마다성으로 이동하여 농성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은 미카와국에서 동미노 지역을 침공하여, 도오야마 토시카게가 아케치성을 탈환하였다.
하시바 군은 카가노이성, 오쿠성, 다케가하나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으나, 오다 노부카쓰와 이에야스는 지원 요청에 응하지 않고 성을 넘겨주도록 권고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다케가하나성의 수공).
히데요시는 기후성을 거쳐 오사카성으로 돌아갔고, 이에야스도 사카이 타다쓰구에게 고마키야마성을 맡기고 기요스성으로 이동하였다.
와카야마에서는 네가이·자사슈와 코가와지 슈토가 히데요시의 부재를 틈타 사카이와 오사카를 공격하고, 기시와다성에도 공격을 가했으나 나카무라 가즈우지와 마쓰우라 무네키요가 이를 막아냈다(기슈 정벌). 히데요시는 이 전투로 인해 여러 차례 전장을 떠나 오사카성으로 귀환했다.
북관동에서는 호조 우지나오가 이끄는 호조 군과 사타케 요시시게,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등이 전투를 벌였다(누마지리 전투).
사타케 요시시게 등은 히데요시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시나노국에 출병하여 호조 씨를 견제했다. 호조 씨는 이에야스와의 강화를 통해 히데요시에 대한 동맹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시코쿠에서는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도가와성을 함락시켜 사누키국 평정을 완수했다(제2차 토가와성 전투). 이에야스는 모토치카에게 영토를 약속하며 셋쓰국 등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19]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나가시마성(長島城)과 기요스성 중간에 있던 가네가성(蟹江城) 등을 함락시켰다. 이에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즉각 반격하여 성을 탈환했고, 가즈마스는 배를 타고 이세국으로 도망쳤다(가네가성 전투(蟹江城合戦)). 히데요시는 전장에 없어 대응이 늦었고, 결국 호쿠리쿠 지방의 병력을 귀국시켜야 했다.[20]
히데요시는 낙전성으로, 이에야스는 이와쿠라성으로 이동하여 양측이 대치했으나, 작은 충돌만 있었을 뿐이었다.
4. 휴전과 강화
학산모리 전투 패배 소식이 전해진 후, 히데요시는 류센지로 이동했다. 이에야스가 오바타 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격을 계획했으나, 이에야스는 이미 고마키야마 성을 거쳐 기요스 성으로 돌아간 뒤였다. 히데요시는 4월 10일(5월 19일) 학전을 떠나 5월 1일(6월 9일) 오사카 성에 도착했다.
6월 16일(1584년 7월 23일), 타키가와 가즈마스가 이에야스의 가니에 성을 공격했으나 오다 나가마스에게 격퇴당해 이에야스 측에서 제외되었다.
9월 9일(10월 12일), 이에야스의 지시를 받은 사사 나리마사가 노토국의 스에모리 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몰아냈으나, 마에다 도시이에가 도착하여 사사 군을 격파했다.
4. 1. 노부카쓰의 단독 강화
11월 12일, 오다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허락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화의를 맺었다.[1]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에게 이가와 이세 반국을 넘겨줄 것을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고, 노부카쓰는 이를 수락했다. 노부카쓰가 전선을 이탈하면서 전쟁 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11월 17일에 미카와로 돌아갔다. 이가와 이세 반국은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모 우지사토 등 히데요시 측 다이묘에게 주어졌다.이에야스는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와 독자적으로 화의를 맺은 것에 격분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이에야스는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명분이 없어 아들 오기마루(후일의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 갈등을 종식시켰다.[12]
그 후, 히데요시는 타키가와 우키타쓰를 함정성(浜松城)에 보내 이에야스와의 강화를 맺으려고 시도했다. 이에야스는 답례로 차남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삼기 위해 오사카로 보냈다.

4. 2. 이에야스의 강화
1584년 11월 12일, 오다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허락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화의를 맺었다.[1]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에게 이가와 이세 반국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했고, 노부카쓰는 이를 수락했다. 노부카쓰가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전쟁 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11월 17일에 미카와로 돌아갔다. 이가와 이세 반국은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모 우지사토 등 히데요시 측 다이묘에게 주어졌다.이후 히데요시는 타키가와 우키타쓰를 사자로 함정성(浜松城)에 보내 이에야스와의 강화를 시도했다. 이에야스는 답례로 차남 오기마루(후일의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냈다.(도쿠가와 가문에서는 양자, 히데요시 측에서는 인질로 인식)[12] 이렇게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에야스는 두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우위를 점했지만, 1585년 초 히데요시와 화해했다. 오다 나가마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사사 나리마사와 마에다 도시이에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다. 조지 샌섬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어리석은 다툼에 힘을 낭비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1]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1584년 4월 9일(5월 19일) 학산모리 전투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의 군대는 류센지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 이에야스가 오바타 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날 새벽 공격하기로 결정했으나, 이에야스는 오바타 성을 떠나 고마키야마 성을 거쳐 기요스 성으로 돌아갔다. 히데요시는 이케다 쓰네오키의 죽음과 이에야스의 출발 소식을 듣고 4월 10일(5월 19일) 학산을 떠나 5월 1일(6월 9일) 오사카 성에 도착했다.[1]
1584년 6월 16일(7월 23일), 타키가와 가즈마스가 이에야스의 가니에 성을 공격했으나 오다 나가마스에게 패배하여 책임을 지고 이에야스 측에서 제외되었다.[1]
1584년 9월 9일(10월 12일), 이에야스의 지시를 받은 사사 나리마사가 노토국의 스에모리 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몰아냈으나, 마에다 도시이에가 도착하여 사사 군을 격파했다.[1]
이후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하위 섹션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5. 1. 히데요시 포위망 붕괴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허락 없이 1584년 11월 12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화의를 맺었다.[1] 이에야스는 두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우위를 점했지만,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1585년 초에 화해했다. 오다 나가마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 그리고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와 마에다 도시이에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다. 조지 샌섬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어리석은 다툼에 힘을 낭비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1]이에야스는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와 독자적으로 화의를 맺은 것에 대해 격분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이에야스는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명분이 없어 아들 오기마루(후일의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 갈등을 종식시켰다.[12]
키슈의 자카슈(雑賀衆)·네구라이슈(根来衆)와 시코쿠(四国)의 쵸소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등은 고립되었고, 각각 키슈 정벌(紀州征伐)·시코쿠 정벌(四国征伐)에 의해, 1585년 8월까지 모두 평정되었다.
또한, 1584년 11월 23일,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는 자신의 영지인 도야마(富山)를 출발하여 눈 덮인 다테야마(立山)을 넘어( 사라사라 고에(さらさら越え)), 하마마쓰(浜松)의 이에야스(家康)를 방문하여 히데요시(秀吉)에 대한 저항을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듬해 1585년 8월 도야마의 역(富山の役)에서 히데요시(秀吉)에게 항복했다.
5. 2. 도쿠가와 가문의 위상 변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를 멸망시키고(고슈 정벌(甲州征伐)),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히데요시는 노부타다의 아들 삼법사를 오다 가문의 당주로 삼았다. 이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로부터 삼법사를 빼앗고,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쓰를 삼법사의 대리인으로 옹립하여 주군으로 받들었다.덴쇼 임오의 난(天正壬午の乱)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5개 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1583년 히데요시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노부타카를 옹립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에게 승리했다. 시즈가타케 전투 후, 히데요시는 오사카성(大坂城)에 노부카쓰를 포함한 여러 장수들을 초대했다.
1583년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에 의해 안토 성(安土城)에서 쫓겨났고, 이후 노부카쓰와 히데요시의 관계는 나빠졌다. 1584년 3월 6일 노부카쓰는 가신 히지카타 유키히사(土方雄久)에게 명하여 히데요시파 가신 세 명을 나가시마 성(長島城)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히데요시는 노부카쓰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기슈의 자카슈(雑賀衆)·네구라이슈(根来衆)와 시코쿠(四国)의 쵸소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호쿠리쿠(北陸)의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 관동(関東)의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등이 노부카쓰·이에야스와 연합하여 히데요시 포위망을 형성, 히데요시 진영을 압박했다.

히데요시는 관백 자리를 둘러싼 다툼(관백상론)에 개입하여 1585년 7월, 고노에 마에히사의 양자가 되어 관백에 임명되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양자로 보낸 히데야스 등을 인질로 삼아 도쿠가와 가문이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이에야스 토벌을 계획하며 미노국 대각성(大垣城)에 15만 명의 군사를 위한 병량을 비축했다. 지위와 전력 모두 이에야스를 압도한 히데요시는 1586년 초에 출진할 계획이었다.
이에야스는 천정 임오의 난 이후 사나다 마사유키와 대립했다. 마사유키가 우에스기 가문과 히데요시 편에 가담하여 저항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어려움을 겪었다(제1차 우에다 합전). 또한 이 무렵 이에야스는 등에 난 종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에서는 1583년부터 1584년에 걸쳐 발생한 지진과 폭우, 그리고 전쟁 부담으로 인해 영지 경영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1583년 5월부터 7월까지 간토 지방에서 도카이 지방 일대에 걸쳐 대규모 폭우가 이어져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는 "50년 만의 대홍수"를 겪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 황폐화는 도요토미 정권과의 전투 지속을 어렵게 만들었고, 영지 재건이 시급했다.
1586년 1월 2일, 도쿠가와 가문의 실질적인 2인자였던 이시카와 카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도쿠가와 군의 기밀이 유출되자 군제를 쇄신하고 다케다 군을 본보기로 개혁했다고 한다.
1586년 1월 18일, 일본 열도 중앙부를 “천정 대지진”이 강타했다. 규모(M) 8급, 최대 진도 6이었다고 한다. 이 지진으로 키후네성(木舟城)이 무너져 성주 마에다 히데쓰구(도시이에의 동생)가 사망했다. 히다국오오노군(현재의 기후현시라카와무라)의 키운성(帰雲城)도 성 아래 전체가 매몰되어 성주 우치가시마씨 일족이 멸망했다.

이 지진이 없었다면 이에야스는 2개월 후 히데요시의 대군에게 총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국지전에서는 승리했지만, 이후 히데요시는 포위망을 무너뜨리고 기슈와 시코쿠 등 영토를 크게 넓혀 군사력에 큰 차이가 생겼다. 전쟁이 시작되면 후호죠씨처럼 이에야스가 멸망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지진으로 히데요시의 이에야스 공격 전선 기지인 대각성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미카와 국과 접한 오와리 국을 통치하던 오다 노부오의 거성 나가시마 성도 무너져 세이슈 성으로 옮겨야 했다. 히데요시 군이 전개할 예정이었던 미노·오와리·이세 지방의 피해가 커서 전쟁 준비가 불가능해졌다.
이에야스 측은 이 지진으로 오카자키성이 피해를 입었지만, 영지 내 진도는 4 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천정 대지진 이전의 폭우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등으로 인한 백성 동원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는 황폐해져 이에야스에게도 도요토미 정권과의 싸움은 불가능했다.
지진 후에도 히데요시는 이전 계획대로 동미노·시나노 방면에서 이에야스를 정벌하려 했지만, 곧 중지하고 화해 노선으로 전환했다. 1586년 10월 27일,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으로 가서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여러 다이묘 앞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항복할 것을 표명했다. 도요토미 정권 2인자의 지위를 확보하여 미래를 대비하게 되었다.
5. 3. 덴쇼 대지진과 정치적 분수령
1586년 1월 18일(덴쇼 13년 11월 29일), 일본 열도 중앙부를 강타한 "덴쇼 대지진"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지진은 규모(M) 8급, 최대 진도 6으로 추정되며, 주부, 도카이, 호쿠리쿠 지방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다.[1]지진으로 인해 히데요시의 전선 기지였던 대각성이 전소되었고, 오다 노부카쓰의 거성인 나가시마 성도 붕괴되었다. 히데요시 군이 주둔할 예정이었던 미노, 오와리, 이세 지방은 큰 피해를 입어 전쟁 준비가 불가능해졌다.[1]
반면, 이에야스 측은 오카자키성이 피해를 입었지만, 영토 내의 진도는 4 이하로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덴쇼 대지진 이전의 폭우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등으로 인해 도쿠가와 가문의 영토는 황폐해져 있었고, 이에야스 역시 도요토미 정권과의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덴쇼 대지진은 양측 모두에게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히데요시는 지진 이후에도 이에야스 정벌을 계획했지만, 곧 중지하고 화해 노선으로 전환했다. 노부카쓰 역시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섰고, 결국 1년 가까운 협상 끝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종속하게 되었다.[1]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이소다 미치후미 준교수는 덴쇼 대지진을 "근세 일본의 정치 구조를 결정지은 분수령의 대지진"이라고 평가했다. 지진이 없었다면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멸망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지진으로 인해 양측의 군사력 차이가 좁혀지고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이에야스는 2인자의 지위를 확보하고 장래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1]
6. 평가
라이산요의 『일본외사』에는 "공(신군 이에야스)이 천하를 얻은 것은 오사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키가하라에 있었고, 세키가하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마키에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어,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천하인으로 만든 중요한 전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24]
6. 1. 군사적 측면
통설적으로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가 우회 작전 발의를 건의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이와자와는 히데요시가 다뉴 나가히데에게 보낸 4월 8일자 서장[1]을 자세히 검토하여, 미카와 공격 작전이 이케다 쓰네오키의 강압적인 건의가 아닌 히데요시가 구상했던 작전을 쓰네오키가 헤아려 진언한 것이라고 서술했다.[2] 타니구치는 더 나아가 우회 작전의 주도권은 쓰네오키가 아닌 히데요시에게 있었으며, 구키 수군까지 포함한 수륙 양용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3][4]6. 2. 정치적 측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사후 권력을 장악해 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대립은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로 이어졌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를 명분상 주군으로 받들었으나, 노부카쓰는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히데요시에 대항했다. 1584년 3월 6일, 노부카쓰는 히데요시파 가신 3명을 살해했고, 이에 히데요시는 노부카쓰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4]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키슈의 자카슈(雑賀衆)·네구라이슈(根来衆), 시코쿠(四国)의 쵸소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호쿠리쿠(北陸)의 사사 나리마사(佐々成政), 관동(関東)의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등이 노부카쓰·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히데요시 포위망을 형성했다.
히데요시는 군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1586년 이에야스가 상락(上洛)하여 형식적인 복종을 표하면서 강화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사이의 종속 관계는 완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호조씨(北条氏)와의 동맹을 유지하며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고,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협력 없이는 호조씨(北条氏)를 공격할 수 없었다.
결국 히데요시는 동국(東國) 정벌을 연기하고 이에야스를 통한 "총무사(惣無事)" 정책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완전히 복종한 것은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선봉을 맡으면서였다.[23]
7. 전투 이후 이에야스의 신종(臣従) 과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압도하기 위해 관백 자리에 오르고, 오가키성(大垣城)에 병량을 비축하며 대규모 공격을 계획했다.[16] 그러나 천정 임오의 난 이후 사나다 마사유키와의 대립(제1차 우에다 합전)과 등 종양, 영지 내 자연재해 등으로 이에야스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6]
천정 13년(1585년) 7월, 히데요시는 고노에 마에히사의 양자가 되어 관백 선하를 받았다.[16]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양자로 보낸 히데야스 등을 인질로 삼아 도쿠가와 가문이 종속되었다고 선전했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하며 히데요시의 토벌 계획을 세웠다.[16]
천정 11년(1583년)부터 12년(1584년)에 걸쳐 발생한 지진과 폭우로 도쿠가와씨의 영토는 황폐해졌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로 인한 인력 동원은 전답 황폐와 기근을 초래했다.[16] 이러한 상황에서 천정 13년 11월 13일(1586년 1월 2일), 이시카와 카즈마사의 탈주 사건이 발생하여 도쿠가와군은 기밀 유출로 군제를 개혁해야 했다.[16]
천정 13년 11월 29일(1586년 1월 18일), 천정 대지진이 발생하여 히데요시의 공격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16] 키후네성(木舟城), 키운성(帰雲城) 등 각지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고, 히데요시는 사카모토성(坂本城)에서 오사카성으로 피신했다.[16]
이 지진으로 히데요시의 전선 기지였던 오가키성이 전소되고, 오다 노부오의 거성 나가시마성도 붕괴되는 등 히데요시군의 피해가 컸다.[16] 반면 이에야스 측은 오카자키성이 피해를 입었지만, 영토 내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16] 그러나 도쿠가와씨의 영토 역시 황폐해져 양측 모두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6]
결국 히데요시는 이에야스 정벌 계획을 중지하고 화해 노선으로 전환했다.[16] 아사히히메와의 혼인, 다이쇼인 인질 등을 조건으로 천정 14년(1586년) 10월 27일,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에게 신종(臣従)을 표명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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