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라카미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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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무라카미 천황은 남북조 시대에 남조의 96대 천황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이다. 1333년 겐무 신정 시작과 함께 동북 지방으로 파견되어 북조와 대립하는 남조를 이끌었다. 1339년 즉위 후, 남조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북조와의 대립과 무로마치 막부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와카에 능하고 서도에도 뛰어났으며, 1368년 스미요시에서 41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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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라카미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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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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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 1339년 9월 18일 – 1368년 3월 29일 |
즉위식 | 1339년 11월 6일 |
추존호 | 고무라카미 천황 (後村上天皇) |
휘 | 노리요시 (義良), 노리나가 (憲良) |
묘호 | 히노오 능 (檜尾陵) |
통치 정보 | |
쇼군 |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
간파쿠 | 니조 모로모토 → 고노에 쓰네이에 → 니조 노리모토 → 고노에 쓰네이에 → 니조 노리모토? → 고노에 쓰네이에? |
준후 | 기타바타케 치카후사 |
생애 | |
출생 | 1328년 |
사망 | 1368년 3월 29일 |
릉묘 | 히노오 능 (檜尾陵) (오사카) |
가계 | |
아버지 | 고다이고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 노 렌시 |
배우자 | 기타바타케 씨, 후지와라 쇼시 |
자녀 | 조케이 천황, 고카메야마 천황, 유키나리 친왕 외 |
기타 | |
황거 | 요시노 행궁, 가나오 행궁, 이와시미즈 하치만궁, 아마노 행궁, 간신지, 스미요시 행궁 |
2. 약력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겐무 신정을 시작하자, 모리쿠니 친왕에게 옹립되었던 고곤 천황을 폐위시켰다.
같은 해,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노리요시 친왕(후의 고무라카미 천황)은 호조 씨 잔당 추토와 도고쿠 무사들의 귀속을 목적으로, 측근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그의 장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에게 받들려 무쓰 국 다가 성으로 향했다. 겐무 원년(1334년) 다가 성에서 친왕이 된 노리요시 친왕은 도호쿠 지방에서 조정을 따르는 무장들을 모아 오우 쇼군부(도호쿠 쇼군부)를 세웠다. 오우 쇼군부는 도호쿠 지방 및 간토 북부 3개 구니(시모쓰케, 고즈케, 히타치)를 포함했기에 사실상 동일본 소조정이나 다름없었다.
이듬해인 겐무 2년(1335년) 닛타 요시사다에게 멸망당한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가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켰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모반을 일으켜 겐무 신정에서 이탈하였다. 12월,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조정 군사를 격파하고 이듬해인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 정월에 교토를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하였다.
겐무 2년(1335년) 12월, 노리요시 친왕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과 함께 다가 성을 출발하여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토하기 위해 교토로 진군하였다.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 정월, 노리요시 친왕과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이끄는 군이 교토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격파하고, 다카우지를 규슈로 도망치게 하였다. 3월에 노리요시 친왕은 원복을 행하였고, 3품 무쓰 태수로 서임되었다.
그러나 규슈로 달아났던 아시카가 다카우지 ・ 다다요시 형제는 규슈에서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금 교토로 쳐들어왔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 ・ 닛타 요시사다를 격파하고 마사시게는 전사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다시금 교토를 탈취하고 고곤 천황의 동생인 지묘인 왕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였다. 한편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달아나 자신의 조정을 선포하였고, 고묘 천황은 북조, 고다이고 천황은 남조로써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 주력군이 사라진 다가 성의 오우 쇼군부는 북조군의 공격으로 위험해져, 1월 8일, 노리요시 친왕 및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은 오우 쇼군부를 다테 유키토모의 영지인 후쿠시마 현 료 산으로 옮겼다. 8월, 노리요시 친왕 및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료 산성에서 다시금 교토를 목표로 진군하여 12월 오우 쇼군부 군사(남조군)가 북조군을 격파하고 가마쿠라를 탈환하였다. 이듬해인 엔겐 3년/랴쿠오 원년(1338년) 1월 노리요시 친왕은 미노 국 아오노가하라 전투에서 아시카가측을 격파하고 이세 ・ 이가 방면에 전진한 뒤 요시노 행궁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었다. 엔겐 3년/랴쿠오 원년 5월 22일(양력 1338년 6월 10일) 남조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이시쓰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였다. 엔겐 3년 윤7월 2일 남조의 닛타 요시사다도 후지시마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였다. 9월, 노리요시 친왕은 무네요시 친왕과 함께 이세 국 오오미나토에서 세 번에 걸쳐 무쓰 국으로 향하고자 하였으나 폭풍우를 만나 이세에 표착하였다. 엔겐 4년/랴쿠오 2년(1339년) 3월 노리요시 친왕은 요시노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가 되었다.[12] 8월 15일, 고다이고 천황의 양위로 고무라카미 천황이 되었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즉위 후, 기나이 인근 구니의 지샤(寺社)나 무사들에게 정력적으로 윤지(綸旨)를 발급하였다. 1348년 1월, 아시카가측의 고노 모로나오에게 요시노를 습격당하여 기이의 하나조노로 피난하기도 하였는데, 후에 야마토의 가모우로 옮겼다. 1350년 아시카가 일족 사이에 내홍(간노의 소란)이 격화되자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남조로 항복하고 1351년 10월에는 다카우지가 똑같이 남조에 항복하였다(쇼헤이 일통). 천황은 다카우지에 대해 다다요시 ・ 다다후യു 추토의 윤지를 전하고, 11월에는 북조의 스코 천황을 폐위하는 동시에 삼종신기를 접수하고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도 폐태자하였다.
남조는 다카우지가 다다요시를 추토하고자 간토로 향한 틈을 타 교토 회복 작전을 냈다. 1352년 2월 가모우를 출발, 가와치의 도조를 거쳐 셋쓰의 스미요시에 이르러 윤2월 야마시로의 오토 산으로 들어가 시치조 오미야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격파하고 교토를 회복하였다. 쇼헤이 일통은 파탄이 났고, 요시아키라는 오미로 도망쳤으며, 고무라카미 천황은 고곤 ・ 고묘 ・ 스코 세 상황과 폐태자 나오히토 친왕까지 모조리 오토 산으로 연행하였다. 3월, 아시카가측의 반격으로 교토를 버리고 오토 산에서 농성하였으나, 5월 요시아키라의 군에 패하여 가까스로 탈출, 가모우로 귀환하였다. 1354년 3월, 고곤 ・ 고묘 ・ 스코 세 상황과 나오히토 친왕을 가와치 아마노의 곤고지로 들이고 10월에는 고무라카미 천황 자신도 곤고지로 옮겼다. 1355년 1월, 남조에 귀순한 다다후유를 내세워 교토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다카우지 ・ 요시아키라 부자의 군에 패하고 좌절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묘 상황을 교토로 돌려 보냈다.
1357년 2월, 고곤 상황 ・ 스코 상황 ・ 나오히토 친왕도 교토로 돌려 보내고, 1359년 12월에 자신도 간신지(오사카 부 가와치나가노 시)로 행궁을 옮겨 이듬해 9월에에는 스미요시까지 북상, 1361년 막부의 정쟁에서 패하고 실각한 집사 호소카와 기요우지의 귀순을 받아 들이고 12월 8일에 시조 다카토시 ・ 구스노키 마사노리 등이 교토로 쳐들어가 일시적으로 교토를 회복하였으나, 곧 요시아키라의 반격으로 26일에 철퇴하였다. 남조의 힘은 이미 약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남조는 일관되게 강경한 자세를 관철하였고, 1367년 4월 칙사 하무로 미쓰스케를 통해 막부와 화목 교섭을 시도했으나, 고무라카미 천황은 무가측의 항복을 조건으로 요구하여 요시아키라의 격노를 사 화의는 결렬되었다. 이 해에 고무라카미 천황은 이미 병세가 짙어져 있었다. 이듬해인 1368년 3월 11일 자시에 스미요시 대사의 궁사 쓰모리 씨의 스미노에도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2. 1. 즉위 전
憲良親王|노린나가 친왕일본어은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로, 어머니는 레이시 부인이다.[2] 그는 남북조 시대라는 격동의 시기에 살았으며, 북조와 남조 간의 정통성 다툼에 휘말렸다.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 신정을 시작하자, 어린 노린나가 친왕은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와 함께 무쓰국 타가조(현재의 미야기현)로 파견되어 동쪽 사무라이들의 충성을 회복하고 호조 씨 잔당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란으로 고다이고 천황이 사카모토로 돌아가면서 이 임무는 중단되었다.[2]
이후 노린나가 친왕은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와 함께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항했다. 1336년 교토에서 패배한 후 무쓰국으로 돌아갔으나, 1337년 타가조가 공격받자 요시노로 피신하여 계속 전투를 벌였다.[2]
1338년, 노린나가 친왕은 다시 타가조로 향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요시노로 돌아왔고, 같은 해 10월 황태자로 임명되었다.[2]
2. 2. 남북조 시대
정경 2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겐무 신정을 시작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 쇼군 모리쿠니 친왕에 옹립된 고곤 천황을 폐위시켰다.같은 해,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노리요시 친왕(후의 고무라카미 천황)은 호조 씨 잔당 추토와 도고쿠 무사들의 귀속을 목적으로, 측근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그의 장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에게 받들려 무쓰 국 다가 성으로 향했다. 겐무 원년(1334년) 다가 성에서 친왕 선하를 받은 노리요시 친왕은 도호쿠 지방에서 조정을 따르는 무장들을 모아 고다이고 천황의 분조(分朝)격인 오우 쇼군부(도호쿠 쇼군부)를 세웠다. 오우 쇼군부는 도호쿠 지방 및 간토 북부 3개 구니(시모쓰케, 고즈케, 히타치)를 포함했기에 사실상 동일본 소조정이나 다름없었다.
이듬해인 겐무 2년(1335년) 닛타 요시사다에게 멸망당한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가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켰다. 그 혼란 속에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죽임을 당했다. 또한,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러 온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모반을 일으켜 겐무 신정에서 이탈하였다. 겐무 2년 12월,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조정 군사를 격파하고 이듬해인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 정월에 교토를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하였다.
겐무 2년(1335년) 12월, 노리요시 친왕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과 함께 다가 성을 출발하여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토하기 위해 교토로 진군하였다.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 정월, 노리요시 친왕과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이끄는 군이 교토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격파하고, 다카우지를 규슈로 도망치게 하였다. 3월에 노리요시 친왕은 원복(元服)을 행하였고, 3품 무쓰 태수로 서임되었다.
그러나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 규슈로 달아났던 아시카가 다카우지 ・ 다다요시 형제는 규슈에서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금 교토로 쳐들어왔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 ・ 닛타 요시사다를 격파하고 마사시게는 전사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다시금 교토를 탈취하고 고곤 천황의 동생인 지묘인 왕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였다. 한편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달아나 자신의 조정을 선포하였고, 고묘 천황은 북조, 고다이고 천황은 남조로써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 주력군이 사라진 다가 성의 오우 쇼군부는 북조군의 공격으로 위험한 지경에 놓였다. 때문에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 1월 8일, 노리요시 친왕 및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은 오우 쇼군부를 다테 유키토모의 영지 안에 있는 후쿠시마 현 료 산으로 옮겼다. 8월 도호쿠 지방군을 거느린 노리요시 친왕 및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료 산성에서 다시금 교토를 목표로 진군하여 12월 오우 쇼군부의 군사(남조군)가 북조군을 격파하고 가마쿠라를 탈환하였다. 이듬해인 엔겐 3년/랴쿠오 원년(1338년) 1월 노리요시 친왕은 오우 쇼군부의 군을 서쪽으로 진군시켜서 미노 국 아오노가하라 전투에서 아시카가측을 격파하고 이세 ・ 이가 방면에 전진한 뒤 고다이고 천황이 있는 야마토의 요시노 행궁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었다. 엔겐 3년/랴쿠오 원년 5월 22일(양력 1338년 6월 10일) 남조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이시쓰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였다. 엔겐 3년 윤7월 2일 남조의 닛타 요시사다도 후지시마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였다. 9월 노리요시 친왕은 무네요시 친왕과 함께 이세 국 오오미나토에서 세 번에 걸쳐 무쓰 국으로 향하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일행은 흩어져 버렸고, 노리요시 친왕의 배도 이세에 표착하였다. 엔겐 4년/랴쿠오 2년(1339년) 3월 노리요시 친왕은 요시노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가 되었다.[12] 8월 15일,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양위로 즉위하여 고무라카미 천황이 되었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어려서부터 주로 기나이 인근 구니의 지샤(寺社)나 무사들에 대해 정력적으로 윤지(綸旨)를 발급하였고, 남조의 안녕 기원이나 소유 영지 안도(安堵) ・ 급부, 군세 재촉이나 포상을 행하였다. 쇼헤이 3년/조와 4년(1348년) 1월 아시카가측의 고노 모로나오에게 요시노를 습격당하여 기이의 하나조노로 피난하기도 하였는데, 후에 야마토의 가모우로 옮겼다. 쇼헤이 5년/간노 원년(1350년) 아시카가 일족 사이에 내홍이 격화되자(간노의 소란) 앞서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남조로 항복하고 이듬해(1351년) 10월에는 타카우지가 똑같이 남조에 항복하였다(쇼헤이 일통). 천황은 타카우지에 대해 다다요시 ・ 다다후유 추토의 윤지를 전하고, 11월에는 북조의 스코 천황을 폐위하는 동시에 삼종 신기를 접수하고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도 폐태자하였다.
남조는 타카우지가 다다요시를 추토하고자 간토로 향한 틈을 타서 교토 회복을 위한 작전을 냈다. 쇼헤이 7년/분나 원년(1352년) 2월에 가모우를 출발하여 가와치의 도조를 거쳐 셋쓰의 스미요시에 이르러 윤2월 19일 야마시로의 오토 산으로 들어가 시치조 오미야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격파하고 교토를 회복하였다. 쇼헤이 일통은 파탄이 났고, 요시아키라는 오미로 도망쳤으며, 고무라카미 천황은 고곤 ・ 고묘 ・ 스코 세 상황과 폐태자 나오히토 친왕까지 모조리 오토 산으로 연행하였다. 3월에 아시카가측의 반격으로 교토를 버리고 오토 산에서 농성하였으나, 5월 요시아키라의 군에 패하여 가까스로 탈출, 미와 사 ・ 우다를 거쳐서 가모우로 귀환하였다. 쇼헤이 9년/분나 3년(1354년) 3월에는 고곤 ・ 고묘 ・ 스코 세 상황과 나오히토 친왕을 가와치 아마노의 곤고지의 탑두 간초인으로 들이고 10월에는 고무라카미 천황 자신도 곤고지로 옮겨서 탑두 마니인을 자신의 행궁으로 정하였다. 쇼헤이 10년/분나 4년(1355년) 1월 다시금 남조에 귀순한 다다후유를 내세워 교토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타카우지 ・ 요시아키라 부자의 군에 패하고 좌절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묘 상황을 교토로 돌려 보냈다.
쇼헤이 12년/엔분 2년(1357년) 2월에는 고곤 상황 ・ 스코 상황 ・ 나오히토 친왕도 교토로 돌려 보내고, 쇼헤이 14년/엔분 4년(1359년) 12월에 자신도 간신지(오사카 부 가와치나가노 시)로 행궁을 옮겨서 이듬해 9월에에는 스미요시까지 북상, 쇼헤이 16년/고안 원년(1361년) 막부의 정쟁에서 패하고 실각한 집사 호소카와 기요우지의 귀순을 받아 들이고 12월 8일에 시조 다카토시 ・ 구스노키 마사노리 등이 교토로 쳐들어가 일시적으로 교토를 회복하였으나, 곧 요시아키라의 반격으로 26일에 철퇴하여야 했다. 남조의 힘은 이미 약해져 있었고, 쇠퇴하는 기세를 만회할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조는 일관되게 강경한 자세를 관철하였고, 쇼헤이 22년/조지 6년(1367년) 4월 칙사 하무로 미쓰스케를 막부와의 화목 교섭을 행하였는데, 고무라카미 천황은 무가측의 항복을 조건으로 요구하였으므로 요시아키라의 격노를 산 끝에 화의는 결렬되었다. 이 해에 고무라카미 천황은 이미 병세가 짙어져 있었다. 이듬해인 쇼헤이 23년/오안 원년(1368년) 3월 11일 자시에 스미요시타이샤의 궁사 쓰노모리 씨의 스미노에도노에서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2. 3. 고무라카미 천황의 치세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겐무 신정을 시작한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이었던 모리쿠니 친왕에게 옹립되었던 고곤 천황을 폐위시켰다.같은 해, 고무라카미 천황은 호조 씨 잔당 추토와 도고쿠 무사들의 귀속을 목적으로 측근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그의 장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에게 받들여져 무쓰 국의 다가 성으로 보내졌다. 1334년 다가 성에서 친왕 선하를 받았다. 그는 다가 성에서 도호쿠 지방의 조정을 따르는 무장들을 모아 고다이고 천황의 분조(分朝)격이었던 오우 쇼군부(도호쿠 쇼군부)를 세웠다. 오우 쇼군부는 도호쿠 지방 및 간토 북부 3개 구니(시모쓰케, 고즈케, 히타치)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동일본 소조정이나 다름없었다.
1335년 닛타 요시사다에게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당할 때 자결했던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가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켰다. 그 혼란 속에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은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명으로 죽임을 당했다. 또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모반을 일으켜 겐무 신정에서 이탈하였다.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조정 군사를 격파하고 교토를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하였다.
1335년 12월, 고무라카미 천황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아키이에 등과 함께 다가 성을 출발하여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토하기 위해 교토로 진군하였다. 1336년 정월, 이들이 이끄는 군이 교토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격파하고, 다카우지를 규슈로 도망치게 하였다. 3월에 원복(元服)을 행하였고, 3품 무쓰 태수로 서임되었다.
그러나 1336년 규슈로 달아났던 아시카가 다카우지 ・ 다다요시 형제는 규슈에서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 교토로 쳐들어왔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 ・ 닛타 요시사다를 격파하고 마사시게는 전사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다시 교토를 탈취하고 고묘 천황을 옹립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달아나 자신의 조정을 선포하였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1337년 다가 성의 오우 쇼군부는 북조군의 공격으로 위험한 지경에 놓였다. 때문에 1337년 1월, 고무라카미 천황 및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은 오우 쇼군부를 료 산으로 옮겼다. 8월 도호쿠 지방군을 거느린 이들은 다시 교토를 목표로 진군하여 12월 가마쿠라를 탈환하였다. 1338년 1월 미노 국 아오노가하라 전투에서 아시카가측을 격파하고 이세, 이가 방면에 전진한 뒤 요시노 행궁으로 들어갔다.
같은 해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었다. 1338년 5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이시쓰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였다. 윤7월, 닛타 요시사다도 후지시마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였다. 9월, 고무라카미 천황은 무네요시 친왕과 함께 이세 국 오오미나토에서 세 번에 걸쳐 무쓰 국으로 향하고자 하였으나 폭풍우를 만나 이세에 표착하였다. 1339년 3월 요시노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가 되었다.[12] 8월,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양위로 즉위하여 고무라카미 천황이 되었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어려서부터 기나이 인근 구니의 지샤나 무사들에 대해 정력적으로 윤지(綸旨)를 발급하였다. 1348년 1월 아시카가측의 고노 모로나오에게 요시노를 습격당하여 기이의 하나조노로 피난하였는데, 후에 야마토의 가모우로 옮겼다. 1350년 아시카가 일족 사이에 내홍이 격화되자(간노의 소란)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남조로 항복하고 1351년 10월에는 다카우지가 똑같이 남조에 항복하였다(쇼헤이 일통). 천황은 다카우지에 대해 다다요시 ・ 다다후유 추토의 윤지를 전하고, 11월에는 북조의 스코 천황을 폐위하는 동시에 삼종 신기를 접수하고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도 폐태자하였다.
남조는 다카우지가 다다요시를 추토하고자 간토로 향한 틈을 타서 교토 회복 작전을 냈다. 1352년 2월 가모우를 출발하여 가와치의 도조를 거쳐 셋쓰의 스미요시에 이르러 윤2월 야마시로의 오토 산으로 들어가 시치조 오미야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격파하고 교토를 회복하였다. 쇼헤이 일통은 파탄이 났고, 요시아키라는 오미로 도망쳤으며, 고무라카미 천황은 고곤 ・ 고묘 ・ 스코 세 상황과 폐태자 나오히토 친왕까지 모조리 오토 산으로 연행하였다. 3월에 아시카가측의 반격으로 교토를 버리고 오토 산에서 농성하였으나, 5월 요시아키라의 군에 패하여 가까스로 탈출, 가모우로 귀환하였다. 1354년 3월에는 고곤 ・ 고묘 ・ 스코 세 상황과 나오히토 친왕을 가와치 아마노의 곤고지로 들이고 10월에는 고무라카미 천황 자신도 곤고지로 옮겼다. 1355년 1월 다시금 남조에 귀순한 다다후유를 내세워 교토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다카우지 ・ 요시아키라 부자의 군에 패하고 좌절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묘 상황을 교토로 돌려 보냈다.
1357년 2월에는 고곤 상황 ・ 스코 상황 ・ 나오히토 친왕도 교토로 돌려 보내고, 1359년 12월에 자신도 간신지로 행궁을 옮겨서 이듬해 9월에에는 스미요시까지 북상, 1361년 막부의 정쟁에서 패하고 실각한 집사 호소카와 기요우지의 귀순을 받아 들이고 12월 8일에 시조 다카토시 ・ 구스노키 마사노리 등이 교토로 쳐들어가 일시적으로 교토를 회복하였으나, 곧 요시아키라의 반격으로 26일에 철퇴하여야 했다. 남조의 힘은 이미 약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남조는 일관되게 강경한 자세를 관철하였고, 1367년 4월 칙사 하무로 미쓰스케를 통해 막부와 화목 교섭을 시도했으나, 고무라카미 천황은 무가측의 항복을 조건으로 요구하여 요시아키라의 격노를 사 화의는 결렬되었다. 이 해에 고무라카미 천황은 이미 병세가 짙어져 있었다. 이듬해인 1368년 3월 11일 자시에 스미요시 대사의 궁사 쓰모리 씨의 스미노에도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1세였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와카는 니조 다메사다에게 배워 1353년 『다이리 천수』나 1365년의 『다이리 360수가』를 편찬했고, 준칙선집 『신엽화가집』에도 고무라카미 천황 자신이 지은 와카가 100수나 실려 있으며, 『겐지 이야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임제종 선승 고호 가쿠묘에게서 선을 배우고, 비파 ・ 쟁 등의 음악이나 다이가쿠지 왕통의 당양을 이어받아 서도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3. 평가
고무라카미 천황은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이 다이고·무라카미 천황의 엔기·덴랴쿠의 치를 이상으로 삼아, 다이고 천황에 빗대어 생전에 스스로 고다이고라는 호를 정했던 것을 이어, '''고무라카미인'''으로 추증되었다.[12] 니조 다메사다(二条為定)에게 와카를 배워 쇼헤이 8년(1353년) 『다이리 천수』(内裏千首)나 20년(1365년)의 『다이리 360수가』(内裏三百六十首歌)가 편찬되었고, 준칙선집(准勅撰集) 『신엽화가집(新葉和歌集)』에도 고무라카미 천황 자신이 지은 와카가 많게는 100수가 실려 있다.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임제종 선승 고호 가쿠묘(孤峰覚明)에게서 선(禅)을 배우고, 비파(琵琶) ・ 쟁(箏) 등의 음악이나 다이카쿠지 왕통의 당양(唐様)을 이어받아 서도(書道)에도 뛰어났다.
4. 가계도
관계 | 이름 | 비고 | |
---|---|---|---|
뇨고 | 기타바타케(미나모토)씨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딸 | |
뇨고 | 가키몬인 | 친부 미상, 니조 모로모토의 유자(猶子) | |
제1황자 | 유타나리 친왕 | ||
황자 | 친왕 | 고카메야마 천황의 황태제. 고쇼인노미야가의 선조. 고레나리 친왕 또는 야스나리 친왕으로도 추정. | |
덴지 | 후지와라씨 | 아노 사네타메의 딸 | |
제2황자 | 히로나리 친왕 | ||
생모 불명 | 제3황자 | 고레나리 친왕 | |
생모 불명 | 제4황자 | 야스나리 친왕 | |
생모 불명 | 제5황자 | 모로나리 친왕 | |
생모 불명 | 제6황자 | 가네나리 친왕 | |
생모 불명 | 황자? | 요시나리 친왕 | |
생모 불명 | 황녀? | 노리코(겐시) 내친왕 | |
생모 불명 | 황녀? | 사다코(데이시) 내친왕 |
5. 연호
참조
[1]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https://books.google[...]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3]
문서
[4]
문서
続史愚抄, 南朝公卿補任
[5]
문서
南朝編年記略, 南方遺胤
[6]
문서
皇代記
[7]
문서
皇代記
[8]
문서
新葉和歌集, 南朝編年記略
[9]
간행물
長慶天皇を仰ぎ奉りて
角川書店
[10]
문서
園太暦
1353-06-04
[11]
간행물
萩原寺所蔵『理趣三昧表白』 ―後亀山天皇の生母に関する一史料
臨川書店
[12]
문서
신엽화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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