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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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사는 후한 말 동탁 휘하의 장수로, 황건적의 난 진압과 동탁 토벌전 등에서 활약했다. 동탁 사후 이각, 장제 등과 함께 장안을 점령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권력을 잡았으나, 이각과의 갈등, 서부 세력과의 전투, 헌제의 탈출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부하에게 배신당하여 죽임을 당했으며, 그의 잔혹함과 권력욕은 후한 말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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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시인이었던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으로 인해 후대 평가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 후한의 거기장군 - 동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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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현은 후한 말 예장 태수로, 주호와의 갈등으로 서성에서 피살되었으며 제갈량과 제갈균을 길렀다.
곽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곽사 |
다른 이름 | 곽다 |
출생지 | 융창현, 간쑤성 |
사망일 | 197년 |
사망지 | 메이현, 산시성 |
직업 | 군사 장군, 정치가, 군벌 |
작위 | 메이양후 |
관직 | |
거기장군 | 195년–197년 |
군주 | 헌제 |
후장군 | 192년–195년 |
군주 | 헌제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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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경력
192년 동탁이 왕윤에게 죽자 이각, 장제, 번조 등과 함께 1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왕윤과 동탁 제거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이 과정에서 여포와 일대일 결투를 벌였으나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194년 마등이 한수와 결탁해 장안을 공격해오자 번조와 함께 출격해 마등군 1만 명을 베었고, 마등에게 협력한 강족도 격파하였다.
195년 이각이 번조를 살해하고 곽사와 서로 공격하였다. 이각은 헌제를 위협해 자신의 영으로 옮기고 궁실을 불태웠다. 이후 곽사의 공격으로 화살이 임금 있는 곳까지 날아왔고 이각의 귀에도 화살이 적중하였다. 장제가 둘을 화해시켰고, 헌제가 동쪽으로 귀환할 때 곽사는 양봉, 동승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그러나 곽사는 헌제를 습격하고 이탈하여 이각, 장제 등과 힘을 합쳐 헌제를 추격하였으나, 조조의 대공격으로 군대가 궤멸되었다(삼보의 난).
이후 이각과 함께 도적이 되었으나 197년 부하 오습에게 배신당해 죽임을 당했다. 동승의 술회에 따르면, 이각과의 전투에서 병사 수백 명으로 이각군 수만 명을 격파했을 정도로 강용한 무사였다고 한다.[3]
2. 1. 동탁 휘하 활동
양주에서부터 동탁을 따랐으며, 동탁의 초창기 지지자로서 황건적 진압, 양주 전투, 동탁 토벌 연합군과의 전쟁 등 동탁의 주요 전투 대부분에 참여했다.[3]동탁이 동쪽 군벌들과 전쟁을 시작했을 때, 곽사는 우보를 보좌하여 미현의 방어를 강화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들은 요새를 건설하고 동탁이 수도를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기기 전에 그곳에 30년 치 식량을 비축했다. 호진과 여포가 손견에게 크게 패하고 동탁이 장안으로 후퇴한 후, 우보, 곽사, 이각은 반동탁 연합군과의 최전선이었던 산(현재의 산시성)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연합군은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고 곽사와 이각과의 싸움에 집중하지 않았기에, 선임 장군 주준은 그의 오랜 친구인 도겸에게 동탁 군대와 싸우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1] 도겸은 동탁과 일반적인 동맹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예 단양병 3,000명을 보내 주준이 중모현에서 곽사와 이각과 싸우는 것을 도왔지만, 주준은 완전히 패배했다. 곽사, 이각, 장제는 이후 조조가 막을 수 없었던 진류와 영천 군에서 약탈을 감행했고, 그곳의 많은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다.[2]
3. 장안 전투
192년 동탁이 사도 왕윤에게 죽자 서량에서 동료 이각, 장제, 번조 등과 함께 1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여포와 정식으로 일대일 결투를 하였으나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3]
194년 마등이 한수와 결탁해 장안을 공격해오자, 곽사는 번조와 함께 출격해 마등군 1만 명을 베었고 마등에게 협력한 강족도 격파하였다.[3]
3. 1. 동탁 암살과 장안 점령
192년 동탁이 사도 왕윤에게 암살당했을 때, 곽사는 수도 밖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번조, 이각, 장제와 함께 양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우보를 지도자로 삼으려 했으나, 우보는 부하 호적아(胡赤兒)에게 살해당했다.[3]곽사는 이각, 장제, 번조 등과 함께 왕윤에게 사면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윤은 이들을 제외한 동탁의 다른 부하들에게만 사면령을 내렸다. 이에 가후의 제안에 따라 장안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초기에는 수천 명의 병사만 따랐으나, 점차 세력이 늘어났다. 서영과 호진이 양주군에 맞서 싸웠으나, 서영은 전사하고 호진은 반란군에 합류했다.[3]
장안 성벽 밖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곽사는 여포와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 곽사는 여포의 창에 찔려 패배했지만, 상처에서 살아남았다. 양주군은 여포를 성 안으로 몰아냈고, 장안을 포위했다. 왕윤이 자결한 후, 반란군은 장안을 장악하고 헌제를 인질로 잡았다. 이들은 황제 임명권을 장악하여 한나라 중앙 정부 내에서 권력을 확보했다.[3]
4. 권력 장악과 통치
그 후 곽사와 이각, 번조, 장기는 높은 관직을 요구했다. 곽사와 이각은 황제를 암살하고 황위를 찬탈할 생각까지 했지만, 번조와 장기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반란군의 지도자였던 이각은 조정의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마음대로 관리를 좌천시키고 승진시켰다.
194년, 한수, 마등, 유언의 서부 세력이 연합하여 이각, 곽사, 번조, 장기가 통제하는 한나라 중앙 정부에 도전했다. 이각은 조카 이리(李利)와 곽사, 번조를 파견하여 연합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연합군은 장안 서쪽 약 약 20.92km 지점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이리는 연합군의 군수 물자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번조에게 적을 추격하여 전멸시키라고 명령했지만, 번조는 한수와의 우정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이리는 장안으로 돌아와 이 사건을 이각에게 보고했다. 이각은 연회를 열어 번조를 배신 혐의로 공개 처형했다.
곽사는 아내의 질투심 때문에 이각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곽사의 아내는 남편이 이각의 첩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여, 이각이 준 음식에 독을 타고 남편에게 이각을 믿지 말라고 설득했다. 곽사는 이각의 연회에서 술에 취해 자신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구토를 유발하기 위해 액체 변을 섭취했다. 이는 이각을 불쾌하게 했고, 두 사람은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이각은 헌제를 납치하고 곽사는 황제의 신하들을 납치했다.
4. 1. 조정 장악과 전횡
192년, 동탁이 왕윤 등에 의해 암살되었을 때 이각·곽사는 동방에 있었지만, 가후의 진언을 받아들여 동탁의 보복에 나서 여러 군을 모아 장안을 탈환했다.[1]헌제를 옹립하고 왕윤을 죽인 후 후장군 지위에 올라 이각·번조 등과 함께 조정을 지배했다.[1] 이각은 조정의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마음대로 관리를 좌천시키고 승진시켰다. 이 전횡 기간 동안 병사를 풀어 성읍을 약탈하게 하여 삼보의 민중은 기아에 빠졌고 "2년 동안 서로 잡아먹었다"고 한다. (삼국지 동탁전)[1]
194년, 마등이 이각에게 사적인 교제를 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한수 등과 결탁하여 장안을 공격해 왔다.[1] 곽사는 번조와 함께 출격하여 마등군 1만여 명을 참수했다.[1] 또한, 마등에게 협력하던 강족도 격파했다.[1]
동료이자 소꿉친구인 이각과는 술자리를 열고, 서로의 진영에서 숙박하는 사이였다.[1] 그러나 후에 이각이 곽사에게 첩을 주었다고 의심한 아내에게 속아 대립하여 항쟁을 벌이게 되었다.[1]
4. 2. 서부 세력과의 전투
194년 마등이 한수와 결탁해 장안을 공격해오자, 곽사는 번조와 함께 출격해 마등군 1만 명을 베었고 마등에게 협력한 강족도 격파하였다.[3]이각은 조카 이리(李利)와 곽사, 번조를 파견하여 한수, 마등 연합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연합군은 장안 서쪽 약 약 20.92km 지점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이리는 연합군의 군수 물자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번조에게 적을 추격하여 전멸시키라고 명령했지만, 번조는 한수와의 우정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이리는 이 사건을 이각에게 보고했고, 이각은 연회를 열어 번조를 배신 혐의로 공개 처형했다.
4. 3. 이각과의 갈등
195년 2월, 이각이 번조를 살해하면서 이각과 곽사는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3] 3월, 이각은 후한 황제인 헌제를 위협해 자신의 영으로 옮기고 궁실을 불태웠다. 이후 곽사의 공격으로 화살이 임금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고 이각의 귀에도 화살이 적중하였다.당시 곽사의 질투심 많은 아내 Qiong 부인은 남편이 이각의 첩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여 남편이 이각의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녀는 이각이 준 음식에 독을 탔고, 남편에게 이각을 너무 믿지 말라고 설득했다. 곽사는 이각의 연회에서 술에 취해 자신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구토를 유발하기 위해 액체 변을 섭취했다. 이는 이각을 불쾌하게 했고, 두 사람은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이각은 헌제를 납치하고, 곽사는 황제의 신하들을 납치했다. 장안에서 격전이 매일 벌어졌고, 헌제는 가후에게 휴전을 요청하도록 했다.
5. 몰락과 죽음
그러나 상황은 통제 불능 상태였다. 격전이 매일 골목이나 시장에서 수십 차례 벌어졌다. 빈번한 전투로 인해 장안은 주민들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헌제는 가후에게 이각과 곽사 사이에 휴전을 요청하도록 했고, 가후의 말을 들은 그들은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했다.[3]
이후 곽사는 미현으로 돌아갔고 황제를 되찾기 위한 추가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으며, 이각은 장안을 점령했다.
5. 1. 헌제 탈출과 세력 약화
195년 이각이 번조를 살해하고, 이각과 곽사는 서로 공격하였다.[3] 장제가 중재에 나서기 전까지, 이각은 헌제를 위협해 자신의 영으로 옮기고 궁실을 불태웠으며, 곽사의 공격으로 화살이 임금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고 이각의 귀에도 화살이 적중하였다. 195년 6월 장제가 섬현으로부터 와서 둘을 화해시켰고, 7월 헌제가 동쪽으로 귀환할 때 곽사는 양봉, 동승 등과 함께 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8월 곽사는 헌제를 습격하고 무리에서 이탈하였고, 이각, 장제 등과 힘을 합쳐 헌제를 추격하였으나 헌제가 구원을 요청한 조조의 대공격으로 완전히 군대가 궤멸되었다.이각과 곽사 간의 내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헌제는 장안에서 몰래 빠져나왔고, 백파적의 수장 양봉에게 구출되었다. 양봉은 동승, 양정, 서황과 함께 황제를 추격하는 군대를 이끌던 곽사를 격파했다. 곽사는 헌제를 되찾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하기 위해 이각에게 돌아갔으나, 양정을 격파하는 등 초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양봉과 동승에게 밀려났다.
이후 조조는 헌제를 장악하는 새로운 패권자가 되었다. 이각과 곽사의 세력은 이전의 내분과 헌제의 상실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다.
5. 2. 최후
197년 미현에서 부하 오습에게 배신당해 죽었다.[3] 오습은 곽사의 잔여 세력을 이끌고 이각에게 합류했다. 곽사의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다.6. 평가
동승의 술회에 따르면, 곽사는 병사 수백 명으로 이각 군 수만 명을 격파했을 정도로 강용한 무사였다고 한다.[3] 곽사의 잔혹함과 권력욕은 후한 말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7. 기타
일부 판본에는 곽범으로 기록되어 있다.
8.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헌제가 자력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이각·곽사는 헌제를 쫓다가 조조군에게 참패했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3]
9. 부하
참조
[1]
서적
Houhanshu
[2]
서적
Sanguozhi
[3]
서적
선주전(先主傳) 주석 [헌제기거주(獻帝起居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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