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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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와나성은 일본 미에현 구와나시에 위치했던 성으로, 가마쿠라 시대에 축조된 이후 여러 번의 개축과 소실을 거쳤다. 1601년 혼다 다다카쓰가 구와나번의 영주가 되면서 대대적인 증축이 이루어졌으나, 1701년 화재로 천수각이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 에도 시대에는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과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이 번주를 역임했으며, 막부 말기에는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가 교토 치안을 담당했다. 보신 전쟁에서 성은 항복했고, 메이지 시대에 석벽이 훼손되어 방파제로 사용되었다. 현재 료준지 산문, 해자 일부, 석벽 등이 남아있으며, 1928년에는 혼마루와 니노마루가 큐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2003년에는 반류 망루가 외관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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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나성 | |
---|---|
기본 정보 | |
![]() | |
다른 이름 | 오기 성 (Ōgi-jō) 아사히 성 (Asahi-jō) |
위치 | 구와나, 미에현, 일본 |
좌표 | 35°03′52.65″N 136°41′55.4″E |
군사 시설 정보 | |
종류 | 평지 스타일의 일본의 성 |
건축 시작 | 1601년 |
건축가 | 혼다 다다카쓰 |
사용 시기 | 에도 시대 |
철거 | 1873년 |
상태 | 부분적으로 재건됨 |
공개 여부 | 공개 |
역사 | |
건설 연도 | 게이초 6년 (1601년) |
개축 | 마쓰다이라 (히사마쓰) 사다카쓰 |
통치 가문 | 혼다 씨 마쓰다이라 씨 |
폐성 연도 | 메이지 6년 (1873년) |
구조 | |
구조 | 제곽식 평성 |
천수 구조 | 복합식 층탑형 4중 6층 (1635년 건축, 현존하지 않음) |
주요 건축 자재 | 석벽, 해자 |
재건축 | 반류 야구라 (외관 복원) |
문화재 정보 | |
문화재 지정 | 미에현 사적 |
2. 역사
헤이안 시대 말기와 무로마치 시대 동안, 현대의 구와나 지역은 十楽の津|주라쿠노쓰일본어로 알려졌으며, 이세만의 주요 항구이자 상인 길드가 관리하던 곳이었다. 1515년 시인 소초는 이곳을 1,000채가 넘는 집, 사찰, 여관이 있는 주요 도시로 묘사했다. 이 항구는 "구와나 삼성"으로 알려진 세 개의 요새(히가시 성, 니시 성, 미사키 성)로 보호받았다. 센고쿠 시대에 이 지역은 나가시마를 중심으로 한 ''잇코잇키'' 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나,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제거된 후 그의 장군 다키가와 카즈마사에게 하사되었다. 노부나가 사후, 다키가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대하여 영토를 잃었다. 오다 노부카츠가 잠시 이 지역을 소유했지만, 오다와라 전투 이후 히데요시에게 몰수되었다. 1595년, 히데요시는 우지이에 유키히로에게 22,000 고쿠의 영지를 주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몰수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의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에서 구와나가 기소강, 나가라강, 이비강에 의해 형성된 나가시마 삼각주 서쪽의 나가라강 어귀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함을 인지했다. 에도와 교토를 잇는 도카이도의 여행객들은 다리가 없어 구와나 항구에서 오와리국 아쓰미 반도로 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혼다 타다카츠를 가즈사국 오타키 성에서 구와나로 재배치하고 옛 히가시 성 부지에 강둑을 따라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혼다의 지휘 아래 구와나주쿠는 번성하는 역참 마을로 발전했다. 1616년, 혼다가 히메지 번으로 전봉되면서 구와나 번은 마쓰다이라 씨(松平氏)의 분가가 통치하게 되었다.
1701년 화재로 성과 성곽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덴슈 재건을 불허했고, 나머지 성은 소규모로 복원되었다.
바쿠마츠 시대 구와나는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씨를 지지한 아이즈 번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동생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가 통치했다. 그가 북일본에서 삿초 동맹과 싸우는 동안 성은 무혈 항복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 군대에 의해 불태워졌고, 석벽은 방파제를 만들기 위해 욧카이치 항으로 철거되었다.[1]
1928년 혼마루와 니노마루 일부, 석벽과 해자 잔해를 포함한 공원이 조성되어 九華公園|큐카 공원일본어이라 불렸고, 1942년 성터는 미에현 지정 사적이 되었다.[2] 현재 건물에는 재건된 야구라 두 채가 있으며, 성터는 구와나역에서 도보 20분 거리이다.
구와나 시가 동쪽에 위치하며 이비 강에 접한 수성이다. 성 북쪽에는 도카이도 구와나 숙(시치리의 나룻터)이 있어 교통 요충지였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차 "구와나"에 당시 성이 그려져 있다.
현재 성터에는 건물이 없고 돌담과 해자만 남아 九華公園|구카 공원일본어으로 정비되어 있다. 2003년 국토교통성 수문 통합 관리소 건조로 반룡 망루가 외관 복원되었는데, 1층은 수문 관리소, 2층은 구와나 시 관할 전망대 겸 자료실이다.
2. 1. 가마쿠라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186년 구와나 유키쓰나가 가마쿠라 막부의 명에 의해 구와나 지역에 처음으로 성을 쌓은 것이 구와나 성의 시작이다.[2] 이후 지역 토호들이 동성(東城), 서성(西城), 미사키성(三崎城)을 쌓았고, 이 셋을 합쳐 구와나 3성으로 불렀다. 구와나성은 이 중 동성에 해당하며, 1513년 이토 부자에몬이 거관을 조성한 것이 시초이다.1574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세를 공략한 후, 부장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나가시마성 성주로 부임하여 구와나의 여러 성에 가신들을 배치하였다. 1576년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가신 핫토리 가즈마사에게 명해 성을 보수하게 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의 일환으로 하시바 히데요시에 가담한 오다 노부카쓰와 시바타 가쓰이에에 가담한 오다 노부타카가 싸울 때, 하시바 히데요시의 가신 아마노 가게토시가 수장으로 입성했다. 노부타카가 죽고 하시바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카쓰가 대립하자, 1584년 오다 노부카쓰의 구원에 응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담해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수장으로 사카이 다다쓰구,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입성했다.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해 전투는 종결되었다.
1587년 니와 우지쓰구, 1591년 히토쓰야나기 나오모리가 입성했으며, 성을 개축하였다. 이때 동성에서 구와나 성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1595년 우지 ಬಿಜೆ 유키히로가 성주로 부임한 후, 간베성에서 천수각을 옮겨와 성을 개수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유키히로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담하였고, 전후 영지가 몰수되었다.
2. 2. 에도 시대
1616년 2대 번주 혼다 다다마사의 아들 혼다 다다토키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와 결혼하면서, 1617년 다다마사는 하리마국 히메지번으로 옮겨졌다. 그 대신 야마시로국 후시미번에서 마쓰다이라 사다카쓰가 들어왔다. 이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1617년~1710년, 1823년~1871년)과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1710년 ~ 1823년)을 포함하여 총 3가문 19대가 신판, 후다이 다이묘로서 성주로 부임하였다.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5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시게가 성주였던 1701년, 구와나 시가지 대부분이 불에 타는 큰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천수도 함께 소실되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1823년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이 무사시국 오시번으로 옮겨가자,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이 다시 번주로 부임했다. 이때 마쓰다이라 사다쓰나(진코쿠 공)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슈코쿠 공)를 기리는 진코쿠슈코쿠 신사가 성내에 건립되었다.
4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는 교토의 치안을 담당했는데, 이는 그의 친형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도 교토 치안을 담당했기 때문에 형제가 함께 교토의 치안을 담당한 것이다. 대정봉환 이후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구 막부군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 번주가 없는 구와나 성에서는 신정부군에 대항할 것인지 아니면 항복할 것인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신사의 제비뽑기를 통해 항전이 결정되었지만, 하급 번사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성을 넘겨주었다. 이때 성에 불을 놓아 항복의 뜻을 나타냈다.
겐와 3년(1617년) 2대 다다마사는 하리마 히메지번으로 옮겨졌고, 대신 마쓰다이라 사다카쓰가 들어왔다.
겐로쿠 14년(1701년) 마쓰다이라 사다시게 대에 구와나 시가지의 절반 이상을 태우는 큰 화재가 발생했고, 이때 천수도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호에이 7년(1710년) 사다시게는 에치고 다카다번으로 옮겨졌고, 대신 마쓰다이라 (오쿠다이라) 타다마사가 들어와 7대째 이어졌지만,
분세이 6년(1823년)에 무사시 오시번으로 옮겨졌다.
대신 마쓰다이라 (큐마쓰) 사다나가가 들어왔다. 이전에 다카다로 옮겨졌던 큐마쓰 가문의 재입성이었다.
이때 번조인 마쓰다이라 사다쓰나 (친국공)와 실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수국공)를 모시는 진국수국 신사를 성 안에 권진했다.
막부 말기에는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친동생인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가 번주가 되어, 교토 쇼시다이로서 형과 함께 교토의 치안을 담당했다.
다이세이 봉환 후의 게이오 4년(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구 막부군과 함께 사다아키도 에도로 향했다.
번주 부재의 구와나 성에서는 항전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격론이 벌어졌고 진국수국 신사의 신점(神籤)에 의해 상층부에서는 항전으로 결정했지만, 하급 번사의 맹반발을 받아 결국 무혈 개성했다. 메이지 정부군은 이 때 다쓰미 망루를 불태워 개성의 증거로 삼았다.[2]
2. 3. 막부 말기 ~ 메이지 시대
바쿠마츠 시대 구와나성은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씨의 주요 지지자이자 아이즈 번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가 통치했다. 그러나 그가 북일본에서 삿초 동맹과 싸우는 동안 부재하자, 성은 전투 없이 황실군에 항복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의 군대에 의해 불태워졌고, 석벽은 방파제의 일부를 형성하기 위해 욧카이치 항으로 철거되었다.[1]다이세이 봉환 이후 게이오 4년(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구 막부군과 함께 사다아키도 에도로 향했다. 번주 부재의 구와나성에서는 항전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격론이 벌어졌고 진국수국 신사의 신점(神籤)에 의해 상층부에서는 항전으로 결정했지만, 하급 번사의 맹반발을 받아 결국 무혈 개성했다. 메이지 정부군은 이 때 다쓰미 망루를 불태워 개성의 증거로 삼았다.
쇼와 3년(1928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서거 100주년에 혼마루, 니노마루 일대를 정비하여 九華公園|큐카 공원일본어으로 했다. 쇼와 17년(1942년)에는 미에현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2]。
현재 건물에는 두 개의 재건된 야구라가 포함되어 있으며,[1] 성터는 구와나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다.[1] 헤이세이 15년(2003년)에는 국토교통성 수문 통합 관리소를 건조하면서 반룡 망루를 외관 복원했다.
3. 구조
이비강에 접한 수성이다. 혼마루를 중앙에 두고 남쪽에는 니노마루, 동쪽에는 아사히마루, 북쪽에는 산노마루를 배치하였으며, 그 주변을 몇몇 구루와로 둘러싼 제곽식 평성(平城)이다. 성의 북에서 동으로는 이비강이 흐르고 있어 천연의 해자로 삼았다. 혼다가 건설한 구와나성은 대략 삼각형 모양이었으며, 한쪽 면은 기소강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내부에는 길이 150m, 너비 60m의 직사각형 모양의 내곽이 있었고, 여기에는 4층 6단의 덴슈와 각 모서리에 3층 3단의 야구라(망루) 3개가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성과는 달리, 내곽 주변에는 주거 공간이 아닌 방어 구역을 형성하는 작고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구획이 있었다. 성 전체는 낮은 석벽과 24개의 2층 야구라, 12개의 1층 야구라, 46개의 문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공격이 예상되는 성의 서쪽 지역은 물 해자로 추가적으로 보호받았다.
현재 성터에는 건조물 없이 석벽과 해자만 남아있으며, 규카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2003년 국토교통성의 수문통합관리소 건물을 반류 망루 터에 건립해 외관만 복원했다. 2층 망루 중 1층은 수문관리소로 사용되며, 2층은 구와나 시 관리하의 전망대 겸 자료실로 이용되고 있다.
4. 현재
현재 성터에는 건조물 없이 석벽과 해자만 남아있으며, 규카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1942년에는 성터가 미에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 2003년 국토교통성의 수문 통합 관리소 건물을 반류 망루 터에 건립해 외관만 복원했는데, 2층 망루 중 1층은 수문 관리소로 사용되며, 2층은 구와나시 관할의 전망대 겸 자료실로 이용되고 있다.
성터는 구와나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다.
4. 1. 남아있는 건조물
구와나시 료준지(了順寺)의 산문은 구와나 성의 성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다. 산노마루 어전은 미에현 미에군 아사히 정의 조센보(浄泉坊)에 이전되어 현재에도 남아있다. 그 밖에도 해자가 일부 남아있으며, 석벽 또한 해안을 따라 남아있어 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욧카이치시의 욧카이치 항 건설 당시, 구와나 성의 석벽 일부를 사용하여 방파제를 만들었다. 이 방파제는 '시오후키 제방'이라고 불리는데, 시오후키(潮吹き)란 물이 뿜어져 나오는 현상을 뜻한다. 제방 위에는 빈 구멍이 뚫려 있어 파도의 힘을 약화시키도록 설계되었다. 현재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메이지 정부가 부국강병과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사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
5. 교통
JR 도카이 긴테쓰 구와나역 및 산기 철도 니시쿠와나 역에서 하차하여 버스로 환승, 〈혼초〉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다. 또는 JR간사이 본선・긴테츠나고야선・요로 철도요로선 구와나역에서 도보 약 15분 거리에 있다.
6. 주변 정보
참조
[1]
웹사이트
Kuwana-jo ato
https://www.bunka.pr[...]
Mie Prefecture
2021-08-20
[2]
웹사이트
桑名城跡
http://www.bunka.pre[...]
三重県教育委員会
201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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