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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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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치관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황해도 도사를 거쳐 평안도 도체찰사의 종사관, 병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을 지지하며 의금부 지사,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거쳤고,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에 책록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함길도 도체찰사,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건주위 토벌에 공을 세우고, 성종 때 원상으로 정무를 주관하다 1470년에 사망했다. 그는 청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여러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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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구치관
작위조선 제23대 영의정
임기1466년 6월 9일~1466년 12월 5일
출생일1406년
사망일1470년
별명자는 이율(Iryul)·경률(Gyeongnyul)
가문능성 구씨
학력문과에 급제
경력
종교
종교유교(성리학)

2. 생애

구치관은 1434년(세종 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예문관검열, 예조정랑, 호조좌랑,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1439년(세종 21년)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어 황해도 흉년 대책을 해결하고 세종에게 건의하여 세금을 감면시켰다. 1449년 평안도 도진무의 종사관으로 특별 임명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에는 병조정랑으로 평안도 도체찰사 김종서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황보인으로 교체된 뒤에도 종사관으로 유임되었다. 그해 의주읍성의 개보수를 보고했고, 성균관 사예, 의정부검상, 사복시소윤, 사복시윤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에 의해 임시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로 임명되어 함길도에 파견되었고, 이후 지사간원사, 대호군, 부지승문원사, 의금부지사를 거쳐 1454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단종의 선위에 참여하였다.

세조 즉위 후 우승지에 제수되었고, 1455년(세조 1년)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고, 1457년(세조 3년) 병조참판, 1460년 이조판서, 1461년 숭록대부로 승진했다. 함길도 도체찰사, 1462년에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거쳐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이후 의정부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1470년(성종 1년) 신숙주, 한명회 등과 함께 원상(院相)으로서 정무를 주관하였고, 내불당(內佛堂) 감조 도제조(監造都提調)를 맡아 《대전》의 이전을 교정했다. 같은 해 능성부원군으로 승작되었으며, 사재감제조(提調)로서 사재감을 감독했다. 9월 13일 사망하자 성종은 조회를 정지하고 예장하였다.

2. 1. 초기 활동

1434년(세종 16년)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 예문관검열, 예조정랑, 호조좌랑,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내고 1439년(세종 21년)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어 그해 11월 황해도 관찰사 허조(許稠)와 함께 황해도 흉년 대책을 해결하였다. 이어 세종에게 건의하여 황해도의 구휼을 얻어내고 세금을 감면시켰다.

1443년(세종 25년) 인사 문제에 도관 주부(導官注簿) 재직 중 이조 좌랑 이계선(李繼善)의 처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지적당했다.

1449년 평안도 도진무의 종사관으로 특별 임명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야인이 평안도를 약탈하자 문종의 명으로 파견되어 살펴보고 돌아왔다. 그해 병조정랑으로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 김종서의 종사관이 되었다. 도체찰사가 황보인으로 바뀌었는데 의주읍성 수축 당시의 문제로 파직되었으나 황보인의 보고로 복직, 다시 종사관이 되었다. 그해 의주읍성의 개보수를 보고했다. 같은 해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이후 의정부검상을 거쳐 사복시소윤(司僕侍小尹), 사복시윤을 역임하였다.

2. 2. 관료 생활

1453년(단종 1년) 산릉도감 별감으로 있다가 일처리 잘못으로 의금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단종이 이를 무마시켰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에 의해 임시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로 임명되어 함길도에 파견, 경성부사 이경유(李耕田+柔)를 참살하고 보공 대호군(保功 大護軍)으로 승진했다. 얼마 뒤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임명됐다가 대호군(大護軍)으로 전직했다. 그해 겨울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거쳐 의금부지사가 됐다. 1454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그해 부종묘 추향 대제(祔宗廟秋享大祭)의 찬례가 되어 제향참여자들을 시상할 때 채단초(綵段綃) 각각 1필(匹)을 하사받았다. 이어 명나라의 사신을 접견하고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되고 좌부승지 재직 중 단종의 선위에 참여하였다.

세조 즉위 후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년)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이후 이조참판으로 승진되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년) 병조참판, 1460년 이조판서,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거쳐 1461년 숭록대부로 승진했다. 이후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1462년에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뒤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고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이후 의정부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이 변경을 침범하자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에 특별 임명되어 토벌대 사령관으로 출정하였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예종 대에는 공신 능성군(綾城君)으로 조정에 입시했다.

2. 3. 생애 후반

1470년(성종 1년) 신숙주, 한명회 등과 함께 원상(院相)으로서 정무를 주관하였고, 내불당(內佛堂) 감조 도제조(監造都提調)를 맡아 《대전》의 이전을 교정했다. 같은 해 능성부원군으로 승작되었으며, 사재감제조(提調)로서 사재감을 감독했다. 9월 13일 사망하자 성종은 조회를 정지하고 예장하였다. 그는 훈신임에도 용모와 행동이 엄숙하고 확고하여 이익과 세력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몸가짐을 청백하고 검소하게 하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개성부윤 구성로
아버지목사 구양
어머니윤사영의 딸
부인청주 이씨 - 이중부의 딸
장남구경
손자구장손
손자며느리교하 노씨 - 노사신의 딸
장녀박휘에게 출가
차녀권영손에게 출가
삼녀경정공주의 외손자 양주 조씨 조선에게 출가
사녀유익후에게 출가


4.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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