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 마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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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다 마고베는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일본의 군담 소설과 연극에서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에도 시대의 군담 소설에서는 여인의 원수를 갚는 것을 돕는 인물로 등장하며, 덴메이 시대에는 조루리로 제작되어 인기를 얻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논개의 자살 공격으로 사망했다는 새로운 신화가 형성되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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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 마고베 | |
---|---|
인물 정보 | |
이름 | 기다 마고베 |
본명 | 기다 무네하루 |
별명 | 게야무라 로쿠스케 |
![]() | |
생애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출생 | 불명 |
사망 | 불명 |
묘소 | 오이타현 나카쓰시 야마쿠니정 게야무라 후쿠오카현 소에다정 가즈노 |
가문 정보 | |
가문 | 불명 |
가몬 | 뱀 눈알 |
가몬 설명 | 주군 겸 가신이 가토 기요마사이기 때문에 기요마사의 부하였으며 마고베에게 가몬이 부여되었을 수 있음. |
부모 | 사타케 간베에 |
정치 및 군사 정보 | |
주군 | 가토 기요마사 |
소속 | 가토 가문 |
2. 역사 속 기다 마고베
기다 마고베는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으로, 900석 이상의 영지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가토 16장"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임진왜란)에 참전하여 3번대 시모카와 마타자에몬 휘하에서 철포수 40명을 이끌고 종군하였으며, 전장에서는 모이를 두르고 있었다고 한다.[5]
『청정기(清正記)』와 『가토가전(加藤家伝)』[6]에는 가토 군의 우량카이(만주) 공격 시 모리모토 가즈히사와 선봉 경쟁을 벌이다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기요마사가 쓴 편지에 기다 마고베의 이름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전사가 아닌 다른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이 있다.[2]
기다 가문은 가토 가문이 몰락한 후, 호소카와 가문에 봉사하였다.[2]
2. 1. 기다 마고베의 가계
기다 마고베 사후, 가토 기요마사는 친척을 찾아 마고베의 이름을 계승시켰다. 동생으로 여겨지는 기타 손베에 겐바(후에 기타 겐바 마사카쓰로 개명)는 구마모토성 축성 등에 종사하였다.[2] 가토 가문이 개역된 이후에는 낭인 생활을 거쳐 아마가사키번 아오야마씨에 수석 가로로 봉직하였다.또 다른 동생 기타 각우에몬은 나카쓰번 호소카와씨에 봉직하였다. 이후 호소카와 가문을 따라 히고로 이주했으며, 각우에몬의 자손은 규슈 일대에 퍼졌다. 겐바의 자손은 효고현 아마가사키에서 간사이 일대, 그리고 아오모리에서 도호쿠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3. 전설 속 게야무라 로쿠스케
기다 마고베는 '게야무라 로쿠스케'라는 이름으로 여러 전설에 등장한다. 에도 시대 군담 소설인 《도요토미 칭제이 군담》, 《진제어군기》, 《풍신진제군기》 등에는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여인의 원수를 갚는 것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1] 이 이야기는 덴메이 연간에 인형 조루리 《히코야마 곤겐 서조검》으로 상연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가부키, 영화 등으로 각색되었다.[1]
1960년대에는 한국 민간 전승인 논개 전설과 연결되어 진주성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3. 1. 《히코야마 곤겐 서조검》 줄거리
덴메이 6년(1786년) 다케모토 센타로좌에서 초연된 우메노 시모카제와 지카마쓰 야스조 합작의 11단 시대물 조루리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기 직전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1]모리 씨의 검술 사범 요시오카 이치미사이가 교고쿠 다쿠마의 기습으로 살해당하고, 그의 가족들은 복수를 다짐한다. 게야무라에 사는 농부 로쿠스케는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요시오카 이치미사이의 제자였다. 로쿠스케는 미진 단조(교고쿠 다쿠마)의 계략에 빠지지만, 결국 그의 정체를 밝혀내고 복수를 돕는다.
로쿠스케는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이 되어 '기다 마고베'라는 이름을 받고, 임진왜란(1592~1598)에 참전한다.
특히 검의 스승 요시오카 이치미사이(吉岡一味斎)의 딸이자 이치미사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오손(お園)과 로쿠스케가 재회하여 혼례를 올리는 에피소드 등을 그린 9단째의 「케야무라(毛谷村)」가 많이 상연된다.
3. 2. 전설의 배경
오이타현 나카쓰시 야마쿠니정 게야무라와 후쿠오카현 소에다정에는 기다 마고베(게야무라 로쿠스케)의 무덤이 있다.[2] 사가현 가라쓰시 나고야성에는 '로쿠스케샤'라는 사당이 있으며, 조선에서 사망한 기다 마고베의 시신이 소금에 절여져 이곳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3] 1716년에 작성된 《게야무라 로쿠스케 약연기》에는 그가 게야무라에서 62세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 한국에서의 새로운 신화
1960년대 한국의 민간 전승 논개 전설과 연결되어 진주성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4] 논개에 대한 당대 기록은 없으며, 비교적 초기 기록에는 자살 공격 희생자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후대의 여러 『임진록』 사본에서는 희생자를 가토 기요마사 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지칭하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당대 한국 자료에는 한국인들이 기다 마고베(Kida Magobee) 또는 기다 마고베(Keyamura Rokusuke)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거나, 그를 자살 공격과 관련지었다는 증거가 없다.[4]
기다 마고베를 희생자로 특정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1951년 다마가와 이치로의 일본 소설 《경성, 진해, 부산》에서 이 새로운 신화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었고,[4] 1962년 박종화의 《논개와 계월향》에서 희생자를 기다 마고베로 처음 지목했다.[2]
새로운 신화는 다음과 같다.
참조
[1]
서적
Hiko-san Gongen chikai no sukedachi
Japan Arts Council
[2]
서적
Bunroku Keichō no eki [Jinshin-Teiyū Waran]
[3]
학술지
"Hiko-san Gongen chikai no sukedachi" ron
[4]
서적
Kīsen: "Mono iu hana" no bunkashi
Sakuhinsha 作品社
[5]
문서
加藤家傳
[6]
문서
加藤家傳の説明
[7]
문서
木田家に関する記述
[8]
문서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에 대한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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