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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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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응남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6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홍문관, 제주 목사 등을 거쳐 좌의정까지 역임했다. 1591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일본의 침략 준비를 보고하고,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 것을 알렸다. 임진왜란 중에는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전서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에서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비판했으며, 1598년에 사망하여 사후 호성공신 2등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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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응남
원어명金應南
군주조선 선조 이연
출생일1546년
출생지한성부
사망지한성부에서 병사
사망일1598년 12월 21일 (1546년 1월 1일 출생)
거주지조선 한성부
정당무소속
본관원주
별명자 중숙(重叔), 호 두암(斗巖), 시호 충정(忠靖)
학력1568년 증광문과에 을과 급제
경력문관, 작가, 시인, 문장가
직책前 조선국 의정부 좌의정 (前 朝鮮國 議政府 左議政)
임기1595년 ~ 1597년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한산이씨(韓山李氏), 해남윤씨(海南尹氏)
자녀적자 김명룡(金命龍), 서자 김명시(金命時)
부모아버지 김형, 어머니 서흥 김씨
친척장인 이지번, 처남 이산해

2. 생애

김응남은 1568년(선조 1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남응운, 김상용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전서(篆書)의 대가였으며, 특히 노수신, 이산해와 함께 만든 조광조의 신도비명은 최고의 역작으로 칭송받았다. 이산해는 김응남의 처남이다.[1]

임진왜란 시기에는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비판하는 입장을 보였다.[1] 1597년 병을 얻어 1598년 사망하였고, 1604년 호성공신 2등으로 원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1]

2. 1. 관직 생활

1568년(선조 1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예문관, 홍문관, 제주 목사, 좌부승지, 대사헌,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일본이 쳐들어 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고하고 조선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지 않겠다고 변무하였다.[1] 이 당시, 일본에게 점령된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명을 정벌하려 한다는 풍문이 일본으로부터 복건(福建)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같은 해 11월, 한양에 돌아와 보고한 이후, 한성부판윤(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 격)이 되었다.[1]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부체찰사로서 평안도로 피란하는 왕을 따라나섰고, 이조판서가 되어 왕을 따라 환도한 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1]

2. 2. 임진왜란과 이순신, 원균과의 관계

김응남은 임진왜란 시기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비판하는 입장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1597년 3월 10일(음력 1월 23일) 기록을 보면, 김응남은 이순신의 전공이 그의 부하인 정운의 독촉으로 마지못해 출전하여 거둔 것이라고 평가했다.[1] 3월 14일(음력 1월 27일) 기록에는 "수군으로서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발언하는 등 윤두수와 함께 이순신에 대해 경계심과 반감을 드러냈다.[1]

2. 3. 말년

1597년(정유년) 선조 30년에 개성에서 경리(經理) 양호를 만난 후 병을 얻었으나, 양호가 지시한 군량 담당 업무로 인해 병을 이유로 사직하지 못하였다.[1] 이후 영남으로 내려갔으나, 같은 해 10월 출발하여 풍기에서 병세가 심해져 가마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1] 같은 해 11월, 한양으로 돌아왔으며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중하여 사양하였고, 사은사는 정곤수로 대체되었다.[1] 1598년 음력 5월, 선조는 허준을 보내어 김응남을 간병하게 하였으나, 허준은 이미 늦었다고 하였고, 선조는 내의원 약재를 내주면서까지 간병할 것을 지시하였다.[1] 그러나 같은 해 음력 11월 24일, 김응남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1]

3. 사후 평가

김응남은 당대와 후대에 걸쳐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그는 전서(篆書)의 대가로, 남응운, 김상용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특히 노수신, 이산해와 함께 만든 조광조의 신도비명은 최고의 역작으로 칭송받았다.[1]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원균의 관계에서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선조편에는 그가 원균을 두둔하고 이순신을 경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1] 1597년 3월 10일(음력 1월 23일)에는 이순신의 전공을 그의 부하인 정운이 독촉하여 마지못해 이룬 것이라고 평가절하 했으며, 3월 14일(음력 1월 27일)에는 "수군으로서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발언하는 등 윤두수와 함께 이순신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1]

1598년 사망 이후,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으로 원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1]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김말손(金末孫)
할아버지김안우(金安祐)
백부(伯父)김침(金琛)
중부(仲父)김영(金瑛)
사촌동생[2]김두남(金斗南)호는 파강(巴江), 김영의 아들
조카김현룡(金見龍)김두남의 장남
조카김준룡(金俊龍)김두남의 차남
조카손자김경문(金敬文)김준룡의 장남
조카손자김인문(金仁文)김준룡의 차남
아버지김형(金珩)
어머니이름 미상김덕유(金德裕)의 딸
부인한산 이씨(韓山李氏)이지번(李之蕃)의 딸, 1642년 음력 6월 29일 사망[3]
아들김명룡(金命龍)1568년 출생
측실해남 윤씨(海南尹氏)[4]
아들김명시(金命時)1592년 출생
동생김기남(金起南)
장인이지번(李之蕃)
처남이산해(李山海)


5.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6. 관련 문화재

김응남 호성공신교서 및 관련 고문서는 보물 제1756호이다.

참조

[1] 서적 撫松小說
[2] 서적 撫松小說
[3] 서적 撫松小說
[4] 서적 撫松小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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