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대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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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낙동강 대공세는 1950년 9월, 한국 전쟁 중 북한군이 부산 교두보를 함락하기 위해 감행한 대규모 공세이다. 북한군은 병력과 물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이후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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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대공세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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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6.25 전쟁 |
전체 | 낙동강 방어선 |
날짜 | 1950년 9월 1일 - 9월 15일 |
장소 | 낙동강 방어선 전역 |
결과 | 유엔군의 승리 |
결과 상세 | 인천 상륙 작전의 발판 마련 유엔군이 전세를 역전하는 계기가 됨 북한군의 목표 달성 실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
지휘관 | |
지휘관 1 | 더글라스 맥아더 월턴 워커 존 H. 처치 에드워드 A. 크레이그 윌리엄 B. 킨 백선엽 김백일 유재흥 김홍일 |
지휘관 2 | 최용건 김책 김무정 리권무 김웅 |
병력 | |
병력 1 | 140,650명 |
병력 2 | 105,8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3명 사망The Times, August 24, 1950 17명 부상The Times, September 6, 1950 |
사상자 2 | 34,000명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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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
로마자 표기 | Nakdonggang daegongse |
영어 표기 | Great Nakdong Offensive |
2. 배경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래,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보다 인력과 장비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1] 북한의 전략은 모든 방면에서 유엔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고, 정면 공격과 함께 양 측면을 이중 포위하여 포위, 고립시킨 후 혼란 속에 퇴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은 많은 장비를 버리고 갔다.[2] 6월 25일 초기 공세부터 7월과 8월 초 전투까지, 조선인민군은 이 전략을 사용하여 유엔군을 효과적으로 격파하고 남쪽으로 밀어냈다.[16] 그러나 8월에 부산 교두보가 구축되면서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이 측면 공격을 할 수 없는 연속적인 전선을 유지했고, 우수한 유엔 군수 체계로 더 많은 병력과 물자가 투입되면서 수적 우위는 매일 줄어들었다.[3]
8월 5일 조선인민군이 부산 교두보에 접근했을 때, 그들은 네 개의 주요 접근로에서 동일한 정면 공격 전술을 시도했다. 8월 한 달 동안, 조선인민군 제6사단과 제7사단은 마산 전투에서 미군 제25보병사단과 교전하여, 초기 유엔군의 반격을 격퇴한 후 고마암 전투[4]와 배틀 마운틴 전투를 공격했다.[5] 이러한 공격은 잘 갖춰지고 대규모 예비대를 보유한 유엔군이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반복적으로 격퇴하면서 정체되었다.[6] 마산 북쪽에서는 조선인민군 제4사단과 미군 제24보병사단이 낙동강 돌출부 지역에서 격전을 벌였다. 제1차 낙동강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은 다수의 미군 예비대가 투입되어 격퇴되면서 강을 건너는 교두보를 유지할 수 없었고, 8월 19일 조선인민군 제4사단은 50%의 사상자를 내고 강 건너로 밀려났다.[7][8] 대구 지역에서는 조선인민군 5개 사단이 대구 전투에서 도시를 공격하려는 여러 차례의 시도에서 유엔군 3개 사단에 의해 격퇴되었다.[9][10] 특히 치열한 전투는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이 공격으로 거의 전멸한 볼링 앨리 전투에서 벌어졌다.[11] 동해안에서는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이 포항 전투에서 대한민국군에 의해 격퇴되었다.[12] 전선 전반에서 조선인민군은 이러한 패배로 고전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들의 전략이 실패한 전쟁에서 처음이었다.[13]
8월 말까지 조선인민군은 한계에 다다랐고, 원래 부대의 많은 수가 병력과 효용성이 크게 감소했다.[3][14] 군수 문제가 조선인민군을 괴롭혔고, 식량, 무기, 장비 및 보충병 부족은 그들의 부대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2][15] 8월 말까지 유엔 사령부는 북한군보다 더 많은 전투 병력을 한국에 배치했고, 유엔군의 공중 및 해상 우위는 북한군에게 매일 증가하는 불리함을 의미했다.[3] 조선인민군은 수백 대의 탱크를 잃었고, 부산 교두보 전투 당시 100대 미만의 탱크를 보유했지만, 미군은 600대의 탱크를 보유했다. 8월 말까지 조선인민군의 유일한 남은 우세는 그들의 주도권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병력은 높은 사기를 유지했고 대규모 공세를 허용할 만큼의 보급품을 갖추고 있었다.[16]
2. 1. 북한군의 전략과 전술
북한군 사령부는 낙동강 대공세를 계획하면서, 유엔 해군의 지원으로 인해 유엔군을 포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11] 대신, 방어선을 돌파하고 붕괴시키기 위해 정면 공격을 감행하는 것을 유일한 성공의 희망으로 삼았다.[3] 소련으로부터 첩보를 입수한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를 따라 유엔군이 증강되고 있으며, 즉시 공세를 취하지 않으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7] 부차적인 목표는 대구를 포위하고 그 도시에 있는 유엔 부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군은 먼저 대구로 향하는 보급선을 차단하고자 했다.[14]북한 지휘부는 새로운 공세를 예상하여 병력을 증강했다.[18] 원래 2개 군단 10개 사단에서 여러 독립 여단을 포함하여 14개 사단으로 확장되었다.[20] 새로운 병력은 북한의 예비 병력에서 투입되었다.[19] 최용건이 부사령관을, 김책이 전선 사령부를 지휘했다.[17] 동부의 제2군단은 김무정 중장이, 서부의 제1군단은 김웅 중장이 지휘했다. 제2군단은 제10사단, 제2사단, 제4사단, 제9사단, 제7사단, 제6사단, 제105기갑사단과 제16기갑여단, 제104경비여단을, 제1군단은 제3사단, 제13사단, 제1사단, 제8사단, 제15사단, 제12사단, 제5사단과 제17기갑여단을 지휘했다.[20] 이 병력은 약 97,850명에 달했지만, 그 중 3분의 1은 신병,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병사로 무기와 장비가 부족했다.[21][22]
8월 20일, 북한 지휘부는 휘하 부대에 작전 명령을 배포했다.[17] 이 계획은 유엔 방어선을 상대로 5개의 공격을 동시에 가하는 것이었다. 이 공격은 유엔 방어군을 압도하고 최소 한 곳에서 방어선을 돌파하여 유엔군을 후퇴시킬 수 있도록 했다. 5개의 전투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은 다음과 같다:[21]
# 제6사단과 제7사단은 마산에서 미 제25보병사단을 돌파한다.
# 제9사단, 제4사단, 제2사단, 제10사단은 낙동강교에서 미 제2보병사단을 돌파하여 밀양과 영산으로 진격한다.
# 제3사단, 제13사단, 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로 진격한다.
# 제8사단과 제15사단은 대한민국 제8보병사단과 제6보병사단을 돌파하여 하양과 영천으로 진격한다.[24]
# 제12사단과 제5사단은 대한민국 수도사단과 제3보병사단을 돌파하여 포항과 경주로 진격한다.
8월 22일, 북한의 수상인 김일성은 9월 1일까지 전쟁을 끝내라고 명령했지만, 공세의 규모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19] 제1집단과 제2집단은 8월 31일 23시 30분에, 제3집단, 제4집단, 제5집단은 9월 2일 18시에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다.[24] 이 공격은 유엔군을 각 지점에서 동시에 압도하고 유엔이 증원할 수 없는 여러 곳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했다.[17][23] 북한군은 유엔의 제공권과 해군 화력에 대응하기 위해 주로 야간 공격에 의존했는데, 이는 유엔군이 효과적으로 사격하는 것을 막고 아군 오사로 인한 막대한 사상자를 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25]
이 공격은 유엔 지휘관과 병사들을 기습했다.[26] 8월 26일까지, 유엔군은 교두보에 대한 마지막 심각한 위협을 파괴했다고 생각했으며, 11월 말까지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27] 한편, 대한민국 부대는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결과로 사기가 저하되었고, 미국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존 B. 쿨터 소장을 포항 지역으로 보내 사기가 저하되어 붕괴되어 가던 대한민국 제1군단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28]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인 크로마이트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전에 북한군이 심각한 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26]
3. 낙동강 대공세 (9월 공세)
3. 1. 주요 전투
3. 1. 1. 경주-포항 축선
경주 전투는 유엔군의 동해안 우익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공세로 시작되었다.[29] 5,000명으로 재편된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은 기계 및 포항동 지역에서의 패배 이후 재편성을 마치고 산에서 이동을 시작했다.[27] 제12사단은 식량, 무기, 탄약이 부족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저조했다.[25][30] 8월 27일 04:00,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기계 북쪽의 대한민국 제17연대가 무너져 후퇴했고, 연쇄적으로 대한민국 제18연대도 후퇴하며 기계읍을 상실했다.[28][31]월턴 워커는 메이저 제너럴 쿨터에게 동쪽의 대한민국군을 감독하도록 명령했다.[28] 쿨터는 경주에 도착하여 잭슨 기동 부대를 편성하고, 한국 군사 고문단(KMAG)과 함께 본부를 설치했다.[28] 잭슨 기동 부대는 수도사단, 제3사단, 미군 제21보병연대, 제3대대, 제9보병연대 및 제73중전차대대(C중대 제외)로 구성되었다.[28] 쿨터는 기계 지역의 조선인민군 침투를 제거하고 영천 북쪽에서 월포리 해안까지 약 19km에 이르는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받았다.[32]
8월 28일로 예정되었던 쿨터의 공격 계획은 연기되었다.[34] 준장 김홍일은 사상자가 많고 병력이 지쳐 공격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포항동 위쪽의 조선인민군 제5사단이 남쪽으로 압박하며 대한민국 제3사단은 후퇴 조짐을 보였다.[33] 8월 28일, 국방부 장관 신성모에게 보내는 특별 성명을 발표하여, 대한민국군에게 부산 교두보에서 전선을 유지할 것을 촉구했다.[35]
조선인민군 제5사단의 압박은 포항동 북쪽에서 강화되었고, 대한민국 제3사단은 99고지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36] 9월 2일, 미 제21보병연대가 대한민국군을 지원했으나, 조선인민군의 침투로 기계에서 동쪽으로 4.8km 떨어진 대한민국 수도사단과 제3사단 경계선이 위협받았다.[36]
9월 2일 01:30,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은 기계 계곡 남쪽의 높은 언덕 지대에서 수도사단을 공격했다.[30] 이 공격으로 대한민국 제18연대와 제17연대가 후퇴했다.[32] 9월 3일 새벽, 조선인민군은 안강리에서 동쪽으로 4.8km 떨어진 동서 회랑 도로에 도달했고, 수도사단은 거의 붕괴되었다.[36] 쿨터는 제21보병연대를 경주 부근에 집중시켰고, 워커는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 제7사단을 이동시켰다.[38]
9월 3/4일 밤, 3대의 조선인민군 T-34 전차가 대한민국 포병 포대를 공격하고, 안강리에 진입했다.[38] 9월 4일 12:00, 조선인민군은 경주-안강리 도로에서 경주에서 4.8km 이내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포항동 지역의 대한민국 제3사단과 수도사단 사이에 3.2km의 틈이 있었고, 경주 북서쪽에는 수도사단과 대한민국 제8사단 사이에 12.8km의 틈이 있었다.[39]
9월 5/6일 밤, 포항동에서 사건이 절정에 달했다.[40] 대한민국 제3사단은 포항동에서 철수했고, 9월 6일 조선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사령부는 대한민국 제1군단과 제3사단 사령관을 해임했다.[41] 백선엽 준장이 대한민국 제1군단을, 대령 송요찬이 수도사단을, 이종찬 대령이 제3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30]

3. 1. 2. 영천 축선
대구 지구와 동해안의 경주 지구 사이의 높은 산악 지대에서 조선인민군 제8사단과 제15사단은 9월 1일 대구와 포항을 잇는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하양과 영천 인근 지역으로 남쪽으로 공격을 준비했다. 이 공격은 기계-포항 지역에서 진행된 조선인민군의 공세와 연계될 예정이었다. 제8사단의 목표는 하양이었고, 제15사단의 목표는 영천이었으며, 이 사단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천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2] 제8사단에 맞서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이, 제15사단 전면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17]10일간의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제8사단은 몇 킬로미터 진격하는 데 그쳤고, 9월 12일이 되어서야 화정동을 점령했는데, 화정동은 영천에서 약 22km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제8사단은 이를 지원하던 제17기갑여단의 신형 T-34 전차 21대 중 거의 전부를 잃었다. 대구 회랑으로 들어가는 이 산악 지대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은 조선인민군 제8사단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9월 8일까지 일부 조선인민군 대대에는 20명밖에 남지 않았다.[17][43]
영천 위의 동쪽 도로에서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은 9월 2일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17] 병력이 크게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3개 연대의 병력이 총 3,600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4일 만에 영천의 측면 통로까지 진격했다. 9월 6일까지 조선인민군 사단 병력이 영천 안과 남쪽에 진입했다. 조선인민군은 영천에 머물지 않고 대구와 포항 사이의 도로를 내려다보는 영천 남쪽과 동남쪽의 언덕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날 대한민국 제7사단 제5연대가 측면 통로를 따라 동쪽에서 공격하여 영천 자체에서 북한군을 몰아낸 후 영천 북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9월 8일,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의 추가 병력이 영천에 도착하여 영천을 재탈환했다. 그날 오후 대한민국 제1사단 제11연대가 대구 전선에서 도착하여 영천 안과 인근 지역에서 조선인민군을 상대로 반격을 가했다. 이 작전으로 영천 대부분에서 조선인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일부는 영천 동남쪽에 있는 철도역을 점령하고 있었다.[43]
영천의 동남쪽과 동쪽 언덕에서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포병 연대가 보병보다 앞서나가 탄약을 소진했고, 지원 없이 대한민국 육군의 반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 작전에서 조선인민군 포병 사령관이 사망했다. 대한민국 제5연대와 제11연대가 사기가 저하된 제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영천 인근에 도착한 후, 전투가 너무 격렬하여 양 군은 재편성하여 협동 작전을 펼 기회가 없었다. 9월 9일과 10일, 대한민국 육군 부대는 영천 동남쪽의 경주 도로와 접한 언덕에서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을 포위하여 사실상 전멸시켰다. 조선인민군 사단 참모장 김연 대령이 다른 고위 장교들과 함께 사망했다. 주한 미 군사 고문단(KMAG) 장교들이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의 낙오병을 수습하고 부대를 재편성하는데 기여하여 이 전투의 성공적인 결과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9월 10일,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은 영천-경주 도로에서 조선인민군을 몰아냈다.[44]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의 잔존 병력이 후퇴한 후 영천 북쪽으로 진격한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과 제7사단 제5연대는 거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9월 12일, 이 두 대한민국 육군 부대의 병력은 영천에서 약 13km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또한 영천에서 동쪽으로, 경주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전선의 틈새를 메웠다.[44]
동부 전투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는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이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을 돌파하여 영천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그러나 월턴 워커 장군의 신속한 판단으로 전선의 두 지역에서 대한민국 제5연대와 제11연대가 침투 지역으로 파견되어, 돌파구를 활용하기 전에 부대를 격파하는 결과를 낳았다. 워커는 경주와 영천 지역에서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필요한 증원 병력에 대한 판단력으로 칭찬을 받았다.[44]
3. 1. 3. 대구 축선
(내용 없음)3. 1. 4. 낙동강 돌출부 축선
(내용 없음)3. 1. 5. 마산 축선
(요약(summary)과 원본 소스(source)가 비어있어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내용을 채워주시면 위키텍스트를 생성해 드리겠습니다.)4. 결과 및 영향
낙동강 대공세는 한국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다.[137] 조선인민군은 초기 여러 곳에서 유엔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17] 9월 4일~5일, 미 제8군과 대한민국 육군은 본부 요소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고, '데이비슨 라인'으로의 후퇴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9월 6일, 워커는 추가 후퇴가 필요하지 않다고 결정했다.[138]
일부 역사가들은 낙동강 대공세의 목표가 처음부터 달성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31] T. R. 페렌바흐에 따르면, 북한군보다 더 잘 갖춰진 미군은 연속적인 방어선을 형성한 후 쉽게 상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16]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은 이미 약화된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139] 사실상 장비가 없고, 지쳐버린 병력과 낮은 사기를 가진 조선인민군은 심각한 불리함을 겪었고, 인천 상륙을 막으면서 부산 교두보에 대한 압박을 계속할 수 없었다.[140] 9월 16일 제8군은 부산 교두보 반격을 시작했다. 9월 23일까지 조선인민군은 부산 교두보에서 전면적으로 후퇴했으며, 유엔군은 1950년 9월 유엔군 반격을 통해 북쪽으로 신속하게 추격했다.[139]
조선인민군의 파괴로 인해 북한군만으로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막대한 장비와 인력 손실은 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육군이 입은 손실과 맞먹었다. 조선인민군은 전투 부대로서 완전히 붕괴되었고, 남은 병력은 매우 약한 저항을 하며 북한으로 후퇴했다. 반면 유엔군은 육해공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공세로 전환했다.[141] 기동력이 떨어진 많은 조선인민군 부대는 항복했는데, 부대 규모는 수천 명에서 수백 명으로 줄어들었다.[142]
5. 평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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