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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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낙산사는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에 위치한 사찰로, 671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차례의 중창과 화재를 겪었다. 2005년 화재로 주요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현재 재건이 진행 중이다. 주요 문화재로는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보물 제1723호) 등이 있으며, 의상대와 홍련암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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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낙산사 |
로마자 표기 | Naksansa |
한글 표기 | 낙산사 |
한자 표기 | 洛山寺 |
종교 | |
종파 | 조계종 |
위치 | |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55) |
상세 정보 | |
창건자 | 의상 |
창건 연도 | 671년 (신라 문무왕 11년) |
소속 |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 말사 |
지정 문화재 | |
사적 | 낙산사 일원 (대한민국 사적 제495호) |
명승 | 의상대와 홍련암 (대한민국 명승 제27호) |
보물 | 칠층 석탑 (대한민국 보물 제499호) 건칠관음보살좌상 (대한민국 보물 제1362호)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와 사리장엄구일괄 (대한민국 보물 제1723호) |
유형 문화재 (강원특별자치도) | 홍예문 (제33호) 담장 (제34호) 의상대 (제48호) |
관련 정보 | |
관동팔경 | 관동팔경 중 하나 |
웹사이트 | 낙산사 홈페이지 |
2. 역사
낙산사는 671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은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아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15] 858년 신라 헌안왕 때 범일대사가 중창하였으나,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6][17]
1467년 조선 세조가 금강산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낙산사를 중창하도록 명하였고, 이때 칠층석탑이 지어졌다.[18][19][20] 1469년(예종 1년)에는 정희왕후가 세조를 위해 범종을 만들도록 하였다.[21] 성종 대에는 절 운영권을 두고 다툼이 있었으나, 수행승이 운영권을 갖도록 결정되었다.[22] 그러나 1489년 산불로 불에 타는 시련을 겪었다.[23]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화재를 겪었으나, 인조 때 재차 중건되었다. 1777년 정조 원년에 다시 화재를 당하였으나 다음 해에 중건되었다.[24] 1788년 단원 김홍도는 ''금강사군첩''에 낙산사의 모습을 담았다.
오늘날 의상대는 의상이 명상했던 자리에 1925년에 건립되었다.[5]
2. 1. 창건과 번성 (신라~고려)
昔 義湘法師始自唐来還 聞大悲真身住此海邊崛内 故因名洛山 盖西域寳陁洛伽山|옛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대비(관음보살)의 진신(사리)이 이 해변의 굴 속에 있다고 들었기에 이름을 낙산이라고 지었다. 이는 서역에 보타락가산이 있기 때문이다.중국어—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15]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굴 속에 들어가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 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하였다 한다.[15] 858년 신라 헌안왕 2년 범일대사가 중창하였으나[16]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7]
낙산사는 671년 신라 문무왕의 특사였던 승려 의상 대사가 창건하였다.[1][2] 의상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관세음보살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동굴 근처에서 명상을 하던 중, 관세음보살로부터 그곳에 사찰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았다.[4]
2. 2. 중창과 시련 (조선)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굴 속에 들어가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 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하였다 한다.[15] 858년 신라 헌안왕 2년 범일대사가 중창하였으나[16]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17]1467년 조선 세조는 금강산을 둘러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낙산사가 몽골 전란으로 쇠락한 채 방치된 것을 보고 중창을 명령하였다.[18] 중창은 학열(學悅)이 책임지었고[19], 칠층석탑이 이 때 지어졌다.[20] 1469년(예종 1년) 정희왕후가 세조를 위해 발원하여 범종을 만들었다. 건칠관음보살상도 이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21]
성종 대에 이르러 학열이 노쇠하게 되자 절의 운영권을 두고 다툼이 있었다. 1477년 강릉대도호부사는 성종의 윤허를 받고 쟁송에 대해 입안을 내려 수도하는 수행승이 절의 운영권을 갖도록하였다.[22] 1489년 3월(음) 산불로 불에 탔다.[23]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를 겪었다. 1624년 인조 원년, 1631년(인조 9년)과 1643년(인조 21년) 재차 중건이 있었으나 1777년 정조 원년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 다시 중건하였다.[24]
2. 3. 근현대
1953년 6·25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지만, 2005년 4월 5일 23시 53분 경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양양읍 화일리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4월 5일 아침 산림청과 대한민국 국군은 헬기 10여 대를 긴급 투입해 진화 작업에 나섰다. 산불은 아침 7시 경 바람을 타고 낙산해수욕장까지 번졌고 오전 11시 20분 경 큰 불이 거의 잡힌 듯 보여 주민들은 속속 집으로 돌아와 가재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진화 작업을 위해 투입됐던 헬기는 고성 산불 진화를 위해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잦아지던 불길은 오후 1시경 강풍을 타고 되살아났으며 헬기도 양양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후 2시 30분 양양군은 재난 경보를 발령했지만 15시 30분 낙산사에 산불이 확산되어 방화선이 무너졌고 산불이 일어난지 불과 1시간 만에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4월 7일 양양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이 화재로 21채의 건물이 불타고 보물 479호로 지정되어 있던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면서 보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25] 산불 이후 동종은 복원되었지만 다시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보물 제479호는 결번으로 남아 있다. 낙산사 동종은 2006년 9월 29일 새로 주조되어[26] 10월 13일 충북 진천에서 시험 타종을 거친 후[27], 10월 16일 낙산사에 안치되었다.[28]3. 2005년 화재와 복원
6·25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다시 지었지만, 2005년 4월 5일 23시 53분 경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양양읍 화일리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4월 5일 아침 산림청과 대한민국 국군은 헬기 10여 대를 긴급 투입해 진화 작업에 나섰다. 산불은 아침 7시 경 바람을 타고 낙산해수욕장까지 번졌고 오전 11시 20분 경 큰 불이 거의 잡힌 듯 보여 주민들은 속속 집으로 돌아와 가재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진화 작업을 위해 투입됐던 헬기는 고성 산불 진화를 위해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잦아지던 불길은 오후 1시경 강풍을 타고 되살아났으며 헬기도 양양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후 2시 30분 양양군은 재난 경보를 발령했지만, 15시 30분 낙산사에 산불이 확산되어 방화선이 무너졌고 산불이 일어난 지 불과 1시간 만에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4월 7일 양양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이 화재로 21채의 건물이 불타고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어 있던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면서 보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25] 산불 이후 동종은 복원되었지만 다시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보물 제479호는 결번으로 남아 있다. 낙산사 동종은 2006년 9월 29일 새로 주조되어[26] 10월 13일 충북 진천에서 시험 타종을 거친 후[27], 10월 16일 낙산사에 안치되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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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5일, 주변 숲에서 시작된 화재로 낙산사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낙산사 동종은 15세기에 제작된 국보였으나, 화재로 녹아 파괴되었다.[2][3] 박물관에는 화재에서 살아남은 절터에서 발견된 나무로 만들어진 바이올린과 첼로가 전시되어 있다. 종의 복제품이 제작되어 다시 절에 설치되었다.[7]
이 사찰은 13세기 몽골의 침략 때 화재로 파괴된 적이 있다. 조선 시대(1392–1910)에는 1467년, 1469년, 1631년, 1643년에 왕명에 의해 사찰이 여러 차례 재건 및 확장되었다. 2005년 화재 이전의 시설은 한국 전쟁 중 건물들이 파괴된 후 1953년에 건설되었다.[8]
4. 주요 문화재
낙산사에는 보물 3종, 사적 1종, 명승 1종, 강원특별자치도의 유형문화재 3종, 강원특별자치도의 문화재자료 1종이 있다. 2005년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 동종(구 보물 제479호)은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조성한 동종으로 조각 수법과 전체적인 모양이 아름다워 당대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혔지만, 화재로 녹아내려 옛 모습을 잃었다.[25]
낙산사에는 관세음보살로 알려진 해수관음상이 정상에 있다.[2][4] 해수관음상은 동남쪽을 바라보며 15m 높이에 2.8m 높이의 기단 위에 서 있다. 흰색 화강암 조각상은 언덕 꼭대기의 탁 트인 공간에 서 있으며, 바다를 바라보며 평화로운 명상에 잠긴 눈과 손가락을 하고 있다. 이 거대한 조각상은 부산 조각가 권정환의 작품으로 1977년에 봉헌되었다. 조각을 완성하는 데 700톤의 화강암과 6개월이 걸렸다. 이는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불상이다.[6]
홍련암은 의상이 돌 굴 위에 지은 암자이다.[5] 법당 바닥에는 아래쪽 바다를 볼 수 있는 10cm 크기의 구멍이 있다.
4. 1. 국가지정 문화재
낙산사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 사적, 명승을 보유하고 있다.낙산사 칠층석탑(보물 제499호)은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건립된 고려 양식의 석탑이다.[1][6] 이 외에도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보물 제1723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4월 5일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 동종(보물 제479호)은 2005년 7월 7일 보물에서 해제되었다.
낙산사 경내와 주변 지역은 양양 낙산사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대한민국의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어 대한불교조계종 낙산사에서 관리하고 있다.[1]
4. 1. 1. 보물
(단체)(襄陽 洛山寺 七層石塔)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불교가 쇠퇴하는 상황에서 지어진 7층 석탑은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29]

(襄陽 洛山寺 乾漆觀音菩薩坐像)
낙산사 원통보전 안에 봉안된 관음보살 좌상이다. 낙산사가 중건될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襄陽 洛山寺 海水觀音空中舍利塔·碑 및 舍利莊嚴具 一括)
1692년 조선 숙종 18년에 승려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부도로 모신 사리의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