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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언해 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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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논어언해 권3은 조선 선조 초에 간행된 4권 4책 중 권3의 영본으로, 사서의 하나인 논어에 토를 달아 언해한 책이다. 임고서원과 도산서원에 완질이 소장되어 있으며, 을해자체경서자로 인쇄되었다. 16세기 국어 연구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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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언해 권3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논어언해 권3
유형유형문화재
지정 번호444
지정일2019년 2월 14일
소유자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소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로 56
시대조선시대
수량1책
문화재청 ID21,04440000,11

2. 간행 배경 및 역사

『논어언해』는 사서 중 하나인 『논어』에 토를 달고 언해한 책이다.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 공자의 언행 등을 담은 유교의 핵심 경전으로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학습되었다. 이 책은 선조 초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4권 중 권3에 해당하는 1책의 영본(零本)이다. 일부 훼손되고 표지가 개장되었으나, 초간본으로서 가치가 있다.

조선 시대 사서언해 작업은 꾸준히 이루어졌으나, 선조 대에 이르러 교정청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결실을 보게 된다. 선조의 명으로 시작된 사서언해 편찬 사업은 1588년에 완료되었고, 1590년 7월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어언해』 권3은 바로 이 시기에 간행된 초간본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도산서원에 소장된 동일 판본의 내사기(內賜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며, 임고서원본(보물) 등 완질로 전해지는 다른 초간본들과 동일한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교정청에서 간행된 언해본들은 "교정청본"이라 불리며, 16세기 후반의 중요한 관판본(官版本)으로서 이후 언해본 간행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당시의 언어, 사상,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록 이 책은 영본이지만 전래가 드물어 국어사 및 서지학 연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 1. 유교 경전 번역 사업

사서언해 작업은 조선 시대에 꾸준히 이루어진 중요한 문화 사업이었다. 이는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경전에 구결을 다는 작업과 함께 진행되었다. 경서에 구결을 붙이는 작업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어, 조선 초기에는 이미 사서에 대한 구결을 정하고 교정까지 시도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초기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사서 전체에 대한 언해는 선조 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

선조는 유교 경전의 보급과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1585년에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이후 이산해, 정철 등 당대 학자 31명에게 사서의 언해 작업을 명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1588년 10월에 편찬이 완료되었으며, 간행은 곧이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에 하사된 『논어언해』의 기록에 따르면 1590년 7월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언해본 간행에는 을해자체경서자라는 금속활자가 사용되었다. 이 활자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선조 21년(1588)에서 선조 23년(1590) 사이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소학언해』를 비롯하여 『논어언해』, 『맹자언해』, 『대학언해』, 『중용언해』 등 사서언해와 『효경언해』 같은 경서를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확한 주조 시기와 배경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대략 선조 19년(1586) 여름부터 선조 20년(1587) 4월 이후 수개월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교정청에서 간행된 경서 언해본들은 흔히 "교정청본"이라고 불린다. 이는 16세기 후반 조선의 대표적인 관판본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정청본은 이후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고 널리 보급되면서, 당시 조선 사회의 언어생활과 사상, 문화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2. 2. 교정청과 을해자체경서자

선조는 1585년(선조 18년) 교정청을 설치하여 사서의 언해 작업을 명하였다. 이 작업에는 이산해, 정철 등 31명의 관원이 참여하였으며, 1588년 10월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이후 간행이 이루어졌는데, 도산서원에 반사된 논어언해의 기록("萬曆十八年七月日", 즉 선조 23년(1590) 7월)을 통해 그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논어언해를 포함한 사서언해는 교정청 설립 후 1590년 7월 이전에 처음으로 간행된 것이다. 이 시기 간행된 경서 언해본들은 통칭하여 "교정청본"으로도 불린다.

이때 인쇄에 사용된 활자는 을해자체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이다. 이 활자는 임진왜란 직전인 1588년(선조 21년)에서 1590년(선조 23년) 사이에 소학언해, 논어언해, 맹자언해, 대학언해, 중용언해 등 사서언해와 효경언해 같은 경서를 인쇄하기 위해 주조된 중자와 소자의 금속활자이다. 관련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한 주조 시점이나 장소, 글씨체 바탕 등은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초인본인 소학언해가 정서된 1586년(선조 19년) 여름부터, 선조가 인쇄를 명하고 이산해에게 발문을 쓰게 한 1587년(선조 20년) 4월 이후 몇 달 사이에 주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정청본은 1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관판본으로서, 이후 17세기 사서언해 간행본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들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번각되어 간행되고 널리 보급되면서 당시의 언어, 사상, 생활 문화 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3. 판본 및 서지학적 특징

논어언해』는 사서(四書) 중 하나인 『논어』에 토를 달고 언해한 책이다.[1] 『논어』는 유교의 핵심 경전으로,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 공자의 언행 등을 담아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교육 자료로 활용되었다.[1]

조선 선조 대에 이르러 사서 전체에 대한 언해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선조는 1585년(선조 18년) 교정청을 설치하고 이산해, 정철 등 여러 신하에게 사서 언해를 명하여[1] 1590년(선조 23년) 7월 이전에 을해자체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라는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간행하였다.[1]

이 시기에 교정청에서 간행된 경서 언해본들은 통칭하여 교정청본이라고도 불린다.[1] 이 판본들은 1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관판본(官版本)으로서 중요한 서지학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고 보급되면서 당시 조선 사회의 언어, 사상, 문화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1] 교정청본 『논어언해』는 완질 또는 일부만 남은 영본(零本) 형태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국어사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

3. 1. 현존 판본 현황

선조 23년(1590) 7월 이전에 간행된 『논어언해』 초간본은 교정청에서 이산해, 정철 등이 참여하여 만든 것으로, 을해자체경서자라는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인쇄되었다.[1] 이 초간본은 1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관판본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고 보급되어 당시 조선 사회의 언어, 사상, 생활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

현재까지 알려진 『논어언해』 초간본의 주요 판본 현황은 다음과 같다.

판본명완질 여부특징 및 상태소장처문화재 지정
임고서원본완질 (4권 4책)임고서원보물[1]
도산서원본완질 (4권 4책)"萬曆十八年七月日(만력 18년 7월 일)"이라는 내사기(內賜記)가 남아 있어 간행 및 반사 시기 추정의 중요 근거가 된다.[1]도산서원문화재 미지정
(조사대상본)영본 (권3, 1책)첫/끝 2장 일부 훼손, 누습으로 변색/헤짐, 표지 개장. 전래가 드문 편이다.[1](소장처 정보 없음)문화재 미지정 (유형문화재 지정 검토 필요성 언급됨)[1]



특히 임고서원에 소장된 판본과 도산서원에 소장된 판본은 모두 완질로 전해지고 있으며, 동일한 시기(1590년 7월 이전)에 동일한 활자(을해자체경서자)로 인쇄되어 각각 임고서원과 도산서원에 내려진 것으로 추정된다.[1] 이 중 임고서원본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1]

이 외에도 일부만 남은 영본(零本) 형태의 판본들이 존재하는데,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전해지는 수량이 많지 않아 희귀하며, 국어사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

3. 2. 판본의 형태적 특징

조사 대상 판본은 전체 4권 4책 중 권3의 1책만 남은 영본(零本)이다. 책의 크기는 33cm×21cm이며, 반곽(半郭)의 크기는 24.7cm×17.1cm이다. 판식(版式)은 사주쌍변(四周雙邊)에 계선(界線)이 있는 형태이다. 판심(版心)의 어미(魚尾)는 위아래로 안쪽을 향한 세 개의 잎사귀 무늬(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이며, 판심제(版心題)는 ‘논어언해(論語諺解)’이다.

표지는 후대에 개장(改裝)되었으며, 표지 다음에는 빈 종이인 공격지(空隔紙) 없이 바로 권3의 본문이 시작된다. 본문의 첫 2장과 마지막 2장은 일부 훼손되었고, 전반적으로 누습(漏濕)으로 변색되고 헤진 흔적이 있으나, 본문 내용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본문은 한문 원문을 먼저 싣고 이어서 언해를 붙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면은 10행 19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결(口訣)과 한자음이 달린 한문 원문은 맨 윗줄부터 쓰고, 언해문은 첫 글자를 한 칸 띄우고 시작한다. 이러한 판형은 을해자체경서자로 간행된 다른 사서 언해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 책의 인쇄에 사용된 활자는 을해자체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이다. 이 활자는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21년(1588)에서 선조 23년(1590) 사이에 주조된 중자(中字)와 소자(小字)의 금속활자이다. 『소학언해』, 『논어언해』, 『맹자언해』, 『대학언해』, 『중용언해』 등 사서 언해본과 『효경언해』 같은 경서를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확한 주조 시기와 장소, 글씨체의 바탕 등은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 어렵지만, 초인본(初印本)인 『소학언해』가 정서된 선조 19년(1586) 여름부터 선조 20년(1587) 4월 이후 수개월 사이에 주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해문과 한자음 표기에는 성조를 나타내는 방점(傍點)이 찍혀 있으며, 중세 국어의 특징인 반치음(ᅀ)과 옛이응(ᅌ)이 사용되었다.

3. 3. 언어학적 특징

『논어언해』 권3은 선조 23년(1590)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16세기 후반 조선국어 특징을 잘 보여준다. 언해문과 한자음 표기에는 글자의 성조를 나타내기 위한 방점(傍點)이 찍혀 있다. 또한, 오늘날에는 사용되지 않는 옛 한글 자모인 반치음(ᅀ)과 옛이응(ᅌ)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음운 체계와 표기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4. 문화재적 가치

『논어언해』는 사서(四書) 중 하나인 『논어』에 토를 달고 우리말로 풀이한 책이다. 현재 조사 대상이 된 판본은 조선 선조 초기에 간행된 전체 4권 4책 중 권3만 남아있는 영본(零本)이다.

이 책은 16세기 후반의 국어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국어사 연구에 가치가 크다. 또한, 선조 대에 교정청에서 간행한 초간본이라는 점에서 서지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사용된 금속활자와 인쇄술, 책의 형태 등을 연구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된다.

나아가 『논어』라는 유교의 핵심 경전을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해하여 보급했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유교 이념의 전파와 조선 사회의 사상 및 문화 형성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조사 대상 판본은 일부가 훼손되고 전체 중 일부만 남은 영본이지만, 그 전래가 드물어 희귀성이 높다. 동일한 판본의 완질이 임고서원과 도산서원에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임고서원본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논어언해』 권3은 국어사, 서지학, 사상사 등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4. 1. 희귀성 및 보존 상태

『논어언해』 권3은 내사기(內賜記) 기록이 남아있는 판본이 도산서원에 전해지고 있으며, 동일한 판본으로 임고서원본도 완질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완질로 전해지는 임고서원본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사 대상 판본은 전체 4권 4책 중 권3의 1책만 남은 영본(零本)이다. 책의 형태를 보면 본문의 첫 2장과 마지막 2장이 일부 훼손되었으며, 표지는 후대에 새로 만들어 바꿔 달았다(개장, 改裝). 또한 전반적으로 습기에 노출되어(누습, 漏濕) 다소 많이 변색되고 헤진 흔적이 있으나, 본문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 상태이다.

이처럼 조사 대상 판본은 일부가 훼손되고 전체 중 일부만 남은 영본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그 전래가 비교적 드물어 희귀한 편이다. 따라서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국어사와 서지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4. 2. 국어사 및 서지학적 중요성

『논어언해』는 사서(四書) 중 하나인 『논어』에 토를 달고 한글로 풀이한 책이다. 이 책은 조선 선조 대(1588년~1590년)에 교정청에서 을해자체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라는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간행한 초간본에 해당한다.[1] 이는 임진왜란 직전에 이루어진 중요한 간행 사업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서지학적 측면에서 이 책은 1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관판본(官板本)으로, 소위 "교정청본"으로도 불린다. 당시 인쇄 기술과 출판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이후 17세기에 간행된 다른 사서 언해본들의 저본(底本)이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서지학적 가치가 높다.[1] 비록 현재 전하는 판본 중 일부는 권3만 남은 영본(零本)이고 부분적인 훼손도 있지만, 전래 자체가 드물어 희귀성을 지닌다. 동일한 판본의 완질이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는 보물 임고서원본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도산서원에도 완질이 전해진다.[1]
국어사적 측면에서는 16세기 후반 한국어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언해문과 한자음에 표기된 방점(傍點, 성조 표시)과 오늘날 사용되지 않는 고어 자음인 'ᅀ'(반치음)과 'ᅌ'(옛이응) 등의 사용 예가 남아 있어, 당시의 음운 체계와 표기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1] 이 책은 이후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고 보급되면서 당시 언어생활뿐 아니라 사상과 문화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1]

이처럼 『논어언해』 권3은 비록 일부만 남은 영본이라 할지라도, 서지학국어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1]

4. 3. 사상사적 의의

논어』는 사서(四書)의 하나로, 유교의 핵심 경전이며 동아시아에서 오랜 시간 학습되고 전파된 기본서이다. 이 책에는 공자와 그 제자 간의 문답,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뛰어난 제자들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요한 사서를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이해하도록 언해(한글 번역)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다. 경서에 구결(口訣)을 붙이는 작업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행해졌으며, 조선 초기에도 이미 사서에 대한 구결을 정하고 교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사서 전체에 대한 언해는 선조 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선조는 1585년(선조 18년) 교정청을 설치하고 이산해, 정철 등 교정청 관원 31명에게 사서의 언해를 명하였다. 이 작업은 1588년(선조 21년) 10월에 완료되었으며, 1590년(선조 23년) 7월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에 하사된 『논어언해』의 기록("萬曆十八年七月日")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때 간행된 『논어언해』를 포함한 사서의 언해본들은 통칭 "교정청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는 1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관판본으로, 17세기 사서언해 간본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들이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고 보급되면서 당시 조선 사회의 언어, 사상, 생활 문화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는 『논어』와 같은 핵심 유교 경전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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