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영릉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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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 영릉 석물은 조선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구 영릉에 사용되었던 석물들을 지칭한다. 1446년 구 영릉 조성 당시 제작되어, 1469년 영릉이 현재의 여주로 천장된 후 땅에 묻혔다가 1973~1974년 발굴되었다.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세종 시대의 국력과 문화 발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석물들은 세종대왕신도비, 문무석인상, 석양상, 석마상, 장명등, 망주석, 혼유석, 고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 왕릉의 석물 배치와 제작 기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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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영릉 석물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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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 영릉 석물 |
로마자 표기 | Gu Yeongneung Seokmul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42 |
지정일 | 1980년 6월 11일 |
주소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 | 부속문화재 13점 |
문화재청 ID | 21,00420000,11 |
2. 역사
1446년(세종 28년) 소헌왕후가 승하하면서 태종의 능인 헌릉 서쪽 산등성이에 영릉이 조성되기 시작했다.[1] 1450년(세종 32년) 세종이 합장되고, 1452년(문종 2년) 세종대왕신도비가 건립되면서 공역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1] 그러나 1469년(예종 원년)에 영릉의 위치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논의가 있어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로 옮기게 되었다.[1]
구영릉 석물들은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에 땅에 묻혔다가 1973년~197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이전되었다.[1]
하지만 현재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는 왕릉 조성 및 발굴 당시의 모든 품목과 수량이 남아 있지는 않다. 원래 각각 4기씩 조성되었을 석양상과 석마상은 현재 각기 2기씩 남아 있고, 2기였던 망주석은 현재 1기의 일부만 남아 있다.[1] 장명등과 석인상은 모두 갖추어져 있으나 장명등의 경우 개석(지붕돌)이 없다. 세종대왕신도비는 이수(머릿돌)와 비신(비석 몸체)만 남고 귀부(받침돌)가 없어진 채 발굴되었다. 혼유석은 동쪽 부분이 잘려나간 상태이고, 원래 4기였을 고석(북 모양의 돌)은 1기만 남아 있다. 병풍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난간주석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능에서는 크기가 일정한데,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있는 7기의 난간주석 중 2기는 나머지 5기와 크기 및 제작기법에서 차이를 보여 어느 것이 구영릉의 난간주석인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석호상은 1974년 발굴 이후 2기가 현재의 영릉으로 이전되었고, 나머지 2기는 발굴 전 도굴되었다가 회수되어 단국대박물관에 옮겨졌다고 하나 역시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1] 죽석(대나무 모양 돌)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있으나, 발굴 당시 구영릉 봉분 터 주위에서 죽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어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이처럼 조성 당시의 석물 품목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지만, 구영릉석물들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 석물 배치 방식과 제작 수법 등을 알 수 있게 하고, 당시의 양전척, 주척 등을 환산할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세종 시대의 국력과 문화 발전 정도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1]
2. 1. 구영릉의 조성
1446년(세종 28년) 소헌왕후가 승하하면서 태종의 능인 헌릉 서쪽 산등성이에 조성되기 시작했다.[1] 1450년(세종 32년) 세종이 합장되고, 1452년(문종 2년) 세종대왕신도비가 건립되면서 공역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1] 그러나 1469년(예종 원년)에 구영릉의 위치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논의가 있어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로 영릉을 옮기게 되었다.[1]구영릉은 국조오례의의 치장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이자 조선 초기 왕릉을 대표하는 능이었다. 동분이실의 석실을 채택했고, 이실의 예에 따라 문관석인상과 무관석인상을 각각 2기, 석양, 석마, 석호를 각각 4기씩 제작했다. 석실 내부에는 고구려 계통의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 일월성진도를 그렸으며,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병풍석으로 둘렀고, 그 바깥쪽으로 다시 외박석과 난간주석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구영릉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부터는 보이지 않는 신도비도 세워졌다.[1] 이러한 왕릉제도는 구영릉 이후 조성된 문종의 능인 현릉과 세조의 능인 광릉부터는 적용되지 않게 된다.[1]
2. 2. 구영릉의 천장
1469년(예종 원년)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구영릉(舊英陵)을 현재의 경기도 여주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1]3. 구영릉 석물
구 영릉(舊英陵)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으로, 태종의 능인 헌릉 서쪽 산등성이(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13번지 일대)에 있었다. 1446년(세종 28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성되기 시작했고, 1450년(세종 32년) 세종이 서실(西室)에 합장되었으며, 1452년(문종 2년) 세종대왕신도비가 건립되면서 완성되었다.[1]
1469년(예종 원년),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영릉은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다.[1]
구 영릉 석물들은 구 영릉 조성과 시기를 같이하여 세워졌으며, 영릉이 여주로 옮겨갈 때 운반 문제로 땅에 묻혔다가 1973~197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이전되었다.[1] 그러나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는 모든 석물이 남아있지 않다. ‘구영릉석물’ 중 일부는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초장지인 옛 희릉(서초구 내곡동)에 배치되었다고 하나, 구 영릉의 석물로 추정된다.[2]
석호상은 십이지신상에서도 수호신으로 나타나며, ‘구영릉석물’ 중 하나로 예부터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이처럼 조성 당시 석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지만, 구영릉석물들은 조선 초기 왕릉 규모, 석물 배치 방식과 제작 수법, 당시 양전척, 주척 등을 환산, 세종 시대 국력과 문화 발달 정도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2]
3. 1. 구영릉 석물의 특징
國朝五禮儀중국어의 치장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으로, 동분이실(同墳異室)의 석실(石室)을 채택하였다. 석실 내부에는 고구려 계통의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 일월성진도를 그렸으며,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병풍석으로 둘렀고, 그 바깥쪽으로 다시 외박석과 난간주석을 설치하였다.[1] 이실(二室)의 예에 따라 문관석인상과 무관석인상을 각각 2기, 석양, 석마, 석호를 각각 4기씩 제작했다. 세조의 능인 광릉부터는 보이지 않는 신도비도 세워졌다.[1]이러한 대규모의 장대한 왕릉제도는 구영릉 이후 최초로 조성된 문종의 능인 현릉과 세조의 능인 광릉부터는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또한 같은 세종의 능이라도 현재의 영릉은 예종 때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구영릉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1]
구영릉을 구성하는 구영릉석물들은 구영릉 조성과 시기를 같이 하여 세워진 것으로,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에 땅에 묻혔다가 1973~197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이전되었다.[1]
조성 당시의 석물 품목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지만, 구영릉석물들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 석물 배치 방식과 제작 수법 등을 알 수 있게 하고, 당시의 양전척, 주척 등을 환산할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세종 시대의 국력과 문화 발달 정도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1]
3. 2. 석물의 종류 및 수량
구 영릉 석물은 원래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구 영릉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469년(예종 원년) 영릉이 경기도 여주군으로 옮겨갈 때 함께 옮겨지지 못하고 땅에 묻혔다. 이후 1973~1974년에 걸쳐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이전되었다.[1]구 영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왕릉이자 조선 초기 왕릉을 대표하는 능이었다. 이실(二室)의 예에 따라 문관석인상과 무관석인상은 각각 2기, 석양, 석마, 석호는 각각 4기씩 제작되었다.[1] 그러나 현재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는 발굴 당시의 모든 품목과 수량이 남아있지 않다.[1]
현재 남아있는 석물의 종류와 수량은 다음과 같다.
종류 | 원래 수량 | 현재 수량 | 비고 |
---|---|---|---|
문관석인상 | 2기 | 2기 | |
무관석인상 | 2기 | 2기 | |
석양 | 4기 | 2기 | |
석마 | 4기 | 2기 | |
석호 | 4기 | 0기 | 2기는 현재 영릉으로 이전,[1] 2기는 도굴 후 회수되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으로 이전[2] |
세종대왕신도비 | 1기 | 귀부(龜趺) 망실 | 이수(螭首)와 비신(碑身)만 남음[1] |
장명등 | 1기 | 개석(蓋石) 망실 | |
혼유석 | 1기 | 동측 부분 절단 | |
고석 | 4기 | 1기 | |
망주석 | 2기 | 1기 (일부) | |
난간주석 | ? | 7기 | 2기는 크기와 제작기법 상이, 추가 확인 필요[1] |
죽석 | ? | ? | 추정, 추가 확인 필요[1] |
이처럼 조성 당시의 석물 품목과 수량이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구 영릉 석물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 석물 배치 방식, 제작 수법 등을 파악하고, 세종 시대의 국력과 문화 발달 정도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1]
3. 3. 발굴 및 이전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구 영릉 석물을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이전하였다.[1] 그러나 발굴 당시의 모든 석물이 현재 기념관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석양상과 석마상은 각각 4기 중 2기만 남아있고, 망주석은 2기 중 1기의 일부만 남아있다. 장명등은 개석이 사라진 채로, 세종대왕신도비는 귀부가 사라진 채 이수와 비신만 남아있다. 혼유석은 동쪽이 잘려나갔고, 고석은 4기 중 1기만 남아있다. 병풍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난간주석은 7기가 남아있는데, 이 중 2기는 다른 5기와 크기 및 제작기법에서 차이를 보여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석호상은 발굴 후 2기가 현재의 영릉으로 이전되었고, 나머지 2기는 도굴되었다가 회수되어 단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하나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1] 죽석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있으나, 발굴 당시 봉분 터 주위에서 죽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역시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1]3. 4. 현재 상태
구영릉 석물은 현재 세종대왕기념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으며, 조성 당시의 품목과 수량이 완전하지 않다. 일부는 망실되었고, 추가 확인이 필요한 석물도 있다.[1]위치 | 종류 | 수량 및 상태 | 비고 |
---|---|---|---|
세종대왕기념관 | 석양상(石羊像), 석마상(石馬像) | 각 2기 (원래 각 4기) | |
세종대왕기념관 | 망주석(望柱石) | 1기 중 일부 (원래 2기) | |
세종대왕기념관 | 장명등(長明燈) | 개석(蓋石) 망실 | |
세종대왕기념관 | 세종대왕신도비(世宗大王神道碑) | 이수(螭首)와 비신(碑身)만 남고 귀부(龜趺) 망실 | |
세종대왕기념관 | 혼유석(魂遊石) | 동측 부분 절단 | |
세종대왕기념관 | 고석(鼓石) | 1기 (원래 4기) | |
세종대왕기념관 | 난간주석(欄杆柱石) | 7기 중 2기는 다른 5기와 크기 및 제작기법 상이 | 추가 확인 필요 |
세종대왕기념관 | 죽석(竹石)으로 추정되는 석물 | 추가 확인 필요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 석호상(石虎像) | 2기 | 발굴 전 도굴되었다가 회수, 2007년 용인 죽전캠퍼스 이전 후 박물관 입구 좌우측 배치 |
영릉 | 석호상(石虎像) | 2기 | 1974년 발굴 이후 이전 |
(미발견) | 병풍석(屛風石) | - |
4. 석물의 문화재적 가치
구 영릉 석물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왕릉인 구 영릉을 구성하는 석물들로, 1469년(예종 원년) 영릉이 경기도 여주로 옮겨질 때 운반상의 어려움으로 땅에 묻혔다가 1973~1974년에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이전되었다.[1] 비록 조성 당시의 모든 석물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유물이다.
구영릉은 국조오례의의 치장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왕릉이자 조선 초기 왕릉을 대표하는 능이었다. 동분이실의 석실을 채택했고, 이실의 예에 따라 문관석인상과 무관석인상을 각각 2기, 석양, 석마, 석호를 각각 4기씩 제작했다. 석실 내부에는 고구려 계통의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 일월성진도를 그렸으며,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병풍석으로 둘렀고, 그 바깥쪽으로 다시 외박석과 난간주석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구영릉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부터는 보이지 않는 신도비도 세워졌다.[1]
4. 1. 학술적 가치
구영릉 석물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 석물 배치 방식, 제작 수법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당시 사용된 양전척(量田尺), 주척(周尺) 등을 통해 세종 시대의 국력과 문화 발전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1] 조선 문종 2년(1452) 세종대왕신도비가 건립되면서 공역(工役)이 완성된 단계의 조선 전반기 대표 조각상이라는 점은 이러한 학술적 가치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2]4. 2. 예술적 가치
구 영릉 석물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 석물 배치 방식, 제작 기법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세종 시대의 국력과 문화 발달 정도를 짐작하게 하며, 조선 전기 조각상의 대표적인 예로 평가받는다.[1]석물 중 석호상은 십이지신상에서 수호신으로 나타나는 등 귀중하게 여겨졌다. 비록 조성 당시의 모든 석물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구 영릉 석물은 여전히 조선 초기 석조 미술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웅장하고 섬세한 조각 기법을 보여준다.[2]
5. 지정 내역
wikitext
현재 지정된 구영릉 석물은 총 13기(基)이다.[1]
번호 | 사진 | 문화재명 | 수량 | 크기 | 석질 |
---|---|---|---|---|---|
42-1호 | 세종대왕신도비 (世宗大王神道碑) | 1기 | 높이 5.7m, 두께 50cm, 너비(하단 1.55m, 상단 1.78m) | 대리석 | |
42-2호 | 문관석인상1 (文官石人像1) | 1기 | 높이 3.15m, 어깨 너비 1.04m, 두께 1.07m | 화강암 | |
42-3호 | 문관석인상2 (文官石人像2) | 1기 | 높이 2.84m, 어깨 너비 1.06m, 두께 96cm | ||
42-4호 | 무관석인상1 (武官石人像1) | 1기 | 높이 3.12m, 너비 1.07m, 두께 m | ||
42-5호 | 무관석인상2 (武官石人像2) | 1기 | 높이 3.23m, 너비 1.06m, 두께 1m | ||
42-6호 | 석양상1 (石羊像1) | 1기 | 높이(대석 포함) 1.21m, 길이 1.47m | ||
42-7호 | 석양상2 (石羊像2) | 1기 | 높이(대석 포함) 1.22m, 길이 1.45m | ||
42-8호 | 석마상1 (石馬像1) | 1기 | 높이(대석 포함) 1.66m, 길이 1.52m, 너비 60cm | ||
42-9호 | 석마상2 (石馬像2) | 1기 | 높이(대석 포함) 1.7m, 너비 61cm | ||
42-10호 | 장명등 (長明燈) | 1기 | 높이(지대석 포함) 1.8m, 지름 86cm | ||
42-11호 | 망주석 (望柱石) | 1기 | 길이 77cm, 지름(원수 40cm, 운두 55cm) | ||
42-12호 | 혼유석 (魂遊石) | 1기 | 길이 2.236m, 너비 1.73m, 높이 44cm | ||
42-13호 | 고석 (鼓石) | 1기 | 높이 45cm, 지름 65cm |
6. 동산화된 부동산문화재
구영릉 석물은 원래 동산(움직여 옮길 수 있는 재산)이 아니었으나, 여러 과정을 거쳐 동산 문화재가 되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구영릉이 있던 자리에 함께 묻혔다가 1973~1974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이전되었다.[1]
원래 능의 구성물이었던 석물이 땅속에 묻혔다가 발굴되어 박물관 등으로 옮겨져 보관, 전시됨으로써 동산 문화재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는 1973~1974년 발굴 당시의 모든 품목과 수량이 남아있지는 않다. 석양상과 석마상은 각각 4기(基)씩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각 2기(基)씩 남아있고, 망주석은 2기(基) 중 1기(基)의 일부만 남아있다.[1] 장명등은 개석(蓋石)이 없고, 세종대왕 신도비는 귀부(龜趺)가 망실되었다. 혼유석은 동쪽이 절단되었고 고석은 1기(基)만 남았다. 병풍석은 발견되지 않았다.[1] 난간주석은 크기가 달라 추가 확인이 필요하고, 석호상은 일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되거나 도굴 후 회수되어 단국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나 역시 확인이 필요하다.[1]
2003~2004년에는 분산 배치되어 있던 석물들을 현재 위치로 일괄 이전하여 세종대왕기념관의 야외 전시물로 기능하고 있다.[3] 이처럼 구영릉 석물은 조선 초기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지 못하고 일부 유실되거나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7. 추가 확인 필요 사항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있는 7기의 난간주석(欄杆柱石)은 2기가 나머지 5기와 크기 및 제작 기법 면에서 차이를 보여, 어느 것이 구 영릉(舊英陵)의 난간주석인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1] 석호상(石虎像)은 1974년 발굴 이후 2기가 현재의 영릉으로 이전되었고, 나머지 2기는 발굴 전 도굴되었다가 회수되어 단국대박물관에 옮겨졌다고 하나 역시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1]
죽석(竹石)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있으나, 발굴 당시 구 영릉 봉분 터 주위에서 죽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어 죽석에 대해서도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1]
참조
[1]
간행물
서울특별시고시제2002-76호
http://event.seoul.g[...]
서울특별시장
2002-03-15
[2]
문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
[3]
간행물
서울특별시공고 제2007-2111호
http://event.seoul.g[...]
서울특별시장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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