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빗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콜라스 빗선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조선술, 지도 제작, 정치, 예술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술에 관한 저서를 출판하고, 러시아 해군 현대화에 기여했으며, 시베리아 최초의 지도를 제작하여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빗선은 또한 암스테르담 시장을 역임하며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고, 윌리엄 3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원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저서와 수집품은 당대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네덜란드의 지리학자 - 페트뤼스 플란시우스
페트뤼스 플란시우스는 플랑드르 출신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지도 제작자, 개혁파 교회 목사로서, 항해술 발전에 기여하고 남쪽 하늘 별자리 연구와 새로운 별자리 도입,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설립 기여 등 지도 제작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 10648번에 그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 네덜란드의 지도 제작자 - 빌럼 바런츠
빌럼 바런츠는 북동 항로를 탐험하다가 노바야제믈랴에서 조난당해 사망했지만, 그의 탐험은 북극 지역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 네덜란드의 지도 제작자 - 페트뤼스 플란시우스
페트뤼스 플란시우스는 플랑드르 출신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지도 제작자, 개혁파 교회 목사로서, 항해술 발전에 기여하고 남쪽 하늘 별자리 연구와 새로운 별자리 도입,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설립 기여 등 지도 제작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 10648번에 그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니콜라스 빗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641년 5월 8일 |
출생지 |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
사망일 | 1717년 9월 10일 |
사망지 |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
매장지 | 에흐몬트 안 덴 호프, 잉글랜드 |
직업 | 정치가 |
2. 초기 생애와 교육
니콜라스 빗선은 암스테르담의 유력 가문인 빗선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코르넬리스 얀 빗선은 암스테르담의 시장이자 수석 집행관이었으며,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행정관을 지냈다. 1656년, 니콜라스는 아버지를 따라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당시 통치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의 자녀들을 만났다.[2]
빗선은 1671년에 Aeloude and hedendaegsche Scheepsbouw en Bestiernl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곧 조선술 분야의 표준 저작으로 인정받았다. 해부학자인 스테노조차 이 책을 읽었을 정도였다. 빗선이 설명하는 기술은 배의 뼈대보다 선체를 먼저 만드는 '선체 우선' 방식이었으며, 당시 일반적이던 '프레임 우선'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 책은 표현이 모호하고 구성이 혼란스러워 읽기 쉽지는 않지만, 빗선이 직접 제작한 흥미로운 판화가 많이 실려 있다. 이는 동시대 조선업자이자 하리치 시장이었으며 표트르 대제의 스승이기도 했던 앤서니 딘의 ''해군 건축 교리''와 비교될 만하다.[5]
1688년, 빗선은 윌리엄 3세의 잉글랜드 침공 계획 논의에 참여했으나, 처음에는 큰 의구심을 표하며 명확한 조언을 주저했다.[8] 윌리엄 벤팅크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민감한 사람이라고 평했다.[8] 당시 다른 시장들 중 코르넬리스 헤일빈크는 공개적으로 계획에 반대했고, 장 아펠만은 왕자의 신뢰를 얻지 못해 정보에서 배제되었다. 침공이 실행된 후, 빗선은 런던으로 가서 암스테르담 시가 지원 자금으로 사용한 [9]의 비용을 충당할 방법을 모색했다. 윌리엄 3세가 준남작 작위를 제안했지만, 빗선은 이를 사양했다.[9]
시장으로서 빗선은 예술과 과학 분야의 후원자 역할을 했으며, 라이프니츠와 같은 독일 학자들과 교류했다.[12] 그는 안토니 반 레벤후크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현미경을 통한 미생물 관찰을 지원했다. 또한 화가 얀 더 브레이와는 도시 급수 개선 계획과 관련하여 협력했으며, 이집트와 러시아 연구에 도움이 필요했던 예술가 코르넬리스 더 브루인을 지원했다. 빗선은 더 브루인이 페르세폴리스 그림을 왕립 학회에 소개하도록 독려했을 가능성이 있다.[13] 올퍼트 다퍼, 요한 니어호프의 형제(중국 조선에 대한 설명 포함), 소방 호스를 발명한 얀 판 데르 헤이덴, 약사 헤르마누스 앙겔코트 주니어, 피터 랑엔디크를 포함한 46명의 저자가 빗선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했다.[15] 그는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이 수리남에서 수집한 식물과 곤충에 대한 판화를 출판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1966년 출판)
1662년 3월, 니콜라스는 암스테르담의 아테네움 일루스트르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여했다. 그는 혜성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반박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조카인 요하네스 후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라이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3] 법보다는 언어학과 지도 제작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1664년부터 1665년까지 니콜라스는 특사 야코프 보렐이 이끄는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 공국을 방문했다. 사절단은 배를 타고 당시 스웨덴 영토였던 리가에 도착한 뒤, 육로를 통해 노브고로드를 거쳐 모스크바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평생 친구가 된 앤드류 비니우스를 만났고, 이후 그에게 지도와 물건들을 보내주었다. 당시 차르였던 알렉세이 1세와 타르 독점권을 놓고 벌인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빗선은 자신의 일기에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도 예술이나 과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니콘 총대주교를 만나 성상 숭배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자신의 수호성인이자 암스테르담의 수호성인인 성 니콜라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러시아 방문 이후에도 그의 학문적 여정은 계속되었다. 1666년부터 1667년까지 이탈리아 로마를 여행했고, 피사에서는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 데 메디치를 만났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과학자 멜키제데크 테베노와 교류했다.[4] 1668년에는 잉글랜드의 옥스퍼드를 방문했다.
1674년, 니콜라스 빗선은 카테리나 호치피에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유아기에 세상을 떠났다.
3. 조선술
이 책은 빗선과 표트르 대제가 서신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서유럽 기준에 비해 뒤처져 있던 러시아 제국 해군의 현대화 논의로 이어졌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암스테르담 조선소에 군함을 발주하는 대신, 빗선이 협상한 칙령을 통해 러시아는 네덜란드 공화국에 곡물, 목재, 활석, 타르, 가죽 등을 공급하게 되었다. 1697년, 대사절단의 일환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표트르 대제를 위해 빗선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조선소에서 4개월간의 훈련 과정을 마련해주었다. 표트르 대제는 야코프 J. 힌로펜의 집에 머물면서 빗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식물학자이자 해부학자인 프레데리크 루이스를 만나기도 했다.[6]
4. 지도 제작
니콜라스 빗선은 20년간의 연구 끝에 1690년 시베리아 최초의 지도를 출판했다. 이 지도는 노바야 제믈랴에서 중국까지 이르는 지역을 상세히 묘사했다. 빗선은 차르와 페르시아로 가는 카스피해 경유 무역로 및 시베리아를 경유하는 중국 무역로 개설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1692년, 그는 "''Noord en Oost Tartarye''"(북방과 동방 타르타리아)라는 제목으로 시베리아와 주변 지역에 대한 개요를 출판했으나, 이 초판에는 참고 문헌이 명시되지 않았다. 같은 해, 빗선은 1643년 사할린 해안을 탐험했던 마르턴 헤리츠 즈 브리스의 일기를 입수했지만, 이 일기는 이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빗선은 지도 제작 과정에서 고대 문헌, 중세 아랍 자료, 그리고 동시대 유럽 학자들의 연구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 1705년에는 "''Noord en Oost Tartarye''"의 증보판을 출판했으며, 이 판은 1785년에 재판되었다. 17세기 네덜란드어로 쓰인 이 방대한 책은 백과사전적인 세부 정보를 담고 있으며, 다양한 텍스트를 다소 복잡하게 엮어 놓은 형태였다.
이 책에서 빗선은 당시 유럽인들이 알고 있던 유럽과 아시아의 북부 및 동부 지역, 볼가 지역, 크림 반도,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몽골, 티베트, 중국, 조선, 그리고 일본 등 인접 지역에 대한 정보를 총망라하여 설명했다. 예를 들어, 책에는 900개의 그루지야어 단어와 700개의 칼미크어 단어 목록, 그리고 티베트어, 만주어, 몽골어의 문자 체계 그림 등이 포함되어 있다. 빗선은 총 25개 이상의 언어에 대한 단어 목록 및 기타 데이터를 제공했다.[7]
5. 암스테르담 시장과 학문/예술 후원
시장으로서 빗선은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시베리아의 희귀품과 예술품 수집에 관심을 가졌으며, 헤렌흐라흐트의 골든 벤드에 위치한 자택에 산호, 래커, 서적, 그림, 무기, 도자기, 곤충, 조개껍데기, 박제 동물, 보석 등 방대한 수집품을 모았다. 그의 집과 수집품은 암스테르담의 명소가 되었다.
그는 독일의 학자 라이프니츠 등과 교류했으며, 안토니 반 레벤후크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현미경으로 발견한 미생물에 대해 논의했다. 1698년에는 빌렘 더 플라밍으로부터 뉴홀랜드(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져온 조개껍데기 두 개를 받았고, 이의 그림을 마틴 리스터에게 제공했다.[10] 그러나 빗선은 플라밍의 탐험대가 탐험 자체보다 무역에 더 치중한 것에 실망감을 나타내기도 했다.[11]
빗선은 커피나무를 바타비아(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암스테르담을 거쳐 남아메리카로 전파하려는 시도에도 관여했다. 보어하브는 빗선이 주로 케이프 반도 식물을 그린 1,500점 이상의 식물 그림 컬렉션, 이른바 Codex Witsenii를 수집했다고 추정했다.[12] 이 그림들은 암스테르담의 아테네움 일루스트레 식물학 교수이자 호르투스 보타니쿠스에서 일하던 카스파르 코멜린에게 넘어갔고,[3] 이후 요하네스 부르만에게 전달되어 그의 저서 Rariorum africanarum plantarum(1738-1739)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 코덱스는 부르만 사후 그의 아들 니콜라스 로렌스 부르만에게 상속되었으나, 1800년 경매를 통해 판매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화가 얀 더 브레이와는 도시 급수 시설 개선 계획과 관련하여 접촉했으며, 이집트와 러시아 방문을 위해 인맥이 필요했던 예술가 코르넬리스 더 브루인을 지원했다. 빗선은 더 브루인이 페르세폴리스 그림을 왕립 학회에 선보이도록 독려했을 가능성이 있다.[13]
올퍼트 다퍼, 요한 니어호프의 형제(중국 조선 관련 저술 포함), 소방 호스 발명가 얀 판 데르 헤이덴, 약사 헤르마누스 앙겔코트 주니어, 피터 랑엔디크 등을 포함해 총 46명이 빗선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했다.[15] 또한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이 수리남에서 가져온 식물과 곤충을 묘사한 판화를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빗선은 종교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종교 통합주의적인 접근을 취했다. 그의 관심은 유교의 성인으로 여긴 공자(그의 컬렉션에 있던 한나라 시대 중국 거울 분석에 근거)뿐만 아니라 샤머니즘에까지 이르렀다.[16] 마녀사냥을 비판한 목사 발타자르 베커르와 친분을 유지했다.
6. 빗선의 유산
빗선은 젊은 시절부터 시베리아의 희귀품과 예술품 수집에 열정을 보였다. 암스테르담 헤렌흐라흐트의 골든 벤드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는 산호, 옻칠 공예품, 서적, 그림, 무기, 도자기, 곤충, 조개껍데기, 박제 동물, 보석 등 방대한 수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1698년에는 빌렘 더 플라밍으로부터 뉴홀랜드(호주)산 조개껍데기 두 개를 받아 그 그림을 마틴 리스터에게 제공하기도 했다.[10] 그러나 탐험 자체보다 교역에 더 집중했던 플라밍의 항해 결과에는 실망감을 표했다.[11] 빗선은 커피나무를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을 거쳐 남아메리카로 전파하려는 시도도 했다. 보어하브에 따르면, 빗선은 케이프 반도 식물을 중심으로 1500점 이상의 식물 그림을 모았는데, 이는 'Codex Witseniila'로 알려지게 되었다.[12] 이 그림들은 암스테르담의 아테네움 일루스트레 식물학 교수이자 호르투스 보타니쿠스 소속이었던 카스파르 코멜린에게 전달되었다.[3] 코멜린 사후에는 요하네스 부르만에게 전달되어, 그의 저서 ''Rariorum africanarum plantarumla''(1738-1739)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 1779년 부르만이 사망하자 그림들은 아들 니콜라스 로렌스 부르만에게 상속되었고, 1793년 그가 사망한 뒤 1800년 경매를 통해 팔려 행방이 묘연해졌다.
빗선은 종교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특정 교파에 얽매이지 않는 종교 통합주의적 관점을 가졌다. 그의 관심은 공자(자신의 수집품인 한나라 시대 중국 거울 분석에 기반하여 '성스러운 공자'라 칭함)뿐 아니라 샤머니즘에까지 이르렀다.[16]
마녀사냥을 비판했던 목사 발타자르 베커르는 그의 친구였다.
빗선은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별장 'Tijdverdrijf|테이트페르드레이프nl'(소일거리) 근처 에흐몬트 안 덴 호프에 안장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그의 임종을 지키며 "훌륭한 친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사후 그의 방대한 기록과 서재는 오랫동안 행방이 불분명했다. 조카 니콜라스 빗선 2세(1682-1746)가 서재를 물려받았으나 큰 관심이 없어, 라틴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서적 2,300여 권이 1728년과 1747년 경매에 부쳐졌다.[17] 또 다른 조카 니콜라스 빗선 3세(1709-1780)는 여러 가족 구성원이 수집한 원고를 상속받아 1761년 경매로 넘겼다.[18] 1886년에 이르러서야 빗선의 모스크바 여행 일기 사본과 노트가 파리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19] 이를 통해 그의 사후 300년이 지나서야 여행기가 출판될 수 있었다.
7. 저서
Moskovische Reyse 1664–1665. Journaal en Aentekeningennld 모스크바 여행 1664–1665. 일지 및 기록
(Th.J.G. 로허와 P. 데 벅 편집, 헤이그, 1966. 1996년 러시아어 번역본 Путешествие в Московию 1664–1665|푸테셰스트비예 브 모스코비유 1664–1665rus 출간)1671 Aeloude en hedendaegsche Scheepsbouw en Bestiernld 고대 및 현대의 조선술과 운영 1690 Architectura Navalis et Regimen Nauticumlat 조선술과 항해 지침 (제2판) 1692 Noord en Oost Tartarye, ofte bondig ontwerp van eenige dier landen en volken welke voormaels bekent zijn geweest. Beneffens verscheide tot noch toe onbekende, en meest noit voorheen beschreve Tartersche en naaburige gewesten, landstreeken, steden, rivieren, en plaetsen, in de noorder en oosterlykste gedeelten van Asia en Europa verdeelt in twee stukken, met der selver land-kaarten: mitsgaders, onderscheide afbeeldingen van steden, dragten, enz. Zedert naauwkeurig onderzoek van veele jaaren, door eigen ondervindinge ontworpen, beschreven, getekent, en in 't licht gegevennld 북동 타르타리아, 또는 과거에 알려졌던 일부 땅과 민족에 대한 간결한 개요. 더불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고 대부분 이전에는 기술되지 않았던 타르타르 및 인접 지역, 지방, 도시, 강, 장소들, 아시아와 유럽의 북쪽 및 동쪽 부분에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해당 지역의 지도와 함께: 또한, 도시, 복장 등의 다양한 그림들. 다년간의 정밀한 연구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상, 기술, 그림을 그리고 출판함
(초판: 암스테르담, 1692; 제2판: 암스테르담, 1705; 1785년 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