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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 하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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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다 하야오는 1882년 센다이시에서 태어난 일본 육군 군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 주재 무관으로 활동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맺었다. 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으로 만주국군 육성에 힘썼으며, 중국 주둔군 사령관으로 화북 분리 공작을 추진했다. 참모차장 시절에는 중일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도조 히데키와의 갈등으로 좌천되었다. 예비역으로 편입된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재판에서 증언하며 일본의 입장을 옹호했다. 1948년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중일 전쟁 초기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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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 하야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다 하야오 소장 (1932-36)
본명다다 하야오
출생일1882년 2월 24일
출생지센다이, 미야기현, 일본 제국
사망일1948년 12월 16일
사망지도쿄,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
별칭없음
군사 경력
소속 국가일본 제국
군종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3년–1941년
최종 계급[[파일:帝國陸軍の階級―襟章―大将.svg|35px]] 육군 대장
지휘지나 주둔군
제11사단
제3군
북지나 방면군
소속 부대제18 포병 연대
참전 전투러일 전쟁
시베리아 출병
중일 전쟁
동계 공세 (1939-1940)
백단대전
남진 전투
수상욱일장
금치훈장 (2등)
가족
이후 활동농부

2. 생애

다다 하야오는 센다이 번 출신 사무라이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삼촌에게 입양되었다. 센다이 육군 지방 유년 학교, 육군 중앙 유년 학교를 거쳐 190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15기)하고,[3]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러일 전쟁 중 뤼순 공방전에 참전했다.[12] 1913년 육군대학교를 졸업(25기)하고,[13]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유명한 고모토 다이사쿠의 여동생과 결혼했다.[14]

1917년 베이징의 중화민국 육군 대학 교관으로 초빙되면서 중국과 인연을 맺었다.[15] 리위안훙 대총통의 최고 군사 고문이었던 아오키 노부즈미 중장과 사카니시 리하치로 소장의 보좌관을 겸임하며 시베리아 출병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15] 다다는 이들을 스승으로 삼아 중국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15][16] 시베리아 출병 당시 만주를 시찰하면서 힘에 의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16]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1932년 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이 되어 만주국군 육성을 맡았다.[18] "오족협화"라는 이상에 공감하여, 일본의 지도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현지 풍속과 관습을 존중하는 방침으로 군대 건설에 힘썼다.[18]

1935년 중국 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화북 분리 공작을 추진했다.[19][20] 관동군의 대소련 전쟁 대비와 총력전 체제 구축을 위해 화북의 자원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21][22] "다다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 측을 자극하였으나,[23][20] 이는 큰 문제가 되었고, 히로타 고키 외상이 해명해야 했다.[23] 지둥 방공 자치 정부 성립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24][25] 1936년, 지차 정무 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과 방공 협정을 체결했다.

"고장불명(孤掌不鳴)"을 좌우명으로 삼고, "일중 공존공영"을 주장하며, 일본인의 잘못된 우월감을 버리고 중국의 독립과 체면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7][28] 헌병을 동원하여 밀수 단속을 실시하기도 했다.[27][28] 1935년 12월 17일 톈진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다다를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29]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 부참모장으로서 이시하라 간지 등과 함께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33] 트라우트만 평화 공작을 추진하여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에게 연락, 독일 주중 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의 중재를 통해 일본과 중국 간 긴장 완화를 시도했다.[36] 그러나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육군성 스기야마 하지메, 해군성 요나이 미쓰마사, 외무성 히로타 고키에 의해 무산되었다.

1938년 1월 15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히로타 고키 외상은 트라우트만 평화 공작 중단을 주장했지만, 다다는 "이 기회를 놓치면 장기 전쟁이 될 우려가 있다"며 협상 지속을 주장했다.[51] 결국 평화 공작은 중단되고, 다음 날 고노에 총리는 "이후 장제스는 협상 상대가 아니다"라는 제1차 고노에 성명을 발표했다.

스기야마 겐 육군대신 경질 문제와 이시하라 간지의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였다.[64] 이타가키 육군대신에게 도조 경질을 요구했고, 도조 역시 다다 경질을 요구하며 맞섰다.[65] 결국 양측 모두 경질되었으나, 다다는 제3군 사령관으로 전출된 반면, 도조는 항공 총감으로 영전하여 다다는 이타가키와 절연하게 되었다.[65]

1939년 히라누마 내각 총사퇴 후 아베 노부유키 내각 조각 시, 육군 삼장관 회의에서 후임 육군대신 후보로 결정되었으나,[66] 도조 파의 반대와 쇼와 천황하타(슌로쿠) 또는 우메즈(미지로) 선호로 무산되었다.[68][70][72][74]

1941년 육군 대장 승진과 동시에 군사 참의원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 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77] 육사 15기 동기인 우메즈 미지로와 하스누마 시게루는 현역으로 남았기 때문에, 육군 대신 도조 히데키에 의한 보복성 인사로 여겨진다.[77][78] 태평양 전쟁 중 예비역 장성들이 소집되었지만, 다다는 소집되지 않고 지바현 다테야마시에서 은거했다.[79][80]

1945년 A급 전범 용의자로 지정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지 않았다.[82]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출두하여 일본의 입장을 변호하는 증언을 했다.[81][82] 1948년 지바현 다테야마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고,[81] 사망 일주일 후 전범 지정이 해제되었다.[77]

2. 1. 초기 군 경력

센다이 번 출신 사무라이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삼촌에게 입양된 다다 하야오는 센다이 육군 지방 유년 학교, 육군 중앙 유년 학교를 거쳐 190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15기)했다.[3] 졸업 후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러일 전쟁 중 뤼순 공방전에 참전했다.[12]

1913년 육군대학교를 졸업(25기)하고,[13] 같은 해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유명한 고모토 다이사쿠의 여동생과 결혼했다.[14]

1917년 베이징의 중화민국 육군 대학 교관으로 초빙되면서 중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15] 리위안훙 대총통의 최고 군사 고문이었던 아오키 노부즈미 중장과 사카니시 리하치로 소장의 보좌관을 겸임하며, 주로 시베리아 출병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15] 아오키와 사카니시는 육군 내에서 손꼽히는 중국 전문가였으며, 다다는 이들을 스승으로 삼아 중국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15][16]

시베리아 출병 당시, 다다는 사카니시의 명령으로 만주를 시찰하면서 힘에 의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기록했다.[16]

2. 2. 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 시절

1931년 만주 사변이 일어났다. 이듬해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되자 다다는 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이 되어 만주국군 육성을 맡았다.[18] 하지만 국군이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동북 4성의 각 군벌의 사병을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다다는 임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는 만주국의 "오족협화"라는 이상에 공감하여, "일본이 지도적인 입장에 있어도, 힘 있는 자는 겸허하게 마음을 다하고, 약자의 입장을 고려한다", "중국의 실정을 모르는 일본인은 잘못된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만주국에의 입국은 최소한으로 한다", "현지의 풍속과 관습을 존중하고, 일본적인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군대 건설에 힘썼다.[18]

2. 3. 중국 주둔군 사령관 시절

1935년 8월, 다다는 우메즈 미지로의 후임으로 톈진에 사령부를 둔 중국 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19] 당시 일본군은 화북 분리 공작을 추진하며 화북에 구 군벌의 자치 정부를 세우려 획책하고 있었다.[20] 이는 관동군이 대소련 전쟁을 위해 측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고,[21] 총력전 체제 구축을 위해 화북의 자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22]

6월에는 펑타이 병변, 10월에는 샹허 사건 등 “중국인에 의한” 자치 운동(배후에는 일본 군부가 있었다)이 일어났다.[20]

이러한 상황에서 다다는 9월 24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 세 가지 점을 강조하며 북지 5성 연합 자치체 결성에 대한 지도를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 측을 자극하였다.[23][20]

이 "다다 성명"은 큰 문제가 되었고, 히로타 고키 외상은 이를 정식 성명이 아닌 기자단과의 담화라고 해명해야 했다.[23] 비록 현재 연구에서는 막료가 성명을 준비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다다 성명"이 다다의 본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어쨌든 다다의 실책이 된 것은 분명하다.[23]

이후 일본 군부의 압력으로 11월 25일 지둥 방공 자치 위원회(12월 25일 지둥 방공 자치 정부로 개칭)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는 자치를 가장한 괴뢰 정권이었으며,[24] 다다는 이러한 방식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25]

한편, 중국 측은 일본의 압력을 피하고자 12월 18일 지차 정무 위원회를 설치하여, 화북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자치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24]

1936년, 다다는 지차 정무 위원회의 위원장 쑹저위안과 방공 협정을 체결하였다.

2. 4. 참모차장 시절

다다는 "고장불명(孤掌不鳴)"을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대중 정책에서도 "일중 공존공영"을 기조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지 기초 관념"이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했는데,[27][28]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일본인은 잘못된 우월감을 버려야 한다.
  • 중국의 독립을 존중하고, 중국 민족의 체면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일본의 부정부패를 단속하고, 불량 일본인을 즉시 추방해야 한다.
  • 직업적 친일파를 배격해야 한다.


다다는 화북 지역에서 일본인들이 중국인을 멸시하고, 심지어 중국 관헌을 무시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자성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27] 그는 실제로 헌병을 동원하여 밀수 단속 등을 실시하기도 했다.[27][28]

이처럼 중일전쟁 친선을 지향했지만, 톈진 재임은 불과 9개월 만에 끝나 귀국해야 했다.[29] 1935년 12월 17일에는 톈진 일본 조계의 지나 주둔군 사령관 관저 근처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중국인 1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이는 다다를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29]

다다가 현지인들로부터 존경받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무츠 부인의 회고에 따르면, "슌님(駿様, 다다 하야오의 별명)은 재임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톈진 시장을 비롯한 중국 요인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이임할 때 베이징 시장 부인이 만수산에서 송별 연회를 여는 등 정중하게 마음을 써주어 감명받았다"고 한다.[29]

2. 4. 1. 중일 전쟁 불확대 노력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발발 이후, 다다는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 부참모장으로서 이시하라 간지 등과 함께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33] 그는 독일의 중재를 통한 트라우트만 평화 공작을 추진하였다.[36] 다다는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에게 연락하여 독일 주중 대사인 오스카 트라우트만이 주도하는 중재 노력의 일환으로 일본과 중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다다는 양국이 소련의 외부 위협과 공산주의의 내부 위협이라는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서로 싸우면서 귀중한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본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 육군성 스기야마 하지메, 해군성 요나이 미쓰마사, 외무성 히로타 고키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들은 모두 다다가 사적 외교를 시도했다고 비난했다.

다다는 혼마 마사하루 정보부장과 함께 비밀 공작을 진행하여 상하이에 마네기를 파견했다. 마네기는 전선 시찰을 핑계로 오트와 상하이에 건너가 10월 26일에 오스카 트라우트만 주중 독일 대사와 회담했다. 중일 평화의 중재를 요청하여 트라우트만으로부터 쾌락을 얻었다.[36]

같은 시기,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도 주일 독일 대사에게 평화의 중재를 의뢰하여, 트라우트만을 통한 중일 협상 루트가 설정되게 되었다.[36]

다다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이 평화 공작은 현대에는 "'''트라우트만 평화 공작'''"이라고 불린다.

11월 2일, 히로타 외무대신으로부터 디르크센 대사에게 일본 측의 평화 7개 조건이 제시되었다. 디르크센은 이 조건이라면 중국 측이 수락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5일에는 트라우트만으로부터 장제스에게 일본의 평화 조건이 전달되었다.[39]

그러나 장제스는 이 평화 조건을 거부했다. 11월 3일에 브뤼셀에서 개막한 구국가 조약 회의(일본은 불참)의 동향에 기대를 건 것이었다. 회의 결과는 중일의 무력 충돌에 대해 즉시 정전을 권고했을 뿐, 중국이 원했던 대일 제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40] 또한, 이 시기 장제스는 소련에 파병 요청을 했지만, 결국 소련은 움직이지 않았다.[41]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장제스는 일본의 평화 조건을 재고하게 되었다.

이 동안 트라우트만을 통한 평화 협상의 자세한 내용은 오트로부터 혼마 정보부장에게 전해졌지만, 다다 이외에는 알리지 않는 철저함이었다.[36]

12월 2일, 장제스는 트라우트만에게 강화 조약의 기초로서 일본의 요구를 수락할 것을 전했다.[42] 12월 7일, 디르크센 대사는 중국 측의 의향을 히로타 외무대신에게 전했지만, 히로타는 최근 일본의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평화 조건의 변경을 시사했다.[42]

격전이 벌어졌던 상하이 전투는 11월 9일까지 종결되었으며, 중국 측은 최정예 부대가 괴멸, 투입 병력 70만 중 19만 명의 희생을 내는 큰 손해를 입었다.[43] 한편, 일본 측은 상하이에서 작전을 중단할 예정이었지만, 현지 군의 요청에 밀려 전선은 확대되어 갔다.[44] 다다는 현지 군의 난징 추격을 한 번은 막았지만, 결국 현지 군의 적극론이 이겨 12월 1일에 난징 공략 명령이 내려지는 상황이었다.[44]

12월 21일, 일본의 새로운 평화 조건이 결정되었지만, 12월 13일에 난징을 공략한 일도 있어, 평화 조건은 잇따라 가중되어, 이전 안에 비해 훨씬 가혹한 것으로 바뀌었다.[45] 일본의 신 평화 조건은 22일에 히로타 외무대신으로부터 디르크센 대사에게 전달되었다. 디르크센은 중국 측의 수락은 절망적이라는 견해를 보였다.[42]

이 신 평화 조건에 대해, 중국 측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46] 다만, 12월 말의 국방 회의에서 평화 수락을 결정했다는 설, 또는 정부 수뇌가 평화 수락으로 기울었지만, 장제스의 양해를 얻기 전에 일본으로부터 협상이 중단되었다는 설도 있다.[46] 장제스의 일기에는 "일본의 조건과 방식이 이토록 가혹하니, 우리나라가 고려할 수도 없고, 수락할 수도 없다. 이를 상대하지 않기로 결심해도 내부적 분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지만, 장제스의 항전론은 국방 회의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47] "장제스를 제외한 당정군의 책임자는 모두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에 반대"[48]였다. 중국이 답변을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 일은 일본 측에서 지연 작전으로 간주되게 된다.[46]

신 평화 조건에 대한 중국으로부터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일본 측에서는 정부・육군성을 중심으로 협상 중단론이 대두되었다.[49] 이에 대해 참모 본부는 협상 중단론을 억누르고, 협상 기한 연장을 꾀하는 한편, 어전 회의 개최를 요청했다.[49] 1월 11일의 어전 회의에서는 화전 양용안이 채택되어, 중국 정부가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후 이를 상대하는 사변 해결에 기대를 걸지 않고, 신흥 지나 정권의 성립을 조장한다"[49], 요구에 응할 경우에는, 중국이 성의를 가지고 평화 조건을 실행한다면 조건 완화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결정했다.[50]

일본 측은 15일까지 중국으로부터 만족스러운 답변이 없으면 협상을 중단하기로 합의했지만, 14일에 도착한 중국의 답변은 일본의 평화 조건이 애매하니, 구체적인 세부 조건을 제시해 달라는 취지의 내용이었다.[50] 정부는 중국의 답변을 성의가 없다고 보고 협상 중단으로 기울지만, 참모 본부는 여전히 협상 지속을 주장, 이렇게 15일의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는 정부와 통수부의 전면 대결이 되었다.[50]

1938년 1월 15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히로타 고키 외상은 트라우트만 평화 공작 중단을 주장했지만, '''다다는 "이 기회를 놓치면 장기 전쟁이 될 우려가 있다"며 협상 지속을 주장했다'''.[51]

다다를 제외한 참석자들은 차례로 평화 공작의 중단을 주장했다.[51]

  • 스기야마 육상은 "기한까지 회신이 없는 것은 평화의 성의가 없다는 증거이다. 장제스를 상대로 굴복할 때까지 작전해야 한다"고 말했다.[51]
  • 히로타 외상은 "오랜 외교관 생활의 경험에 비추어, 중국 측의 응답은 평화 해결의 성의가 없는 것이 명확하다. 참모 차장은 외무대신을 믿지 않는가"라고 말했다.[51]
  • 고노에 총리는 "신속하게 평화 협상을 중단하고, 우리의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51]
  • 요나이 해상은 "정부는 외무대신을 신뢰한다. 통수부가 외무대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동시에 정부 불신임이다. 정부는 사직 외에는 없다"고 말했다.[51]


참석자 중 유일하게 평화 공작 지속을 주장한 다다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51]

오전에 시작된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는, 단 한 사람, 평화 공작 중단에 반대하는 다다의 저항으로 인해 저녁까지 이어졌다.[52]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의 결론은 "평화 공작 중단"이었다.'''

다다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52]

결국 다음 날인 16일, 고노에 총리는 "이후 장제스는 협상 상대가 아니다"라는 뜻을 선언했다 (제1차 고노에 성명).

2. 4. 2. 도조 히데키와의 갈등 및 좌천

스기야마 겐 육군대신 경질 문제와 이시하라 간지의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다다는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였다. 1938년 8월, 이시하라 간지가 만주에서 귀국하자, 다다와 도조 차관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다다는 황족 총장 아래에서 실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대차관'으로서, 육군차관을 건너뛰고 이타가키 육군대신과 직접 접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도조 차관에게 불쾌감을 주었다.[64] 12월, 이시하라가 마이즈루 요새 사령관으로 좌천되자, 이 인사를 둘러싸고 다다와 도조는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65] 다다는 이타가키에게 도조의 경질을 요구했고, 도조 역시 이타가키에게 다다의 경질을 요구하며 맞섰다.[65] 결국 이타가키의 중재로 양측 모두 경질되었으나, 다다는 제3군 사령관으로 전출된 반면, 도조는 항공 총감으로 영전하는 형태가 되어, 다다는 이타가키와 절연하게 되었다고 한다.[65]

1939년 8월, 히라누마 내각이 총사퇴하고 아베 노부유키 내각이 조각될 때, 다다는 육군 삼장관 회의에서 이타가키 육군대신의 후임 육군대신 후보로 결정되었다.[66] 후보로는 도조 히데키, 니시오 스스무, 이소야 렌스케 등이 거론되었으나, 도조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강했음에도 이타가키를 중심으로 한 반대론에 의해 다다로 결정되었다.[66]

그러나 이 결정은 곧 파문을 일으켰다. 도조 파는 다다의 육군대신 취임을 저지하려 했고, 기도 고이치 내무대신에게 다다 반대를 요청하기도 했다.[68] 또한, 신문에 후임 육군대신 후보로 이소야와 다다의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이는 도쿄 헌병대의 정보 누설에 의한 다다 취임 방해 공작이었다는 증언도 있다.[68]

이이누마 마모루 소장이 다다에게 승낙을 얻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쇼와 천황은 "육군대신으로는 하타(슌로쿠) 또는 우메즈(미지로)를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70] 관동군은 이 인사에 반대하며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사령관이 이타가키 육군대신에게 대신 유임을 간청하는 전보를 보내는 등 저항했다.[71] 쇼와 천황은 신문 보도를 통해 이소야와 다다가 신임 육군대신 후보로 거론되는 것을 알고, 아베에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자를 대신으로 데려와도, 자신은 승낙할 뜻이 없다"라고 말했다.[72] 이는 이시하라(파)에 대한 경계심 때문으로 추측된다.[72] 결국 육군 삼장관 회의를 다시 열어 하타를 육군대신 후보로 결정함으로써, 다다의 육군대신 취임은 무산되었다.[74] 육군 삼장관 회의에서 결정된 육군대신 후보가 뒤집힌 것은 다다의 사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75]

2. 5. 예비역 편입 및 말년

1941년 7월, 육군 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군사 참의원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 후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77] 같은 육사 15기 출신 육군 대장인 우메즈 미지로와 하스누마 시게루는 현역으로 남았기 때문에, 이는 육군 대신 도조 히데키에 의한 보복성 인사로 여겨진다.[77][78]

태평양 전쟁 중에는 예비역 장성들이 소집되어 군무에 종사했지만,[79] 다다는 소집되지 않고 지바현 다테야마시에서 은거하며 지냈다.[80]

1945년 12월,[77] A급 전범 용의자로 지정되었으나, 건강 문제 등으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지 않았다.[82]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출두하여 일본의 입장을 변호하는 증언을 했다.[81][82]

1948년 12월 18일,[3] 지바현 다테야마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81] 사망 일주일 후, 전범 지정이 해제되었다.[77]

3. 평가

다다 하야오는 중일 전쟁 초기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중국 전문가로서 중국과의 평화 공존을 주장했지만, 당시 일본 군부 내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27][28] 그는 "고장불명(孤掌不鳴)"孤掌不鳴|고장불명중국어을 좌우명으로 삼고, "일중 공존공영"을 주장하며 중국에 대한 이해를 강조했다.[27][28]

다다는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에게 연락하여 오스카 트라우트만 독일 주중 대사의 중재를 통해 일본과 중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그는 양국이 소련의 위협과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했지만,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비롯한 일본 내 강경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다다는 화북 분리 공작을 추진하고, 1935년 9월 "다다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 측을 자극하는 등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23][20] "다다 성명"은 히로타 고키 외상이 해명할 정도로 문제가 되었으며, 다다의 실책으로 평가받는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는 "대지 기초 관념"이라는 팸플릿을 통해 일본인의 우월감을 버리고 중국의 독립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27][28] 또한, 톈진 시장을 비롯한 중국 요인들의 신망을 얻는 등 현지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29]

4. 연보


  • 1903년(메이지 36년) 11월 - 육군사관학교 졸업(15기)[3]。육사 15기 동기생으로는 우메즈 미지로(육군 대장), 하누마 반(육군 대장), 가와모토 다이사쿠(육군 대좌), 노기 야스노리(노기 마레스케의 차남, 러일 전쟁에서 전사) 등이 있다.
  • 1904년(메이지 37년) 3월 - 육군 포병 소위 임관. 야포 제18연대 부속.[3]
  • * 7월 - 러일 전쟁에 종군(1905년 6월까지). 뤼순 공방전에 참가.[12]
  • 1905년(메이지 38년) 6월 - 육군 포병 중위 진급.
  • * 12월 - 육사 생도대 부속.
  • 1909년(메이지 42년) 11월 - 육군 포공 학교 고등과 졸업.
  • 1913년(다이쇼 2년) 8월 - 육군 포병 대위 진급.
  • * 11월 - 육군대학교 졸업(25기)[13]
  • 1915년(다이쇼 4년) 6월 - 참모본부 부원.
  • 1917년(다이쇼 6년) 3월 - 중화민국 정부에 초빙됨(베이징 육군대학 교관).[15]
  • 1918년(다이쇼 7년) 11월 - 참모본부 부속[84]
  • 1919년(다이쇼 8년) 12월 - 육군 포병 소령 진급. 육군대학교 교관.
  • 1923년(다이쇼 12년) 8월 - 육군 포병 중령 진급.
  • 1924년(다이쇼 13년) 7월 - 구미 출장(1925년 2월까지).
  • 1925년(다이쇼 14년) 5월 - 야전 중포병 제2연대 부속.
  • 1926년(다이쇼 15년) 3월 - 중화민국 정부에 초빙됨(베이징 육군대학 교관).
  • 1927년(쇼와 2년) 7월 - 육군 포병 대좌 진급. 육군대학교 교관.
  • 1928년(쇼와 3년) 3월 - 야포병 제4연대장.
  • 1930년(쇼와 5년) 3월 - 제16사단 참모장.
  • 1931년(쇼와 6년) 3월 - 중화민국 정부에 초빙됨(베이징 육군대학 교관).
  • 1932년(쇼와 7년) 4월 - 관동군 사령부 부속(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18]
  • * 8월 8일 - 육군 소장 진급.
  • 1934년(쇼와 9년) 8월 - 야전 중포병 제4여단장.
  • 1935년(쇼와 10년) 8월 - 지나 주둔군 사령관.[19]
  • * 9월 24일 - 허베이 5성 분리 구상(기동 방공 자치 정부의 수립)을 공언.[85]
  • 1936년(쇼와 11년) 4월 - 육군 중장 진급.
  • * 5월 - 제11사단장.
  • 1937년(쇼와 12년) 8월 - 참모 차장. 육군대학교장 겸임(1938년 3월까지).
  • 1938년(쇼와 13년) 12월 - 제3군 사령관.
  • 1939년(쇼와 14년) 9월 -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
  • 1941년(쇼와 16년) 7월 - 육군 대장으로 친임, 군사 참의원.
  • 1941년(쇼와 16년) 9월 - 예비역 편입. 이후 지바현 다테야마시에서 한거.
  • 1945년(쇼와 20년) 12월 - A급 전범 혐의자 지정(스가모 프리즌 수용은 면함).[77]
  • 1948년(쇼와 23년) 12월 - 위암으로 사망, 1주일 후 전범 혐의 해제.[77]

5. 영전

위계



훈장 등



외국 훈장 착용 허가


6. 기타


  • 육군대학교 교관 시절 "중국인 포로 1만 명을 얻은 상황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라는 문제를 출제했다[96]。 육대 학생들은 여러 가지로 고심한 답안을 준비했지만, 다다의 모범 답안은 "무기를 압수한 후 전원 석방, 정업에 종사하게 한다"였다[96]。 이는 학생 중 한 명이었던 아리수 스이조 (나중에 육군 중장)의 회상에 따른 것이다[96]
  • 중국 주재 중 가와시마 요시코와 친하게 지냈으며, 가와시마가 다다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이였다[77]
  • 료칸을 깊이 존경했다[98]료칸 연구의 일인자였던 소마 교후와 깊은 교류를 가졌다[98]1937년 11월, 참모 차장에 취임한 직후 다다가 소마에게 처음으로 서신을 보낸 이후(당시 다다는 소마와 면식이 없었다[98]), 1948년 다다가 사망할 때까지 소마에게 보낸 서신은 72통에 달한다. 이는 이토이가와 민속 자료관(통칭 "소마 교후 기념관")[99]이 편찬한 『소마 교후 앞으로의 서간집』에 수록된 것으로, 군인으로부터 소마에게 보낸 서신으로는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이다[98][100][101]。 다다와 소마는 다다의 사촌 소마 코쿠로를 통해 먼 친척 관계였다[101]
  • 다다의 장남 다다 아키라(1925년생, 2007년 사망)는 경제학자(일본 경제 사상사 전공)로, 지바 대학 교수, 다이토 문화 대학 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102]
  • 자치통감』 등의 역사서, · 시대 병법서 등 약 1,200권에 달하는 다다의 장서가 장남 다다 아키라에 의해 와세다 대학에 기증되어 "보도실(ほうとうしつ) 문고"라는 명칭으로 와세다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103]。 "보도실"은 다다의 서재 호이며, "韜"는 활과 칼을 수납하는 자루를 의미한다[103]
  • "전신주처럼 호리호리한 몸"이라고 표현되는 마른 체형에 장신이었다[104]。 다다 아키라에 따르면, 다다의 신장은 5척 9촌이었다[104]。 다다의 평전을 쓴 이와이 슈이치로는 "단순 계산하면 177cm였다는 셈이지만, 평균 신장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당시에는 꽤 눈에 띄는 존재였을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1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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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간행물 『官報』第2500号「叙任及辞令」 19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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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논문 2017
[102] 논문 2017
[103] 논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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