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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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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와 천황은 제124대 일본 천황으로, 다이쇼 천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6년 즉위하여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했으며, 그의 치세는 쇼와 시대(1926-1989)로 불린다. 그는 1921년부터 섭정으로 정치를 시작했으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일본의 군국주의가 심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군사적 행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항복을 결정하고 1946년 인간 선언을 발표하여 천황의 신성을 부인했다. 전후에는 일본국 헌법에 따라 상징적인 군주로 남았으며, 해양 생물학 연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일본은 격동의 시기를 겪었으며, 그의 전쟁 책임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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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군복을 입은 히로히토
1935년 공식 초상화
이름쇼와 천황
재위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대관식1928년 11월 10일
즉위식 종류일본
선대 황제다이쇼 천황
후대 황제아키히토
추존 호칭쇼와 천황 ()
섭정일본
섭정 기간1921년 11월 25일 – 1926년 12월 25일
섭정 이전 군주다이쇼 천황
배우자구니 나가코(1924년 결혼)
자녀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다카쓰카사 가즈코
이케다 아쓰코
아키히토, 일본 천황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
시마즈 다카코
연호쇼와
연호 기간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왕가일본 황실
아버지다이쇼 천황
어머니구조 사다코
종교신토
출생 이름히로히토, 미치노미야 친왕 ()
출생일1901년 4월 29일
출생 장소도구 궁, 아오야마, 도쿄, 일본
사망일1989년 1월 7일
사망 장소후키아게 궁, 도쿄, 일본
장례일1989년 2월 24일
매장 장소무사시 황릉, 하치오지
쇼와 천황 서명
음성
기타 정보
히로히토 (裕仁)
별칭쇼와 천황 (昭和帝)
아명미치노미야 (迪宮)
인장와카타케 (若竹)
원복1919년 5월 7일
정부 수반와카쓰키 레이지로
다나카 기이치
하마구치 오사치
이누카이 쓰요시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하야시 센주로
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시데하라 기주로
요시다 시게루
가타야마 데쓰
아시다 히토시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단잔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재위 이전 섭정 당시 정부 수반가토 도모사부로
야마모토 곤베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작위대훈위
학력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도구 어학문소 수료
부업생물학자
복무일본군
복무 기간1912년~1945년
계급대원수(일본 육군), 대원수(일본 해군)
지휘전군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2. 즉위 전의 삶

1901년 4월 29일, 메이지 천황의 재위 기간 중 아오야마궁에서 훗날 다이쇼 천황이 되는 황태자 요시히토와 황태자비 사다코(훗날 테이메이 황후) 사이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에는 미치노미야(Michi) 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태어난 지 10주 후, 궁정을 떠나 가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1904년 가와무라 백작이 사망하자, 히로히토는 동생 야스히토 친왕과 함께 궁정으로 돌아왔다.[443] 1908년부터 가쿠슈인에서 초등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메이지 천황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가쿠슈인 학장 겸 히로히토의 교육 담당자로 임명했다.[2] 노기는 체력 단련과 더불어 검소함, 인내심, 자제력 등의 가치관을 심어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요시히토가 즉위했고, 히로히토는 황태자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 제국 육군 소위와 일본 제국 해군 소위로 임관되었고, 욱일장 대훈장을 받았다.[3] 1914년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하고 도고 헤이하치로가 총재로 있던 동궁어학문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6년 공식적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며, 1918년 료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내정되었다.

1919년 성년식을 치렀고, 1920년 귀족원 황족 의원이 되었다. 1921년 영국을 비롯한 유럽 5개국을 방문했으며, 귀국 후 아버지 다이쇼 천황의 건강 악화로 섭정에 취임하였다.[461] 1923년 4월 12일부터 4월 27일까지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섬을 방문하였다.[464] 같은 해 12월 27일에는 도라노몬 사건으로 저격을 당했으나 목숨을 건졌다.

1924년 1월 26일, 나가코 여왕과 결혼했다.[190]

2. 1. 출생과 성장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오후 10시 10분,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현: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카사카)의 아오야마 고쇼(동궁어소)에서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후의 다이쇼 천황)과 황태자비 세쓰코(후의 정명황후)의 첫째 아들(친왕)로 태어났다.[164] 키는 1척 6치 8분(약 51센티미터), 몸무게는 800몬메(3,000그램)였다. 메이지 천황의 첫 손자(내손자)였으며, 황실전범의 규정에 따른 "황손"의 탄생이었다.

1902년 영아 시절의 히로히토


1921년 다이쇼 천황의 네 아들들: 히로히토, 다카히토, 노부히토, 그리고 야스히토 친왕


히로히토는 1901년 4월 29일, 조부인 메이지 천황의 재위 기간 중 아오야마궁에서 태어났다.[1] 21세의 황태자 요시히토(훗날 다이쇼 천황)와 16세의 황태자비 사다코(훗날 테이메이 황후) 사이의 첫 아들이었다. 그는 메이지 천황과 이나바 나루코의 손자였으며, 어린 시절에는 미치노미야(Michi) 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히로히토가 태어나기 전, 메이지 천황과 측근들은 근친혼이 아이의 요절이나 병약한 아이의 출산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439][440] 황족이 아닌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구조 미치타카 공작의 넷째 딸인 구조 사다코를 황태자비로 간택하기로 결정하였다.[439]

메이지 천황은 요시히토와 황태자비 사다코의 의견을 물은 끝에 히로히토를 군인이 가르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히로히토를 교육시킬 후견인이 될 군인은 결혼한 육군·해군 장교여야 했으며 ‘군인적인 모습’을 히로히토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했다.[439] 그리하여 히로히토는 가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양육을 맡기기로 하였다. 가와무라는 유학을 배웠으며, 황태자비 사다코와는 먼 인척 관계였다.[439] 히로히토를 맡은 가와무라는 히로히토를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줄 알며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기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439][441][442]

히로히토는 가와무라가 세상을 떠난 1904년 11월까지 가와무라의 저택에서 지냈으며, 그 후 동생 지치부노미야와 함께 요시히토와 사다코 아래서 자라게 됐다.[443] 처음에는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의 황실 별장에서, 나중에는 아오야마 어소의 황손어전에서 살았다.[442] 히로히토 형제의 직접적인 양육은 요시히토 황태자의 신임 시종장 기도 다카마사가 맡았다가 나중에 전담 시종과 궁녀들이 그 일을 맡게 됐다.[443]

1908년 봄부터 히로히토는 도쿄 요쓰야에 있는 가쿠슈인의 초등과에 들어갔다. 메이지 천황은 러일 전쟁에서 활약했던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를 제10대 가쿠슈인 원장으로 임명해 히로히토를 비롯한 황손들의 교육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노기는 엄격한 군대식 교육과 무사도, 유학 사상, (禪)을 강조하였으며, 황손들을 엄격하게 대했다.[445]

1912년 7월 29일,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아버지 요시히토가 천황이 되면서 히로히토는 황태자로 책봉됐으며, 육군·해군 소위의 직위를 하사받았다.[447]

2. 2. 황태자 시절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오후 10시 10분,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현: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카사카)의 아오야마 고쇼(동궁고쇼)에서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후의 다이쇼 천황)과 황태자비 세츠코(후의 정명황후)의 첫째 아들(친왕)로 태어났다.[164] 키는 약 51센티미터, 몸무게는 3,000그램이었다. 메이지 천황의 첫 손자였으며, 황실전범의 규정에 따른 "황손"의 탄생이었다.

5월 5일, 칭호를 미치노미야(迪宮), 이름을 히로히토(裕仁)로 지었다.[165]

1912년(메이지 45년) 7월 30일, 조부 메이지 천황이 붕어하고, 부친 가니 친왕이 즉위함에 따라 구 황실전범 규정에 의해 황태자가 되었다. 같은 해(1912년(다이쇼 원년)) 9월 9일, 황족신위령 제17조에 따라 만 11세로 육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근위 보병 제1연대 부속 및 제1함대 부속이 되었다.[402] 같은 날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402]

1914년(다이쇼 3년) 3월에 학습원 초등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4월부터 도고 헤이하치로 총재(해군대장)의 동궁어학문소에 들어갔다.

1916년(다이쇼 5년) 10월 31일 만 15세로 육해군 대위로 진급했다.[175] 같은 해 11월 3일 궁중 현소에서 입태자례를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황태자가 되었다.[176]

1918년(다이쇼 7년) 1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의 첫째 딸인 료코 여왕황태자비로 내정되었다.

1919년(다이쇼 8년) 4월 29일 만 18세가 되었다. 5월 7일 성년식을 거행했고,[179] 이듬해 5월 8일 다이쇼 천황·정명황후 주최의 연회가 열렸다.[180] 제국 의회귀족원황족 의원이 되어 즉위까지 약 7년 8개월간 재임했다.[181]

1920년(다이쇼 9년) 10월 만 19세로 육해군 소좌로 진급했다.[182] 1921년(다이쇼 10년) 2월 10일, 료코 여왕과의 약혼에 변경 없음을 발표하여 약혼을 둘러싼 소동은 결착을 보았다( '''궁중 모 중대한 사건''').

같은 해 3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군함 가토리로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유럽 5개국을 방문했다(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유럽 방문'''). 영국 방문 중 5월 9일, 영국 국왕조지 5세로부터 바스 훈장로열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받고, 명예 육군 대장(Honorary General)으로 임명되었다.[183]

귀국 직후인 1921년 11월 25일부터 건강이 악화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고, 칭호도 셋쇼노미야(摂政宮|섭정궁일본어)가 되었다.[461]

히로히토의 대리청정 시기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이온지 긴모치


1923년 육군 중령 및 해군 중령으로 진급하였고, 1925년 육군 대령 및 해군 대좌로 진급하였다.

1923년 4월 12일 요코스카를 출발해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섬으로 행차를 떠났다.[464] 히로히토는 일본이 타이완섬에 세운 신사와 군사 시설, 일본 자본이 개입한 공장 등을 방문하고, 1915년 무장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혔던 535명의 형량을 ‘인애의 상징’이라는 명분으로 줄여주었다.[464] 4월 27일 섬 북쪽 지룽을 떠났다.

1923년 12월 27일 의회 개회식장으로 취임 연설을 하러 가던 중 아나키스트 난바 다이스케가 총격을 가하는 도라노몬 사건이 발생했지만, 동궁 시종장이 다치는 데 그치고 히로히토는 무사했다. 이 사건으로 야마모토 내각이 총사직했으며, 경시총감 유아사 구라헤이 등 관련자들이 면직되었다.[465] 1924년 1월 26일 나가코와 혼례를 올렸다.[466]

2. 3. 섭정 취임

1921년 11월 25일, 히로히토다이쇼 천황의 건강 악화로 인해 만 20세(세는 나이 21세)의 나이로 섭정에 취임하였다.[185] 섭정 취임 이후 히로히토는 '''섭정궁'''(摂政宮)으로 불렸다. 구 황실전범하에서 천황을 대신하여 대권을 행사하는 황족 섭정에 취임한 것은 히로히토뿐이다.

1923년 4월, 히로히토는 1895년부터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을 12일간 방문하였다.[10]

타이완 신문들은 황태자를 위해 고급 중국 요리가 제공되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황제나 황태자가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현지 요리를 먹거나 서양 요리가 아닌 외국 요리를 해외에서 먹은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다.[12]

1923년 4월 24일 타이페이에서 히로히토가 사용한 식기류 (국립 타이완 박물관)


히로히토는 타이페이 외 여러 장소를 방문한 후 4월 25일에는 타이페이의 베이터우 온천 지역을 방문했다. 히로히토 황태자는 덴 겐지로 총독에게 칙령을 전달하고 1923년 4월 26일 기륭을 떠났다.[16]



1923년 9월 1일에는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다. 9월 15일 히로히토는 지진으로 인한 참상을 승마로 시찰하고, 그 상황을 보고 결혼을 연기했다. 12월 27일에는 호노몬 사건으로 저격당했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1924년 1월 26일, 히로히토는 나가코 여왕과 결혼했다.[190]

1925년 4월, 히로히토는 아카사카 동궁 가궁소 내에 생물학 어학문소를 설치했다. 같은 해 8월, 전함 "나가토"로,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과 아사히토 친왕을 동반하여 당시 남쪽 절반이 일본 영토였던 사할린을 시찰했다('''사할린 행계''').[195] 12월, 첫째 황녀·테루노미야 나리코 내친왕이 탄생했다.

3. 천황 즉위와 제2차 세계 대전

昭和天皇일본어의 치세는 여러 중요한 사건들을 포함한다. 1926년 다이쇼 천황붕어에 따라 황위 계승하여 제124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묵인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일으켰을 때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513]

1938년 1월 8일 육군 사열 중 시라유키를 타고 있는 쇼와 천황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을 형성하는 삼국 동맹 조약 당사국이 되었다. 1941년 12월 8일(하와이 시간 12월 7일), 일본군은 홍콩 주둔 영국군, 진주만미국 함대, 필리핀을 동시 공격하고 말레이 반도 침공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로 "옥음방송"을 하여 국민에게 종전을 선언하였다.

1943년 4월 29일 대본영의 장으로서 천황

3. 1. 즉위 초기

온건파 출신인 하마구치 오사치는 쇼와 천황과 궁정 측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히로히토가 즉위한 직후 몇 년 동안 일본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다이쇼 사후 휴회 상태였던 제52차 제국 의회는 1927년 1월 18일에 다시 열렸다.[487] 제국의회에서 쇼와 천황은 궁중 측근들과 함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488] 우선 메이지 천황을 경축하여 새 천황 히로히토를 간접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태어난 날인 11월 3일을 메이지의 날(明治節일본어)로 제정하여 3월 3일에 공표하였다.[488] 그리고 추밀원은 시데하라 외무대신의 대중국 정책을 공격하여 와카쓰키 내각을 총사직하게 했다.[488][489] 그 후, 가와이, 진다, 마키노, 이치키 기토쿠로 등이 천황과 상의해,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새 총리로 세웠다. 다나카의 총리 선임 때부터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당할 때까지 총리 인선은 궁중 측근을 비롯한 내대신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사이온지는 이들의 선택에 재가를 하는 데 그치게 됐다.[488] 1927년 4월 20일에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출범했다.[490] 쇼와 천황은 마키노를 통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각종 정책에 간섭했다.[488]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제국 육군의 계략으로 기차를 타다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쇼와 천황은 이를 불문에 부쳐 은폐하려 했으며,[491] 1929년 7월에 다나카의 후임으로 온건 외교 노선을 표방한 입헌민정당 총재 하마구치 오사치를 새 총리로 지명했다.[491] 미국·영국과의 외교적 충돌을 꺼려했던 쇼와 천황과 궁중 측근들은 해군 군비 축소 문제에 대한 가토 히로하루의 의견을 뿌리쳤으며 가토와 육군중장 아라키 사다오, 도고 헤이하치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의 방해에도 아랑곳않고 하마구치가 순양함 톤수 비율에 대해 영국, 미국과 타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491] 다나카가 있었던 정우회는 이 일을 두고 하마구치 총리와 마키노, 스즈키, 가와이 등의 측근들을 ‘군주 주변의 간신배’라고 규탄했다.[491]

그 후 1930년 4월 22일, 일본이 영국, 미국과 런던 해군 감축 조약을 체결하자, 정우회와 군령부 등은 반대 여론을 부추겼으며, 같은 해 11월 14일에 쇼와 천황이 오카야마현에서 육군 특별 대연습을 지휘하던 사이 하마구치 총리를 극우 폭력배이자 애국사 단원인 사고야 도메오가 저격했다.[491][492][493] 이 사건은 쇼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 세력과 정당 내각 사이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는 계기가 됐다.[491] 이듬해 4월 14일, 후계자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다시 내각을 구성했지만, 군비 축소를 둘러싼 육군과 해군의 대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491]

3. 2. 만주사변과 군부의 발호

1931년 9월 18일 밤, 만주 사변이 일어났다.[494] 쇼와 천황은 이 만주 사변을 묵인했으며 때때로 관동군의 중국 공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나라 다케지가 1931년 9월 22일에 쓴 일기에 따르면 쇼와 천황은 하야시의 통수권을 침해한 침략 행위를 묵인했으며, 10월 1일에는 참모총장과 관동군 사령관에게 “육군 형법을 위배했다”며 가벼운 징계만을 내리는데 그쳤다.[494] 쇼와 천황은 10월 8일에 관동군의 진저우 공중 폭격을 재가했다. 진저우 공습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도시 폭격이었다.[494][495]

10월 24일, 중화민국의 호소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이사회 특별위원회는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스팀슨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과 중화민국에 켈로그-브리앙 조약을 발동했다. 국제 연맹은 일본군에게 11월 16일까지 만주의 점령지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도의적 결의를 가결했다.[494][496] 해외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으나, 반대로 일본에서는 신문, 라디오, 연예계, 제국재향군인회, 극우 단체 등이 불안 심리를 조장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관동군을 지지하고 서양과 중화민국을 비난하는 여론이 강해졌다.[494][497]

11월 6일,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은 장제스 국민정부와의 협상 계획을 파기함을 쇼와 천황에게 보고했으며[494] 시차(熙洽)를 비롯한 남만주의 기득권층 등이 일본을 지지했다.[494] 그 후 시데하라는 마키노 노부아키, 사이온지 긴모치, 새로이 조선 총독이 된 우가키 가즈시게에게도 이 방침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494] 한편 쇼와 천황은 11월 5일에 가나야 한조 참모총장에게 위임명령권을 내려 가나야가 관동군의 작전과 용병(用兵)에 관한 것들을 결정할 수 있도록 윤허했다.[494] 11월 23일, 시데하라는 미국의 AP 통신에 거짓 성명을 내보내, 만주 사변에 발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나라도, 일본군이 만주 북부의 하얼빈과 치치하얼을 점령하게 된[498] 원인을 제공한 나라도 모두 중화민국이라고 밝혔다.[494]

만주에서 진저우 공중 폭격이 벌어진 직후인 10월, 참모본부의 급진 인사인 하시모토 긴고로가 비밀결사 벚꽃회를 이끌고 정권 전복을 기도하는 일이 발생했다. 하시모토는 같은 해 3월에 이어 두 번째로 정권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쇼와 천황과 군 상층부는 하시모토 일당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이들은 솜방망이 처벌만을 받고 풀려났다.[494] 하지만 이 사건은 제국 육군 안에서 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끼리 두 파벌로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하나는 아라키 사다오, 마사키 진자부로, 오바타 도시시로 등을 따르는 청년 장교들이 모인 황도파(皇道派)였고, 다른 하나는 나가타 데쓰잔, 도조 히데키, 하야시 센주로 등의 고위 장교들과 그들을 따르는 청년 장교들이 모인 통제파(統制派)였다. 이 두 파벌은 모두 ‘천황 아래서’ 군사 독재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일본의 침략 활동을 지지했지만 황도파는 쿠데타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급진파였고, 통제파는 암살이나 협박과 같은 수단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법률 등의 개정을 통해 정부를 차차 군부 위주로 개혁하자고 주장하는 등 황도파보다는 다소 온건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494]

1931년 12월 23일, 관동군이 내각의 명령을 무시하고 진저우를 점령했다.[499] 미국, 영국, 프랑스는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을 9개국 조약을 위반한 행동이라 지적했지만 쇼와 천황은 이에 아랑곳 않고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관동군에게 칙어를 내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중국 비적과 맞서 싸워 황군의 위엄을 세계에 드높였다”며 정부의 통제를 무시한 관동군을 치하했다.[499] 3월 9일, 관동군은 만주의 관동군 점령 지역을 떼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명목 상의 군주로 옹립했다.[499][500] 육군은 황족 장로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였고, 해군은 런던 해군 감축 조약의 반대파들을 이끈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친왕을 군령부 총장으로 임명하여 황실과의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려 했다.[499]

3. 3. 중일전쟁과 난징 대학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은 본격화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중국 각지에서 군사 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1937년 12월, 일본군은 난징 대학살을 일으켰다.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잔혹 행위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513]

3. 4. 태평양 전쟁과 패전



1937년 7월 8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났다.[514] 쇼와 천황은 중화민국과의 갈등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한 주 전인 6월 30일에 아무르강의 건차자도(乾岔子島)에서 일본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포함 2척을 파괴하여 소비에트를 자극하는 것을 우려했다.[514] 결국 쇼와 천황은 “중국과의 전쟁은 두세 달 안에 끝낼 수 있다”고 말한 간인노미야와 스기야마 하지메 신임 육군대신의 말만 믿고, 고노에 내각의 허베이 파병 결정을 승인하였다.[514] 7월 27일, 쇼와 천황은 전쟁을 결판내기 위해 베이징과 톈진 지방의 중국군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고, 일본군은 총공격을 개시한 지 이틀 만에 베이징과 톈진을 모두 점령했다.

쇼와 천황의 어명으로 일본의 군사적 행동은 중국 내 일본인 보호에서 중국 침략으로 바뀌었다.[514][515] 일본 정부는 이러한 중국 침략 행위를 ‘사변’ 해결이나 성전(聖戰)으로 미화했다.[514] 1937년 10월 27일, 쇼와 천황은 러일 전쟁 이후 폐지된 대본영을 궁중에 다시 설치하도록 명령했다.[516] 11월 19일에는 내각과 군을 연결하는 ‘대본영정부연락회의’가 조직되었고, 그 안건들은 쇼와 천황이 직접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최종 결정되었다.[516] 쇼와 천황은 어전회의에서 일본과 주변국의 운명이 걸린 결정을 승낙했지만,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재가만 했다.[516]

1940년 9월 27일, 표면적으로 히로히토의 지휘 아래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을 형성하는 삼국 동맹 조약 당사국이 되었다.

1940년 9월 5일, 고노에 총리는 제국회의 하루 전 히로히토에게 결정 초안을 비공식 제출했다. 이날 저녁, 히로히토는 육군 참모총장 스기야마, 해군 참모총장 나가노 오사미, 고노에 총리와 회의를 가졌다. 히로히토는 스기야마에게 서방과의 전면전 성공 가능성을 질문했고, 스기야마가 긍정적으로 답하자 그를 질책했다.

전 해군대신이자 경험이 풍부한 해군참모총장 나가노 제독은 나중에 "황제께서 그런 식으로 질책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높아지셨다."라고 말했다.[28][29]

1941년 11월 3일, 나가노는 진주만 공격 계획을 히로히토에게 자세히 설명했다.[33] 11월 5일, 히로히토 천황은 제국회의에서 서방에 대한 전쟁 작전 계획을 승인했고, 그 달 말까지 군부 및 도조와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다.[33] 그는 처음에 전쟁 참여를 주저했지만, 결국 진주만 공격 결정을 승인했다. 그는 군사 문제 통제권을 확대했고, 평소와 달리 군사 평의회에 참석했으며, 공격 계획에 대한 추가 정보를 요구했다.[33]

1941년 12월 8일(하와이 시간 12월 7일), 일본군은 홍콩 주둔 영국군, 진주만미국 함대, 필리핀을 동시 공격하고 말레이 반도 침공을 시작했다.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1942년 말~1943년 초) 궁궐로 들어오는 정보는 현실과 동떨어졌지만, 히로히토는 총리 도조 히데키와 긴밀히 협력하고 군부로부터 정확한 보고를 받았으며 항복 직전까지 일본의 군사적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1941년 12월 7일 히로히토 천황과 고준 황후, 자녀들


일본의 진격은 1942년 여름 미드웨이 해전과 8월 미군의 과달카날 및 툴라기 상륙으로 멈췄다. 히로히토는 11건의 주요 사건에서 전쟁 작전 수행을 직접 감독하는 데 관여했다. 1941년~1942년 필리핀, 특히 요새화된 바탄 반도에 대한 조기 공격을 명령하도록 고위 지휘부에 압력을 가했고, 과달카날 전투에서 육군 항공 전력 배치를 확보했다. 과달카날 철수 후 뉴기니에서 새로운 공세를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해군에 불만을 품고 중부 솔로몬 제도 철수를 비판하고 알류샨 열도 손실에 대해 미국과의 해전을 요구했으나 참패했다. 사이판 탈환 계획과 오키나와 전투 공세 계획이 그의 주장에 따라 작성되었다.[40] 그는 군사 공세 계획을 도왔다.[41]

1944년 9월, 히로히토는 서구 세력의 악의를 분쇄하고 황실의 운명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결의여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이는 연합군의 반격에 맞서 일본이 승리를 갈망했던 것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했다.

엄격한 정부 통제 하의 언론은 1944년~1945년 일본 도시들이 공습을 받고 식량과 주택 부족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히로히토가 국민 사기를 고양시킨다고 묘사했다. 일본의 후퇴와 패배는 "확실한 승리"를 예고하는 성공으로 기념되었다.[42] 미군 잠수함이 일본 선박을 격침하며 식량, 의약품, 연료 부족이 심화되자 일본 국민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44년 중반부터 시작된 미국군의 주요 도시 공습은 승리담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그해 말, 도조 정권이 몰락하고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두 총리가 히로히토의 승인을 받아 전쟁을 계속했지만 실패했고 일본은 재앙에 가까워졌다.[43]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로 "옥음방송"을 하여 국민에게 종전을 선언하였다.

4. 전후의 삶과 상징 천황제

왼쪽


쇼와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이른바 "옥음방송"을 하여 국민에게 종전을 선언하였다.[161] 1946년 1월 1일에는 이른바 "인간 선언"(신일본건설에 관한 칙서)을 발표하여 신격화를 부정하였다.[161] 이후 점령기에는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회견 등을 통해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162] 1946년부터 1949년까지는 전국 각지를 순행하며 패전 후 국민과 접촉하였다(쇼와 천황의 전후 순행).

1947년 5월 3일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서는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제1조)"인 천황(상징 천황제)이며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는다(제4조)"라고 규정되었다.

쇼와 천황은 일본군난징 대학살을 알고 있었고, 군 통수권자로서 군기 붕괴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516] 종전 후, 자유민주당 등은 헌법 개정을 통해 천황의 권한을 복고하려 했으나 민중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13]

1971년에는 천황으로서 처음으로 유럽 각국을, 1975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였다.

4. 1. 연합군 점령과 민주화 개혁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왼쪽)와 쇼와 천황이 함께 찍은 사진. 이 사진은 일본 국민에게 굴욕감을 주어 큰 충격을 주었다.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임했으며, 쇼와 천황은 1945년 8월 17일에 스즈키의 후임 총리로 세습친왕가 후시미노미야의 후손이자 육군 대장 출신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를 임명했다.[565][566] 히가시쿠니노미야는 전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를 국무대신으로, 아사히 신문사 전 부사장 오가타 다케토라를 내각서기관장으로 임명해 쇼와 천황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쇼와 천황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고자 했다.[565] 고노에의 조언에 따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전국 각지에서 연합군을 위한 매춘부를 모집하여 점령지에서 일본 민간인들을 상대로 일어날 폭행 행위를 예방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 세워진 ‘특수위안시설협회’(RAA)는 도쿄에서만 약 1,500명의 자원 여성들을 모았다.[565] 1945년 8월 18일, RAA는 선서문에서 자원으로 매춘에 참여한 이들을 ‘쇼와 천황의 도진 오키치’에 비유하며 “이들의 희생으로 점령군의 광란의 폭력을 막을 방파제를 쌓고,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지켜가며, 일본 사회의 안녕에 기여하려 한다”는 뜻을 밝혔다.[565][567] 한편 내무성 경보국[568]은 1945년 8월 23일 전국 경찰에 극비 수칙을 내려보내 중신들과 천황이 내린 항복 결정에 대한 여론의 비난을 단속하도록 했다.[565] 특히 마쓰에 소요 사건을 비롯한 대규모 반동 폭동은 보도관제에 따라 그 소식을 철저히 은폐하거나 축소했다.[565]

1945년 8월 30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새로 임명된 더글러스 맥아더요코하마시에 임시 사령부를 차렸다. 도착 사흘 뒤인 1945년 9월 2일,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천황 대리인단은 도쿄 만의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조인했다.[569] 1945년 9월 17일 맥아더는 쇼와 천황이 있는 고쿄에서 가까운 유라쿠초의 다이이치 생명 빌딩에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청사를 설치했다.[569] 1945년 9월 11일에는 일본인 전범 용의자들이 1차로 연합군에 붙잡혔고, 1945년 9월 18일 미국 상원에는 쇼와 천황을 전쟁 범죄자로 기소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합동 결의안 94호》가 제출됐다.[569] 하지만 맥아더와 측근 보너 펠러스는 전쟁 책임을 모두 일본의 강경 군부 지도자들에게 전가하고, 쇼와 천황은 따로 떼어 상징적인 입헌군주로 두어 쇼와로 하여금 일본 국민들을 원활하게 통치한다는 ‘블랙리스트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569] 1945년 9월 27일, 쇼와 천황은 서양식 예복 차림으로 미국 대사관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사진을 함께 찍었다.[569] 이 사진은 1945년 9월 29일자 일본의 주요 신문에 실리게 됐는데, 맥아더가 훈장을 단 예복을 입지 않았고 천황을 향한 예의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며 논란을 빚었다.[569]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사진 게재를 엠바고에 붙이려 했지만, GHQ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진 게재를 명령하였다. 이는 맥아더가 일본의 천황을 평범한 존재로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연출한 사진이라고 한다. GHQ와 계속 충돌하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총사직했다.[569] 맥아더는 쇼와 천황이 히가시쿠니노미야의 후임으로 온건파이자 외무대신을 지낸 시데하라 기주로를 지명하는 것에 지지를 보냈으며, 1945년 10월 8일 시데하라 내각이 출범했다.[569]

일장기·욱일기 사용과 기미가요 등의 국가주의적 요소를 배제한 GHQ는 1945년 10월 30일에 황실의 총자산을 공표하였다. 비록 궁내성이 대폭 수치를 축소하였다고는 하나, 이때 쇼와 천황의 앞으로는 당시 기준으로 약 160억 엔에 이르는 자산이 있었다.[569] 쇼와 천황을 비롯한 황실의 부가 쟁점이 됐고,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은 천황제의 폐지를 요구했다.[569][570][571][572] 이제 국민들은 정부와 천황에 대하여 법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게 됐으며, 각 정당들도 활동을 재개하였다.[569]

제국주의의 제도적 잔재를 청산한 GHQ는 일본 국민들의 의식 개조 계획에 들어갔지만, 이 과정에서도 쇼와 천황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 했다. GHQ의 민간정보교육국(Civil Information and Education Section)은 기획과장 브래들리 스미스가 쓴 《태평양 전쟁사: 진실 없는 군국주의 일본 제국의 붕괴》라는 10회에 걸친 연재 기사를 교도 통신사를 통해 일본어로 번역해 연재했다.[573] 스미스의 글은 일본군이 난징에서 자행한 대학살을 비롯한 전쟁 범죄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쇼와 천황을 ‘온건파’로 두둔하여 맥아더의 목적을 반영하였다.[573] 이어 GHQ는 일본방송협회(NHK) 라디오를 통해 《진상은 이렇다》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여기서도 “일본은 자국 방위가 아닌 침략을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며, 지도자들이 국민을 기만했다”는 내용을 선전했지만, 이 방송은 오히려 국민들을 자극하여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573] 그러는 한편으로 GHQ는 전쟁 범죄자들을 검거하면서 수사 범위를 황족들로 넓혔으며, 1945년 12월 15일에는 제국의 비호를 받던 신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국가신도’와 연관된 군국주의, 국가주의적 교육을 금지하는 ‘신도 지령’을 내렸다.[574]

4. 2. 새 헌법과 천황제의 운명

쇼와 천황은 난징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범죄들을 묵인했다.


1937년 12월 14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한 뒤 아사카노미야의 참모장 이누마 마모루의 주도로 비무장 상태의 중국군 패잔병 약 17,000명 이상을 살해했다. 12월 17일에는 마쓰이와 아사카노미야의 승전 기념 행진이 열렸다.[517] 일본군은 난징 성과 그 주변에서 석 달 넘게 살인, 강간, 약탈, 방화를 저질렀고, 일본 육군 소위 두 명이 벌인 ‘중국인 100명 목 베기 시합’은 도쿄니치니치 신문에 여러 번 보도되었다.[516][518] 일본군은 난징에서의 범죄 행위 보도를 금지하고 미화하려 했으며, 일본과 조선의 언론들은 “난징에서 많은 포로가 잡히고 중국인들의 시신이 대량으로 묻혔다”는 식으로만 보도했다.[516][519] 그러나 난징의 전쟁 범죄는 미국과 유럽 기자들을 중심으로 알려졌고, 욘 라베 등 난징에 남아있던 외국인들은 난징 안전지대를 구성해 약 20만~30만 명의 피난민을 수용했다.[520]

쇼와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과 정부는 일본군이 난징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를 알고 있었다. 아사카노미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간인노미야 등은 난징에서 일본군이 범죄를 저지를 당시 군 고위 간부였다. 스기야마 육군대신, 대본영 장교들, 외무성도 알고 있었으며, 시게미쓰 마모루는 “난징 점령 당시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중국에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했다.[516] 허버트 빅스는 쇼와 천황이 난징 대학살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군 통수권자로서 군기 붕괴에 관심을 쏟을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516] 쇼와 천황은 군에서 해임되어 도쿄로 돌아온[521] 마쓰이에게 칙서를 내렸고, 1940년에 돌아온 아사카노미야에게는 훈장을 내리는 등[516] 난징에서의 전쟁 범죄를 묵인했다.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반파당한 BB-39 애리조나. 진주만 공격은 일본이 치른 양면 전쟁의 시작이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대본영정부연락회의 심의 장소는 총리 관저에서 쇼와 천황이 있는 고쿄로 옮겨졌다. 연락회의 결정은 어전회의를 거쳐 공식화되었기에, 연락회의가 잦아지자 쇼와 천황이 참여하는 어전회의도 잦아졌다.[526][527] 쇼와 천황은 7월 초순 일본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을 승인했지만, 7월 2일 ‘관동군 특종 연습’을 재가해 북만주에 70만~80만 병력을 집결시켰다가 8월 9일에 철회하는 등 결정을 번복했다.[527] 미국은 일본의 재미 자산을 동결하고, 8월 1일부로 석유가솔린의 대일본 수출 금지 조치를 내렸다.[527] 일본은 석유 수입량의 약 80%를 미국에 의존했기에, 이 조치는 전쟁을 계속하려는 일본에게 치명적이었다.[528]

정상회담 계획이 실패한 뒤 미국, 영국, 중화민국,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가 일본을 압박했다.[529] 군부는 ‘미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며 고노에 내각을 압박했다.[530] 고노에 내각은 10월 16일 총사직했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친왕이 후임으로 천거되었으나, 쇼와 천황은 황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며 각하했다. 대신 기도 고이치와 중신들의 천거를 받은 도조 히데키를 총리로 지명했다.[530] 10월 17일 출범한 도조 내각가야 오키노리를 대장대신으로, 도고 시게노리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했으나, 이들은 도조의 미국과의 전쟁 주장에 곧 동의했다.[531] 쇼와 천황은 도조에게 로마 교황 비오 11세와 만나게 했고, 11월 8일 진주만 공격 작전 보고, 11월 15일 계획 전반과 세부 사항 보고를 받았다.[531]

11월 26일, 미국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대사와 구루스 사부로 특사에게 ‘헐 노트[532]를 전달했다. 미국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 외 정권은 지지하지 않으며, 일본에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육해군, 경찰력 등 모든 병력을 철수하라”고 요구했다.[531] 도고 시게노리는 헐 노트를 ‘미국의 최후통첩’이라고 거짓 전달했고, 미국과의 전쟁에 동의했다.[531] 다카마쓰노미야는 개전 결정 만류를 청했으나, 나가노 오사미시마다 시게타로 해군대신은 전쟁 강행을 주장했다.[531]

1941년 12월 8일, 야마모토 이소로쿠나구모 주이치가 이끄는 해군이 하와이주 진주만을 폭격했고, 일본군은 루손섬 클라크 항공 기지, 싱가포르, , 다바오, 웨이크섬을 공습했다.[531] 진주만 공격 등 일본군 공습은 선전포고 없이 벌어졌고, 쇼와 천황은 공격 8시간 가까이 지난 오전 11시에야 선전 조서를 발표했다.[531]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전쟁 책임을 지고 총사임했고, 쇼와 천황은 8월 17일 후시미노미야 후손이자 육군 대장 출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를 총리로 임명했다.[565][566]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고노에 후미마로를 국무대신, 아사히 신문사 전 부사장 오가타 다케토라를 내각서기관장으로 임명해 쇼와 천황을 비판을 막으려 했다.[565]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통해 매춘부를 모집, 도쿄에서만 약 1,500명이 지원했다.[565] 8월 18일, RAA는 선서문에서 “희생으로 점령군의 광란의 폭력을 막을 방파제를 쌓고,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지켜가며, 일본 사회의 안녕에 기여하려 한다”고 밝혔다.[565][567] 내무성 경보국[568]은 8월 23일 전국 경찰에 극비 수칙을 내려 항복 결정에 대한 비난을 단속하게 했다.[565] 마쓰에 소요 사건 등 대규모 폭동은 보도관제로 은폐하거나 축소했다.[565]

1945년 8월 30일, 더글러스 맥아더요코하마시에 임시 사령부를 차렸다. 9월 2일,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천황 대리인단은 도쿄 만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569] 9월 17일 맥아더는 유라쿠초 다이이치 생명 빌딩에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청사를 설치했다.[569] 9월 11일 일본인 전범 용의자들이 체포되었고, 9월 18일 미국 상원에는 쇼와 천황을 전쟁 범죄자로 기소해야 한다는 《합동 결의안 94호》가 제출됐다.[569] 맥아더와 보너 펠러스는 쇼와 천황을 입헌군주로 두어 통치한다는 ‘블랙리스트 작전’을 계획했다.[569] 9월 27일, 쇼와 천황은 맥아더와 사진을 찍었다.[569] 이 사진은 9월 29일자 일본 신문에 실렸는데, 맥아더가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며 논란이 되었다.[569]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사진 게재를 반대했지만, GHQ 명령으로 게재되었다. GHQ와 충돌하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총사직했다.[569] 맥아더는 시데하라 기주로를 후임 총리로 지지, 10월 8일 시데하라 내각이 출범했다.[569]

GHQ는 일장기·욱일기 사용, 기미가요 등 국가주의 요소를 배제하고 10월 30일 황실 총자산을 공표했다. 당시 기준 약 160억 엔이었다.[569] 일본공산당 등은 천황제 폐지를 요구했다.[569][570][571][572] 국민들은 정부와 천황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게 되었고, 정당들도 활동을 재개했다.[569]

GHQ는 일본 국민 의식 개조 계획 과정에서도 쇼와 천황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브래들리 스미스의 《태평양 전쟁사》를 교도 통신사로 번역해 연재, 일본군 전쟁 범죄를 강조하면서 쇼와 천황을 ‘온건파’로 옹호했다.[573] GHQ는 일본방송협회(NHK) 라디오 《진상은 이렇다》를 방영, “일본은 침략 목적 전쟁, 지도자들이 국민 기만” 내용을 선전했지만,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573] GHQ는 전쟁 범죄자 수사 범위를 황족으로 넓혔고, 12월 15일 ‘국가신도’ 관련 교육을 금지하는 ‘신도 지령’을 내렸다.[574]

주권 회복 정책과 복고 개헌 운동을 추진한 요시다 시게루조선총독부에서도 근무한 바 있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미일안전보장조약, 주일 미군 특별 권한 부여 행정 협정이 발효, GHQ는 폐지되고 일본은 독립국이 되었다.[613] 쇼와 천황은 새 헌법에 따라 정치 간섭이 어려워졌다. 자유민주당은 개진당과 헌법 제9조 폐지, 천황 국가원수 지위 명시 등 ‘개헌 운동’을 벌였지만, 민중 반대로 저지당했다.[613]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52년 1월 31일 “쇼와 천황 양위”를 언급했다가 요시다 총리에게 “비국민” 힐난을 받았다.[613]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는 18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대관식에 참여 예정이었다.[613] 쇼와 천황과 요시다 내각은 영국에 우호 뜻을 전하려 했다.[614] 쇼와 천황은 이세 신궁, 메이지 신궁 참배, 1952년 10월 16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재개, 1975년까지 여덟 차례 방문했다.[613] 1978년 태평양전쟁 A급 전범 합사 후에는 참배하지 않았다.

자유민주당과 개진당의 헌법 복고 운동을 지지했고, 1955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을 무시하고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만나 외교 문제를 협의했다.[613] 시게미쓰는 쇼와 천황이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반대함을 알고 자문을 그만두었다.[613]

쇼와 천황의 복고 시도와 달리, 군인들은 일본군 전쟁 범죄를 고백했다. 1957년 《삼광》(三光)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삼광 작전’이 널리 퍼졌다.[613] 우익은 복귀 병사들을 “일본인 망신, 공산주의 첩자”로 매도, 조직 폭력배로 출판사를 압박해 절판시켰다.[613]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가 황태자 책봉식에서 황태자 아키히토와 함께 한 모습(1952년)


우익 신국가주의 운동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계속됐다. 패전 비판적 역사 연구가 주목받았고, 1930~40년대 전쟁 확대 지지 지식인들은 비판 대상이 되었다.[613] 공산주의자, 좌파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학생, 노동층은 자유민주당 복고 개헌 운동을 비난, 자유민주당은 교육 통제, 애국심 고양 강요로 역풍을 맞았다.[613]

‘2키 3스케’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에 올랐다. 기시 내각은 B, C급 전범 구명, 동남아 관계 회복을 지향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전범 사면 시 일본은 과거를 잊고 미국에 접근 가능” 설득, 냉전 이해관계 고려한 아이젠하워는 전범 석방을 도왔다.[615] 기시 내각은 복고 개헌, 자위대 강화, 미일 안보 조약 개정 반대 여론 탄압 위한 경찰력 강화 ‘경찰관직무집행법’ 입안을 추진했지만, 국민 반발로 무너졌다.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1958년 11월 총파업에 들어갔다.[615]

4. 3. 전쟁 책임 논란



1937년 12월 14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누마 마모루의 주도로 비무장 상태의 중국군 패잔병 약 17,000명 이상을 살해했다.[517] 이후 석 달 넘게 살인, 강간, 약탈, 방화를 자행했으며, ‘중국인 100명 목 베기 시합’은 도쿄니치니치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516][518] 일본 정부는 이러한 범죄 행위 보도를 금지하고 미화했지만,[516][519] 미국과 유럽 기자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520] 욘 라베 등 외국인들은 난징 안전지대를 구성해 피난민들을 수용했다.[520]

쇼와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과 정부는 난징에서의 전쟁 범죄를 알고 있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등은 군 고위 간부였고, 시게미쓰 마모루는 “난징 점령 당시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중국에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고 술회했다.[516] 허버트 빅스는 쇼와 천황이 군 통수권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516] 쇼와 천황은 마쓰이 이와네에게 칙서를 내리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에게 훈장을 내리는 등[516] 전쟁 범죄를 묵인했다.

도조 히데키태평양 전쟁 이후 독재 내각을 이끌었다.


1942년 1월, 쇼와 천황은 《대해령 제14호》를 발령해 포르투갈티모르섬 공격을 명했다.[533]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까지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했다.[533] 1942년 4월, 사다코 대비가 일본군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묻자, 쇼와 천황은 화제를 바꿨다.[534]

바탄 죽음의 행진 이후, 미국은 둘리틀 특공대로 도쿄 등을 공습했다. 쇼와 천황의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령에 불시착한 승무원 3명은 사형당했다.[533]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조 히데키는 쇼와 천황에게 특공대원들의 선처를 요청했다고 증언했다.[536]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군은 큰 손해를 보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대형 항공모함 4척 등을 잃었다. 해군은 이 사실을 축소 보고했지만, 쇼와 천황은 정확한 보고를 받았다.[533][537] 1942년 8월부터 과달카날 전투 등을 거치며 전황은 연합군에 유리하게 흘렀다.[538]

1943년 5월, 알류샨 열도애투섬 수비대가 전멸당하고, 남방 전선도 무너졌다.[539] 쇼와 천황은 참모총장들에게 “왜 확실한 승리를 얻지 못했느냐”며 일갈하고,[540] 육군과 해군의 불통을 지적했다.[540]

도조 히데키는 독재 체제를 강화했고, 1944년 임팔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버마를 상실했다.[539] 연합군은 사이판 등을 점령하고 B-29 폭격기 기지로 삼아, 태평양 제공권과 제해권을 빼앗았다.[543] 1944년 7월, 도조 내각은 총사직했고, 쇼와 천황은 고이소 구니아키를 후임으로 임명했다.[543]

1946년 1월 1일, 쇼와 천황은 인간선언을 발표했다.[574] 언론은 쇼와 천황을 '국민과 함께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인' 등으로 칭송했다.[576]

쓰다 소키치는 “역대 천황은 민주주의와 양립해왔다”고 주장하며, 국민들에게 황실 포용을 촉구했다.[574][577] 요시다 시게루는 “황실이 우리 민족의 시조이자 종가”라고 했다.[578] 반면 좌파 지식인들은 쇼와 천황 미화에 반발했다. 《신소》(真相|신소일본어)는 천황제를 공격하고, 쇼와 천황을 풍자했다.[579][574]

1946년 1월, 더글라스 맥아더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전보에서 쇼와 천황의 전쟁 범죄 혐의를 부정하고,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면 일본인들 사이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574][580] 1946년 2월, GHQ는 새 헌법안을 작성했다. 이들은 천황을 정치권력에서 분리된 상징으로 규정하고, 전쟁 포기를 선언하는 조항을 추가했다.[574]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어 쇼와 천황은 정치적 권력을 잃었다.[574][581]

조지프 베리 키넌


1945년 9월, GHQ는 전범 용의자 체포령을 내렸다.[582]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일본 독자 전범 재판을 주장했지만, GHQ는 거부했다.[583] 1946년 3월까지, 보너 펠러스는 전쟁 지도자들을 심문하고, 쇼와 천황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도록 유도했다.[582][584] 같은 해 3월, 펠러스는 요나이 미쓰마사에게 일부 국가가 쇼와 천황 처벌을 원한다는 것을 전했다.[582] 쇼와 천황 측근들은 쇼와 천황을 재판에서 보호하기 위해 비밀 모임을 가졌다.[582]

1946년 3월, 데라사키 히데나리는 맥아더의 질문서를 쇼와 천황에게 전달했다. 쇼와 천황은 캘리포니아주의 아시아인 이민 거부 정책, 백호주의 등을 언급하며 태평양 전쟁 배경으로 인종적 긴장을 이야기했다.[585] 이후 만주사변 등에 대해 증언했다.[582][586] 쇼와 천황은 도조 히데키를 옹호하고, 자신의 해임 반대를 인정했다.[582][588][589] 1946년 4월, 데라사키는 쇼와 천황의 구술 기록 요약문을 펠러스에게 전달했다. 요약문은 쇼와 천황을 ‘무력한 존재’로 묘사했다.[582]

A급 전범 용의자 명단에 쇼와 천황은 없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쇼와 천황을 “인도(人道)를 거스른 죄” 용의자로 포함시켰다.[590] 하지만 쇼와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모습. 침략 전쟁을 주도한 고위 장군들과 관료들은 모두 재판을 받았지만 쇼와 천황은 재판을 받지 않았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에서 각 연합국은 자국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590] 중화민국은 중국 공산당과의 싸움에 집중하기 위해 쇼와 천황을 기소하지 않았다.[590][592][593][594] 필리핀은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기소 명단 제외를 문제삼지 않았다.[590][595] 인도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는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며 재판 자체를 반대했다.[590][596]

1946년 5월 3일, 도쿄에서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들은 무죄를 주장했다.[597] 1947년 12월, 도조 히데키는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증언했다.[597] 하지만 윌리엄 로건의 심문 과정에서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천황 폐하의 의사를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증언하며, ‘천황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을 뒤엎었다.[597]

1948년 11월 12일, 윌리엄 웹 재판장은 주요 전범 25명에게 유죄 평결을 내렸다. 도조 히데키 등 7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597] 미국 연방대법원은 재판소 결정을 인정했다.[597] 사형당한 피고인들의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쇼와 천황에게는 아무런 형도 내려지지 않았다.[597]

웹은 쇼와 천황 면책에 대해 “어떠한 통치자도 침략 전쟁 개시라는 범죄를 저지르고서 면죄를 주장할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597] 앙리 베르나르 판사도 쇼와 천황 면책에 불만을 표했다.[597] 베르트 뢸링 판사는 쇼와 천황 면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597] 라다비노드 팔 판사는 반대 의견을 냈지만, 웹은 선고 당일 “팔 판사가 반대 의견을 냈다”는 사실만 공표했다.[597][599][600]

쇼와 천황은 점령기와 도쿄 재판 기간 동안 민심 수습을 위해 전국을 행차했다.[602] 1947년, 문부성이 민주주의 교육 교본 《새 헌법 이야기》에서 쇼와 천황에게 극존칭어를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대중매체들은 천황 관련 소식에 극존칭어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605][606] 쇼와 천황은 일본사회당가타야마 데쓰를 비판하고, 오키나와의 미군 점유를 제의하는 등 정치 간섭을 시도했다.[607]

1947년 10월, 조지프 키넌 수석검사는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고 공식 천명했다.[607] GHQ는 쇼와 천황의 행차를 비난하고 중단 명령을 내렸지만,[607] 1949년에 재개되어 1951년까지 이어졌다.[607]

한국 전쟁을 계기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은 좌익을 탄압하고, 천황 비판을 통제했다.[607] 1951년 10월, 쇼와 천황은 교토 대학을 방문했을 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직면했다. 학생들은 ‘공개 질의서’를 냈고, 《평화의 노래》를 불렀다.[607][610] 이 항의 집회를 주도한 학생들은 제적당했다.[607]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풍자당한 쇼와 천황


일본군은 중국 침략 시 국제법 적용을 거부했지만, 쇼와 천황은 제지하지 않았다.[657] 쇼와 천황은 베르사유 조약 등에서 금지한 화학 무기 사용을 허가했다.[657] 1937년 7월, 최루탄 사용을 허가했고, 1938년 봄부터 독가스를 살포했다.[657]

1939년 5월, 쇼와 천황은 야외 화학무기 실험을 허가하는 《대륙명 제301호》를 재가했다.[657] 1940년, 731 부대 창설을 재가하고 세균 무기 사용을 허락했다.[657] 허버트 빅스는 일본군의 세균전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고엽제 등을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비판했다.[657]

쇼와 천황은 충칭 등 중국 도시 폭격과 ‘삼광 작전’(방화, 살인, 약탈)을 명령했다.[657] 1938년 12월, 《대륙명 제241호》를 통해 무제한 살육을 묵인했다.[657] 1941년 12월, 《대륙명 제575호》를 내렸다.[657] 히메타 미쓰요시는 ‘섬멸 작전’으로 최소 247만 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이라 추산했다.[657][659]

야스쿠니 신사 임시대제에 참배하는 쇼와 천황(1934년)


쇼와 천황은 일본군 침략 정책을 격려하고, 관련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660] 1932년 1월, 관동군에 칙어를 내렸고,[660] 1940년 삼국 동맹 체결을 환영하는 조서를 발표했다.[660] 스기야마 하지메와 침략 계획을 상의하고, 중국 침략을 질책했다.[660]

1945년 11월,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쇼와 천황에게는 전쟁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661] 더글라스 맥아더는 쇼와 천황 면책을 지지했다.[661]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맥아더의 야심과 퀘이커교 신자들의 지지를 면책 배경으로 지적했다.[662] 요시다 유타카는 맥아더가 쇼와 천황을 이용하려 했다고 비판했다.[663]

쇼와 천황은 재판을 받지 않았지만,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는 시각은 여전히 있었다. 1988년 12월, 모토시마 히토시 나가사키시장은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661] 모토시마는 발언 철회를 거부했고, 극우 단체 세이키주쿠 간부에게 총격을 당했다.[661] 아사히 신문2001년 8월 15일 사설에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밝혔다.[661] 2000년 12월, ‘일본군 성노예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는 쇼와 천황에게 유죄 판결이 선고됐다.[664]

4. 4. 상징적 군주로서의 활동

쇼와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이른바 "옥음방송"을 하여 국민에게 종전을 선언하였다.[161] 1946년 1월 1일에는 이른바 "인간 선언"(신일본건설에 관한 칙서)을 발표하여 신격화를 부정하였다.[161] 점령기에는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회견 등을 통해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162] 1946년 2월부터 1949년까지 전국 각지를 순행하며 패전 후 국민과 접촉하였다(쇼와 천황의 전후 순행).

1947년 5월 3일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서는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제1조)"인 천황(상징 천황제)이며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는다(제4조)"라고 규정되어 있다.

쇼와 천황은 점령기와 도쿄 재판이 진행되던 때 민심 수습을 위해 전국 각지를 행차했다.[602] 오가네 마스지로, 가토 스스무 등 궁내성(지금의 궁내청) 관료들은 쇼와 천황의 행차가 메이지 천황의 권위적인 대순행을 선례로 한 것이라고 했지만,[603] 쇼와 천황 본인은 행차의 목적이 “고통받는 국민을 위로하고 복구 노력을 격려하는” 치유라고 밝혔다.[604]

1947년 문부성이 민주주의 교육 교본인 《새 헌법 이야기》에서 쇼와 천황에게 극존칭어를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중매체들은 천황 관련 소식을 전할 때 극존칭어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605][606] 한편 쇼와 천황은 새 일본국 헌법 제정 이후에도 정치에 간섭을 시도했는데, 일본사회당가타야마 데쓰가 새 내각을 조직하자 가타야마를 ‘유약하다’고 비판했으며, 가타야마 총리에게 교토 어소에서 자신에게 공식 보고를 올릴 것을 요구했다.[607] 또한 아시다 히토시 외무상 등을 통해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9월 20일에 맥아더를 찾아 미군이 오키나와를 99년간 점유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의했다.[607]

쇼와 천황이 니가타현 나가오카시를 찾은 1947년 10월 10일, 조지프 키낸 수석검사는 천황과 재벌계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는 성명을 내 쇼와 천황이 기소되지 않았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이로써 쇼와 천황은 법적인 책임 요구에서는 자유로워졌다.[607] 하지만 행차 규모가 커지자 GHQ는 “지방행정기관과 사기업이 막대한 경비를 부담하고 있다”며 쇼와 천황의 행차 일정을 “호화로운 유세”라고 비난했다. 곧 GHQ는 1948년 1월 12일 민정국을 통해 공공 자금을 남용하고 부당한 과세를 강요하는 행차를 중단하도록 명령했다.[607] 그러나 이 행차는 1949년에 재개돼 1951년 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사이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만주 공격 문제로 경질당하면서 매슈 리지웨이가 새로 GHQ 사령관이 됐다.[607]

한국 전쟁을 계기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은 ‘스탈린주의자들과의 전쟁’을 빌미로 좌익을 탄압했으며 평화주의 운동과 천황 비판 또한 엄격히 통제했다.[607] 좌익 단체의 풍자잡지 《신소》는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의 한 청년이 ‘쇼와 천황의 사생아’라고 주장한 기사를 전했는데 요시다 총리는 쇼와 천황을 대신해 이들을 모두 고발했다.[608][609] 이러한 일본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쇼와 천황은 평화주의 시위에서 자신의 권위에 대한 평화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요시다 내각이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에 조인한 뒤 같은 해 10월에 쇼와 천황은 교토 지역을 행차하던 중 교토 대학을 찾았다. 교토 대학에서는 요시다 내각이 조인한 두 조약을 반대하는 시위를 열고 있었다.[607]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인간선언을 한” 천황에게 ‘공개 질의서’를 냈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일본이 단독 강화와 재무장을 하려는 과정에서, (쇼와) 당신이 예전과 같은 전쟁 이데올로기의 지주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었다.[610] 쇼와 천황이 교토 대학에 도착했을 때 2,000여 명의 학생들은 천황을 칭송하는 기미가요 대신 《평화의 노래》를 불렀고, 신문은 이것을 ‘불경한 행동’이라고 맹비난했다.[607] 이 항의 집회를 주도한 8명은 제적을 당했으며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멍청한 빨갱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쇼와 천황에 대한 반감이나 무관심을 보이면서 학생들의 평화주의적 시위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611][612]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미일안전보장조약, 주일 미군에게 특별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 협정이 한꺼번에 발효됐다. GHQ는 폐지되고 점령은 끝났으며 일본은 정식으로 독립국이 됐다.[613] 하지만 쇼와 천황은 새 헌법에 따라 정치적인 일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게 됐다. 이에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민주당 세력은 극우 정당인 개진당과 손잡고 헌법 제9조 폐지와 천황의 국가원수 지위 명시, 메이지 헌법에 있었던 천황의 권한 일부 부활 등을 골자로 한 ‘개헌 운동’을 벌였지만 민중의 반대로 저지당했다.[613]

자유민주당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중의원은 1952년 1월 31일, 예산위원회의 질의 시간에 “황태자 아키히토도 성인이 됐으니, 쇼와 천황이 책임을 지고 천황 자리를 양위한다면 전쟁 유가족들에게 감명을 줄 것”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가, 오히려 요시다 총리의 분노를 사 “천황에게 퇴위를 요구하는 자는 비국민”이라는 힐난을 받았으며 국민들로부터 주목을 끌지도 못했다.[613] 나카소네가 퇴위론을 꺼낼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는 18세로 같은 해 11월에 황태자 책봉식을 앞두고 있었으며 그 직전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에 참여하는 등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고 있었다.[613] 쇼와 천황과 요시다 내각은 황태자를 통해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에 우호의 뜻을 전하려 했다.[614] 그러면서도 쇼와 천황은 복고적인 태도를 가졌는데 이세 신궁, 메이지 신궁에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1952년 10월 16일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다시 거행했다. 그 후 1975년까지 야스쿠니 신사를 여덟 차례나 방문했다.[613] 그러나 1978년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이후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또한 자유민주당과 개진당이 추진한 헌법 복고 운동을 지지했으며, 1955년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을 무시하고 자신을 지지하던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한 달에 두어 번 꼴로 만나 직접 중요한 외교 문제를 협의하기까지 했다.[613] 하지만 시게미쓰는 곧 쇼와 천황이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했으며, 자신이나 하토야마 총리와는 달리 소비에트 연방과의 국교 회복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쇼와 천황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613]

1971년(쇼와 46년)에는 천황으로서 처음으로 유럽 각국을 방문하였고, 1975년(쇼와 50년)에는 역시 천황으로서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어느 외국 방문에도 향순황후를 동반).

히로히토 천황과 고준 황후의 네덜란드 도착 (1971년 10월 8일)


히로히토 천황과 닉슨 대통령 간의 회담은 애초 계획에 없었다. 당초 미국 방문은 유럽 방문을 위한 단순한 급유 경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요청으로 급히 회담이 결정되었다. 일본 측은 이 요청을 수락했지만, 외무대신 후쿠다 다케오는 회담을 추진한 주일 미국 대사 우시바 노부히코에게 전화를 걸어 "그것은 나에게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인식을 바로잡고 싶다"라고 말했다. 당시 후쿠다 외무대신은 닉슨 대통령과 히로히토 천황의 회담이 악화되고 있는 일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이용될 것을 우려했고, 상징적 천황제의 전제가 흔들릴까 염려했다.[65][66]

덴마크와 벨기에에서는 깊은 왕실 교류를 포함한 조기 방문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이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1936년 퇴위하여 사실상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에드워드 8세와 재회하여 한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동남아시아 전구에서 복무한 참전 용사들과 그곳의 잔혹한 점령으로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에 의해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네덜란드에서는 날달걀과 보온병이 던져졌다. 시위가 너무 심각해서 천황을 수행한 고준 황후는 탈진했다. 영국에서는 시위대가 히로히토 천황의 마차가 지나갈 때 침묵으로 서서 등을 돌렸고, 일부는 사망자를 상징하는 붉은 장갑을 착용했다.[67] 풍자 잡지 ''프라이빗 아이''는 히로히토 천황의 방문을 언급하며 인종차별적인 이중적 의미를 사용했다("공기 중에 불쾌한 닛폰인").[68] 서독에서는 일본 천황의 방문에 극좌파의 적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는데, 시위 참가자들은 히로히토 천황을 동아시아아돌프 히틀러에 해당하는 인물로 간주하고 "히로히틀러"라고 부르며, 추축국 전쟁 범죄에 대한 기억과 인식에 대한 광범위한 비교 논의를 촉구했다. 히로히토 천황 방문에 대한 시위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에 맞선 미국의 전쟁 노력에 대한 일본과 서독의 상호 공모 및 가능성을 비난하고 강조했다.[69]

이러한 시위와 반대에 대해 히로히토 천황은 귀국 후 11월 12일 기자 회견에서 미리 보고를 받았고 "각국의 환영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70] 또한 3년 후 금혼식 기념 기자회견에서 황후와 함께 이 유럽 방문을 50년 동안 가장 즐거웠던 기억으로 언급했다.[70]

1975년 10월 2일, 백악관에서 열린 일본 국빈을 위한 만찬 전에 고준 황후, 베티 포드 여사, 히로히토 천황, 제럴드 포드 대통령


1975년, 히로히토(昭和天皇)와 고준 황후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초청으로 9월 30일부터 10월 14일까지 14일 동안 미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미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 육군, 해군, 공군뿐만 아니라 해병대와 해안경비대도 국빈 방문을 예우했다. 방문 전후로 일본에서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과 같은 반미 좌익 단체들이 일으킨 일련의 테러 공격이 발생했다.

1975년 9월 30일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Virginia)에 도착한 히로히토 천황과 고준 황후는 2주 동안 미국에 머물렀다.[71] 포드 대통령과의 공식 회담은 10월 2일에 있었다.[72] 10월 3일에는 히로히토 천황이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했다.[73] 10월 6일에는 히로히토 천황과 고준 황후가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Westchester County, New York)에 있는 자택에서 록펠러 부통령 부부를 방문했다.[74]

백악관 국빈 만찬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연설을 통해 "전후 일본 재건을 도와준 미국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체류 중에는 디즈니랜드를 방문했고, 미키 마우스 옆에 웃고 있는 사진이 신문을 장식했으며,[75] 미키 마우스 시계를 구입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귀국 당일에는 두 종류의 기념 우표와 우표첩이 발행되었는데, 이는 이 방문이 중대한 사업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쇼와 천황(Emperor Shōwa)의 마지막 미국 방문이었다. 방문 전후에 천황과 황후가 가진 공식 기자 회견 또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4. 5. 일본의 독립과 복고 운동

쇼와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과 정부는 일본군이 난징에서 자행한 전쟁 범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사카노미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간인노미야 등은 난징에서 일본군이 범죄를 저지를 때 군의 고위 간부였다. 스기야마 육군대신, 대본영의 장교들, 외무성 등도 알고 있었으며, 전시 중 특명전권대사로 난징에 머물렀던 시게미쓰 마모루는 “난징 점령 당시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중국에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516] 허버트 빅스는 당시 일본군의 지휘명령 계통의 정점에 서서 모든 동정을 상세히 쫓고 있었던 쇼와 또한 난징 대학살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군 통수권자로서 군기 붕괴에 관심을 쏟을 의무를 실천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516] 쇼와 천황은 군에서 해임되어 도쿄로 돌아온[521] 마쓰이에게 마쓰이의 임무 성공을 치하하는 칙서를 내렸으며, 1940년에야 돌아온 아사카노미야에게는 훈장을 내리는 식으로[516] 난징에서의 전쟁 범죄를 묵인했다.

항복을 반대하던 군대는 궁성 사건을 일으키고, 아쓰기와 가스미가우라호의 비행장에서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쇼와로부터 지지를 잃으면서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560][561] 군대의 저항이 일단락된 후 항복 선언의 사전 작업으로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미국과 연합군 각 정부에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통지했다.[562]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이 전날에 녹음한 일명 옥음방송(玉音放送|교쿠온호소일본어)이 라디오를 통해 퍼졌다.[562] 하지만 옥음방송을 녹음할 때 녹음한 판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쇼와 천황이 사용한 언어는 궁정체였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쇼와 천황의 뜻을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옥음방송이 있은 뒤 아나운서 와다 노부카타가 조서 전문을 해설을 덧붙여 풀어서 읽었다.[562] 와다는 “천황 폐하께서는 폐하의 명을 받들지 아니하고 무기를 자진해 거두어들인 백성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짐의 이 한 몸은 어찌되든 간에 더 이상 국민이 전화에 쓰러지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국민에 대한 큰 자비와 사랑을 내려주신 천황 폐하의 성은을 입은 백성들 중 어느 누가 자신의 불충을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562][564] 사흘 뒤인 8월 17일에는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의 전장에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 해제를 명하는 《육해군인에게 내리는 칙어》를 발표하였다.[562] 이로써 일본 제국은 패전국이 됐으며, 일본 제국이 강제로 지배하고 있던 조선미국소련의 관리체제로 들어갔고, 타이완은 청나라를 계승한 중화민국을 이끄는 장제스에게 반환되었으나 후에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에게 중국 본토를 빼앗기고 대만섬으로 도주했다.

쇼와 천황은 점령기와 도쿄 재판이 진행되던 때 민심 수습을 위해 전국 각지를 행차했다.[602] 오가네 마스지로, 가토 스스무 등 궁내성(지금의 궁내청) 관료들은 쇼와 천황의 행차가 메이지 천황의 권위적인 대순행을 선례로 한 것이라고 했지만,[603] 반면 쇼와 본인은 행차의 목적이 “고통 받는 국민을 위로하고 복구 노력을 격려하는” 치유라고 밝혔다.[604]

1947년, 문부성이 민주주의 교육 교본인 《새 헌법 이야기》에서 쇼와 천황에게 극존칭어를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중매체들은 천황 관련 소식을 전할 때 극존칭어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605][606] 그러는 한편으로 쇼와 천황은 새 일본국 헌법 제정 이후에도 정치에 간섭을 시도했는데, 일본사회당가타야마 데쓰가 새 내각을 조직하자 가타야마를 ‘유약하다’고 비판했으며, 가타야마 총리에게 교토 어소에서 자신에게 공식 보고를 올릴 것을 요구했다.[607] 또 아시다 히토시 외무상 등을 통해 미국의 오키나와의 반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9월 20일에 맥아더를 찾아 미군이 오키나와를 99년간 점유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의했다.[607]

쇼와 천황이 니가타현 나가오카시를 찾은 1947년 10월 10일, 조지프 키낸 수석검사는 천황과 재벌계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는 성명을 내 쇼와 천황이 기소되지 않았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이로서 쇼와 천황은 법적인 책임 요구에서는 자유로워졌다.[607] 하지만 갈수록 행차의 규모가 커지자 GHQ는 “지방행정기관과 사기업이 막대한 경비를 부담하고 있다”며 쇼와 천황의 행차 일정을 “호화로운 유세”라고 비난했다. 곧 GHQ는 1948년 1월 12일 민정국을 통해 공공 자금을 남용하고 부당한 과세를 강요하는 행차를 중단하도록 명령했다.[607] 하지만 이 행차는 1949년에 재개돼 1951년 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사이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만주 공격 문제로 경질당하면서 매슈 리지웨이가 새로 GHQ 사령관이 됐다.[607]

한국 전쟁을 계기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은 ‘스탈린주의자들과의 전쟁’을 빌미로 좌익을 탄압했으며, 평화주의 운동과 천황 비판 또한 엄격히 통제했다.[607] 좌익 단체의 풍자잡지 《신소》는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의 한 청년이 ‘쇼와 천황의 사생아’라고 주장한 기사를 전했는데, 요시다 총리는 쇼와 천황을 대신해 이들을 모두 고발했다.[608][609]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쇼와 천황은 평화주의 시위에서 자신의 권위에 대한 평화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요시다 내각이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에 조인한 뒤 같은 해 10월에 쇼와 천황은 교토 지역을 행차하던 중 교토 대학을 찾았다. 교토 대학에서는 요시다 내각이 조인한 두 조약을 반대하는 시위를 열고 있었다.[607]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인간선언을 한” 천황에게 ‘공개 질의서’를 냈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일본이 단독 강화와 재무장을 하려는 과정에서, (쇼와) 당신이 예전과 같은 전쟁 이데올로기의 지주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었다.[610] 쇼와 천황이 교토 대학에 도착했을 때 2,000여 명의 학생들은 천황을 칭송하는 기미가요 대신 《평화의 노래》를 불렀고, 신문은 이것을 ‘불경한 행동’이라고 맹비난했다.[607] 이 항의 집회를 주도한 8명은 제적을 당했으며,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멍청한 빨갱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쇼와 천황에 대한 반감이나 무관심을 보이면서 학생들의 평화주의적 시위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611][612]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미일안전보장조약, 주일 미군에게 특별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 협정이 한꺼번에 발효됐다. GHQ는 폐지되고 점령은 끝났으며, 일본은 정식으로 독립국이 됐다.[613] 하지만 쇼와 천황은 새 헌법에 따라 정치적인 일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게 됐다. 이에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민주당 세력은 극우 정당인 개진당과 손잡고 헌법 제9조의 폐지와 천황의 국가원수 지위 명시, 메이지 헌법에 있었던 천황의 권한 일부 부활 등을 골자로 한 ‘개헌 운동’을 벌였지만, 민중의 반대로 저지당했다.[613]

자유민주당나카소네 야스히로 중의원은 1952년 1월 31일, 예산위원회의 질의 시간에 “황태자 아키히토도 성인이 됐으니, 쇼와 천황이 책임을 지고 천황 자리를 양위한다면 전쟁 유가족들에게 감명을 줄 것”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가, 오히려 요시다 총리의 분노를 사 “천황에게 퇴위를 요구하는 자는 비국민”이라는 힐난을 받았으며, 국민들로부터 주목을 끌지도 못했다.[613] 나카소네가 퇴위론을 꺼낼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는 18세로, 같은 해 11월에 황태자 책봉식을 앞두고 있었으며, 그 직전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에 참여하는 등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고 있었다.[613] 쇼와 천황과 요시다 내각은 황태자를 통해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에 우호의 뜻을 전하려 했다.[614] 그러면서도 쇼와 천황은 복고적인 태도를 가졌는데, 이세 신궁, 메이지 신궁에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1952년 10월 16일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다시 거행했다. 그 후 1975년까지 야스쿠니 신사를 여덟 차례나 방문했다.[613] 그러나 1978년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이후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또한 자유민주당과 개진당이 추진한 헌법 복고 운동을 지지했으며, 1955년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을 무시하고 자신을 지지하던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한 달에 두어 번 꼴로 만나 직접 중요한 외교 문제를 협의하기까지 했다.[613] 하지만 시게미쓰는 곧 쇼와 천황이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했으며, 자신이나 하토야마 총리와는 달리 소비에트 연방과의 국교 회복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쇼와 천황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613]

이처럼 쇼와 천황이 일본 제국 시대로의 복고를 시도하려는 것과는 달리, 각지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일본군이 자행한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1957년, 이들이 중국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방화, 살인, 약탈에 대해 쓴 《삼광》(三光)이라는 책은 그 해에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곧 ‘삼광 작전’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졌다.[613] 우익 기득권층에서는 복귀한 병사들을 “일본인의 망신, 공산주의의 첩자, 중공에 세뇌당한 자들”로 매도했으며,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출판사를 압박해 책을 절판하게 만들었다.[613]

4. 6. 노년기의 삶과 사망

쇼와 천황은 1978년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이후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1952년 10월 16일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다시 거행했고, 그 후 1975년까지 여덟 차례나 방문했다.[613]

쇼와 천황은 일본 제국 시대로의 복고를 시도했지만, 각지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일본군이 자행한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1957년, 이들이 중국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쓴 《삼광》(三光)이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삼광 작전’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졌다.[613] 우익 기득권층은 복귀한 병사들을 매도하고 조직 폭력배를 동원해 책을 절판시켰다.[613]

하지만 우익 세력의 신국가주의 운동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계속됐다. 자유주의자, 학생 집단과 노동층은 자유민주당의 복고 개헌 운동을 비난했으며, 자유민주당은 교육 통제와 애국심 고양을 강요하려다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613]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B급, C급 전범들의 구명 정책과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회복을 지향했다. 냉전에 따른 이해관계를 고려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이를 승인하고 전범 석방을 도왔다.[615] 기시 내각은 복고 개헌과 자위대 강화를 추진했으며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대한 반대 여론을 탄압하기 위해 경찰력을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400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합류한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가 1958년 11월부터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기시의 계획은 무너졌다.[615]

히로히토는 재판을 받지 않았지만, ''아라히토가미'' 즉, 현신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는 1889년 일본 헌법에 따라 히로히토가 신토 신앙에서 유래한, 국가에 대한 신성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일본 천황이 신의 후손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1945년 12월, 그는 부대장인 기노시타 미치오에게 "일본인이 신의 후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천황이 신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공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천황이 신성 주장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공적인 입장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졌다. 맥아더 장군이 그를 일본인들이 점령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유용한 파트너로 여겼기 때문이고, 요시다 시게루의 배후 조종으로 그를 유럽식 군주로 몰아세우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였다.

히로히토의 제한된 헌법 군주로서의 지위는 1947년 헌법의 제정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헌법은 천황을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정의했다. 그의 역할은 명목상의 정부 권력조차 없는 순전히 의례적이고 대표적인 것으로 재정의되었다. 그는 헌법에 명시된 국가 문제만을 수행하도록 제한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그 영역에서의 그의 행동은 내각의 구속력 있는 지시에 따라 수행되었다. 1947년 히로히토는 미국이 작성한 국가의 새로운 헌법에 따라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61]

1979년 이란 혁명과 짧았던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몰락 이후, 히로히토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왕족 칭호인 "황제"의 어떤 변형이라도 갖는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5. 비판 및 논란

쇼와 천황에 대한 비판과 논란은 여러 방면에서 제기되었다.


  • 학계: 미국의 일본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2000년에 쓴 《히로히토와 현대 일본의 형성》에서 쇼와 천황이 태평양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쟁 책임에서 면죄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649]
  • 대한민국 언론: 일본 사학자들이 쇼와 시대 관련 책을 출간하는 것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일본 지식층이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밝히는 것을 꺼린다고 지적했다.[650] 동아일보 기자 황호택은 이명박 대통령이 아키히토 천황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에 대해, 일본 제국 헌법 11조에 따른 천황의 일본군 통수권자로서의 책임을 언급하며 쇼와 천황의 책임을 연결하여 아키히토의 사과를 요구했다.[651] 국민일보 기자 조용래는 《쇼와 천황의 종전사》(1992)를 예로 들며, 연합군이 쇼와 천황을 이용하기 위해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고, 이것이 일본 내 전후 청산 중단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652]
  • 영국 언론: 쇼와 천황 사망 직후, "쇼와 천황은 악마의 화신"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653] 극동전쟁포로연합회 의장 헤럴드 페인은 쇼와 천황이 즉각 처형되었어야 한다고 비난했다.[653]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히로히토, 혐오당하는 일본의 황제"라는 기사에서 쇼와 천황을 '악마의 화신'으로 묘사했다.[653] 더 선은 "지옥이 사악한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고 혹평했고,[654] 데일리 스타는 쇼와 천황을 '사악한 작자'로 규정했다.[654] 영국 언론의 비난은 일본 정부가 직접 항의 서한을 전달할 정도로 격렬했다.[654]
  • 영국 왕실 및 BBC: 《버키스 피어리지》 편집자 브룩스 베이커는 1989년 1월 7일, 유럽 왕가 일족이 맥아더를 설득해 쇼와 천황을 전범 재판에서 처형시키지 않았다고 폭로했다.[655] BBC는 쇼와 천황이 난징 대학살을 알고 있었고, 중일 전쟁과 동남아시아 침략에서 일본군의 전과에 대해 시종장 기도 고이치에게 긍정적인 발언을 했다고 폭로했다.[656]
  • 장작림 폭살 사건과 다나카 기이치 내각: 1928년 장작림 폭살 사건의 책임자 처벌 문제와 관련하여, 다나카 기이치 총리가 쇼와 천황에게 약속한 처벌을 이행하지 않자, 쇼와 천황은 다나카의 약속 위반을 강하게 질책했고, 그 결과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총사퇴했다. 이 사건으로 쇼와 천황은 이후 정치적 개입에 신중해졌다고 한다.
  • 천황기관설 사건: 1935년 천황기관설 사건에 대해, 쇼와 천황은 미노베 다쓰키치천황기관설을 옹호하며 "미노베는 충신이다"라고 말했다.
  • 2.26사건: 1936년 2.26사건 당시, 쇼와 천황은 분노를 드러내며 반란군 진압 의지를 밝혔다. 이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입장을 지켜왔던 천황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1. 전쟁 책임론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주제이다.[84]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은 쇼와 천황을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추축국의 독재자로 묘사했다.[85] 그러나 전후 미국은 천황제 유지가 일본의 평화적인 점령과 전후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쇼와 천황을 전쟁 정책에 관여하지 않은 "권력 없는 명목상의 지도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기록들이 공개되고, 1989년 쇼와 천황 사후 역사 연구가 증가하면서 이러한 이론에 대한 반박이 제기되기 시작했다.[85][86][87] 최근에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논쟁이 정치 및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개입 정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88]

일본 전쟁 기억 전문가이자 다트머스 대학교 교수인 제니퍼 린드는 "수년에 걸쳐 여러 증거들이 드러나면서 역사가들은 그의 책임과 그에 대한 그의 반성에 대한 그림을 그려왔다. 이것은 그가 극도로 유죄였으며 전쟁 후 그로 인해 황폐해졌다는 이전의 그림을 매우 잘 확인하는 퍼즐의 또 다른 조각이다."라고 말했다. 여러 증거를 통해 역사가들은 쇼와 천황이 전쟁 발발과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적어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88][89]

일본군은 중국을 침략하면서 국제법 적용을 거부했으나, 쇼와 천황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657] 또한, 베르사유 조약 제171조 등 여러 국제 협정에서 금지한 화학 무기 사용을 허락했다.[657] 1937년 7월 28일, 쇼와 천황은 최루탄 사용을 허가했고, 1938년 봄부터는 중국과 몽골의 주요 전투 지역에서 독가스 살포를 시작했다.[657]

1939년 5월 15일, 쇼와 천황은 만주국과 소련 국경 지대에서 야외 화학무기 실험을 허가하는 《대륙명 제301호》를 재가했다.[657] 1940년에는 중국에서 세균 무기 사용을 허락하며 731 부대 창설을 재가했다.[657] 허버트 빅스는 1942년까지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한 세균전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고엽제, 독가스 등을 사용하는 행위로 이어졌다고 비판했다.[657]

쇼와 천황은 충칭 등 중국 여러 도시에서 일본군의 전략 폭격과, '삼광 작전'(三光作戰)이라 불리는 방화, 살인, 약탈을 포함한 작전을 명령했다.[657] 이 작전에서 일본군은 “적 또는 지역 주민을 가장한 적”과 “잠재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주민 중 15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성인 남자”를 모조리 죽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657][658] 1938년 12월 2일, 쇼와 천황은 《대륙명 제241호》를 통해 이 지역에서의 무제한 살육을 묵인했다.[657] 1941년 12월 3일에는 《대륙명 제575호》를 내려 점령지역을 세분화하고 '섬멸 작전'을 수행했다.[657] 역사학자 히메타 미쓰요시는 이 '섬멸 작전'으로 최소 247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657][659]

쇼와 천황은 일본군의 침략 정책을 재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침략 행위를 격려하고 관련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지시를 내렸다.[660] 1932년 1월 8일, 만주사변 3개월 후 쇼와 천황은 관동군에 칙어를 내려 격려했다.[660] 1940년 삼국 동맹 체결을 환영하는 조서를 발표했다.[660] 동남아시아 침략 시기에는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와 자주 침략 계획을 상의했고, 중국 침략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에 대해 크게 질책했다.[660]

1945년 11월,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661] 맥아더는 천황제를 일본 국민의 구심점으로 판단, 1946년 쇼와 천황의 면책을 지지하는 편지를 보냈다.[661] 쇼와 천황의 면책 배경에는 맥아더의 정치적 야심과 퀘이커교 신자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662] 요시다 유타카는 맥아더가 쇼와 천황을 이용하려 했다고 비판했다.[663]

쇼와 천황은 재판을 받지 않았지만,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는 시각은 여전히 존재했다. 1988년 12월 7일, 모토시마 히토시 나가사키시 시장은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661] 이 발언으로 모토시마 시장은 비난과 협박을 받았으며, 극우 단체의 총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661] 쇼와 천황 사후, 그의 전쟁 책임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아사히 신문은 2001년 8월 15일 자 사설에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밝혔다.[661] 2000년 12월, NGO가 개최한 '일본군 성노예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는 쇼와 천황에게 유죄 판결이 선고됐다.[664]

1990년 12월, 문예춘추는 『쇼와 천황 독백록』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쇼와 천황이 1919년부터 1946년까지의 사건들을 회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쇼와 천황은 독백에서 만주사변은 정당화했지만, 미국,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감은 부족했다고 밝혔다.[106] 그는 군 지휘관들보다 서구 열강의 경제 봉쇄에 대한 일본의 취약성을 더 잘 알고 있었다.[106]

1941년, 쇼와 천황은 미국과 별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독백에서 "우리는 미국과 무승부를 거두거나, 기껏해야 6대 4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중략) … 우리가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평화를 달성했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쇼와 천황이 평화를 중시했기 때문에 전쟁의 조기 종결을 원했다는 이론을 반박한다. 1944년 9월,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은 장제스에게 타협을 제안했지만, 쇼와 천황은 이를 거부했다.[106] 전황이 불리해지자, 쇼와 천황은 "적에게 어딘가에서 한 방 제대로 먹이고 나서 평화의 기회를 잡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레이테 만 해전 승리를 기대했지만 패배했다. 1945년 2월 14일, 고노에 후미마로는 쇼와 천황에게 전쟁 종식을 촉구했다. 오키나와 전투 패배 후에도 쇼와 천황은 "한 방 제대로 먹일" 수 있는 전장을 찾았다. 1945년 8월, 쇼와 천황은 미국의 일본 점령이 천황제를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츠담 선언에 동의했다.

2018년 8월, 쇼와 천황의 시종이었던 고바야시 시노부의 일기가 공개되었다.[107] 이 일기는 쇼와 천황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중대하게 여겼고, 나이가 들면서 그러한 감정이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제니퍼 린드는 "수년에 걸쳐 이러한 여러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역사가들은 그의 책임과 그에 대한 그의 반성에 대한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이것은 그 이전에 형성되어 온 그림, 즉 그가 극도로 책임이 있었고 전쟁 후 그로 인해 괴로워했다는 그림을 매우 잘 확인해주는 또 다른 조각입니다."라고 말했다. 1980년 5월 27일자 기록에는 쇼와 천황이 중일전쟁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고 싶었지만, 궁내청 관계자들에 의해 저지당했다는 내용이 있다.[107] 1987년 4월 7일자 기록에는 전쟁 책임에 대한 논의에 시달린 천황이 삶의 의지를 잃어가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107] 궁내청 관료 다지마 미치지의 수첩에 따르면, 쇼와 천황은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 대해 사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108] 그는 "군부의 과격파가 전쟁 수행을 주도하도록 방치한 점에서 부족했다"고 말했다.[108]

2018년 7월, 유자와 미치오의 메모가 공개되었다. 이 메모는 진주만 공격 직전 쇼와 천황과 도조 히데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105] 유자와는 도조의 말을 인용하며 "일왕께서는 결정을 내리신 후 편안하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셨습니다."라고 기록했다. 역사가 후루카와는 유자와의 메모를 통해 "도조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관료였기 때문에 상관인 일왕에게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왕이 결정하도록 모든 것을 보고해야 했습니다. 일왕이 반대하지 않으면 그는 진행했습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군 장군 나라 다케지의 일기는 쇼와 천황이 만주사변을 잘 알고 있었고, 일본군 장군 이시와라 간지가 배후에 있음을 인정했지만, 점차 새로운 상황에 적응했고 책임자들을 처벌하려는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109] 2021년 9월, 백다케 사부로의 일기 25권, 수첩, 메모가 공개되었다.[110] 백다케의 일기에는 쇼와 천황의 각료와 고문 일부가 천황이 전쟁 준비 면에서 그들을 앞서나가고 있다고 우려한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차다니 세이이치는 백다케의 일기 발견에 대해 "(백다케의 일기는) 일본 지도자들이 전쟁으로 이끈 과정을 기록한 천황의 측근 중 한 명이 쓴 중요한 기록이다."라고 말했다.[110]

1989년 1월 해제된 영국 정부의 히로히토에 대한 평가는 그를 "사건의 경과를 바꿀 만큼 강력하지 않은" 인물로 묘사하며, 히로히토는 "무력했고" 히틀러와의 비교는 "터무니없이 빗나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119] 영국령 인도 출신 법률가 라다비노드 팔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반대하며 1,235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을 작성했다.[111] 그는 일본군의 작전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장제스가 서구 열강, 특히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보이콧한 것에 대한 무역 작전 보이콧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팔은 이웃 국가들에 대한 공격은 특히 소련을 포함한 공격적인 환경으로부터 일본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정당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것을 범죄가 아닌 자위 작전으로 간주했다. 팔은 "진정한 범죄자는 우리 앞에 없다"고 말했고 "패전만이 국제 범죄다"라고 결론지었다. 전 영국 주일대사 존 화이트헤드는 1989년에 "성격과 기질 면에서 히로히토는 운명이 그에게 부여한 역할에 부적합했다"고 진술했다.[119] 화이트헤드는 히로히토가 자신의 견해를 너무 강하게 주장했다면 고립될 수도 있었고 더 유순한 왕족 구성원으로 대체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전쟁 전 메이지 헌법은 히로히토를 "신성한" 전능한 존재로 규정했지만,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히로히토의 권력은 장관들과 군부에 의해 제한되었다. 화이트헤드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히로히토의 겸손함이 일본 국민이 새로운 1947년 헌법과 연합군 점령을 받아들이는 데 기본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119]

5. 2. 천황 폐위론

GHQ는 1943년 모스크바 선언,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 1945년 8월 8일 런던에서 조인된 ‘국제사법재판소 헌장’에 따라 1945년 9월 11일 전범 용의자에 대한 1차 체포·구금령을 내렸다.[582]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전범 용의자가 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이 독자적인 전범 재판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GHQ는 이를 거절했다.[583]

1945년 9월 22일, 맥아더의 심리전 담당 참모였던 보너 펠러스는 GHQ가 검거한 일본 제국의 전쟁 지도자들 중 40명을 따로 뽑은 뒤, 1946년 3월 6일까지 5달 보름동안 스가모 형무소에서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582] 펠러스의 심문을 받은 전쟁 지도자들은 쇼와 천황이 기소되지 않도록 쇼와 천황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로 입을 맞췄다.[582][584] 개인 심문을 마친 1946년 3월 6일, 펠러스는 GHQ가 있는 다이이치 생명 빌딩의 집무실로 요나이 미쓰마사와 통역관을 불러 연합국 중 소비에트 연방을 위시한 몇몇 국가가 쇼와 천황의 처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전했다.[582] 1945년 12월 6일에서 7일 사이, 미국인 수석검사 조지프 베리 키넌과 직원들이 도쿄에 국제검찰국을 설치하였으며, 이어 11개국의 재판관과 검사들이 모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의 설치도 추진했다.[582] 쇼와 천황의 측근들은 쇼와 천황이 재판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위 관료들과 비밀 모임을 가졌는데 이들은 변호인단을 차려 군부의 ‘단독 책임’을 강조하고, 쇼와 천황에게 책임을 물을 만한 어떤 꼬투리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582]

1946년 3월 18일, GHQ 연락 담당관 데라사키 히데나리는 맥아더가 보낸 질문서를 쇼와 천황에게 전달했다. 쇼와 천황은 답변을 구술하는 자리에서 캘리포니아주의 아시아인 이민 거부 정책,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주의가 “일본국민을 분개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 대표가 주장한 인종 평등에 관한 호소를 열강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태평양 전쟁의 배경으로 인종적 긴장을 이야기했다.[585] 그 후, 쇼와 천황은 관동군이 저지른 장쭤린 폭살 사건, 다나카 기이치 내각 총사직, 런던 해군 군축 회의, 만주사변과 상해 사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1936년 2·26 사건, 자신이 재가한 “육해군 대신을 현역 장교에 한해 임명하기로 하는 규정”, “중국에 대한 평화협상과 추축국 삼국동맹”에 대해서도 증언했다.[582][586] 쇼와 천황과 데라사키의 두 번째 만남에서 데라사키는 맥아더가 이미 1946년 1월에 쇼와 천황의 전쟁 범죄 혐의를 씻어낼 비밀 전문을 워싱턴에 보냈음을 전했다. 그 날 쇼와 천황은 아베 노부유키·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의 실각 원인과 추축국 삼국동맹, 도조 히데키에 얽힌 문제, 진주만 공격 계획까지, 측근들이 앞서 제기했던 7가지 질문에 대답했다.[582]

이틀 뒤에 열린 세 번째 자리에서 쇼와 천황은 도조 독재 내각의 성립과 도조의 개전 방지 노력, 쇼와 자신이 내린 개전 조서, 제국 육군과 해군의 반목 등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582][587] 이 때 쇼와 천황은 도조를 “남을 잘 헤아리는 인물”이라며 치켜세우면서 도조의 독재에 대해서는 “(도조가) 유사시에 여러 관직을 차지해 지나치게 바쁜 나머지 도조의 마음이 아랫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헌병을 지나치게 앞세웠기 때문”이라며 두둔했다.[582] 또한 쇼와 천황은 자신이 도조의 해임을 반대했다고 인정했다. “(도조가) 이전부터 대동아 각지의 사람들과 접촉해왔기 때문에 도조를 무시하고 내각을 무너뜨리면 대동아 각지에서 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했다고 말했다.[588][589] 데라사키와 쇼와 천황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만났다.[582] 데라사키와 만난 뒤 쇼와 천황은 데라사키를 통역으로 대동하여 1946년 4월 23일에 맥아더와 만나기로 하였으나 그 전날인 22일에 시데하라 내각이 갑작스럽게 총사직했기 때문에 데라사키는 펠러스에게 회담 연기를 요청했다. 대신 데라사키는 쇼와 천황의 구술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을 영어로 번역해 펠러스에게 전달했다. 이 요약문에서는 중일 전쟁에서 쇼와 천황이 수행한 역할을 완전히 생략하여 쇼와 천황을 ‘무력한 존재’로 묘사했다.[582]

국제검찰국(IPS)의 집행위원회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를 구성하는 각 나라에서 보낸 ‘참여검사’가 모인 곳이었다. 조지프 키낸이 우두머리를 맡았고, 미국과 영국의 법무관 직원들이 돕는 가운데 IPS는 용의자를 심문하고 ‘평화에 대한 죄’로 기소할 용의자를 선정하는 작업에 집중했다.[590] 미국 검찰진이 작성한 이른바 ‘A급 전범’ 용의자 명단에는 30명이, 영국 검찰진이 작성한 명단에는 11명이 올랐는데 쇼와 천황은 양쪽 명단에 모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가 제시한, 기소 가능한 ‘100인의 잠정 명단’에는 평화에 대한 죄뿐만 아니라 “인도(人道)를 거스른 죄”(Crimes against humanity)에 대한 용의자로 쇼와 천황이 들어가 있었다.[590] 또 오스트레일리아는 쇼와 천황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보고서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측은 “쇼와 천황이 어느 때에도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강요를 받아 승낙 문서를 쓴 바가 없다”고 강조했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승낙했기에” 쇼와 천황의 죄질이 더 나쁜 것이라고 설의 형식으로 덧붙였다.[591] 하지만 쇼와 천황은 결국 기소를 당하지 않았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에 참여한 연합국은 저마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590]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과의 싸움에 집중하기 위해 쇼와 천황을 기소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도쿄 재판에도 재판관으로 메이루아오, 검사로 샹저준, 비서 두 명 등 네 명만을 보냈다.[590][592][593][594] 필리핀은 전쟁 기간에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을 잃는 피해를 입었으며,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590] 필리핀 정부는 도쿄 재판의 재판관으로 바탄 죽음의 행진을 경험한 델핀 하라니야(Delfin Jaranilla)를 천거했으며, 참여검사로 페드로 로페스(Pedro Lopez)를 임명했다. 로페스는 도쿄 재판에서 필리핀 관계 사건을 다룰 때, 일본군이 필리핀의 민간인,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에게 자행한 잔학 행위 144건을 발표해 배상 청구의 근거로 삼았다.[590] 하지만 이들은 쇼와 천황이 기소 명단에서 제외된 것을 문제삼지는 않았다.[595] 인도는 캘커타 고등법원의 판사를 지낸 라다비노드 팔을 보냈는데, 팔은 추축국을 이용해 독립 운동을 꾀하던 찬드라 보스를 지지하는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 팔은 일본식 제국주의를 적극 옹호했기 때문에 재판 자체를 반대했다. 팔은 ‘공명정대한 재판 운영을 다짐하는 공동 선언문’에도 홀로 서명을 거부했으며 피고인들에게 예의를 표하기도 했다. 팔은 이처럼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일본은 무조건 옳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590][596]

재판은 1946년 5월 3일, 도쿄 고쿄에서 가까운 이치가야(市ヶ谷)의 구 육군성 건물을 개수한 강당에서 열렸다. 알파벳에 따라 아라키 사다오부터 차례로 불려나온 피고인들은 모든 혐의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무죄를 주장했다.[597] 검찰진은 6월 4일 키낸의 초두진수를 시작으로 거의 8달 동안에 걸쳐 각 국면의 공소를 제기했다. 이어 검사들은 미국과 일본의 외교 정책에 관한 자료로서 각종 조약과 협정, 기타 문서를 제시했으며 증인 109명을 소환해 구두로 증언케 하고 561명의 서면 증언을 받아 모두 법정에 제출했다.[597]

1946년 6월 13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참여검사 앨런 맨스필드(Alan Mansfield)는 일본도 가맹했던 헤이그 조약의 다양한 내용과 일본의 정치·관료 체제를 명백히 밝히는 문서를 법정에 제출하였다. 일본인 증인으로 출석한 시데하라 기주로, 와카쓰키 레이지로 등 전임 총리들은 육군의 사실상의 독립과 ‘경찰국가’ 체제 등을 이야기하며 “천황과는 관련이 없는 군국주의자들이 사건을 벌이고 역대 내각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주장했다.[597] 재판은 여름을 대비해 냉방 시설을 갖추기 위해 잠시 휴정에 들어갔다가 6월 27일에 재개됐다. 검찰진은 2·26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이누카이 쓰요시의 아들인 이누카이 다케루를 증인으로 불렀다. 다케루는 “아버지 쓰요시가 쇼와 천황을 알현해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할 수 있도록 칙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증언했는데 기도 고이치와 도고 시게노리의 변호인 호즈미 시게타카는 이누카이 다케루의 증언이 “천황 폐하께 만주사변 확대의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597] 의도치 않게 쇼와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게 된 것에 대해 당황한 이누카이는 다음 날 증언에서 전날의 증언을 “조선군과 철도수비대를 제자리로 철수시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축소했다.[597]

1947년 12월 26일, 증인석에 선 도조 히데키는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다”면서 “일본의 정치는 메이지 헌법 체제를 끝까지 준수했다”며 일본 정부와 쇼와 천황을 두둔하고 나섰다.[597] 하지만 기도 고이치의 변호인인 윌리엄 로건이 도조 히데키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도조 히데키는 로건의 “평화를 바라는 천황의 의사에 반해 기도 고이치가 어떠한 행동을 취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런 적은 없다.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천황 폐하의 의사를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제국의 고관이라면 더욱 그러하다”라는 증언을 하면서 여태껏 변호인들과 GHQ, 일본 정부가 계획해온 ‘천황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을 뒤엎게 됐다. 바로 다음인 1948년 1월 6일에 증인석에 섰을 때 도조는 이 증언을 번복하려 했다.[597]

1948년 11월 12일, 재판장 윌리엄 웹(오스트레일리아 소속)은 다수파의 의견만을 반영한 판결에 따라 주요 전범 25명에게 전원 유죄 평결을 내렸다. 이 중 도조 히데키와 이타가키 세이시로,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마쓰이 이와네, 무토 아키라 등 다섯 장군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렸으며, 문관 출신인 전 총리 히로타 고키에게도 사형 선고를 내렸다.[597] 변호인단은 이 선고를 무마하기 위해 미국 연방대법원에 소원을 냈지만 연방대법원은 심리 전날에 극동위원회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는 ‘국제적인 권위 하에 임명된 것’이라는 성명을 낸 것을 반영해 “연방대법원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의 판결을 파기할 권한이 없다”며 재판소의 결정을 인정했다.[597] 사형당한 피고인들의 시신은 화장되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한 시종은 도조 히데키가 사형 당했을 때 쇼와 천황이 방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598] 한편, 재판장 웹은 전 내대신 기도 고이치, 전 총리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 16명에게 종신형을, 전 총리 도고 시게노리에게는 금고 20년형을, 판사진이 개전의 주요 책임자로 판단하지 않았던 시게미쓰 마모루에게는 금고 7년형을 내렸다. 하지만 쇼와 천황에게는 아무런 형도 내려지지 않았다.[597]

판결 후 웹은 쇼와 천황의 면책에 대해 쇼와 천황이 ‘강요를 당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어떠한 통치자도 침략 전쟁 개시라는 범죄를 저지르고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라며 당당히 면죄를 주장할 수는 없다”고 단언해 쇼와 천황을 감싸는 이들을 공격했다.[597] 프랑스의 앙리 베르나르(Henri Bernard) 판사도 쇼와 천황의 면책에 불만을 표했다. 베르나르는 “비록 (쇼와 천황을 비롯한) 선전 포고의 주요 장본인들은 모두 책임에서 풀려났지만, 출두한 피고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모두 (쇼와 천황을 비롯한) 주요 장본인들과 공범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597] 네덜란드의 베르트 뢸링 판사는 쇼와 천황의 면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침략’이라는 개념을 국제법상의 범죄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피고인 중 기도 고이치, 도고 시게노리 등 다섯 명의 무죄를 주장했다.[597] 인도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는 8월 초순에 반대 의견을 모두 써 웹에게 냈지만 웹은 선고 당일인 11월 12일에 “팔 판사가 반대 의견을 냈다”는 사실만 공표했다.[597][599][600]

일본 제국이 무너지던 1945년 6월, 갤럽은 미국 국민을 대상으로 ‘전쟁 이후, 일본 천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조사하였고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고 발표했다.[665]

Q. 전쟁 이후 일본 천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항목비율
1. 죽이거나, 고통을 주고 굶겨 죽인다36%
2. 처벌하거나 국외로 추방한다24%
3. 재판에 회부하여 유죄가 되면 처벌한다10%
4. 전범으로 처리한다7%
5. 천황의 책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고,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상급 군사 지도자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16%
6. 꼭두각시로 이용한다3%
7. 기타, 모름 등4%



갤럽 조사에 응답한 사람들 중 중 1번, 2번, 3번, 4번으로 응답한 77%가 천황의 처벌을 요구했다. 또, 1945년 1월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스에서 열린 태평양 문제 조사회에서 영국 대표단이 천황제 문제를 일본 국민의 자율에 맡기자고 주장한 반면, 상당수의 중국 대표와 미국 대표는 천황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그 외에 천황을 런던으로 추방하거나 도쿄가 아닌 일본 국내의 다른 장소에서 연합군이 일본을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666]

연합군 각 정부들도 공식적인 입장을 내기에 이르렀다. 장제스는 일본 국민의 자율에 맡기자고 했지만 국민당 정부 관료들이나 중화민국 의회는 일본의 황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으며, 중국공산당도 1945년 9월 14일자 해방일보를 통해 “쇼와 천황(히로히토)은 국가 원수로 일본 육해군의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에 전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밝혔다.[667]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945년 8월 13일, 미국 국무부에 “천황은 일본의 국가 원수이자 군 통수권자로, 일본의 침략 행위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을 전했으며 같은 날 뉴질랜드 외무부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제 기구 전체를 근절해야 하며, 천황이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의 침략 전쟁에 관여한 경우에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밝혔다.[667]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일본 안에서도 천황이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야 하며 쇼와 천황이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진보계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1946년 12월 도쿄 대학 총장 난바라 시게루는 의회에 출석해 천황제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시인인 미요시 다쓰지는 국민을 퇴폐로부터 헤어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쇼와 천황이 물러나는 것이 최선이라는 글을 발표했다.[667]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지낸 철학자 아베 요시시게는 “국민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천황 스스로가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했으며, 쇼와 천황의 측근이었던 기도 고이치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을 앞두고 “황실의 안녕을 위해 쇼와 천황이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667]

하지만 미국의 반대로 천황의 퇴위는 실현되지 않았다.[667]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 기념식 자리에서 요시다 시게루 내각은 천황이 직접 패전의 책임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궁내청의 반대로 무산됐다.[667] 이처럼 전쟁 이후에 일본 안팎으로 쇼와 천황이 전쟁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흐르기도 했지만 쇼와 천황은 “굳건한 결의로써 만난을 헤치고 일본의 국가 재건을 조속히 달성하기 위해” 계속 재위하기를 원한다는 서한을 맥아더에게 보냈으며 책임을 지라는 여론에 대해 침묵했다.[667] 그 후 일본에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논하는 것은 쇼와 천황이 죽은 지금까지 일종의 금기 사항이 됐다.[667]

5. 3.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

쇼와 천황은 전후 A급 전범들이 비밀리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밝혀지자 197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했다. 이러한 참배 중단은 그의 후계자인 아키히토나루히토도 이어갔다.[78]

2006년 7월 20일, 일본경제신문(닛케이 신문)은 히로히토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한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는 각서 발견에 대한 기사를 1면에 게재했다. 전 궁내청 장관 도미타 도모히코(富田朝彦)가 보관한 이 각서는 야스쿠니 신사에 14명의 A급 전범이 합사된 것이 참배 거부의 이유임을 최초로 확인해 준다. 도미타는 히로히토와 나눈 대화 내용을 자신의 일기와 수첩에 상세히 기록했다. 각서에 따르면, 1988년 히로히토는 야스쿠니 신사가 전몰자 명단에 A급 전범들을 포함시킨 결정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시점부터 마쓰오카시라토리를 포함한 A급 전범들이 합사되었다. 쓰쿠바(筑波)는 신중하게 행동했다고 들었다." 여기서 쓰쿠바는 1966년 정부가 작성한 전몰자 명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범들을 합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전임 최고 사제인 츠쿠바 후지마로(筑波藤麿)를 가리킨다. "현재 최고 사제인 마쓰다이라(松平)의 아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마쓰다이라(松平)는 강한 평화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몰랐다. 그래서 그 이후로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여기서 마쓰다이라(松平)는 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궁내청의 대장을 지낸 마쓰다이라 요시타미(松平頼寿)를 가리킨다. 그의 아들인 나가요시(永芳)는 츠쿠바 후지마로(筑波藤麿)의 뒤를 이어 야스쿠니 신사의 최고 사제가 되었고, 1978년 전범들을 합사하기로 결정했다.[79]

6. 평가

쇼와 천황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쇼와 천황 사후, 당시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태평양 전쟁에 대한 쇼와 천황의 책임론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며 두둔했다.[646] 분게이슌주 편집장 출신 한도 가즈토시는 저서 《쇼와사》에서 관동군 장교들의 독단적 침략 행위를 비판하면서도, 쇼와 천황에 대해서는 "적장이 주는 물은 마시지 않겠다는 왕의 긍지를 보여주었다"고 옹호했다.[647]

반면, 쇼와 천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간사이가쿠인 대학 교수 도요시타 나라히코는 저서 《히로히토와 맥아더》에서 쇼와 천황이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하려는 맥아더와 미국을 상대로 거래를 통해 천황제와 자신의 목숨을 부지했다고 평가했다.[648] 미국일본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저서 《히로히토와 현대 일본의 형성》에서 쇼와 천황이 전제 군주로 길러졌고 태평양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전쟁 책임에서 면죄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649]

대한민국 언론들은 일본 사학자들의 쇼와 시대 관련 저서를 분석하며, 일본 지식층이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밝히는 것을 꺼린다고 지적했다.[650] 동아일보 기자 황호택은 이명박 대통령이 아키히토 천황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에 대해, 일본 제국 헌법 11조에 따른 천황의 일본군 통수권과 맥아더의 쇼와 천황 면책, 전후 일본 세대의 침략 전쟁 무시 또는 정당화를 언급하며 쇼와 천황의 책임을 들어 아키히토의 사과를 요구했다.[651] 국민일보 기자 조용래는 《히로히토 독백록》과 요시다 유타카의 《쇼와 천황의 종전사》를 예로 들며, 연합군이 쇼와 천황을 이용하기 위해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고, 이것이 일본 내 전후 청산 중단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652]

영국에서는 쇼와 천황 사망 직후 언론을 중심으로 "악마의 화신"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653] 극동전쟁포로연합회 의장 헤럴드 페인은 쇼와 천황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군과 연합군 포로의 죽음에 책임지고 즉각 처형됐어야 한다고 비난했다.[653]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히로히토, 혐오당하는 일본의 황제"라는 기사에서 영국군 포로들이 쇼와 천황을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고 그의 죽음을 기뻐한다고 보도했다.[653] 더 선은 "지옥이 사악한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고 혹평했고,[654] 데일리 스타는 사설에서 쇼와 천황을 '사악한 작자'로 규정하고 "쇼와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 앞에서 기쁨의 춤을 출 것"이라고 썼다.[654]

영국 왕실 소식지 편집자 브룩스 베이커는 1989년 1월 7일 유럽 왕가 일족이 맥아더를 설득해 쇼와 천황을 전범 재판에서 처형시키지 않았다고 폭로했다.[655] BBC는 다큐멘터리에서 쇼와 천황이 난징 대학살을 알고 있었고, 중일 전쟁과 동남아시아 침략에서 일본군 전과에 대해 기도 고이치에게 "우리가 해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깨닫고 있느냐"는 말을 했다고 폭로했다.[656]

7. 작품

쇼와 천황은 해양생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분야에 정통했다. 일본 황궁에는 쇼와 천황이 자신의 이름으로 해양생물학 분야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실험실이 있었다.[76] 그의 업적에는 수십 종의 새로운 히드로충류를 기술한 것이 포함된다.[77]

쇼와 천황의 실험실(1950년)


쇼와 천황의 해양생물학 관련 논문은 다음과 같다.

발표 연도논문 제목
1967일본산 신속 신종을 포함한 망상해파리과(Clathrozonidae) 수산류에 대한 검토.[630]
1969아마쿠사 제도산 수산류 일부.[631]
1971Clathrozoon wilsoni Spencer에 대한 추가적 고찰.[632]
1974보닌 제도산 수산동물 일부.[633]
1977아카바 만(홍해)산 수산류 5종.[634]
1983이즈오시마 및 니지마산 수산류.[635]
1984파나마 만산 신종 수산류 Hydractinia bayeri n. sp. (수산과).[636]
1988일본 천황 폐하께서 채집하신 사가미 만산 수산류.[637]
1995사가미 만산 수산류 II. (유고)[638]



1943년 6월 24일, 전함 「무사시」를 방문한 쇼와 천황(중앙).


쇼와 천황은 군사 전략에도 관심을 보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대본영에서 동티모르 점령 계획이 제기되었을 때, 아조레스 제도가 연합국 측에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져 일본의 오스트레일리아 공습은 다른 기지를 이용하여 실시되었다. 1941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시종무관으로 근무한 츠보시마 후미오의 일기에 따르면, 쇼와 천황은 전황에 대해 질문하고, 병사들의 양식에 대한 보존성을 묻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265]

7. 1. 영화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의 영화 《일본 패망 하루 전》은 쇼와 천황이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밝히고 일본의 항복을 결정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7. 2. TV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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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3.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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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서적 河出人物読本 天皇裕仁 河出書房新社 2014-08
[370] 문서 昭和天皇もファン 昭和天皇も「刑事コロンボ」の大ファンで、訪米された際にフォークさんとの対面を求めたが実現しなかった。
[371] 문서 昭和天皇もコロンボのファンで、1975年に訪米された際は実現こそしなかったが、フォークが昼食会に招待されたこともあった。
[372] 문서 (日本で人気のあった)アメリカのドラマ『刑事コロンボ』を陛下も見るそうだが、どんなところを楽しんでおられるのか。
時間の都合がつかず、私自身はその番組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が、一般の国民が非常に楽しんで見たと聞いています。

[373] 간행물 文藝春秋 2012-03
[374] 서적 陛下の御質問 - 昭和天皇と戦後政治 文春文庫
[375] 서적 味 東西文明社
[376] 서적 陛下、お味はいかがでしょう。「天皇の料理番」の絵日記 徳間書店
[377] 뉴스 ひらめきの料理番が「見た」昭和天皇 質素・倹約・無私 でもカレーにイカ粉/忘れられぬ「おいしかった」 https://mainichi.jp/[...] 2018-08-03
[378] 뉴스 天皇陛下の好物 198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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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웹사이트 昭和天皇が採集した深海生物が新種と判明 ヒトデの仲間、東大などが分析 国内での新種発見は106年ぶり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8-03-09
[382] 간행물 海上保安庁全船艇史 海人社
[383] 서적 昭和天皇と私 : 八十年間お側に仕えて 学習研究社 2014-08
[384] 웹사이트 コトクラゲ https://www.aquamari[...] アクアマリンふくしま
[385] 문서 陛下、お尋ね申し上げま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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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 서적 今上陛下と母宮貞明皇后 日本教文社 1987
[388] 서적 陛下、お尋ね申し上げます 1988
[389] 서적 陛下、お尋ね申し上げま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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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웹사이트 昭和天皇にあいたい 2 (皇居勤労奉仕団涙の『君が代』) https://ndlsearch.nd[...] 2024-10-22
[432] 웹사이트 昭和天皇にあいたい 3 https://ndlsearch.nd[...]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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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 문서 겸 마지막 후지와라 씨장자
[435] 문서 후지와라씨는 헤이안 시대 이후 천황가와 외척 관계를 형성했던 섭가로서 겐지나 헤이시처럼 자손들이 여러 가문으로 분가하였다.
[436] 서적 빅스
[437] 문서 “나라가 풍요로우면 백성은 평안하다”는 뜻이다.
[438] 서적 빅스
[439] 서적 빅스
[440] 문서 요시히토 황태자는 메이지 천황의 후궁 소생이다. 메이지 천황은 5명의 아내에게서 15명의 아이를 얻었으나 11명은 어린 나이에 죽었으며, 3남 요시히토 황태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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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서적 빅스
[444] 서적 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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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문서 이 시기의 일본 평민들은 소학교를 거쳐 5년제 일반 중학교를 다녔다.
[450] 서적 빅스
[451] 서적 빅스
[452] 문서 아시아계(황인종)가 인도·유럽계(백인종)에게 위협을 끼친다는 주장이다.
[453] 서적 빅스
[454] 서적 빅스
[455] 서적 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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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 서적 빅스
[461] 서적 빅스
[462] 문서 일본 궁내성의 의전직 관리직
[463] 서적 빅스
[464] 서적 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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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 서적 빅스
[468] 서적 빅스
[469] 문서 정우회, 혁신 클럽
[470] 문서 가네코와 박열 사진 사건
[471] 뉴스 박열 사진 사건으로 결국 내각 와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6-08-28
[472] 서적 빅스
[473] 뉴스 천황 폐하 붕어, 25일 오전 1시 25분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6-12-26
[474] 뉴스 동궁전하 어천조(御踐祚), 다이쇼 천황 붕어 즉시 거행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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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 서적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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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뉴스 천황 폐하의 말씀(칙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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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 서적 빅스
[483] 문서 진다 스테미와 스즈키 시종장 임명
[484] 문서 1933년 퇴역
[485] 문서 조선총독부, 시즈오카현 지사, 궁내차관 역임
[486] 문서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시미즈구 마을
[487] 뉴스 18일부터 재개된 양원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7-01-19
[488] 서적 빅스
[489] 뉴스 와카쓰키 내각 총사직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7-04-17
[490] 뉴스 다나카 내각의 실현과 그 후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7-04-20
[491] 서적 빅스
[492] 뉴스 권총 괴한, 돌연 하마구치 총리에게 총격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0-11-15
[493] 문서 저격을 당한 하마구치는 1년 후인 1931년 8월 26일에 사망했다. 그 전인 같은 해 4월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494] 서적 빅스
[495] 뉴스 일본군, 랴오닝 성의 새 근거지 진저우 폭격 개시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1-10-10
[496] 뉴스 국제 연맹, "11월 16일까지 일본은 만주 철병 완료하라"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1-10-24
[497] 뉴스 소련, 방송 통해 "이번 만주 사건은 세계 대전의 발단…"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1-10-27
[498] 뉴스 치치하얼 점령, 그 후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1-11-20
[499] 서적 빅스
[500] 뉴스 만주국사는 내일 9일부터 시작된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2-03-09
[501] 뉴스 천황 폐하의 행차에 폭탄을 던지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2-01-10
[502] 서적 빅스
[503] 뉴스 내각, "만주국 예정대로 14일 승인"……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2-09-13
[504] 뉴스 연맹 탈퇴 통고문, 오늘 사무국에 보낸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3-02-27
[505] 뉴스 일·만 연합군, 러허 진격 개시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3-02-26
[506] 뉴스 중국군에 일대 통격……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3-05-09
[507] 서적 빅스
[508] 서적 빅스
[509] 뉴스 동경 사건의 경과 개요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6-03-05
[510] 서적 빅스
[511] 서적 빅스
[512] 서적 빅스
[513] 서적 빅스
[514] 서적 빅스
[515] 뉴스 일·중 양국 간 격전 전개!……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7-07-29
[516] 서적 빅스
[517] 뉴스 성대한 난징 입성식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7-12-18
[518] 뉴스 선간후살, 목 베기 시합……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7-12-17
[519] 뉴스 적 유기 사체 8만……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7-12-19
[520] 뉴스 '중국판 쉰들러' 영화로…… 독일인 욘 라베,난징 대학살 당시 25만명 구해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6-07-24
[521] 뉴스 상하이 전선 방면의 최고지휘관을 경질하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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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 문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및 트루먼 대통령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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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 뉴스 히로히토, 교묘한 정치력으로 처벌 대신 '평화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다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9-07-28
[649] 뉴스 일본의 전쟁책임, 그 정점은 히로히토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0-10-05
[650] 뉴스 맥아더가 日王 히로히토 대신 죽인 그 군인은…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12-09-21
[651] 뉴스 한국인은 ‘日王전쟁범죄’ 사면한 적 없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12-08-27
[652] 뉴스 일본의 전후청산이 멈춰선 까닭은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2-09-11
[653] 뉴스 "히로히토는 악마의 화신"…… 영국 언론 일제히 비난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9-01-09
[654] 뉴스 "히로히토 죄값 안 받고 오래 살아" 영국 신문 사설에 일본 발끈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88-09-24
[655] 뉴스 히로히토 사망 이모저모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89-01-08
[656] 뉴스 [사설] 강영훈 총리의 조문 결정 취소하라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89-01-25
[657] 서적 빅스
[658] 뉴스 중국인 대량 살육 ‘난징 학살’ 사과커녕 정당화하는 일우익 https://news.naver.c[...] 한겨레 200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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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서적 이규배
[661] 서적 이창위
[662] 서적 박진우
[663] 서적 박진우
[664] 뉴스 '日 추악한 역사', 세상 밖으로 끌어낸 수요집회 https://news.naver.c[...] 머니투데이 201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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