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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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리우스 미요는 프랑스의 작곡가로, 1892년에 태어나 1974년에 사망했다. 그는 6인조의 일원이었으며, 에릭 사티와 친분을 유지했다. 미요는 재즈의 영향을 받아 작품에 다조성을 활용했으며, 오페라, 발레, 관현악곡, 피아노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443개에 달하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발레 《지붕 위의 소》, 《세계의 창조》, 피아노곡 《브라질의 향수》 등이 있다. 그는 194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밀스 칼리지와 파리 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스티브 라이히, 데이브 브루벡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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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미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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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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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Darius Milhaud |
출생일 | 1892년 9월 4일 |
출생지 | 마르세유, 프랑스 |
사망일 | 1974년 6월 22일 |
사망지 | 제네바, 스위스 |
직업 | 작곡가 지휘자 교육자 |
배우자 | 마들렌 밀요 |
자녀 | 1명 |
음악 경력 | |
악기 | 피아노 |
장르 | 클래식 음악 |
활동 기간 | 1909년 - 1972년 |
교육 | 파리 음악원 |
작품 목록 | 작품 목록 |
2. 생애
1892년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엑상프로방스에서 자랐다.[2]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파리 음악원에서 샤를 위도르, 뱅상 댕디 등에게 음악을 배웠다. 에리크 사티와 친하게 지냈으며, 프랑스 6인조 중 유일하게 사티와 사이가 좋았던 작곡가였다.[2]
1922년 미국에서 재즈를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8]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을 피해 194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종전 후 1947년부터 1971년까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밀스 칼리지와 파리 음악원을 오가며 음악을 가르쳤다.[16] 스티브 라이히,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버트 바카락, 데이브 브루벡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그의 제자이다.[16]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1920년대 이후에는 류머티즘으로도 고생했다. 작곡에 대한 열정이 매우 강해서 다양한 악기 편성을 시도하고, 탱고나 재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영화 음악에도 참여하는 등, 197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사망 후에는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묻혔다.[16]
2. 1. 초기 생애 (1892-1909)
1892년,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엑상프로방스에서 아몬드 거래로 재산을 모은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가브리엘 미요는 상관을 운영하면서 지역 음악 협회의 핵심 인물을 맡았고, 어머니 소피(알라티니)는 과거 파리시에서 성악을 공부했다.[21] 이러한 환경 속에서 7세에 지역 음악가 레오 부르기에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1904년부터 부르기에의 사중주단에서 제2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22] 이 무렵 클로드 드뷔시의 현악 사중주곡을 공부하고, 1902년에 초연된 『펠레아스와 멜리상드』의 악보를 입수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지역 군악대 음악대장에게서 화성학을 배우면서 작곡을 시작했지만, 배운 화성학은 활용되지 않고, 독자적인 화성 진행에 의한 바이올린 소나타를 썼다.[23]1909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파리에서는 빈번하게 연주회에 다니며, 모리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초연과 발족된 지 얼마 안 된 발레 뤼스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 등에 자극을 받아 드뷔시,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에 경도되었다. 그 한편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에는 혐오감을 느껴, 평생 "반 바그너"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24]
원래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한 입학이었지만, 차츰 작곡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음악원에서는 폴 뒤카에게 관현악, 자비에 루루에게 화성을 사사했지만, 미요는 화성 성적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미요가 루루에게 자작 바이올린 소나타를 보여주자, 루루는 "자네는 내 수업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자네는 이미 자신만의 화성 어법을 가지고 있는데, 더 관습적인 화성을 배우려고 하다니. 수업을 떠나게"라고 말했다.[25] 루루의 수업을 떠난 후, 앙드레 제달주에게 대위법, 샤를마리 비도르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제달주의 수업에서는 자크 이베르, 아르튀르 오네게르와 동기였고, 비도르의 수업에서는 제르멘 타유페르, 조르주 오리크와 알게 되었다.
이 무렵, 음악을 배우는 한편 프랑시스 잠, 폴 클로델 등 문학가들과 친교를 맺고, 그들의 작품을 텍스트로 한 오페라와 가곡을 작곡했다. 특히 외교관이기도 했던 시인 클로델과의 우정은 평생 이어졌다.
2. 2. 파리 음악원 시절 (1909-1916)
1909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파리에서는 연주회에 자주 다니며 모리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초연과 발레 뤼스 (러시아 발레단) 공연 등에 자극을 받아 클로드 드뷔시,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에 경도되었다. 반면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에는 혐오감을 느껴 평생 "반 바그너" 자세를 취하게 된다.[24]원래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해 입학했지만, 점차 작곡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음악원에서는 폴 뒤카에게 관현악, 자비에 루루에게 화성을 배웠지만, 미요는 화성 성적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미요가 루루에게 자신이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를 보여주자, 루루는 "자네는 내 수업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자네는 이미 자신만의 화성 어법을 가지고 있는데, 더 관습적인 화성을 배우려고 하다니. 수업을 떠나게"라고 말했다.[25] 루루의 수업을 떠난 후, 앙드레 제달주에게 대위법, 샤를마리 비도르에게 작곡을 배웠다. 제달주의 수업에서는 자크 이베르, 아르튀르 오네게르와 동기였고, 비도르의 수업에서는 제르멘 타유페르, 조르주 오리크와 알게 되었다.
이 무렵, 음악을 배우는 한편 프랑시스 잠, 폴 클로델 등 문학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품을 텍스트로 한 오페라와 가곡을 작곡했다. 특히 외교관이기도 했던 시인 클로델과의 우정은 평생 이어졌다.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브라질 체류 (1914-1919)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미요는 당시 브라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시인이자 극작가 폴 클로델의 비서로 일했다. 미요는 수년 동안 클로델과 협력하여 그의 많은 시와 연극을 위한 음악을 썼다. 브라질에서 그들은 발레 ''인간과 그의 욕망(L'Homme et son désir)''을 공동 작업했다.[3]2. 4. 프랑스 6인조와 전위적 활동 (1919-1925)
에리크 사티와 친했으며, 프랑스 6인조 가운데 유일하게 사티와 반목하지 않은 작곡가였다.[2] 1922년 미국에서 재즈를 접했다.[8] 프랑스로 돌아온 미요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작곡했는데, 여기에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에르네스토 나자레의 노래도 포함되었다.[30] ''소를 지붕에(Le Bœuf sur le toit)''에는 나자레와 다른 인기 브라질 작곡가들의 멜로디가 포함되어 있으며, 카니발의 소리를 연상시킨다. 그 멜로디 중에는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니발 곡이 있는데(포르투갈어로, 그는 프랑스어로 'Le boeuf sur le toit'로 번역했으며, 영어로는 'The Ox on the Roof'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12개의 리우데자네이루 동네를 연상시키는 12개의 춤 모음곡인 ''브라질의 그리움(Saudades do Brasil)''을 제작했다. 오리지널 피아노 버전이 나온 직후 그는 이 모음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했다.동시대 유럽의 영향도 중요했다. 미요는 자신의 현악 5중주곡(1920)을 아르놀트 쇤베르크에게 헌정했고,[6] 이듬해 여러 차례의 리허설을 거쳐 ''달의 피에로(Pierrot lunaire)''의 프랑스 및 영국 초연을 지휘했다.[7] 1922년 미국 여행에서 미요는 할렘 거리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재즈를 들었고,[8] 이는 그의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듬해 그는 재즈의 아이디어와 관용구를 사용하여 6개의 연속적인 춤 장면으로 구성된 발레 ''세계 창조(La création du monde)''를 완성했다.[31]
1925년 미요는 배우이자 낭송가인 사촌 마들렌과 결혼했다. 1930년 그녀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다니엘 미요를 낳았는데, 그가 부부의 외동아들이었다.[9]
2. 5. 재즈의 영향과 빈 방문 (1922-1939)
미요는 1922년 미국에서 재즈를 접했다.[8] 1920년에 『지붕 위의 소』를 지휘하기 위해 런던으로 건너갔을 때, 빌리 아놀드 악단이 연주하는 '댄스 음악'이 아닌 본격적인 재즈를 접하고 그 매력에 눈을 떴다.[30] 1922년에 자작곡 공연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할렘의 재즈와 흑인 음악을 연구하여 그 리듬과 음색을 살린 실내악곡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그 성과가 알토 색소폰을 포함한 17명의 연주자에 의한 『세계의 창조』(1923년, 발레 스웨도와에 의해 초연)이며, 재즈의 어법을 사용한 작품으로는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1924년)보다 빠른 것으로, 이 장르의 성공 사례가 되었다.[31]1922년에는 미국으로의 연주 여행에 이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단절되었던 오스트리아의 음악가들과의 교류를 목적으로, 풀랑크와 함께 빈의 알마 말러의 집을 방문했다. 여기서 아르놀트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 등을 만났다. 알마 말러 부인의 제안에 따라 쇤베르크와 미요가 각각 『달에 홀린 피에로』를 지휘하여, 두 가지 연주를 비교 청취했다.[32]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류머티즘의 진행에 시달리면서도 창작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극음악 외에 영화 음악도 담당했으며,[33] 이다 얀케레비치와 마르셀 메이에르를 위해 작곡한 『스카라무슈』(1937년)는 인기 작품이 되었고, 그 악보는 이례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34]
2. 6. 제2차 세계 대전과 미국 망명 (1940-1945)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미요 부부는 1940년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10] 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미요가 유대인 혈통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해방 전까지는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었다.[11] 그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있는 밀스 칼리지에서 교직을 얻어 오페라 ''볼리바르''(1943)를 작곡하고 앙리 테미앙카 및 파가니니 사중주단과 협력했다. 1949년 그곳에서 열린 특별한 콘서트에서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그의 현악 14중주곡을 연주했고, 이어서 파가니니 사중주단이 그의 15중주곡을 연주했다. 그런 다음 두 앙상블은 두 곡을 함께 8중주로 연주했다.[12] 1950년, 이 곡들은 애스펜 음악제에서 파가니니 사중주단과 줄리어드 현악 사중주단에 의해 연주되었다.[13]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브루벡은 1940년대 후반 밀스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미요의 가장 유명한 제자 중 한 명이 되었다. 2010년 2월 JazzWax와의 인터뷰에서 브루벡은 남성도 대학원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던 여자 대학인 밀스에 미요에게 배우기 위해 특별히 다녔다고 말하며 "미요는 재즈를 사랑하고 자신의 작품에 재즈를 통합한 매우 재능 있는 클래식 작곡가이자 교사였습니다. 제 형 하워드는 그의 조수였고 그의 모든 수업을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14] 브루벡은 그의 첫째 아들 이름을 다리우스로 지었다.
2. 7. 전후 활동과 말년 (1945-1974)
1947년부터 1971년까지 밀스 칼리지와 파리 음악원에서 번갈아 가며 가르쳤는데, 1930년대부터 휠체어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은퇴를 해야 했다.[16] 그는 애스펜 음악제 및 학교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그의 제자로는 윌리엄 볼콤, 스티브 라이히, 캐서린 멀키 워네, 레지나 한센 윌만, 데이브 브루벡 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미국에서도 활동했다.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1920년대 이후에는 류머티즘으로도 고생했다.
작곡 의욕이 왕성하여 다양한 악기 편성을 시도하거나, 탱고나 재즈에도 영향을 받았다. 또한 영화 음악에도 손을 대어, 창작 활동은 사망할 때까지 쇠퇴하지 않았다. 1974년 제네바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엑상프로방스의 생피에르 묘지에 묻혔다.[16]
3. 주요 작품
미요는 매우 다작하는 작곡가였으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작품은 복조성의 사용과 재즈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작품 목록은 443번으로 끝을 맺었다.[38]
미요는 파울 힌데미트, 잔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 헨리 코웰 등과 같이 매우 빠르게 작업하는 작곡가였다. 그의 인기작으로는 《지붕 위의 소》, 《세계의 창조》, 《스카라무슈》, 《브라질 향수》 등이 있다.
1940년, 유대인이었던 미요는 제2차 세계 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했다. 미국에서 캘리포니아주 밀스 칼리지에서 작곡을 가르치면서[35], 여러 교향악단에서 객원 지휘를 했다. 1945년에는 오페라 『볼리바르』를 작곡했다.
전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밀스 칼리지에는 1971년까지 재직하여 1년마다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1971년 밀스 칼리지를 사임하고 제네바에서 살았다. 1974년 6월 22일 제네바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마지막 작품은 목관 오중주였다. 고향 엑상프로방스의 생 피에르 묘지에 매장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12곡의 교향곡, 6곡의 실내 교향곡, 21곡의 현악 사중주(번호 붙은 것 18개, 붙지 않은 것 3개),[37] 5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해 다수의 발레, 오페라, 가곡, 합창곡, 실내악곡, 협주곡, 관현악곡 등이 있다.[38] 관악 합주 분야에서는 「프랑스 모음곡」이 유명하다.
3. 1. 오페라
- 방황하는 양 Op.4 (1910~15/1923년 초연) (3막)[38]
- 오르페우스의 불행 Op.85 (1925/1926년 5월 7일 초연) (3막)[38]
- 카르팡트라의 에스테르 Op.89 (1925) (2막)[38]
- 가련한 선원 (1926)[38]
- 단편 오페라 에우로페의 약탈 Op.94 (1927)[38]
- 버려진 아리아네 (단편 오페라) Op.98 (1927)[38]
- 단편 오페라 해방된 테세우스 Op.99 (1927)[38]
- 크리스토프 콜롬부스 Op.102 (1928/1930년 초연) (2부 27경)[38]
- 막시밀리안 Op.110 (1930/동년 초연) (3막 9경)[38]
- 메데 Op.191 (1938/1939년 초연) (1막)[38]
- 볼리바르(오페라) Op.236 (1943/1950년 초연) (3막)[38]
- 다비드(미요) Op.320 (1954/동년 연주회 형식으로 초연/1955년 무대 초연) (5막 8장)[38]
- 향연 Op.370 (1958/동년 초연) (1막)[38]
- 죄 많은 어머니(오페라) Op.412 (1964/1966년 초연) (3막)[38]
- 프랑스의 왕, 성 루이 Op.434 (1970~71/1971년 초연) (2부)[38]
- 샤브리에의 오페레타 《실패한 교육》을 위한 레치타티보 Op.82[38]
3. 2. 발레
- 지붕 위의 소 Op.58[38] - 전설적인 카바레의 이름을 빌려준 발레로, 미요와 레 식스(Les Six)의 다른 멤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 세계의 창조 Op.81[31] - 재즈의 영향을 받은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솔로 색소폰을 위한 발레이다. 1922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할렘의 재즈와 흑인 음악을 연구하여 그 리듬과 음색을 살린 실내악곡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그 성과가 알토 색소폰을 포함한 17명의 연주자에 의한 『세계의 창조』(1923년, 발레 스웨도와에 의해 초연)이며, 재즈의 어법을 사용한 작품으로는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1924년)보다 빠른 것으로, 이 장르의 성공 사례가 되었다.
- 에펠탑의 신랑신부 Op.70 (합작)
- 잔느의 부채 Op.95 (합작, 폴카만 작곡)
- 샐러드 Op.83
- 푸른 기차 Op.84
- 사랑하는 여인 Op.101
- 꿈 Op.124
- 꽃 피는 중세 Op.152
- 미국 작품 2 Op.219
- 봄의 희롱 Op.243
- 종 Op.259
- 거울 속의 아담 Op.283
- 레몬 따기 Op.298b
- 포도 수확 Op.317
- 바람의 장미 Op.367
- 새들의 가지 Op.374
3. 3. 관현악곡
다리우스 미요는 복조성과 재즈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관현악곡을 작곡했다.[38]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교향곡 1번 Op.210 (1939년 작곡, 1940년 초연)
- 교향곡 2번 Op.247 (1944년 작곡, 1946년 초연)
- 교향곡 3번 "테 데움" Op.271 (1946년 작곡, 1947년 초연, 합창 포함)
- 교향곡 4번 Op.281 (1947년 작곡, 1948년 초연)
- 교향곡 5번 Op.322 (1953년 작곡, 1955년 초연)
- 교향곡 6번 Op.343 (1953년 작곡, 1955년 초연)
- 교향곡 7번 Op.344 (1955년 작곡, 1956년 초연)
- 교향곡 8번 "론 강" Op.362 (1957년)
- 교향곡 9번 Op.380 (1959년 작곡, 1960년 초연)
- 교향곡 10번 Op.382 (1960년 작곡, 1961년 초연)
- 교향곡 11번 "로맨틱" Op.384 (1960년)
- 교향곡 12번 "전원풍" Op.390 (1961년 작곡, 1962년 초연)
- 클로델적 우주를 위한 교향곡 Op.427 (1968년)
- 실내 교향곡 1번 "봄" Op.43 (1917년)
- 실내 교향곡 2번 "파스토랄" Op.49 (1918년)
- 실내 교향곡 3번 "세레나데" Op.71 (1921년)
- 실내 교향곡 4번 Op.74 (1921년)
- 실내 교향곡 5번 Op.75 (1922년)
- 실내 교향곡 6번 Op.79 (1923년 작곡, 1926년 출판)
- 교향 모음곡 1번 Op.12
- 교향 모음곡 2번 Op.57
- 브라질의 향수 Op.67b (전 13곡)
- 프로방스 모음곡 Op.152b
- 새 Op.181
- 프랑스 모음곡 Op.248 (취주악/관현악 편곡)
- 모음곡 '파리' Op.284b
- 신포니에타(소 교향곡) Op.363
- 극음악 '사울'에서 편곡한 극장의 음악 Op.334b (취주악)
특히, 관악 합주 분야에서는 학생 관악단 연주를 상정하고 작곡된 프랑스 모음곡이 유명하며, 기술적인 난이도가 높지 않아 친근하다.
3. 4. 협주곡
다리우스 미요는 많은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38]작품 번호 | 작품명 |
---|---|
127 | 피아노 협주곡 1번 |
225 | 피아노 협주곡 2번 |
270 | 피아노 협주곡 3번 |
295 | 피아노 협주곡 4번 |
346 | 피아노 협주곡 5번 |
13 | 카마르그의 노래에 의한 시곡 |
61 | 발라드 |
63 | 5개의 연습곡 |
83b | 엑스의 사육제 |
188 | 전원의 환상곡 |
278a | 협주적 모음곡 |
228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
300 | 두 대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
93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
263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
373 | 바이올린 협주곡 3번 "국왕의 콘서트" |
58b | 시네마 판타지 |
135 | 봄의 콘체르티노 |
234b | 3부 모음곡 |
108 | 비올라 협주곡 1번 |
340 | 비올라 협주곡 2번 |
242 | 소나타 아리아 |
311 | 여름의 콘체르티노 |
136 | 첼로 협주곡 1번 |
225 | 첼로 협주곡 2번 |
332 | 피에몬테 지방 민요에 의한 북 이탈리아 모음곡 |
109 | 타악기,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
197 | 플루트, 바이올린,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
230 | 클라리넷 협주곡 |
278 | 마림바, 비브라폰,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
323 | 하프 협주곡 |
365 | 오보에 협주곡 |
376 | 협주 교향곡 |
407 | 클라브생 협주곡 |
309 | 가을의 콘체르티노 |
414 | 보스턴 시를 위한 음악 |
165c | 스카라무슈 (색소폰과 관현악) |
165d | 스카라무슈 (클라리넷과 관현악) |
234 | 영국 모음곡 |
327 | 겨울의 콘체르티노 (트롬본과 관현악) |
430 | 스탠퍼드 세레나데 |
관악 합주 분야에서는 「프랑스 모음곡」이 유명하다. 이 곡은 학생 관악단의 연주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친근하고 기술적인 난이도가 높지 않다.
3. 5. 실내악
다리우스 미요는 많은 실내악 작품을 남겼다.[38] 주요 실내악 작품으로는 목관 5중주 《르네 왕의 굴뚝 작품번호 205》, 오보에·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를 위한 《야곱의 꿈 작품번호 294》 등이 있다. 미요는 21곡의 현악 사중주(번호 붙은 것 18개, 붙지 않은 것 3개)를 작곡했다.[37]- 현악 사중주 1번 작품 5 (1912)
- 현악 사중주 2번 작품 16 (1914~15)
- 현악 사중주 3번 작품 32 (1916)
- 현악 사중주 4번 작품 46 (1918)
- 현악 사중주 5번 작품 64 (1920~21)
- 현악 사중주 6번 작품 77 (1922)
- 현악 사중주 7번 작품 87 (1925)
- 현악 사중주 8번 작품 121 (1932)
- 현악 사중주 9번 작품 140 (1935)
- 현악 사중주 10번 작품 218 (1940)
- 현악 사중주 11번 작품 232 (1942)
- 현악 사중주 12번 작품 252 (1945)
- 현악 사중주 13번 작품 268 (1946)
- 현악 팔중주 작품 291 (1948~49) (현악 사중주 14번, 15번을 함께 연주)
- 현악 사중주 14번 작품 291-1
- 현악 사중주 15번 작품 291-2
- 현악 사중주 16번 작품 303 (1950)
- 현악 사중주 17번 작품 307 (1950)
- 현악 사중주 18번 작품 308 (1951)
- 시바의 여왕 작품 207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추모 작품 435
- 에튀드 작품 442
- 바이올린 소나타 1번 Op.3
- 바이올린 소나타 2번 Op.40
- 야곱의 꿈 Op.294 (오보에,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Op.47
- 피아노,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위한 모음곡 Op.157b
- 모음곡 "르네 왕의 벽난로" Op.205 (목관 오중주)
-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 Op.76
-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 Op.100
- 봄 Op.18 (바이올린)
- 엘레지 Op.251 (비올라)
- 네 개의 얼굴 Op.238 (비올라)
- 즉흥곡 Op.91
- 세고비아나 Op.366 (기타)
- 두 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3. 6. 피아노
다리우스 미요는 피아노를 위한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피아노 이중주곡 《스카라무슈 작품번호 165b》와 피아노곡 《브라질 향수 작품번호 67》은 특히 유명하다.[38] 5개의 피아노 협주곡[37]도 작곡했다. 주요 피아노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제목 | 작품 번호 | 비고 |
---|---|---|
피아노 협주곡 1번 | 127 | |
피아노 협주곡 2번 | 225 | |
피아노 협주곡 3번 | 270 | |
피아노 협주곡 4번 | 295 | |
피아노 협주곡 5번 | 346 | |
카마르그의 노래에 의한 시곡 | 13 | |
발라드 | 61 | |
5개의 연습곡 | 63 | |
엑스의 사육제 | 83b | |
전원의 환상곡 | 188 | |
협주적 모음곡 | 278a |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 228 | |
두 대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 300 | |
피아노 소나타 1번 | 33 | |
피아노 소나타 2번 | 293 | |
모음곡 「봄」 제1집 | 25 | |
모음곡 「봄」 제2집 | 66 | |
명상 | 277 | |
세계 관광 여행자 | 358 | |
인생의 기쁨 - 와토를 기리며 | 360 | |
스카라무슈 | 165b | 두 대의 피아노 |
부드러운 캐러멜 | 68 | |
오르간 소나타 | 112 | 1931년 |
파스토랄 | 229 | 1941년 |
9개의 전주곡 | 231b | 1942년 |
소조곡 | 348 | 1955년, 전 3곡 |
3. 7. 영화 음악
미요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류머티즘의 진행에 시달리면서도 창작을 계속하며 극음악 외에 영화 음악도 담당했다.[33]다음은 미요가 작업한 영화 음악 목록이다.
연도 | 제목 | 원제 | 비고 |
---|---|---|---|
1915 | 사랑받는 방랑자 | The Beloved Vagabond | |
1924 | 인휴메인 | 'LInhumaine'' | |
1933 | 빵 없는 땅 | Land Without Bread | |
1934 | 타르타랭 드 타라스콩 | Tartarin of Tarascon | |
1934 | 마담 보바리 | Madame Bovary | |
1936 | 사랑받는 방랑자 | The Beloved Vagabond | |
1937 | 침묵의 성채 | The Citadel of Silence | |
1938 | 라스푸틴 | Rasputin | |
1938 | 몰레나르 | Mollenard | |
1939 | 시장의 딜레마 | 'The Mayors Dilemma'' | |
1945 | 희망: 테루엘 산맥 | Espoir: Sierra de Teruel | |
1947 | 벨 아미의 은밀한 사생활 | The Private Affairs of Bel Ami | |
1947 | 돈으로 살 수 있는 꿈 | Dreams That Money Can Buy | |
1969 | {{lang|fr|Dieu a choisi Paris|}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