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쓰나무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테 쓰나무라는 다테 쓰나무네의 장남으로, 1659년에 태어났다. 2세에 가문을 상속받아 다테 소동을 겪었지만, 어린 나이 덕분에 가문은 존속되었다. 13세에 정무를 시작하여 방풍림 설치, 운하 개발 등 치적을 남겼으며, 유학을 장려하고 사찰 건립에도 힘썼다. 그러나 개혁은 번 재정을 압박하여 재정이 악화되었고, 가신단의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겐로쿠 아코 사건 당시에는 아코 의사들의 통행을 저지했으며, 1729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19년 사망 - 파루크시야르
파루크시야르는 1713년부터 1719년까지 무굴 제국의 황제였으며, 사이이드 형제의 지원으로 황제가 되었으나, 그의 통치 기간은 반란과 내부 갈등, 그리고 제국 쇠퇴를 가속화시킨 정책 결정으로 특징지어진다. - 1719년 사망 - 조지프 애디슨
조지프 애디슨은 18세기 영국의 수필가, 극작가, 정치가로서, 《태틀러》와 《스펙테이터》를 창간하여 영국 수필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으며, 《카토》 등의 희곡을 발표한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 센다이번주 - 다테 마사무네
다테 마사무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다이묘이며 센다이 번의 초대 번주로, '독안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오슈 지역을 장악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속, 임진왜란과 오사카 전투에 참전, 센다이 번 건설과 스페인과의 통상 추진, 문화 예술에도 힘썼다. - 센다이번주 - 다테 나리쿠니
에도 시대 센다이 번의 12대 번주인 다테 나리쿠니는 이달 가문 양자로서 번주가 되어 기근 대비 정책과 번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잦은 재해와 사치스러운 생활로 비판받았으며, 학문과 문학 장려로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659년 출생 - 희빈 장씨
희빈 장씨는 조선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로, 뛰어난 미모와 숙종 시대의 당쟁 속에서 왕비까지 올랐으나,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1659년 출생 - 민진후
민진후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민생 안정에 힘썼으며, 소론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다가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종 묘정에 배향되고 충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다테 쓰나무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다테 쓰나무라 |
일본어 이름 | 伊達綱村 |
로마자 표기 | Date Tsunamura |
출생 | 1659년 4월 29일 |
사망 | 1719년 8월 5일 |
묘소 | 미야기현센다이시다이넨지 산 다테 가문 묘소 무진등묘 |
향년 | 60세 |
다른 이름 | 가메치요마루 (유명) 쓰나모토 쓰나무라 소지로 |
시호 | 다이넨지덴 고잔젠다이 대거사 |
신호 | 해당 정보 없음 |
계명 | 해당 정보 없음 |
관직 | |
관위 | 종4위좌근위권중장, 무쓰노카미, 증종3위 |
가문 | |
씨족 | 다테 씨 |
가신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도쿠가와 쓰나요시 |
센다이 번주 | |
번 | 무쓰국센다이 번 |
대수 | 4대 |
재임 기간 | 1660년 ~ 1703년 |
이전 번주 | 다테 쓰나무네 |
다음 번주 | 다테 요시무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다테 쓰나무네 |
어머니 | 미사와 하쓰코 |
배우자 | 만수사전 (이나바 마사노리의 딸) |
자녀 | 센치요 사카에히메 하쿠히메 |
양자 | 다테 요시무라 기라히메 다테 쓰나무네 딸 |
형제자매 | 다테 쓰나무라 다테 무라카즈 다테 무네치카 나쓰히메 다테 무라나오 루이히메 미히메 센히메 지에히메 기라히메 나레히메 기쿠노조 무스히메 기치주로 유후히메 다케히메 |
2. 생애
다테 쓰나무네의 맏아들이자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쓰나무라는 2세의 어린 나이에 다이묘가 되었다. 아버지 쓰나무네가 삼촌인 이치노세키 번의 다테 무네카쓰와 이와누마 번의 다무라 무네요시 등의 정치적 조작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1] 1660년부터 1671년까지 두 삼촌은 어린 쓰나무라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며 권력을 찬탈했고, 탐욕, 부패, 무능한 통치로 악명이 높았다. 번은 끊임없는 농민 반란에 시달렸고, 쓰나무라는 여러 번 삼촌들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피했다.
이러한 사건은 ''다테 소동''으로 절정에 달했고, 분라쿠와 가부키를 포함한 대중 소설의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다테 가문의 방계 친척이자 다테 쓰나무네의 가신인 아키 무네시게는 번의 부정을 막기 위해 쇼군 관료에게 민원을 제기했다. 로주 의회와 타이로 사카이 타다키요 앞에 소환되어 증언을 하는 과정에서, 아키 무네시게는 하라다 무네스케에게 살해되었고, 하라다 무네스케는 경비병에게 살해되었다. 법원은 아키의 편을 들었고, 쓰나무라는 다이묘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의 삼촌 무네카쓰와 무네요시는 해임되었다.[2]
쓰나무라는 실제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자, 방풍림과 관개 시설 및 강의 홍수 통제 시설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또한 유교 연구를 강조하여 여러 유명 학자들을 센다이로 데려왔고, 수많은 불교 사찰과 신사 건설을 후원했다. 1689년부터 1690년까지 그는 히코네 번의 이 나오오키와 함께 닛코 도쇼구의 수리를 지원했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그는 훌륭한 통치자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이러한 공공 사업과 사찰 건립의 재정적 부담으로 번은 부채에 시달렸다. 1683년, 번은 지폐를 발행했지만, 만연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번의 화폐는 환영받지 못했다. 1693년, 그의 고위 가신들은 참지 못하고, 고위 가문을 통해 쓰나무라에게 폭정에 의한 통치를 경고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쓰나무라는 분노하며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1697년 가을, 그가 자발적으로 사임할 기미가 보이자 가신들은 그를 강제로 은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다.
쓰나무라는 1703년까지 재임했고, 아내(이나바 마사노리의 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촌 다테 요시무라에게 양위했다. 171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다테 가문 묘소가 아닌 센다이의 다이넨지야마에 있다. 1924년에 그는 사후에 정3위로 추서되었다.[2]
2. 1. 어린 시절과 다테 소동
다테 쓰나무네의 맏아들이자 첩의 자식으로, 어린 시절 이름은 가메치요마루(亀千代丸)였다. 나중에 다테 쓰나모토(伊達綱基)로 불렸지만,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주관한 겐푸쿠 의식에서 다테 쓰나무라로 이름을 바꾸었다.[1] 만지 2년 3월 8일 (1659년4월 29일) 다테 마사무네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사와 키요나가의 딸인 하츠코였다. 원복할 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편휘를 받아 처음에는 쓰나모토(綱基), 이후 쓰나무라(綱村)라고 칭했다.[5]2세의 나이에 다이묘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삼촌인 이치노세키 번의 다테 무네카쓰와 이와누마 번의 다무라 무네요시의 정치적 조작으로 인해 아버지가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1] 만지 3년(1660년) 7월, 다테 무네카쓰(무츠이치노세키번주)의 정치 간섭이나 가신단의 대립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아버지가 은거하게 되었고, 불과 2세(만 1세 4개월)의 나이로 가문을 상속했다. 다테 무네카쓰와 다무라 무네요시 등이 후견인이 되었지만, 가신 내에서는 아버지 시대부터 이어지던 가신들의 대립이나 다테 무네카쓰의 전횡 등이 계속되어 혼란이 이어졌다.
1660년부터 1671년까지 두 삼촌은 어린 쓰나무라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며 권력을 찬탈했고, 탐욕, 부패, 무능한 통치로 악명이 높아졌다. 번은 끊임없는 농민 반란에 시달렸고, 쓰나무라는 여러 번 삼촌들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피했다. 간분 6년(1666년)에는 쓰나무라 자신이 다테 무네카쓰의 측근에 의해 독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간분 11년(1671년)에 다테 소동(간분 사건)이 발발하여 다테 가문은 개역의 위기에 놓였지만, 쓰나무라 자신이 어렸기 때문에 막부의 재판에서는 문책을 받지 않았고, 다테 무네카쓰 등 관계자가 처벌을 받게 되었다.
2. 2. 번주로서의 통치
쓰나무라는 13세에 도미타 시게쓰구의 보좌를 받아 정무를 시작했다. 방풍림을 설치하고 운하를 개발하는 등 치적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1] 유학을 배우고 다수의 학자를 초빙하여 번사 편찬에 힘썼다. 불교에 귀의하여 사찰 건립, 신사 조성에 힘썼으며, 덴나 원년(1681년)에는 하치만구를 현재의 센다이시 아오바구 카와우치 카메오카로 이전하여 새롭게 사전을 조영하고, 덴나 3년(1683년)에 카메오카 하치만구라고 칭했다.[2] 겐로쿠 2년(1689년)부터 겐로쿠 3년(1690년)에 걸쳐 닛코 도쇼구 수복 총봉행이었던 이이 나오오키를 보조하여 도쇼구 수복을 완수했다. 겐로쿠 7년(1694년)에는 무카이야마의 아타고 신사를 개수(혹은 신조)했다. 겐로쿠 8년(1695년)부터는 "겐로쿠의 조영"이라고 불리는 시오가마 신사의 조영을 실시했다(이는 쓰나무라의 은거 후인 호에이 원년(1704년)에 준공되었다). 같은 겐로쿠 8년에는 황벽종의 료소쿠산 다이넨지를 창건했다. 그러나 사찰이나 신사의 조영 등 다양한 개혁을 실시한 것이 오히려 번 재정을 압박하게 되어, 덴나 3년(1683년)에 번찰을 발행했지만, 오히려 물가 상승을 초래하여 센다이 번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2]히라이즈미에 있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관련된 다카다테・요시쓰네당은 덴나 3년(1683년)에 쓰나무라가 건립했다. 교토에 있는 하무로 가문의 보제사・조주지의 방장은 겐로쿠 10년(1697년)에 쓰나무라의 저택을 이전한 것이다.
겐로쿠 6년(1693년), 번주・쓰나무라 중심의 전제 정치에 대해 다테 일족은 반발하여 간언했다. 그 때문에 쓰나무라는 사죄장을 썼다. 겐로쿠 10년(1697년) 가을, 쓰나무라의 정치 자세가 고쳐지지 않아 가신단은 번주 강제 은거를 계획했지만, 친족인 이나바 마사유키(에치고다카다 번주)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겐로쿠 15년(1703년), 겐로쿠 아코 사건에서는 센다이 번 저택 앞에 병사를 대기시켜 의사의 통행을 저지했다.[6] 아코 의사는 다테가[7]의 번저를 통과하지 않는 경로로 센가쿠지로 철수했다.[8]
2. 3. 말년과 사망
다테 쓰나무네의 맏아들이자 첩의 자식이었던 쓰나무라는 1703년까지 다이묘 자리에 있었다. 아내가 이나바 마사노리의 딸이었으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촌 다테 요시무라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쓰나무라는 171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다테 가문 묘소가 아닌 센다이의 다이넨지야마에 있다. 1924년에는 사후 정3위로 추서되었다.[2]
3. 가족 관계
4. 문화 사업과 유산
쓰나무라는 13세에 도미타 시게쓰구의 보좌를 받아 정무를 시작하여 방풍림 설치, 운하 개발 등 치적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유학을 배우고 다수의 학자를 초빙하여 번사 편찬에 힘썼다. 불교에 귀의하여 사찰 건립, 신사 조성에 진력했으며, 덴나 원년(1681년)에는 하치만구를 현재의 센다이시 아오바구 가와우치 카메오카로 이전하여 새롭게 사전을 조영하고, 덴나 3년(1683년)에 카메오카 하치만구라고 칭했다. 겐로쿠 2년(1689년)부터 겐로쿠 3년(1690년)에 걸쳐 닛코 도쇼구 수복 총봉행이었던 이이 나오오키를 보조하여 도쇼구 수복을 완수했다. 겐로쿠 7년(1694년)에는 무카이야마의 아타고 신사를 개수(신조라는 설도 있음)했다. 겐로쿠 8년(1695년)부터는 "겐로쿠의 조영"이라고 불리는 시오가마 신사의 조영을 실시했고(호에이 원년(1704년)에 준공), 같은 해 황벽종의 료소쿠산 다이넨지를 창건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찰, 신사 조영은 번 재정을 압박했고, 이를 해결하고자 덴나 3년(1683년)에 번찰을 발행했지만, 오히려 물가 상승을 초래하여 센다이 번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히라이즈미에 있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관련된 다카다테・요시쓰네당은 덴나 3년(1683년)에 쓰나무라가 건립했다. 교토에 있는 하무로 가문의 보제사・조주지의 방장은 겐로쿠 10년(1697년)에 쓰나무라의 저택을 이전한 것이다.
쓰나무라는 다음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
- 『다테 출자 정통 세차고』
- 『다테 출자 세차고』 - 신대부터 아침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 『다테 정통 세차고』 - 아침종부터 하루무네까지의 역사
- 『다테 치가 기록』
- 『세이잔 공 치가 기록』 - 테루무네의 사적
- 『테이잔 공 치가 기록』 - 마사무네의 사적
- 『기잔 공 치가 기록』 - 타다무네의 사적
겐로쿠 6년(1693년) 다키가미 신사에서 바위 둔덕(게센누마시 모토요시정)의 금 생산을 축하하며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11]
옛날의 일을 본보기 삼아, 누구든 바위 둔덕에서 지금을 봄으로 삼아 황금 꽃이 피네.
참조
[1]
서적
Samurai Warlords
Blandford Press
1989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615–1867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3
[3]
웹사이트
伊達綱村
[4]
웹사이트
「顕彰パネル」贈る 実行委、市内全小中学校へ 塩釜 /宮城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9-02-20
[5]
문서
[6]
기록
伊達治家記録
[7]
문서
[8]
서적
赤穂事件と四十六士 (敗者の日本史)
吉川弘文社
2013
[9]
웹사이트
http://www.toenji.co[...]
[10]
문서
[11]
보고서
嚮館跡ー防災集団移転促進事業・災害公営住宅整備事業(大谷地区)に伴う発掘調査報告書ー
気仙沼市教育委員会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