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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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구향교는 1398년(조선 태조 7년)에 창건되어 현유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여러 차례 이건되었으며, 1932년 현재의 남산동으로 이전되었다.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양사재, 낙육재 등 다양한 건물들이 있으며, 명륜당에서는 현재 고전 강좌와 예절 교육이 이루어지고, 주말에는 전통 혼례가 열린다. 대성전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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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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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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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문화재자료 |
지정 번호 | 1 |
지정 연월일 | 1982년 3월 4일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 |
소유자 | 대구향교재단 |
제작 시기 | 조선 시대 |
비고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향교 |
2. 역사
대구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처음 세워졌다. 창건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소실되는 등 여러 차례의 화재와 이전을 거듭하였다. 선조 대에 달성공원 자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교동으로 돌아왔으며,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현재의 남산동 위치로 이전되었다.[1][2] 해방 이후에는 교육기관 설립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북독립촉진회 결성 장소가 되는 등 지역 사회의 중요한 활동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5]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복원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3]
2. 1. 조선시대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교동에 처음 세워졌다. 창건 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었다. 정종 2년(1400년)에 불타 없어졌으나 곧 다시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향교가 대구부 동쪽 2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2년(1599년)에 달성공원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가, 선조 38년(1605년)에 원래 위치인 교동으로 다시 옮겼다.[1]
선조 37년(1604년), 조정과 사림 사이에서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특히 정인홍 등이 이황이나 이언적과 같은 인물들의 문묘 종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대구향교의 유생들도 모여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조정에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모당집》).
인조 3년(1625년)에는 향교의 명륜당을 중건하였다. 순조 6년(1806년)에는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윤광안(尹光顔)이 그 해 10월 향교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칠곡 출신 유생 이동급(李東汲)의 문집 《만각재집》(晚覺齋集)에 남아 있다.
2. 2. 일제강점기
1932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등 주요 건물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2. 3. 해방 이후
해방 이후인 1945년 대성중학원(이듬해 대성중학교로 승격)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 대구 지역의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결성준비위) 등 6개 정당이 대구향교에 모여 경북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이는 이승만의 주창으로 서울에서 좌우 이념이나 정파를 넘어 결성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강령을 따른 것이었다. 특히 3.1운동 당시 대구 출신의 기독교계 인사이자 민족대표였던 이갑성과, 돈암장을 드나들며 이승만 등 우익 인사들과 교류했던 이경희에 의해 경북 지역에서 비교적 일찍 결성되었다. 촉진회는 1) 독립 촉진을 위한 민족 총단결, 2) 생산 장려를 통한 민중 생활 안정, 3) 계몽운동을 통한 민도 향상, 4) 일본 제국주의 잔재 청산 등의 행동 강령을 내세웠으며, 대구의 일부 좌파 세력도 경북독립촉진회에 참여하였다.[5]대성중학원은 이후 1947년에 대구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명륜당에 개설하였고, 1948년에는 대구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94호에 따라 재단법인 경상북도 향교재단 설립이 인가되었다.
1974년에는 명륜당과 삼문, 사무실이 중건되었고, 1981년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재단법인 대구직할시 향교재단 설립이 인가되었다. 1990년에는 동·서재와 낙육재가 복원되었으며, 1995년에는 유림회관이 신축되었다.
3. 주요 건물
대구향교에는 유교 성현을 모시는 대성전과 학문을 강론하던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東齋), 서재(西齋), 양사재, 낙육재, 문묘, 삼문 등 여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4] 또한, 향교 경내에는 대구성의 축성과 유래를 기록한 비석, 수성비, 그리고 역대 관찰사, 판관, 군수 등의 공적을 기리는 불망비(不忘碑)와 송덕비 등 여러 석비가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3. 1. 대성전 (大成殿)
대구향교의 주요 건물 중 하나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4] 대성전 내부에는 5성(五聖),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그리고 한국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원래 대구향교는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였으나, 1931년 향교를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대성전이 왼쪽에, 명륜당이 오른쪽에 위치하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로 바뀌었다. 현재 대성전은 북쪽에 자리 잡고 넓은 뜰을 향하고 있다.[4]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는 석전대제가 이곳에서 거행된다. 석전대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과 대구의 유명한 유학자들을 기리는 제사 의례이다.[4]
3. 2. 명륜당 (明倫堂)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성전과 같은 시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향교 내에서 대성전과 함께 중요한 기본 건물로 여겨진다. 이곳은 대구 지역의 유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도덕을 수양하던 장소였다.
원래 교동에 있을 당시 대구향교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이 뒤에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 배치를 따랐다. 이는 경주향교나 경산향교와 유사한 형태이다. 그러나 1931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대성전 옆에 명륜당이 자리하는 좌묘우학(左廟右學)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는 성주향교와 비슷한 배치이다. 건물이 오래되어 낡자 1974년에 콘크리트 구조에 기와를 얹어 새로 지었다.

명륜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왼쪽에 있는 건물이 동재(東齋),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서재(西齋)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정면 양쪽 끝 칸에는 창문이 있고 가운데에는 문이 있다. 동재와 서재는 명륜당에 부속된 건물로, 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처음 향교를 지을 때 함께 세워졌으나, 1932년 향교 이전 후에는 다시 짓지 못했다가 1990년 낙육재를 지으면서 함께 다시 세웠다.
명륜당과 동서재 사이의 공간에서는 한문이나 고전 강독, 한시 경연대회 등이 열리며, 전통 혼례와 같은 가정의례도 치러진다. 명륜당에서 동서재 쪽으로 나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옆문 앞에는 높이 2.53m의 공자상이 향교 외삼문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 공자상은 1997년 중국 산둥성 칭다오시가 대구광역시와의 자매결연 5주년을 기념하여 백옥으로 만들어 기증한 것이다.
현재 명륜당은 고전 한자와 전통 한국 예절에 대한 강의와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로 사용되고 있다.[1] 주말과 공휴일에는 단지 내 정원에서 전통 한국 결혼식이 열린다.[1]
3. 3. 동·서재 (東·西齋)
명륜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왼편에 있는 것이 동재(東齋), 오른편에 있는 것이 서재(西齋)이다. 동서재는 앞 4칸, 옆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좌우 한 칸씩 창문이 있고 가운데에 문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로 위치한 재(齋)는 명륜당의 부속 건물로서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원래 향교를 건축할 때 함께 세워졌으나, 1932년에 향교가 현재 위치로 이건된 뒤에는 다시 건립되지 못했다. 이후 1990년에 낙육재(樂育齋)를 지으면서 동서재 또한 함께 재건하였다. 명륜당과 동서재 사이의 공간은 향교에서 여는 한문이나 고전 강독, 한시 경연대회 및 전통혼례와 같은 가정의례가 열리는 장소로 활용된다.
명륜당에서 동서재로 나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옆문 앞에는 2.53m 높이의 공자상이 향교 외삼문을 마주보고 세워져 있다. 이 공자상은 1997년 중국 산둥성(山東省) 칭다오시(靑島市)에서 대구광역시와의 자매결연 5주년을 기념하여 백옥(白玉)으로 제작해 기증한 것이다.
3. 4. 양사재 (養士齋)

영조 43년(1766년)에 대구 판관 김노에 의해 건립되었다. 당시 관찰사였던 김응순과 김노 자신이 쓴 기문이 남아 있다. 향교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고을 내의 유생들을 뽑아 이곳에 머물게 하며 학문을 강의하였고, 향시가 열릴 때마다 시험장으로 사용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교동 지역, 향교 구역 내의 동신문 밖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91년 12월 28일, 현재의 자리에 상층 32평, 하층 36평 규모로 재건되었다. 지상으로 드러난 양사재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형태이며 내부는 하나의 큰 공간(통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양사재의 아래층은 대구향교 소속 여성유도회와 여성예학연구원의 교육 장소로 쓰이고 있다.
3. 5. 낙육재 (樂育齋)

경종 원년(1721년)에 경상감사 조태억(趙泰億)이 대구읍성 남문 밖에 세웠다. 이곳은 경상도 지역의 유생들을 선발하여 기숙시키며 독서와 학문 연구를 지원하던 곳이었다. 건립 당시 낙육재는 대구향교와는 별개의 독립된 건물이었다. 독서, 시 짓기(詩賦), 연구 등의 기능을 갖춘 교육기관이었지만, 향교와 달리 문묘(文廟)나 사당(祀廟)을 따로 두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고종 광무 10년(1906년)에 통감부에 의해 철폐되었다. 이후 1990년 10월 7일, 대구시 보조금과 대구향교재단의 자체 자금으로 현재의 향교 내 양사재 옆자리에 재건되었다. 재건된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내부는 하나의 큰 공간(통칸)으로 되어 있다.
낙육재가 철폐될 당시 남은 재산은 협성학교 설립에 사용되었고, 소장하고 있던 장서(총 764책)는 현재 대구향교와 구 대구부립도서관을 거쳐 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도서관 고문헌 보관실의 이름도 낙육재에서 유래했다.
3. 6. 기타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東齋), 서재(西齋), 문묘, 삼문 등이 있으며, 향교 내에는 대구성(大邱城)의 축성 및 유래를 기록한 축성비와 수성비, 경상도관찰사, 판관, 군수 등을 지냈던 사람들의 불망비(不忘碑), 송덕비 등이 옮겨져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한국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
대성전은 대구향교대성전 문서 참고.
; 명륜당(明倫堂) · 동서재(齋)
명륜당은 앞 5칸, 옆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성전과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으며, 향교 안에서 대성전과 나란히 꼽히는 기본 건물로서 대구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도의를 닦던 곳이다. 교동에서 이건되기 직전의 대구향교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이 뒤에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경주향교(慶州鄕校)나 경산향교(慶山鄕校)와 유사하다. 그러나 1932년에 향교가 이건된 뒤에는 성주향교(星州鄕校)와 같이 대성전 옆에 명륜당이 위치하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이 노후되자 1974년 콘크리트 와즙으로 중건하였다.
명륜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왼편에 있는 것이 동재, 오른편에 있는 것이 서재이다. 동서재는 앞 4칸, 옆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좌우 한 칸씩 창문이 있고 가운데에 문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로 위치한 재는 명륜당의 부속 건물로서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원래 향교를 건축할 때 함께 세워졌으나 1932년에 향교가 이건된 뒤 다시 건립되지 못했다. 이후 1990년에 낙육재를 지으면서 동서재 또한 함께 재건하였다. 명륜당과 동서재 사이의 공간은 향교에서 여는 한문이나 고전 강독, 한시 경연대회 및 전통혼례와 같은 가정의례가 벌어지는 곳이다. 명륜당에서 동서재로 나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옆문 앞에는 2.53m의 공자상이 향교 외삼문을 마주보고 세워져 있다. 이 공자상은 1997년 중국 산둥성(山東省) 칭다오시(靑島市)에서 대구광역시와의 자매결연 5주년을 기념해 백옥(白玉)으로 제작하여 기증한 것이다.
; 양사재(養士齋)
영조(英祖) 43년(1766년)에 대구 판관 김노(金魯)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관찰사 김응순(金應淳)과 김노 자신이 쓴 기문이 남아 있다. 향교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고을 내의 유생들을 뽑아 기숙하게 하면서 이곳에서 학문을 강의하였고, 향시(鄕試) 때마다 시험장으로 사용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교동, 향교 구역 내의 동신문(東神門) 밖에 있었다고 한다. 1991년 12월 28일, 현재의 자리에 상층 32평, 하층 36평 규모로 재건되었다. 지상으로 드러난 양사재 건물은 앞 5칸에 옆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는 통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양사재 하층은 대구향교 소속 여성유도회와 여성예학연구원의 교육도장으로 쓰이고 있다.
; 낙육재(樂育齋)
경종(景宗) 원년(1721년)에 경상감사 조태억(趙泰億)이 대구읍성의 남문 밖에 세웠다. 경상도 지역의 유생들을 뽑아 기숙시키며 독서 및 학문 연구를 지원하였다. 건립 당시 낙육재는 대구향교와는 독립된 건축이었다. 독서와 시부(詩賦)의 제술, 연구 등의 기능이 있었던 교육기관임에도 향교와는 달리 문묘(文廟)나 사묘(祀廟)를 따로 두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다. 고종(高宗) 광무(光武) 10년(1906년) 통감부에 의해 철폐되었으며, 1990년 10월 7일에 대구시 보조금 및 대구향교재단의 자체자금으로 향교 내 양사재 옆에 재건되었다. 앞 5칸, 옆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은 통칸으로 되어 있다. 낙육재가 철폐될 당시 낙육재의 재산은 협성학교 설립에 쓰였고, 소장되어 있던 장서(전 764책)는 현재 대구향교와 대구부립도서관을 거쳐 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당 도서관의 고문헌 보관실 명칭은 낙육재에서 유래한 것이다.
4. 현재의 활용
명륜당은 현재 고전 한자와 전통 한국 예절에 대한 강의와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로 사용되고 있다. 주말과 공휴일에는 경내 정원에서 전통혼례가 열린다.[1]
대성전은 대구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2]
참조
[1]
웹사이트
Daegu Hyanggyo Confucian Academy Daegu Daegu' Daegu Hyanggyo Confucian Academy Daegu Hyanggyo Confucian Academy in Daegu Daegu Hyanggyo Confucian Academy at Daegu Sightseeing in Daegu Tourist Attractions in Daegu South Korea
http://www.asiarooms[...]
2012-01-07
[2]
웹사이트
▒▒▒ eGovFrame Potal 온라인 지원 포탈 ▒▒▒
http://english.daegu[...]
[3]
웹사이트
Asian Historical Architecture: A Photographic Survey
http://www.orientala[...]
[4]
웹사이트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the KNU Times
http://www.knutimes.[...]
2012-01-07
[5]
서적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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