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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나가 나가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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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나가 나가마사는 1549년 오미 국에서 태어나, 시바타 가쓰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무장이다.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히데요시의 직신이 되었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다. 히데쓰구의 가로로서 3만 석 영지를 받았으며, 임진왜란 종결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속해 활약하여 미노 국에서 영지를 받았고, 다카스 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 1612년 다카스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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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나가 나가마사
기본 정보
씨명도쿠나가 씨 (후지와라 씨 서류)
이름도쿠나가 나가마사
이명마사토키
가명 (통칭)곤노스케
관직시모사노카미, 이와미노카미, 시키부쿄호인
계명고토쿠인덴 게이곤 주쇼 다이코지
묘소고토쿠지 (기후현가이즈시가이즈초 다카스)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생년덴분 18년 (1549년)
몰년게이초 17년 7월 10일 (1612년8월 6일)
정치 경력
막부에도 막부
주군시바타 가쓰토요 →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쓰구 →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미노다카스 번 번주
가족 관계
아버지도쿠나가 마사토시 (도사노카미)
배우자정실: 미카미 씨
자녀마사시게, 마사나리, 마사즈미, 마사아키라
마쓰다이라 야스시게 계실

2. 생애

덴분 18년(1549년), 오미 국 도쿠나가 촌에서 태어났다.[1] 처음에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 시바타 가쓰토요를 섬겼으나,[1][2]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의 직속 가신이 되었다.[2] 이후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부가로(付家老)를 지내기도 했으며,[2][1] 히데쓰구 사후 다시 히데요시를 섬겼다.[2]

임진왜란 중에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위문했으며,[3]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의 명으로 미야기 도요모리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어 철군 교섭을 담당했다.[6][2]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7] 전후 그 공으로 다카스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7] 게이초 17년(1612년) 7월 10일, 다카스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덴분 18년(1549년), 오미 국 도쿠나가 촌에서 도쿠나가 마사토시의 아들로 태어났다.[1]

처음에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인 시바타 가쓰토요를 섬겼다.[1][2] 덴쇼 11년(1583년), 시바타 씨와 하시바 씨가 다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직전에 오미 나가하마 성을 가지고 가쓰토요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하시바 측이 되었다. 그러나 가쓰토요의 병 치료를 따라 상경했기 때문에 전투 자체에는 참가하지 않았다.[2] 가쓰토요가 병사한 후에는 히데요시의 직신이 되었다.[2]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미노 오와리 진격에 종군했다.[2]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에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부 가로가 되어, 오와리 국 니와 군과 미노 국 마쓰키 섬에 2만 석을 받고, 미노 다카마쓰 성(마쓰노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2][1] 이어서 미노에서 1만 석을 가증받아, 총 3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2][1] 히데쓰구 영지의, 오미 노토가와의 용수 시설을 정비한 기록이 남아 있다.

분로쿠 2년(1593년) 8월 25일,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 경상도 김해로 가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주둔을 위로했다.[3]

분로쿠 4년(1595년) 4월 12일, 히데쓰구가 쥬쇼(나가마사)의 교토 저택에 묵었다.[4] 같은 해 7월, 히데쓰구 할복 사건에는 연좌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히데쓰구의 죄상을 나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쥬쇼는 다시 히데요시를 섬겼다.[2]

2. 2. 도요토미 가문 가신 시대

처음에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인 시바타 가쓰토요를 섬겼다.[1][2] 1583년(덴쇼 11년), 시바타 씨와 하시바 씨가 다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전투 직전에 오미 나가하마 성을 가지고 가쓰토요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하시바 측이 되었다. 하지만 가쓰토요의 병 치료를 따라 교토로 상경했기 때문에 전투 자체에는 참가하지 않았다.[2] 가쓰토요가 병사한 후에는 히데요시의 직신이 되었다.[2]

1584년(덴쇼 12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미노, 오와리 진격에 종군했다.[2]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에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부가로(付家老)가 되어, 오와리 국 니와 군과 미노 국 마쓰키시마(松木島)에 2만 석을 받고, 미노 다카마쓰 성(마쓰노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2][1] 이어서 미노에서 1만 석을 추가로 받아, 총 3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2][1] 히데쓰구 영지 내 오미 노토가와의 용수 시설을 정비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93년(분로쿠 2년) 8월 25일,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 경상도 김해로 가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주둔 상황을 살폈다.[3]

1595년(분로쿠 4년) 4월 12일, 히데쓰구가 나가마사의 교토 저택에 묵었다.[4]

같은 해 7월, 히데쓰구 할복 사건에는 연좌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히데쓰구의 죄상을 나열했다고 전해진다.

『다이코키』에 따르면, 히데쓰구 처형 후, 단바 국 가메야마 성에 연금되어 있던 히데쓰구의 처자는 7월 29일, 나가마사의 교토 저택으로 옮겨졌다가 8월 2일 처형장으로 보내졌다.[5] 그 후 나가마사는 다시 히데요시를 섬겼다.[2]

1598년(게이초 3년) 8월 18일에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25일, 오대로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나가마사와 미야기 도요모리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은 정유재란을 위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들과 협의하여 명나라와 강화하고, 전군을 무사히 철수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6][2] 귀국 후, 히데요시의 유물인 깃코(吉光)의 칼을 받았다.[2]

1599년(게이초 4년), 이에야스가 후시미 무카이시마 성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이 나오마사·혼다 타다카쓰·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과 함께 다리 앞을 경호했다.[7] 8월에는 나오마사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다른 마음이 없음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하고, 이에야스의 대리인으로부터 회신을 받았다.[7]

1600년(게이초 5년), 아이즈 정벌에 종군하였다.[7]

2. 3. 임진왜란 종결과 도쿠가와 가문

게이초 3년(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8월 25일 고다이로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나가마사와 미야기 도요모리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은 임진왜란(게이초의 역)을 위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여러 장수들과 협의하여 명나라와 강화를 맺고,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는 임무를 맡았다.[6][2] 나가마사는 이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한 후, 히데요시의 유품인 깃코(亀甲) 문양의 칼을 받았다.[2]

게이초 4년(1599년), 이에야스가 후시미의 무카이시마 성으로 거처를 옮기자, 나가마사는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과 함께 다리 앞을 경호했다.[7] 같은 해 8월, 이이 나오마사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다른 마음이 없음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하고 답신을 받았다.[7]

게이초 5년(1600년), 아이즈 정벌에 참전했다.[7] 이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했으며, 이에야스로부터 가네모리 나가치카와 함께 먼저 서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사문자(左文字) 나기나타를 하사받았다.[7] 나가마사는 장남 도쿠나가 마사시게를 이에야스 곁에 남겨두고 출발했다. 무사시 국 아쓰기(厚木)에 머물던 중, 이에야스의 사자 오쿠다이라 사다하루로부터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 측에 처자식을 인질로 잡힌 다이묘는 진퇴를 자유롭게 해도 좋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에 감격한 나가마사는 선봉에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고, 차남 도쿠나가 마사나리를 영지에서 불러 미카와 국 요시다 성의 이케다 데루마사에게 인질로 보냈다.[7]

같은 해 8월 17일, 나가마사는 동군 소속의 이마오 성 성주 이치하시 나가카쓰, 아카메 성 성주 요코이 도키야스와 함께 서군 측 마루모 가네토시의 거점인 후쿠쓰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2] 가네토시는 오가키 성으로 도주했다.[8] 19일에는 서군 다카기 모리카네의 거점인 다카스 성을 계략을 써서 함락시키고 그곳에 주둔했다.[8] 23일, 동군의 군감(軍監)인 이이 나오마사와 혼다 타다카쓰는 나가마사, 이치하시 나가카쓰, 요코이 도키야스, 다카기 사다토모[9] 등에게 미노 국 타기 군 고마노 성(駒野城)에 주둔한 서군 이케다 히데우지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10] 히데우지는 성을 지키며 농성했으나, 나가마사 등이 성을 포위 공격하여 세키가하라 본 전투가 끝난 후인 9월 16일에 항복을 받아냈다.[11] 또한, 나가마사는 오쓰 성에서 농성 중이던 동군 소속 교고쿠 다카쓰구에게 삼남 도쿠나가 마사스미를 보내 오미 국 이바(饗庭)에서 배를 이용해 조총 탄약을 세 차례 보급했다.[7]

세키가하라 전투 후, 나가마사는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이이 나오마사, 혼다 마사노부 등과 함께 전투에서 활약한 여러 다이묘들의 공적을 조사하는 역할을 맡았다.[7]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노 국에서 2만 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고, 이후 오와리 국으로 영지를 옮겨 미노 국의 타기 군, 후와 군, 이시즈 군과 오와리 국의 가이사이 군 등 4개 군에 걸쳐 총 5만 600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7] 이때 거성을 다카스 성으로 옮겨 다카스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게이초 17년(1612년) 7월 10일, 다카스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였다. 장남 도쿠나가 마사시게가 뒤를 이었다.

2. 4. 세키가하라 전투와 다카스 번

게이초 4년(1599년), 이에야스가 후시미 무카이시마 성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이 나오마사,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과 함께 다리 앞을 경호했다.[7] 같은 해 8월에는 이이 나오마사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하고 답신을 받았다.[7]

게이초 5년(1600년)에는 아이즈 정벌에 이에야스를 따라 종군했다.[7] 이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했으며, 이에야스로부터 가나모리 나가치카와 함께 선발대로 서쪽으로 향하라는 명령과 함께 사문자(左文字) 나기나타를 하사받았다.[7] 나가마사는 장남 마사시게를 이에야스 곁에 남겨두고 출진했으나, 무사시 국 아쓰기(厚木)의 숙소에서 이에야스의 사자 오쿠다이라 사다하루가 와서 미쓰나리 측에게 오사카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힌 다이묘는 진퇴를 자유롭게 결정해도 좋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에 감격한 나가마사는 선봉에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고, 추가로 차남 마사나리를 영지에서 불러 미카와 국 요시다 성의 이케다 데루마사에게 인질로 보냈다.[7]

8월 17일, 미노 국에서 동군 소속인 이마오 성의 이치하시 나가카쓰, 아카메 성의 요코이 도키야스와 함께 서군 마루모 가네토시의 거점인 후쿠쓰카 성을 공략했다.[2] 가네토시는 오가키 성으로 패주했다.[8] 19일에는 서군 다카기 모리카네의 거점인 다카스 성을 계략을 써서 함락시키고, 나가마사가 직접 성에 주둔했다.[8] 8월 23일, 동군의 군감(軍監) 이이 나오마사혼다 다다카쓰는 나가마사, 이치하시 나가카쓰, 요코이 도키야스, 다카기 사다토모[9] 등에게 미노 다기 군 고마노 성(駒野城)에 주둔한 서군 이케다 히데우지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10] 히데우지는 성에 틀어박혀 저항했으나, 나가마사 등이 성을 포위했고, 세키가하라 본 전투가 끝난 후인 9월 16일에 항복을 받아냈다.[11] 또한 오쓰 성에서 농성하던 동군 교고쿠 다카쓰구를 지원하기 위해 삼남 마사스미를 파견하여, 오미 국 이바(饗庭)에서 배를 이용해 조총 탄약을 세 차례 보급했다.[7]

전투 후에는 이에야스의 가신인 이이 나오마사, 혼다 마사노부 등과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활약한 여러 다이묘들의 공적을 평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7]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노 국에서 2만 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고, 이후 오와리 국으로 영지가 일부 변경되어 미노 국 다기 군, 후와 군, 이시즈 군 및 오와리 국 가이사이 군의 4개 군에 걸쳐 총 5만 600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7] 이때 거성을 다카스 성으로 옮겨 다카스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게이초 17년(1612년) 7월 10일, 다카스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남 마사시게가 그 뒤를 이었다.

2. 5. 죽음

게이초 17년 (1612년) 7월 10일, 다카스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였다. 가독은 장남 마사시게가 이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간행물 史料綜覧
[4] 간행물 史料綜覧
[5] 간행물 史料綜覧
[6] 간행물 史料綜覧
[7] 서적
[8] 간행물 史料綜覧
[9] 문서 駒野城主[[高木貞久]]の五男
[10] 간행물 史料綜覧
[11] 간행물 史料綜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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