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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다카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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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고쿠 다카쓰구는 오미국의 슈고였던 교고쿠 다카요시의 장남으로, 1563년에 태어났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인질로 보내졌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 아케치 미쓰히데 편에 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쫓기다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의탁했지만,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가쓰이에가 패하면서 위기에 처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 여동생과 아내의 배경으로 다이묘가 되었고,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오쓰 성을 지켜 세키가하라 전투에 기여했다. 이에야스로부터 와카사 국을 받아 오바마 번을 건설했으며, 1609년에 사망했다. 그는 '반딧불이 다이묘'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의 생애는 소설과 드라마로도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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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다카쓰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도쿠겐인 소장
씨족우다 겐지교고쿠 씨
이름교고쿠 다카쓰구 (京極 高次)
아명고보시 (小法師)
별명하시바 오쓰 재상, 교고쿠 시종, 교고쿠 와카사노카미
생애
출생에이로쿠 6년 (1563년)
사망게이초 14년 5월 3일 (1609년 6월 4일)
아버지교고쿠 다카요시
어머니교고쿠 마리아 (아자이 히사마사의 딸)
형제자매다카토모 (高知)
다쓰코 (竜子)
쇼운인 (松雲院)
구쓰키 막달레나 (朽木マグダレナ)
배우자정실: 하쓰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
측실: 야마다 씨, 오구라 씨
자녀다다타카 (忠高)
야스모 다카마사 (安毛高政)
관직 및 지위
관위종3위 참의
주군오다 노부나가
아케치 미쓰히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오미 오쓰 성주 → 와카사 오바마번
기타 정보
계명태운사전철종도한 (泰雲寺殿徹宗道閑)
태운사전전삼품상공철종도한대거사 (泰雲寺殿前三品相公徹宗道閑大居士)
소속오다 씨
도요토미 씨
동군
도쿠가와 막부

2. 생애

에이로쿠 6년(1563년), 교고쿠 다카요시와 교고쿠 마리아(아자이 히사마사의 딸)의 장남으로 오미국 오다니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고호시(小法師)였다. 당시 교고쿠 씨는 본래 기타오미의 슈고 가문이었으나, 가신이었던 아자이 씨의 하극상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쇠퇴한 상태였다.

겐키 원년(1570년), 아버지에 의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내져 그를 섬겼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아케치 미쓰히데 측에 가담했다가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가 패배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의탁하기도 했다.

이후 여동생 다쓰코(마쓰노마루도노)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고,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이자 요도도노의 동생인 하쓰(조코인)를 정실로 맞이하면서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 오미국 오쓰 성(6만 석)의 성주가 되었다.[1]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蛍大名|호타루 다이묘일본어(반딧불이 다이묘)라고 폄하하기도 했으나, 단순히 배경에만 의존한 인물은 아니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오쓰 성에서 농성하며 모리 모토야스,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이 이끄는 서군 대군의 발을 묶어 세키가하라 본선에 참전하지 못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4] 전투 후 이 공로를 인정받아 와카사 국 오바마 9만 2천 석 영지를 하사받아[1] 구니모치 다이묘가 되었다.

다카쓰구는 현대 교고쿠 씨족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여겨지며, 오닌의 난 이후 약화되었던[3] 가문의 명성과 지위를 회복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2] 게이초 14년(1609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가문의 배경과 초기 생애

교고쿠 씨(京極氏)는 기타오미(北近江)의 슈고(守護) 가문이었으나, 한때 주가(主家)로 섬겼던 가신 아자이 씨(浅井氏)가 하극상(下剋上)을 일으키면서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3] 교고쿠 가문은 13세기부터 힘을 떨쳤으나 오닌의 난 이후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2] 다카쓰구는 이러한 가문의 상황 속에서 아자이 씨의 보호 아래 그들의 거성인 오미국(近江国) 오다니성(小谷城) 내의 교고쿠마루(京極丸)에서 태어났다.

에이로쿠 6년(1563년), 아버지 교고쿠 다카요시(京極高吉)와 어머니 교고쿠 마리아(京極マリア)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자이 히사마사(浅井久政)의 딸이자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누나였다. 다카쓰구의 아명은 고호시(小法師)였다.

겐키 원년(1570년), 아버지 다카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군사 동원 요구에 직접 응하지 않는 대신, 가문의 충성심을 보이고자 아들 다카쓰구를 인질로 기후의 노부나가에게 보냈다.[8] 다카쓰구가 인질로 지내던 시기, 그의 부모인 다카요시와 마리아는 아즈치성 아래에 있던 세미나리오(Seminario)에서 40일간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다. 당시 11~12세였던 다카쓰구 역시 세례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부모가 세례를 받은 직후 아버지 다카요시가 급사하면서 계획이 보류되었다. 이는 기독교도가 된 것이 신불(神仏)의 벌을 초래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원복(元服)을 치른 후에는 '''다카쓰구'''(高次)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노부나가를 섬겼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다카쓰구는 여동생 료코(竜子)의 남편이자 매제인 다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와 함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측에 가담하여 나가하마성(長浜城)으로 출진했다. 그러나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가 패배하면서 다카쓰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외숙부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였던 오이치(お市)가 재혼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에게 몸을 의탁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마저 히데요시에게 패배하면서 다카쓰구는 다시금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8]

2. 2. 다이묘로의 성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 여동생 다쓰코(마쓰노마루도노)의 영향력 등으로 다카쓰구는 히데요시에게 용서받고 그를 섬기게 되었다. 덴쇼 12년(1584년)에 오미국 다카시마군 내 2,500석 영지를 받았고, 다음 해에는 5,000석으로 가증되었다. 같은 해 규슈 정벌에서의 공적으로 1만 석으로 더욱 영지가 늘어났으며, 오미조성 성주가 되어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다.

덴쇼 15년(1587년)에는 교고쿠 가문의 옛 가신이었던 아자이 가문 출신이자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인 하쓰를 정실로 맞이하였다. 다카쓰구와 하쓰는 사촌 관계였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의 공으로 오미 하치만산성 2만 8,000석으로 영지가 늘어났으며,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쓰구관백에 오르자 종5위하 시종에 임명되었다. 분로쿠 4년(1595년)에는 오미국 오쓰성 6만 석으로 크게 가증되었고, 종4위 좌근위소장에도 임명되었다. 오쓰성은 아케치 미쓰히데의 사카모토성을 계승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족인 아사노 나가마사가 축성한 곳으로, 시가군에 위치한 오미 남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듬해에는 하시바 성 사용이 허가되고 도요토미 성도 하사받았으며[10], 종3위 산기(재상)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다카쓰구의 빠른 출세는 본인의 공적보다는 여동생 다쓰코와 아내 하쓰 등 유력한 여성들과의 혼맥(閨閥)에 기인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뒤에서 다카쓰구를 '''蛍大名|호타루 다이묘일본어'''(반딧불이 다이묘)라고 쑥덕거렸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도요토미 정권오미국 지배를 원활히 하고자 했던 정치적 계산을 간과한 측면도 있다. 즉, 하시바(도요토미) 가문의 기반이 된 기타오미 지역에서 아자이 가문 이전에 대대로 슈고였던 교고쿠 가문의 명망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비록 이러한 배경으로 출세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가 단순히 배경에만 의존한 무능한 인물만은 아니었음은 이후 오쓰성 전투 등에서의 행적을 통해 보여준다.

2. 3. 오쓰 성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시다 미쓰나리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아이즈우에스기 가게카쓰 토벌을 위해 오사카를 떠난 이에야스는 이틀 뒤인 6월 18일 오쓰성에 들러 다카쓰구에게 우에스기 정벌 기간 동안 성을 지킬 것을 부탁하고, 동생 교고쿠 다카토모와 가신 야마다 오이를 이에야스 군에 합류시켰다.[23]

그러나 미쓰나리 측에서도 우지이에 유키히로와 구키 모토쓰나[24]를 통해 서군에 가담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군 측 이이 나오마사 등으로부터도 거듭 서신으로 오쓰성 수비를 부탁받은 다카쓰구는[11], 성의 수비가 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일단 서군에 가담하는 척했다. 이를 위해 오사카에 적자 구마마로(교고쿠 다다타카)를 인질로 보내고, 오쓰성을 방문한 미쓰나리와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출진 준비를 하면서 서군의 동향 정보를 동군에 몰래 전달했다. 미쿠리야 요시미치는 이러한 다카쓰구의 행동이 가신 중 친서군파에 대한 배려나 만일의 경우 교고쿠 가문의 생존을 위한 책략이었으며, 실제로는 일관되게 동군 측으로 행동했다고 해석한다.[11] 동군 장수들 사이에서는 다카쓰구가 동군 소속이라는 사실이 7월경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미쓰나리 등 서군 수뇌부는 다카쓰구가 도요토미 가문과의 관계로 인해 당연히 서군에 가담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가 농성을 시작할 때까지 동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11]

9월 1일, 다카쓰구는 서군과 함께 오쓰성을 출발해 2일 에치젠 히가시노에 도착했으나, 가이쓰를 거쳐 배편으로 오쓰성으로 돌아왔다. 3일, 성에 병사를 모으고 군량을 반입하며 농성 준비를 마치고, 서군을 막겠다는 뜻을 이이 나오마사에게 전했다. 이 소식은 즉시 오사카에 전해져, 성 근처 오사카세키에 주둔하던 모리 모토야스(서군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의 숙부) 군대가 오쓰 마을로 진군했다.

여기에 다치바나 무네시게 군대까지 합류했다. 7일, 서군의 공격 병력은 1만 5천에서 4만 명[11][23][12] 사이로 불어났고, 대포가 동원되어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1일 밤부터 12일 새벽 사이, 가신 야마다 오이, 아카오 이즈노카미 등이 야습을 감행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12일 낮에는 성의 해자가 메워졌다. 13일 총공격이 시작되어 다카쓰구 자신도 창 두 자루를 들고 응전하다 부상을 입었으며[11], 산노마루(三の丸)와 니노마루(二の丸)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14일, 모리 모토야스는 오사카성에서 온 사자, 고야산의 모쿠지키 오고 상인, 신조 나오타다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다카쓰구는 거부하며 항전 의지를 보였다.[11] 이때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다카쓰구의 목숨을 살리고자 보증 서한을 작성했고, 가신 세토구치 마사자네가 화살에 서한을 매달아 성 안 다카쓰구의 우마지루시에 명중시켜 전달했다.[12][13][14][15][16][17] 서한을 읽고 무네시게의 호의에 감동한 다카쓰구는[11], 기타노만도코로의 사자 고조스를 받아들이고, 노신 구로다 이요 등의 설득을 받아들여 마침내 항복했다.[11] 항복 조건으로 무네시게는 일족인 다치바나 마사토키(다치바나 사부로에몬)를 인질로 성 안에 보냈다. 15일 아침, 다카쓰구는 성 근처 원성사(園城寺)에서 삭발하고[11] 7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성을 나와 고야산으로 향했다.[12][13][14][15][16][17]

공교롭게도 오쓰성이 개성된 바로 그날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져 서군의 패배로 끝났다. 결과적으로 다카쓰구의 13일간의 농성으로 인해 모리 모토야스,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 1만 5천여 명의 서군 병력은 세키가하라 본선에 참전하지 못하게 되었고[18], 이는 동군의 승리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카쓰구는 여동생 다쓰코(마쓰노마루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고, 오이치의 딸이자 요도도노의 동생인 하쓰(조코인)를 정실로 맞이한 덕분에 출세했다는 의미에서 '''반딧불이 다이묘'''(蛍大名)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오쓰성 전투에서 보여준 능력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그는 전후 와카사 일국(오바마 9만 2천석[1])을 받아 구니모치 다이묘가 되었고, 가문의 재흥을 이끌었다.

오쓰성 전투 당시 주요 가신 및 참전 인물은 다음과 같다.

오쓰성 전투 주요 인물 및 활약
역할인물
구로다 이요, 야마다 오이
사이토 가쓰자에몬, 와카미야 헤이스케, 히라 시치자에몬, 다가 마고자에몬, 오가와 가쓰타유
다카미야 한시로, 아카오 이즈노카미, 야마다 오이, 미타무라 이즈모, 미타무라 키치스케, 우치다 타로자에몬, 아마고 게이, 핫토리 사도, 구라치 호키, 와카미야 헤이베, 사와키 사쿠자에몬, 사이토 가쓰자에몬, 다가 마고자에몬, 이마무라 카몬, 미노우라 빈고, 혼고 사에몬, 마루오 마고고로, 나카이 지헤, 핫토리 코타로, 도모쿠니 신베, 테라니시 사에몬, 이토 초에몬, 이노우에 시게베, 이시카와 우에몬, 사이쇼 겐자에몬, 후카이 초에몬, 우에하라 타로사쿠와, 지칸자에몬, 오가와 고로하치, 오노 진에몬, 오구라 신베, 히로세 사쿠타유
코세키 진에몬, 이소노 하치자에몬, 이시구로 마타베, 야마다 산자에몬, 시노하라 소헤, 오가와 사코에몬, 미우라 고에몬, 신보 키사에몬, 나카쓰 가쿠베, 가와카미 코사에몬, 이토 가쿠스케, 하야시 고로베, 요코야마 큐나이, 가가와 마타에몬, 시노하라 우에, 야마다 헤이베, 마부치 은사이, 후지오카 마타에몬, 이시카와 큐에몬


2. 4. 와카사 국주 시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의 군세를 오쓰로 유인하여 본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교고쿠 다카쓰구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다카쓰구는 오쓰성 전투 후 고야산에 머물렀으나, 이이 나오마사와 야마오카 도아미, 동생 다카토모의 설득으로 하산하였다. 오사카에서 이에야스를 만난 다카쓰구는 와카사 국 1개국 8만 5,000석으로 영지가 가증되어 고세야마성으로 들어갔다. 게이초 5년(1600년) 10월에는 오바마에 입성했으며, 다음 해에는 오미 국 다카시마군 내 7,100석이 추가로 주어져 총 9만 2,1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1]

오사카 전투를 앞두고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다카쓰구는 일본해와 기타가와, 미나미가와 강에 둘러싸인 운핀(雲浜) 땅에 니조성을 모방한 오바마성 축성을 시작했다. 또한 고세야마성 기슭의 성터와 무가 저택을 상가로 활용하고 새로운 구역을 만드는 등 오바마의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정비했다.

다카쓰구는 이에야스로부터 깊은 신임을 얻었던 것으로 보이며, 관련 서찰도 남아있다.

한편, 예수회의 기록에 따르면 다카쓰구와 그의 정실 하쓰는 기리시탄(크리스천)으로 세례를 받았다.[19] "1602년도 일본 연보"에는 다카쓰구와 그의 동생 다카토모가 모두 기리시탄이 되었으며, 와카사와 단고 지역에서 기독교가 확산될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0] 이는 이에야스가 게이초 7년(1602년) 외국 종교(기독교) 전파 및 귀족의 입교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21] 일어난 일이다. 당시 이에야스가 루손(필리핀)과의 무역에 선교사의 중개가 필요했기 때문에 금지령이 엄격히 시행되지 않았던 배경이 있다.[20] 그러나 교고쿠 가문의 개종은 공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1603년도 일본 연보"에는 다카쓰구 부부가 이에야스를 두려워하여 신앙을 공개하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22]

게이초 14년(1609년) 5월, 다카쓰구는 4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남 다다타카가 그 뒤를 이었다.

3. 가계

교고쿠씨는 우다 천황의 후손을 자처한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에서 비롯되었으며[5], 세이와 겐지 계열의 사사키씨 분파에 속한다.[3]

다카쓰구의 아버지는 교고쿠 다카요시이며, 어머니는 아자이 히사마사의 딸이자 아자이 나가마사의 누나인 교고쿠 마리아이다. 그는 에이로쿠 6년(1563년) 오미국 오다니성의 교고쿠 마루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카쓰구는 덴쇼 15년(1587년) 외삼촌인 아자이 나가마사오이치(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사이의 둘째 딸인 오하쓰와 결혼했다. 오하쓰는 다카쓰구의 사촌 여동생에 해당한다. 이 결혼으로 다카쓰구는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사위가 되었다.[6]

또한, 아내 오하쓰의 자매들을 통해 당대 권력자들과 복잡한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이로 인해 다카쓰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히데타다 양측 모두와 처남 관계를 맺게 되었다.[6][1]

다카쓰구의 여동생(혹은 누나)인 교고쿠 다쓰코(마쓰노마루도노)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면서, 다카쓰구는 히데요시와 다층적인 인척 관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여성들의 후광으로 출세했다는 세간의 인식 때문에 '반딧불이 다이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다카쓰구의 사후, 아내 오하쓰는 출가하여 조코인(常高院)이라는 법명을 받았다.[7] 그녀는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 양측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두 가문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1615년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교고쿠 다카쓰구의 가계'''
관계이름생몰년비고
아버지교고쿠 다카요시1504년 ~ 1581년
어머니교고쿠 마리아1542년 ~ 1618년아자이 히사마사의 딸, 아자이 나가마사의 누나
정실오하쓰 (조코인)1570년 ~ 1633년아자이 나가마사오이치의 차녀, 다카쓰구의 사촌
측실야마다 씨
장남교고쿠 타다타카1593년 ~ 1637년어머니: 야마다 씨
측실오구라 씨
차남야스게 타카마사아타게 타카마사(安毛高政)라고도 함. 어머니: 오구라 씨
여동생교고쿠 다쓰코마쓰노마루도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장남 교고쿠 타다타카는 1607년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넷째 딸 하쓰히메(初姫)와 결혼했다. 그러나 후사 없이 사망하여 영지는 막부에 몰수될 위기에 처했으나, 막부는 다카쓰구의 차남이자 타다타카의 이복동생인 야스게 타카마사의 아들 교고쿠 다카카즈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잇게 했다. 다카카즈는 처음 하리마국 다쓰노번 50,000석을 받았다.[1] 이후 1658년 사누키국 마루가메번으로 이봉되었으며, 다카쓰구의 후손(정확히는 차남 계열)은 폐번치현까지 마루가메를 다스렸다. 이 교고쿠 가문 분가의 당주는 메이지 시대자작 작위를 받았다.[1]

4. 인물 및 평가

교고쿠씨는 기타오미의 슈고 가문이었으나, 가신이었던 아자이씨의 하극상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교고쿠 다카쓰구는 이러한 상황에서 아자이 가문의 비호 아래 태어났다. 이후 그의 여동생 료코(마쓰노마루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고,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이자 요도도노의 여동생인 하쓰를 정실로 맞이하면서 다카쓰구의 지위는 크게 상승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다카쓰구가 자신의 능력보다는 여성들의 후광, 즉 혼맥(閨閥)에 의지해 출세했다고 수군거리며 '''반딧불이 다이묘'''라고 불렀다.[10] 하지만 여기에는 도요토미 가문이 오미국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아자이씨 이전의 슈고 다이묘였던 교고쿠 가문의 명망을 이용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다카쓰구는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벌어진 오쓰성 전투에서 그는 자신의 거성인 오쓰성에 틀어박혀 1만 명이 넘는 서군의 대군을 상대로 열흘 이상 농성하며 이들의 발을 묶었다. 이로 인해 모리 모토야스나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같은 서군의 주요 병력은 세키가하라 전투의 주전장으로 향하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다카쓰구 자신도 창에 두 군데나 찔리는 부상을 입으며 분전했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고 그는 고야산으로 들어가 출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에야스는 서군의 대군을 오쓰성에 묶어둔 다카쓰구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전후 다카쓰구는 와카사 국 일국(9만 2천 고쿠)을 하사받아 구니모치 다이묘의 지위에 올랐고,[1] 동생 교고쿠 다카토모와 함께 교고쿠 가문을 재건하여 근세 다이묘 가문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오바마 번의 초대 번주로서 오바마 성 축조와 조카마치 정비에 힘쓰는 등 영지 경영에도 능력을 보였으며, 이에야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도쿠가와 막부 체제 하에서 교고쿠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세습 가신인 후다이 다이묘와는 구별되는 도자마 다이묘로 분류되었지만,[2] 다카쓰구의 노력 덕분에 가문은 번성할 수 있었다. 한편, 예수회의 기록에 따르면 다카쓰구는 부인 하쓰와 함께 기독교 세례를 받았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눈치를 보아 이를 공표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19][20][22]

4. 1. 현대의 평가

소설

  • 미즈카미 츠토무 『호적(湖笛)』(마이니치 신문사, 1966년)
  • 사사자와 사호 『운명의 연회』 (코분샤 시대소설 문고, 1995년, 『여인할복(女人切腹)』 수록)
  • 아키즈키 타츠로 『반딧불이 성(螢の城)』 (PHP 연구소, 2011년 2월)
  • * 【개제】『불 반딧불이 성(火螢の城)』 (PHP 문예 문고, 2015년 3월)
  • 이마무라 쇼고 『새왕의 방패(塞王の楯)』 (슈에이샤, 2021년 10월 / 슈에이샤 문고, 2024년, 상하권) - 오쓰성 전투를 소재로 한 작품

텔레비전 드라마

5. 유산

도쿠가와 이에야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발을 오쓰성에 묶어둔 다카쓰구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와카사국 일대 8만 5,000석과 오미국 다카시마군 내 7,100석을 더해 영지를 늘려주었다. 이에 다카쓰구는 오바마에 입성했다.

오사카 전투를 앞두고 다카쓰구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바마성이다. 이 성은 동해, 기타가와 강, 남천에 둘러싸인 운핀(雲浜) 땅에 니조성을 본떠 지어졌다. 또한 다카쓰구는 기존 노치세 산성 기슭의 성터와 무사들의 저택 자리를 상가(마치야, 町屋)로 바꾸고 새로운 구획을 만드는 등 오바마의 성 아랫마을(조카마치)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이는 오늘날 오바마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다카쓰구가 이에야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에야스가 직접 보낸 서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예수회의 기록인 〈1601년도 일본연보〉와 〈1602년도 일본연보〉에는 다카쓰구와 그의 정실 죠코인(교고쿠 마리아, 京極マリア|교고쿠 마리아일본어), 동생 교고쿠 다카토모가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회 기록에는 다카쓰구를 '와카사노카미 사이쇼도노(若狭守宰相殿|와카사노카미 사이쇼도노일본어)'로 지칭하며 그의 세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이에야스가 외국 종교인 기독교의 확산을 경계하고 귀족들의 입교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일이었다.

5. 1. 묘소

게이초 14년(1609년) 5월에 47세로 사망했으며, 장남인 교고쿠 타다카가 뒤를 이었다.

고야 산 오쿠노인에는 오쓰 성에서 전사한 22명의 가신을 위령하는 석비가 게이초 5년(1600년) 9월 13일 날짜로 남아있다.

다카쓰구가 일상 거처로 사용했던 후세야마 성의 하야카타(下屋形)이자 와카사 다케다 씨의 수호소였던 곳은 다카쓰구 사후 그의 보리사 부지로 사용되었다. 다카쓰구의 계명을 따 "타이운지(泰雲寺)"로 명명되었으나, 후에 사카이 씨에 의해 쿠우인지로 개명되었다.

다카쓰구의 적남인 교고쿠 타다카는 와카사에서 이즈모오키로 영지가 가증되어 옮겨갔기 때문에, 이즈모의 마쓰에성 아래(현 마쓰에시 타케야초) 호키산 안코쿠지에 아버지 다카쓰구를 위한 공양탑을 건립했다. 현재도 그 보협인탑이 남아 있으며, 마쓰에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시가현 마이바라시의 토쿠겐인에 있는 석묘 및 내부의 석탑은 간분 11년(1671년)에 자손인 교고쿠 타카토요가 건립한 것이다.

안코쿠지 산몬 + 약연기(마쓰에시)(시마네현 마쓰에시 타케야초 993 국도 9호선 구도, 우이가와 근처)


안코쿠지 쇼로몬(마쓰에시)(오른쪽에는 교고쿠 다카쓰구 공양탑, 산몬・국도 9호선은 왼쪽)

참조

[1] 서적 Nobiliar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03
[2] 서적 Ancien Japon https://books.google[...] 1888
[3] 서적 Dictionnaire historique du Japon https://books.google[...] 2002
[4] 서적 Sekigahara 1600: the final struggle for power https://books.google[...] 1995
[5] 서적 "Japan's Name Culture: The Significance of Names in a Religious,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https://books.google[...] 1995
[6] 웹사이트 The silk coloured portrait of wife of Takatsugu Kyogoku http://www.city.obam[...]
[7] 웹사이트 Nozen-zan Joko-ji temple http://p-www.iwate-p[...]
[8] 문서 2017
[9] 간행물 十六・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 1991
[10] 논문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11] 서적 戦国・近世初期西と東の地域社会 岩田書院
[12] 서적 長編歴史物語戦国武将シリーズ(1)立花宗茂
[13] 서적 旧柳川藩志
[14] 서적 旧柳川藩志
[15] 서적 柳川の歴史4・近世大名立花家
[16] 웹사이트 関原軍記大成 https://dl.ndl.go.jp[...]
[17] 웹사이트 『慶長武士』 https://dl.ndl.go.jp[...]
[18] 웹사이트 『日本戦史・関原役』(第七篇 本戦前後東西各地ノ諸戦 第九章 大津) https://dl.ndl.go.jp[...]
[19] 문서 2004
[20] 문서 2017
[21] 문서 1990
[22] 문서 2017
[23] 문서 역주 - 궁내성(현대 [[일본 궁내청]]의 전신)의 한 기관인 오이료에서 유래한 일본 인명.
[24] 문서 역주 - 우지이에는 여동생 쇼운인의 남편, 구쓰키는 여동생 막달레나의 시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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