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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이종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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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사》는 이종휘가 저술한 기전체 통사 서적으로, 소론과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유교 사관을 재정립하려 했다. 이 책은 단군조선을 한국사의 뿌리로 보고, 고구려와 발해를 중시하며, 기자조선의 문화적 의의를 강조하는 등 자주적인 역사관을 담고 있다. 《동사》는 고조선부터 발해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특히 고구려, 발해를 중심으로 북방 민족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종휘는 기자불신설을 통해 중국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성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역사관은 후대 민족주의 사학에 영향을 미쳤다.

2. 동사의 저자 이종휘

이종휘는 소론에 속하며,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유교사관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서 고구려를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이종휘는 단군조선의 혈통과 기자조선의 문화가 융합된 것이 고구려라고 생각했다. 고구려는 단군의 후예인 부여의 주몽이 세웠고, 기자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백제신라보다 유교 문화가 발달했으며, 넓은 영토를 가진 대국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신라는 유교를 받아들였지만 노장사상이나 불교가 융성하여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를 한국사 체계에 포함시키고,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독립 항목을 구성했다. 대조영을 기자 이후 으뜸가는 위인으로 꼽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이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계 국가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1][2]

이종휘는 주자 성리학의 전통적인 역사 인식과 달리 단군조선의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 한국사의 뿌리가 단군조선이며,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멸망했지만 단군의 후손들이 부여, 예맥, 비류, 옥저 등을 건국했고, 부여의 후예가 고구려백제를 건국했으므로 결국 단군의 혈통을 이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기자조선의 문화적 의미를 높게 평가하여, 기자를 통해 중국 문화가 유입되어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대주의 성리학자들과 달리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을 주장하여,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2. 1. 이종휘의 사상적 배경

이종휘는 소론에 속하며,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유교사관의 재정립을 시도했다.[1][2]

3. 동사의 편찬 배경과 목적

이종휘는 《동사》를 저술하면서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과 성리학적 역사관의 한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3. 1. 성리학적 역사관의 한계

주자 성리학의 전통적인 역사 인식에서 기자조선을 높게 평가한 것과 달리, 이종휘단군조선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였다. 한국사의 뿌리는 단군조선으로서, 비록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단군의 후손들이 부여, 예맥, 비류, 옥저 등을 건국하였고, 부여의 후예가 고구려백제를 건국하였으므로, 결국 단군의 혈통임을 강조하였다. 이종휘는 기자조선의 의미도 문화적 측면에서 높게 평가하였다. 기자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사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역사관과 달리 이종휘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 즉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4. 동사의 구성과 내용

《동사》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다시 여러 개의 세부 항목으로 나뉜다.

'''제1장 본기(本紀)'''는 고조선의 역사를 다루며,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서술한다.

'''제2장 세가(世家)'''는 기자 이후 고조선과 관련된 여러 국가, 즉 부여, 발해, 가야의 역사를 다룬다.

'''제3장 열전(列傳)'''에서는 예맥, 옥저, 비류, 낙랑 등 고조선 주변의 여러 종족과 고구려의 주요 인물들, 탐라, 협부을송, 을지문덕, 설총, 최치원 등의 인물들을 다룬다.

'''제4장 연표(年表)'''는 고조선부터 삼한, 육국, 사군이부 등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고사고금인표를 통해 주요 인물들의 활동 시기를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5장 지1(志1)'''과 '''제6장 지2(志2)'''는 고조선고려의 제도, 문화, 사회, 지리 등을 다룬다. 예악, 식화, 신사, 고구려의 예문, 율력, 천문, 지리, 형법, 오행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며, 고려의 경우 천문, , 오행, 선거, 여복, 백관, 등을 다룬다.

부여단군의 후손이 압록강 북쪽에 세운 나라로, 사방 2천 리의 영토를 가졌다. 조선에 복속되어 2천 년 동안 이어져 오다가 해부루왕 때 동부여로 천도하였다. 해모수는 부여의 옛 도읍을 근거지로 삼았고, 금와왕유화부인에게서 주몽을 낳았다. 주몽은 졸본으로 달아나 고구려를 세웠다. 대소왕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었고, 그의 동생과 사촌동생은 각각 갈사국을 세우거나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도두왕은 나라를 고구려에 바쳤고, 한나라 안제 때 위구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다. 의려왕선비족 모용외의 침략으로 자살했고, 현왕은 연나라 모용황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이후 부여고구려에 투항하여 멸망하였다.

4. 1. 본기(本紀)

《동사》의 〈본기〉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후조선(위만조선)으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 '''단군본기'''에서는 단군 왕검의 탄생과 고조선 건국, 그리고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3]
  • '''기자본기'''에서는 기자가 조선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교화한 내용과 기자조선의 멸망 과정을 다루고 있다.[3]
  • '''삼한본기'''에서는 단군기자 시대에 존재했던 , , 한, , 말갈 등 여러 종족 중 삼한의 기원과 조선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3]
  • '''후조선본기'''에서는 위만조선의 왕위를 찬탈하고 위만조선을 건국한 과정과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3]


이종휘주자 성리학의 역사 인식과 달리 단군조선을 한국사의 뿌리로 강조하였다. 비록 단군조선기자조선에 의해 멸망했지만, 단군의 후손들이 부여, 예맥, 비류, 옥저 등을 건국했고, 부여의 후예가 고구려백제를 건국했으므로 결국 단군의 혈통을 이었다고 보았다.

4. 1. 1. 단군본기

환인의 서자 환웅은 태백산에 살면서 박달나무 아래에서 단군을 낳았다. 단군의 이름은 왕검이고 성은 환(桓)씨라고 한다. 도당씨[3]가 중국에서 나라를 세운 무진년 경에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단군의 아들 부루는 갑술년에 도산에서 하우씨[4]에게 조회하였다. 단군상나라 무정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4. 1. 2. 기자본기

기자조선을 설립한 자서여(子胥餘)는 은나라 성탕왕의 16세손이고 은나라 마지막 왕인 임금의 큰아버지이다. 주나라 왕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치고, 요수 동쪽에 자리잡고 나라를 세웠다. 8조 법금을 만들고 정전법을 도입하였으며 백성들을 교화했다.[3] 기자조선의 41세손 부왕(否王)에 이르러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이를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신하로서 복종하였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準王)은 연나라 사람 위만을 박사로 임명하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으나,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평양성을 습격하자, 배를 타고 남쪽 한(韓)으로 도망하였다.

이종휘기자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역사관과 달리 이종휘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 즉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4. 1. 3. 삼한본기

단군기자(濊), (貊), 한(韓), (餘), 말갈(靺鞨)의 다섯 종족이 있었는데, 이 중 한(韓)이 가장 컸다. 한은 진한, 변한, 마한으로 나뉘며, 합쳐서 삼한이라고 불렀다. 삼한은 한강 이남에 있었고 땅이 사방 1천 리였으며, 78개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에 신하로서 소속되어 군현처럼 세금과 조공품을 냈다.[3]

4. 1. 4. 후조선본기

후조선의 왕 위만(衛滿)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망명하여 준왕으로부터 박사 벼슬을 받고 서쪽 변방을 지켰다. 이후 세력을 키워 한나라 혜제 원년 정미년(기원전 194년)에 평양성으로 들어가 준왕을 내쫓고 조선의 왕이 되었다.[3] 위만의 손자 우거왕에 이르러 나라가 점점 강해지자, 주변 여러 나라들이 한나라 천자에게 조공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위만조선에 속해 있었던 예족의 군장 남려는 이에 불만을 품고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이후 위만조선한나라와 수 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였으나, 니계장 (參)이 우거왕을 암살하는 등 지배층의 내분으로 멸망하고 말았다(기원전 108년).[3] 위씨조선이 망하자 한나라는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였다.[3]

4. 2. 세가(世家)

이종휘의 《동사》에는 기자세가(箕子世家), 부여세가(夫餘世家), 발해세가(渤海世家), 가야세가(加耶世家)가 포함되어 있다.

기자세가에서는 기자조선이 중국 문화의 유입을 통해 조선이 문화 국가, 즉 소중화(小中華)가 되는 데 기여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로서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을 주장하여, 조선사가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성을 지닌다고 강조했다.[1]

부여세가, 발해세가, 가야세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내용이 필요하다.

4. 2. 1. 기자세가 보유

이종휘는 기자조선의 의미를 문화적 측면에서 높게 평가하였다. 기자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역사관과 달리 이종휘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 즉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1]

5. 동사의 역사관과 특징

동사》는 수산집(修山集)에 수록된 기전체 통사 서적이다. 저자 이종휘소론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유교사관을 재정립하려 했다. 그는 주자 성리학 중심 역사관에서 벗어나 단군조선을 중시하고, 고구려발해를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는 등 자주적인 역사관을 보였다.[1][2]

5. 1. 단군조선 중심의 민족사 인식

이종휘는 주자 성리학의 전통적인 역사 인식에서 기자조선을 높게 평가한 것과 달리, 단군조선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였다. 한국사의 뿌리는 단군조선으로서, 비록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단군의 후손들이 부여, 예맥, 비류, 옥저 등을 건국하였고, 부여의 후예가 고구려백제를 건국하였으므로, 결국 단군의 혈통임을 강조하였다.[1][2]

이종휘는 기자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아, 기자조선의 의미도 문화적 측면에서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사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역사관과 달리 이종휘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을 지적함으로써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1][2]

5. 2. 고구려와 발해 중심의 역사 서술

이종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에서 고구려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종휘는 단군조선의 혈통과 기자조선의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 바로 고구려라고 파악하였다. 고구려는 단군의 후예인 부여의 주몽이 세운 나라로서, 기자조선의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백제신라에 비해 유교 문화가 훨씬 발달하였고, 사방 4~5천 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가진 대국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1]

반면 유학자였던 이종휘는 신라에 대해서 명목상으로는 유교를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노장사상이나 불교가 번성하여 문화적으로 낙후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를 한국사 체계 안에 포함시키고, 별도로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독립적인 항목을 구성하였다. 이 점에서 이종휘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기자 이래 으뜸가는 위인으로 꼽았다.[1] 이러한 이종휘의 역사 인식은 이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계 국가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이어졌다.[1][2]

5. 3. 북방 민족에 대한 관심

이종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에서 고구려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종휘는 단군조선의 혈통과 기자조선의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 바로 고구려라고 파악하였다. 고구려는 단군의 후예인 부여의 주몽이 세운 나라로서, 기자조선의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백제신라에 비해 유교 문화가 훨씬 발달하였고, 사방 4~5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가진 대국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반면 유학자였던 이종휘는 신라에 대해서는 명목상으로는 유교를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노장사상이나 불교가 번성하여 문화적으로 낙후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종휘는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를 한국사 체계 안에 포함시키고, 별도로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독립적인 항목을 구성하였다. 이 점에서 이종휘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기자 이래 으뜸가는 위인으로 꼽았다. 이러한 이종휘의 역사 인식은 이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계 국가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1][2]

5. 4. 자주적 역사관

이종휘는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조선 중심의 주체적인 역사관을 확립하려 노력했다. 그는 주자 성리학의 전통적인 역사 인식과 달리 단군조선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였다. 한국사의 뿌리는 단군조선이며, 비록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단군의 후손들이 부여, 예맥, 비류, 옥저 등을 건국하였고, 부여의 후예가 고구려백제를 건국하였으므로 결국 단군의 혈통임을 강조하였다.[1][2]

이종휘는 기자조선의 의미도 문화적 측면에서 높게 평가하였다. 기자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역사관과 달리 이종휘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 즉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1][2]

이종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에서 고구려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는 단군조선의 혈통과 기자조선의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 바로 고구려라고 파악하였다. 고구려는 단군의 후예인 부여의 주몽이 세운 나라로서, 기자조선의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백제신라에 비해 유교 문화가 훨씬 발달하였고, 사방 4~5천 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가진 대국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반면 유학자였던 이종휘는 신라에 대해서 명목상으로는 유교를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노장사상이나 불교가 번성하여 문화적으로 낙후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를 한국사 체계 안에 포함시키고, 별도로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독립적인 항목을 구성하였다. 이종휘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을 기자 이래 으뜸가는 위인으로 꼽았다. 이러한 이종휘의 역사 인식은 이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계 국가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로 이어졌다.[1][2]

6. 동사의 영향과 의의

이종휘의 《동사》는 신채호, 박은식 등 후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이종휘의 역사관을 계승하여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계 국가 중심의 역사 인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동사》에서 고구려를 단군조선의 혈통과 기자조선의 문화가 융합된 국가로 파악하고,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아 한국사 체계에 포함시킨 점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6. 1.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

이종휘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계 국가를 중요시하는 역사관을 가졌으며, 이는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1][2] 그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고구려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고구려는 단군의 후예인 부여의 주몽이 세운 나라로서, 기자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백제신라보다 유교 문화가 훨씬 발달했고, 사방 4~5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가진 대국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신라에 대해서는 유교를 명목상으로만 받아들였을 뿐, 실제로는 노장사상이나 불교가 번성하여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를 한국사 체계에 포함시키고,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독립 항목을 구성하였다. 또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기자 이래 으뜸가는 위인으로 꼽았다.

6. 2. 현대적 의의

이종휘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계 국가를 중요시하는 역사 인식을 가졌으며, 이는 이후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고구려를 단군조선의 혈통과 기자조선의 문화가 융합된 국가로 파악하고,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아 한국사 체계에 포함시킨 점은 주목할 만하다. 대조영을 기자 이래 으뜸가는 위인으로 평가한 것 또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1][2]

참조

[1] 서적 해제: 동사의 체제와 역사의식 소명출판 2004-12-30
[2] 문서 김영심과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한 후 [[규장각]]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3] 문서 [[도당씨]](陶唐氏)는 중국 [[요 (군주)|요 임금]]을 말한다. 처음에 도(陶)라는 지역에 살다가 당(唐)이라는 지역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도당씨]]라고 부른다. 요 임금은 중국 전설상의 [[삼황오제]] 중 한 명으로, [[순 (군주)|순 임금]]과 함께 '요순시대'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4] 문서 하우씨(夏禹氏)는 [[하나라]]를 개국한 [[우 (하나라)|우 임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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