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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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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9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난 스페인의 화가이다. 그는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 미술을 배우고, 초기에는 보데곤을 그리다가 마드리드로 가서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벨라스케스는 초상화와 역사화를 주로 그렸으며, 특히 궁정의 난쟁이나 광대들을 개성 있게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세비야의 물장수', '브레다의 항복', '시녀들' 등이 있으며,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기법을 습득하여 사실적이면서도 인상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에두아르 마네, 파블로 피카소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166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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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
로마자 표기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출생일1599년 6월 6일
출생지스페인 세비야
사망일1660년 8월 6일 (61세)
사망지스페인 마드리드
분야회화
사조바로크
서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서명
작품
주요 작품브레다의 항복 (1634–35)
로케비 비너스 (1647–1651)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 (1650)
시녀들(1656)
실 잣는 여인들(1657년경)
작품 목록작품 목록
기타 정보
수상산티아고 기사단 기사
스승프란시스코 파체코
배우자후아나 파체코(Juana Pacheco)
자녀프란시스카 데 실비아 발레스케스 이 파체코(Francisca de Silva Velázquez y Pacheco)
이그나시아 데 실비아 벨라스케스 이 파체코(Ignacia de Silva Velázquez y Pacheco)
자화상
벨라스케스의 자화상, 1640년경
자화상

2. 어린 시절

벨라스케스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소박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부모는 그에게 신앙심과 직업 윤리를 심어주었고, 언어와 철학을 가르쳤다.

벨라스케스는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 밑에서 1년 동안 미술을 공부하며 긴 털 붓을 사용하는 기법을 익혔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이후 12세에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5년간 세비야 화풍, 비례, 원근법 등을 배웠다.[13] 파체코는 매너리스트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때때로 단순한 직접 사실주의를 표현한 화가이자 훌륭한 교사였다. 파체코의 화실에서 벨라스케스는 고전을 연구하고, 비례와 원근법에 대한 훈련을 받았으며, 세비야의 문학 및 예술계 동향을 접했다.[13]

1618년 4월 23일, 벨라스케스는 스승 파체코의 딸인 후아나 파체코(1602년 6월 1일~1660년 8월 10일)와 결혼했다.[14]

2. 1. 출생과 가문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서 1599년 6월 6일에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포르투갈유대인 출신의 변호사였던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바와 스페인의 하급귀족(Hidalgo) 출신인 헤로니마 벨라스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에서는 어머니의 혈통을 드러내기 위해서 장남이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쓰는 것이 관례였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신을 경외할 것과 유능한 직업을 갖도록 교육받았으며, 특별히 언어학과 철학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 아래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벨라스케스는 1년 동안 그와 함께 공부했으며, 아마도 어린 벨라스케스는 에레라로부터 긴 털로 된 붓을 쓰는 법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벨라스케스의 생가, 세비야


12살이 되던 해 첫 스승을 떠나면서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예술가이자 교사였던 프란시스코 파체코 아래서 견습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파체코의 교실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고 그곳에서 세비야의 화풍과 비례와 원근법 등에 대해 배웠다.[13]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바(Juan Rodríguez de Silva)와 헤로니마 벨라스케스(Jerónima Velázquez) 사이의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 1599년 6월 6일 일요일 세비야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5] 세례는 그의 출생 후 며칠 또는 몇 주 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의 외조부모인 디에고 다 실바(Diego da Silva)와 마리아 로드리게스(María Rodríguez)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수십 년 전에 세비야로 이주했다.

1658년 벨라스케스가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그는 자격을 얻기 위해 하급 귀족 출신임을 주장했지만, 그의 조부모는 상인이었을 수도 있다. 일부 저자들은 그의 조부모가 유대인 ''콘베르소''였다고 제안했다.[6][7][8] 라파엘 코메즈(Rafael Cómez)는 벨라스케스가 ''모리스코'' 혈통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9]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의 부계는 콘베르소(개종 유대인) 가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의 외조부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는 포르투갈에서 세비야로 이주했는데, 당시 많은 콘베르소들이 포르투갈에서 이동하여 실바 등의 성을 사용했다.[98][99]

2. 2. 초기 교육과 미술 수업



벨라스케스는 1599년 6월 6일 스페인 안달루시아 세비야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비아는 포르투갈유대인 출신의 변호사였고, 어머니 헤로니마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하급귀족(Hidalgo) 출신이었다. 벨라스케스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신을 경외하고 유능한 직업을 갖도록 교육받았으며, 특히 언어학과 철학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고,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Francisco de Herrera) 아래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여 1년 동안 긴 털로 된 붓을 쓰는 법을 배웠다.

12살이 되던 해 벨라스케스는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5년 동안 세비야 화풍, 비례, 원근법 등을 배웠다.

2. 3.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도제 시절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서 1599년 6월 6일에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그는 포르투갈유대인 출신의 변호사였던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비아와 스페인의 하급 귀족(Hidalgo) 출신인 헤로니마 벨라스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신을 경외하고 유능한 직업을 갖도록 교육받았으며, 특히 언어학과 철학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이탈리아 화풍을 거부했던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 밑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벨라스케스는 1년 동안 그와 함께 공부했으며, 아마도 에레라로부터 긴 털로 된 붓을 쓰는 법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12살이 되던 해 첫 스승을 떠나면서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예술가이자 교사였던 프란시스코 파체코 밑에서 견습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파체코의 교실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고, 그곳에서 세비야의 화풍과 비례와 원근법 등에 대해 배웠다.[99] 1617년, 18세에 독립하였고, 다음 해인 1618년에는 스승인 파체코의 딸 후아나와 결혼했다.

3. 세비야 시대 (1617-1622)

벨라스케스는 1620년대 초 세비야에서 명성을 쌓았다. 1622년 4월, 국왕의 사제였던 후안 데 폰세카의 소개장을 가지고 마드리드로 갔다. 벨라스케스는 새로운 국왕 필리프 4세를 그릴 수는 없었지만, 파체코의 요청으로 시인 루이스 데 곤고라의 초상화를 그렸다.[21] 곤고라의 초상화는 월계관을 쓴 모습이었는데, 벨라스케스는 나중에 이 부분을 덧칠했다.[22] 1623년 1월 세비야로 돌아와 8월까지 머물렀다.[23]

벨라스케스는 초기에는 보데곤(스페인의 정물화)이라 불리는 실내 풍경이나 정물을 그린 그림을 많이 제작하였으며, 종교적 주제의 작품과 초상화도 그렸다.

3. 1. 초기 경력과 결혼

1620년대 초 세비야에서 그는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618년 4월 23일, 그는 스승이었던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 파체코(Juana Pacheco, 1602년 6월 1일 ~ 1660년 8월 10일)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다.[99] 맏딸 프란시스카 데 실비아 벨라스케스 이 파체코(Francisca de Silva Velázquez y Pacheco, 1619-1658)는 1633년 8월 21일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교회에서 화가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와 결혼하였으며, 막내딸 이그나시아 데 실비아 벨라스케스 이 파체코(Ignacia de Silva Velázquez y Pacheco)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죽었다. 맏딸이 결혼하던 즈음에 벨라스케스는 그의 걸작들을 그렸다. 동방박사의 경배(esThe Adoration of the Magi영어)에서는 성스러운 배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17세기 스페인 화단에서는 보데곤이라고 불리는 실내 풍경이나 정물을 그린 그림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궁정 화가가 되기 전의 벨라스케스는 『동방박사의 경배』 등의 종교적 주제의 작품, 『수녀 헤로니마 데 라 후엔테』 등의 초상화와 함께 이 보데곤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1618년에 제작된 『달걀을 요리하는 노파』가 있다. 1622년에는 수도 마드리드로 여행했다.

3. 2. 보데곤과 초기 종교화

초기 벨라스케스의 작품 경향을 보여주는 보데곤(스페인의 정물화)과 종교화는 다음과 같다.

그림제목 및 설명
--세 명의 음악가 (1617-1618년), 베를린 회화랑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의 그리스도 (1618년), 런던 국립미술관
--달걀을 요리하는 노파 (1618년),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동방박사의 경배 (1619년), 프라도 미술관
--수녀 헤로니마 데 라 후엔테 (1620년), 프라도 미술관
--세비야의 물장수 (연도 미상), 앱슬리 하우스


4. 마드리드 시대 (1623-1660)

벨라스케스는 1622년 4월 초, 국왕의 사제였던 후안 데 폰세카의 추천으로 마드리드로 갔다. 같은 해 12월, 국왕이 총애하던 궁정 화가 로드리고 데 비얀드란도가 사망하면서 벨라스케스는 궁정 화가가 될 기회를 얻었다.

올리바레스는 벨라스케스에게 마드리드로 이사할 것을 명하면서, 다른 화가가 왕을 그릴 수 없도록 하고 모든 그림을 궁정에 보관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1624년, 벨라스케스는 왕으로부터 300두카트를 받고 가족과 함께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623년,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왕과 다른 사람들 모두 그의 그림에 만족했다. 프라도 박물관에는 1670년과 1671년에 그려진 벨라스케스의 왕을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네덜란드 출신 화가 안토니오 모르의 영향을 받아 펠리페 2세의 화풍을 연상시키며 입체감이 잘 드러나도록 묘사되었다. 같은 해 웨일스 공(훗날 찰스 1세)이 스페인 궁정을 방문했을 때 벨라스케스가 왕자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지만, 이 그림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1628년 루벤스의 권고로 로마에 유학하여, 베네치아파의 영향을 받아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기법을 익혔다. 정확한 사실적 묘사와 섬세한 색채를 바탕으로 한 인상주의적 경향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4. 1. 궁정 화가로의 임명

벨라스케스는 1622년 4월, 국왕의 사제였던 후안 데 폰세카의 추천으로 마드리드로 갔다. 1622년 12월, 국왕의 총애를 받던 궁정 화가 로드리고 데 비야란드라노가 사망했다.[24]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장관인 올리바레스 공작으로부터 궁정으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50 두카트(175g의 금)를 받았고, 폰세카는 젊은 화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완성된 초상화는 왕궁으로 보내졌다.[21] 국왕의 초상화가 의뢰되었고, 1623년 8월 30일 필리프 4세가 벨라스케스를 위해 자리를 잡았다.[21] 이 초상화는 국왕의 마음에 들었고, 올리바레스는 다른 화가가 필리프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른 모든 국왕의 초상화는 유통에서 제외할 것을 약속하며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로 이주할 것을 명령했다.[25] 이듬해인 1624년 그는 가족을 마드리드로 이주시키는 비용으로 국왕으로부터 300두카트를 받았다. 마드리드는 그의 여생을 보낸 곳이 되었다.

1623년,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로 두 번째 여행을 간다. 이때 스페인 수상이었던 올리바레스 백작(가스파르 데 구스만)의 소개를 받아 국왕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는 국왕의 마음에 들었고,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4. 2. 펠리페 4세와의 관계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를 각별히 아꼈으며,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에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당시 화가는 "장인"으로만 여겨졌지만, 펠리페 4세는 말년에 벨라스케스에게 궁정 장식 책임자를 맡기고 귀족이자 왕의 측근으로서 지위를 부여했다.[74]

1622년 12월, 펠리페 4세가 총애하던 궁정 화가 로드리고 데 비얀드란도가 사망하자, 벨라스케스는 돈 후안 데 폰세카의 주선으로 궁정에 들어오게 되었다. 1623년 8월 16일,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하루 만에 완성된 초상화는 머리 부분만 그린 것이었지만, 왕과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그림에 만족했다. 올리바레스는 벨라스케스의 가족 모두 마드리드로 이사할 것을 명했고, 다른 어떤 화가도 왕을 그릴 수 없으며 모든 그림은 궁정에 보관될 것이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듬해인 1624년, 벨라스케스는 왕으로부터 300두카트를 받고 마드리드로 이사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74]

1623년에 그려진 말을 탄 왕의 모습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프라도 박물관에는 1670년과 1671년에 그려진 벨라스케스의 왕을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다. 이 초상화들은 네덜란드 출신 화가 안토니오 모르의 영향을 받아 펠리페 2세의 화풍을 연상시키며, 입체감이 잘 드러나게 묘사되었다. 같은 해 웨일스 공(훗날 찰스 1세)이 스페인 궁정을 방문했을 때 벨라스케스가 왕자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지만, 이 그림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는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면 빠른 붓놀림으로 거칠게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사실적인 옷 주름으로 보인다. 이러한 붓터치는 인상주의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마네 등 근대 화가들이 벨라스케스를 높이 평가한 이유이기도 하다.

4. 3. 루벤스와의 만남

1628년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이사벨 클라라 외제니아의 외교관으로 파견된 피터 폴 루벤스와 만나 친분을 맺었다. 같은 해 『바쿠스의 승리』(프라도 미술관)를 그렸다.[45]

4. 4.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 (1629-1631)

벨라스케스는 1629년에 이탈리아에서 1년 반을 보낼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 첫 번째 방문은 그의 화풍 발전에 있어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고 있으며, 스페인 왕실 후원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45]

그는 베네치아, 페라라, 첸토, 로레토, 볼로냐, 로마를 여행했다.[45] 1630년에는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나폴리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리베라를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45]

이 시기 벨라스케스의 주요 작품으로는 '야곱에게 가져온 요셉의 피묻은 옷'(1629–30)과 '화성의 대장간의 아폴론'(1630)이 있다. 이 두 작품은 그가 이탈리아 화가들과 견줄 만한 대규모 역사화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준다.[33] 두 작품은 거의 실물 크기의 여러 인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가 비슷하여 짝을 이루도록 그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성서적 장면은 속임수를 묘사하고, 신화적 장면은 속임수의 발각을 묘사한다.[34] 벨라스케스는 "바쿠스의 승리"에서처럼 그의 인물들을 일상생활의 제스처와 표정을 가진 현대인으로 묘사했다.[35] 귀도 레니와 같은 볼로냐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벨라스케스는 "화성의 대장간의 아폴론"을 이전의 어두운 붉은색 바탕이 아닌 연회색 바탕으로 준비된 캔버스에 그렸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보다 더 큰 광채를 만들어냈고, 그는 이후 연회색 바탕을 정기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34]

1628년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이사벨 클라라 외제니아로부터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온 피터 폴 루벤스를 만나 친분을 맺었다. 1629년, 미술품 수집과 그림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 여행이 허락되었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배에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영웅이었던 암브로지오 스피놀라와 동승하게 되어 친분을 맺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 페라라, 로마에 체류하여 163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때 로마에서 제작한 『불카누스의 대장간』(프라도 미술관)과 『요셉의 옷을 받는 야곱』(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을 스페인으로 가져왔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빌라 메디치의 정원, 로마』(프라도 미술관)을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4. 5. 중기 작품 활동 (1631-1649)

1629년, 미술품 수집과 그림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영웅 암브로지오 스피놀라와 배를 같이 타게 되어 친분을 맺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 페라라, 로마에 머물렀고, 163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때 로마에서 그린 『불카누스의 대장간』(프라도 미술관)과 『요셉의 옷을 받는 야곱』(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을 스페인으로 가져왔다. 또한 『빌라 메디치의 정원, 로마』(프라도 미술관)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94]

귀국 후 1634년부터 1635년에 걸쳐 부엔 레티로 별궁의 "여러 왕국의 방"에 장식할 그림 제작을 의뢰받았다. 이미 사망한 스피놀라 장군을 기리기 위해 『브레다의 항복』을 제작했다. 그 외에도 1637년 이후 『발리에카스의 소년』, 1644년 『엘 프리모』와 『세바스티안 데 모라』(모두 프라도 미술관) 등 여러 작품을 제작했고, 관리로서도 승진했다.

''브레다 성의 항복(La rendición de Breda)'', 1634~1635년


『브레다의 항복』은 왕의 별궁 ‘여러 왕국의 사이’라는 큰 홀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전승화(戰勝畵)이다. 1625년 네덜란드 남부 요새 브레다에서 스페인 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패배한 브레다 수비대 지휘관 유스티누스(오라녜 공 빌럼 1세의 서자)가 승리한 스페인 측 총사령관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에게 성문 열쇠를 넘겨주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러한 종류의 전승화에서는 패장이 땅에 무릎을 꿇고 승자가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브레다의 항복』에서는 패장 유스티누스와 승장 스피놀라가 같은 땅 위에 대등하게 서 있다. 온화한 표정의 스피놀라는 오랜 친구를 대하듯 패장 유스티누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 스피놀라 옆에 크게 그려진 말은 그가 패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부러 말에서 내렸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승자의 관대함을 강조한 표현은 패자에게 명예로운 철수를 허락한 스페인의 기사도 정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94]

벨라스케스는 궁정의 난쟁이광대를 소재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104], 이 작품들도 그중 하나이다. 『광대 파블로 데 발야돌리드』, 『광대 디에고 데 아세도』, 『광대 세바스티안 데 모라』는 독립된 초상화로 그려졌다. 『광대 파블로 데 발야돌리드』를 제외한 세 작품은 왕의 사냥용 별장 토레 데 라 파라다(Torre de la Parada, 파라다 탑)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레카스의 소년』의 모델은 왕세자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놀이 상대였던 난쟁이 프란시스코 레스카노이며,[104] Lezcanillo 또는 el Vizcaíno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발레카스(Vallecas)는 마드리드 교외 지명이다. 모델은 마드리드 근교 과다라마 산맥을 배경으로 트럼프를 들고 사냥복 차림으로 야외에 앉아 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화면 가까이에서는 빠른 붓놀림으로 거칠게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사실적인 옷 주름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상파에도 영향을 준 유화 기법은 마네 등 근대 화가들이 벨라스케스를 높이 평가한 이유이다.

4. 5. 1. 브레다 성의 항복

『브레다의 항복』은 왕궁의 "여러 왕국들의 방"이라는 대홀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전승화이다. 1625년, 네덜란드 남부 요새 브레다에서 스페인 군의 승리를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패배한 브레다 수비대 사령관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오라녜 공 빌럼 1세의 서자)가 승자인 스페인 측 총사령관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에게 성문의 열쇠를 건네주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전승화에서는 패전 장수는 땅에 무릎을 꿇고 승자는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가 일반적이었지만, 이 『브레다의 항복』에서는 패전 장수 유스티누스와 승자 스피놀라는 같은 땅 위에 대등한 위치에서 서 있다. 온화한 표정의 스피놀라는 마치 오랜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패자 유스티누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참고로 두 사람은 1601년 뉴포트에서 대결한 적도 있다). 스피놀라의 옆에 크게 그려진 말은 그가 패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부러 말에서 내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승자 측의 관용을 이중삼중으로 강조한 표현은 패자에게 명예로운 철수를 허락한 스페인의 기사도 정신의 승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여겨진다.

4. 5. 2. 궁정 난쟁이와 광대들의 초상화

벨라스케스는 궁정에서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로 섬겼던 난쟁이광대를 소재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104], 이 작품들도 그중 하나이다. 『광대 파블로 데 발야돌리드』, 『광대 디에고 데 아세도』, 『광대 세바스티안 데 모라』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초상화로 그려졌다. 『광대 파블로 데 발야돌리드』를 제외한 세 작품은 왕의 사냥용 별장 토레 데 라 파라다(Torre de la Parada, 파라다 탑)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발레카스의 소년』의 모델은 왕세자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놀이 상대로 궁정에서 살았던 난쟁이 프란시스코 레스카노이며,[104] Lezcanillo 또는 el Vizcaíno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발레카스(Vallecas)는 마드리드 교외의 지명이다. 모델은 마드리드 근교 과다라마 산맥을 배경으로 손에 트럼프를 들고 사냥복 차림으로 야외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4. 6.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 (1649-1651)

1649년,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나 로마에 2년 정도 머무르게 된다. 이때 그려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은 가톨릭 최고 위치에 있는 성직자의 초상이라기보다는, 신경질적이며 교활한 한 사람의 노인처럼 묘사되어 있다. 국왕, 교황에서 익살꾼까지 어떤 모델이든 냉철하게 바라보며 인물의 내면까지 표현하는 필력은 벨라스케스의 장점이다.[89]

''교황 인노첸시오(Portrait of Pope Innocent X)'', 1650년


후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 초상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림의 규격은 141cm × 119cm이며, 현재 로마의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에 있다.

''비너스의 단장(Rokeby Venus)'', 1647~1651년경


thumb』(1648-51년) 런던 국립미술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당시 가톨릭 전통이 강했던 스페인에서는 드문 나체상이다. 1914년, 난폭한 자에 의해 등에서 엉덩이에 이르는 7곳이 칼로 훼손되었다. 현재도 미세하게 수복의 흔적이 보인다.

2009년, 오랫동안 벨라스케스의 화풍을 따른 추종자들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남자의 초상화」(Portrait of a Man)가 세척 및 복원되었다. 벨라스케스 자신의 작품으로 밝혀졌으며, 초상화 속 인물의 특징이 "브레다 항복"이라는 그림 속 인물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새롭게 세척된 캔버스는 해당 그림을 위한 연구작일 가능성이 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이라는 속성은 확실시되지만, 초상화 속 인물의 신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 새로운 연구작이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한다.[89]

2010년, 예일대학교 미술관 지하실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손상된 그림이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1925년 예일대학교에 기증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은 이전에 17세기 스페인 화파의 작품으로 분류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그림을 벨라스케스의 작품으로 분류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가 글 읽는 법을 배우는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은 예일대학교의 보존 전문가들에 의해 복원될 예정이다.[90][91]

2011년 10월,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의 피터 체리(Peter Cherry) 박사가 X선 분석을 통해 영국에서 발견된, 19세기 화가 매슈 셰퍼슨(Matthew Shepperson)의 이전 소장품에 있던 초상화가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벨라스케스의 작품임을 확인했다. 이 초상화는 50대 또는 60대의 신원 미상의 남성을 묘사하고 있으며, 벨라스케스의 후원자인 펠리페 4세 국왕의 사냥감독이었던 후안 마테오스(Juan Mateos)일 가능성도 있다.[92] 이 그림은 크기가 47cm x 39cm이며, 2011년 12월 7일 경매에서 300만파운드에 낙찰되었다.[93]

4. 7. 후기 작품 활동 (1651-1660)

시녀들(Las Meninas), 1656년


펠리페 4세의 왕녀 마르가리타를 중심으로 시녀, 궁정에서 일하던 소녀 등이 그려져 있다. 화면 왼쪽에는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제작 중인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속 인물들은 감상하는 사람 쪽으로 시선이 향해 있으며, 뭔가를 깨달아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춘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는 그림 속 벽에 걸린 거울에 암시되어 있는데, 이 거울에는 국왕 펠리페 4세 부부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즉,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위치에서 그림 속 인물들을 보고 있는 사람은 국왕이다.

이 그림은 국왕의 여름 집무소에 걸려 있었다고 전해지며, 벨라스케스의 검은 의상 가슴에는 붉은 산티아고 기사단 십자 문장이 그려져 있다. 벨라스케스는 국왕의 특별한 조치로 1659년 기사단에 가입하여 귀족이 되었고, 이 문장은 그 후에 덧붙여졌다.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 1650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벨라스케스는 작품 수가 적었으며, 두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과 공무를 위한 국내 출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왕궁에서 지냈다. 화가로서 대부분의 기간을 궁정 화가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작품 대부분은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다.[102] 21세기 현재 약 120점의 작품 중 약 50점이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103]

4. 7. 1. 시녀들 (Las Meninas)



Las Meninases(시녀들)는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를 중심으로, 시녀들과 당시 궁정에 있던 난쟁이들이 그려진 작품이다. 화면 왼쪽에는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이 당당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앙의 마르가리타 공주를 포함하여 그림 속 인물들은 그림을 보는 사람 쪽을 향하고 있으며, 무언가를 알아채고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춘 듯한 자세로 그려져 있다. 그 '무언가'는 그림 안쪽 벽에 걸린 거울에 암시되어 있는데, 이 작은 거울에는 펠리페 4세 부부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다. 즉, 그림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이 그림의 감상자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 국왕 자신이다.

이 그림은 국왕의 여름 집무실에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 벨라스케스의 검은 옷 가슴에는 붉은 십자 문장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문장이다. 벨라스케스는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1659년(죽기 1년 전)에 산티아고 기사단에 가입하여 귀족이 되었고, 이 문장은 그 후에 추가된 것이다.

그림의 크기는 318cm × 276cm이며,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4. 7. 2. 아라크네의 우화 (직녀들)

한때 '직녀들'이라고 불리며 산타 바르바라 직물 공장에서 일하는 직녀들을 그린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문서 발견을 통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묘사된 아라크네와 기술의 여신 미네르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임이 밝혀졌다. 두 사람 사이의 직물 경쟁은 전경에, 미네르바에 의해 아라크네가 거미로 변하는 장면은 후경에 그려져 있다. 뛰어난 빛, 대기, 분위기 묘사 측면에서 『라스 메니나스』와 함께 벨라스케스 예술의 정수라 할 만한 걸작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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