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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베스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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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람베스 신조는 1595년 잉글랜드 국교회의 예정론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캔터베리 대주교 존 휘트기프트와 다른 성직자들이 모여 채택한 9개 조항의 신학적 선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칼뱅주의 교수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휘트기프트는 람베스 궁전에서 회담을 주최하여 윌리엄 휘태커가 초안을 작성하고 주교들이 수정하여 9개 조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신조가 자신의 동의 없이 작성되었고, 내용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중단을 명령하여 잉글랜드 국교회 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얻지 못했다. 람베스 신조는 아일랜드 종교 조항에 영향을 미쳤으며, 칼뱅주의 5대 강령의 기초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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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베스 신조
개요
이름람베스 조항
원어명Lambeth Articles
작성 시기1595년
관련 장소잉글랜드 람베스
관련 인물윌리엄 휘테이커
관련 기관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적 배경
배경칼뱅주의 논쟁의 심화
목적잉글랜드 성공회 내 칼뱅주의 신학 확립 시도
주요 내용예정설, 선택유기, 구원의 불가항력성 강조
논란잉글랜드 성공회 내 다양한 신학적 입장과 충돌
결과공식적인 효력을 갖지 못하고, 제임스 1세에 의해 철회됨
주요 내용
1조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가운데서, 예정에 따라 구원받을 자들을 영원불변하게 작정하셨으며, 그 작정된 수는 확정되어 변경될 수 없다.
2조하느님은 믿음과 경건한 삶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에 대한 고려 없이, 예정에 따라 구원으로 이끌 자들을 확정하셨다.
3조예정된 자들 외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모든 사람을 위해, 또는 그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4조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구원으로 이끌 자들을 작정하셨으므로,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로 결정하셨다.
5조선택받은 자들은 살아있는 믿음, 최종적인 믿음의 확신에 따라 하느님의 영에 의해 살아있는 지체로 연합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아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6조참된 구원의 은총은 한 번 받으면 최종적으로 잃을 수 없으며, 파기될 수 없다.
7조구원은 예정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며, 그 외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영향
신학적 논쟁칼뱅주의아르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 심화
역사적 의의잉글랜드 성공회 내 신학적 다양성과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
현대적 평가예정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비판 존재
관련 문서
관련 문서람베스 조항 (영문 위키문헌)

2. 예정론 논쟁의 배경

엘리자베스 1세 통치 기간 잉글랜드 국교회 내에서는 예정설 교리에 관하여 칼뱅주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39개 신조 제17조는 예정을 다루었지만, 칼뱅주의자들이 믿는 이중 예정(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을 위해, 다른 사람은 유기를 위해 예정하셨다는 믿음) 대신 구원을 위한 선택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16세기 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등장하면서 예정론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2. 1.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칼뱅주의 논쟁

엘리자베스 1세 통치 기간, 케임브리지 대학교칼뱅주의의 중심지였다. 토머스 카트라이트, 윌리엄 퍼킨스, 윌리엄 휘태커 등이 대표적인 칼뱅주의 교수였다. 그러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영향을 받은 윌리엄 바렛, 피터 바로 등은 예정설에 반대하며 논쟁을 일으켰다.,

2. 1. 1. 윌리엄 바렛의 설교와 논쟁

엘리자베스 1세 (1558-1603)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국교회 내의 주요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칼뱅주의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예정설(Predestination in Calvinism) 교리에 관해서 그러했다. 39개 신조 제17조("예정과 선택에 관하여")는 예정을 다루었지만, 칼뱅주의자들이 믿는 이중 예정설(Double predestination (Hyper-Calvinist))(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을 위해, 다른 사람은 유기를 위해 예정하셨다는 믿음)과 달리 구원을 위한 선택(Election in Christianity)만을 지지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칼뱅주의의 거점이었으며, 토머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윌리엄 휘태커(William Whitaker) 등이 주목할 만한 칼뱅주의 교수였다. 당시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 in the Church of England) 소수(윌리엄 바렛(William Barret), 피터 바로(Peter Baro), 존 오버럴(John Overall (bishop)), 안토니오 델 코로(Antonio del Corro) 등)가 있었는데, 이들은 지배적인 칼뱅주의에 도전했다.

바렛과 바로가 설교에서 예정설에 반대하면서 논쟁이 촉발되었다. 1595년 4월 29일, 케임브리지(Cambridge)의 성 마리아 더 그레이트 교회(Great St Mary's)에서 행해진 바렛의 설교는 다음 세 가지 요점을 다루었다.

1.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

2. 하나님(God in Christianity)은 악한 행위에 대해 임의적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악행에 대해 악인을 정죄한다.

3.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교 이후, 휘태커, 험프리 틴들(Humphrey Tyndall)과 로버트 솜(Robert Some)이 이끄는 그룹은 바렛을 가이우스 칼리지(Caius College) 펠로우십에서 축출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3. 람베스 신조의 발전 과정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들은 신학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휘태커와 틴들을 런던 람베스 궁전으로 보내 캔터베리 대주교 존 휘트기프트와 회담하게 했다. 이 회담에서 람베스 신조 초안이 작성되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3. 1. 람베스 회담과 신조 초안 작성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들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휘태커와 틴들을 런던 람베스 궁전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존 휘트기프트와 다른 성직자들을 만나도록 보냈다.[1] 휘트기프트 외에 토론에 참여한 가장 고위 성직자들은 런던 주교 리처드 플레처와 뱅고어 주교 리처드 본이었다. 역사학자 니컬러스 타야크에 따르면, 성직자들은 고등법원의 자격으로 활동했다.

조항은 휘태커가 초안을 작성했고, 반 칼뱅주의자들이 덜 반대하도록 주교들이 약간 수정했다. 조항은 1595년 11월 20일 람베스에서 채택되었다. 조항은 이를 승인한 요크 대주교 매튜 허튼에게 보내졌다.

3. 2.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와 신조의 중단

휘트기프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신조에 대해 알리지 않고, 이를 비밀로 하려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2월 5일경에 신조를 알게 되었고 즉시 휘트기프트에게 중단을 명령했다. 여왕은 자신의 지식이나 동의 없이 신조가 작성된 것에 대해 격분했다. 또한 신조의 신학적 내용을 싫어했다. 왕실의 승인 없이는 신조는 잉글랜드 국교회 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얻지 못했다.

4. 람베스 신조의 내용

람베스 신조의 주요 저자 윌리엄 휘태커


람베스 신조는 39개 신조를 대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제17조("예정과 선택에 관하여")를 칼뱅주의 신학, 특히 저낙선택설에 일치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1] 9개 조항의 상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조하라.

4. 1. 9개 조항의 요약

1. 영원한 일부의 선택은 생명으로, 다른 일부의 유기는 죽음으로 이어진다.[1]

2. 생명으로의 예정을 움직이는 원인은 믿음과 선행에 대한 미리 아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1]

3. 선택된 자의 수는 변동될 수 없다.[1]

4. 생명으로 예정되지 않은 자는 그들의 죄로 인해 필연적으로 정죄받을 것이다.[1]

5. 선택된 자의 참된 믿음은 결국 완전히 실패하지 않는다.[1]

6. 참된 신자, 즉 칭의를 얻는 믿음을 갖춘 자는 용서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완전한 확신예수 안에서 갖는다.[1]

7. 구원하는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1]

8. 성자를, 즉 하나님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지만, 모든 사람이 아버지에 의해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1]

9. 구원받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지와 능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1]

5. 람베스 신조의 영향

람베스 신조는 제임스 어셔가 작성한 아일랜드 종교 조항(1615년 더블린에서 채택)에 삽입되었으며, 도르트 신조(1618-19)에 담긴 칼뱅주의 5대 강령의 기초를 제공했다.

5. 1. 아일랜드 종교 조항에의 채택

제임스 어셔가 작성한 아일랜드 종교 조항은 1615년 더블린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람베스 신조가 채택되어 삽입되었다. 도르트 신조(1618-19)에서 람베스 신조에 담긴 칼뱅주의 5대 강령의 기초를 찾을 수 있다.

5. 2. 도르트 신조와의 관계

람베스 신조는 도르트 신조(1618-19)에 담긴 칼뱅주의 5대 강령의 기초를 제공했다.[1]

6. 역사적 평가와 논쟁

람베스 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며, 신학적 입장과 해석에 따라 논쟁이 존재한다. 해리 포터와 피터 레이크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학자주장
해리 포터람베스 신조는 칼뱅주의 소수가 자신들의 견해를 강요하려 한 실패한 시도였다. 윌리엄 휘트기프트 대주교는 교회 내 평화를 위해 람베스 신조를 지지했을 뿐이며, 비칼뱅주의자도 수용하도록 휘태커의 초안을 수정하여 타협했다.
피터 레이크람베스 신조는 케임브리지 신학자들과 휘트기프트 간의 타협을 보여주며, 이들이 공통적인 칼뱅주의적 가정을 공유했다. 케임브리지 신학자들은 신학에 있어 더 엄격하고 스콜라주의적이었던 반면, 휘트기프트는 이들을 편협하다고 생각했다.

[1]

6. 1. 해리 포터의 주장: 칼뱅주의 소수의 실패한 시도

해리 포터는 1958년 저서 ''튜더 시대 케임브리지의 종교 개혁과 반동''에서 람베스 신조가 칼뱅주의 소수가 자신들의 견해를 강요하려 한 실패한 시도였다고 주장했다. 포터는 윌리엄 휘트기프트 대주교가 교회 내 평화를 위해 람베스 신조를 지지했을 뿐이며, 휘트기프트는 비칼뱅주의자도 수용하도록 휘태커의 초안을 수정하여 타협했다고 주장했다. 포터의 주장은 피터 화이트와 데보라 슈거가 지지했다.[1]

6. 2. 피터 레이크의 주장: 칼뱅주의적 가정 공유

피터 레이크는 람베스 신조가 케임브리지 신학자들과 휘트기프트 간의 타협을 보여주며, 이들이 공통적인 칼뱅주의적 가정을 공유했다고 주장했다. 케임브리지 신학자들은 신학에 있어 더 엄격하고 스콜라주의적이었던 반면, 휘트기프트는 이들을 편협하다고 생각했다. 람베스 신조는 "영국에서 중요한 신학자들의 의견이 과도한 부담 없이 인지 가능한 칼뱅주의적 사고 틀 안에서 수용될 수 있다"는 휘트기프트의 믿음을 보여주었다.[1]

7. 한국 교회에 주는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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