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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선 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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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랑선 퇴각은 1885년 3월 프랑스군이 베트남 랑선에서 청나라군과의 전투 후 철수한 사건이다. 방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청나라군과 교전했으나, 낄루아 전투에서 네그리에 장군이 부상을 입고 에르빈제 중령이 지휘를 맡으면서 퇴각을 결정했다. 에르빈제는 청나라군의 포위를 우려하여 랑선을 포기하고 추로 퇴각했으나, 이는 불필요한 결정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프랑스 내각이 붕괴되고, 청불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었으며,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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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선 퇴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청불전쟁, 통킹 원정
날짜1885년 3월
장소베트남 북부 랑선 북쪽
결과청나라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제3공화국
교전국 2청나라
지휘관
병력 규모
사상자 규모

2. 배경

1885년 3월 중순, 통킹에서의 군사적 상황은 일시적인 교착 상태에 있었다. 1885년 2월, 랑선 원정에서 프랑스군은 랑선을 점령하고, 통킹에서 청나라의 광서군을 몰아냈다. 2월 하순, 통킹 원정군 총사령관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은 뚜옌꽝 포위전을 풀기 위해 로랑 조바니넬리 중령의 1여단과 함께 하노이로 돌아왔다.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은 2여단과 함께 랑선에 남았다.

조바니넬리의 1여단은 흥호아와 뚜옌꽝 주변의 당경숭의 운남군과 대면했고, 랑선의 네그리에의 2여단은 반정신의 광서군과 대면했다. 청나라군은 현실적으로 몇 주 동안 공격을 시작할 여력이 없었다. 2월에 공동으로 랑선을 점령한 프랑스 2개 여단은 청나라군에게 개별적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안길 만큼 전력이 강하지 않았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청나라 영토를 위협하여 청나라가 강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에게 국경을 넘어 2여단을 광서성으로 보내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브리에르 드 리즐과 드 네그리에는 국경에서 60km 떨어진 룽저우에 자리잡은 청나라군 본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원정 가능성을 조사했다. 그러나 3월 17일,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은 파리의 육군 장관에게 그 작전은 “자신의 전력을 넘어선 것”이라고 조언했다. 3월 중순에 대규모의 프랑스 증원군이 통킹에 도착했다.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에게 교착 상태를 깨뜨릴 짧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장군은 운남군을 공격하여 옌바이 너머로 쫓아내기 위해 1여단을 증원하기로 하고, 대부분의 증원군을 흥호아로 이동시켰다. 그와 조바니넬리가 서쪽 공략 계획을 짜는 동안, 드 네그리에 장군에게 랑선 진지를 지키고 있으라고 명령했다.[19]

3. 방보 전투와 낄루아 전투

1885년 3월 23일과 24일,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2여단은 진남관 근처에서 반정신이 이끄는 청나라 광서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에게는 '''방보 전투'''로, 청나라군에게는 '''진남관 전투'''로 알려져 있다.[19] 프랑스군은 3월 23일에 청나라군의 외곽 진지를 일부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24일에는 청나라군의 주력 진지를 공격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강력한 반격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청나라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후퇴했지만, 전사자 70명, 부상자 188명이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탄약 부족과 사기 저하로 인해 드 네그리에는 결국 랑선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1]

진남관, 낄루아, 랑선 퇴각, 1885년 3월


진남관 전투에서 승리한 청나라군은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3월 28일 낄루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정오 직전, 청나라군은 프랑스군 진지를 향해 대규모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드 네그리에는 폴 귀스타브 에르빈제 중령에게 부대를 이끌고 청나라군 좌익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포병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오후 4시경 청나라군 좌익을 낄루아 북동쪽 언덕에서 몰아냈다. 오후 5시경, 청나라군은 완전히 퇴각했다. 낄루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7명이 전사하고 38명이 부상당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 네그리에는 청나라군 진지를 정찰하던 중 가슴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에르빈제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2][3][4][5][6][7][8][9]

4. 랑선 퇴각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 (1842–1913)


1885년 3월 중순, 통킹의 군사적 상황은 일시적인 교착 상태였다. 1885년 2월, 랑선 원정에서 프랑스군은 랑선을 점령하고, 통킹에서 청나라의 광서군을 몰아냈다. 2월 하순, 통킹 원정군 총사령관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은 뚜옌꽝 포위를 풀기 위해 로랑 조바니넬리 중령의 1여단과 함께 하노이로 돌아왔고,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은 2여단과 함께 랑선에 남았다.

1885년 3월 24일, 진남관 전투(방보 전투)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퇴각하는 프랑스를 추격했고, 3월 28일 드 네그리에는 낄루아(Ky Lua)에서 랑선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정오 직전에 청나라군은 프랑스 진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여 빽빽하고 육중한 부대로 진격했다.

드 네그리에는 폴 귀스타브 에르빈제 중령에게 디구에와 파레의 대대와 청나라 좌익을 역습하도록 명령했다. 포병의 지원을 받은 공격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후 4시경, 에르빈제는 광서군의 좌익을 언덕에서 낄루아의 북동쪽으로 몰아냈다. 오후 5시경, 광서군은 완전히 후퇴했으며, 추적을 막기 위해 후위대만 남았다.

낄루아에서 발생한 프랑스군 사상자는 7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당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 네그리에는 청나라의 요새를 정찰하면서 가슴 부위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연대 고위 지휘관인 에르빈제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20][21][22][23][24][25][26][27]

폴 귀스타브 에르빈제 중령 (1839-86)


여단장 지휘를 맡은 에르빈제는 당황했다. 그는 청나라군이 랑선을 포위하고, 보급선을 차단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에르빈제는 끼꿍강(Sông Kỳ Cùng)에 대포와 포차를 버리고, 군자금을 유기했으며, 이후 청나라군이 이를 회수했다. 또한, 그는 브리에르 드 리즐에게 탄약 부족을 이유로 퇴각 결정을 통보한 후 통신선을 절단하여 상부의 개입을 차단했다.[29]

3월 28일 밤, 2여단은 랑선을 떠나 타인머이와 동선으로 퇴각했다. 퇴각은 청나라의 개입없이, 손실도 없이 진행되었으나, 에르빈제와 쇼에프는 지나치게 서둘러 진군했고, 여단의 절반은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지쳐 있었다.[29]

브리에르 드 리즐은 랑선을 포기하겠다는 에르빈제의 결정에 대경실색했다. 3월 29일, 브리에르 드 리즐은 에르빈제에게 격노한 전보를 보내 2여단이 타인머이와 동선에서 진지를 사수하도록 명령했다. 에르빈제는 이 명령에 복종했다.

3월 30일, 프랑스군은 타인머이와 동선에서 야전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진군해 오는 청나라군을 만날 대비를 했다. 에르빈제는 정찰 기병을 보냈으나, 이 보고서의 중요성을 크게 과장했고, 브리에르 드 리즐에게 여단이 포위망에 직면했다고 경고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총검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에르빈제는 점점 더 분별이 없어졌다. 그는 오후 8시에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날 아침 포위되어 학살당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후 9시경, 프랑스 전초기지 보초병들의 총성은 잘못된 경보로 판명되었고, 에르빈제는 “나는 병들었네, 부대도 나만큼 병들었고! 날 내버려 두게!”라고 답했다.[30]

3월 30일 저녁 10시, 브리에르 드 리즐은 에르빈제에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추로 돌아갈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에르빈제는 즉각 추로 퇴각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3월 30일 밤, 에르빈제의 부대는 타인머이를 떠나 횡산관[31]을 가로질러 동선까지 행진하여 슈에프의 병력들과 합류했다. 새벽 직전에 재결합한 2여단은 동선에서 추 방향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에르빈제는 루셀 포대의 포를 무력화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장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3월 31일, 청나라 척후병은 포껌 근처에서 프랑스 부대를 따라잡았다. 에르빈제는 보병대대에게 사선진 대형으로 퇴각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르콤트 대위는 “3,000명의 프랑스군이 40명의 청나라군으로부터 도망쳤다”고 썼다.

귀스타브 보르그니 데스보르드 중령 (1839 ~ 1900)


에르빈제의 랑선 포기 결정은 불필요했다. 3월 29일, 청나라군은 진남관과 옌끄어아이 캠프의 피난처로 향하고 있었다. 3월 30일, 반정신은 랑선을 다시 점령했다. 광서군 본대는 프랑스군을 추로 추격할 상태가 아니었으며, 반정신은 동선과 박레에 제한적인 진격으로 만족했다. 에르빈제의 퇴각 결정은 2월 원정의 성과를 무위로 돌렸다.

4월 1일, 추에서 2여단은 기진맥진했고, 사기가 떨어졌다. 3월 28일, 브리에르 드 리즐은 귀스타브 보르그니 데스보르드(Borgnis-Desbordes) 대령을 2여단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보르그니 데스보르드는 4월 2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4. 1. 에르빈제의 오판과 책임 논란

에르빈제는 보불전쟁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통킹에서는 야전 지휘관으로서 역량 부족을 드러냈다. 그는 말라리아를 앓고 있었으며,[30] 신체적, 정신적 불안정 상태에서 랑선 포기라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30]

3월 28일, 에르빈제는 청나라 군이 랑선을 포위하고 보급선을 차단하려 한다고 판단, 랑선을 포기하고 추(Chu)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8] 이 과정에서 끼꿍강(Sông Kỳ Cùng)에 대포와 보물 상자를 버리고, 통신을 두절시키는 등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28] 3월 30일, 에르빈제는 다시 추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포병 포대를 희생시키려 했으나 장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1]

랑선 퇴각 이후, 에르빈제의 행동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열렸으나, 그의 책임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33] 그는 술에 취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많은 장교들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33] 결국 에르빈제는 공식적인 기소 없이 풀려났지만, 더 이상의 현장 지휘를 맡지 못하게 되었다.[33] 그는 1886년에 사망했다.[33]

5. 랑선 퇴각의 영향

3월 28일, 브리에르 드 리즐이 파리에 보낸 비관적인 ‘랑선 전보’는 막대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쥘 페리는 즉각 통킹에 군대를 증원하려 했으나, 브리에르 드 리즐이 상황을 곧 안정시킬 수 있다고 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34] 첫 전보가 공개되자 프랑스 하원에서는 조르주 클레망소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이 페리 내각을 공격했고,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어 3월 30일 내각이 붕괴되었다.[34] 군중들은 “페리를 세느강에 던져라! 통킹 놈들을 죽이자!”라고 외쳤으며, 페리는 이 사건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줄어 다시는 수상이 되지 못했다.[34]

샤를 드 프레이시네가 페리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청나라와 휴전 및 평화 협정을 맺었다.[34] 청나라는 펑후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 큰 타격을 입었고, 조선 문제로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례적으로 합의를 원했다.[34] 청나라 협상가들은 톈진 협약을 이행하기로 하고, 프랑스는 박레 매복에 대한 배상 요구를 철회하면서 4월 4일 평화협약이 체결되었다.[34] 6월 9일에는 이홍장쥘 파트노트르가 본 조약에 서명했다.[34]

랑선 퇴각은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에 대한 국내 여론을 악화시켰고, 1885년 12월 ‘통킹 논쟁’으로 이어졌다.[34] 하원은 근소한 차이로 통킹 파병을 지지했지만, 마다가스카르 원정을 포함한 다른 식민지 계획은 수년간 연기되었다.[34] 프랑스에서는 랑선에서 제2여단이 궤멸되고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랑선 재앙’이라는 전설로 이어졌다.[18] 심지어 1937년에도 한 프랑스 역사가는 "이 작고 평범한 도시의 이름은 프랑스인들에게 거대한 전투의 패배를 상기시킨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35]

5. 1. 프랑스 국내 정치에 미친 영향

3월 28일, 브리에르 드 리즐이 파리에 보낸 비관적인 ‘랑선 전보’는 프랑스 국내 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34] 쥘 페리는 즉각 통킹에 군대를 증원하려 했으나, 브리에르 드 리즐이 상황을 곧 안정시킬 수 있다고 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34] 첫 전보가 공개되자 프랑스 하원에서는 조르주 클레망소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이 페리 내각을 공격했고,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어 3월 30일 내각이 붕괴되었다.[34] 군중들은 “페리를 세느강에 던져라! 통킹 놈들을 죽이자!”라고 외쳤으며, 페리는 이 사건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줄어 다시는 수상이 되지 못했다.[34]

샤를 드 프레이시네가 페리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청나라와 휴전 및 평화 협정을 맺었다.[34] 청나라는 펑후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 큰 타격을 입었고, 조선 문제로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례적으로 합의를 원했다.[34] 청나라 협상가들은 톈진 협약을 이행하기로 하고, 프랑스는 박레 매복에 대한 배상 요구를 철회하면서 4월 4일 평화협약이 체결되었다.[34] 6월 9일에는 이홍장쥘 파트노트르가 본 조약에 서명했다.[34]

랑선 퇴각은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에 대한 국내 여론을 악화시켰고, 1885년 12월 ‘통킹 논쟁’으로 이어졌다.[34] 하원은 근소한 차이로 통킹 파병을 지지했지만, 마다가스카르 원정을 포함한 다른 식민지 계획은 수년간 연기되었다.[34] 프랑스에서는 랑선에서 제2여단이 궤멸되고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랑선 재앙’이라는 전설로 이어졌다.[35]

5. 2. 청불 전쟁의 종결

3월 28일, 브리에르 드 리즐이 파리에 보낸 비관적인 ‘랑선 전보’는 프랑스 국내에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끄는 정부 반대파들은 페리 정부를 공격했고, 불신임 동의안이 상정되어 3월 30일 페리 정부는 붕괴되었다.[34] 페리는 이 사건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34] 그의 후임인 샤를 드 프레이시네는 빠르게 정전과 잠정적인 강화 조약을 협상했다.

청나라는 펑후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큰 타격을 입었고, 조선에서의 이해관계 때문에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었다.[34] 따라서 청나라는 이례적으로 합의를 원했고, 톈진 협약을 이행하기로 합의했다. 프랑스는 박레 매복에 대한 배상 요구를 철회했다.[34] 4월 4일 평화협약이 체결되었고, 6월 9일 이홍장과 프랑스의 쥘 파트노트르 장관이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청불 전쟁을 종식시켰다.[34]

랑선 퇴각은 프랑스 국내 정치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청불 전쟁의 굴욕적인 종결은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에 대한 열기를 일시적으로 억눌렀고, 1885년 12월 ‘통킹 논쟁’으로 이어졌다.[34] 프랑스 하원은 통킹에 프랑스군을 유지하는 것을 근소한 차이로 지지했지만, 마다가스카르 정복을 포함한 다른 식민지 계획은 수년 동안 연기되었다.[17]

5. 3. 동아시아 정세에 미친 영향

조르주 클레망소를 비롯한 프랑스 정부 반대파들은 랑선 퇴각 소식을 듣고 쥘 페리 내각을 공격했다. 불신임 동의안이 상정되었고, 페리 정부는 1885년 3월 30일 붕괴되었다.[34] 페리는 이 사건의 여파로 다시는 수상직에 오르지 못했고, 정치적 영향력도 크게 줄었다.[34] 그의 후임인 샤를 드 프레이시네는 빠르게 정전 협상을 추진했다.

한편, 청나라는 펑후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타격을 입혔고,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을 우려하여 프랑스와의 협상을 서둘렀다.[34] 청나라 협상가들은 톈진 협약 이행에 동의했고, 프랑스는 박레 매복에 대한 배상 요구를 철회했다.[34] 1885년 4월 4일 평화협약이 체결되었고, 6월 9일 이홍장과 프랑스의 쥘 파트노트르 장관이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34]

랑선 퇴각은 프랑스 내 식민지 확장 정책에 대한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다.[34] 1885년 12월 '통킹 논쟁'에서 하원은 통킹 주둔군 유지 문제를 근소한 차이로 가결시켰고, 마다가스카르 정복 등 다른 식민지 계획은 연기되었다.[17]

프랑스에서는 랑선 퇴각 당시 제2여단이 전멸하고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헛소문이 돌았고, 이는 '랑선 참사'라는 전설로 이어졌다.[18] 1937년 한 프랑스 역사가는 "이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도시(랑선)의 이름이 프랑스인들에게 거대한 전투의 패배를 상기시킨다"고 기록했다.[35]

6.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랑선 퇴각은 프랑스군의 오판으로 인한 군사적 실패였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리한 영토 확장의 폐해를 보여준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더불어민주당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인 '신중함'과 '책임감'을 결여한 결과로 발생했다.

브리에르 드 리즐이 파리에 보낸 비관적인 ‘랑선 전보’는 프랑스 내에 큰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끄는 반대파는 페리 정부를 공격했고, 결국 페리 정부는 붕괴되었다.[34] 군중들은 “페리를 세느강에 던져라! 통킹 놈들을 죽이자!”라고 외치며 분노했다. 페리는 이 사건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줄었고, 다시는 수상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34]

청나라펑후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의 갈등 가능성을 우려하여 프랑스와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34] 결국 양국은 평화협약을 체결했고, 톈진 협약을 이행하기로 합의했다.[34]

랑선 퇴각은 프랑스 내 식민지 확장에 대한 열기를 꺾는 결과를 가져왔다. 1885년 12월 '통킹 논쟁'에서 하원은 통킹에 프랑스군을 유지하는 것을 간신히 지지했지만, 마다가스카르 정복 등 다른 식민지 계획은 연기되었다.[34]

프랑스에서는 랑선 퇴각 당시 제2 여단이 궤멸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헛소문이 돌았고, 이는 '랑선 참사'라는 전설로 이어졌다.[35] 1937년에도 한 프랑스 역사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고 평범한 도시의 이름은 프랑스인들에게 거대한 전투의 패배를 상기시킨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18]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전쟁과 식민지 확장의 비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으며, 평화적 해결과 외교적 노력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참조

[1] 서적 Armengaud, 40–58; Bonifacy, 23–6; Harmant, 211–35; Lecomte, 428–53 and 455; Maury, 185–203
[2] 서적 Elleman 89 https://books.google[...]
[3] 서적 Holstein 108 https://books.google[...]
[4] 서적 Holstein 336 https://books.google[...]
[5] 서적 Holstein 336 https://books.google[...]
[6] 서적 Jordan 47 https://books.google[...]
[7] 서적 Windrow 16 https://books.google[...]
[8] 서적 Finch 79 https://books.google[...]
[9] 서적 Bourgeios 297 https://books.google[...]
[10] 서적 Armengaud, 70–74; Bonifacy, 31–6; Dreyfus, 155–8; Harmant, 272–4; Lecomte, 485–501
[11] 서적 Lecomte, 501
[12] 서적 Lecomte, 501–2
[13] 서적 Armengaud, 75
[14] 서적 Armengaud, 74–6; Bonifacy, 36–8 and 39–40; Harmant, 274–300; Lecomte, 501–12; Maury, 218–28
[15] 서적 Lecomte, 520
[16] 서적 Bonifacy, 40; Huard, 972–1,016
[17] 서적 Huard, 1,113–74; Thomazi, 277–82
[18] 서적 Thomazi, 261
[19] 서적 Armengaud, 40–58; Bonifacy, 23–6; Harmant, 211–35; Lecomte, 428–53 and 455; Maury, 185–203
[20] 서적 Elleman 89 https://books.google[...]
[21] 서적 Holstein 108 https://books.google[...]
[22] 서적 Holstein 336 https://books.google[...]
[23] 서적 Holstein 336 https://books.google[...]
[24] 서적 Jordan 47 https://books.google[...]
[25] 서적 Windrow 16 https://books.google[...]
[26] 서적 Finch 79 https://books.google[...]
[27] 서적 Bourgeios 297 https://books.google[...]
[28] 문서 팜반선에 의하면 Thanh Moy 또는 Thanh Moi로 표기하면 아이치랑(Ải Chi Lăng, 支稜隘)의 옛 지명
[29] 서적 Armengaud, 70–74; Bonifacy, 31–6; Dreyfus, 155–8; Harmant, 272–4; Lecomte, 485–501
[30] 서적 Lecomte, 501
[31] 문서 현재의 지명은 중국은 橫山關, 베트남은 데옹응앙(Đèo Ngang)이다. Đèo는 고개, 협곡을 의미한다.
[32] 서적 Armengaud, 75
[33] 서적 Bonifacy, 40; Huard, 972–1,016
[34] 서적 Huard, 1,113–74; Thomazi, 277–82
[35] 서적 Thomazi,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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