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노이에 모토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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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노이에 모토히로는 1589년 조선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중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무관이다. 일본에서 모리 데루모토에게 발탁되어 스오국에서 영지를 하사받고,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야규 신카게류 검술을 익혔으며, 1647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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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이에 모토히로 | |
---|---|
기본 정보 | |
씨명 | 이가 모토히로 |
한자 표기 | 李家元宥 |
이명 | 이성현 → 복여이원유 → 이가원유 |
호 | 도사이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
출생 | 덴쇼 17년 (1589년) |
사망 | 쇼호 4년 11월 27일 (1647년 12월 23일) |
가문 | 우계 이씨 → 이가 씨 |
관직 | |
관위 | 불명 |
막부 | 불명 |
섬긴 가문 | 모리 데루모토 → 히로나리 |
번 | 조슈번 |
가족 관계 | |
부 | 이복남 |
배우자 | 다카하시 오키노카미의 딸 ( 나이토 모토나가의 양녀) |
자녀 | 요시히로 슈안 도오와 딸 (하타노 나리미치의 부인) 딸 (오바타 나리시게의 부인, 이토 나리유키의 부인) 딸 (히사요시 미쓰마사의 부인) 딸 (우노 노부쿠니의 부인) |
2. 생애
천정 17년(1589년, 조선 선조 22년), 조선의 무관 이복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아버지 등 조선군 장수들이 전사하면서 남원성이 함락되자, 모리 씨 가신 아소누마 모토노부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2. 1. 조선에서의 삶과 정유재란
정유재란 중 남원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1589년 조선에서 태어난 리노이에는 어린 시절 임진왜란을 겪었고,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아버지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는 모리 가문의 가신인 아소누마 모토노부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당시 "李家龍虎"(이가 용호)라는 한자가 새겨진 군사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1]일본에서 리노이에는 일본어를 배웠고, 모리 데루모토에게 발탁되어 야마구치현 쿠마게군의 카츠마에서 100 고쿠의 영지를 받았다.[1] 또한 모리 가문의 ''오토기슈''(고문)가 되었다.[2] 모리 데루모토의 명에 따라 삭발하고, '원(元)' 자를 받아 이름을 '''원유(모토히로)'''로 했다. 처음에는 '복여이'라는 성씨를 사용했지만, 모리 히데나리의 명에 따라 성씨를 '이가'로 고쳤다. 히데나리 시대에도 에도에서 오토기슈로서 시중을 들었으며, 장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한 후에도 항상 히데나리 앞에서 대기했다.
그는 불교 승려가 되었고, 데루모토가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글자 元(모토)를 사용하여 모토히로(元廣)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성씨 리노이에(李家)는 일본어로 "이씨 가문"을 의미한다. 리노이에는 야규 무네요시의 제자인 오노 이에노부(야규 이에노부)로부터 ''검술''을 배워 야규 신카게류의 ''멘쿄''를 받았다.[2] 이에노부가 죽자 리노이에는 그의 창[2] 과 일본도를 유품으로 받았다.
1647년 11월 27일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2. 2. 일본에서의 정착과 모리 가문 섬김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모리 군(毛利軍)에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후 모리 가문의 가신인 아소누마 모토노부(阿曾沼元信)에게 양육되어 조슈번에 정착하였다. 성을 리노이에(李家)로 바꾸고, 번주 모리 데루모토에게서 모토(元) 자를 받아 모토히로(元宥)로 개명하였다. 일본 의학서 《방장의학사》(防長醫學史)에 따르면, 장남과 차남과 함께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4] 《하기 번 제가계보》(萩藩諸家系譜)에는 리노이에 가문이 조선 왕족의 지류로 후대에 복록 500석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게이초 2년(1597년, 조선 선조 30년) 남원성 전투에서 아버지 이복남 등 조선군 장수들이 전사하고 남원성이 함락되자, 리노이에 모토히로는 종자 2명과 함께 모리 씨 가신 아소누마 모토노부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당시 모토히로는 '이씨 용호'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병기를 가지고 있었다.[1]
일본에 온 후 일본어를 배웠으며, 모리 데루모토에게 발탁되어 스오 국 구마게 군 가쓰마 촌 100석의 영지를 받고 오토기슈로 데루모토를 섬겼다.[1][2]
데루모토의 명으로 삭발하고 '원(元)' 자를 받아 '''모토히로(元宥)'''로 이름을 바꿨다. 처음에는 '''복여이'''라는 성씨를 썼으나, 본래 이씨였기에 모리 히데나리의 명에 따라 '''이가(李家)'''로 고쳤다. 히데나리 대에도 에도에서 오토기슈로 그를 섬겼으며, 장남 뇨유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한 후에도 항상 히데나리 곁에 있었다.
야규 이에노부(마쓰에몬, 오노 이에노부)에게 검술을 배워 우치타치를 맡았고, 야규 신카게류(아리치 신카게류) 면허를 받았다.[2] 이에노부가 죽자 평생 애용하던 창과 장도를 유품으로 물려받았다.[2]
2. 3. 검술 실력
리노이에는 야규 무네요시의 뛰어난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오노 이에노부(야규 이에노부)에게 검술을 배웠다. 그는 이에노부에게서 우치다치를 물려받았고 야규 신카게류의 ''멘쿄''를 받았다.[2] 이에노부가 죽자 리노이에는 그의 창[2]과 일본도를 물려받았다.2. 4. 죽음
1647년 11월 27일(쇼호 4년), 리노이에 모토히로는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3. 가계
처는 나이토 모토히데의 딸로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참조
[1]
서적
閥閲録
[2]
서적
閥閲録
[3]
블로그
역사작가 기리노 사쿠진의 블로그
http://dangodazo.blo[...]
[4]
서적
동양의학 대사전
경희대학교 출판국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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