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쿠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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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쿠오국은 1869년 보신 전쟁 이후 무쓰국이 다섯 개의 구니로 분할되면서 설치되었다. 원래 무쓰국과 한자 표기는 같지만, 음독인 '리쿠오'로 발음하며, 아오모리현과 이와테현 북부에 걸쳐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지방 통치를 위해 현과 번을 설치했지만, 리쿠오국은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거의 갖지 못했다. 1869년 당시 도난번, 시치노헤번, 히로사키번, 구로이시번, 하치노헤번 등이 리쿠오국 영역에 속했으며, 이후 아오모리현과 이와테현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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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젠국은 1869년 무쓰국에서 분리되어 설치된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보신 전쟁 이후 미야기현과 이와테현으로 분할 편입되었으며, 14개의 군으로 구성되었다. - 도산도 - 무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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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오국 | |
---|---|
지도 | |
![]() | |
일반 정보 | |
원래 이름 | (리쿠오 노 쿠니) |
일반적인 긴 이름 | 리쿠오 국 |
구분 | 국 |
국가 | 일본 |
오늘날 | 이와테현 아오모리현 |
역사 | |
이전 | 무쓰 국 |
계승 | 도나미현 시치노헤현 히로사키현 구로시현 하치노헤현 |
시작 연도 | 1869년 |
종료 연도 | 1871년 |
통치 | |
통계 | |
기타 명칭 |
2. 연혁
1869년 1월 19일(메이지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 동맹이 패배하면서 무쓰국이 리쿠오(陸奧)·리쿠추·리쿠젠·이와시로·이와키의 다섯 구니로 분할되었다. 이때 리쿠오국은 원래의 무쓰국과 한자 표기는 같았지만, 공식적인 발음은 음독인 "리쿠오"로 변경되었다.[3]
관청에서는 무쓰국의 발음을 훈독인 "무쓰"에서 음독인 "리쿠오"로 바꾸었다.[3] 이는 세 개의 "리쿠"가 붙은 나라의 발음을 통일하고, 구 무쓰와 신 무쓰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3] 그러나 "리쿠오"라는 관청 용어는 널리 퍼지지 못하고, "무쓰"라는 전통적인 발음이 현재까지 지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지방 통치를 위해 직할지에 현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기존 다이묘 가문이 다스리는 번에 위임하였다. 국 단위의 행정 기관은 이후 설치되지 않았다. 지리적 설명이나 통계 집계 구분에서 국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분할은 정치적으로나 지역권·문화권 성립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메이지 초기 시점에서의 이후 리쿠오국 내 지배 현황은 「구고구령취조장(旧高旧領取調帳)」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1,157촌·422,139석여). '''굵은 글씨'''는 해당 군내에 번청이 위치한 곳이다. 국명이 있는 것은 비지령이다. 이 기록에서는 모리오카 번령이 이미 도난 번으로 이관된 후의 상황으로 되어 있다.
군명 | 석수 | 촌수 | 비고 |
---|---|---|---|
쓰가루군 | 340,866석여 | 878촌 | 히로사키 번, 구로이시 번 |
니노헤군 | 14,796석여 | 76촌 | 리쿠추 모리오카 번 |
산노헤군 | 42,952석여 | 120촌 | 리쿠추 모리오카 번, 하치노헤 번 |
기타군 | 23,524석여 | 83촌 | 리쿠추 모리오카 번, 시치노헤 번 |
리쿠오 국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 메이지 원년
- 12월 7일(1869년 1월 19일) : 무쓰국이 설치되었다. 같은 날, 모리오카 번이 보신 전쟁 이후 처분으로 감봉되어 영지가 히로사키 번의 취체지가 되었다.
- 메이지 2년
- 2월 8일(1869년 3월 20일) : 구 모리오카 번령이 히로사키 번 관할에 반대하는 잇키 발생으로 구로바네 번 취체지로 변경되어, '''기타오쿠 현'''으로 통칭되었다.
- 8월 7일(1869년 9월 12일) : 기타오쿠 현의 명칭이 정식으로 '''구노헤 현'''으로 결정되었다.
- 9월 13일(1869년 10월 17일) : 구노헤 현이 '''하치노헤 현'''(제1차)으로 개칭되었다.
- 9월 19일(1869년 10월 23일) : 하치노헤 현(제1차)이 하치노헤 번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산노헤 현'''으로 개칭되었다.
- 11월 3일(1869년 12월 5일) : 구 아이즈 번이 '''도난 번'''으로 전봉되면서 산노헤 군·기타 군의 산노헤 현 관할 지역을 이관받았다.
- 11월 28일(1869년 12월 30일) : 산노헤 현이 '''에사시 현'''에 편입되었다.
- 메이지 4년
- 7월 14일(1871년 8월 29일) : 폐번치현으로 번령이 '''히로사키 현''', '''구로이시 현''', '''시치노헤 현''', '''하치노헤 현''', '''도난 현''' 관할이 되었다.
- 11월 2일(1871년 12월 13일) : 제1차 부현 통합에 의해 '''아오모리 현''' 관할이 되었다.
- 1876년(메이지 9년) 5월 25일 : 제2차 부현 통합에 의해 니노헤 군이 '''이와테 현''' 관할이 되었다.
2. 1. 설치 배경
1869년 1월 19일(메이지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패배한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여러 번에 대한 처분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태정관 포고에 의해 종전의 무쓰국('''むつ'''노 쿠니)은 리쿠오국('''りくおう'''노 쿠니)·리쿠추국·리쿠젠국·이와시로국·이와키국의 5개 구니로 분할되었다.[3]무쓰국과 동시에 분할된 데와국이 지쿠시국·도요국·히노쿠니의 전례에 따라 우젠국·우고국으로 "전·후"로 분할된 것에 반해, 무쓰국은 고시국이나 기비국이 "전·중·후"로 나뉘어 성립된 에치고국이나 빈고국을 따라 "리쿠고국"이 되지 않고,[3] 분할 전의 "무쓰국"이라는 표기를 그대로 계승했다. 원래 "奥(오쿠)"는 "後(고)"와 마찬가지로 기나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임을 나타내며, 과거 와도 6년 (713년)에 단바국에서 단고국이 분할되었을 때 개칭되지 않은 전례가 있었다.
8세기 전반까지 기나이 정권의 도호쿠 지방 지배 영역은 현재의 미야기현 일대보다 남쪽이었으며, 그보다 북쪽에는 에미시가 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1869년에 성립된 리쿠오국('''りくおう'''노 쿠니)은 1000년 전 "무쓰국"('''むつ'''노 쿠니)이라고 불리던 미야기현 이남 지역에서 보면 약 300km나 떨어진 전혀 다른 지역이 되었고, 메이지 시대의 분할 당시에는 "신 무쓰"라고도 불렸다.[3] 또한, 관청 용어로는 무쓰국은 훈독인 "'''むつ'''"에서 음독인 "'''りくおう'''"으로 변경되었다.[3] 이것은 3개의 "리쿠"가 붙은 나라의 읽는 법을 음독으로 통일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구 무쓰와 신 무쓰와의 구별을 두기 위해서였다.[3] 그러나, 관청 용어의 "'''りくおう'''"은 일반에게 널리 퍼지지 않아, 종래부터의 읽는 법인 "'''むつ'''"가 현재에는 지배적이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지방 지배를 위해 직할지에 현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종래의 다이묘 가문이 다스리는 번에 위임했다. 구니 단위의 행정 기관은 그 후에도 전혀 설치되지 않았다. 지리적 설명이나 통계 집계 구분에서 구니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분할은 정치적으로나 지역권·문화권 성립에 거의 의미를 이루지 못했다.
2. 2. 분할 과정
1869년 1월 19일(메이지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에도 막부 편에 섰던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같은 날 태정관 포고에 의해, 기존의 무쓰국은 리쿠오(陸奧)·리쿠추·리쿠젠·이와시로·이와키의 다섯 구니로 분할되었다.[3] 리쿠오국은 원래의 무쓰국과 한자 표기는 같지만, 읽는 방식은 달랐다.8세기 전반까지 기나이 정권의 도호쿠 지방 지배 영역은 현재의 미야기현 일대보다 남쪽이었고, 그보다 북쪽에는 에미시가 살고 있었다. 1869년에 성립된 리쿠오국(りくおう)은 1000년 전 "무쓰국"(むつ)이라고 불리던 미야기현 이남 지역에서 약 300km나 떨어진 전혀 다른 지역이었고, 메이지 시대 분할 당시에는 "신무쓰"라고도 불렸다.[3]
무쓰국의 한자는 그대로 둔 채 읽는 법만 훈독인 "무쓰"(むつ)에서 음독인 "리쿠오"(りくおう)로 변경한 것은, 3개의 "리쿠"(陸)가 붙은 나라의 읽는 법을 음독으로 통일하는 동시에 구 무쓰와 신 무쓰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3] 그러나, "리쿠오"라는 읽는 법은 일반에게 널리 퍼지지 않아, 종래의 "무쓰"라는 읽는 법이 현재는 지배적이다.
메이지 정부는 지방 통치를 위해 직할지에는 현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종래의 다이묘 가문이 다스리는 번에 위임했다. 국 단위의 행정 기관은 설치되지 않았으며, 이 분할은 정치적, 지역적, 문화적으로 거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분할 당시 리쿠오국의 영역에 있던 번은 아래와 같다.
2. 3. 명칭 변경
1869년 1월 19일(메이지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 동맹이 패배하면서, 무쓰국은 리쿠오(陸奧)·리쿠추·리쿠젠·이와시로·이와키의 다섯 구니로 분할되었다. 이때, 리쿠오 국은 원래의 무쓰 국과 한자 표기는 같았지만, 공식적인 발음은 음독인 "리쿠오"로 변경되었다.[3]8세기 전반까지 기나이 정권의 도호쿠 지방 지배 지역은 현재의 미야기현 남쪽이었고, 그 북쪽에는 에미시가 살고 있었다. 따라서 1869년에 성립된 리쿠오국은 1000년 전 "무쓰국"이라 불리던 미야기현 이남 지역과는 약 300km나 떨어진 곳이었기에, "신 무쓰"라고도 불렸다.[3]
관청에서는 무쓰국의 발음을 훈독인 "무쓰"에서 음독인 "리쿠오"로 바꾸었다.[3] 이는 세 개의 "리쿠"가 붙은 나라의 발음을 통일하고, 구 무쓰와 신 무쓰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3] 그러나 "리쿠오"라는 관청 용어는 널리 퍼지지 못하고, "무쓰"라는 전통적인 발음이 현재까지 지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의 연혁
1869년 1월 19일(메이지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패배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대한 처분의 일환으로, 포고에 의해 이전의 무쓰국('''むつ'''노 쿠니)은 리쿠오국('''りくおう'''노 쿠니), 리쿠추국, 리쿠젠국, 이와시로국, 이와키국의 5개 국으로 분할되었다.[3]무쓰국('''むつ'''노 쿠니)과 함께 분할된 데와국이 지쿠시국, 도요국, 히 국처럼 "전(前)·후(後)"로 분할된 것과 달리, 무쓰국은 고시국이나 기비국처럼 "전(前)·중(中)·후(後)"로 나뉘어 성립된 에치고국이나 빈고국을 따라 "리쿠고국"이 되지 않고[3] 분할 전의 "무쓰국"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원래 "오쿠(奥)"는 "고(後)"와 마찬가지로 기나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의미하며, 과거 713년에 단바국에서 단고국이 분할되었을 때 명칭이 변경되지 않은 전례가 있었다.
8세기 전반까지 기나이 정권의 도호쿠 지방 지배 영역은 현재의 미야기현 일대보다 남쪽이었고, 그보다 북쪽에는 에미시가 거주하였다. 따라서 1869년에 성립된 리쿠오국('''りくおう'''노 쿠니)은 1000년 전 "무쓰국"('''むつ'''노 쿠니)이라 불리던 미야기현 이남 지역에서 약 300km나 떨어진 전혀 다른 지역이었으며, 메이지 시대 분할 당시에는 "신(新) 무쓰"라고도 불렸다.[3] 또한, 관청 용어로는 무쓰국이 훈독인 "'''むつ'''"에서 음독인 "'''りくおう'''"으로 변경되었다.[3] 이는 3개의 "리쿠"가 붙은 나라의 읽는 법을 음독으로 통일하는 동시에, 구(舊) 무쓰와 신(新) 무쓰를 구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3] 그러나 관청 용어인 "'''りくおう'''"은 일반에 널리 퍼지지 않았고, 이전부터 사용되던 "'''むつ'''"가 현재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지방 통치를 위해 직할지에 현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기존 다이묘 가문이 다스리는 번에 위임하였다. 국 단위의 행정 기관은 이후 설치되지 않았다. 지리적 설명이나 통계 집계 구분에서 국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분할은 정치적으로나 지역권·문화권 성립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분할 당시 리쿠오국의 영역에 있던 번은 다음과 같다.
- 도난 번
- 시치노헤 번 (모리오카 번 지번)
- 히로사키 번
- 구로이시 번 (히로사키 번 지번)
- 하치노헤 번
「구고구령취조장(旧高旧領取調帳)」에 기재된 메이지 초기 시점에서의 이후 리쿠오국 내 지배 현황은 다음과 같다(1,157촌·422,139석여). '''굵은 글씨'''는 해당 군내에 번청이 위치한 곳이다. 국명이 있는 것은 비지령이다. 이 기록에서는 모리오카 번령이 이미 도난 번으로 이관된 후의 상황으로 되어 있다.
군명 | 석수 | 촌수 | 비고 |
---|---|---|---|
쓰가루군 | 340,866석여 | 878촌 | 히로사키 번, 구로이시 번 |
니노헤군 | 14,796석여 | 76촌 | 리쿠추 모리오카 번 |
산노헤군 | 42,952석여 | 120촌 | 리쿠추 모리오카 번, 하치노헤 번 |
기타군 | 23,524석여 | 83촌 | 리쿠추 모리오카 번, 시치노헤 번 |
리쿠오 국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 메이지 원년
- 12월 7일(1869년 1월 19일) : 무쓰 국이 설치되었다. 같은 날, 모리오카 번이 보신 전쟁 이후 처분으로 감봉되어 영지가 히로사키 번의 취체지가 되었다.
- 메이지 2년
- 2월 8일(1869년 3월 20일) : 구 모리오카 번령이 히로사키 번 관할에 반대하는 잇키 발생으로 구로바네 번 취체지로 변경되어, '''기타오쿠 현'''으로 통칭되었다.
- 8월 7일(1869년 9월 12일) : 기타오쿠 현의 명칭이 정식으로 '''구노헤 현'''으로 결정되었다.
- 9월 13일(1869년 10월 17일) : 구노헤 현이 '''하치노헤 현'''(제1차)으로 개칭되었다.
- 9월 19일(1869년 10월 23일) : 하치노헤 현(제1차)이 하치노헤 번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산노헤 현'''으로 개칭되었다.
- 11월 3일(1869년 12월 5일) : 구 아이즈 번이 '''도난 번'''으로 전봉되면서 산노헤 군·기타 군의 산노헤 현 관할 지역을 이관받았다.
- 11월 28일(1869년 12월 30일) : 산노헤 현이 '''에사시 현'''에 편입되었다.
- 메이지 4년
- 7월 14일(1871년 8월 29일) : 폐번치현으로 번령이 '''히로사키 현''', '''구로이시 현''', '''시치노헤 현''', '''하치노헤 현''', '''도난 현''' 관할이 되었다.
- 11월 2일(1871년 12월 13일) : 제1차 부현 통합에 의해 '''아오모리 현''' 관할이 되었다.
- 1876년(메이지 9년) 5월 25일 : 제2차 부현 통합에 의해 니노헤 군이 '''이와테 현''' 관할이 되었다.
3. 영역
1869년(메이지 원년) 제정된 리쿠오 국은 현재의 아오모리현 전역과 이와테현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 이와테현에 속하는 지역은 다음과 같다.[1]
3. 1. 범위
1869년(메이지 원년) 제정 당시의 영역은 현재의 아오모리현 전역과 이와테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였다.[1]3. 2. 군
3. 3. 근대 이후의 행정 구역 변화
1869년 1월 19일(메이지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패배한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여러 번에 대한 처분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포고에 의해 종전의 무쓰국이 리쿠오국, 리쿠추국, 리쿠젠국, 이와시로국, 이와키국의 5개로 분할되었다.[3]메이지 정부는 지방 통치를 위해 직할지에는 현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종래의 다이묘 가문이 다스리는 번에 위임했다. 분할 당시 리쿠오 국의 영역에 있던 번은 다음과 같다.
- 도난 번
- 시치노헤 번 (모리오카 번 지번)
- 히로사키 번
- 구로이시 번 (히로사키 번 지번)
- 하치노헤 번
「구고구령취조장(旧高旧領取調帳)」에 기재된 메이지 초년 시점에서의 이후 본 국내의 지배는 다음과 같다(1,157촌·422,139석여).
군 | 석고 | 지배 |
---|---|---|
쓰가루군 | 340,866석여 | 히로사키 번, 구로이시 번 |
니노헤군 | 14,796석여 | 리쿠추 모리오카 번 |
산노헤군 | 42,952석여 | 리쿠추 모리오카 번, 하치노헤 번 |
키타군 | 23,524석여 | 리쿠추 모리오카 번, 시치노헤 번 |
메이지 원년 12월 7일(1869년 1월 19일) 무쓰 국이 발족되었고, 같은 날 모리오카 번이 보신 전쟁 후의 처분에 의해 감봉되어 영지가 히로사키 번 취체지가 되었다. 메이지 2년 2월 8일(1869년 3월 20일) 구 모리오카 번령이 히로사키 번의 관할에 반대하는 잇키의 발생에 의해 구로바네 번 취체지로 변경되어 '''기타오쿠 현'''이라고 통칭되었다. 8월 7일(1869년 9월 12일) 기타오쿠 현의 명칭이 정식으로 '''구노헤 현'''이 되었다. 9월 13일(1869년 10월 17일) 구노헤 현이 '''하치노헤 현'''(제1차)으로 개칭되었고, 9월 19일(1869년 10월 23일) 하치노헤 현(제1차)이 하치노헤 번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산노헤 현'''으로 개칭되었다. 11월 3일(1869년 12월 5일) 구 아이즈 번이 '''도난 번'''으로 전봉되어 산노헤 군·키타 군의 산노헤 현 관할 지역을 이관받았다. 11월 28일(1869년 12월 30일) 산노헤 현이 '''에사시 현'''에 편입되었다.
메이지 4년 7월 14일(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에 의해 번령이 '''히로사키 현''', '''구로이시 현''', '''시치노헤 현''', '''하치노헤 현''', '''도난 현'''의 관할이 되었다. 11월 2일(1871년 12월 13일) 제1차 부현 통합에 의해 '''아오모리 현'''의 관할이 되었다. 1876년(메이지 9년) 5월 25일 제2차 부현 통합에 의해 니노헤 군이 '''이와테 현'''의 관할이 되었다.
4. 국내 시설
히로사키의 이와키산 신사는 분할 전의 무쓰국과 구별하기 위해 "'''쓰가루국'''"(쓰가루노쿠니)으로 전국일궁회에 의해 "신일궁"으로 인정받고 있다.
5. 인구
메이지 5년(1872년) 조사에 따르면, 리쿠오국의 인구는 47만 3244명이었다.
참조
[1]
서적
Mutsu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
웹사이트
地名「三陸地方」の起源に関する地理学的ならびに社会学的問題
https://web.archive.[...]
[3]
간행물
地名「三陸地方」の起源に関する地理学的ならびに社会学的問題 : 地名「三陸」をめぐる社会科教育論(第1報)
https://doi.org/10.1[...]
岩手大学教育学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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